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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대한민국 전통예술무용·연희대제전(06/09)<br>무용(전통무용·창작무용·불교무용)/연희■ 대회 목적 인재발굴과 후진 양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호남예술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전통무용·연희 문화유산의 발전을 위하여 개최. ■일 시 : 2024년 06월 09일(일요일)대면 심사 (오전 09시 30분~ ) ■장 소 : 광주문화재단 전통문화관 서석당 (광주 동구 의재로 222) ■시상식 : 2024년 06월 09일(일요일)오후 5시 ■주 최 : (재)광주문화재단 / 주 관 : 사단법인 남도전통예술진흥회 ■후 원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농림축산식품부,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광주광역 시의회, 광주예총, 광주국악협회, 광남일보, (사)한국사진작가협회 광주지회, (사)호남문화유산활용센터, 전남대학교 문화재학협동과정 원우회, 전남대학교문화유산연구소, (사)한진옥류호남검무보존회 ■경연부문 가. 무용(전통무용 · 창작무용 · 불교무용) / 연희 나. 명인·명무부, 일반부, 신인부, 학생부(초·중등부, 고등부) ※ 불교무용: 불교사상에 근간을 두고 행하여지는 의식무 및 창작무용 등 ■참가자격 ■학생부 : 초, 중, 고등학교 재학 중인 학생 및 근로 청소년 ■신인부 : 만19세 이상의 비전공자 및 장년 (연마기간 8년 이하) ■일반부 : 만19세 이상의 대학(원)생 및 일반 (단, 전년도 본 대회의 동일부문 대상 수상자 제외) ■ 명인부 : 만35세의 대학(원)생 및 일반(단,35세 미만일지라도 국가 시·도립단체에서 5년 이상 근무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증명하는 자는 명무부에 출전할 수 있음) ※예능보유자 및 전수조교, 전년도 대상 입상자는 출전제외 ■경연순서 가. 학생부 신인부→일반부→명인명무부 순으로 대면 심사 진행 나.경연시간 학생부/신인부(3분~5분 이내) 일반부/명무부(5분~7분 이내) (대회 당일 경연 참가번호는 신청서 접수 역순임) ■ 참가 신청 1. 접수기간:2024년 05월 01일 ~ 06월 8일 17:00까지 2. 신 청 서:예술마루/국악신문사/ http://cafe.daum.net/namdoart참가신청서 다운로드 3. 신청방법:E-mail 접수만 가능 (주)국악신문 경연대회에서 다운로드하여 사용(참가신청서 작성시 사진첨부 후 메일 발송) 4. 구비서류: 참가신청서, 증명사진 필수 5. 주 소: 광주광역시 남구 금당로 124번길 1 (주월동) 6. E-mail . : ums0080@naver.com 7. 참 가 비 : 없 음 8. 단체는 참가인원에 관계없이 1개팀으로 인정되며 동점자는 연장자(고학년)가 우선함 9. 동일부문내 단체·개인별 중복 참여 가능 * e메일 제출시 유의사항 접수 메일 제목 예시) ■무용 일반부– 박*은 – 호남검무 – 개인 ■연희 신인부– 최*정 외 3명 – 부포놀음 – 단체 ※ 접수 오류시 회신 전화번호 필히 기재 10. 접수완료시 신청자 e메일로 회신해 드림 무용 010, 7480, 0977/ 연희 010, 5618, 8696 ※ 접수 신청일로부터 2일 이내 집행부에서 접수완료 회신 메일을 받지 못한 경우 집행부로 문의 ■ 심사진행 및 심사항목 1) 본 대회 심사위원 위촉규정에 의해 위촉하고 경연 당일(06월 09일 일요일 오후 6시) 홈페이지에 발표함. 2) 경연 심사는 학생부→ 신인부→일반부→명무부의 순서로 심사하며 필요시 심사위원 회의에서 경연시간을 조정하여 심사할 수 있음. 심사의 전 과정은 공개진행하며 한 부문이 끝날 때 마다 부문별 심사결과를 공개함. 3) 작품구성(30), 공간활용(30), 동작표현(30), 의상 및 심사규정 준수(10) ■ 심사회피제도 심사위원과 참가자가 8촌 이내의 친인척 및 직계 제자 관계일 경우 해당 심사위원과 참가자는 경연 전에 집행부에 알려야 하며 해당 심사위원은 참가자를 심사할 수 없음. ■ 심사결과 및 수상자 사후 관리 1. 부문별 심사위원은 행사 전 날 오후 18시, 본회 카페에 공지함http://cafe.daum.net/namdoart 2. 부문별 경연 종료 후 심사위원 점수 및 수상자 공고 3. 본 대회 수상자는 사후 본 대회 심사위촉 및 각 기관과 각종 공연 및 행사와 학술행사에 참여 기회 제공 ※ 경연순서와 시간은 대회운영 규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시상내역 ■명인· 명무부 (전통· 불교무용 / 연희) 구 분 훈 격 인 원 시 상 종합대상 국회의장상 1명 상장 및 상금 200만원 대 상 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 1명 상장 및 상금 30만원 최우수상 광주광역시장상 2명 상 장 우 수 상 광주광역시의회의장상 2명 상 장 장 려 상 광남일보사장상 / 본회 이사장상 2명 상 장 ■일반부 (전통· 창작 / 불교무용 / 연희) 구 분 훈 격 인 원 시 상 종합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1명 상장 및 상금 100만원 대 상 전라남도지사상 2명 상장 및 상금 각 30만원 최우수상 광주광역시 남구청장상 2명 상 장 우 수 상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상 2명 상 장 장 려 상 광남일보사장상 / 본회 이사장상 2명 상 장 ■신인부 (전통·창작 / 불교무용 / 연희) 구 분 훈 격 인 원 시 상 종합대상 전라남도지사상 1명 상장 및 상금 20만원 대 상 국회의원상 2명 상 장 최우수상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상 2명 상 장 우 수 상 광남일보사장상 2명 상 장 장 려 상 본회 이사장상 2명 상 장 학생부 종합대상 교육부장관상 1명 상장 및 상금 50만원 ■고등부 (전통 · 창작 · 불교무용 / 연희) 대 상 광주광역시교육감상 1명 상장 및 상금 각 10만원 최우수상 광주광역시 서부교육지원청교육장상 2명 상장 및 상금 각 5만원 우 수 상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상 2명 상 장 장 려 상 광남일보사장상 / 본회 이사장상 2명 상 장 ■초 ・ 중등부 (전통 · 창작 · 불교무용 / 연희) 대 상 광주광역시교육감상 2명 상 장 최우수상 광주광역시 서부교육지원청교육장상 2명 상 장 우 수 상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상 2명 상 장 장 려 상 광남일보사장상 / 본회 이사장상 2명 상 장 ■공로상 및 지도자상 무형문화유산 공로상 광주광역시장상 1명 상 장 지도자상 광주시의회 의장상 2명 상 장 안무가상 국회의원상 2명 상 장 특별상 국회의원상 2명 상 장 최종 수정일자: 2024.05.13. 오후 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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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br>주요한의 기록, 그 진실은?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도산안창호포럼 제3집 ‘애국가 작사와 도산안창호’에는 대부분의 필자들이 ‘친일파 지식인’이란 규정하에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윤치영”을 나열하고, 이어 "국학의 대가 최남선, 서지학자 황의돈, 안창호와 함께 상해에서 일했던 주요한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했다고 하였다. 이 중에 주요한朱耀翰)은 ‘安島山全書’라는 방대한 저술에서 ‘애국가’ 항목을 두고 세 번에 걸쳐 작사자에 대해 거론한 인물이다. 그런민큼 누구보다도 주요한의 작사자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게 된다. 이를 짚어 보기로 한다. 안창호의 생애를 다룬 대표적인 전기(傳記)는 이광수의 ‘도산안창호’와 주요한의 ‘安島山傳記’이다. 전자는 안창호를 "도덕주의자의 거울”로, 후자는 "민주적 지도자의 전형”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자료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도 평가를 받는다. 이 두 저자는 안창호가 임시정부 조직 초기부터 이광수가 귀국하는 1921년 2월 사이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으로 함께 활동한 이들이다. ‘도산안창호’는 "작사자 문제 발화”로, ‘안도산전서’는 "작사자 문제 유지, 확산”의 저술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 즉,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安島山全書’의 평가 "작사자 문제 유지, 확산”의 평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주요한은 외견상으로는 몰라도 내심은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보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 이유를 주요한의 발언을 순차화 하여 밝혀 보기로 한다.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주요한의 첫 발언은 네 가지 점에서 주목을 하게 된다. 하나는 작사자 문제가 발발한 후 첫 번째의 반응이란 점이다. 미국의 한 백과사전 출판사가 애국가 작사자의 연혁을 문의해 온 바, 공보처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통보하려 한다는 기사(서울신문)를 낸 것이 1955년 4월 4일 자이다. 그리고 주요한이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것이 4월 19일이기 때문이다. 둘은 안창호설에 대한 반론으로 대표적이란 점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반증하는 것임으로 쉽지 않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셋은 안창호의 최측근 중 한 명이란 점이다. 임시정부 시기와 흥사단 활동에서 이광수와 주요한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했던 인물인데, 한 사람은 작사자로, 또 한 사람은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는 점에서다. 넷은 주요한은 애국가 작사자를 판단할 전문소양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장 시절 ‘적십자의 노래’ 등을 작사하고 ‘불놀이’를 발표한 시인이란 점이다. 주요한의 첫 발언은 이렇다.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자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라는 기고문에서 매우 강한 어조로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한 것이다.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 도산이 작사자라고 하는 직접적인 증명을 가진 사람을 필자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또한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신화적인 설’이란 표현은 곧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주장은 듣도보지도 못했다.”는 강경한 부인이다. 이 결과는 가장 가까이에서 살며 안창호가 직접 "내가 작사했다”라는 말을 한 바도 없다고도 했다. 이는 "내가 작사하지도 않았다고 하는 말도 듣지 못했다”라는 억지를 배척한다. 특히 안창호가 직접 자신이 작사자라는 말을 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말까지 하였다. 이는 이후 1963년 발간한 ‘안도산전서’에서도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로 기술하여 이를 견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지적 표현은 주요한의 깊은 내심에서 나온 확신임으로 쉽게 변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두 번째 발언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시기에 발표한 글에서다. 1955년 12월 조사위원회 일원으로서, 자신이 주관한 월간잡지 ‘새벽’에 발표한 ‘去國歌와 靑年學友會歌’란 글이다. 여기서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라는 대목의 행간을 읽어보기로 한다. "文敎部에서 愛國歌作詞者調査委員會를 委囑하여 그 사무를 추진할 때에 筆者도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었다.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 調査途中에 딴 所得이 있기로 여기 披瀝하고자 하는 바이다.(중략) 그때 開城에 있는 韓英書院에서 찍어 내서 몰래 사용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거기는 약 2백餘篇의 唱歌가 수집되어 있는데, 推算年代로 보아서 물론 秘密出版이다. 이 唱歌集 속에 제1章은 愛國歌(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되어 있고, 제2章 역시 愛國歌(성자신손 오백년은)로 되어 있다. 曲調는 두 가지가 같다고 하였고, 曲譜를 보면 스코틀랜드 民謠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의 그것이었다. 그 밖에 韓末에 유행되던 여러 가지 노래가 수집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筆者는 ‘靑年學友會歌’라는 것을 발견했다.(중략) 다음에 유명한 ‘去國歌’도 이 두 책에 揭載되어 있다. 이 歌詞는 春園선생이 저술한 ‘島山安昌浩’에 收錄되었으나 그 歌詞의 行數가 節을 따라 맞지 않는 점이 있어 一部 漏落된 것으로 추측되었는데 敍上의 兩 唱歌集에 收錄된 것으로서 완전한 歌詞가 발견되었다고 생각한다.”(월간 <새벽>, <去國歌와 靑年學友會歌>, 1955, 12) 다소 길게 인용한 글은 주요한이 ‘도산안창호’의 내용을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대비로 ‘한영서원 발행 창가집’도 조사자로서 살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발언 "신화적인 설”이라는 단언은 적어도 이광수의 ‘도산안창호’ 기록을 분명하게 부정한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 두 번째 발언의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라고 한 소이를 알 수 있게 된다. 즉, 이미 작사자조사위원회에서 적어도 안창호가 작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또한 한영서원에서 발행한 창가집의 "제1章은 愛國歌(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되어있고, 제2章 역시 愛國歌(성자신손 오백년은)”라고 구분하여 인용한 대목에서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영서원의 창가집에는 두 애국가의 작사자로 윤치호라고 밝혀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작사자조사위원회가 결론을 윤치호로 내리게 한 근거 중 하나라는 것과 1916년 ‘경무부 보고 애국창가집 사건’ 기록에 ‘윤치호 舊作 애국가’라고 하였다는 사실에서다.(이후 1920년대 김종만 소장(所藏) 노래책에 애국가 작사자로 ‘윤선생 치호’로 표기되고, 가장 방대한 자료집인 1931년 한석원이 펴낸 ‘세계명작가곡집 무궁화’에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 작사’ 밝힌 사실에서 재확인이 된다.) 이를 주요한은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주요한은 이 두 번째 발언의 행간에 "안창호는 작사자가 아니다”를 담은 것이다. 만일 작사자조사위원회의 결론이나 자신의 견해가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면 굳이 이상과 같은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그 委員會의 결론에 작사자는 안창호라고 했는데~”라고 했어야 마땅한 것이다. 결국 두 번째 발언에서도 주요한은 내심으로는 입장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주요한의 저술 ‘安島山全書’에서 별도의 ‘愛國歌’라는 소항목을 두어 안창호 작사설을 확대, 재생산한 두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살피는 것은 상해 임시정부 시절의 에피소드이다. 이의 진앙지는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이다. 즉,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 하였다"”이다. 주목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단순히 "대답이 없었다”인데 주요한은 다음과 같이 "웃고 대답이 없었다”라고 부연하였다.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 상해시대에 –이 노래는 선생님이 지으셨지요?-라고 도산에게 물으면 –웃고 대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시점과 장소는 주요한이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 등으로 안창호와 이광수와 함께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사정이다. 이런 점에서 주요한의 부연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즉, "웃고 대답이 없었다”라고 하여 소위 ‘소이부답(笑而不答)’이란 에피소드로 만들었다. 이 사자성어는 굳이 말로 알려주지 않고 웃음으로 대신한다는 뜻이나 일반적으로는 직접 대답하기 곤란하여 회피하는 모습이나 대응할 가치가 없는 질문에 예의상 대처하는 태도를 말하기도 한다. 이에 적용하면 결국 안창호가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지만, 정작 안창호에게 작사했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여 회피했다”인 것이다. 이 사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안창호와 함께 있었지만 들은 바가 없는 얘기이다.”라는 뜻을 피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실상은 안창호 스스로가 작사자가 아니라고 말한 것과 같지 않느냐라고 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은 애국가를 대성학교 개교 후 안창호가 작사하고, 이를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여 확산시켰다. 다소 감동적인 이야기다.(이를 장리욱은 1983년 발행한 <偉大한 韓國人 安昌浩>(중앙서관, 118~119쪽)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확산시켜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살핀다면 흔한 말로 ‘카더라 통신’ 수준인데, 에피소드의 시점 등을 눈여겨 읽지 않으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의 시점은 대성학교 개교 이후라는 점과 오늘날에는 쓰지 않는 ‘대리교장’ 같은 용어의 이해이다. 대성학교의 개교 시점은 1908년 9월이고, 대리교장 또는 대변교장은 저명 인사를 내세워 학생모집 효과를 얻기 위한 방편이고, 개교 후에는 윤치호가 서울에 거주하기 때문에 평양의 안창호가 교장직의 대리를 맡아 쓰게 된 말이다. "대성학교 대리교장으로 있던 도산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성자신손 오백년은’으로 시작하는 애국가에서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했다. 이에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 놓았던 것을 꺼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되었다고 칭찬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라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였다. 장소는 평양 대성학교 안창호 대리교장 사무실, 때는 1908년 9월 대성학교 개교 이후 어느 날, 등장인물은 서울에서 온 교장 윤치호와 평양의 대리교장 안창호, 개요는 안창호가 지어 두었던 "동해물과 백두산이~”하는 애국가를 서랍에서 꺼내 보이자 윤치호는 이를 좋다고 하자 안창호가 이를 윤치호가 지었다고 양보하여 발표하자고 하며 확산시켰다. 여기에 굳이 작품 이름을 추론한다면 ‘실패한 작사자 조작극’ 정도일 것이다. 매우 드라마틱하다. 안창호가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하여 명의(名義)를 넘겨주었다니 오늘이나 당시나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은 설정될 수 없는 것이어서 재미는 있으나 사실은 아니다. 결정적으로는 현 애국가가 ‘찬미가 14장’이란 이름으로 출판된 것이 1908년 6월인데도, 두 달이나 지난 뒤에 개교한 대성학교에서 가사를 두고 잘되었다고 하며 안창호가 작사한 것을 윤치호의 작사로 하여 발표하기로 하였다니 그렇다. 이런 이유로 주요한의 첫 발언에서 ‘신화적인 설’이라고 했다고 보는데, 이 극의 배경을 살피면 이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것이다. 우선 작사자 문제의 발화점인 ‘도산 안창호’의 본질적 문제이다.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이 책 여러 곳의 탈맥락적인 안창호 작사 언급 대목은 편집과정에서 원 저자인 이광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박현환(‘도산 안창호’의 저자가 이광수가 아닌 ‘편집 겸 발행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대표이다. 박현환은 안창호가 귀국하자 1922년 7월 귀국하여 이광수 주변에서 흥사단 활동을 도운 인물이고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복구 시기까지 국내 흥산단 업무를 관장한 인물이다.) 같은 인물이 가필한 결과라는 것이 문제다. 대표적인 대목이 ‘상해시대편’의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는 탈맥락적인 부분이다. 이에 따른 결론은 "전기소설에 근거한 안창호설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두 번째 문제는 이 극의 대본이 ‘전문(傳聞)을 다시 전문’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요한은 위의 인용문 앞에 이렇게 전재하여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하여 안태국의 사위인 홍재형(洪在衡)이 장인에게 전해 들은 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장인에게 전해 들은 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한 기술이라고 했다. 첫 발언자는 안태국, 이를 전한 이는 홍재형, 이를 듣고 주요한이 기록을 하였다. 첫 발화자 안태국(安泰國, 1877~1920)은 평양에서 나고 자란 인물로 대한제국시대 잠시 하급관리를 지냈다. 그리고 독립협회 평양지부에서 이강, 차리석, 최광옥, 이갑 등과 함께 활동하며 안창호와 연을 맺었다. 한일합방 후에는 계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1916년에 만기 출감하였다. 3.1민족운동 이후에는 평양을 떠나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총장 비서관직을 맡았다. 그리고 1920년 3월 병사했다. 이를 감안(勘案)한다면 이미 1920년 이전에 작사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 시기 이전에 사위 홍재형한테 전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1940년 상해 흥사단 원동지부 위원 정도로만 알려진 홍재형이 어떻게 장인에게 듣고 다시 이를 주요한에게 전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1920년 이전 왜 이런 사실이 안태국만이 알고 있었느냐도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언에 전언’을 통해 펼쳐진 대성학교를 무대로 한 ‘실패한 작사자 조작극’은 제목 그대로 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용, 살피려는 것은 임정시절 가사 일부를 수정하였다는 대목이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11쪽에서 최남선이 언급한 부분이다. "만약 안창호가 문의를 하였다면 그 직위로 보면 주요한이 아닌 이광수에게 하였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주요한의 나이가 당시 20세라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 역시 ‘안도산전서’의 ‘애국가’ 항목(93~97쪽)에서 4절의 일부를 수정했다는 것과 2, 3절에 대한 언급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1919년부터 상해에서 ‘임군을 섬기며’ 대신에 ‘충성을 다하여’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도산이 고친 것이었다. 둘째 절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든지, 셋째 절 ‘가을하늘 공활한데’와 같은 웅장한 구상은 도산의 머리가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주요한, ‘안도산전서’, 1971년, 93~97쪽) 앞의 문장은 ‘찬미가 제14장’의 4절 중 ‘임군을 섬기며’를 현재의 ‘애국가’와 같이 ‘충성을 다하여’로 고친 것은 안창호라고 하였다. 이는 1919년 12월 1일 발행된 신한청년당 기관지 ‘新韓靑年’ 창간호 속 표지에 수록한 ‘애국가’ 4절에 ‘충성을 다하여’로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임시정부 시기 수정된 것으로 볼 때 가능성이 높다. 이는 주요한이 작사자에 대한 유일한 단정적 표현에서 그렇게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의 해석 문제는 주요한의 표현대로 추정 정도일 뿐인 것이다. 이상에서 작사자 문제를 확산시킨 ‘안도산전서’의 세 대목을 그 발화점인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와 대비하여 살폈다. 이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도산 안창호’의 원천적 문제 제기이다. 이 책은 이광수가 쓴 원고에다 당시 ‘편집 겸 발행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대표 박현환(나정 박현환(蘿井 朴賢煥)은 1892년 평안북도 철산(鐵山) 출신으로 평안북도 정주 오산 학교의 이광수의 후배이면서 제자로 일본 유학 후 오산 학교 교사로 일했다. 3. 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등과 흥사단 원동 단우로 ‘신한청년’과 ‘독립신문’ 편집 업무를 함께 하였다. 해방 직후에 흥사단 국내 위원부 재건에 앞장섰고, 흥사단의 해외 조직과 국내 조직 재건에 기여한 인물이다.) 이 ‘태극기와 애국가’ 항목을 삭제하고, 대신에 곳곳에서 덧붙여 가필(加筆)을 하였다. 그 결과 감동적인 기술과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사실로 오해하게 하였다. 소설가적 성향을 발휘한 것인데, 박현환은 이광수를 따른 작가로 1920년대 초반 톨스토이 소설 부활을 ‘해당화’라는 제명으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다. 또한 해방 후에는 흥사단의 국내 재건을 도맡은 인물이다. 이로서 이광수에게 전기소설 집필을 의뢰하고, 이의 편집과 출판을 주관한 인물이다. 그 결과 탈맥락적이고 산발적으로 작사자가 안창호라고 왜곡시켰다. 사실(fact)이 아니라 감동으로 가짜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음은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자의 첫 발언, 1955년 12월호 월간 ‘새벽’ 기고문, 그리고 1971년 주요한이 편찬한 ‘안도산전서’ 에서 제시한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평가이다. 정리하면 주요한은 첫 발언 ‘신화적인 설’을 번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안도산전서’는 흥사단의 입장을 고려하여 부정하지는 않고, 인용하는 방식으로 단순 서술을 한 것 뿐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주요한이 안창호설을 지지한 것으로 오독 할 수가 있다. 이는 위에서 살핀 바대로 주요한은 첫 발언 이후 이를 부인하거나 번복한 바가 없다. 결론적으로 주요한은 안창호가 작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단지 일부 사설을 수정한 바가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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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디에서나 한글문화 체험국립한글박물관은 외국인 대상 한글문화 체험 교육 프로그램 '손으로 꽃피우는 한글'을 운영한다. 외국인들이 시각화된 이미지로서의 한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한 교육 프로그램이다. 외국인 한글문화 체험교육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현장 교육, 온라인 원격교육, 학습자료 지원 등 다양한 방식의 한글문화 체험 콘텐츠를 제공한다, 교육 내용은 한글 전통 서체 변천 과정을 박물관 소장품을 통해 관찰하고 다양한 현대적 캘리그래피 기법을 활용해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보는 과정으로 구성된다.국립한글박물관은 올해부터 학습자료를 희망하는 재외 한글문화원과 세종학당 한국문화 ·한국어 강좌 수강생을 대상으로 '손으로 꽃피우는 한글'의 교육 영상 2편과 교구재를 배포하고 있다. 하반기에는 '찾아가는 해외 한글문화 체험 교육'이 시범 운영된다. K팝 등 한류가 지속적으로 확산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직접 방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박물관은 향후 한류 강세 지역 중심으로 이 교육을 점진적으로 확장 운영할 계획이다.참가를 희망하는 기관과 단체는 국립한글박물관 웹사이트에서 첨부된 신청서를 작성한 후 담당자에게 이메일로 신청 접수하면 된다.참가비와 교구재 비용은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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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만원 지급 청년 문화예술패스, 11월30일까지 8만880명 발급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8일 기준 8만880명이 청년 문화예술패스를 발급받았다고 11일 밝혔다. '청년문화예술패스'는 전국 19세 대상으로 1인당 공연⋅전시 관람비 최대 15만원을 지급하는 사업이다. 연극, 뮤지컬, 클래식·오페라, 발레·무용, 국악, 전시 예매에 즉시 사용 가능한 포인트를 제공한다. 시행(3월28일) 12일 만에 전체 지원 대상(16만명)의 51%가 발급을 마쳤다. 서울(68.4%)의 발급률이 가장 높았다. 뒤를 이어 세종(63.3%), 인천(58%), 경기(53.3%), 전남(48.9%) 순이었다.이달 첫째 주 기준 '청년 문화예술패스' 이용자들의 관심이 높은 공연은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 연극 '옥탑방 고양이', 전시 '유토피아: 노웨어, 나우 히어'였다.대구 등 6개 지방자치단체와 공립 문화예술기관은 '청년 문화예술패스' 이용자를 대상으로 관람권 할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할인 혜택을 적용받을 수 있는 주요 공연은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대구오페라하우스 '파우스트' ▲영도문화예술회관 '디 첼리스텐 앙상블 제14회 정기연주회' ▲춘천문화재단 '선우예권 위드(with) 오케스트라 드 챔버 드 파리' ▲강원문화재단 '2024 평창대관령음악제' ▲인천중구문화회관 '뮤지컬 브람스' ▲세종예술의전당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 등이다. 할인율은 공연마다 다르며 참여 기관과 공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예술위 누리소통망(SNS)에서 확인할 수 있다.청년 문화예술패스는 협력예매처인 인터파크와 예스24 웹사이트 및 모바일앱에서 신청 가능하다. 발급 기간은 11월 30일까지, 사용 기한은 올해 12월 31일까지다. 현재 대구광역시 등 6개 지방자치단체와 공립 문화예술기관이 ‘청년 문화예술패스’ 이용자를 대상으로 관람권 할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할인 혜택이 적용되는 주요 공연 목록 및 할인율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SNS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챌린지에 재능기부로 참여한 원밀리언은 "'청년 문화예술패스'를 발급받고 공연과 전시를 즐기자"는 메시지를 안무로 표현했다. 원밀리언 소속 노원 안무가(아마존 크루)가 직접 안무를 개발했다. 영상은 문체부 대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오는 15일 공개된다.청년 문화예술패스는 19세 청년에게 뮤지컬·클래식·연극 등의 공연과 전시 예매에 즉시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를 지급하는 사업이다. 협력예매처인 '인터파크'와 '예스24' 누리집 또는 모바일 응용프로그램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발급 기간은 오는 11월30일, 사용기한은 12월31일까지다. 지역별 신청인 만큼 발급 상황에 따라 조기 마감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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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만나는 '문화향연' 공연국립중앙박물관은 국립박물관문화재단과 함께 11월까지 서울 용산 박물관과 소속 지역 박물관에서 '박물관 문화향연'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공연을 펼친다. 이달 27일에는 시각 장애인 연주자로 구성된 '한빛예술단'이 무대에 오른다. 6월에는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가 관람객을 위한 공연을 선보인다. 올해부터는 공연 중에 박물관이 소장한 주요 유물을 소개할 예정이다. 4월에는 봄날의 정취가 엿보이는 남계우(1811∼1890)의 그림 병풍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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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재재단 예술단 예술감독에 송미숙 씨한국문화재재단은 재단이 운영하는 예술단의 신임 예술감독으로 송미숙 씨를 위촉했다고 11일 밝혔다. 임기는 2026년 3월까지다. 송미숙 예술감독은 국가무형문화재 '진주검무', 경기도 무형문화재 '안성향당무' 등을 이수했으며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현재 국립진주교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예술협회 이사장, 한국춤협회 수석 부이사장, 국가무형문화재 진주검무보존회 지부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문화재재단 예술단은 1981년 5월 창단돼 전통춤 전승·보전을 위한 다양한 공연과 활동을 펼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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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 2세가 부르는 서러운 아리랑사할린한국교육원장 3년간 업무를 마치고 귀임한지 1년이 지났지만, 사할린 동포들의 서러운 처지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코로나 시절 함께 불렀던 아리랑 선율에 따라서 부른 개사한 노래를 불러본다. 교육일지와 사진 속에 있는 사할린 동포 2세들의 얼굴들을 떠 올려본다. 사할린 한인 2세의 간절한 소망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국문화 수업을 함께하면서 이분들의 간절한 소망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동포들의 뼈져린 한은 영주귀국으로 조국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만나는 것이다. 한국으로 가신지 30년이 지나고 이미 영주귀국 후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2세대 자녀 한명과 그 배우자를 영주귀국 대상으로 확대되었다.(2021년) 그 이전까지는 풀릴 기미가 없이 가슴 아프게 지속되었다. 1세대 부모가 사망한 2세대 자녀들에 대해서는 현재 법적으로 영주귀국이나 귀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국적 취득에 관한 속지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어려서부터 한국어를 말하고 쓰고 배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이 술김에 흥얼거리는 아리랑이나 민요 가락을 들으며 자랐고, 한국의 전통 풍습과 명절을 쇠었으며, 조선에서 가져 오거나 사할린에서 만들어 쓴 조선의 생활물품을 늘 보고 쓰며 아버지, 어머니 따라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어린시절, 청소년 시절, 냉전의 시기를 살아 왔다. 해방 후 냉전 시기에 사할린 한인들은 억류되어 감시 당하며 사회주의 소련땅 사할린의 노동력을 보충하는 신분이었다. 이동과 취업, 인간으로서의 권리적 측면에서 차별과 멸시는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과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대한민국의 발전상이 보도되면서 급격히 사할린 한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었지만, 어린 시절 당했던 차별과 수모에 대해서는 늘 대화의 끝에 "정말 숱하게 멸시를 받았어." 하시며 푸념하듯 말씀하시곤 했다. 오죽했으면 한인 2세대인 사할린태권도협회 안수학 회장은, 어린 시절 차별과 수모에 반대하여 싸움을 자주 했고, 김치 냄새난다고 놀리는 러시아 아이들 혼내주고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가라테를 배웠으며, 한러수교 후 태권도를 다시 익혀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국적을 러시아로 바꾸지 않고 평생 무국적으로 살다가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대하고 있었고 2세대 자녀들은 귀환을 믿으며 굳건히 당당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냉전과 사회주의 시절을 살다가, 한국의 발전상이 사할린에 알려지고 사할린 한인의 존재와 귀환의 문제가 공영방송을 타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 사실 한-러 수교 이전에도 KBS사회교육방송(현재 한민족방송)에서는 사할린 한인동포들이 고국의 친지에 전하는 사연들이, 일본으로 이중징용 되어 재일동포가 된 지인을 통해 전달되어 방송이 되곤 했다. 그러나 첨예한 냉전 시기에 관심도 지원도 교류도 불가능한 시기였다. 1990년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후 고국방문이 이루어질 때 한국에 다녀오신 1세대 부모들이 많았다. 그러나 영주귀국 희망 신청이 이루지던 결정적 시기를 맞이하기 전에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이 참으로 많다. 그 시기에 생존해 계신 1세대분들은 영주귀국을 희망하고 신청하여 고국에 오셨지만, 사망하신 1세대분들은 영영 통한의 그리움 안고 타국 땅에서 숨을 거두고 그 섬에 묻히셨다. 사할린에 징용되었다가 일본으로 다시 이중 징용된 1세대 부모를 둔 2세대 자녀들은, 알음알음 정보를 얻어 일본의 한 공동묘지에서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기도 하였다. 이 얽히고 설킨 일제 강제징용과 식민시대의 압제와 희생, 그리고 조국으로부터 외면 당한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이분들에겐 실로 삶 전체가 버겁고 서러운 현실이다. 나는 어떤 영향력을 가진 위치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영주귀국 확정 전에 부모를 잃은 2세대 분들의 원한을 내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보고 가슴에 간직하게 되었다. 사할린 동포 지원 특별법에 "사망 등 다양한 사유로 영주귀국 신청을 하지 못한 1세대 동포들의 자녀들에게도 희망에 따라 영주귀국의 기회와 모국인 대한민국의 국적 취득이나 경제적 지원의 혜택을 드릴 수 있는 방안" 을 모색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범위의 2세대 분들 중에는 현 러시아 정부의 연금을 수령하는 분도 있고, 홀로 사업을 일으킨 분도 있으며, 이미 사할린 사회에 인정을 받은 문화 예술 공로자도 많다. 대한민국으로 영주귀국한다면 자녀들과의 이별을 두려워하는 분들도 많다. 따라서 그런 범위의 모든 2세대 분들이 영주귀국을 희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국이 풀어주지 못한 부모의 원한을 보며 겪으며 성장하고 기억하는 자녀들의 소망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조국에서 살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사할린 한인 2세의 고통과 설움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사할린한국교육원과 유치원에서 25년간 한국어를 가르치시다가 2021년 영주귀국 신청으로 한국에 오신 2세 전영희 선생님은, 어머니가 2004년 병환 중에 영주귀국을 하셨지만 대한민국 국적이 나오기 전에 병원에서 사망하셔서 한국 국적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니 전영희 선생님은 영주귀국 대상이 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영주귀국 하시는 1세분과 재혼을 하여 배우자 자격으로 2021년 11월에 영주귀국을 하셨다. 그러나 배우자께서 역시 국적 취득 전에 별세하셔서 국적이 나오지 않아 애태우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화가 난다. 영주귀국 하신 분이 돌아가시면 사후에라도 국적을 드려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래야 자녀에게도 법적으로 고국에서 살아 볼 기회가 생길 것 아닌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에 오셨는데 남편이 국적을 받기 전에 별세하여 배우자의 국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아내는 다시 돌아가라는 것인가. 너무나 법 적용이 허술하고 냉혹하다. 유독 사할린 한인, 사할린 동포들에게 더 냉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1세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영주귀국 허용된 2세 분들 중에는 한국어에 서툰 분들이 많고 일상 생활, 행정적 처리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 고국 정착 과정에 난제와 장벽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래서 사할린한국교육원의 한국어 교재를 다시 가져와 드린 적이 있다. 정착 지원 체계가 아직 자리 잡히지 않아 각자도생 해야한다는 말이 나왔다. KBS한민족방송이 주관하는 한민족체험수기대회에서, 2021년(사할린아리랑무용단 박영자 단장), 2022년(유즈노사할린스크 김경순) 성인 부문 대상을 모두 사할린 2세대 한인 어르신이 수상하셨다. 2021년 수상자 박영자님은,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다시 이중징용 되셨다가 끝내 일본에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인사드리던 기막힌 디아스포라가 담긴 가족사를 글로 남겼다. 수상 인터뷰에서 "KBS가 주는 이 대상은 우리 가문의 영광이기 전에 사할린 한인 전체에 주는 상"이라며 "사할린에서 다시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으로 끌려가서 타국에 묻히신 외할아버지께 이 상을 바친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하셨다. 2022년 수상자인 김경순님은 아버지에 대한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90년대 중반 병든 노부모가 한달 간의 모국방문에서, 50년 만에 아들과 상봉 후 다시 이별하여 사할린에 돌아와 몇 개월 만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끝내 영주귀국 신청을 해보지 못한 서러움에 관한 처절한 가족사의 이야기를 쓰셨다. 특히 김경순님은 한국교육원 한국문화 수업시간에 배운 가수 조용필의 노래(그 겨울의 찻집)와 주병선의 노래(칠갑산) 가사를 바꿔 부모에 대한 기억, 조국 귀환에 대한 부모의 열망, 부모님과 10살 아들(김경순님의 오빠)과의 이별 장면 등을 가사에 담아 내게 보내셨다. 그 노래를 노래방 반주에 맞추어 불러 보았는데, 부르다가 여러 번 가슴이 메이고 눈물이 터져 한참 후에나 완전히 부를 수 있었다. 그 노래 영상들을 김경순님께 내가 보냈고 김경순님은 한국의 조카들(큰 오빠의 자녀)에게 보내 드렸다고 한다. 그러면 조카들로부터 아버지 어린 시절을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고 한다. 박영자님의 외할아버지 이야기와 김경순님의 부모님과 오빠에 대한 사연은, ㈜국악신문과 새고려신문과 ‘우리말방송’에도 게재되고 방영되었다. 김경순님 사연은 KBS한민족방송에서도 사할린과 전화로 연결하여 소개되기도 하였다. 나도 방송에 출연하여 사연과 노래 가사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소개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사할린 동포, 사할린 한인 1992년부터 시작된 사할린 동포 1세대의 영주귀국 사업으로 현재까지 4,700여 분이 홀로 또는 배우자와 함께, 그리고 2021년부터는 '이미 한국에 사시는 부모님'의 2세대 자녀 1인과 배우자가 한국에 영주귀국하여 사신다.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으로 강제징용되었거나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들을 ‘사할린동포’라고 정의한다. 이분들이 영주귀국이 허용된 사할린 동포 1세대이다. 따라서 사할린에서 한 집안이나 동네에서 자란 언니, 동생, 친구라도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영주귀국 지원 혹은 희망과 신청 대상이 되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영주귀국 사업 개시 당시 생존하는 1세대 한인에 한하여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신청 및 허용 대상이 되었다. 이 글은 영주귀국 사업과 신청이 이루어지기 전에 사망하거나 기타 사정으로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없었던 부모를 둔, 2세대 사할린 한인 자녀들의 간절한 소망에 관한 것이다. 이분들은 2024년 현재 연령상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에 이르신 분들이다. 조국 귀환의 기회를 누리지 못한 불쌍한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통절한 한을 품은 채 살고 계시다. 어떻게든, 그렇게도 부모가 돌아가고 싶던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계시다. 영주귀국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대한민국 국적 취득을 하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절차가 너무나 어렵다고 한다. 이런 점을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2020년에서 부터 3년간 한국문화교류가 단절되는 시기 필자는 임시 탈춤강습과 탈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국립사할린대학 한국어과 학생들과 사할린아리랑무용단 단원들에게 탈춤 기본 춤사위를 지도했다. 우리 민족은 어디를 가나 노래방이 있듯이 러시아는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사교댄스나 스포츠댄스 모임이 많다. 아마도 죽을 때가지 춤을 추다가 간다고나할까. 동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실버댄스 동아리에 들어가서 함께 춤을 배우기도 했다. 그들에게 탈춤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렇게 동포들과 가까이 만나게 되면서 사할린 한인들의 이산에 대해 4대 가족사를 접하게 되었다. 특히 댄스 클럽에서 만난 오석만씨가 KBS한민족방송에서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2023년 우수상을 수상했다. 처음에는 누구나 한국어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들의 가족사는 바로 잊혀진 한국사이고 동아시아 전쟁사라는 나의 설득에 용기를 내서 슬픈 가족사를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책으로 묶여 나와서 보내드리게 되었다. 한국교육원 수업에서 한국어 수업이나 한국문화 체험 프로그램에서 만난 한인들이 과제물로 내 놓은 체험수기 중 우수한 작품이 KBS한민족체험수기에서 매년 대상과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경순님은 한국교육원 수업에서 ‘그 겨울의 찻집’ 노래를 배우신 후 ‘눈물의 섬, 사할린’으로 가사를 정셨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가사 중에 특히 "사무친 한을 풀어 주세요."는 대한민국에 외치는 절규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서러운 아리랑 사할린으로 끌려 왔어요. 조선 땅에서 그 옛날 일본 놈들의 시달림 받고, 늘 괴로움에 떨었죠 가고픈 고향 한국 땅으로, 부모형제 사는 마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 한숨만 저절로 나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리워라 내 고향 사모친 한을 풀어 주세요, 하루 속히 날아 가고파 그늘진 세월, 고향 그리며, 철천지 한이 되었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꿈에서 본 내 고향 그리고 ‘칠갑산’ 노래의 곡조를 생각하면서 부모와 이별하는 어린 10살의 오빠의 심정을 감정이입하여 지은 ‘’ 가사는 이러하다. 이별의 부두 부모 잃은 어린 마음을, 그 누가 알아 주리요 외로웁고 서럽던 아픔, 누구에게 원망 주리요 어머니는 내게 같이 떠나자, 애닯게 속삭였지만 할아버지 무서워 끝내, 따라간다는 말을 못했소 어머니가 나를 두고 떠난 날, 배 떠난 부두에 나가 하염없이 목 놓아 울었다오.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또 김경순님은 아리랑민족의 후예로서, 부모님과 큰오빠의 오십년 이별과 한번의 만남, 또 이별과 사별의 한, 전체 사할린 한인동포들의 고통의 역사를 담아 아리랑 가사로 쓰셔서 내게 보내셨다. 적절한 아리랑 곡을 찾아 보았는데, BTS의 아리랑이 긴 가사를 모두 담을 수 있었기에 노래로 불러서 보내 드렸다. 도중에 여러 번 목이 메었다. '한맺힌 사할린 아리랑'을 정리한 가사는 이러하다. 한맺힌 사할린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일제에 끌려 사할린 왔소. 모질던 징용살이 누가 아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간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믿음에 살아 낸 세월 [랩 버젼] 한달만 있다가 돌아간단 그말, 어찌나 기다렸는지. 밤이면 라디오 틀어 놓고서 혹시나 우리를 찾을까 봐. 애타게 기다린 자식 형제들 오십년 넘어서 만나보네. 수십년 세월을 참아 왔는데 언제 또 고향 땅을 밟아보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기다리다 지쳐 세상 뜨신, 우리네 부모님들 불쌍하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 넘어간다. 부모들 사모친 한 생각하면, 애타던 자식들도 가여워라. 너나없이 서럽고 아파 어이하오. 이 가사의 핵심은 부모와 어린 오빠가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친 것, 그런 가엾은 부모를 보는 자식들 모두 차마 맨 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가엾다는 점이다. 영주귀국의 기회가 오기 전에 돌아가신 불쌍한 부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진다. 부모님의 나라에 더 가까이 가고 싶은데 도무지 소식도 없고 희망을 찾을 수도 없다. 이 아리랑의 마지막 가사들은, 그렇게 부모를 잃고 조국과 단절된 채 희망을 잃은 사할린 한인 2세대 자녀들의 심정을 그대로 외치는 절규다. "(조국 귀환을) 기다리다 지쳐 세상 뜨신 우리네 부모님들 불쌍하오 부모들 사모친 한 생각하면 애타던 자식들도 가여워라 너나없이 서럽고 아파 어이하오 2023년 9월에는 ㈜국악신문사(대표이사 기미양)를 통하여, 아리랑 무용단장 박영자님(갈리나 박)의 아리랑 가사를 받았다. 박 단장님 역시 일찍 부모를 잃고 영주귀국의 희망이 사라진 심정과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마음 속의 조국에 대한 이미지와 당신의 현실에 대하여 "사할린 2세 아리랑"라는 재목을 달고 가사를 지으셨다. 아리랑 반주를 확장하여 가사를 붙여 서울의 사무실에서 불러 보았다. 사할린 2세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는 사할린 2세 한인 할머니, 하지만 부모 조국은 한국이라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 어릴 때 저 산 너머엔, 내 조국 있다고 믿었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팔십 년 세월 부모 잃고 서럽구나, 나도 이제 주름진 할머니로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말문 터진 손주들 자주 묻는 말, 할머니와 조국에서 살 수는 없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발전되어 잘 사는 우리 조국 한국, 우리에겐 자랑스런 마음만 크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언젠가 이 생명 끝나기 전에, 조국 품이 우리 2세들 안아 줄까 한인 2세, 우리는 누구인가요 어릴 적부터 조국의 존재를 믿고 한국어, 한국문화로 정체성을 지켜 왔지만, 영주귀국 신청 시기 이전에 부모를 빨리 여의신 사할린 한인 2세 어르신들의 심정은 한결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한국을 조국으로 선택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당신들께도 주어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설령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사할린 사회에 뿌리박은 삶의 터전을 옮기는 문제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자녀들과의 이산, 다른 친지, 친구들과의 이산을 의미하며 기존의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는 연금의 상실과 영주귀국 후 생활보호대상자 신분으로서의 생활 등 수많은 심적 갈등 상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조국이 부모의 한을 풀어 준다는 기본적인 정책의 도리와 그로부터 받는 부수적 혜택이면 충분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신들의 국적 취득이나 자녀의 유학이나 체류 등에 있어서 유연함 같은 혜택일 수 있다. 엄연히 식민지 시기 타국으로 강제동원된 국민들의 자손이 아닌가 말이다. 2021년 10월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 정권에 항복하여 붕괴되던 시기, 그간 한국 정부에 기여한 아프가니스탄 국민과 가족들을 우리 특수부대를 투입하여 목숨을 걸고 안전하게 데려온 미라클(기적)의 작전이 있었다. 그러한 쾌거는 우리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한국 정부의 도덕성과 형제애 및 인류애를 상기시킨다. 그런 인류애와 형제애를 지닌, 정의로운 나라가, 강제로 희생된 일제침략기의 혈육과 자손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또한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의 적용으로 인해, 명백한 국적 회복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 상황(영주귀국 후 국적 취득 전 사망하신 경우)에서 비인륜적으로 국적을 부여하지 않아 그 자녀들의 기회가 방기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법의 취지를 저버리는 일이다. 법의 사각지대는 극단적으로 냉혹하게 2세대분들의 가슴을 갈라 놓는다. 법이 어째 그리 촘촘하지 못하여 법 구실을 다 못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일본 정부나 러시아 정부와 얽힌 외교적, 법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면 좋겠지만, 그런 문제 해결의 전제없이도 우리 정부의 결단이면 어느 정도 가능한 일 아닐까 생각한다. 하물며 인구도 수십년 간 하염없이 감소하고 있어 국가 소멸의 길로 가는 절체절명의 시기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가 묻고 싶다. 나는 2세분들의 사무치고 뼈저린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한다. "왜 한국은 그렇게 발전했으면서 우리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죠? 옛날엔 가난했다, 전쟁으로 힘들었다, 다 이해해요. 그런데 지금은요?" "부모들은 우리에게 한국어와 한자를 가르쳤어요. 조국에 돌아갈 때까지 잊으면 안된다고. 저 산 넘어가면, 바다 건너가면 조국 조선땅이 있다고 했어요. 고향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소련 시절에, 영주귀국 전에, 병으로, 이중징용으로 다 돌아 가셔서 우리들은 갈 기회가 없어졌어요. 우린 뭐에요?" "부모가 끝내 돌아가지 못한 고향에, 왜 사할린에서 태어난 2세들은 못 살아 보는 거죠? 한국말도 말하고 생활방식도 한국식으로 잊지 않고 지켜왔는데?" 한국 교육부에서 파견 나온 교육공무원은 이에 대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다만 ‘제가 그런 것을 결정하거나 영향을 미칠 만한 능력이 없어서 죄송해요.’ 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의 애환을 담은 가사에 노래를 불렀고, 교실과 공원에서 한국의 인기 가요를 불렀으며 탈춤을 소개하고 민속춤을 같이 추었으며 한국문화 수업을 했다. 그리고 ‘한국어말하기대회’에서 발표하실 내용을 컴퓨터로 옮겨 드리고 약간 교정하는 역할만을 했다. 나는 한국에 복귀 이후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의 행사에는 가능한 참여하고 있다. 지난 3월 23일 파주사할린동포회 영주귀국 15주년 행사에서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님을 비롯한 사할린동포들과 함께 사할린아리랑이 대합창으로 불려졌다. 사할린이라는 말만 나와도 눈믈을 흘리신다. 우리는 그분들이 흘리신 디아스포라의 눈물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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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김세철 선생 소리와 춤판 ‘김세철의 풍류’소리는 정선아리랑 외 3곡, 춤은 한량무와 진도북춤을 선보였다. 노년의 여유를 풍류로 펼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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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통일기원 세종전국국악경연대회 대상에는 정온유 씨제10회 통일기원 세종전국국악경연대회에 명인명창부 종합대상은 기악부문의 정온유씨가 수상하였다. 정온유씨는 비대면 심사로 진행된 이번 경연대회에 총 223명의 참가자 중 대회 최고 상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의장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정온유씨는 ‘오늘 이 자리에 있게끔 도와주신 부모님, 스승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상을 받을수록 더욱 더 겸손한 자세로 뭐든 노력하고 열심히 하는 제가 되겠습니다. 저에게 과분한 상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국회의장상에 기악부문 이수현씨가 수상하였고, 통일부장관상에는 민요부문 황명분, 중고등부 종합대상 교육부장관상은 기악부문 정지민양이 수상하게 되었다. 대회를 주최•주관한 (사)한국보훈선양예술협회는 올해에도 풍물부문에 명인명창부를 추가하였고. 내년에는 더 많은 부문 확대를 통해 보다 많은 국악인의 참여를 바라며 비대면으로 축소되었던 각 부문의 시상과 상금을 대폭 상향하여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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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고수를 가리는 제44회 전국고수대회, 전주에서 20일부터고수중의 명고수를 가리는 제44회 전국고수대회가 4월 20일과 21일 이틀간 전주 덕진예술회관에서 열린다.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사)한국국악협회 전북특별자치도지회(지회장 손현배)가 주최하는 이번 대회는 대명고수부, 명고부, 일반부, 신인부, 노인부, 중.고등부, 초등부 등 7개의 부문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우리 전통예술인 판소리에 꼭 필요한 고수인의 저변확대와 연구 계승발전 그리고 신인들을 발굴 육성하여 국악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최고 명고수의 등용문이 되도록 기회를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다. 출연 명창으로는 이난초 국가문화재, 왕기석, 김세미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를 포함, 대통령상을 수상한 박미선, 허애선, 문영주, 김찬미, 임현빈, 강민지, 박가빈, 박현영 등 총 12명의 명창들이 대회에 출전하는 고수들의 북 장단에 호흡을 맞춘다. 대명고수부 대통령상 수상자에게는 대통령상과 우승기, 상금 천만원을 수여하며, 그 외에도 명고부 대상은 국무총리상, 일반부 대상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중.고등부 대상은 교육부장관상 등이 상금과 함께 수여된다. 손현배 지회장은 "전국고수대회는 지난 43년간 수많은 명고수를 배출한 수준 높은 대회로서, 국내 최고의 명창들과 권위 있는 심사위원을 선정하여 참가자들의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있다” 고 말했다. 접수기한은 4월 16일(화) 오후 5시까지이며, 참가신청서 등을 작성해 이메일(jbkm23s@naver.com) 또는, 팩스(063-261-4501)로 접수 가능하다. 자세한 사항은 (주)국악신문 경연대회 게시판, 전북국악협회 사이트(https://cafe.daum.net/jbkm23)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문의전화는 063-262-4501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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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부산동래 전국전통예술경연대회(06/15-16)(무용.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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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86)<br> 김병섭 명인의 '설장고' 춤사위설장고 장구잽이가 혼자서 장구를 메고 노는 놀이를 설장고라고 하고, 장구잽이 2명이 노는 놀이는 쌍장고(雙杖鼓)이고, 세 사람의 경우는 삼장고(三杖鼓)라고 하며, 여러 명이 노는 경우에 장고놀이라고 한다. 설장고에서 많이 연주되는 장단은 덩덕궁이·다드라기(호두락가락)·구정놀이·굿거리이다. 본래 상쇠와 둘이서 놀이판 가운데 나와 서로의 가락을 주고받으며 놀던 것이었으나, 전라북도 정읍의 유명한 장구잽이 김홍집(金弘集)에 의하여 오늘날과 같이 혼자 하는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근래에는 무용수들에 의하여 장구춤으로 안무되기도 한다.설장구는 전라도 우도농악권 지역에서 크게 발달하였으며, 김병섭은 이를 바탕으로 개인 설장구를 만들어 현재까지 설장구 유파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해지고 있다.김병섭 선생은 장고 하나로 한국농악판에서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았던 명인이다. 김병섭(金炳燮)1921~1987년1921년 정읍시 북면 출생1930년 김학순에게 장구 사사1935년 싱카포르 함락 기년 축제 참가1937년 징용으로 아오지 탄광으로 징용1956년 전국농악경연대회 개인상 수상1964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개인상 수상1975년 한양대, 서울예고, 선화예고 출강1986년 서울국립극장 명무전 출연 1987년 9월 11일 향년 75세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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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88)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얼씨구 노다노다 가세 아지까리 동백아 네 열지마라 누구를 괴자고 네 열렸나 열라는 콩팥은 왜 아니 열고 아사리 동백은 왜 여는가 감상 동백은 생강나무의 강원도 사투리다. 김유정 소설 ‘동백꽃’에서의 ‘동백’이 그렇고, 강원도 아리랑과 정선 아리랑에 등장하는 ‘동백’도 선운사 ‘동백’과는 다른 생강나무를 말한다. 생강나무는 3~4월에 노란 꽃을 피우며 상처를 내면 생강냄새가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주까리의 씨앗은 한약명으로 피마자(蓖麻子)이다. 모두 열매를 이용해 기름을 짠다. 기름을 짜서 머리에 발라 치장한들 예쁘게 봐줄 대상이 없으니 아주까리 동백은 결국 무용지물인 셈이다. 아주까리 동백보다 양식으로 쓸 콩팥이 훨씬 절실한데 쓸 데 없는 아주까리 동백만 열리니 볼이 메일 밖에. 그러나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의 이치가 아니던가. *(누구를) 괴자고 : (누구를) 사랑하자고 *아지까리, 아사리: ‘아주까리’가 소리가 흐르면서 음이 변했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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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모던걸 착륙,정동극장 '모던정동'국립정동극장이 100년 전 모던걸을 만날 수 있는 연희극 '모던정동'을 선보인다. 국립정동극장은 2024년 예술단 정기공연 '모던정동'을 5월 1∼4일 초연한다고 8일 밝혔다. '모던정동'은 2024년을 살아가는 현대의 인물 '유영'이 100년 전 정동으로 돌아가서 당대의 모던걸 '화선'과 '연실'을 만나는 과정을 서서롤 담아낸 연희극이다. 이 작품은 전통과 서구문화가 착종되어 있던 근대의 예술을 춤과 음악으로 풀어내며 전통 연희의 범주를 확장한다.한국 창작 춤부터 찰스턴 스윙, 신민요춤, 레뷰 댄스까지 다채로운 장르의 춤이 펼쳐진다. 실제 근대 대중극장에 와있는 듯한 극중극 만담 장면과 재즈 음악이 함께하는 스윙 댄스 장면도 하이라이트다.근대 가요 '사의 찬미', 신민요 '봄맞이'와 '처녀총각', 만요 '그대와 가게되면' 등 당대의 유행가 뿐만 아니라 이에 영감을 얻어 이번 작품을 위해 새롭게 작곡한 음악들도 만나볼 수 있다. 100년 전의 정동 거리, 정동교회, 전차, 극장, 덕수궁 등 시대를 담은 콜라주 영상을 통해서 서사성을 집중적으로 높였다. 안경모 연출과 김가람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정보경이 안무를, 신창열이 작곡·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예술감독으로 참여한 국립정동극장 대표이사 정성숙은 "절망의 시기였지만 희망을 노래했고, 문화예술을 통해 새로운 꿈을 꾸며 현대의 밑그림이 된 1920~30년대 풍경을 춤과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며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의 복원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국립정동극장에서 선보이는 이번 신작에 많은 관심을 가져 달라"고 했다.정동극장은 가정의 달을 맞아 온 가족이 함께하기 좋은 이벤트도 마련됐다. 오는 5월4일 공연에 한해 정동 지역의 근대문화유산과 공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 '모던정동 한바퀴'에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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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가·흥보가·심청가·춘향가·수궁가, 5주간 '판소리 완창무대'소리의 고장 전북 전주시는 오는 13일부터 5주간 매주 토요일 우진문화공간에서 '판소리 완창무대'를 진행한다고 9일 밝혔다. 올해로 여덟 번째를 맞은 '판소리 완창무대'는 전주국제영화제 등 상반기 전주에서 열리는 다양한 행사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4∼5월 열린다. 시는 공개 모집을 거쳐 선정한 ▲ 보성소리 적벽가(소리 정윤형) ▲ 동편제 박록주 바디 흥보가(소리 장서윤) ▲ 보성소리 심청가(소리 신정혜) ▲ 김세종제 춘향가(소리 정승희) ▲ 정광수제 수궁가(소리 김미진)를 무대에 올린다. 시 관계자는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판소리를 전승하고 널리 알리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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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유산 ‘옥장’ 보유자로 김영희 씨 인정문화재청은 국가무형유산 ‘옥장(玉匠)’ 보유자로 김영희(金泳熙, 경기 파주시, 1959년생) 씨를 인정하였다. 국가무형유산 ‘옥장’은 옥으로 여러 가지 기물이나 장신구를 제작하는 기능 또는 그러한 기능을 보유한 장인을 말한다. 옥은 동양문화권에서 금·은과 함께 대표적인 보석으로 여겨지며, 사회신분을 나타내는 장신구로도 이용되었다. 희고 부드러운 옥의 성질이 끈기와 온유, 은은함, 인내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옥의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채석-디자인-절단-성형-세부조각(구멍뚫기, 홈파기)-광택의 과정을 거친다. 각 공정에 따라 절단 공구인 쇠톱, 구멍을 뚫는 송곳인 활비비, 연마기인 갈이틀 등의 여러 가지 도구가 사용된다. 이번 국가무형유산 ‘옥장’ 보유자 인정조사는, 지난해 공모 후 서면심사와 현장조사를 실시해 옥장의 핵심 기능인 투각 및 조각하기, 홈내기 등의 기량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김영희 씨는 현재 시도무형유산 ‘옥장’ 보유자로 인정된 장인으로, 1970년에 김재환 선생의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기능을 전수받아 53년 동안 옥 가공 기술을 연마하였다. 현재 국가무형유산 ‘옥장’ 보유자는 1명이며, 이번에 보유자가 추가 인정됨에 따라 향후 전승 현장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재청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전승자 충원을 통해 전승기반을 확충하고, 대국민 문화향유의 토대를 강화해 나가는 적극행정을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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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문화재단 ‘화성시 예술단’ 단원 공개 모집화성시문화재단이 2024년 ‘화성시 예술단’을 이끌어갈 신규 단원을 모집한다. ‘화성시 예술단’은 지역 내 문화 균등 발전과 지역민의 고품격 문화향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화성시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사업이다. 올해 새롭게 명칭을 변경한 ‘화성시 예술단’은 화성시의 대표 연주 단체로 활동을 시작한다. 특히 올해는 퓨전국악 장르의 신설로 보다 다채로운 공연을 선보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공개 모집의 정원은 총 47명으로 관현악, 퓨전국악 2개 분야의 예술단원과 음악감독, 코디네이터를 모집할 예정이며, 화성시에 거주 중인 시민 중에서 자격을 갖춘 자라면 누구나 지원 가능하다. 최종 합격자는 오는 5월 20일부터 약 7개월간 ‘화성시 예술단’의 단원으로 근무하며 기획공연과 화성시 대표 행사 및 축제에서 다양한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김신아 화성시문화재단 대표이사는 "역량 있는 예술인들의 많은 지원을 바란다”며 "화성시 예술단을 통해 시민들에게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예술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모집 접수는 4월 11일(목)부터 19일(금) 오후 6시까지며, 지원 희망자는 화성시문화재단 홈페이지(www.hcf.or.kr) 내 채용 공고를 확인해 이메일로 응시원서를 접수하면 된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화성시문화재단 문화사업팀으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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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9) <BR>김세중의 한국민속가면무극 춤사위 발표회1969년)멍석 위에서 민속극에 뜻을 둔 이래 가장 절실했던 것은 둔한 몸을 가지고 직접 춤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생활의 분신의 하나인 전통 민속극과 좀처럼 사귀어지지 않았던 불행스런 이유가 내편에 있음은 내자신이 그 앞에 자칫 생소한 손님으로 때로는 우리극 자체가 엉뚱하고 별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게 했던 흥분한 나의 눈에 기인되었기 때문이다. 춤이 꼭 그렇게 만들어져야 했던 사회적 여건 시대상을 비롯한 절실한 생활의식들을 담고있는 우리 무소(舞 素) 속에는 우리의 모든 역사의 분자들이 집약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대다수 서민들의 생활감정을 밑바탕으로 가장 빨리 흡수하고 가장 빨리 내어 뱉으면서도 자기것을 익혀 만들 어간 몸짓이 바로 디딤과 벌림의 '덧뵈기춤'이라고 본다. 몸 마디마디의 멋(神)을 감고 또는 모으고 또는 꺾고 매쳐서 베긴것을 풀어 내거나 뿌리면서 중심을 잃은 듯한 춤짓들이 여유있게 디뎌가며 벌려나가는 것이 그 특징이 아닌가. 몇 평 안되는 마당에서 좁은 논두렁길 언덕바지에서. 꼬불꼬불 산길 따라 논뚝따라 애환과 갈등들을 질라서 보릿대춤으로 달래며 짓이겨가면서 숨차게 염원했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그 속에 엉켜있는 것이다. 춤을 익혀주신 네 분의 연로한 스승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그분들의 숙련된 춤사위와 서투른 자신의 모습을 보 여드리며 지극히 지루하나마 조잡히 깨여져가는 어설픈 현대화에 탈춤의 정직한 자료로서 내놓은 것이다.(김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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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79<BR>국악의 날 지정을 위한 제언(6)-정간보와 오음악보국악의 전통 악보에 대한 내용이 어렵다고 하여, 지난 회에서는 ‘정간보’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하였다. 이후 국악을 전공하시는 여러분의 선생님께서 댓글을 보내주셨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어렵게 느껴졌던 내용들이 좀 더 설명이 쉬어지고 보완되었다고 생각하셨는지 격려의 댓글을 보내주신 것으로 보인다. 그 댓글의 내용 중 두 분의 것만 간단히 소개하겠다. 먼저, 단국대학교 국악과 명예교수이신 이상용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댓글을 소개하겠다. "박교수, 좋은 글 잘 읽고 공부도 많이 하고 있어, 박교수가 자랑스러워, 고마워요”라고 보내주셨다. 또 한분은, 전통가곡 분야의 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이신 조순자 선생님이 보내주신 댓글이다. "(전략) ~~ 아마도 훈민정음 이해하기처럼 정간보도 지극히 간결하고 쉬운 우리 음악 표기 방법임을 먼저 기초부터 알려야 할 듯합니다. 힘내셔요.”라고 역사적 사실까지 언급하시면서 자세한 말씀을 해주셨다. 이상용 선생님은 필자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재학 중 전공악기인 대금 지도교수님이셨다. 국립국악고등학교의 교사를 거쳐서 단국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셨다. 학문적으로나 인품 또한 외유내강 형으로 모든 제자들이 흠모의 대상으로 삼으며 존경하는 국악계의 큰 어른이시다. 가곡 전수관 관장이신 조순자 선생님은 국가무형문화재 가곡 예능보유자이다. 우리 국악계에서 이와 같은 명칭을 갖게 되면 통상 ‘명인(名人)’이라는 존칭을 사용한다. ‘조순자 명인’이라고 부른다. 평생 전통가곡(歌曲)만 60여 년을 부르며 지켜온 조순자 명인은 화관문화훈장과 각종 상을 많이 받았고, 80세에 가까운 요즘에는 가곡 반주악보인 관현악 총보를 마무리하여 곧 세상에 발표할 것이라는 포부를 들려주셨다. 두 분 선생님의 지적과 격려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더욱 자상하고 겸손한 집필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참고로, 전통가곡은 2010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다. 한편, 전통가곡과 시조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왜냐하면 가곡과 시조는 노래스타일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일반인들은 그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그렇다면 가곡과 시조의 차이는 무엇일까? 잠깐 살펴보겠다. 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형식으로서 장고반주만으로 노래한다.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대중음악이다. 그러나 가곡은 5장 형식으로서 [대여음, 1장, 2장, 3장, 중여음, 4장, 5장, 대여음]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쉽게 표현하면, [전주, 1장, 2장, 3장, 간주, 4장, 5장, 후주]의 5장 형식으로 연주한다. 그리고 가곡은 피리, 대금, 가야금, 거문고, 해금 등의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노래한다. 여기서 중여음과 대여음을 연주할 때는 노래는 쉬고 반주만 연주한다. 그리고 대여음은 5장 다음의 후주로 연주하지만 노래 시작하기 전에 전주로도 사용한다. 노래가사는 가곡과 시조 모두 동일한 노랫말을 사용하지만, 노래 선율은 가곡이 한층 예술성이 높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가곡은 전문가들의 음악이라고 한다. 한편, 현재 불려지는 전통가곡은 학설에 의하면 고려가요인 ‘정과정’이라는 곡이 효시라고 한다. ‘정과정’은 향가 계열의 고려가요로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계승된 대표적인 노래이다. 원래 평민들에 의해 불려졌던 ‘정과정’과 같은 고려가요는 한글이 창제되고 악학궤범이 만들어지면서 궁중음악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러면서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의 악보에 고려가요들이 실리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왕실 주관으로 악보를 만들게 된다. 여기에서, 정간보인 『시용향악보』와 ‘오음악보’와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하겠다. (「한국음악의 구기보법(舊記譜法)」 장사훈 논문 참조)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는 동양최초의 유량악보(有量樂譜)이다. 즉 서양악보인 오선보의 기능과 같이 ‘정간보’는 정(井)자 모양의 칸 안에 음이름을 적어 기보 하는데, 칸은 음의 길이, 음이름은 음의 높이를 나타내도록 창안하였다. 그리고, 정간보라는 악보 형식에 음의 높이와 음의 길이를 표기한 악보를 "오음약보(五音略譜)‘라고 부른다. ‘오음약보’는 주로 5음음계의 음악을 표기할 때 사용되었다. 기본음(으뜸음)을 중심으로 위 쪽의 음 높이는 上一, 上二, 上三, 上四, 上五, 아래쪽의 음높이는 下一, 下二, 下三, 下四, 下五의 방식으로 음의 높낮이를 표시했다. 그리고 그 음 옆에 가사를 적어 넣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악보가 바로 『시용향악보』인 것이다. 그런데, "시용향악보”는 ’오음악보‘로써 고려가요를 수록한 악보이지만, 성종 때(이동복 석사 논문, 참조) 만들어진 악보여서인지 세종 때보다는 좀 더 진화된 악보 표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음의 높이뿐만 아니라, 上一, 上二, 上三 ~ ~, 등의 음 옆에 ’음길이‘와 ’리듬‘도 가끔 보이고 ’가사‘도 씌어 있다. 그리고 장고 반주 악보까지 보인다. "시용향악보”의 고려가요 악보를 자세히 보면, 上一, 上二 등의 음정 옆에 장고반주인 고(鼓), 요(搖), 편(鞭), 쌍(雙)의 글씨가 세로로 보이고, 박(拍)이라는 글자도 보인다. 다음 회에 이 용어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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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회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 대상에 차지혁대한무용협회는 제61회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 대상 및 한영숙상 수상자로 현대무용 '메모리 오브 센스'를 선보인 차지혁(한국예술종합학교)을 선정했다고 8일 밝혔다. 신인 무용인들의 등용문으로 통하는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는 한국전통무용, 한국전통명작무, 한국창작무용, 현대무용, 발레 부문으로 나눠 진행된다. 올해는 총 224명이 참가했으며, 예선을 거쳐 지난 5일 영등포아트홀에서 96명이 본선을 치렀다. 차지혁은 각 부문 금상 수상자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둬 올해 대회 최고의 무용수로 선정됐다. 올해는 발레연구학회 후원으로 발레 부문에 홍정희상이 신설됐으며, '에스메랄다'를 선보인 김은서(경희대)가 수상자로 뽑혔다. 한국창작무용 부문에서 최고 점수를 받은 이에게 수여되는 송범상은 양기성(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전통명작무 부문 최고 득점자에게 주어지는 김진걸상은 윤주현(경희대)에게 돌아갔다. 부문별 금상 수상자는 아래와 같다. ▲ 현대무용 여자부문 임재령(경희대) ▲ 현대무용 남자부문 차지혁(한국예술종합학교) ▲ 발레 여자부문 김은서(경희대) ▲ 발레 남자부문 이수현(서울발레씨어터) ▲ 한국전통명작무 부문 윤주현(경희대) ▲ 한국전통무용 여자부문 김채린(장인숙 희원무용단) ▲ 한국전통무용 남자부문 윤형서(한국예술종합학교) ▲ 한국창작무용 여자부문 이선영(경희대) ▲ 한국창작무용 남자부문 양기성(한국예술종합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