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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56

특집부
기사입력 2021.09.3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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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의 소리

     

    이 동 희

     

    복귀 <3>

    세종 임금은 박연의 아악 등 예악에 쏟고 있는 열정을 잘 알고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칭찬이기도 했지만 관심이었고 애정이었다.

    세종 131, 상호군上護軍 남급南汲 大護軍 박연 등이 새로 아악을 제작하여 바쳤다. 대호군은 종3품관의 친공신親功臣으로 무직武職을 띠게 하여 체아록遞兒祿 이 주어졌다. 박연은 교수관敎授官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 악학별좌樂學別坐 봉상판관奉常判官 봉상소윤少尹 등의 직책을 가졌었다.

    "내 이에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려 하는데 어떤가?”

    지난 해 8월 세종은 사정전思政殿에서 박연이 만든 종들로 연주한 아악인 사청성四淸聲을 감상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여러 중신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공역功役은 비록 적다 하더라도 관계는 지극히 중대하오니 위의 감역관監役官으로부터 아래의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모두 차등을 두어 베푸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물어보길 잘 하였다. 중신들은 의외로 냉정하였다. 왕의 생각이 지나친 것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시행하도록 하였다.

    지난 달에는 아악을 만드는 것을 감독한 박연의 노고에 대하여 털옷과 관을 내려주도록 하였다.

    박연은 너무 황공하고 몸둘 바를 몰랐다. 그 내용물이 무엇이든 왕이 기억해 주고 생각해 주고 평가해 주는 그 마음만으로도 너무 고맙고 황송하였다. 안장 갖춘 말을 하사 받았을 때는 너무 감읍하여 무어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하늘의 별을 따 준다고 한들 그보다 더 가슴 벅찰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잠시도 해찰을 하지 않고 예악의 정책 개혁에 정열을 쏟는 것이었다. 악기 제조와 아악 제작에 혼을 다 쏟는 것이었다. 혼신을 다 하는 일이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누으나 그가 추구하는 일에 용맹정진하였다.

    다시 회례악기會禮樂器를 새로 만들었다. 상호군 납급과 군기판관軍器判官 정양鄭穰과 같이였다. 회례악은 궁중의 예연의식禮宴儀式으로 동지와 정월 초하루 대신들이 한 자리에 모인 예식에서 연주되는 음악이다. 세종 15년 아악기를 비롯하여 제례 아악과 조회 및 회례아악이 새로이 제정되었으며 아악보 및 주악 절차 등이 완비되는데 박연은 그 중심에 있었고 거기에 그의 혼신을 다 바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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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신문]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56

      

    그리고 계속 글을 올리는 상주를 하였다.

    회례에 쓰는 남악男樂과 관복冠服을 당나라 경운지무景雲之舞의 녹운관綠雲冠 화금포花錦袍와 성수지무聖壽之舞 해홍지무解紅之舞의 금동관金銅冠 화봉관花鳳冠 오색화의五色畫衣 자비수유紫緋繡襦와 용지지무龍池之舞의 부용관芙蓉冠 오색운의五色雲衣 등을 모방하여 그림으로 그리고 아울러 속체俗體의 세 모양을 그려 올리었다.

    그러자 경운景雲 용지龍池 등의 무관복舞冠服을 쓰라고 명하였고 인하여 다섯 가지 채색으로써 모형의상 및 회례아악과 당 송의 제도인 당상 당하의 공인工人의 관복 모양을 그림으로 그리고 모형을 만들어 올리라고 하였으며 상정소詳定所 제조提調에게 명하여 함께 의논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박연은 다시 당나라에서 만든 운금雲錦과 화금花錦의 모양을 본떠서 채색 비단에다가 회례 남악의 무동舞童의 관복을 그려서 올렸다. 거기에 이견異見이 있을 수 없었다.

    "이 관과 의복을 무동의 수효대로 갖추어 만들라.”

    왕은 즉각 하명하였다. 세종 138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10월의 일이었다.

    "박연이 상언上言한 아악의 관복 제도에 대하여 사람을 보내어 옳고 그름을 질문하소서

    예조에서 아뢰었고 왕은 상정소에 의논하게 하였다.

    제조 황희 맹사성 허조許稠 신상申商 등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자문咨文을 기초起草하여 말뜻이 만약 순리하다면 아뢸 것입니다.”

    중국 조정에 시비是非를 묻고 확인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정초鄭招가 아뢰었다. 정초는 뒤에 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농사직설農事直說을 찬진撰進하였다.

    "중조中朝에 제후국諸侯國의 제향祭享하는 예는 반드시 사대부와 같을 것이나 물을 것이 없으며 천자가 종묘에 제향하는 예는 아마 물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의견에 따랐다.

    그리고 총제摠制 유사눌柳思訥이 가사를 지어 바치며 말하였다.

     

     

    "옛날에 시가詩歌는 나라 안에서 채집하게 되므로 비록 여항閭巷의 노래일지라도 왕의 교화가 미치게 됨을 볼 수 있으니 주남周南 소남召南의 시가 이것입니다.”

    경연대회

    경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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