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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과 고물장수
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는 유전(流轉)하는 물건이다. 오늘 갑이 샀다가 내일 을에게 넘기는가 하면, 모레는 다시 병의 손에 들어간다. 이처럼, 지금 내가 소장하고 있는 고서도 언젠가는 남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다만 지금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고서는 일반적인 생활용품과는 달라서 구입처와 판매처가 일정하지 않다. 또한 엄밀히 말하면 똑같은 고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팔고 사는 사람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고서가 유통되는 경로는 매우 다양하나, 그 중에서 고서점을 통한 유통이 가장 일반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점차 인터넷 고서점과 경매를 통한 고서 매매가 고서 유통의 새로운 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시대 변화에 따른 자연적인 현상이겠으나, 고서의 특성상 인터넷을 통한 유통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고서는 직접 눈으로 보고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겠다. 또한, 지금은 고물장수를 통해 고서가 유통되는 경우가 많이 줄었지만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유통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다. 변두리 헌책방에서는 아직도 고물장수에 의존해 책을 구입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1974년경 하루는 원효로 부근의 한 헌책방에 들렀다. 책방 주인은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군대 가는 대신 감옥에 갔다 올 정도로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직장생활하기에도 마땅치 않아 헌책방을 차렸다고 했다. 당시 나는 군입대를 앞둔 때라, 군대 대신 감옥을 다녀왔다는 그의 말이 그저 영웅담처럼 들렸다. 웬일인지 그의 가게에는 고물 장사꾼들이 끊임없이 리어카를 끌고 오곤 했다. 그들은 수집한 책들을 가게 앞 골목길에 부려 놓고 책방 주인이 필요한 책을 고르면 나머지는 다시 자루에 담아 고물상으로 가져가곤 했다. 책값은 책방 주인이 치러 주는 대로 두말없이 받아 가면서 연신 고맙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파지 값만 받는 고물상보다는 헌책방에 파는 것이 훨씬 이문이 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예전 헌책방 사업의 성패는 동네 고물장수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그 책방 주인은 제법 수완이 좋아 보였다. 그날도 고물장수가 리어카를 끌고 왔다.
"오늘은 뭐 시꺼먼 책이 좀 나왔는데….”
"어디 좀 볼까.”
책방 주인이 자루 속의 책을 확 쏟았다. 최근의 잡지·소설 등과 함께 고서 한 무더기가 쏟아졌다. 『현해탄』 『문학의 논리』 『지용시선』 등 수십여 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로만 들었지 모두 실제로는 처음 보는 책들이었다. 옆에서 쳐다보는 내 가슴이 다 뛰었다. 그런데 주인은 잡지와 소설 등 최근에 나온 책들만 남기고 모두 자루에 담더니 못쓰는 거라며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고서 수집에서는 몇 가지 불문율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서점 주인이나 다른 사람이 흥정하는 도중에는 절대로 끼어들거나 참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기에 처음부터 못 본 체했다. 저 귀한 책들을 못쓴다고 하니 주인더러 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사겠다고 나설 수도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고물장수는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나는 얼른 책방 주인에게 말을 건넸다.
"아까 그 책들 중에 필요한 책이 있는데 내가 사도되겠습니까?”
주인은 흔쾌히 그러라고 하면서, 막 골목을 벗어나려는 고물장수를 불러 세웠다. 그렇게 해서 그 책들을 모두 헐값에 구할 수 있었다.
『현해탄』은 임화(林和, 1908-1953)의 대표 시집으로 1938년 동광당서점에서 발행했으며(*사진 9~10), 『문학의 논리』 역시 임화가 1940년 학예사에서 발행한 문학이론서이다.(*사진 11)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임화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서기장을 지냈고, 1947년 월북했다. 『지용시선』은 정지용(鄭芝溶, 1903-?)의 시집으로 1946년 을유문화사에서 발행되었다.(*사진 12) 정지용은 6.25때 납북된 시인이다. 그날 내가 구한 십여 권의 책은 모두 소위 월북작가의 책이었다. 1988년 7월에 이 책들이 모두 해금되어 지금은 마음 놓고 구해 볼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이러한 책은 사고팔기는 고사하고 작가의 이름조차도 거론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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