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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는 유전한다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사람뿐만 아니라 고서의 세계에도 운명이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서들은 그래도 복 받은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고서들이 전란으로 소실되기도 하고, 도배지로 쓰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불쏘시개가 되거나 화장실에서 사라졌다. 그런 와중에서도 장서인(藏書印)이 찍혀 있는 고서를 이따금 만날 수 있다. 장서인이란 책의 임자를 표시하기 위해 찍은 도장이다. 뿐만 아니라 잘 만들어진 장서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예술품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유명인의 장서인일 경우 그 책의 품격도 그만큼 올라간다. 선인의 손때와 숨결이 묻어 있으니 이 얼마나 귀한 책이겠는가. 이런 책을 ‘수택본(手澤本)’이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 거의가 좋은 책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고서 수집가들이 이러한 책들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사진 13)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다른 문중의 자료를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선영산도(先塋山圖)』란 제목의 필사본은 이름 그대로 조상이 묻혀 있는 산의 지도다. 지도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라는 선산의 소재지와, "이천상의 산(李天祥山)”이라는 주변 산의 주인, 경계가 될 만한 지형지물, 수십 기(基)의 묘가 표시되어 있다. "부당정사(芙塘精舍)에서 후손 현각(顯珏)이 기사년(己巳年, 1869)에 수정(修正)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지도를 그린 재주가 매우 빼어나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의 솜씨로 보인다.
이 지도는 손바닥만 한 수진본(袖珍本)이지만, 펼치면 가로 26.5cm, 세로 24.5cm 크기가 된다. 수진본이란 유생(儒生)이 늘 익혀야 하는 경서나 시문을 작은 책에 옮겨 적어 소매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읽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 옷소매 속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한 작은 책을 말한다. 『선영산도』는 수진본 중에서도 그 장정이 특이하여 접으면 마치 지갑처럼 아름다운 모양이 된다. 앞서 고서의 분류에서 설명한 축절첩장본의 한 종류로 그 장정이 매우 특이하다. 표지에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자손만대에 잘 간수하라(敬覽 守而勿失)”고 당부하고 있다.(*사진 14~15)
이처럼 개인이나 집안에서 소중하게 간직하던 고서들이 어느 순간 생면부지의 새 주인에게 넘어가게 된다. 여기에는 도난당한 고서도 있고, 집안의 내력과 가계(家系)를 기록한 족보나 『선영산도』 같은 문중의 유물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한결같이 자자손손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귀중한 책이라도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거치면서 유전하는 운명으로 살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고서 유통의 한 과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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