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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가을 풀을 연상시켜
이규진(편고재 주인)
할고대라고도 불리는 쪽굽에 돋을무늬 같기도 한 연주문 등이 있는 등 전형적인 17C 관요산 제기의 일종인 백자철화제기보편이다. 보는 곡식을 담아 놓는 제기로 둥근 형태에 귀가 달리고 주로 동으로 만들지만 백자도 있다. 백자에서는 고전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17C로 와 개선되기 시작한 전형적인 제기 중의 하나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도편은 일찍이 지인에게서 양도를 받은 것으로 경기도 광주시 상림리 백자 가마터에서 출토된 것이다.
쪽굽에 양각의 연주문과 그리고 음각의 초화문 등은 상림리 외에도 선동리 등 17C 관요에서 더러 보이는 백자보의 특징이다. 내게는 이러한 도편이 여러 점 있다. 그러면서도 지인을 통해 이 도편을 입수한 것은 철화무늬 때문이다. 17C 백자에서 철화란 흔히 볼 수 있는 장식기법이다. 임란 후 도자기 산업의 급격한 몰락과 구입의 어려움에 따른 청화의 소멸은 대용품으로 철화의 등장을 강요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자철화제기보편에 대한 내 지극한 관심은 단순히 철화가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백자철화제기보편에서 보이는 철화는 세로로 붙어 있는 연주문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들어 있는데 초화문의 정확한 종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를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추초문 같은 느낌이 들고는 한다. 추초문이라고 하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은가. 즉 금사리 시기 몇 줄의 선을 청화로 그려 넣어 쓸쓸한 가을 풀을 연상시켜 도자기 애호가들을 매료시키는 그 추초문 말이다. 그런데 백자철화제기보편의 철화무늬가 바로 이를 연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안료는 달라도 이러한 17C 철화무늬가 18C 청화무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흥미롭고도 귀중한 자료이겠는가.
경기도 광주시 상림리 백자 가마터는 광주시 일원에 흩어져 있는 그 많은 가마터 중에서도 비교적 서쪽에 위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도를 벗어나 마차 길로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드문드문 민가가 있는 곳이 바로 상림리인데 이곳에도 백자 가마터가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굽 안에서 보이는 간지로는 신미(辛未,1631) 계유(癸酉,1633) 등이 출토되고 있어 17C 관요 중에서는 탄벌리 다음으로 이른 시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가마터에서는 청화는 물론 없고 철화가 보이지만 이 또한 흔치는 않다. 더구나 백자철화제기보편에서 보이는 철화무늬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여간 귀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