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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42<BR>아리랑의 어원기미양 / 아리랑학회 이사 2012년 유네스코 아리랑 인류무형문화유산 신청서에 제시한 아리랑의 종류는 ‘50여 종’이다. 이 숫자는 김연갑이 1986년 발행한 ‘민족의 노래 아리랑’에서 제시한 이후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어느 기록에서도 50여 종의 구체적인 곡명을 제시한 바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숫자가 갖는 진의는 누구도 정확히 제시할 수 없음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셀 수 없다(uncountable)’또는 ‘셀 필요가 없다’(Can not cell)는 말이 된다. 시간이 감에 따라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특이성에서 종류도 셀 수 없이 많고 기원설(起源說)이나 어원설(語源說)도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런 배경에는 아리랑만의 독특한 성격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문화재청 아리랑 해설 게시문에 따르면 "후렴에서 ‘아리랑’이나 ‘아리’ 또는 ‘아라리’를 고정적으로 사용하는 노래”라고 규정하였다. 이런 형식의 노래는 전통민요뿐만 아니라 통속민요, 더 나아가 대중가요와 가곡은 물론, 해외 교민들이 작창(作唱)하여 부르거나 외국인들이 창작한 외국어 버전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장르의 아리랑 후렴에는 아리랑, 아리, 아라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밀양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의 후렴에서 그 전형(典型)이 확인된다. 아리 아리랑 서리 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 응- 응-아라리가 났네(진도아리랑 노래비)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밀양아리랑 노래비) 이런 실상에서 ‘아리랑’은 후렴에서 ‘아리’와 ‘아라리’와 함께 나타난다. 이런 사실에서 역사나 어원에 접근할 때는 이들과의 관계를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관계는 어감이 비슷한 것에서 뉘앙스 정도만 다른 것일까? 아니면 속뜻이 같은 것일까? 전자라면 ‘아리랑’만이 대상이나 후자라면 각각의 의미와 변이 관계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아리랑에 대한 학술적 접근이 시작된 것이 1930년대, 연구 성과가 있게 되는 시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데, ‘아-리-랑’ 3음절의 음가(音價)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성과에 머물렀다. 국문학계 양주동이 그랬고, 역사학계 이병도가 그랬고, 민속학계 서정범과 임동권 역시 기존 연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지만, 오늘의 3음보 2행의 후렴 형성은 17세기 들어 이양법(移讓法)의 일반화로 논농사 작업환경의 형성에 따라 선후창(先後唱)의 필요성에서 조흥소(助興素) 강화로 ‘ㅇ’음이 첨가된 결과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리랑’이 고유한 술어나 곡명이 아니라 ‘아리’의 2음절에서 안정적인 3음절 ‘아라리’로의 변이, 다시 조흥 음소 ‘ㅇ’의 첨가로 형성된 것이란 말이다. 이의 증거 사료는 1912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전국 대상 민속조사보고서에서 확인이 된다. 한일합병 후 민정 파악을 위해 실시한 ‘통속적 독물 급 리언 리요 조사에 관한 건’(通俗的 讀物 及 俚諺 俚謠 調査 關件)의 아리랑 관련 자료를 정리하면, 이는 경복궁 중수 공사(1865~1872) 시기 유행한 노래 아리랑을 부역(賦役)꾼으로 참가한 이들이 고향에 돌아와 확산시킨 현상이다. 이 자료에 조사된 아리랑 후렴에는 다음과 같이 20여 종이 도출된다. ①아리랑歌 ②阿朗歌 ③아리랑打令 ④酒色界의 雜歌 ⑤어르렁타령 ⑥아르렁打令 ⑦어르렁타령 ⑧啞而聾打詠 ⑨아리랑타령 ⑩啞聾歌 ⑪阿朗歌 ⑫아르랑타령 ⑬아르릉타령 ⑭啞利聾打令 ⑮아리랑타령 ⑯어르렁打令 ⑰愁心歌 ⑱아르렁타령 ⑲아르랑打令 ⑳아르랑歌 이상과 같이 표기(表記) 상의 곡명은 총 18가지이다. 정리하면 곡명과 후렴에서 오늘의 음가 ‘아리랑’을 쓴 경우는 네 가지(① ③ ⑨ ⑮)다. 이는 비로소 이 시기부터 ‘아리랑’이 중심 술어로 합의를 얻어가고 있는 단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자를 혼용한 것이 13가지, 곡명에 ‘가’(歌)를 쓴 것이 7가지이다. 이는 조사 당시 실제 제보자의 응답이 아니라 이를 기록한 문식 있는 조사자들의 개입 결과일 수가 있다. (실제 기록상의 조사자는 당시 전국 지역 교원들이었다.) 곧 수집과 보고 단계에서 조사자의 수정·가필(加筆)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아리랑의 곡명이 당시 지역마다 다르게 불렸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아리(르)’+’렁’/‘롱’/‘랑)’ 등의 단일화 단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오늘의 음가 ‘아리랑’은 1910년부터 SP 음반으로 발매되어 대중적으로 보급된 1920년대 초에 정착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어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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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Br> 고개의 나라, ‘아리랑고개’도 있다!고개는 산을 모태로 한다. 산의 허리 부분에 있는 고개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거나 가장 편리한 길이다. 마을과 마을을 질러갈 수 있기에 인적자원이나 물자가 넘나들고 군사적 관문 구실도 한다. 그래서 고개 입구에는 소위 수위도시(首位都市)로 발전시키는 복합기능의 관문취락(關門聚落)이 있거나 소도시를 견인하는 수안보와 문경 같은 영하취락(嶺下聚落) 같은 형태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를 ‘산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은 곧 ‘고개의 나라’라고 하는 말과 같다. 우리는 산을 신성시하여 고개마루쯤에 성황당이나 장승을 세워 양편 주민들을 문화적으로 연결시켰다. 당연히 방언·가옥구조·생활양식 등 문화권 설정에 있어 자연적인 경계를 이뤄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시켜왔다. 이 같은 우리의 자연조건 덕에 적어도 어느 자연 마을이라도 고개한 곳은 갖고 있다. 집에 가려면 고개 하나는 넘어가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니 그 이름도 많게 되었다. 고개·재·목·퇴·티 같은 순 우리 말이 있는가 하면 한자어로 고개 령(嶺), 고개 상(峠), 우뚝 솟을 치(峙), 고개 재/점(岾), 고개 현(峴)과 같이 뫼 산(山)을 변으로 쓴 한자어가 있게 되었다. 이 중에 ‘치’는 주로 영남 지방에서 쓰이는데, 울치(蔚峙)·율치(栗峙) 팔량치(八良峙)와 같이 하나의 접미어로 이루어진 지명이다. 이에 비하여 관북지방에서는 치에 ‘령’을 중복으로 썼다. 후치령(厚峙嶺)·주치령(走峙嶺)과 같은 용례가 있다. 그리고 두 가지 이상을 같이 쓰는 곳도 있다. 문경새재의 경우인데 조령(鳥嶺)과 초점(草岾, 억새풀 고개)과 함께 ‘새재’를 함께 쓴다. ‘조령’은 ‘새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이고, ‘초점’은 ‘억새풀이 많은 고개’라는 뜻이고, ‘새재’는 죽령과 추풍령 사이의 ‘사이 고개’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고개의 이름이 만들어지는 데는 주목되는 몇 가지 패턴이 있다. 그것은 고개 너머에 있는 지역 이름을 써서 정한다는 사실이다. 의왕시 학동에 있는 ‘오매기 고개’와 ‘의일 고개’의 예인데, 고개 양편의 의일 지역에서는 ‘오매기 고개’로 불리고, 오매기 지역에서는 ‘의일 고개’로 부른다는 점이다. 이는 고개를 넘어오는 곳이기보다는 넘어가는 곳으로 인식한 결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명분을 단 이름이 생기면 그 두 가지를 함께 쓴다는 점이다. 강원도 진부 ‘헌터골 고개’와 ‘전우치 고개’의 예인데, 헌터 고개로 불리던 것이 고전소설 <전우치전>의 주인공 전우치가 넘나든 고개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전우치 고개’로 더 많이 불리는 경우다. 이는 자연 지명을 쓰다가도 사연과 명분의 이름이 생기면 이를 더 많이 쓰게 된다는 경우이다. 마지막은 우리말 이름과 한자식 표현을 함께 쓰기도 한다는 점이다. 강원 이북지역 고개 이름 중에 ‘구리 고개’ 또는 ‘동현(銅峴)’이라는 지명이 많은데, 이는 구리 광산 일대의 고개를 우리말과 한자식으로 표현한 예이다. 이는 문헌 기록과 현지의 표현이 공존하는 경우의 예인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고개 이름도 있다. 많고 구구한 고개 이름 중에는 지명이 아닌 노래 이름을 쓴 경우가 있다. 바로 ‘아리랑고개’이다. 어떤 고개보다도 유명한 고개일듯한데, 앞에서 살핀 고개 작명(作名)의 패턴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리랑고개’는 어떻게 해서 탄생한 이름일까? ‘아리랑’의 어원설이 ‘백인백설(白人百說)이듯이, 이 ’아리랑고개‘의 작명 배경도 그럴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배경에 대해 궁금해했다는 점이다. 아리랑 속의 고개, 고개를 노래하는 아리랑으로 다가가 본다. ①문경새재는 왠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고나 (진도아리랑)②아리랑 고개는 왠 고갠가 넘어갈적 넘어올적 눈물이 난다 (해주아리랑) ③문경새재 넘어갈 적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문경새재아리랑)④아리랑 고개는 열두나 고개 넘어갈적 넘어올적 눈물이 나네 (서도아리랑) ⑤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북간도아리랑)⑥울며 넘던 피눈물의 아리랑고개 한번 가면 다시 못올 탄식의 고개 (기쁨의 아리랑)⑦아리랑 고개는 혁명의 고개 (김산아리랑)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⑧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서 백두산 고개를 넘어간다 (영일아리랑) ①~③은 문경새재와 아리랑고개가 어떤 고개인가라고 묻는다. 세 고개는 같다고 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고개’라고 한다. ④에서 아리랑고개는 구비가 많은 ‘열두 구비의 고개’라고 한다. 곡절(曲折)이 서리고 서렸다고 한다. ⑤와 ⑧은 살길을 찾아 남부여대하여 북간도로 가는 국경이 아리랑고개라고 한다. ⑦은 혁명의 고개가 바로 아리랑고개라고 단언한다.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이란 기치가 어른거린다. 이렇게 볼 때 아리랑 스스로가 묻고 답한 아리랑고개는 일단 ‘눈물’(피눈물), ‘탄식’, ‘쓰라림’이 수식하는 고개로, ‘쓰라린 가슴으로 울며 넘는 고개’인 것이다. 결국 ‘아리랑의 고개’ 또는 ‘고개에 서린 아리랑’은 이별과 만남의 정한(情恨)이 서린 우리들의 정서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하게 되는 것은 위의 아리랑에서 구체적인 지명을 들어 아리랑고개라고 한 것이 ①과 ③이다. 그 구체적인 지명이란 경상북도 문경과 충주 사이를 잇는 ‘문경새재’로서 이 고개가 아리랑고개라고 한 것이다. 비록 은유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민중의 사심 없는 소리’라는 민요의 진정성에서 이런 정도의 표현은 사실에 부합될 것이다. 곧, "아리랑고개는 문경새재에서 비롯된 것이다”로 이해하게 한다. 이에 1896년 미국 선교사 H. B.헐버트가 채록한 대표 사설은 다음과 같다. "On SaiJai’s slope in Mun-gyung town/ We hew the paktal namu down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이 기록은 후렴과 곡조를 부기(附記) 한 아리랑 기록으로는 현존하는 문헌 중 최초라는 점에서 신빙(信憑) 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확인한 이 같은 결론에 대해 사실은 이미 1955년 승려 시인 유엽(柳葉,1902~1975)이 1955년 이미 ‘민요 아리랑에 대한 私考’라는 글을 통해 제시했다. 오히려 단정적인 표현이 아니기에 더욱 동의하게 된다. "고개라는 말이 공교히 곡조(曲調)의 곡자(曲字)를 ‘구비’라고 해서 고개를 연상하게 하고, 또 자연계의 ‘재’(嶺)라는 말과 통할 뿐만 아니라, 구비와 재는 돌거나 넘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경험적 기억회상작용(記憶回想作用)에서 이별의 한(恨)을 또 한 번 연상하게 함으로써 ‘문경새재’ 같은 험준하고 불상사가 많던 이야기를 빚어낸 자연계의 지리적 고개를 끌어다가 아리랑 고개인 한과 정의 정신적 고개와 결부시킨 것은 작시기교(作詩技巧)로써 있을 수 있는 ‘멋’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랑고개는 문경새재에서 비롯된 시어(詩語)이다. 만일 이 ‘아리랑고개’라는 시어가 없다면, 과연 우리는 아리랑을 이처럼 가까이 불러왔을까? 온갖 상상을 허용하는 이 ‘고개’, ‘아리랑고개’를 창출한 우리 조상들은 대단한 창조적 시심(詩心)을 소유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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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br>아리랑과 천주교의 만남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는 ‘은이(隱里) 성지’가 있다. 천주교회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목한 본당이며 순교 후 유체의 이장 경로이기도 하다. ‘은이’라는 지명은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천주교 박해 시기 숨어 살던 신자들의 교우촌이었다. 여기에는 ‘삼덕(三德)의 길’이라는 고갯길이 있다. 세 개의 덕(德)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하나는 신덕(信德)고개 ‘별미 고개’, 둘은 망덕(望德)고개 ‘해실이 고개’, 셋은 애덕(愛德)고개 ‘거문정 고개’길을 말한다. 오늘에도 인적이 드믄 산길이 포함되어 있는데, ‘120 나무계단 길’과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 때 호랑이도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는 ‘기적의 길’로 불리는 곳도 있다. 그런데 첫 신덕고개인 ‘별미 고개’에는 뜻밖에도 ‘아리랑’비(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천주교 초기에 아리랑이 신앙공동체에서 불렸음을 추정하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 결속과 포교를 위해 민중의 노래를 불렀다고 본다. 이 비에 새겨진 가사가 당시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만한 유래를 담보했기에 노래비로 새겨졌다고 보게 된다. 김진용 작사의 전체 8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리랑 주님을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후렴구) 천진암 강악회 진리탐구/반만년 어둠속에 동이 트네 청천 하늘에 잔별도많고/천주교 이백년 박해도 많다 심한박해 모진고충 이겨내고/참된신앙 물려주신 순교자여 금자로 발길재는 천사를 보라/격려하며 순교의길 가신님이여 희광이칼 여덟번째 목숨바치고/천당영복 면류관을 쓰신님이여 순교유해 쌓고쌓여 주춧돌되고/순교선혈 흘러흘러 밑거름됐네 한알의 밀알이 이백년썩어/오백만의 열매가 주님찬미해 제1절에서는 상하 계층 없이 사방팔방의 모두가 알고 있는 아리랑의 대표사설을 통해 곡조를 제시했다. 2절은 광주 퇴촌의 천진암(天眞菴)에서의 강학회(1771년 자산 정약전 3형제와 만천 이승훈 등의 천주교리 연구모임) 사실을 말하여 천주교 역사를 제시했다. 3절은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네 차례의 박해를 통해 천주교의 수난사를 나타냈고, 4, 5절은 성스런 순교사를, 6~8절은 신앙 승리의 역사를 찬양했다. 이 가사 천체를 보면 3절과 8절에 ‘이백년’이 있어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으로 작사하여 노래비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20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고, 천주교 신약성서 자체 번역본을 발행하였으니, 이 아리랑 작사도 그만큼 의미를 두어 비로 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 역사와 아리랑은 어떻게 만났을까? 현재 밝혀진 아리랑 자료로는 1823년(道光3년) 청석거사(靑石居士) 필사본 ‘佛說明堂아리랑’이란 기록물에서 1839년 천주교 기해박해 전후에 불렸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문헌자료는 민간신앙에서 수용한 일종의 무경(巫經)으로 "제석천황 관제멸 대범천황 오액명/아라리 사라리 아리사리 아리랑” 같은 사설에서 알 수 있듯이 수명과 복록을 기원하며 아리랑 후렴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아리랑의 보편성을 이용하여 무경의 보급을 용이하게 할 방편으로 수용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주교 교인들도 우리의 전통 시가인 가사체(歌辭體)를 수용하여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어 교리를 전파했듯 민요 아리랑의 형식도 수용했을 것은 분명하다. 천주교인들이 사찰인 천진암을 거점으로 한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통문화를 수용하여 교리전파에 활용하는 것은 포교의 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초기 교회사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확인되기도 했다. 1967년 8월 27일자 ‘가톨릭시보’에는 ‘만천유고(蔓川遺稿)’라는 필사본 문집 발굴에 관해 보도가 있었다. 김양선 목사의 수집으로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 베드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알려진 바대로 이승훈은 1784년 2월에 북경에서 예수회 신부 그라몽(L. DE. Grammont)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돌아와 활동하다 1801년 신해박해 때 순교한 인물이다. 이 책에는 천주가사와 기타 잡기(雜記)가 있고, 중간에 이벽·정약전·이가환 등 초기 천주교 인물들이 남긴 글들이 있고, 이어서 ‘만천시고(蔓川詩藁)’에서 한시 70수가 수록되었다. 바로 이 시고 중 ‘農夫詞’란 작품에 ‘아로롱 아로롱 어히야’라는 기록이 있어 주목하게 된다. 7언절구 한시 변형체로 내용상 1790년 평택현감 시절에 쓴 것으로 보인다. 논농사와 관련한 내용에다 ""경술년이농청서농기고작”(庚戌年里農請書農旗故作)이란 주(註)가 있어 알 수 있다. ‘농부사’ 일절을 인용한다. 神農后稷이 始耕稼하니 自有生民爲大本이라 鐘鼓울려라 鐘鼓울려라 簿言招我 諸同伴 啞魯聾 啞魯聾 於戱也 (蔓川詩藁) (신농후직이 처음 밭을 갈고 김을 매니 민생을 그 근본으로 삼았네 징과 북을 울여라 징과 북을 울여라 잠깐 말하노니 우리의 모든 짝을 부르세 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啞魯聾 啞魯聾 於戱也’ 표현은 ‘아로롱 아로롱 어히야’로 아리랑 후렴의 한 형태가 분명하다. 이 시기 아리랑은 ‘아로롱’, ‘아라렁’, ‘아라성’ 등 다양한 음가(音價)로 표기가 되었으니 ‘아로롱’도 그 이칭(異稱)의 하나이다. 그리고 ‘於戱也’(어희야)는 1896년 미국 선교사 H. B. 헐버트가 기록한 ‘KOREAN VOCAL MUSIC'에 "아라렁 어얼싸 배띄어라”라고 한 후렴 ’어얼싸‘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천주교 초기 인물 이승훈이 아리랑을 수용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초기 천주교 신앙공동체에서도 아리랑이 포교를 위해 향유되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200주년 기념으로 새로운 아리랑이 창작되어 비로 세워지게 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정조년간에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西學)은 단순한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점차 뛰어난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러 하나의 실천학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드디어 그리스도 신앙으로 귀의(歸依)해 가게 하였다. 이 때 민중의 노래 아리랑도 향유되었다. 어떤 공동체에게도 아리랑은 결속력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획득하게 하는 노래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나 만날 수밖에 없는 노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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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br>‘2005’의 아리랑<13><br>정선의 아라리 전승기층(3)아리랑의 특성을 다음 네 가지로 말하기도 한다. "3음보 2행 노래말에 두 줄 후렴으로 된 쉬운 노래라는 ‘형식의 용이성(容易性)’, 한반도 전역은 물론 해외동포가 거주하는 곳에서도 널리 불리는 ‘전승의 광역성(廣域性)’,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 오며 다양한 생활상을 담아 불러오는 ‘기층의 견고성(堅固性)’, 거의 모든 계층에서 향유하는 결과로 사설이 대체적으로 많다는 ‘사설의 적층성(積層性)’, 각 지역의 전형적인 음악어법으로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게 한 ‘탁월한 보편성(普遍性)’이 아리랑의 특징이다.”(김연갑, 제2기 아리랑학교 교재, 2019년) 이중에 ‘기층의 견고성’과 ‘사설의 적층성’은 정선아리랑의 강한 특징임으로 주목이 된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기원설화이고, 한시형 사설의 존재이다. 기원설화는 정선군 조양강 녹송공원에 있는 ‘도원가곡(桃源歌曲)’ 비문을 통해 확인된다. 비문의 주제는 고려 유신 7인이 "벙어리처럼 말을 삼가고 배고픔을 견디며 오로지 충의를 밝히자”는 시편(詩篇)을 남겨 정선아리랑 사설로 불리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도원가곡’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배경을 새겨 놓았다. "崔文漢公의 後孫인 崔燦霽氏가 大田에서 木板 拓本을 入手하여 정선문화원장 崔文圭에게 보내온 資料에 의하여 建立했음”(문안정리 延圭漢 글쓴이 許由 새긴이 金鎭榮) 비 전면에는 ‘도원가곡’ 20자가 새겨져있다. 이 시를 함께 부른 이들 7현을 이색(李穡), 최문환(崔文煥), 전오륜(全五倫), 서진(徐진), 원천석(元天錫), 구홍(具鴻), 길재(吉再)라고 기록했다. 일곱 사람이 함께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원문과 이에 대한 훈, 사설, 해석은 다음과 같다. "我羅理 啞曪肄 餓㦐彛要/皒義朗 古稽露 懶慕艱多” 이를 음에 따라 표기하면 이렇다. 오늘의 후렴임이 틀림없다. "아라리 아라이 아라이요/아의랑 고계로 뢰모간다” 이 후렴을 풀이(훈)하면 다음과 같다. "벙어리 읊조리는 심정 누가알리오/굶고 주려도 떳떳한일 절의를 즐기며 고려 기리면서/온갖 고생 이겨내세" 다음은 비 후면에 새겨진 정선아리랑의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대체적으로는 ‘두문동 72현’ 설화이다. "왕사(王社)가 이미 헐어 졌으니 칠십자는 마냥 슬프도다. 일찍이 조관(朝冠)을 남산 송림에 벗어 걸었는데, 그 산을 괘관현(掛冠峴)이라 이름하였다. 지금 우리들은 명세(名勢)를 감추고, 종적을 거두어 멀리 시골 산중에 내려 왔다. 갓도 안 쓴 채, 시가 걸식 할망정, 이 집을 송방 (松房) 이라 이름하였다. 동학사(東鶴社)에 단사(壇社)를 모셔 놓고, 선왕의 향례(饗禮) 를 꼭 지키는 것은 고려왕의 전통을 지키겠다는 집념 이며, 왕을 모신 곳을 도경궁촌(桃京宮村) 이라 한다. 하느님의 뜻과 백성의 인심이 이미 옮겨졌으니, 이 일을 장차 어찌 할 것인가 . 왕손을 보호하며 고복(高福)이라 부르지만, 고려산 고려동(高麗山 高麗洞)의 왕대(王垈)와 왕촌(王村)은 너무나도 고도(孤島)와 같구나. 자나 깨나 불안한 마음은 사찬(沙粲, 신라 문무왕 때 충신) 을 본 받아 전왕을 잊지 않을 것이요, 화해 (華海, 고려인으로 조선조 명신이 됨)의 간교한 꾀는 끝내 실패할 터이지만, 어찌 아픔의 한이 없을 수 있으리오.” 이 내용은 기존의 정선아리랑 시원설과 닿는다. 1974년 '정선아리랑 가사집' 범혁 등에서 제시한 정선 7현 설화와 같다는 말이다. 정선아리랑에는 고려말의 역사적 사실들이 적층되었고, ‘눈이 올라는 비가~’라는 사설과 같은 한시형 사설로 기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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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br> ‘2005’의 아리랑<12><br>정선의 아라리 기층(2)정선의 아라리 기층을 논의하는 지난 회에서는 정선과 그 이웃 지역이 동일한 자연적 조건이었음을 전제했다. 즉, 오늘의 전형성이 형성되기까지는 ‘아리 시대’, ‘아라리 시대’, ‘아리랑 시대’를 거쳐 왔고, 메나리토리 노래가 형성되어 확산될 여건은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 계곡이라는 공통 조건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메나리토리 노래의 출처를 특정할 수 없음으로 ‘발생(상)지’라는 용어 보다는 ‘전승 중심지’와 ‘전승 주변지’라는 용어가 적절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지는 기층성의 특수성을 파악하여 중심지를 추정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른다면 정선지역이 ‘전승 중심지’이고 영원 평창 태백 강릉 지역이 ‘전승 주변지역’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선지역이 전승 중심지라고 추정한 근거인 ‘기층성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 회에서는 이를 논의하기로 한다. '정선아라리' 또는 '정선아리랑'의 전형성(典型性) 형성은 정선지역에서 ‘정선아리랑’이란 종목명을 일반화 한 시기인 1970년을 전후한 시기이다. 정선인들이 선율과 사설의 다양성과 평등성을 반영한 기록물 출판활동 및 제도적 전승책을 마련한 시기가 이 때이기 때문이다. 기록물은 1968년 사설집 「旌善아리랑」 발행, 1972년 음반(신진레코드사)발매, 1978년 군지(郡誌)를 발행하고, 1976년 ‘정선아리랑제’를 개최하여 확산시켰다. 또한 주산 비봉산 중턱에 <정선아리랑비(碑)>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제도적 전승체계를 확립하는데, 1971년 ‘정선아리랑’이란 종목명으로 도지정 문화재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하였다. 이런 기록과 전승 실천에서는 역사성을 반영했고, 전형성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 확인되는 정선아리랑의 전형성은 다음 몇 가지로 규정할 수 있다. 하나는 음조가 메나리조이다. 둘은 여음구(후렴구)를 먼저 부른다. 셋은 대표사설을 "눈이 올라나~”로 부른다. 일반적으로 독창이다. 마지막은 소리판에서 간헐적으로 엮음아리랑을 이어 부른다. 이는 오늘의 정선아리랑 형태인 것이다. 이런 전형성 확립 현상은 동시대 정선과 다른 주변 지역과는 다른 정황이다. 이는 다른 지역에는 없는 역사성을 기재로 하고 있다. 즉, 고려말 이성계에 의해 역성혁명이 있게 되자 일부 선비들이 출절을 지키기 위해 관직을 버리고 정선 거칠현동으로 들어와 은거하게 되었다. 이들은 시운을 한탄하며 쓰라린 회포를 달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노래는 정선인들이 불러오던 곡조에 자신들의 신세를 표현한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라는 내용의 노래다. 이를 계기로 널리 불리게 된 것이 오늘의 정선아리랑 역사라는 주장이다. 바로 이런 역사가 서려있기에 정선의 아리랑이란 뜻이 담긴 ‘정선아리랑’이란 이름으로 전승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역사성을 반영한 전설은 다음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시기는 500여년 전 고려말, 관직을 지낸 7인이, 정선군 남면 거칠현동으로 와 은거, 이들이 고려왕조를 회고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노래가 정선아리랑의 역사(시원)를 이뤘다는 것이다. 이런 옛 지명인 ‘도원(桃源)’이 1291년(고려 충렬왕 17년)정해지고, 다시 현재의 지명 ‘정선(旌善)’이 1353년(고려 공민왕2년) 형성된 시기임으로 고려왕조와는 각별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역사성은 1980년대 초 정선 유지(有志) <전태화 정선의원장 면담조사 자료> 등을 바탕으로 한 관련 기사나 2006년 발행된 김연갑의 「아리랑 시원설 연구」에서 다각적으로 논의되었다. 이런 논의에서 곡명을 ‘정선아리랑’으로 쓰게 된 기제가 역사성임을 밝히기도 하였다. 이제 위에서 제시한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 "정선아리랑이 이 고장에서 처음 불리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5백여년전인 이조초기라 전한다. 당시 고려왕조를 섬기고 벼슬하던 선비들 중에 불사이군으로 충성을 다집하며 송도에서 은신하다가 정선(지금의 남면 거칠현동)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일생동안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님을 사모하고 충절을 맹서하며 입지 시절의 회상과 가족과 고향의 그리움에 젖어 고난을 격어야 하는 심정을 읊었다.” 사설집 「旌善아리랑」‘由來’편의 일부이다. 고려왕조의 충절을 지킨 7인이 정선에 은거하여 살며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 "그 때 선비들이 비통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으로 부르던 것을 이 지방의 선비들이 풀이하여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지금의 정선아리랑의 가락이다.” 1977년 개최된 제2회 정선아리랑제 행사자료에서 인용한 ‘정선아리랑의 유래’ 중 일부이다. 소위 정선아리랑의 ‘고려유신 한시 율창설’의 진술이기도 하다. # "이(눈이 올라나…) 노래는~ (중략) 송도에는 험악한 먹구름이 모여드는 시운을 한탄하고 쓰라린 회포를 달래며 부른 노래이고 대사는 이러한 어려운 때가 아니라면 자기들이 모든 것을 등지고 쓸쓸한 이 산중에서 울부짖으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정선아리랑의 가락이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를 지닌 것은 이런 한탄과 시름을 읊조리게 된 연유에서 불러지게 된 것이다.” 정선아리랑비 후면 기록의 일부이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구름이 다 몰려온다”를 정선아리랑의 ‘시원(始原)’을 이루는 사설이라고 하였다. 은거 7인 중 채미헌 전오륜(採薇軒 全五倫)은 정선 전씨의 중시조로 1373년(공민왕 22) 과거에 급제하여 우상시(右常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한 고관이다. 현재 남면 거칠현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니 이들이 개성에 있는 고려의 진산 만수산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시국의 암울함을 한탄할만하다. 곧 고려왕조 500년의 멸망을 노래한 것이라는 전설의 서사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선아리랑의 역사성은 전설의 사실 여부를 떠나 정선인들은 물론 인근 지역인들도 수긍할만한 것으로서 아리랑의 시원이 정선에 있음을 공감하게 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적어도 조선왕조말 1809년 「杜門洞實記」를 발행하여 이들을 충절 인물로 재평가하면서 부터라고 본다. 이상을 감안하여 정리한다면 정선아리랑의 전형성이 구축되는 시기는 경복궁 중수 이후 외지에서 들어 온 여음구가 정선아리랑의 후렴으로 함께 불리는 시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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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br>‘2005’의 아리랑<11> <br>정선의 아라리 기층(1)어떤 특정 민속(민요) 현상의 출처 또는 발상지를 알 수 있을까? 예컨대 민요나 아리랑의 발상지가 어디인지를 알 수 있느냐라는 말이다. 이에 관심을 품은 이들은 1세대 국학자들이다. 최남선은 민요의 역사를 "주몽의 고개를 넘어 단군의 마루턱에 나아가도 민요의 하늘은 계속되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최영한(崔永翰)도 그 시원이 무한함을 기술하였다. "붉은 땅에 푸른 풀이 싹 돋는 조선에 있어서 반만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조선인의 원시적 생활이 또한 그러하였을 것도 사실인즉 조선 민요의 역사는 조선민족 생활의 최초로부터 시작하였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민요의 시원을 민족의 시원에 닿아있다고 하였다. 민요 아리랑의 출처를 언급한 이는 민요 학자 고정옥(高晶玉,1911~1969)이다. 그는 1946년 ‘朝鮮民謠硏究’에서 아리랑의 출처가 있다는 전제로 기술했다. 즉, 아리랑이 "최초 단 한 개의 멜로디에서 출발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것이 시일의 경과에 따라 각 지방의 음악적·사상적·언어적 특징에 물들어 경기·서도·강원·영남 등의 각종 아리랑이 생긴 것.”이라고 하였다. ‘단 한 개의 멜로디’가 출현한 곳을 아리랑의 출처(출현지)라고 돌려 말하였다. 이후 역시 민요학자 임동권(任東權/1926~2012)도 1964년 ‘한국민요사’에서 "아리랑타령이나 도라지打令 같은 곡조는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취사선택되어 집단의 공감을 주는 것으로 정립되어 오늘날의 민요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리랑의 ‘멜로디’ 또는 ‘곡조’가 출현한 곳을 출처라고 한 것이다. 아리랑 관련 자료가 집대성된 1980년대 중반 아리랑연구가 김연갑은 1986년 ‘아리랑’에서 흥미로운 이론을 제시하였다. 소위 ‘도너츠 이론’인데, 민속현상의 출처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호수에 처음 낙하물이 떨어져 파장을 일으키면 그 영향으로 물가에 모래톱과 같은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처음 충격이 있었던 곳의 흔적은 사라져 버려 찾을 수 없다. 이는 마치 처음 밀가루 덩이에서 눌러 구멍을 내고 이를 늘려서 도너츠 모양을 만들면 처음의 밀가루 덩어리는 없어지는 것과 같다. 아리랑도 어딘가에서 출현하여 오긴 했지만, 그 처음의 출현지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문화인류학자 메롤로 몽타(Merleau-ponty. M)는 또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전승문화는 기원에 대한 망각을 수반한다.”는 주장이다. 원인은 다르지만 역시 출현지를 찾기 어렵다고 한 것이다. 곧 민요, 또는 아리랑의 기원을 찾는 것은 어렵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까지도 강원도 정선군민들이나 일반인들은 물론, 일부 학자들도 "아리랑의 고향은 정선이다.”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고 되었다. 말하자면 정선지역이 아리랑의 출처라고 한 것이다. 과연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인가? 앞서 살핀 대로 누구도 명확한 근거를 댈 수는 없다. 다만 일부 연구자는 전파론을 들어 ‘정선 아라리→ 서울경기아리랑→ ’ 식의 계통도로 설명하였다. 정선에서는 "정선의 뗏목꾼들에 의해 서울로 전파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그러나 이 전파론은 오늘의 문화인류학계에서도 크게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는 이론이다. 예컨대 ‘강강수월래’의 경우 해남과 진도를 출처로 하여 경북 해안의 ‘월월이청청’이나 내륙의 ‘안동놋다리밟기’로 전파되었다고 보았다. 이는 1985년 영남대 김택규교수가 ‘한국농경세시의 연구’에서 한 주장이다. 그러나 1992년 안동대 임재해 교수는 ‘강강술래와 놋다리밟기의 전승양상과 문화적 상황’이란 논문에서 이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원무(圓舞)와 여성의 가무놀이의 통시적/공시적 보편성 등을 들어 이는 "인류 보편적 의식과 주술적 관념 속에서 저마다 생성된 것”이라는 ‘다원발생설’로 반박한 것이다. 합리적인 반박이다. 아리랑 역시도 메나리토리 노래가 발생될 여건은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 곳곳이 공통으로 지닌 것이었다. 이 때문에 메나리토리 노래의 출처를 특정할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현재의 전형성을 근거로 ‘전승 중심지’ 또는 ‘전승 주변지’로 삼을 수는 있는 것이다. 즉, 기층성을 파악하여 중심지와 주변지로 구분할 수는 있다는 말이다. 이를 적용하면 정선지역 일대가 ‘아라리’의 전승 중심지이고 영월 평창 태백 강릉 지역이 전승 주변지역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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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br> ‘2005’의 아리랑<10> 강원도의 아리랑 전승 실태지금까지 7회에 걸쳐 강원도의 아리랑 상황을 ‘지역별 아리랑 전승실태 조사보고서’를 통해 살펴왔다. 강원도의 아리랑은 전국 7개 아리랑 권역 중 중요도나 전승 범위의 광역성에서 단연 주목이 된다. 그런 만큼 다양한 논점을 살피게 되었다. 이번 회에서는 아라리, 엮음아라리, 자진아라리의 전승 범위를 2005년 상황에서 검토하기로 한다. "아라리의 전수자가 강원도의 거의 전역에 풍부하게 존재해 온 것은 이 노래가 이 지역 민중들의 기층적 삶에 이처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라리는 향토민요로서 강원도의 기층문화로 뿌리 깊고 넓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아라리는 문화적 뿌리가 튼튼한 노래이기에, 민요생태학적 측면에서 볼때 자연스런 전승이 단절된 오늘의 상황 아래에서도 아리랑 전수자들이 아직 도처에 적지 않게 존재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인용문은 2003년 발행된 김시업 편 ‘정선의 아라리’ 같은 조사자료에서 확인되는 전승 상황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민요의 전승 조건이 상실된 상황이지만 강원도의 아리랑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전승자가 적지 않게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아라리가 지역민들의 기층적 삶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아라리는 문화적 뿌리가 튼튼한 노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라리는 긴아라리, 엮음아라리, 자진아라리, 강원도의 아리랑을 말한다. 이들은 인위적 조건에서 전승되기도 한다. 강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유자들을 통한 교육 전수를 말한다. 긴아라리와 엮음아라리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 정선아리랑’으로, 자진아라리는 ‘강원도 무형문화제 제5호 학산오독떼기’ 종목에서 체계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전자는 보유자 4명, 이수자 6명, 전수장학생 14명에 의한 정선아리랑보존회로 조직되었고, 후자는 보유자 3명, 이수자 3명, 전수장학생 4명, 보존회 회원 40여명이 학산오독떼기보존회를 결성하여 전승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보존회 회원 중에는 자연스럽게 체득한 이들이 상당수라는 점이다. 자연적 체득이란 전수교육과 같은 인위적 전승이 아니라 가족공동체 또는 마을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을 말한다. 민속의 가장 바람직한 전승 형태이다. 보유자 김길자의 경우 가정에서 할머니 정옥선과 부친 김병하(2007년 작고)로부터 자연스럽게 소리를 익힌 사실이 그 한 예이다. 이러함에서 정선지역이 비교적 자연적 전승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정선이 우리나라 아리랑의 전승 중심지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 두 지역 보존회는 전수교육 중심의 정기적 축제, 공개 공연, 창극공연, 경창대회, 시장공연, 전수교육, 그리고 가사 짓기 같은 활동을 통해 전승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특히 괄목할 것은 초등학교 교육에서의 성과와 경창대회 정례화와 타지역 경연자를 참여시켜 교류를 확대시켜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강원도 아리랑의 원심력과 구심력을 유지시키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문화재청 발간 ‘지역별 아리랑 전승실태 조사보고서’ 강원도의 아리랑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즉, 아라리, 엮음아라리, 자진아라리는 아리랑문화의 원형으로 보호할 필요성 또한 크게 요구되고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강원도의 경우는 전수자 일부가 자연 체득자여서 인적 자원이 두텁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전체 아리랑사의 위상을 강조하였다. "강원도 향토민요 아리랑은 아리랑 노래문화의 모태이면서, 아리랑 노래문화를 성장시킨 자원아라는 면에서 그 문화사적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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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br> ‘2005’의 아리랑<9> 원형(原型)에서 전형(典型)으로2005년 문화재청이 전국을 대상으로 아리랑의 실태를 조사하여 보고서를 냈다. 이 조사는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눴다. 서울 경기지역, 강원지역, 충청지역, 전라지역, 경상지역, 제주지역이다. 현실적인 사정으로 북한을 제외했으나, 현재의 전국이 아리랑을 전승하고 있음을 실증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아리랑의 역사, 어원, 후렴, 곡조와 사설의 변이, 전승 실상과 범위 등의 논점을 담아냈다. 이 중 4회에 걸쳐 강원지역 아리랑을 살피고 있다. 이번 회에서는 ‘원형’ 문제를 제기한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경기 긴아리랑이 통속민요 아리랑의 시대를 연 뒤, 그 인기에 힘입어 여러 아리랑들이 거듭 뒤를 이어 나왔다. 우선 경기 긴아리랑의 뒤를 이어 나온 것이 경기 자진아리랑이다. 경기 자진아리랑은 강원도 향토민요 자진아리랑을 원형으로 삼아 변형을 가한 노래로 보인다. 그런데 이 노래의 인기는 19세기 말에는 이미 긴아리랑을 능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19세기말에 아리랑 자료로 기록된 사설과 후렴, 악보 등도 실은 모두 경기 자진아리랑의 것이다. 따라서 이미 말한 대로 19세기 말에 아리랑의 대중적 호응이 널리 있었고, 또 궁중 토목 공사의 노무자를 위로하기 위한 연희의 대표적 노래로 꼽혔던 아리랑은 모두 경기 지진아리랑으로 보아야 한다.” 인용 부분은 경복궁 중수 공사 현장에서 불린 아리랑은 어떤 것이며, 이와 경기지역에서 출현한 아리랑과는 어떤 관계인가라는 문제를 담고 있다. 이를 세분하면 이렇다. 하나는 지난 회에서도 살폈지만 궁중 토목 공사의 노무자를 위로하기 위한 연희의 대표적인 노래가 아리랑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아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시하지 않았다. 예컨대 강원지역 아리랑인지, 아니면 경기지역 아리랑인지를 특정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아리랑을 필자는 지난 회에서 김연갑과 최현 등의 주장을 들어 문경새재소리(문경아라리)라고 하였다. 둘은 경기지역의 아리랑은 긴아리랑이 먼저 출현했고, 이를 이어 자진아리랑이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이 문제도 역시 지난 회에서 ‘답습’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1883년 대 유행을 한 아리랑을 경기 자진아리랑이란 사실은 H.B.헐버트 채록 악보와 일치하여 이미 확인되었는데, 긴아리랑이 먼저 형성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선행연구(이보형)의 주장을 답습한 결과일 뿐이다. 왜냐하면 긴아리랑은 좌창계열 전문가의 작창으로 형성된 것으로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는 증거도 없고, 더욱이 중건 공사장에서 불릴 성격의 노래도 아니라는 점에서다. 정리하면 중건 공사장에서 ‘문경새재소리’가 불리며. 이의 변이형으로 경기 자진아리랑이 형성되었고, 이에 자극을 받은 전문가들에 의해 긴아리랑을 출현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자진아리랑은 대중성이 강하고, 긴아리랑은 예술성이 담기게 된 것이다. 셋은 경기지역 자진아리랑은 "강원지역 토속민요 아리랑을 원형으로 삼아 변형~”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원형’이란 표현은 매우 논쟁적인 대목이어서 부연할 필요가 있다. 무형문화에서 ‘원형’이란 술어를 쓸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선정에서부터 오랜 동아 논의되어왔다. 그리고 2003년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에 가입하게 되면서 논의 되다 1962년의 ‘문화재보호법’을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무형문화재법)로 개정하면서 이 술어를 페기 하였다. 무형문화재의 범위를 확대하고, 세대 간 전승과정의 변화와 특성을 고려하여 기존의 ‘원형(原型)유지’에 대응하는 ‘전형(典型)유지’ 원칙을 도입하였다. 2012년 까지 과거 고착형인 원형을 유지해오다 이를 폐기하고, 현재적 전승형인 전형을 수용한 것이니, 50년만에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무형문화재 관리체계를 마련한 것이다. 이는 1962년 당시로서도 원형유지 원칙보다는 전형 유지 원칙이 더 합리적인 논리이고 정책이었다. 그러므로 2005년 보고서 중의 표현도 합리적이지 못하다. 또한 같은 논리로 "일찍이 한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발생된 아리랑은 한반도의 중동부에 위치한 강원도 정선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라는 문화재청 기록의 단정적 표현도 적절하지 못하다. 이런 배경에서 2009년 문화재청은 ‘정선아리랑’만을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 신청을 하여 제외 당하는 오류를 범하였다.(물론 정선아리랑을 제외시킨 이유는 또 있으나 다른 회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아직 민요학계 일부와 문화재 분야 일부에서 이의 합리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무형문화유산 전승 활성화에 결정적인 논리임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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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br> ‘2005’의 아리랑<8>아리랑 발생설2005년 문화재청 발간 보고서 중 ‘강원도 아리랑의 존재양상과 전승실태’에서 경복궁 중수와 아리랑의 확산에 대해서는 기존설을 답습하고 있다. 1930년 총독부 기관지 ‘언문 조선’에 발표된 김지연의 ‘조선민요 아리랑’ 해설에 제시된 주장이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 제시하였다. "19세기말에 대중의 호응을 넓게 받는 노래로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 연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서울과 경기지역에 통속민요 아리랑이 형성된 것은 경복궁 중건 때일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의 발생을 경복궁 중건 때로 보는 견해는 일찍부터 제기되어 온 바이다. 이를테면 김지연은 아리랑의 발생과 관련된 여러 설을 소개하면서 경복궁 중건시에 팔도에서 부역꾼들이 징발되었는데, 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연희를 벌였고 이 때 부역꾼들이 각 지방의 노래로 자신들의 심회를 풀어내는 가운데 아리랑이 불렸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이 대목에는 세 가지 의미 있는 논점을 담고 있다. 하나는 1800년대 말의 서울 경기지역 아리랑은 ‘통속민요 아리랑’이다. 이미 음악적 장르를 달리한 아리랑이란 말이다. 둘은 이 지역의 통속민요 아리랑 형성은 1865년으로부터 7년간의 공사를 마친 1872년 경복궁 중수 이후라는 것이다. 셋은 공사에 동원된 부역꾼들이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 부른 고향의 노래와 함께 아리랑을 부르게 되면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지는 오늘날 일반화 된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공사 현장에서 누가 어떤 아리랑을 불러 확산의 계기를 마련했느냐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는 「한국의 아리랑문화」에서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즉, 강원도의 아라리는 남북한 강을 따라 서울 경기 일원에 이른 시기에 전해졌다. 이에 강원도 아라리가 뗏꾼들이나 부역꾼들이 중수 기간에 불러 새로운 아리랑을 형성시켰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수공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박달나무의 대량 공출에 대한 상실감을 호소하는 "문경새재 박달나무~ ”로 시작하는 ‘문경새재소리’ 또는 ‘문경새재아라리’가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음악적으로도 뒷받침이 되고 있다. 통속민요 아리랑으로 첫 번째 형성된 것으로 대표사설이 "문경새재 박달나무~ ”인 경기잦은아리랑(H.B 헐버트 채보)과 음악적으로 제일 가까운 것은 문경새재아리랑이라는 분석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경복궁 중수 현장에서 새로운 아리랑을 형성시키게 한 것은 부역꾼들에게 공감을 얻을 만한 문경새재아리랑이란 것이다. 단 전제하는 것은 통속민요 아리랑의 첫 번째를 ‘경기잦은아리랑’이냐 ‘긴아리랑’이냐라는 논란이 있지만 전자가 후자에 앞서 형성된 아리랑으로 본다는 것이다. 경기지역 통속민요 아리랑을 형성시킨 계기가 대규모 장정들이 부역꾼으로 집결한 경복궁 중수 공사장이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어떤 아리랑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강원도아리랑’ 또는 ‘정선아라리’라고 말해왔으나, 이제는 ‘문경새재아리랑’으로 좁혀야 한다. 이에 2005년 문화재청 발간 보고서 ‘지역별 아리랑 전승 실태 조사보고서’ 중 ‘강원도 아리랑의 존재양상과 전승실태’에서 문제의식 없이 서술된 ‘아리랑 발생설’은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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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br> ‘2005’의 아리랑<7>19세기 아리랑의 문화적 의미지난 회에서는 토속 '아라리'인 정선아리랑이 산간의 노래에서 들노래로 진출한 결과를 논의하였다. 새로운 사설이 출현하게 되고, 그 변화의 폭은 일정하지 않고, 그 폭이 적은 경우는 기존의 장르성(산간노래인가 아니면 들노래인가)을 유지하기도하고, 달라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들노래로서의 토속 아리랑에는 들노래로서의 일반성을 지향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 정도에 따라 사설의 양상과 장르성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번 회에서는 ‘강원지역 아리랑 전승실태 조사보고’ 중 장르성의 완전한 변화와 그에 의해 문헌에 기록되는 19세기 경기지역 상황을 살피기로 한다. 산간노래 토속 아라리가 들노래로 진출하여 일노래로 장르를 전환하였다. 이로부터 일노래 아리랑은 19세기 들어 새로운 노래문화에 편입되는데, 경복궁 중수로 전국의 장정들이 일정기간 집단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경기지역에서 통속민요로 새롭게 전승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존재가 일부 양반과 외국 선교사에 의해 기록되기 시작했다. 첫 기록으로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 중 아리랑 대목을 주목하였다.(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처음으로 실상과 의미를 학계에 보고했다.) 기록은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1892년 2월에 고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뒤 동궁을 수선하는 토목공사를 하였다고 전하면서, 공사를 독려하기 위해 밤마다 불을 밝히고 광대들을 불러다가 신성염곡을 연주하게 했는데, 그것을 일러 아리랑타령이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원님대신 민영주로 하여금 여러 광대들을 거느리고 아리랑을 전담하게 하여 잘하고 못하는 바에 따라 금과 은으로 상을 주게 했다고 한다.”(매천야록) 이에 대해 보고서는 다음 두 가지로 분석했다. 하나는 19세기말 아리랑이 전문음악인들에 의해 연주되는 통속민요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노무자들을 위한 노래로 연주됨과 동시에 경연대회 주제곡이라는 점에서 아리랑이 매우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아리랑이 경기지역 ‘잦은아리랑’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같은 분석을 차치하고서라도 여기서 확인되는 중요한 의미는 19세기말 서울지역에서 궁중과 민간에서 향유하는 노래가 아리랑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 궁중에서 아리랑을 즐겼다는 사실은 이후 양반층 일부에서 아리랑에 관심을 갖게 하는 기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서 인용한 1894년 발간된 「신찬조선회화」의 아리랑 기록과 선교사 H.B. 헐버트가 기록한 <KOREAN VOCAL MUSIC ARARUNG>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기록에 대한 서지사항과 가치는 이미 김연갑 등에 의해 보고되어서 생락하지만, 다른 민요와 달리 양반층의 관여로 문화적 확산을 가속시킨 것은 눈여길 사항인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 대한 보고서에서 새로운 논점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잦은아리랑과 긴아리랑의 출현 시기 즉, 선후관계를 말한다. 보고서는 선행연구인 이보형의 <아리랑소리의 근원과 변천에 관한 음악적 연구>를 인용하며 ‘긴아리랑’이 앞서 형성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선후 문제는 김연갑의 반론으로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이다. 반론의 요지는 경복궁 중수 공사 기간 경기지역 통속 아리랑을 형성시키는데 영향을 준 소리가 ‘문경새재소리(문경아라리)’으로, 이의 음악적 관계상으로 볼 때 ‘잦은아리랑’이 먼저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문경새재소리’의 정체성 문제와 함께 아리랑 연구에서 논쟁적 대목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산간의 노래 토속 아라리가 들노래도 장르성을 달리하여 경기지역 통속민요 아리랑을 형성시켰다는 사실을 문화변동론의 입장에서 정리했다. 다음 회에서는 2005년 현재, 강원도아리랑의 전승실태를 검토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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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br> ‘2005’의 아리랑<6><br>‘산의 노래’에서 ‘흙의 노래’로‘강원도의 아리랑 존재양상과 전승실태’를 살펴왔다. 지난 회에서는 오늘의 강원도 아리랑에서 후렴이 어떤 형식으로 불리고 있는지, 그런 형식은 언제부터 불리어 온 것인지를 살폈다. 실상을 분석하면 ‘토속민요 아리랑은 후렴을 거의 부르지 않는다’라는 결론이다. 이에 대해 정선군 비봉산에 세워진 ‘정선아리랑비’ 후면의 기록을 들어 ‘경복궁 중수 이후’라고 한 기록을 대비했다. 이번 회는 보고서에서 "이 후렴 문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하며 제시한 아리랑의 성격변화 배경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사실 후렴 문제는 토속민요 아리랑에서만이 아니라 통속민요 아리랑이나 타 지역 아리랑에서도 논쟁적인 대상이다. 왜냐하면 사설면에서 이 후렴이 탈맥락화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설 내용을 분절시켜 장면전환적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설의 문학적 측면만을 본 결과인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후렴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배경으로 강원도의 아리랑이 ‘산간의 노래’에서 ‘들의 노래’로 진출하여 선후창으로 불려지면서 후렴을 규칙적으로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이미 1987년 김연갑 선생이 ‘아리랑 선행연구 검토와 메아리 원형 가능성 고찰’이란 논문에서 ‘산의 노래’와 ‘흙의 노래’라는 개념으로 제시했는데, 이번 회에서는 토속민요 아리랑의 성격변화와 후렴의 관점에서 살피기로 한다. "후렴을 붙여 부르지 않는 것은 산간 노래로서의 양상이며, 후렴을 넣어 부르는 것은 들노래로서의 양상인 것이다.” ‘산간노래’와 ‘들노래’, 그리고 후렴의 여부를 현재 강원도의 아리랑은 후렴을 붙여 부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공존이란 상황으로 이원화하여 설명하는 대목에서 규정한 말이다. 여기에는 ‘산간노래’에서 ‘들노래’로의 진출을 생태적 환경변화의 결과로 보고 이 변화가 가창방식을 바꾸었다고 하였다. 후렴의 여부는 가창방식의 변화 결과물이라고 한 것이다. 이를 따른다면 ‘산간의 아리랑’이 ‘들의 아리랑’으로 진출하는 시점이 곧 가창 방식의 변화 시점이고 후렴의 형성시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산간’과 ‘들’의 개념을 일반화하기는 난점이 있다. 말하자면 산간 내에도 들이 있을 수 있고, 또한 산간은 임산물 체취의 대상이고 들은 논농사 중심의 대상으로 논의해 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시 논농사의 경우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직파법(直播法)과 못자리에서 키워 줄모로 옮겨 심는 이식 재배방식인 이양법(移秧法)의 문제로 확대되어 그 시점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이양법의 14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금지령으로 잠복되었다가 17세기 후반 관계수로의 발달로 일반화 되었다. 결국 이런 논의로 확대되면 강원도에서의 아리랑 후렴은 경복궁 중수 이후 외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강원도 내에서의 생태적 환경변화로 발생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논점을 좁히면 아리랑에서의 후렴 형성은 ‘산간노래’에서 ‘들노래’로의 진출 결과냐 아니면 경복궁 중수를 계기로 토속아리랑에서 통속아리랑이 파생된 결과이냐의 문제이다. 전자는 생태적 환경변화 결과이고, 후자는 ‘정선아리랑비’의 후면 기록대로 외지 유입 결과인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전자는 ‘자연발생설’이고, 후자는 ‘외부유입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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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br> ‘2005’의 아리랑<5> <br> 아리랑의 후렴「지역별 아리랑 전승실태조사보고서」 중 ‘강원도의 아리랑 존재양상과 전승실태’에서 파생관계와 전파 확산 경로를 주목하여 살폈다. 이 번회에서는 후렴의 기능과 출현 시기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아리랑 연구사에서 논쟁적 국면이 바로 후렴 문제이다. 형태, 어의, 본사와의 관계, 기능 등이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요(노래) 일반론에 의한다면 대개 후렴의 첫 어구가 그 민요의 제목이 된다. 이 경우 곡명은 본사와의 관계에서 동시 형성한 것이거나 아니면 후렴이 본사인 단순형태로 출현한 결과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반형과는 다른 것이 아리랑이다. ‘정선아라리’이든, ‘정선아리랑’이든 후렴 첫 구에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선아라리(아리랑)의 후렴은 이렇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강원도아라리’이든 ‘강원도아리랑’이든 2행 전행 ‘아리랑’과 ‘아라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를 전제로 한다면 후렴이 없었다면 곡명 없는 노래였고, 이후 곡명이 후렴을 형성시켰거나 후렴이 형성된 후 곡명을 형성시킨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보고서에는 이를 어떻게 제시했을까? 1996년 강릉대 강원도 지역 조사자료 153건과 1996년 MBC한국민요대전 강원도편 자료 22건의 대상으로 검토한 결과 전자에서는 124건 자료가 후렴 없이 불렀고, 후자는 18건이 후렴 없이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후렴을 규칙적으로 부른 경우는 전자가 4건, 후자가 1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런 현상을 독창이나 윤창으로 부르면 후렴을 붙이지 않는 것이 지배적이며 후렴을 붙여도 불규칙적인 것이 대부분이라고 하여 창법의 영향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보고서는 다시 이렇게 제시했다. "향토민요 아리랑이 후렴을 붙여 부르지 않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는 것은 이 노래들이 본래 후렴을 붙여 부르던 노래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지역별 아리랑 전승실태조사보고서(2006년)」 이에 대한 강릉대 조사자료에서 실례를 들었다. 조사자의 질문과 창자의 답변 일부만을 인용한다. 조사자-아라리는 누구나 다 잘하는 것 같은데요. 아라리 못 하시는 분 없는 것 같구요. 응답자(1)-옛날에는 다 아라리 밖에 없지 뭐. 조사자-예, 근데 왜 저거 안 하세요? 뒤에 후렴이 ‘아리랑 아리랑’, 그 소리는 잘 안 하시네요. 응답자(1)-그 소리는 안 해. 응답자(2)-그건 앞뒤 사람이 넣어 주는 거야. 후렴을 하지 않는다고도 했고, 하더라도 앞뒤 사람이 해 주는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는 여러 사람이 윤창으로 하는 소리판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보고서는 이렇게 정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사람)의 말을 통해 향토민요 아리랑이 본래 후렴을 부르지 않는 노래인데, 그것이 들노래로 진출하여 선후창으로 불려지면서 후렴을 규칙적으로 붙여 노래하게 되었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 주장의 요점은 ‘향토민요 아리랑이 본래 후렴을 부르지 않는 노래’라고 한 부분이다. 이는 앞에서 전제한 곡명과 후렴과의 관계를 대입하면 후렴이 있기 전까지는 곡명이 없었거나 ‘아라리’든 ‘아리랑’은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주장이 있다. 즉, ‘아라리’는 있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바로 1970년대 중반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비봉산 중턱에 세워진 <정선아리랑비> 후면에 새겨진 다음의 문장이다. "본래는 ‘아라리’(音譯·我羅理)라고 일컫던 것이 세월이 흘러감에 어느새 보편적인 ‘아리랑’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니 아리랑이란 누가 나의 처지와 심정을 ‘알리’에서 연유된 듯하더라.”<정선아리랑비> 이 <정선아리랑비> 내용으로는 ‘아리랑’은 ‘아라리’의 변이형이고 이것이 정선에서 불려진 것인데, 지금(1970년대 중반)은 이 ‘아리랑’이 보편화 되어 쓰고 있다고 한 것이다. 본래 ‘아라리’는 존재했었다는 지역의 주장과 ‘아라리’도 ‘아리랑’과 함께 없었다는 20년 후의 조사 보고서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리랑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논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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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br> ‘2005’의 아리랑<4> <br>강원도아리랑의 전파와 그 권역토속민요(향토민요) 아리랑은 강원도아리랑으로도 부른다. 긴아라리, 엮음아라리, 자진아라리 3가지를 말한다. 통칭하여 ‘정선아리랑’이라고도 한다. 이 노래의 기본적인 성격은 노래 자체를 즐기기 위해 부르는 가창 유희요이고 다음이 일노래로 부른 노동요 기능도 크다. 이 중 가장 보편적인 선호도를 갖는 것은 긴아라리이며, 두 가지는 이에 비해 선호도는 낮게 불린다. 이 선호도는 밀착도이기도 한데 긴아라리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은 이를 부르는 이들의 기층적 삶에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토속민요 아리랑의 분포상은 매우 광역적이다. 긴아라리는 강원도와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경기도, 충청도에 전파되었고, 자진아라리 역시 강원도와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경기도, 충청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에 분포하여 전파 범위가 오히려 넓다. 이는 두 노래 간의 기능이 달라진 배경과도 연관이 있다. 즉, 전자는 유희요 기능이 큰 것에 비해 후자는 농사일을 할 때 부르는 노동요 성격임을 보여 준 결과이다. 그리고 엮음아라리는 간헐적으로 긴아라리에 이어 불리는 노래로 강원도를 중심으로, 충청도에 제한적으로 전파되어있다. 당연히 기능과 성격은 긴아라리에 종속된다. 이 같은 토속민요 아리랑의 분포상은 자연지리적 관점으로는 태백산맥을 근간으로 형성된 산맥과 일치하여 산간 계곡을 이어 전승되었다. 계곡은 물길이 있고, 이 물길이 사람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권역적 대립을 넘어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대립과 소통의 요소를 주목한 대목이 있다. 2005년 문화재청 발행 「지역별 아리랑 전승실태 조사보고서」 중 강등학 조사 ‘강원지역 아리랑 전승실태 기초조사’에서 인용한다. ‘메나리토리’ 민요의 전파 경로이면서, 메나리토리 권역이란 결과를 있게 한 배경이 드러난다. "민요의 대립과 소통의 양상은 지형과 맞물려 형성된다. 그리고 민요의 대립과 소통에 간여되는 지형물은 산맥과 들이다. 이 중에 산맥은 민요의 대립과 소통에 모두 관계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산맥은 다른 곳의 민요 전파를 차단하기도 하고, 또 다른 곳에 민요를 파급시키는 통로 구실도 하는 것이다. 태백산맥과 그 지맥이 이르는 곳의 민요 대부분이 '메나리토리'라는 음악적 특징을 보이는 점도 산맥이 민요 소통로의 구실을 해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데 산맥을 통한 우리 민요의 소통은 양방향으로 고르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태백산맥으로부터 여러 지맥이 뻗어 나온 것처럼 우리 민요의 소통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거의 일방적으로 진향되는 경향을 보였다.” ‘산은 문화를 가두고 물은 문화를 푼다’ 또는 ‘강은 동질성을 푸는 동안, 산은 이질성을 키운다.’는 인식의 실증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 상황을 설명하는 적절한 표현이다. 또한 전통시대 민속의 일반적인 전파경로가 통혼권(通婚圈)과 장시권(場市圈)과 직결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이다. 필자가 참여한 2005년 ‘지리학자와의 아리랑기행’ 프로젝트 루트도 이 개념을 따른 답사였다. 아리랑이 우리 얼굴을 꼭 닮은 노래라는 사실은 이 상황으로도 설명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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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br> ‘2005’의 아리랑<3><br>강원도아리랑의 존재와 전승실태강원지역 아리랑의 전반을 공식적인 보고서로 제시한 것은 지난 회의 ‘서울경기지역 아리랑 6종’과 같이 최초이다. 보고자는 강등학(강릉대학교)교수이다. ‘강원도 아리랑의 존재양상과 문화적 전래’와 ‘강원도의 아리랑 전승실태’를 중심으로 보고되었는데, 강원도 토속아리랑을 (긴)아라리, 역음아라리, 잦은아라리 3종으로 규정하였다. 아라리와 엮음아라리는 전자의 가락으로 되돌아오고 부수적으로 불려 분명한 변주 관계로 보지만, 잦은아라리는 독립적으로 불리는 별개의 관계로 보았다. 이들의 분포 상황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경기, 충청, 경상, 전북에까지 광역적이고, 그 분포의 밀집상은 아라리가 가장 넓고, 잦은아라리, 엮음아라리 순임을 확인하였다. 현재 제도적 관리는 아라리와 엮음아라리는 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강원도아리랑’으로, 잦은아라리는 제 5호 ‘강릉학산옥독떼기 과장 모심는 소리’로 지정되어있다. 보고서는 이 강원도 토속아리랑이 모든 아리랑의 본원적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첫 출현을 서울 긴아리랑, 이어서 잦은아리랑이라고 하고, 1926년 본조아리랑이 잦은아리랑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긴아리랑이 잦은아리랑에 앞서 출현했다고 하는 것은 이보형("아리랑소리의 근원과 변천에 관한 음악적 연구”, 한국민요학회, 1997) 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오류이다. 김연갑, 최헌, 김경아의 연구에 의해 경복궁 중수를 계기로 대중에 의해 ‘문경소리’를 매개로 잦은아리랑이 출현했고, 이의 영향으로 좌창 전문음악인들이 잦은아리랑을 작창한 것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보고서 중 주목하는 내용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아라리 분포의 지리적 환경 조건(산맥 분포)을 제시한 것이다. 즉, 토속 아라리의 분포가 강원도를 중심으로 경기도 동부와 남부, 충청북도, 충청남도 동부와 남부 등 중부지방의 서남쪽에 분포하고 있다는 전제이다. 이는 강원도 동쪽에 태백산맥이 종단하고 이로부터 광주산맥, 차령산맥, 소백산맥이 뻗은 것이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으로, 소백산맥에서 다시 노령산맥이 갈라지면서 경기도, 충청남북도, 경상북도, 전라북도에 이르러 전파, 분포상을 형성했다고 한 것이다. 이를 주목하는 이유는 아라리의 분포가 태백산맥을 근간으로 한 산맥분포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는 대립과 소통이 산맥을 통하여 이뤄짐으로서 문화적 감각이 에너지화 되어 부딪치는 곳에서 접변을 이룬 결과이다. 이에 따라 아라리가 처음 출현한 곳은 결국 태백산맥의 한 지역임을 입증해 준다는 사실에서다. 한편 이에 대해서는 2017년 필자가 안내하여 이뤄진 ‘지리학자와의 아리랑기행’(김연갑선생과 이정면 유타대 교수 외 7명)프로젝트에서 확인한 바가 있다. 두 번째 중요 내용은 아라리의 기능을 구체적으로 밝힌 점이다. 강원 토속민요로 자생장르로 전제한 아라리는 종류를 다양화하기 보다는 기능을 복합화 하는 특징을 갖는다는 것이다. 곧 아라리는 기능이 가장 많은 노래로 ‘나무하기’를 대표 기능으로 하고, ‘노해하기’, 모심기, 밭매기 순의 기능이라고 조사했다.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노래하기’가 가장 큰 기능인데, 지역을 벗어나면서 ‘나무하기’와 ‘모심기’ 기능으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양상은 아라리의 전파는 강원지역과 다르게 가창유희요 보다는 ‘나무하기’나 ‘모심는 소리’의 노동 기능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다음 세 번째는 아라리의 생태적 환경변화에 따른 성격변화상을 제시한 점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산간지역에서 들의 농사지역으로 전파되면 당연히 일의 성격에 따라 가창방식, 후렴, 사설의 형식과 내용이 바뀌게 된다. 산간 지역의 가창유희 자리나 밭농사에서는 거의 독창이나 윤창이지만 논농사인 모심기나 논매기에서는 다른 이들과 호흡을 맞춰야 함으로 선후창이나 윤창으로 부르게 된다. 선후창은 후렴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성격을 분명히 한다. 한편 이 후렴의 여부는 ‘정선아리랑 비문’에서 아라리가 후렴을 수용한 것은 경복궁 중수 이후라고 한 사실과 부합한다는 점에서 주목이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강원지역 아라리는 모든 아리랑의 근원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창 방식이나 후렴의 여부 등에서 다른 지역 아리랑과 다른 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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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br>‘2005’의 아리랑<2><br> 6종의 서울경기아리랑2005년의 문화재청 ‘지역별 아리랑 전승실태 조사보고서’는 제도권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아리랑을 조사한 최초의 보고서다. 6개 권역의 아리랑은 국가적 전승 지원 대상이 된 것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서울경기 지역 아리랑 전승실태 기초조사’이다. 조사자는 김연갑(사단법인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이다. 이 조사는 서울경기 권역에 6가지 아리랑으로 규정을 하였다. 이는 당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들의 이수 대상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에 오늘의 시점으로는 이견(異見)이 있을 수 있다. 6개 아리랑은 본조아리랑/강원도아리랑/긴아리랑/한오백년/정선아리랑/구아리랑이다. 이 6종 아리랑의 음악적 특징은 경토리가 우세하고 메나리토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6종의 규정에 대한 이견은 첫 째는 ‘강원도아리랑’을 이 권역의 것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다. 다음은 ‘한오백년’의 문제이다. 전자는 소위 ‘잦은아라리’의 통속화 한 것을 전승지역의 아리랑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써, 오늘의 시각으로는 제외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소된 것은 아니다. 토속 잦은아라리는 강원도 춘천과 강릉이 주전승지역이지만, 이것의 통속화 한 강원도아리랑은 이들 지역에서 전승되지도 않고 포함시키지도 않는다. 현실적 전승활동은 서울경기 지역 민요 전승주체들에 의해서 계승 되고 있다. 결국 문제는 토속 아라리와 이의 통속 아리랑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 보고서의 입장은 전승지역을 중심으로 삼은 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후자 한오백년은 1940년대 초 음반화 되어 서울경기 지역 소리꾼들에게 널리 불리는 것으로, 곡조는 토속민요 긴아리랑과 같지만, 곡명에 ‘아리랑’이 없고 또한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이는 아리랑 범주의 특별한 인식으로 서양음악의 보편 시각에서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와 2014년 국가무형문화재 159호 등재를 계기로 곡명과 후렴의 존재 여부로 삼는 관점에 의해서다. 하여튼 이 6종을 범주화 한 것은 근본적으로는 현재적 전승지역과 전승주체를 중심으로 계승이 되는 실상에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계보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조사 대상자는 ‘12잡가’와 경기민요 전승계보, 즉 조기준 박춘경 장계춘 주몽신이란 구한말 명창들의 계보에서 형성된 제 1세대 보유자 안비취 이은주 묵계월의 계보를 중심으로 삼았다. 당시 보유자 이춘희 계보(이춘희 김혜란 이호연), 이은주 계보(김장순), 묵계월 계보(김영임)에서 총 6인을 대상으로 공통된 6개 곡명의 아리랑 현장 녹취와 전수 과정(음반 취입과 교재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이춘희 계보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며 당시 생존한 1세대 보유자 이은주 선생과 묵계월 선생은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활동이 적어지게 되면서 그 제자 1인을 대상으로 계보가 이어졌다. 이 때 조사된 악보는 서울경기 아리랑의 표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다. 보고서의 결론 부분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주목하였다. 첫 째, 전문 소리꾼들에 의해 형성되고 전수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이 결과로 서울 경기지역 향토성보다는 보편적인 세련미를 특장으로 하여 창민요라는 고정적 기능을 중심임을 밝혔다. 둘 째, 1926년 나운규 감독 영화 '아리랑' 주제가에서 출현한 ‘본조아리랑’은 모든 아리랑의 대표로 인식되어 있고, 이미 세계성을 띄고 있어 전승주체를 제한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제시하였다. 셋 째, 소위 ‘김옥심제정선아리랑’ 또는 ‘서울제정선아리랑’은 1940년대 말, 이창배와 김옥심이 작창한 것으로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일종의 창작아리랑이다. 이에 본조아리랑과 함께 성격상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조사 보고서는 최초의 실태 조사 결과라는 점과 제도권의 관심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활용성과 함께 아리랑 역사에서 주목을 해야 한다. 또한 이 보고서를 통해 서울경기 아리랑으로 6종을 규정한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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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br> ‘2005’의 아리랑<1><br>전국 아리랑 전승실태 조사보고서2005년 벽두부터 아리랑이 화제에 올랐다. 1월 국악신문은 AP통신을 인용하여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을 전파시켰고, 4월에는 중국동포 음악인 안계련 선생과 김봉관 선생이 "중국 중앙정부가 아리랑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조사를 지시한 것으로 안다며 이는 아마도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등재를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니 서두르라”는 제안을 한 것도 이 해였다. 이와 함께 의미를 두어야 하는 아리랑 관련 사항은 문화재청이 전국대상 실태조사 보고서를 낸 사실이다. 제도권에서, 그것도 전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학계와 제도권 일각에서는 ‘정선아리랑이 원형이고, 이를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했는데 더 할게 있겠는가?’라는 인식 정도였다. 이런 어간에 문화재청이 전국을 대상으로 아리랑 전승실태조사를 한 것은 의외였다. 따진다면 이 시기 아리랑의 소관 부처는 문화부이고 담당 부서는 전통문화예술과였다. 아리랑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화재청 소관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화재청이 이런 대대적인 조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와 함께 문화재청 조사치고는 무성의 하고 허술하기도 하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해야 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졸속(拙速)조사였던 것인데, 여기에는 이면(裏面)이 있었던 것이다. 2005년 문화재청 발간 ‘전국 아리랑 전승실태 조사보고서’는 단적으로 졸속임을 보여준다. 조사 취지나 기본 지침조차 없는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억지춘향격인 조사가 이뤄진 배경에는 당시 ‘정치’의 힘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의미가 없는 조사였고, 필요 없는 보고서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럴만한 이유, 꼭 짚어 말하면 전문 민간단체의 건의나 요청보다는 정치권이 문화재청을 움직인 결과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그 진상은 다음과 같다. 2004년 중반, (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는 문광부, 문화재청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에 ‘아리랑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이란 정책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 건의서는 전국 27개 지회 회원과 일부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의견 수렴 결과의 반영이었다. 새로운 세기는 문화의 세기로 우리문화의 세계화가 화두였고, 그 과정에 아리랑에 대한 논의도 다양하게 분출된 시기였다. 그 중에는 아리랑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비등했다. 자발적으로 전승단체를 설립하여 활동해 온 전국 지역 아리랑 전승자들은 아리랑이 다른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으면서 무시를 당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아리랑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반대하는 소수 의견도 있었다. 예컨대 "애국가가 중요하지 않아 국가 지정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듯이 아리랑도 다른 장르보다 못해서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의 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정함으로 해서 오히려 그 위상을 한정시킬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운 것이다. 어떻든 2004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지정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지정 문제까지 건의한 민간단체의 건의서는 정부와 국회 문화관광위에 보낸 건의서 중 반응을 보인 것은 문화관광위 열린우리당 김재홍의원이었다. 이에 김의원실에서는 건의서를 정책보고서로 재구성하여 정책자료로 발간하였다. 동시에 언론을 통해 "아리랑은 민족의 문화로서 우리가 자랑할 만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국가에서 지정하는 중요무형문화재로서의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고 유네스코를 통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문화재청에도 같은 취지를 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당해년도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집중적으로 질의 하여 공감을 얻어냈다. 그 결과로 문화재청이 2005년에 들어서 공식적 전국대상 아리랑 조사를 하게 된 것이다. 2005년 「아리랑 종합 전승실태 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다. 목차 상에서 보면 서울경기, 강원지역, 충청지역, 전라지역, 경상지역, 제주지역까지 6개 권역으로 나누어 조사했다. 이상의 보고 내용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최초의 아리랑 실태가 어떠했는지를 살피기로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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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br>중국, 중국동포, ‘중국 속의 아리랑’기찬숙/아리랑학회 연구이사 아리랑 연표상 어느 해에나 아리랑으로 점철(點綴)되지 않는 해가 있을까마는 2005년의 아리랑은 벽두(劈頭)부터 시작되었다. 1월 19일자 국악신문에는 뜻밖의 아리랑 기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한 국회의원의 인터뷰 중 세계적인 통신사 ‘AP통신’ 보도의 인용이란 설명과 함께 아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이 눈에 띄었다. "고유의 전통음악인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1위에 선정되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이 노래를 알 것이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작곡가들로 이루어진 ‘세계 아름다운 곡 선정대회’에서 82%라는 엄청난 지지를 받고 아리랑이 선정된 것이다. 선정과정 중에는 단 한명의 한국인도 없어 심사했던 이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이에 대해 ‘아리랑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나에게 깨우쳐줬다’, ‘듣는 도중 몇 번씩 흥이 났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감동적이다’라는 반응이었다. 이들 모두 처음 듣는 곡이었다고도 했다.” 이 기사는 화제를 낳았다. 이로부터 급기야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오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 순간, 아리랑연합회 김연갑선생의 ‘근거 없다’는 유권해석(有權解釋)으로 ‘가짜 뉴스’로 잠복되었다. 이렇게 필자에게 2005년은 이 가짜 AP통신 기사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정작 2005년의 중요한 아리랑 기억은 4월 중순 연변에서 전해 온 아리랑 소식이었다. 바로 연변 원로 음악가 안계련선생과 민속학자 김봉관선생의 ‘아리랑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찬동서’가 우리에게 전달 된 것이다. 매우 조심스럽게 전해진 이 문건은 일견 우리가 이미 추진하는 것에 대해 찬동한다는 뜻이지만, 진의는 이 때 우리는 유네스코 등재를 생각을 하지 않던 것으로 중국이 먼저 등재할 수도 있으니 서두르라는 충고였다. 이 충고는 2012년 중국의 아리랑 국가 비물질문화유산 지정으로 현실화 되어 소동을 버린 바 있어 그 진정성을 확인하게 된 바 이다. 이 두 원로 동포 2세대의 고국 아리랑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은 우리에게 동포들의 세대차를 실감하게 하는 계기였다. 이를 통해 중국과 동포사회를 정확하고 더 깊게 이해해야 함을 절감했다.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탄생했다. 그러나 중국 내의 소수민족정책은 이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공동강령(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共同綱領)’이란 공산당의 발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정책은 다민족 국가는 자치제가 적합한 제도이며 보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였고, 자치제도는 공산당의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정책이며 기본정치제도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는 크게 두 단계로 나뉘는데, 첫 단계인 1922년부터 1935년까지는 소련의 영향을 받아 연방제가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다 1935년 중국공산당이 모택동을 핵심으로 한 영도기구를 설립하고 난 이후, 연방제는 민족정책 고려 대상에서 서서히 배제되었다. 소련과는 사정이 다르다는 이유로 연방제 대신 민족구역자치제를 택해 1947년 내몽고자치구 건립을 둔 것이 그것이다. 주은래(周恩來)는 중국이 5천년의 역사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서로 교류하여 한 지역에 다민족이 혼거하는 상황을 강조하였다. 한(漢) 왕조 이후 중앙집권 전통이 지배적이었던 점과 20여년에 걸쳐 민족해방전쟁과 내전에서 한족과 소수민족들이 동지적인 혈연적 유대를 갖게 된 점을 들어 소련식 민족 간 자치가 아닌, 보다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민족 간 연합의 형태로 민족자치구를 두고자 했다. 이중에 조선족의 경우, 한족(漢族)을 포함한 기타 민족들과 함께 반제반봉건 투쟁과 국내 해방전쟁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시민권을 부여 받았다. 이로부터 건국 직전 중국 공산당이 조선민족에 부여한 정치적 지위는 중공연변지위(中共延邊地委) 서기 유준수(劉俊秀)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조국이 조선이라는 것을 승인하는 동시에 그들을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이며, 중국공민으로 일체의 권리를 향수할 수 있고 조선이 외적의 침략을 받을 때 조선공민의 신분으로 조선에 나가 전쟁에 뛰어들 수 있다” ‘조국이 조선’이란 북한을 말하는 제한성이 있긴 하지만 한반도를 조국으로 인정하여 이중국적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건설과 중국대륙의 승리가 보이면서, 유준수는 만주의 조선인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그것은 조선족과 조교(조선교포)의 구별이다. 연변에 중국공민으로 등록된 자는 ‘조선족’으로 분류되며, 등록을 하지 않았거나, 1945년 이후 적절한 중국 공산당의 허가를 취득하지 않고 입국한 사람은 북한 국적으로 분류하여 ‘조교’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중, 호주(戶主)가 중국에 살고, 가족이 북한에 있는 경우 집이나 토지를 중국에서 소유한 자도 중국 공민권을 취득할 수 있다고 했다. 이후, 북한방문을 원하는 조선족은 중국정부의 허가를 취득해야 했으며, 중국인과 동일한 권리 의무를 행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한국전쟁으로 조선족이 동원(참전)되면서 실제적 시행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한국전쟁 기간과 전후 북한의 복구사업에 많은 조선족이 참여한 사실 등에서도 사실상의 이중국적이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57년에 이르러 중국정부는 지역적 개념을 사용하여, ‘산해관(山海關) 이북의 조선인을 조선족’으로, ‘이남의 조선인과 이후 중국에 들어온 사람을 조교’로 분류하기까지 특수한 상황은 유지되었다. 이에 앞서 1945년 9월 말, 이미 조선족의 국적문제를 주시해온 중공중앙동북국은 역사적인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조선인 상황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한족과 만찬가지로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향유한다고 인정하였다. 또한 동북민주연합군사령부 사령 겸 길림성정부 주석 주보중은 "화북지구 항련(抗日聯軍)에 참가한 조선의용군을 제외하고 동북의 조선주민은 일반적으로 중국 경내의 소수민족으로 보는”것으로 조선족의 소수민족 지위를 인정하였다. 이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으로 정치적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현재 조선족자치구역은 조선족자치주 1개, 자치현 1개, 자치향진(민족연합진을 포함) 43개가 있다. 그 외, 조선족촌이 1000여개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국가보다 공산당이 먼저 창립하고 이를 통해 국가를 건립하였음으로 당을 우선시 한다는 특수 상황에서, 정치체는 이미 공산당 선립기인 1920년대 초로부터 확립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1930년대 화북지구 항련(抗日聯軍)에 참가한 조선의용군과 북한 정권 수립 구성원들과 연관을 갖게 되어 남한과는 다른 긴밀성을 갖게 되는 배경이 된다. 결국 구체적으로는 북한이지만 한반도를 고국으로 인식한 동포사회 구성원은 이 역사를 살아 온 소위 동포 1세대들이다. 바로 이 2세들 중 민족성 내지는 고국의 민속과 음악을 이해하여 그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안계련과 김봉관 선생이다. 1946년 연변에서 개최된 3.1절 행사에 ‘아리랑七景’ 같은 민족정서가 담긴 연극작품을 체험하고 자란 이들이다. 2005년의 ‘아리랑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찬동서’가 아니었다면, 이를 계기로 이 분들과 인식을 공유하지 않았다면 2012년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도 중국에 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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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br>아리랑의 전형성(典型性)2016년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아리랑’ 지정은 기존의 문화유산에 대한 관점 또는 지정 요건인 ‘원형성(原型性, Archetype)’에 대한 반성적 대안으로 입론된 ‘전형성(典型性.Typicality.Prototypicality)’에 근거한다. 우리나라 무형문화유산 정책상 원형중심주의에서 전형중심주의로의 전환의 결과이다. 전자는 산업화 시대 급변하는 사회 질서 속에서 현상불변과 현상동결을 기준으로 기·예능 보유자 전수체계 운영 정책이고, 후자는 자발적 전승공동체에 의한 변화와 재창조에 의한 다양성을 가치로 보는 관점이다.결국 전형중심주의로의 전환은 아리랑의 지정으로부터이고, 법적 근거가 된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발효도 아리랑 지정으로부터이다. 이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 시행으로부터 54년만의 변혁으로 아리랑의 현재적 향유와 공동체적 계승 체계에 가치를 부여한 첫 사례인 것이다. ‘전형(성)’에 대해서는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제2조 1항에서 "무형문화재의 가치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했고, 동 법률 제2호에서는 "무형문화재를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하는데 구현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고유한 가치, 기법 또는 지식”이라고 했다. 이는 "같은 부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본보기”라는 일반 개념의 설명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 전형은 유형(類型)과는 다른 개년이다. 유형은 대상으로 하는 범주 안에서 무엇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추상화 과정을 거처 일반화 된 개념이고, 전형은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대상 전체를 포괄 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개별화 된 개념이다. 즉, 개별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가장 큰 보편성을 획득한 것으로 예술적 형상에서 쓰이는 개념이다. 이를 지역 아리랑에 적용하면 "특정 지역 공동체 범주에서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대상화 하여 향유하고 계승하는 실체로서의 아리랑”이 된다. 같은 이치로 포괄적인 아리랑의 전형(성)도 동일하게 개념화 할 수 있다.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지정과 201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 지정도 포괄적 명칭 ‘아리랑’으로 대상화하였다. "60여 종”을 "한국의 서정민요 아리랑”으로, "향토민요 또는통속민요로 불리는 모든 아리랑 계통의 악곡”을‘아리랑’으로 지칭하였다. 이는 각각의 아리랑 개별성을 인정하면서도 모두 보편성을 지녔다고 본 것으로 전형성을 인정한 것이다. 전형성이 확립되어 일반화 되어야만 이를 대상으로 하여 문화적 확장력이 발휘되고 창조적 계승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에 전형성 확립과 공적 인정은 중요한 것이다. 이 아리랑의 ‘전형성’ 또는 ‘전형화’는 언제 확립되었을까? 이는 아리랑을 독립된 문화현상으로 보아 ‘아리랑문화’라는 언표(言表)를 가능하게 하는 상황임을 말하는데, ‘한국의 아리랑문화’(김연갑 외 공저, 2011, 박이정출판)에서는 확립시기를 1930년 전후로 보았다. 이 관점은 1926년 개봉 영화<아리랑>의 흥행으로 다양한 장르에서 아리랑의 자장력을 확인시켜주는 상황에 기반한 것이다. 필자 역시 동의한다. 다음의 두 인용문은 아리랑의 전형성이 확립된 상황임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요사이는 <아리랑타령>이 어찌나 流行되는지 밥 짓는 어멈도 아리랑, 공부하는 남녀학생도 아리랑, 심지어 어떤 女學校에서는 唱歌試驗을 보는데 학생이 집에서 혼자 아리랑타령을 하던 것이 버릇이 되야 다른 唱歌를 한다는 것이 아리랑타령을 하야 선생에게 꾸지람을 듣고 또 어떤 집 家庭에서는 자기 시아버지가 漢江을 가는데 人力車를 타고 간다고 하닛가 며느리가 하는 말이 ‘단 十里못가서 발병이 나싯가바 인력거를 타셔요’ 하닛가 시어머니는 또 ‘버태고개(白峴)가 여간 어려우냐고 한다는 말이 아리랑고개가 좀 어려우냐’고 하야 시어머니와 며누리가 모도 아리랑으로만 놀다가····.”(‘별건곤’, 제16·17호, 1928년 12월호, p151) # "아리랑의 민요가 혹은 무용화가 되고 혹은 영화화가 되었으나 극화가 된 것은 토월회의 금번 공연이 처음이라 하겠다. 첫째 제재를 거기에서 취한 것부터 매우 기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름만이 얼마나 많은 흥미를 끄는지 알 수 없다. 조선 사람으로 누구든지 친함을 가진 민요이다. ‘아리랑 고개’ 조선을 상징하는 것이다. 가장 조선 정조를 대표한 것이다. 그것이 공리적으로 우리민족에게 미치는 영향은 별문제라고 하더라도 ‘아리랑고개’는 마음 깊이 우리들에게 하소하는 바가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쯤은 어찌함인지 조선 땅의 모든 것과 빈틈을 발견할 수 없이 꼭 들어 맡는 감을 준다. 가장 조선 정조를 대표한 것이다.”(동아일보,1929,11,26.) 이상과 같은 자료를 통해 1920년대 말 아리랑의 전형성은 확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형성된 아리랑의 전형성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변이와 재창조가 이뤄진다. 그 중 주목되는 분야가 아리랑을 표방한 ‘선전가(宣傳歌)’이다. 표제에서 ‘아리랑’을 쓰거나 곡조를 아리랑곡조를 부곡한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선전가란 어떤 존재나 효능 또는 주의 주장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특정 가사와 곡조로 구성한 아리랑 표제 노래인데, 이는 아리랑이 일반화 되지 않은 상태, 즉 전형화가 확립되지 않은 대상이라면 출현이 불가능하다. 상호나 상표명과 같은데 대중의 예민한 반응을 필요로 하는 선전가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조사로는 면화 수확을 장려한 ‘면화십장가(棉花十獎歌)’, 충북 수안보의 온천을 선전하는 ‘수안보온천가’, 종천연두 예방접종을 선전하는 ‘종두선전가(種痘宣傳歌)’ 그리고 문맹퇴치를 위한 계몽운동가 ‘문자보급가’ 등이 있다. 이 중에 ‘한글보급운동가’는 그 곡조를 아리랑으로 활용한 노래로, 1920년대 말 70%에 달하는 문맹율의 민중을 대상으로 전개한 계몽운동가이면서 항일적 요소를 담고 있는 노래라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 오는 3월 1일 종편방송 TV조선에서 3.1절 특집방송으로 이 ‘한글보급운동가’를 소재로 한다고 한다. 아직 노래로 재현된 바가 없어 의미가 있는데, 아리랑연합회가 제시한 자료는 조선일보 1931년 1월 7일자에 발표된 ‘문자보급가’이다. 조선일보는 이 노래를 악보와 함께 발표하며 "이 노래가 뜻으로나 곡조로나 우리 향토의 맛과 냄새를 짓게 가졌음에 있어 더욱 그러하다.(중략) 이 노래는 우리가 아무쪼록 우리 대중이 부르게 되도록 일반화 하게 하고 싶다. 그리하야 우리 악단에서 동서악계에 이름이 높으신 김형준씨에게 위탁하야 악보를 편성한 것이니 우리가 가지고 오던 우리의 정취에 맞는 악곡을 잡아서 여기에 뜻있는 노래를 얹어서 이렇게 부름이 어찌 뜻 없는 일이라 하리요”(조선일보,1931,01,16.)라고 설명했다. 가사는 박봉준(朴鳳俊), 편곡은 김형준(金亨俊)이 담당했다. 문자보급가(아리랑曲調) 에-헤 에헤야 우렁차다 글 소경 없애란 소리 높다 우리나 강산에 방방곡곡 새살림 소리가 넘쳐나네 에-헤 에헤야 우렁차다 글 소경 없애란 소리 높다 아리랑 고개는 별고개라요 이 세상 문맹은 못 넘긴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공중에 다니는 저 비행기 산천이 우렁찬 저 기차는 우리님 소식도 알겠건만 문맹에 속타는 이 가슴아 한밤이 대낮된 오늘날에도 눈뜨고 못봄은 어인일이냐 배우자 배우자 어서 배우자 아는 것 힘이요 배워야 산다 4행 사설에 후렴 형식이 특이하나 내용으로 보아 2행을 중첩시킨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되는 것은 사설 끝에 "流行아리랑曲”이라고 단서를 달았기 때문이다. 이 ‘유행아리랑’의 곡조는 본조아리랑, 즉 영화'아리랑' 주제가의 곡조이다. 이로서 영화'아리랑' 주제가 곡조가 이 시기 일반인에게 보편적인 아리랑, 즉 전형화한 아리랑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려 준다. 1930년 전후라는 시점, 이는 아리랑의 전형화가 확립된 시기로 그 자장력으로 무한한 아리랑문화를 확장시켜 가는 역사적인 기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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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br>다시 읽는 ‘Song of Ariran’(6)김산은 님 웨일즈에게 같은 곡조의 다른 곡명을 달아 세 편을 불러주었다. 앞 편에서 제시한 ‘아리랑’(Song of Ariran) ‘옥중가아리랑’(Prisoner's ballad of Ariran) ‘아리랑연가’(Love song of Ariran)이다. 적어도 1937년 이전 이렇게 시제(詩題)를 달리하여 아리랑을 재구성하여 부른 이, 특히 ‘옥중’을 쓸 수 있는 인물은 김산 밖에는 없다. 1932년 최영한(崔永翰)이 아리랑을 소재로 한 민요시의 부각을 말하며 "조선에서 조선 정조를 잘 표현한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민요일 것이다. 조선문학의 정화이며 조선 시가의 원류이다.”라는 민요론, 게다가 1930년대 신민요는 "시인 자신의 개성을 죽이고 민요의 정신에 입각하여 지은 노래”라는 1930년대 말 고종옥(高晶玉)의 신민요론을 뛰어 넘어 ‘시대의 노래’로 불리는 아리랑의 진면목을 보여 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저의 아리랑론, 즉 김산의 아리랑 이식은 ‘저항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조선조말 조정의 무능함과 이에 더해진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에 대한 철저한 저항인 것이다. 김산이 님 웨일즈에게 각인 시킨 「SONG of ARIRAN」 첫 면의 ‘아리랑’에서 "망명과 투옥과 국가적 굴욕을 담은 오래된 전래민요‘라고 그 성격을 선명하게 제시했다. 여기에서의 망명과 투옥, 그리고 국가적 굴욕이란 1937년으로부터 300여년 전이니 조선조 말로부터 일제의 침략기(Because it is beautiful and tragic it has been the favorite song of all Koreans for three hundred years.) 저항한 노래라고 한 것이다. 당연히 저항은 탄압을 동반함으로 슬프고 비극적인 처지의 노래라고 했다. 책 첫머리에서부터 이러한 성격을 분명히 강조하였다. "이 애끓는 노래가 한국의 모든 감옥에서 메아리 쳤다. 이윽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었다. ‘아리랑’은 이 나라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Every Korean prison echoes with these haunting notes, and no one dares deny a man's death-right to sing it at the end. The ‘Song of Ariran’ has come to symbolize the tragedy of Korea.) 그러나 비극에 머무른 노래가 아님도 분명히 했다. 저항의 그 끝에서 극적인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새로운 가사를 통해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노래는 죽음의 노래이지 삶의 노래는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서 승리가 태어날 수도 있다. 이 오래된 아리랑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려는 사람도 있다.”(It is a song of death and not of life. But death is not defeat. Out of many deaths, victory may be born. There are those of us who would write another verse for this ancient "Song of Ariran.) 그래서 그 희망을 쟁취하기 위해 극한 저항을 노래한 아리랑을 ‘위험한 노래’로 규정하여 ‘위험한 사상’만큼이나 위험하다며 탄압하였다.(The Japanese are almost as afraid of ‘dangerous songs’ as of ‘dangerous thoughts’.) 김산의 이러한 저항정신은 단순한 정치학적 약소국으로서의 저항이 아니다. 당연히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이 자리하고 있어 문명사적 정당성을 갖고 있었다. "우리 한반도는 언제나 일본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혹은 시베리아에서 남쪽으로 진출해 나가기 위한 디딤돌이 되어 왔다. 수백년 동안 한국은 북방문화의 중심지였는데, 오랑캐들이 중국을 침략하는 길에 언제나 한국에 침입하여 한국의 아름답고 개화한 도시와 농촌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다.”(Our little peninsula has always been a stepping stone from Japan to China and back again, and from Siberia to the south. She was for hundreds of years the center of culture in the north, and every barbarian invasion passed over on its way to China, devastating Korea's fair cities and fields of civilization.) 이러한 자긍심에서 김산은 아리랑을 중국의 항일전선의 동지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불러주며 인식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모두에게 가르쳐 주었다. 조선의 민요 아리랑.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고 모두 울었다. 중국 사람들은 이 노래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I taught everyone to sing the song I loved best-the old Korean Song of Ariran, and we all wept after we had sung this. The Chinese liked it very much and said they would never forget it.) 특히 감옥의 일본 간수에게 까지도 아리랑을 인식시켰다. 1930년말 북경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에 넘겨져 유치장 머물던 날, "이곳에서 또 다시 아리랑고개를 넘어 간다”(Here I climb again the hills of Ariran.)라고 벽에 쓰고 일본 간수가 조선인 공산당 혁명가임을 알고 ‘인터네셔날가’을 불러달라고 했을 때 대신 아리랑을 불러주었던 사실이 있다. 그 절망적인 순간의 대화에서조차 아리랑을 언급하였다. "오늘 같은 날에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게 뭔데요?" "조선에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죽음과 패배의 노래입니다. 아리랑이지요." 나는 이 노래의 의미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 황량한 갈색 벌판을 바라보고 광동코뮨과 해륙풍을 생각하면서 낮은 소리로 아리랑을 불렀다. 그는 대단히 감동하여서 이제까지 들은 노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칭송을 했다. "당신 부인도 이 노래를 알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대로 이 노래를 알고 있지요. 만일 부인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으면 당신은 부인에게 새 옷을 사주고 친절히 대해주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나는 이 노래를 절대로 잊지 않겠어요.” 유치장에서의 일본 간수와의 아리랑 교류, 얼마나 극적인가. 아리랑만이 가능한 상황이다. 이는 아리랑의 대동성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어제의 ‘북방문화의 중심지 문명국 조선’이 오늘의 중국과 일본의 소용돌이에서 슬픈 노래이지만 언젠가는 상생의 노래로 부를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다. 「SONG of ARIRAN」 속의 아리랑은 저항성(抵抗性), 대동성(大同性), 상생성(相生性)을 지닌 노래인 것이다. 이는 곧 아리랑이 지닌 정신으로, 이 때문에 아리랑은 보편 가치를 지닌 노래이다. 바로 김산이 발견한 이 영롱한 ‘아리랑정신’은 그의 투철한 혁명성 못지않은 빛나는 유산인 것이다. 「SONG of ARIRAN」은 김산(金山/1905~1938)으로 표기된 장지학(張志鶴) 또는 장지락(張志樂), 가명 장지락·리철암·류정화·한국류·류허·한산으로 쓴 인물의 생애와 그가 지닌 혁명정신과 그가 지닌 아리랑 정신이 무엇인가를 기록한 값진 책이다. 주인공 김산은 사회주의 혁명가·항일독립투사·아나키스트·국제주의자·민족주의자라는 다양한 평가를 받는 문제적 인물이다.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공산혁명이란 민족해방운동의 한 이념적 무기로서 인식하는 과정과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 차원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독점적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실천 활동(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동시 추구)에 목적을 갖게 되었음을 대변해주는 인물이다. 만주·북경·광동 지역에서 조선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중국공산당에 입당, 활동하였기에 늘 일제의 눈을 피해 활동해야 했다. 아시아의 제국주의적 광풍을 중국 공산당 혁명 성공의 결과로 조선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활동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일원이지만 결코 "작은 약소국 조선이 흘린 피가 결코 물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소금처럼(like salt in water)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견지하였다. 이에 의해 조국에서 일제를 물리치고 새로운 질서에서 평화롭게 동아시아 국가로 함 산다면 모든 종교와 이념이 지극히 도달해야 할 상생의 실천인 것이다. 이러함에서 3.1운동으로 조국을 떠나기 전부터 인식한 아리랑의 속성을 주목하여 담론화 하며 절실한 동지로 삼았다. 그 결과 아리랑에 대한 혁명적 해석, 곧 ‘혁명을 견인하는 극한적 극복의 노래’로 입론하여 함께하였다. 그리고 인간적 교류의 처지에서 불의에 저항하나 크게 하나 되어 대동하고, 끝내는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상생의 질서를 실천하는 노래임을 「SONG of ARIRAN」 에서 외쳤다. 김산은 아리랑정신의 지혜로운 발현자이며, 동시에 아리랑정신의 투철한 실천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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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br>다시 읽는 ‘Song of Ariran’(5)1930년대 중국 내 항일공산혁명 전선에는 아리랑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 결과의 하나가 1940년 9월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정규 국군인 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광복군아리랑’이 공식 군가로 불린 사실이다. 1939년 1월 창립된 한국독립당 당군(黨軍)과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성립된 군대로 이들에게 이미 아리랑이 공유된 결과이다. 이는 곧 김산이 님 웨일즈에게 아리랑을 불러주고 그 의미를 설명해 준 1937년 상황이기도 하다. 제21회에서 제시한 ‘망명과 투옥과 국가적 굴욕을 담은 한국의 오래된 전래민요 아리랑’과 함께 ‘Song of Ariran’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1961년의 ‘한국과 김산의 생애에 관한 주해-나의 연안 비망록’에 두 편의 아리랑이 더 있다. ‘아리랑옥중가’와 ‘아리랑연가’이다. 충분히 님 웨일즈가 김산으로부터 듣고 영감을 받았을만한 노래이다. 김산으로서는 두 번의 투옥과 중국공산당의 질시(嫉視) 속에서 채화하여 간절하게 심연에 두었던 아리랑이었던 것이다. ‘Song of Ariran’ 앞 부분의 진술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있는 대목이 있다. 아리랑고개는 조선왕조의 폭정에 저항한 이들의 처형장으로 서울에 있는데, 이 고개를 오르는 사형수들에 의해 불리는 노래라고 하였다. 아리랑고개를 구체적 처소로 기록한 것은 이 기록이 처음이다. "젊은이 중의 한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민중에게 알려지자, 그 뒤부터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름으로서 자신의 즐거움과 슬픔에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이 애끓는 노래가 한국의 모든 감옥에서 메아리 쳤다. 이윽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었다. "아리랑"은 이 나라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이 노래의 내용은 끊임없이 어려움을 뛰어넘고 또 뛰어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죽음만이 남게 될 뿐이라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진술에서 아리랑은 지배자의 '억압'에 대한 피지배자의 ''저항의 노래'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죽음'이란 표현은 저항의 의미를 극명하게 강조한 것이다. 김산은 님 웨일즈에게 ‘아리랑고개’의 의미를 설명하고 아리랑을 불러 주었음을 알게 한다. 그 기억의 재현이 바로 다음의 ‘옥중가아리랑’이다. 김산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보여준 '옥중가아리랑'(Prisoner's ballad of Ariran)이다. 옥중가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구비/첫번째 고개를 넘어간다. 내 들던 막걸리는 어디 있나/이제는 한강에 펌푸로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재판장 고개를 넘어간다 금시계줄은 어디로 갔나/쇠수갑은 맞지를 않으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감옥행 고개를 넘어간다 운명의 선고를 기다리며/나이제 생사갈림길에 서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련다 아리랑고개에 간이역하나 지어라/집행인기차를 기다려야 하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동지여 동지여 나의 동지여/그대 열두고개에서 멈추지 않으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열세고개를 넘으리니 Prisoner's ballad of Ariran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There are twelve hills of Ariran And now I am crossing the first hill. Where are the wine and beer I used to have? Now it's the Hankiang Pump for me.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 of my court trial. Where is my wristwatch band of bold? These steel hand'cuffs do not fit so well.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 that leads to prison. Now I stand on the frontier of life and death, Waiting for the sentence of doom. Ariran, Ariran, Arari O! Soon I'll be crossing the last hill. Make a new way-station on the hills of Ariran, For I must await the executioner's train.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last of the hills of Ariran. Comrades, comrades, my comrades! I know you will not stop at the twelfth hill, Ariran, Ariran, Arari O! You will cross the thirteenth hill of Ariran. 이 옥중가는 조선의 정치범들이 자주 부르는 노래로 "1921년 투옥된 한 조선 공산주의자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이 사설은 죄수 경험을 여러 단계로 말하고 있다. 즉 경찰에 의한 체포,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 ‘한강 펌프’라고 명명된 물고문, 사형선고의 기다림, 그리고 다른 혁명가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종래의 열두 번째 고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승리 즉 아리랑의 열세 번째 고개를 쟁취할 것을 뜻하는 마지막 구절 등이다. 1921년, 어디에서, 공산주의자 누가 작사를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김산이 처음으로 투옥되기 이전에 아리랑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한다. 1930년말 북경 경찰에 체포되고, 이후 일본영사관에 넘겨지는 상황을 진술한 대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월 10일 아침 여덟시에 형사가 ‘오늘밤은 일찍 잠자리에 드시오. 내일이면 천진으로 이송될 것이요. 오늘밤이 친구나 부인을 부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요.’하고 말했다.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군요.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합시다.’ 그날 밤 나는 휴식도 취할 수 없었고 잠도 오지 않았다. 나는 벽 위에다가 ‘이곳에서 또 다시 아리랑고개를 넘어 간다’고 쓰고 내 이름을 서명하였다. 나는 아침 일찍 경찰서로 끌려갔다.” 김산 스스로도 ‘이곳에서 또 다시 아리랑고개를 넘어 간다’라고 썼다는 사실에서다. 이상과 같은 ‘Song of Ariran’의 진술에서 비록 20년 후에 발간된 ‘한국과 김산의 생애에 관한 주해-나의 연안 비망록’에 수록된 다음의 ‘아리랑연가’ 역시 김산이 님 웨일즈(Nym Wales)에게 불러준 아리랑인 것이 분명하다. 이 노래에 대해서도 "남녀가 번갈아 부르는 이 노래는 많은 절로 되어 있다. 그 가사는 약 2백여년 전에 씌어졌다.(This song has many verses, sung alternately by men and girls. The verses was written about twenty years ago.)”라는 코멘트(Comment)를 한 것도 이를 알려준다. 아리랑연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구비/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떠나는 님은 잡지를 마라/못보다 다시 보면 달콤하거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에 물새는 못사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천하늘에 별들도 많은데/구름 뒤에 날보고 웃는 이 누구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Love song of Ariran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 of Ariran. There are twelve hills of Ariran And now I am crossing the last hill. Never hold back a parting lover- Absence makes reunion sweet. Ariran, Ariran, Arari O! No waterfowl can live on the hills of Ariran. Yet if my lover lets me go freely, Before walking ten li my foot will be sick.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The moon comes up and the stars come out-- who is that laughing at us behind the clouds?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sl of Ariran. 이 ‘아리랑연가’ 3, 4절은 영화 ‘아리랑’ 주제가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설이다. 그러므로 이 4절의 ‘아리랑연가’는 영화 주제가의 곡조로 불린 것이다. 물론 앞에서 살핀 두 편 모두 같은 곡조이다. 3음보 2행 1련에 2행 후렴의 형식에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자가 북경에서 살고 있는 김산의 장자 고영광(84·高永光) 선생을 초청하여 가진 리영희 대기자와 함께 한 김산서훈기념 간담회에서도 직접 모친으로부터 들어 배웠다며 불러 확인한 사실이다. 이에 따라 알 수 있는 것은 김산이 처음 투옥되는 1930년 말 이전에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가 중국의 항일전선과 조선의 감옥에서도 불렸다는 사실이다.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주제가 ‘아리랑’은 이미 국내는 물론 중국에서까지도 한민족 공동체를 상징하는 노래로 전형성과 보편성을 획득한 노래였다는 것이 된다. 이런 사실에서 1941년 발행된 ‘Song of Ariran’은 아리랑史에서도 평가를 받는 기록물인 것이다.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www.arirangnar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