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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신재효의 삶과 판소리판소리와 관련된 삶 신재효는 본관이 평산(平山)이요 자는 백원(百源)이며 호가 동리(桐里)로, 순조 11년(1812) 11월 6일 전북 고창에서 관약방을 하던 신광흡의 1남 3녀 가운데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73세(1884, 고종21년)를 일기로 태어난 집에서 태어난 날짜와 똑같은 날 다시 이 세상을 떠났다. 중인 출신인 아버지 신광흡은 경기도 고양에서 살다가 서울에서 직장(直長)을 지냈는데, 고창현의 경주인 노릇을 하였다. 경주인은 서울에 머물면서 자신이 담당한 지역의 연락 사무를 대행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신광흡은 경주인의 자리에 있으면서 재산을 모았는데, 이 재산은 그의 아들 신재효가 고창에서 향리로 활동하는 데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뒤에 신광흡은 고창에 이주하여 관약방을 하기도 하였다. 신재효의 어머니는 나이 40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정읍에 있는 월조봉에 치성을 드려 신재효를 얻었다고 한다. 신재효는 회갑이 되던 해(1872)에 내장산 영은사의 법당을 중수하였을 때 그 법당의 상량문을 써준 것으로 보아 이 절이 그의 탄생을 빌었던 곳으로 여겨진다. 영은사는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고 이 터에 새로이 내장사가 세워졌다. 부모는 나이 들어 얻었으니 효도하라는 뜻으로 이름을 재효라고 지었는데, 신재효는 부모의 이러한 뜻에 어긋나지 않게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글은 아버지로부터 주로 배웠는데, 그의 아버지 신광흡이 종 7품 벼슬인 직장을 했으며 관약방을 경영한 것으로 미루어 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칠 만큼의 소양은 충분히 갖추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신재효는 철종 3년(1852)에 고창 현감으로 부임한 이익상 밑에서 이방을 지냈고, 이어서 호장까지오른 뒤 은퇴했다. 고양에서 살았던 아버지가 고창에 내려와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재효가 향리의 우두머리격인 호장에 올랐다는 것은 그가 남다른 재능과 함께 현실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호장에서 퇴임한 뒤인 고종 13년(1876)에는 고창현감으로 부임한 유돈수로부터 그 동안의 업적에대해 위로를 받을 정도로 고창에서 대단한 신망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가 죽은 뒤에 여러 향반들이 만장을 써 보낸 것으로 보아, 고창의 향리나 서민들과 신분을 넘어선 폭넓은 교유를 맺었다. 현재 고창현의 관아가 있었던 모양성 안에는 향리 출신의 신재효와 그의 아버지 신광흡의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져 있다. 신재효는 이미 40대 전후에 곡식 1천 석을 추수하고 50 가구가 넘는 세대를 거느린 부호가 되어 있었다. 신재효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치산의 지혜와 근면성, 성실성 등 그의 남다른 노력의 결과에 의해서였다. 물론 부친의 물려준 유산이 치산의 기반이 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가 재산을 모으고 관리하기 위하여 견지했던 근검 절약의 생활 철학은 그가 남긴「치산가」에 잘 나타나 있다. 신재효는 모은 재산을 쓸 줄 모르는 졸부가 아니었다. 병자년(1876)의 대흉년에는 아끼면서 모은 재산을 굶주린 재해민을 돕는 데 아낌없이 썼다. 이때 그는 사람들이 아무 대가 없이 물질적인 신세를 지면 의타심이 생긴다면서 비록 헌 옷가지나 걸레라도 가져와서 곡식과 바꾸어 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물건에 표시를 해두었다가 후일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갚으러 온 사람들에게는 원래의 곡식만을 받고 그보관물을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신재효가 아량이 넓고 매우 인간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온다. 어느 날 밤 도둑이 신재효의 침방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부드러운 말투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이도리에 어긋나는 일임을 타이른 뒤, 돈 1백 냥을 주면서 남을 해치지 말고 바른 사람으로 착하게 살아갈 것을 당부하였다. 얼마 뒤 그 도둑은 1백 냥의 이자까지 내놓으며 과거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러자신재효는 그럴 수 없다며 도둑이 착한 사람이 된 것을 칭찬하며 되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신재효는 자신이 근무하던 관아인 형방청의 건물을 중수하는 데에 돈을 시주하였고, 경복궁의 복원 사업에 원납전으로 5백 냥을 헌납하였다. 특히 광대의 양성과 후원에는 전 재산을 기울였다. 그는 굶주린 백성을 구휼한 공으로 가선대부의 포상을 받았고, 경복궁 재건을 위한 원납전 희사의 공으로 고종 15년(1878)에는 통정대부라는 품계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이라는 명예직을 받기도 하였다. 신재효의 판소리 지원 신재효가 전 재산을 털어서 판소리에 몰두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우선 조선 후기에는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리게 된 계층이 예술 집단의 후원자를 자임하는 현상이 있었는데, 신재효의 판소리에 대한 관심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생산적인 유흥에 몰입하였으며, 뚜렷한 현실 인식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재효는 판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개작한 사설에서 자신의 현실 인식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위한 동력을 발휘하였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향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판소리를 지원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향리로서 각종 연회에 판소리의 연창자를 포함한 가객과 기녀를 동원하는 일을 주선하였을 것이고, 또 고창현에 소속된 당시의 예능인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그는 직업상 판소리의 연창자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점차 판소리에 심취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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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4: 가야고 병창으로 그린 비천상, 강정숙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강정숙의 음악은 흐르는 물과 같다. 그만큼 유연하고 자연스럽다. 기교가 없는 바 아니나 드러나지 않고, 장인적 내공이 없을 리 없으나 나타나질 않는다. 음악이 완전히 체화되어 하나로 흐르니 마음과 음악 간에 경계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음악은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처럼 편안하게 다가오고 간이하게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현란한 재간을 앞세워 음악을 한다. 재간이 앞서가면 가슴속에 뿌리를 둔 감성의 끈이 끊어진다. 심금心琴이 끊어지니 드러나는 소리인들 오죽하겠는가. 우리가 통상 경험하듯 메마르기 짝이 없고, 공허하기 그지없다.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은 역시 고금의 진리가 아닐 수 없다. 깨끗한 흰 바탕에 그림을 그려야 색깔이며 형상이 제대로 각인되지 않겠는가. 매사가 매한가지다. 음악 또한 바탕이 문제다. 바탕은 닦지 않고, 그 위에 재주로만 수繡를 놓으려 하는 세태다. 마음속 정서의 텃밭에 눈길 한 번 주어 보지도 않은 채, 의례적인 관행처럼 손가락 연습에 발성 훈련부터 서두른다. 강정숙 명인의 음악은 이 같은 세간의 풍조와는 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한마디로 신체 일부의 노련한 훈련으로 쌓아올린 음악이 아니다. 기교 훈련에 앞서 배양된 감성적 마음 바탕이 있다. 그 마음 바탕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질일 수도 있고, 어려서부터 갈고 닦은 공력의 덕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남도지방 특유의 지역적 서정이 배태시킨 필연적 인과因果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녀의 음악 속에는 여느 음악에서는 좀해서 감지되지 않는 세미한 악흥이 있다. 더없이 부드럽고 따듯하면서도, 그리움이 자욱한 보랏빛 연무煙霧 같은 미감이 있다. 그가 병창을 하건 가야고를 타건 판소리를 부르건 한결같이 저변에 맥맥이 흘러가는 그녀만의 예술적 태깔이다. 드디어 강정숙 명인이 자신의 음악적 색조 위에, ‘만경벌 두레살이 걸죽한 육담肉談 남도길 굽이굽이 서린 정한情恨들’까지 입혀서 서공철류 가야금 산조 음반을 발간했다. 크게 경하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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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영상] 2007년 11월 24일 '진도씻김굿' 명인 박병천 선생 하늘길 가시던 날 진도만가팀의 상여 행렬2007년 11월 별세한 한국민속예술의 거장 박병천 명인(1933-2007)의 상여 행렬 원본 영상. 사라져가는 한국의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인 진도만가 원본 영상입니다. #진도씻김굿박병천#진도만가#송가인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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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숙 - 가시밭길 걸으며 지켜 온 불 같은 김연수제 소리뛰어난 목구성 하나로 대중을 휘어 잡으며 반(班)ㆍ상(常)을 뛰어넘었던 역대 명창들. 구전되는 판소리 다섯 바탕의(춘향가ㆍ심청가ㆍ흥부가ㆍ수궁가ㆍ적벽가) 가사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기억해 내는 그 총기는 놀라운 것 이었다. 소리 내용의 변환이나 단원이 달라질 때 사이사이에 껴 넣는 임기응변적 추임새가 이른바 ‘붙임새’다. 갑자기 사설 가사를 잊거나 분명히 안 떠오르면 붙임새를 절묘하게 이용하여 위급한 순간들을 모면하곤 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인, 명창들의 소리에도 붙임새를 적절히 사용한 경우가 적지 않다. 고사성어나 순 한문투로 열거된 사설 내용을 사실은 소리꾼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불러 댄 경우가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이런 오살할 잡놈 같으니라구······.”, "요런, 시러배 같은 연놈들 하는 짓거리라능게 겨우······.” 등의 익살과 욕설로 얼렁뚱땅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걸쭉한 소리꾼들의 이런 붙임새 속임수가 요즘이라고 없을 리는 없다. 그러나 ‘동초제’ 판소리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니리, 발림, 붙임새는 물론 가사 전달까지 확실하며 소리 마디마다의 맺고 끊는 매듭이 분명하다. 이는 살아 생전 동초 김연수(金演洙, 1907~1974)의 성격과도 통한다. "우리 선생님의 성격은 한마디로 불꽃이었습니다. 소리에도 경우가 반듯한 것이라며 흐지부지하거나 얼버무리는 건 딱 질색이었어요. 똑똑한 가사 발음으로 슬픈 대목에선 울리고 웃길 때는 박장대소케 하라고 늘 가르치셨습니다.” 김연수 씨의 유일한 제자로 ‘동초제’ 소리 맥을 이어 내고 있는 여류 명창 오정숙(吳貞淑ㆍ57, 1935년 6월 21일생) 씨. "소리가 아니었으면 살아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란 박복한 운명을 털어놓기까지엔 한동안의 망설임이 계속됐다. 준인간문화재(1982년 9월 30일 지정)로 10년 가까이 있다가 1991년에 인간문화재로 지정(제5호, 춘향가)될 때는 자기 설움에 복받쳐 평평 울었다고 한다. 경남 진주시 옥봉동의 외가에서 태어난 오씨는 세 살 적 부모가 갈라서면서 아버지 오삼룡(吳三龍) 씨를 따라 전주에서 성장했다. 환갑이 가까워지는 지금의 나이에도 어머니 문설행(文雪行) 씨에 대한 정은 별로 없다고 한다. 어렸을 때 나무등걸에 걸려 넘어져도 ‘아이구, 우리 아버지’였지 어머니라고는 안 불렀다는 것이다. 부친은 전북 완산 출신으로 전라 좌도 농악패들이 손꼽던 유명한 상쇠였으며 한때는 창극단 활동도 한 전통 예술인이다. "부모 덕봐야 자식 덕본다더니 자식 복도 없어요. 무남독녀로 태어나 친 혈육 하나 없으니 제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더욱 죽으나 사나 소리밖에 없는 것이 ‘내 인생’입니다.” 오씨는 자식보다도 더 소중한 ‘동초제’ 소리와 그 소리의 맥을 이어주는 제자들이 유일한 희망이며 삶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일주(李一珠, 전북 지방 무형문화재, 전주대사습놀이 제5회 대통령상, 현 전주 도립국악원 강사), 조소녀(調小女ㆍ51, 제2회 남도문화재 판소리 대통령상), 민소완(閔小完ㆍ47, 전주 개인 학원), 은희진(殷熙珍ㆍ45, 국립창극단원), 김소영(41, 전북 도립창극단 수석), 윤소인(尹昭仁ㆍ43, 국립국악원), 강정숙(姜貞淑ㆍ39, 국립국악원), 홍성덕(洪性德ㆍ43, 서라벌창극단 단장), 김정민(金貞敏ㆍ40), 김규형(金奎亨ㆍ32), 강선숙(姜仙淑ㆍ31, 극단 ‘민예’ 단원), 남궁정헌(南宮貞憲ㆍ30, 중앙대 국악과), 최영란(崔英蘭ㆍ25, 대전국악원), 박미애(朴美愛ㆍ25, 이대 국악대학원), 나태옥(羅泰玉ㆍ22, 국립창극단) 씨 등이 각 분야서 왕성한 활동을 하며 정정렬(丁貞烈)―김연수―오정숙으로 이어지는 창맥을 지켜 내고 있다. 이들 외에도 수십 명의 문하생들이 더 있어 오씨의 후계 걱정은 마음놓아도 된다. 국악계서 괴팍하고 오기 많기로 알려져 후학들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동초 김연수 씨는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출신으로 14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당시로는 드물게 서울 중동중학교(5년제)를 졸업한 창악계의 지성인이다. 향리에서 축음기를 통해 판소리 공부를 하다가 29세 때 상경, 송만갑(宋萬甲), 이동백(李東伯), 정정열(丁貞烈), 김창환(金昌煥), 유성준(劉成俊) 명창 등을 만나면서 본격 명창 수업에 뛰어든 인물이다. 특히 독보적인 정정열(1873년생) 명창의 춘향가를 물려받아 오정숙 명창에게 전수했다. 김연수 창극단을 통해서도 명성을 날렸고 1962년 초대 국립창극단장을 지내며 1964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됐었다. 비위 안 맞으면 욕도 하고 큰소리도 잘 쳤지만 죽기 전날까지 후학을 지도했다는 일화를 갖고 있다. 와전과 오자가 많던 판소리 사설을 해박한 그의 지식으로 정리해 놓은 공로는 크게 기억되고 있다. 다섯 바탕 중 춘향전 창본은 김씨 생전에 출간 됐으나 네 바탕은 빛을 못 본 채 1974년 3월 9일 간암으로 급서하고 말았다. 이러한 스승 문하에서 제대로 소리 학습한 오씨다. 철들기 전 7세 때 전주와 익산을 오가며 이기권(李基權, 익산 출신 정정열 명창 수제자) 씨한테 소리맛을 들인 후 14세 때 김연수 씨의 ‘우리창극단’에 입단하며 사제간 만남이 시작된다. "선생님 보다는 차라리 부모였어요. 이리 ‘소라단’ 다산 정씨 제각에서의 백일 독공 이후 후계자로 지목하셨던 것 같습니다.” 23세 때는 서울에서 만정(晚汀) 김소희(金素姬)를 만나 3년여 소리 공력을 보태 오씨의 소리는 더욱 힘있게 뻗는다. 오씨 소리의 춘향가 중 어사출두 후 춘향모가 신바람나 휘젓고 나오는 대목은 앉았던 사람이 일어설 정도로 의기양양함을 준다. 1975년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부 장원, 제1회 남도문화재 대통령상(1983년), KBS 국악대상 수상(1984년) 등 묵직한 수상 경력이 다채롭다. 베를린 세계민속음악제(1985년), 제4회 국제평화음악제(1986년 바그다드), 일본 무사시노 예술제(87년), 유럽 순회 공연(89년)과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90년 10월 14일)까지 참석, 대중의 열광과 환호도 받아 보았지만 오씨 가슴은 아직도 덜 채워진 예술혼과 여자 일생의 각박함으로 텅 빈 듯하다고 한다. 남편 배기봉(裵基峰ㆍ57, 국악협회 전북지부장) 씨는 충남 논산 출신으로 고교 시절 전국고수대회(제3회)에서 일등한 한량북의 명인. "좋은 소리 들으면 여운이 3일 간다.”는 시어머니의 이해 속에 오늘까지 살아 왔다고 명창의 험했던 인생길을 말한다. 맹장 밑에 약졸 없다고 이렇게 해서 김연수 씨의 올곧은 소리제는 오정숙 씨를 통해 탄탄히 살아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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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봉 - 최승희 춤맥 이은 한국 무용의 대가"정승집 개가 죽었을 땐 문상객이 줄을 잇고 막상 정승이 죽으니 발길조차 뜸하더라는 옛말을 떠올립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 ‘현직’일 때뿐이라는 각박한 세태를 떠올리면 가슴 속에서 불덩어리가 치솟기도 하고······.” 이 시대 한국 무용의 대가로서 부채춤의 창무자인 김백봉(金白峰ㆍ경희대 명예 교수) 씨는 손바닥 뒤집듯 쉽게 변하는 세상 인심에 몹시 섭섭해 한다. 그 동안 가르쳐 놓은 제자들의 근황을 물으니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동아대와 한양대를 거쳐 1964년부터 경희대 무용과 교수로 재직해 오는 동안 수천 명의 문하생들을 양성해 냈지만 막판에는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 이라고도 표현한다.최근들어 김씨는 큰딸(안병수ㆍ33, 덕성여대 출강)의 한국 무용 이론과 막내딸(안병헌ㆍ31, 경희대 출강)의 무용 실기를 더욱 북돋워 주기 위해 남은 정열을 쏟아 붓고 있다. 여기에다 한국 무용을 전공하는 큰손녀(귀호ㆍ21, 경희대 무용과)와 둘째 손녀(혜진ㆍ16, 서울예고 2년)를 보면 새로운 용기와 힘이 솟구친다."내가 저 애들을 다시 싸잡아 가르쳐 그 최승희(崔承喜) 선생의 춤맥을 확실하게 이어 놓아야지······.” 김씨의 이런 결심은 모두가 1992년 3월 경희대 무용과 교수를 정년 퇴임한 후에 생긴 마음이다.무대 예술 인생을 소원했던 지망생치고 한 번쯤 ‘김백봉 문하생’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안 가져 본 사람이 있을까. 특히 그가 추어 내는 창작 화관무와 양손에 부채를 든 부채춤은 가히 환상적이다. 절도있는 각(꺾음)으로 수없는 변화를 연출해 내면서도 잎 피기 전 수양버들 가지가 한들대듯 끝간 데 없이 유연한 김씨의 춤집은 완벽에 가까운 육체 언어이다. 여기에다 빼어난 미모와 고혹적인 몸매까지 어우러져 젊은 시절의 그는 ‘군중의 우상’이었다. 여자 나이 70을 눈앞에 두고도 샘솟는 정열과 젊음을 간직하고 있는 김백봉 명예 교수. 한평생을 오로지 춤으로만 살아 온 그의 발자취는 근ㆍ현대 한국 무용사와 맥락이 통해 무용사 정리에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된다. 1927년 평안남도 기양에서 출생(2월 12일)한 김씨는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와 동서간이며 그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김백봉 씨의 춤 일생은 요행과 풍상,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이 겹친 가시밭길이었으며 때로는 목숨을 건 도박의 순간도 있었다고 한다.김씨의 무용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절세의 무용가 최승희를 알아야 한다. 1920년대 사회주의 문학을 이끌던 안막(安萬, 본명 안필승) 씨의 부인으로 광복 이후에는 월북해 북한 당국으로부터 ‘영웅’ 칭호까지 받은 ‘사상 무용가’이다. 최승희는 1926년 일본 현대 무용의 창시자인 이시이바쿠의 한국 공연을 보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찬사와 비난을 함께 받아 왔다. "키가 175cm나 되었고 15세에 두 번이나 월반으로 숙명여고를 졸업했습니다. 사람을 뇌살시키는 뛰어난 미모에다 하루 16시간씩 연습하는 타고난 춤꾼이었지요.”김백봉씨의 남편 안제승(安濟承ㆍ72, 전 경희대 무용과 교수) 씨의 증언이다. 최승희 남편인 안필승 씨는 안제승 씨의 둘째 형이며 이래서 최승희와 김백봉은 동서간이 된다. 안제승 씨는 3형제이며 큰형 안보승(安輔承ㆍ87) 씨도 현재 서울 서대문구 역촌동에 생존해 있다.안필승ㆍ최승희 부부는 북한에서 ‘최고 예우’시절을 보내다 70년대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숙청당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제승 씨는 "70년대 초반 인민숙소(시민아파트)를 배당 받았다고 들은 바 있으며 도주하다가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고 말한다. 1920년대만 해도 ‘신식 기술’이었던 트럭운전사의 딸로 태어난 김백봉 씨. 어릴 적 이름이 충실이었던 김씨는 거꾸로 태어나 ‘거꾸리 참외’로 불렸다고 한다. 평양의 명륜여학교에 다니던 시절, 당시 거리에 나붙은 최승희 무용 공연 포스터를 보고 무조건 무용가가 되고 싶어졌단다.아버지 손을 잡고 함께 진남포의 최승희 무용 공연장을 찾아간 것이 13세 때였다. 공연이 끝나고 분장실로 찾아가 "선생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울면서 매달렸다."그 때 최선생님은 쾌히 승낙하셨어요. 후리후리한 키에 꿈결같은 눈매, 날아갈 듯하며 잡힐 듯하던 몸매를 지금도 못 잊습니다. ‘형님’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지만 아무튼 그 분은 무용을 위해 전생부터 준비된 몸이었나 봐요.”그 해(13세) 6월 18일. 어린 김충실은 최승희를 찾아 일본 도쿄로 갔다. 당시 돈 300원을 허리춤에 끼워 주며 혼자 떠나는 어린 딸을 어머니 아버지는 울면서 보냈다. 그 때 아버지는 "일은 자기가 찾아서 하는 것.”이라며 굳은 의지를 심어 주었다고 회고한다. 김씨는 자신이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열 세 살의 소녀가 평양에서 일본 도쿄까지 갔는지를 모르겠다고 한다. 도쿄 최승희 무용소를 찾아간 김씨는 1년여를 빨래ㆍ청소하며 ‘하녀 생활’을 했다.여기서 만난 사람이 바로 현재의 남편 안제승 씨. 당시 안씨는 형수(최승희)와 함께 있으면서 주인집 가정 교사 생활을 했다. ‘선녀’ 같은 소녀 ‘김충실’에 반한 안씨는 이 때부터 사랑이 싹텄나 보다고 회고한다. 이렇게 해서 김백봉 씨는 최승희의 춤맥을 잇게 되고, 17세 때 첫 무대와 함께 이어지는 안제승 씨와의 결혼으로 최씨와의 관계가 더욱 확실해진다. 학도병에 끌려 가면서 김씨와 결혼한 안씨. 이들 부부의 사랑 얘기는 들을수록 애절하며 ‘안제승ㆍ김백봉 부부’가 지켜 온 한국 무용 반세기 또한 누구도 부인 못 할 큼직한 한국 무용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해방, 그리고 이와 더불어 밀어닥친 안씨 일가에 대한 국민들의 오해. 안필승ㆍ최승희, 안제승ㆍ김백봉 부부는 1946년 6월 월북했다."굳이 여러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곳에서의 환대와 감시 그리고 숙청 직전의 탈출 등을 생각하면 내 인생이 왜 이래야 하는지를 고뇌하게 됩니다. 더욱 중요한 건 최승희 선생과의 예술적 마찰입니다. 최선생의 천부적 예술에다 나 자신의 타고난 ‘끼’를 보태고 싶었던 거지요.”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온 이들은 다시 ‘요시찰 인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사상적 행적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순수한 무대 예술이었다. 이 와중에서도 박기홍 씨를 만나 승무를 전수받고 이동안(李東安) 씨를 만나서는 태평무와 승무를 떼받았다.화관무, 부채춤, 차일춤은 물론 무용극 ‘심청전’, ‘우리 마을 이야기’, ‘물긷는 처녀’ 등 2백여 편의 발표작 모두가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들을 감동시켰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축제서는 물론 그 이전에도 김백봉의 한국 무용은 세계인의 가슴 속에 한국의 예술혼을 뚜렷하게 심고 다녔다. ‘무용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조형적인 무대ㆍ육체 언어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대학 강단과 김백봉 무용연구소를 통해 배출된 후학들만도 수천 명을 헤아린다. 김씨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가졌던 열정을 생각하면 세상 인심이 왜 이래야 하는지를 모르겠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행간’에 묻어 둬야 할 사연 들이 무수하다면서 노염을 다시 한 번 불태우겠다는 각오다.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그의 자택에는 보관문화훈장(1981년)과 함께 각국 에서 받은 훈장들이 거실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화려했던 지난날과 ‘현직’을 떠난 ‘거인’의 현실. 김씨는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살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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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 현(絃)의 인생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서울 법대 출신의 재인서양의 고전 음악은 세계 각국에서 연주가 거듭될 때마다 놀라운 찬사로 이어진다. 또 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품격까지를 격상시켜 주고 신분 상승 효과마저 곁들여 주는데 왜 한국인에게는 우리의 고전, 전통 음악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푸대접까지 받아야 하는가.황병기(黃秉冀ㆍ57, 이대 음대) 교수는 자신이 스스로 찾아낸 ‘학문적 화두’를 부둥켜안고 확신에 찬 해답을 얻어내기 위해 매일매일 골몰하고 있다. 깨어 있을 때마다 가야금의 현으로 퉁겨져 표현될 인간 내면 세계의 악상을 가다듬고 때로는 선정에 든 편안한 마음으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서울 재동국교―경기중―경기고―서울대 법대. 누구 앞에서도 ‘꿀리지 않을’ 한국 사회에서의 학벌이다. ‘서울 법대’를 졸업한 그가 가야금 주자로 ‘천시받는 국악 인생’을 보무도 당당히 걷고 있다. 그래서 황병기 교수의 국악 인생은 우리 국악의 희망과도 통한다."자신이 하는 일을 놓고 사명감 운운하는 사람을 가장 경멸합니다. 본인의 능력껏 분수대로 열심히 사는 것이지요.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늘 긍지와 소신을 스스로 찾아감이 윤택하게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황 교수는 가야금을 통해 결혼(부인은 여류작가 한말숙 씨, 한씨도 대학 시절 가야금에 심취돼 국립국악원서 황씨와 만남)을 했고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평양에 간 음악인이 됐다. 1990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작곡가 윤이상 씨의 초청을 받았던 것. 연주 여행을 통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구미 각국을 몇 차례 순방했고 현지 대학 교수로도 한국 음악의 세계화를 위해 쉴새 없이 뛰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 내놓은 ‘황병기 가야금 창작곡집’은 매년 판매율이 20% 증가하는 베스트셀러로 입지가 확보돼 있다.제자들 또한 기라성 같다. 이재숙(李在淑, 서울음대 교수), 김정자(金靜子, 서울음대 교수), 조청자(趙靑子, 이대 강사), 서원숙(徐元淑, 단국대 교수), 이승열(李承烈, 국립국악원장), 양연섭(梁連燮, 한양대 교수), 양승희(梁勝姬, 서울대, 이대 강사), 문재숙(文在淑, 이대 강사), 박현숙(朴賢淑, 이대 강사), 윤소희(尹素姬, 이대 강사), 곽은아(郭銀雅, 이대 강사) 등을 우선 손꼽는다. 앤드루 킬릭(영국인, 미 워싱턴대 박사 과정), 바버라 스미스(미 하와이대 교수), 로버트 가피어스(전 워싱턴대 교수) 등은 그가 아끼는 외국인 제자들이다. 황 교수는 혹시 거명 안 된 수많은 제자들이 섭섭히 생각하면 어쩌느냐며 교단을 통해 사제지연을 맺은 후학들이 수백 명은 될 것이라고 했다.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의 316번지 그의 자택. 서울 종로구 계동 147의 13번지에서 태어나 처음 ‘문밖’으로 나온 것이 현재의 집이라고 한다. 부친(황태문)의 고향은 전북 옥구로 선대 시묘(侍墓)는 그곳에서 받들고 있다. 부친은 우주 황씨 전국중앙종친회 초대회장을 지냈다.사업가였던 아버지 덕에 풍요로웠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기중 2년 시절 6ㆍ25로 피란 가면서 ‘소년 황병기’의 운명이 바뀐다. 부산 최초의 국악 연구소인 김동민(金東旻) 씨 사무실에서 김철옥 씨가 뜯어 내는 가야금 소리를 들은 것이다. 황씨는 그 때 "저게 바로 우리 할아버지들이 듣던 소리구나.” 하는 깜짝 놀람과 함께 등 뒤에서 "너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느냐.”는 다급한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그 후로는 만류도 아랑곳없이 가야금에 미쳤다고 한다. 부산 용두산공원으로 피란 내려와 있던 국립국악원에 찾아가 김영윤(金永胤) 씨한테 정악 가야금을 밤낮 가릴 것 없이 열중했다."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지는 공부나 일의 능률은 그 성취 효과가 놀랍습니다. 인생사의 어떤 일이든 억지로는 안 되는 법이지요. 아무튼 그 당시는 잠을 자면서도 가야금 꿈을 꾸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도 왜 가야금을 보고 그렇게 전율했고 어째서 숙명 같은 것을 느꼈는지 모르겠습니다.”그렇다고 황씨가 학교 공부에 소홀한 건 절대 아니었다. 경기고 시절에는 영문 소설을 써 당시 교내 신문이었던 ‘경기 타임스’에 게재했고, 특히 수학에 뛰어나 각고 끝에 찾아낸 방정식의 답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 얼굴’ 같았다고 말한다.황교수의 두 아들도 그를 닮아서인지 장남은 미 하버드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막내 아들은 보스턴대 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두 딸은 시집보낸 지 오래이고.한국전쟁이 끝나고 국립국악원이 서울에 자리잡으며 황씨의 가야금에 대한 정열은 더욱 농익어 간다. 이즈음 김윤덕(金允德) 선생을 만나 그 유명한 정남희(丁南希)제 산조를 전수받는다. 김씨는 정씨의 수제자로 가야금 산조의 뛰어난 명인. 여기에 활기를 더해 준 것이 심상건(沈相健) 씨의 민속악 가야금 산조. "정남희 선생의 가야금 산조는 별다른 치장이 없어 담백합니다. 일반대중이 이해하기는 좀 힘든 편이나 구성감이 좋고 지적이어서 맛을 알면 그냥 흠뻑 취해 버리고 말아요. 가야금 연주 기법 중 10여개의 유파가 전해 오고 있으나 정남희제 산조는 들을수록 기품이 와 닿죠.”정남희 씨는 월북 국악인으로 한때 그의 음악 세계가 수난을 당한 때도 있다. 1990년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에 가 낯익은 연주 가락이 있어 찾아가 만나니 바로 정씨의 제자 김길환 씨(평양 음악무용대 교수)였다고. 이처럼 대가들의 연주 기법은 확연히 구분되는 계통이 확립돼 있다는 황 교수의 말이다.고3 때의 전국음악콩쿠르 1등(덕성여대 주최), 대학 3년 시절 차지한 KBS 주최 전국음악콩쿠르(가야금) 최우수상 수상 경력 등으로 졸업(1959년)과 동시 서울음대 강사로 발탁된다. 1959년 신설된 음대를 현제명 학장이 맡으며 국악 쪽을 떠맡긴 것이다."서울법대를 나와 판ㆍ검사 안하고 가야금이나 메고 다니느냐는 소릴 수없이 들었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우리 전통 민속 음악을 제대로 분별해 내는 음악 판ㆍ검사가 되겠노라고 다짐을 거듭했습니다. 국내에서 잘 몰라 그렇지 우리의 전통 음악이 유럽과 미국에서 각광받고 그들의 심성 속에 깊이 파고든 지 오래예요.”62년부터 내딛은 황 교수의 가야금곡 작곡 편력은 ‘한국의 국악 작곡사’ 와도 통한다. 나원화(羅元和) 씨한테 전수받은 정악 가곡과 어우러진 곡풍은 신비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국화 옆에서’, ‘숲’, ‘전설’, ‘영목’, ‘비단길’, ‘가라도’, ‘침향무’ 등은 국악 입문생도들의 ‘고전 음악’이 되어 버렸다. 황교수의 작품 중 ‘미궁(迷宮)’은 최저현을 활로 때려 진동하는 신비음과 인성이 조화를 이룬 상승악으로 매우 충격적이다. 인간의 ‘원초적 공포’를 도출시켜 현대 문명과의 괴리 현상을 비틀어 낸 이 곡은 한때 ‘금지곡’으로 지목되기도 했다.황 교수는 1974년 이화여대 음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음악가’로서의 인생을 새로 굳혔다고 회고한다. 경기고 4년 선배인 전위 미술가 백남준(白南準) 씨와 서울 법대 1년 선배인 가수 최희준(崔喜準) 씨와도 예술적 교류를 갖고 있다."스승의 학풍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학문 세계는 늘 새롭게 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국악의 학문적 접근이 ‘국악의 세계화’를 앞당기고 균형 감각을 상실 않는 세계 음악으로 깊숙이 뿌리내리게 할 것입니다.”가야금 연주와 그만의 작곡 기법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적 명사가 되어 버린 ‘신세대의 재인 황병기 교수’. 오랜 작곡 생활 속에 곡이 많지 않은 이유를 "곡을 쓰는 데는 2주일이 소요되나 구상하는 데만 2년이 걸린다.”고 대답한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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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뱅이 화신으로 살아 온 외곬 50년, 이은관50여 년간 이은관(李殷官, 1917년 11월 27일생) 옹이 찢어 버린 배뱅이 아버지 갓은 모두 3000여 개가 넘는다. ······ 이 갓을 들고 보니이 갓은 우리 아버지 갓이 아니로구나(갈기갈기 갓을 찢고) ······또다시 이 갓을 들고 보니이것도 우리 아버지 갓이 아니로구나 ······(이번엔 울상을 지으며 쫘악쫘악 갓을 찢어 버린다). 이렇듯 신명 나기에 따라 배뱅이굿 한 판(약 1시간)에 서너 개씩 찢어 온 세월. 언뜻 한 판에 찢는 갓을 세 개씩만 어림잡아도 지금까지 이옹이 불러온 배뱅이굿은 1000번이 넘는다. 그것도 한 가지 소리로만 1000번 이상. 이젠 그쯤하고 지칠 때도 됐으련만 앞으로도 1000개 이상은 더 찢고 싶다고 욕심을 낸다.이옹의 연세를 알면 모두가 깜작 놀란다(이은관 옹은 2014년 3월 12일 향년 97세로 별세하셨다). "이은관 씨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되었느냐.”고 되묻는다. 1950년대 라디오 시절부터 들어 온 높고 청아한 목소리만 기억할 뿐, 그를 좇아다닌 세월은 뒷전에 미뤄 놓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서도소리 기능 보유자(29호, 1984년)로 지정된 이씨는 물론 ‘관산융마(關山戎馬)’, ‘수심가(愁心歌)’, ‘난봉가타령’ 등 온갖 서도소리를 간드러지게 잘 부른다. 그러나 이씨가 배뱅이굿을 안 하고 ‘딴짓’을 하면 모여든 사람들은 예외없이 투덜댄다. 역시 배뱅이굿은 이은관 씨가 질러대야 제맛이 나고 이은관 하면 무조건 배뱅이굿이다. 이토록 이씨는 ‘이은관 = 배뱅이굿’이란 등식 속에 평생 동안 살아오고 있다.지금은 오갈 수 없게 된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회산리 에서 태어난 이씨는 부친의 ‘산 높고 골 깊으니 여기가 청산마루로구나’라는 농요(農謠) 작대기 장단 속에 꿈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그 아버지에 그 아들일런가. 아무튼 이씨는 천부적인 목구성을 타고 났다. 안방에서 악을 쓰면 부엌 살강의 ‘놋대접이 움직일 정도’로 목통이 컸다며 단전고성(丹田高聲)을 자랑한다. 이천공립보통학교 졸업과 함께 이천읍으로 이사한 이씨는 한때 백수건달 노릇을 했다. "은관이 너는 목청 좋으니 소리나 해 보라.”는 친구들의 부추김에 이천 명월관, 화산관 등을 드나들며 ‘객쩍은 소리’하고 공술이나 얻어먹는 신세였다. 아버지가 양자였던 탓에 할아버지 성화로 장가까지 일찍 가 놓았다(16세). ‘시골 건달’ 이씨는 우연찮게 황해도 건달 황덕열(黃德烈)을 만나면서 전연 뜻밖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황해도 황주 권번 소리 선생인 이인수(李仁洙) 씨를 소개받은 것. 이씨의 그 때 나이 열 아홉이었다. 이렇게 해서 일생을 통해 울고 웃는 사이가 되어버린 배뱅이와의 첫인연이 맺어지게 된다. 이씨는 "얼굴도 모르는 최정승의 딸 배뱅이가 평생 나를 먹여 살리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며 천연덕스럽게 웃는다. 그렇다면 이은관 씨와 부부지간보다 더 자별해진 배뱅이는 도대체 누구인가.한 옛날 서울에 김정승, 이정승, 최정승 셋이 있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지성으로 명산대찰에 빌어 난 딸들이 세월네(이정승), 네월네(김정승), 배뱅이(최정승). 이들이 자라 세월네와 네월네는 시집 가 잘사는데 배뱅이는 시주 나온 상좌중과 사연(邪戀)에 빠진다. 몰래 정을 통한 상좌중이 훌쩍 떠나 버리자 배뱅이는 그를 못 잊어 상사병으로 죽고 만다.한이 맺힌 최정승과 마누라는 죽은 딸의 넋이나마 만나 보겠다고 팔도의 유명 무당 모두를 불러 모은다. 이 때 평양의 가짜 박수무당이 이 동네 주막집에서 배뱅이집 내력을 미리 듣고 능청스런 넋두리와 울음으로 배뱅이 부모를 속여 많은 재물을 빼앗아 간다는 줄거리다. 어떻게 보면 딸 죽고 재산까지 날리는 분통 터지는 서민들의 한이 포개지지만 이은관 씨의 해학과 넉살좋은 재담으로 듣는 사람은 희비가 엇갈린다.이은관 씨 스승인 이인수 선생은 구한말 평안남도 용강의 유명 소리꾼이었던 김관준(金寬俊) 씨의 수제자. 김관준은 이인수 외에도 최순애(獨順愛), 김칠성(金七星), 김주호(金周鎬), 김밀화주(金密花珠) 등의 소리꾼을 제자로 두었으며 배뱅이굿, 안중근가, 까투리타령 등을 지었다고 전해진다.이렇게 배운 이은관 씨는 21세에 장연 권번 선생을 지내고 23세에는 ‘나도 한번 유명인이 되어 보자’고 무작정 상경한다. 황명선(黃明善, 건달 소리꾼) 씨 소개로 종로 권번에 가 배뱅이굿을 해대니 동기들은 평평 울어댔다. 이 때 최경식(崔景植) 씨를 만나 경기민요와 시조를 배워 두었다.이 때부터 이씨는 바빠졌다. 국일관 놀음청에 나가 장안에서 유명했던 신해중월(申海中月), 백목단(白牧丹) 앞에서 소리를 선보였고 김봉업(어름광대) 씨 단체에 들어가 가설 무대에도 섰다. 박진(朴珍, 작고, 연출가) 씨 소개로 신불출(申不出, 민요 재담가) 씨를 만나서는 국민복 입고 다니며 해방될 때까지 전국 곳곳을 유랑 극단으로 누볐다. 그 당시 군수 월급이 45원일 때 엿새 공연 나가 60원을 받았다고 한다. 어딜가나 ‘이은관의 배뱅이굿’은 3~4창의 열광이 보통이었다. 해방 뒤엔 대한국악원 민요부에 속해 세월을 보내다 장소팔, 고춘자(高春子) 씨와 유랑 극단을 만들어 서민들과 울고 웃으며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음반 취입, 영화 ‘배뱅이굿’ 주연, 라디오ㆍTV 출연 등으로 돈도 벌고 인기도 누릴 만큼 누려온 그다. 미국, 일본, 베트남 등 명성만큼이나 해외 공연을 많이 다녔고 KBS 국악대상(1982년), 보관문화훈장(1990년)도 탔지만 그의 남은 꿈은 ‘제2의 이은관’을 길러 내는 일이다. 20년 전부터 차린 민속예술학원(서울 종로구 장사동 130의 1 삼성빌딩 4층)을 통해 배출된 제자들이 꽤 많지만 현역에서 뛰는 소리꾼이 많지 않다며 밝은 표정만은 아니다. 쓸 만한 제자가 불러도 이씨만큼 알아 주지 않아 힘이 빠진다는 하소연을 자주 듣는다는 것. 박준영(朴準英ㆍ35, 민요 학원), 박경옥(朴京玉ㆍ32, 부천), 인정임(印貞姙ㆍ34, 서울), 김경열ㆍ김경선(33, 쌍둥이, 재일), 최병문(28, 회사원), 박기옥(33, 재일) 씨 등이 이씨 소리제를 이어갈 동량(棟梁)들이다.1남6녀를 두어 모두 출가시키고 노부부가 ‘괜찮은 말년’을 보낸다고 했다. 젊은 시절 백수 건달, 권번 선생 등의 생활을 거쳐 오면서도 ‘가정만은 성역으로 꼭 지켜 내야 된다’는 생각을 가져 온 것이 지금도 대견스럽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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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 박헌봉. 민속예술을 살리는 길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기산(岐山). 경상남도 산청 출신. 성호(星浩)의 2남이다. 6세에 서당에서 한학을 시작하여 15세까지 사서삼경을 공부하였다. 1921년에 상경하여 한성강습소(漢城講習所) 보통과를 거쳐 1923년에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 고등과 3부를 졸업하였다. 1924년진주(晋州)에서 김덕천(金德天)·임한수(林漢洙)에게 2년간 가야금풍류(伽倻琴風流)·가야금병창(伽倻琴倂唱)·고법(鼓法) 등 전통음악을 공부하였다. 1934년에 진주음률연구회(晋州音律硏究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있으면서 풍류와 민속악을 연구하였다. 1936년에 상경하여 정악견습소(正樂見習所)에서 정악을, 아악부(雅樂部)에서 아악풍류(雅樂風流)를 연구하였고, 1938년에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근무하면서 2년간 전통음악을, 조선가무연구회(朝鮮歌舞硏究會)에서 경서도(京西道) 가무를 연구하였다. 1941년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소속 조선음악부의 상무이사를 역임한 그는 함화진(부장)·김석구(창악)·최경식(민요)·김정실(섭외), 이상의 임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5년 조국해방과 더불어 처음에 함화진(咸和鎭)·현철(玄哲) 등과 함께 국악건설본부(國樂建設本部)를 구성하였다. 1945년 8월 29일에는 국악건설본부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국악회(國樂會)를 창설했으며, 다시 그해 10월에는 그 명칭을 국악원(國樂院)으로 개칭하고 원장에 함화진, 부원장에 박헌봉을 선출하였다. 1947년 8월 함화진의 뒤를 이어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의 원장으로 취임했고, 유기룡(총무국장)·임서방(공연국장)·이치종(기획국장)·정기중(서무부장)·박동실(창악부장)·최경식(민요부장)·정남희(기악부장)·김천흥(무용부장)·조상선(국극부장)·채동선(연구부장)과 함께 활동하였다. 대한국악원장·서울시문화위원·국립중앙극장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1960년 개교한 국악예술학교의 초대 교장에 취임하여 11년간 재직하였다. 일평생 국악발전에 헌신했다. 국악협회(國樂協會) 이사장과 문화재위원을 역임했으며, 특히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유기룡(劉起龍)·홍윤식(洪潤植)과 함께 많은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를 조사·연구·발굴하였다.1956년에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을 창설하고 원장 겸 이사장에 취임하여 국악 진흥에 힘썼으며, 1960년에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60년 설립된 국악예술학교의 초대교장 시절 그는 이사인 이병각·김용주·전용순·박선기·문영회·박귀희·박초월·박소군, 그리고 감사인 김은호·박영권과 함께 활동하였다. 1960~1971년 재단법인 국악학원(國樂學院) 기성회 초대 이사장 및 국악예술학교 초대 학교장으로 재임했으며, 국악원장·국립중앙극장 운영위원·한국국악협회(韓國國樂協會)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서울시문화상·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수상했고, 저서로 『唱樂大綱』이 있다. 2012년 4월 26일 기산국악제전위원회는 기산 박헌봉 선생 현창사업회 설립과 기산 박헌봉 국악당 건립추진위원회 결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은 홍윤식(洪潤植) 동국대 명예교수를 제2회 박헌봉국악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1963년에는 국립극장운영위원 및 한국국악협회(韓國國樂協會)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韓國藝術文化團體總聯合會) 부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64년에는 문화재위원회(文化財委員會)의 위원을 역임하였다. 국악, 특히 민속악의 부흥과 교육에 공헌하여 1963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저서로는 『창악대강(唱樂大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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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외길 60여 년, 국악계 마지막 자존심, 김소희1979년 5월 전북 고창 청년회의소는 이 고장 출신 여류 명창 ‘만정(晚汀) 김소희 여사 명창 기념비’를 그의 고향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 세웠다. 김소희 씨는 인물 많기로 유명한 고창에서 이곳 사람들이 선뜻 내세우는 ‘자존심’ 중의 하나. 고창 출신 미당 서정주 시인은 명창 기념비 뒷면에 다음과 같이 읊어 새겼다. 만정 그대의 노래 소리에는 고창 흥덕의 옛날 못물에 몇 만 년 이어 핀 연꽃이 들어 있도다. 학같이 훤출하고 거북이처럼 질기던 이 겨레의 바른 숨결이 잠겨 있도다······. 만정은 김소희(金素姬 1917년 10월 17일생) 씨의 아호. 국악계에선 ‘만정 선생’으로 통한다. 5척 단구의 여자 몸이지만 그만큼 처신이 당당하고 매사를 맺고 끊는 맛이 분명하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소리꾼으로 인간문화재(제5호, 1964년 1월)로 지정되었다. 유명세도 높아 그녀의 일생에 관한 부분도 웬만한 사람은 알 만큼 알고 있다. 그러나 국악계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통하는 만정의 가슴 속 쇳덩이 같은 응어리는 아직도 녹을 줄 모르고 오히려 커 가고 있다. 소리를 한답시고 배움을 뒤로 미뤄 놓은 평생의 철부지 회한, 여자의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대중 인기인의 길, 창은 ‘상것’들이나 하는 소리 정도로 알며 하시당하고 살아 온 세월······. 이 모든 것들이 예인의 길에 새로 입문하려는 후학들에겐 금과옥조 같은 스승의 가르침으로 남는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평범한 아낙으로 요조숙녀의 길을 가지, 가시밭길 같은 국악인의 길은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있는 50여 평 대지의 2층 한옥이 김씨의 집이다. 평생 모은 재산을 국악계에 희사한다는 ‘낭보’에 접할 때마다 김씨의 가슴은 뜨끔하다고 했다. 재복이 안 따라서인지 자신은 60여 년의 국악 일생에 남은 거라곤 집 한 채 뿐이기 때문이다. 광주고등보통학교 시절(13세) 당대 여류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의 소리를 가설 무대서 듣고 공부를 작파해 버린 김씨는 광주에 내려와 소리를 가르치던 동편제 소리 대가 송만갑(宋萬甲) 선생 문하에 들어가 심청가를 전수받으며 평생 명창의 길에 들어선다. 고창은 창악계 여류 명창의 비조(鼻祖)로 꼽히는 진채선(陳彩仙, 동리 신재효 제자) 허금파(許錦波, 1920년 원각사 시절 월매 역)를 배출시킨 곳이다. 김씨 또한 전라도 풍류 대가였던 부친(피리ㆍ단소의 대가)의 ‘끼’를 받아 언뜻 듣기만 해도 훌륭히 모창해 냈다. 6개월 학습 결과는 남원명창대회(14세) 1등으로 나타났다. 그 때 특상은 군산의 나이 많은 손채옥(孫菜玉), 2등은 이름도 낯익은 신숙 씨였다. 이후 전주의 정성린(鄭成麟) 씨를 찾아가 승무 살풀이를 배운 뒤(14세) 이듬해 겨울 ‘영신환’ 가방 하나 들고 상경 길에 오른다. 당시 연극 배우였던 복혜숙(卜惠淑, 작고) 씨와 친구였던 이모 김남수(金南洙) 씨가 명고수ㆍ명무 한성준(韓誠俊) 씨를 소개해 주며 ‘오늘의 김소희’로 일어서게 된다. 김소희(동편제) 창은 ‘상것들이나 하는 소리’라는 삐뚤어진 시각 때문에 천대받고 살면서도 국악을 위해 평생 헌신했던 예인이었다. 김씨 눈을 보며 "사목(뱀눈)이라 재주 있겠구먼.” 하던 감격과 충격을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이 때부터 조선성악연구회를 드나들며 창악계를 주름 잡던 송만갑, 정정렬(丁貞烈, 춘향가) 선생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만난 인연치고 스승 복이 많다고 지금껏 자랑하고 있다. 이 때 이모는 아명 옥희(玉姬), 호적명 순옥(順玉)을 버리고 ‘소희’라 지어 주며 "기왕 들어선 길, 오기로 버려 내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22세에는 명창 박동실(朴東實, 납북) 씨를 화순 동복으로 찾아가 수궁가와 적벽가를 보탠 이후 김계문(金桂文, 향제 가곡), 유순석(양금), 이승환(거문고), 강태홍(姜太弘)ㆍ김윤덕(金允德) 씨(가야금) 등 그야말로 스승 복이 줄줄이 이어진다. 김씨가 아껴 사용하는 아호 만정(晚汀)은 19세 때 김종일(金鍾益, 우석대 설립자) 선생이 즐겨 찾던 ‘관상장이’한테 부탁해 지어 준 것이다. 그 때 관상장이는 "싫으나 좋으나 80까지는 소리를 해야 되겠다.”고 ‘악담’을 했다며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한다. 15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의 춘향가 취입, 빅터ㆍ오케이 레코드 양사의 김소희 쟁탈전, 쌀 한 가마 3원 50전 할 때 2백 원씩 받던 월급, 창극단 조선창극좌에서 민족 의식 고취시킨다며 왜경에게 쫓기고 유치장에서 밤새우던 일 등이 해방 전 교차된 만정의 영욕이다. 여성국악동호회(이사장 박녹주) 햇님달님의 인기, 혈육보다 더 애정이 진한 박귀희(朴貴姬, 가야금 병창)와 피난 시절 부산에서 하던 식당, 국악예술 고등학교 전신인 민속예술학원 설립, 대만과 공산권만 빼놓고 거의 다닌 세계 순회 공연, 그의 후반의 일생은 이렇게 요약된다. 심청가 5장 전집ㆍ춘향가 6장 전집 취입, 국민훈장 동백장(197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음악 부문 상(1984년) 수상 등의 행적이 빛나건만 사는 게 고달프고 여인의 길이 서러워 수 차례 죽을 결심도 굳혔었다고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우전 신호열(雨田 辛鎬烈) 선생한테 배운 안진경(顔眞卿) 체로 1967~70년 내리 3년을 국전 서예에 입선했다. 병든 어머니를 입원시키고 아들 교복 사줄 돈이 없어 가락지 빼어 팔 때 만정은 붓을 들어 고약한 팔자에 대한 분노를 삭였다고 했다. 붓끝에 떨어지는 묵정(墨精)의 흔적 속에 ‘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체휼하고 삼계(三界)잡념을 떨쳐 버린단다. 최근엔 월하(月荷, 여창 가곡)의 권유로 3년 전 입교했던 원불교에 새삼 애착을 갖고 있다. 이렇게 살아 온 만정의 예술속은 장영찬(張永瓚, 명창, 장판개의 아들)ㆍ안향연ㆍ김동애(이상 작고) 씨와 딸 박윤초(朴倫初, 판소리ㆍ기악ㆍ춤) 씨를 비롯 성창순(成昌順, 인간문화재 5호)ㆍ남해성(南海星, 준문화재)ㆍ박양덕(朴良德, 국악인 김무길 씨 부인)ㆍ신영희(申英姬, 조교)ㆍ유수정(劉秀正, 국립창극단)ㆍ한정하(韓正廈, 전수생)ㆍ이명희(李明姬, 1990년 전주대사습 대통령상) 씨 등이 잇고 있다. 주부로는 박정숙(朴貞淑)ㆍ한인환(韓仁煥)ㆍ김경애(金敬愛) 씨 등이 마음이 가고, 민속예술학원ㆍ국악고 등을 통해 그녀의 창맥을 잇는 제자는 1000명도 족히 넘는다. 가성을 안쓰며 상ㆍ중ㆍ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아직도 정동편(正東便) 소리를 한배 채워 부르는 김소희 여사. 그런 그녀가 살풀이 덧뵈기춤(즉흥춤)을 출 때는 소리꾼인지 춤꾼인지 구별 못 한다는 전문가들의 탄성이다. 서울올림픽 개ㆍ폐회식 때 ‘떠나가는 배’의 뒤풀이 소리로 세계를 숙연케 하고 전율시켰던 김소희. 그에게 첫결혼은 언제 했느냐고 물으니 "그런 건 왜 묻느냐.”고 정색을 했다. • 김소희 동편제 명창 계보(번호는 배운 순서)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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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가락으로 승화시킨 서른 살 망부의 한, 안비취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된 경기민요에는 12잡가가 있다. ①유산가(遊山歌) ②적벽가(赤壁歌) ③제비가(燕子歌) ④소춘향가(小春香歌) ⑤집장가(執杖歌. 집장 사령) ⑥형장가(刑杖歌) ⑦평양가(平孃歌) ⑧선유가(船遊歌) ⑨ 출인가(出引歌) ⑩십장가(十杖歌) ⑪방물가(房物歌) ⑫달거리(月齢歌)가 그것이다. 이들 12잡가의 음악의 특징은 4분의 6박자인 도드리 장단이 대부분이며, 형식은 약간 불투명한 유절(마루) 형식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직설적 표현이 많다. 서울ㆍ경기도를 중심으로 충청 북부와 강원 일부 지역까지 애창돼 중부 지방 민요로도 불린다.12잡가는 세 사람의 인간문화재로 나뉘어 지정ㆍ보호받고 있다. 이중 안비취(安翡翠, 1926년 3월 21일생) 씨가 유산가ㆍ제비가ㆍ소춘향가ㆍ십장가를, 묵계월 씨가 적벽가ㆍ출인가ㆍ선유가ㆍ방물가를 부르며, 이은주 씨는 집장가ㆍ평양가ㆍ형장가ㆍ달거리로 지정돼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다.매년 설날이나 추석 등 경축 무대에 ‘안비취와 그 제자들’로 소개되며, 기골 장대한 체구가 대중을 압도해 버리는 안비취 여사.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바로 옆의 이춘희(李春羲, 89년 준문화재 지정), 김혜란(본명은 숙근, 전수자), 이호연(본명 연화, 전수자) 씨 등도 TV 화면을 통해 낯익은 얼굴들이다."4남1녀의 외동딸로 태어났지요. 위로 언니가 일찍 죽자 명이 길라는 뜻에서 ‘복식(福植)’이란 남자 이름으로 지었답니다. ‘비취’란 예명은 12잡가를 떼 주신 최정식(崔貞植)선생이 제가 16세 때 방송에 첫 출연하게 되자 지어 주신 겁니다. 흔히 비취 반지로 알고 있지만 중국 문헌 속에 나오는 새 이름이라고 들었어요.”서울 종로구 효자동 대궐 가까운 곳에서 나고 자란 안씨는 순흥 안씨 보성군파로 당시 부친은 효자동에서 제일 큰 잡화상을 운영했다. 부잣집에다 절에 가 빌어서 난 딸로 애시당초 부족함이나 어려움 같은 건 남의 일이었다고 한다.손으로 태엽 감으며 아버지가 듣던 ‘빅타’ 유성기가 좋아 보여 늘 곁에서 참견했다는 것. 이 때 들은 ‘기막힌 소리’들이 이화중선(李花中仙), 김소희(金素姬), 백운선, 장학선 명창 들의 애절한 판소리. 소학교에 들어갔으나 머리는 좋았는데 공부는 못했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등 소리 가사는 듣기만 해도 줄줄 외워 댔지만 특히 산수는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했다고 한다.안씨의 ‘팔자’는 열 세 살 때의 대담한 가출로 판가름난다. 세 살 위의 이웃집 민향심(閔香心)과 무단 가출, 하규일(河圭一) 씨가 운영하던 정악 교습소에 들어갔다. 그 때 하씨는 이왕직 아악부에 나가면서 별도 교습소를 차려 놓고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안씨는 궁중정재(춤)와 4검무, 연하대무, 무산향 등을 익히고 이병성 씨한테 가곡을 정식으로 전수받았다. 뒤늦게 안 어머니의 지원으로 2년 뒤에는 한성준(韓成俊) 씨를 만나 민속춤(승무)을, 최정식(崔貞植) 씨한테는 경기12잡가를 배우기에 이른다. 이래서 가무에 능한 오늘의 안비취로 일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최정식 씨는 ‘금강산타령’, ‘풍등가’ 등을 작사ㆍ작곡한 장구 명인으로 그의 문하에서 세 명의 인간문화재가 배출됐다. 하규일 씨는 일제 때 조선 권번을 움직인 당대 가무의 대가였다."정악에서 민속악 쪽으로 나오니 창법이 달랐습니다. 특히 상성(고음)이 가곡보다 힘들어 적응하기가 힘들었지요.” 안비취 씨는 정악만을 끝까지 지켜 내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다."어려서부터 시집은 정말 가기 싫었고 소리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사 뜻대로만 됩니까. 19세에 강기준(姜基準) 씨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 분은 내 나이 서른에 딸만 둘 남겨 놓고 훌쩍 떠나 버렸지요.”시집살이하는 동안 ‘여편네가 살림은 안 하고 소리질만 해 댄다’ 하여 가정 불화가 잦았다. 안씨는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술 없이는 못 살겠다는 황소고집이었다고 한다. 남편을 잃은 천추의 한은 춤사위와 소리 가락으로 승화 됐고 결혼식에 참석조차 않은 친정 아버지 가슴을 녹이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6ㆍ25 때 부산 피난지에서의 공연과 1959년(34세) 박귀희(朴貴姬)ㆍ임춘앵ㆍ복혜숙(영화 배우)ㆍ최용자(무용가)ㆍ임유앵(임춘앵 언니) 씨와의 일본 순회 공연이 잊혀지지 않는단다. 일본 첫 공연은 최상덕(연출가), 박진(연출가), 이서구(李瑞求) 씨를 중심으로 ‘대춘향가’를 선보여 교포들을 울렸다. 자유당 말기에는 박초월(木初月), 김소희(金素姬), 박귀희 씨와 함께 당시 오재경(吳在璟) 공보처장관을 설득, 오늘의 국악협회를 인가 받아 창립하는 등 국악 발전에도 앞장섰다. 한때는 골프에 심취, 명동 사보이호텔 건너편에 실내 연습장을 만들기도 했으나 첫 사업은 보기좋게 실패했다.서울 중구 남산동의 안비취 후계양성소에는 대학을 나온 장학생들도 적지 않다. 50명이 넘는 제자 중 최영숙(35)ㆍ이금미(30, 본명 생길, 국립국악원)ㆍ전숙희(44) 씨는 전수자로 등록됐고, 남궁랑(35)ㆍ이유라(34)ㆍ전영희(39) 씨 등은 장학생.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했던가. 준문화재로 지정(1989년)된 이춘희(서울 출생) 씨도 중학 시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민요만 부른다며 체육 선생한테 매맞은 소리 솜씨다. 이창배 민요학원에서 배우다 1971년 안씨를 만나 본격 학습에 들어간 뒤 1975년 안씨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수석 전수생으로 등록됐다. 한때는 김부해 음악학원에서 배운 숨은 솜씨로 가수 황금심 씨 노래를 구분 못 하게 잘했으며 최근에는 롯데월드에서 민요 부르기 강좌(매주 화요일)를 맡고 있다. 안비취 선생은 경기민요에 놀이가 끼지 않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판소리에는 고수와의 대화(아니리)가 있고, 굿에는 리듬ㆍ의상ㆍ소리ㆍ재담까지 포함된 바라지가 신바람을 내 주는데 12잡가는 단조로움의 연속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이지산 스님(재미)이 귀국하면 제자 김혜란 씨에게 바라지 가락을 배우게 해 경기민요와 굿장단의 만남도 시도해 볼 계획이다. 중대, 추계예술대, 서울예전에 나가 강의하면서도 이런 변신 가능성을 여러 번 토의해 보았다고 한다. "한생애 예인의 길을 걷느라 여자로서 잃은 것도 많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쌍계사(雙磎寺) 국사암과 서울 근교 절을 자주 찾으며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를 생각합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건지······. 경기민요에 담긴 내용들도 부의 허망함과 헛된 욕심을 나무라는 내용이 많지요.” • 안비취 경기민요 계보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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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희를 읽다’(1)‘이춘희를 읽다’는 인간문화재 이춘희(李春羲) 선생의 자전적 구술로 엮은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를 요약, 소개하는 글이다. 경기민요 명창의 고난과 영예의 역정을 통해 동시대 국악인들에게 참 명인의 지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함께하기 위해서다. 3회에 걸쳐 전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이춘희를 읽다’(1) 1. 소리에 눈뜨고, 소리 길에 들다 경기소리 명창 이춘희(李春羲) 선생의 구술로 엮은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가 발간되었다. 영어로는 "The Life and Art of Lee Chun Hee, Master of Gyeonggi Folk Songs”이라고 하여 ’경기민요 명인 이춘희의 삶과 예술’이라고 풀어 표현했다. 기존의 서사체 전기(傳記)의 틀을 벗어나 현재의 활동상을 중심으로 오늘에 이른 지난 길을 정리하고, 다시 가야할 길을 열어 보이는 생생한 보고서이다. 이런 성격은 서명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가 전해 준다. 선생의 호(號) ‘旦聲’(아침의 소리)의 의미를 문장화 한 것인데, 아직도 새날의 아침을 기다려 맞으며 해야 할 일을 위해 준비하는 부지런하고 성실함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책머리 발간사는 단 1쪽으로 간명하다. 네 토막의 글 중 세 번째 토막이 직접적인 발행 목적으로 읽힌다. "어떻게 하면 제자들에게 소리를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목숨과도 같은 여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스승으로서 경기민요인으로서 잘 살아야하겠다는 책임감과 생각들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제자, 둘째는 여식(서정화)에게, 그리고 관객(펜)들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했다. 이렇게 책임을 스스로 내세운 것은 어느 정도는 할만큼 했음을 드러낸 자신감이며 권위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춘희’를 읽는 무게감을 갖게 해 준다. 곧 "나처럼 명창이 되기 위해서는 나처럼 노력해라. 그러면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다.”라는 단언이기 때문이다. 이는 두 분의 평가를 발간사에서 제시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실, 생전에 자전적 구술서를 낸 다는 것 자체가 자신감의 표현 아닌가. 우리가 부러워해야 하는 명인의 자부심이다. 우선 서연호(고려대)교수가 성음에 대해 "어떤 고음에도 잡티가 전혀 없는 잘 훈련된 목과 탁월한 성량, 음처리에 빈틈이 없는 완결성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고음과 성량은 천성이지만 ‘완결성’과 ‘잘 훈련된’ 것에 방점을 두었다. 소리하는 누구나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다음은 김해숙(前 국립국악원) 원장의 진술이다. "경기민요에 어눌하던 나의 귀를 확 트이게 한 경험을 하게 하였는데, 경기민요를 그토록 고졸하고 품격있게 느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부럽기 짝이 없는 찬사다. 그런데 이 같은 평가와 찬사는 결코 과장되거나 이 분들만의 취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이 오래전에 한 축사에서 규정을 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춘희 명창의 소리 세계는 확실히 남다른 특장이 있다. 경기민요 특유의 신명을 끌어내면서도 진득한 무게감을 더해 준다. 낙이불류(樂而不流)의 품도를 느끼게 한다. 결코 숙련된 기교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따라서 단성(旦聲) 이춘희 명창의 노래는 경기민요의 격을 한층 높이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 인품으로 균형을 이룬 진솔한 음악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증언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대가의 이만한 평가와 찬사는 이 책의 페이지를 빨리 넘기게 해 준다. 이 책은 다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은 어린 시절 소리 인연과 입문 과정을 담았다. 출생지가 서울 본토박이 한남동 부군당(府君堂) 근처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 매년 정월 초하루 날의 마을굿을 보며 자랐다. 무당집에서 당집까지의 행렬에 끼어 악기소리와 노래 소리를 들으며 한살 한살 자랐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의 ‘사발가’를 가슴으로 들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들은 ‘사발가’의 굿거리장단이 ‘소리병’의 씨앗이 되어 각인되었다. "어린 춘희가 만난 것은 노래였다. 노래에 대한 끼를 발견하고 난 이후에 노래와 함께 찾아오는 밝은 기운과 생동감은 어린 춘희를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하였다. 그 사건의 시작은 한남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음악시간에 부른 ‘봄 아가씨’이다.” 이 경험으로 자신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라디오를 소리선생으로 삼게 되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동요와 민요와 대중가요는 청각이 예민한 소녀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특히 장안의 화제였던 일일연속극 ‘장희빈’의 주제가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와 민요조 구성진 창법의 황금심을 동경했다. 대중적인 노래의 매력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18세가 되던 1968년, 김부해(金富海,1918~1988)가 운영하는 가요학원을 찾았다. 가수의 꿈을 키우기 위해 악보를 받아 피아노 반주에 의한 반복 연습을 하는 과정이다. 희망을 갖고 2년을 다녔다. 선생에게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김부해 작곡의 ‘백령도 처녀’라는 곡을 가수 최숙자가 취입하게 되었는데, 이 때 코러스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달갑지 않았다. 자신에게 만족감 같은 것이 없었다. 가요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마음에서 떠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문득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대중가요가 아니라 민요라는 것을 깨닫고 민요학원을 찾게” 된 것이다.(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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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薄色, 소리는 絶色 -귀명창의 연인 李花中仙일제시대의 판소리는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가기는 하였으나 이전 황금기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시대의 판소리는 5명창으로 알려진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이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이들의 뒤를 이어 이화중선. 임방울. 박녹주. 김여란. 김연수 등이 명창으로 활약하였다. 후에 이화중선의 소개로 송만갑을 만나 국창의 위치에까지 올랐던 김소희는 이화중선의 심청가 한 대목을 듣고는 온통 혼을 빼앗겼다고 고백할정도로 당시 이화중선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이화중선은 명창 박녹주와 달리 그녀의 탄생과 죽음 대목이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고향만 해도 부산 동래, 전남 보성 벌교, 전남 남원 등 설이 분분한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부산 동래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화중선 1898년 부산 동래에서 출생했으며 어렸을 때 이름은 李鳳鶴이었으며 아주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가 전설의 새인 봉황과 학처럼 오래 살라고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1999년 「영남음악사연구」란 논문집을 펴 낸 향토음악사 연구가 손태룡씨는 "이화중선은 다섯살때 동래에서 전남 보성군 벌교면으로 이사갔고, 전남 남원군 수지면 호곡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 , 평범한 시골 아낙으로서의 삶을 보내던 중 명창 송만갑이 이끄는 협률사 공연에 반해 시집을 뛰쳐나와 소리꾼이 됐다”고 주장했는데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1918년, 송만갑의 협률사가 들어와 흠실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처음으로 보게 되는 협률사의 국창과 여류 명창들을 구경하려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화중선도 그 틈에 끼어서 구경을 하였는데, 난생 처음으로 들어보는 판소리와 창극 춘향전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날 밤 화중선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상하게도 어쩐지 자신의 길은 촌부생활이 아닌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3일간 계속된 협률사 공연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경하는 동안에 마음의 동요는 더하였다. 그곳에서 받은 감동과 충격으로 인하여 그동안 자신도 알지 못했던 화중선의 소리에 대한 열정을 일깨웠으며, 자기도 판소리를 배워서 여류명창으로 입신양명해 보려는 생각이 불같이 일어난 것이다. 화중선은 밤마다 번민에 사로잡혀 미칠 것만 같은 심사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화중선은 남편도 가문도 체면도 저버리고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화중선은 덮어놓고 남원으로 달려왔으나 판소리를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배울 것인지 목표도 방향도 알 수 없었다. 남원거리를 방황하다가 어느 노파의 안내로 들어 간 것이 무당집이었다. 화중선은 그 집에 있으면서 무당이 가르쳐 주는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무당은 화중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느 주색가에게 몸을 팔도록 끈덕지게 졸라대어 할 수없이 그 집을 나오게 된다. 그 당시 남원에 거주한 장득주(장재백의 조카)는 명창은 못되어도, 본래 명창의 문하에서 이수하였던 만큼 조격이 높고 남원에서는 일류라는 평판이있었다. 화중선은 소문을 듣고 장득주가 사는 집으로 찾아가 소리를 배우고 싶다고 간청하였으나 하인들이 문전박대를 하고 들여보내 주질 않았다. 어떻게 하든 소리를 배우고 싶었던 화중선은 장득주의 동생이 아직 총각이며 술독에 빠져 지내느라 장가를 들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장득주의 동생과 혼인하는 것이 장득주에게서 소리를 배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는 장득주의 동생 장혁주와 맞선을 보고 결국 혼인을 했다. 장득주는 자신이 소리를 할 때마다 화중선이 문밖에서 한창동안 기웃거리다 들어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또 부엌에서 몰래 숨죽이며 소리하는 모습도 보았다. 장득주는 동생의 아내가 소리에 관심이 있다는 것과 함께 그녀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차렸다. 음악성이 높고 배우려고 하는 열정이 남다른 것을 높이 샀으며, 장차 명창이 될 큰 재목감이라는 것을 알고는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가르쳤다. 화중선은 장득주에게서 소리를 배운지 몇년만에 <춘향가>,<심청가>,<흥보가> 세 마당을 완전히 습득했다. 그 후 화중선은 장혁주와 이혼하고 어느 부자 모씨의 첩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 5백석의 재산을 얻게 된다. 더이상 물질에 어려움이 없게 된 화중선은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선 더 큰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다시 남편과 가정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서울로 올라와 朝鮮券番에 妓籍을 두고 공부를 하는 한편, 명창 송만갑이 이끄는 창극단인 협률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화중선의 소리를 들은 송만갑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소리란 본래 어려서부터 배워야만 명창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법인데, 화중선은 스무살이 넘어서야 소리를 배웠어도 그렇듯 곱고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억지로 꾸며내지 않아도 감정이 그대로 살아있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분명 타고난 소리꾼이 틀림다는 것을 알아챈 까닭이었다. 화중선의 얼굴은 박색이었으나 그 성음만은 월등하게 아름답고 샘물 솟듯이 막힌 데가 없었다. 소리를 조작하지 않고 나오는대로, 부르는대로 하여도 규범에 틀림없이 유창하게 잘 불렀다. 그러한 그녀의 청아하고 감정이 어린 목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화중선의 이같은 타고난 소리는 다른 명창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그녀만의 특징이었다.1923년 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한 「전국판소리대회」가 열렸다. 그녀도 서울에 올라와 그런 큰 무대에 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당시 판소리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배설향도 참가해서 긴장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아버지를 그리는 심청의 마음을 애끊는 가락으로 불러 명창대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일등으로 뽑힌 화중선은 당시 '소리의 왕'이라고 불리던 박기홍으로부터 '화중선'이란 예명을 받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배설향이 여왕이라면 이봉학은 가히 꽃중의 선녀로세. 내 자네를 위해 이름을 하나 지어주겠네. '꽃중의 선녀'라는 뜻으로 '화중선'이라 함은 어떨까? 지금부터 이봉학이란 이름 대신에 '이화중선'이란 이름을 사용하려무나" 이때부터 이봉학이란 이름을 버리고 이화중선이라는 예명으로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명창이 되어서 서울의 창극 무대에 서기 위해 세 번씩이나 가정과 남편을 버리고 온갖 고생을 다했던 화중선은 그 보답으로 송만갑의 협률사에서 활동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화중선이 잠을 설치며 꿈꿔왔던 명창의 길로 드디어 들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 위의 박수갈채를 받는 화중선은 인기와는 반대로 외롭고 쓸쓸한 자신의 삶을 고민하여 살았다고 전해진다.1935년 장안사, 연흥사와 같은 창극 전문 극장이 일제의 치밀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활동사진의 보급으로 인한 경영난이 겹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당연 창극 활동이 부진하게 되었다. 협률사에서 더 이상 소리를 못할 걸 안 화중선은 정식 남편으로 알려진 林完元이 이끄는 대동가극단에 들어가 판소리와 창극을 계속했다. 대동가극단에는 강남중, 임방울 등의 명창과 박초선, 박초홍 등이 가담해 판소리 창극의 토막극, 남도민요, 줄타기 등을 펼치며 지방을 돌아다니며 공연했다.1943년에는 일본의 한 레코드 회사에서 임방울과 이화중선의 레코드를 취입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대동가극단의 단원 모두를 초청해서 일본 순회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초청이 아니라 위문단이란 이름의 반강제적인 공연이었으며 출연료도 주지 않고 여비와 숙식비 정도로만 지불하려는 일제의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일제는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건 예술인이건 적당한 명목을 만들어 마구 부려 먹고 있었다. 대동가극단 단원들은 억울함을 속으로 삼키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공연을 떠나게 되었다.이화중선은 전국 각지와 일본 등지를 여행하며 맑고 청아한 애원성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한없이 밀려드는 고독감과 잔병치레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허약해져가기만 했으며, 정처없이 떠도는 유랑 극단 생활에 그만 지쳐버리고 말았다. 화중선은 본래 약한 체질인데다가 너무 무리하여 유랑 극단 생활을 하다보니 자연 이름 모를 병에 걸려 건강상태가 최악의 상태로 나빠졌다. 화중선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되기 어려운 것을 알고는 큰 슬픔에 잠겨있었다. 동료 명창들이 힘들어 하는 화중선을 위로하기도 했지만, 이미 깊은 병마와 싸워 지쳐버린 화중선에게 별로 큰 용기를 주질 못했다. 화중선의 입에선 죽음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기 시작했다.그러던 어느 날 규슈에서 세도 나이카이를 항해 중이던 여객선에 가극단 일행은 지친 몸으로 올랐다. 화중선은 항해중인 배의 갑판에 올라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화중선의 몸이 힘없이 나풀거리며 바다에 떨어졌다. 그렇게 억새풀같이 한 많은 화중선의 예술 인생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시신은 사가현 앞바다에서 인양 됐는데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 때 화중선의 나이 46세였다. 참으로 극적인 소리인생을 살았던 화중선은 20여년간의 예술혼을 불태워 국악사의 전설적인 여류 명창으로 남겨지게 되었다.이화중선의 삶은 가끔 아편을 즐겼고, 혈육을 남기지 않고 이승을 떴다는 측면에서 박녹주의 삶과 비슷했다. 하지만 소리의 질감은 박녹주와 확연히 달랐다. 박녹주는 동편제 판소리의 정통을 따랐지만 이화중선은 판소리를 대중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의 소리는 일반인들한테는 듣기에 더없이 좋았다. 자연 레코드회사들이 그녀를 붙잡는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화중선은 당대 여류명창 중에서 가장 많은 205장의 유성음반을 남겼다. 한때 달성권번 측에서 대구로 내려와 후학 지도를 권했지만 그녀는 소리하는 사람은 공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지도는 하지 않는 것이라며 전국순회공연에 청춘을 바쳤다. 그녀의 친동생 李中仙(1901∼32)도 명창이었다. 중선은 언니의 유명세에 가려 명창임에도 대중적 인기를 별로 얻지 못했다. 언니가 ‘추월만정 ’ ‘사랑가’(‘춘향가’의 한 대목) 등으로 사람들의 얼을 빼앗을 때, 중선은 흥타령과 육자배기 가락으로 서민들의 한을 달래주었다. 먹고살기가 너무도 힘겨웠던 일제시대를 살아야했던 조선의 민중들에게 이들 자매는 큰 위안이며, 힘이 되어주기도 하였을 것이다. 남보다 늦은 20세가 되어서야 소리의 인생을 시작한 화중선이었지만, 타계하던 그날까지 귀명창들의 연인으로 존재하면서 김초향과 더불어 여류 창악계의 쌍벽으로 화려한 명성을 남기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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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가에 실려 온 70년, 영원한 소리꾼, 묵계월백이숙제 착한 이와 도척 같은 몹쓸 놈도 죽어지면 허사로다.역려건곤에(逆旅乾坤) 부생이 약몽(若夢)하니 즐거움도 얼만고병촉야유(秉燭夜遊)하며 독서담론 자락하니 한가하기 측량없다 ······.일생이 이러하니 상산사호(商山四皓) 죽림칠현 한가롭다.이만하면 적송자(赤松子) 안기생(安期生)을 부러하랴범려(范蠡)의 오호주(五湖舟)와 장자방(張子房)의 사병벽곡(謝病辟穀)소광의 산천금(散千金)과 도연명의 귀거래는 모두 다 작은 일이 아니로다 ······. 깊은 밤, 은근한 석유 등잔 불빛이 창호지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한동네 또래 할머니들 대여섯이 둘러앉아 ‘이 집’ 며느리가 읊는 알듯말듯한 소리를 내 신세와 견줘 가며 듣고 있다. ‘소리’하는 며느리가 지칠까 봐 이따금씩 ‘그려!’ 하며 추임새로 부추긴다. 할머니 무릎에 앉아 뭐가 뭔지도 모르며 골똘히 듣고 있던 손자 녀석은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이 때 구슬픈 듯하면서도 청아한 목소리로 읊어 대던 ‘며느리의 소리’가 바로 ‘삼설기’다.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같은 얘기책에 청을 넣어 구성지게 읽었다.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게 책 읽고 편지 읽는 투의 바로 그 ‘목청’이었다.삼설기는 수많은 경기잡가 중에서도 엄연히 ‘족보 있는 소리’다. 잡가에 능한 소리꾼이 많건만 묵계월(墨挂月ㆍ72,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씨의 삼설기는 단연 독보적이며 발군이다. 그래서 묵씨는 ‘묵계월의 삼설기가 기막히다’는 칭송을 들을 때마다 16세 적 수양모(이정숙) 집 사랑방까지 찾아와 그 소리를 가르쳐 준 이문원(李文元) 선생을 잊지 못한다.인간문화재 묵계월 씨는 또래 소리꾼 이은주, 안비취 씨와 함께 꽤나 알려진 이름이다. 설이나 정월 대보름, 추석 등 민족 고유 명절 때면 TV를 통해 ‘묵계월과 그 문하생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다. 늘 깨끗한 한복에 쪽머리나 찌고 만단 시름없이 소리만 하고 살 것 같은 묵씨에게도 인생의 우여곡절은 깊다. 그가 살아 온 ‘한 생애’는 묵씨 자신의 것이라기 보다는 동시대를 살아 온 동료, 선ㆍ후배 국악인들과도 연관지어 가볍게 지나칠 내용들이 아니다. 바로 국악 1세대들의 현장 육성이기 때문이다.묵씨는 서울에서 나고(중구 광희동 2가 357번지) 자란 순 서울 토박이다. 아버지(이윤기)는 언제 돌아가셨는지 기억도 없고, 열 한 살 때 만난 양어머니(이정숙)에 의해 한 소녀의 운명은 반전해 버리고 만다."그 집에 살던 양언니 이름이 묵계홍이었어요. 소리는 별로였지만 얼굴이 예뻤습니다. 계월이라 지으면 팔자가 좋아질 것이라며 그 집 성을 따 묵계월이라 부르게 된 겁니다.”그 때가 열 두 살 적. 본명 이경옥(李瓊玉)을 버리고 예명 묵계월이라 써온 지 60년이 넘었다. 웬일인지 이씨 집안에는 남자가 귀해 족보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며 아쉬워한다. 수양어머니는 소리 선생 이광식(李光植) 씨를 불러 개인 학습을 시켰다. 1년여 동안 여창 지름, 남창 지름, 시조, 가사 등 기초를 익혔지만 뛰어난 소리는 아니었다고 회상한다.양모 손에 이끌려 조선 권번에 입적한 것이 13세. 여기서 주수봉(朱壽鳳) 씨를 만나 경기12잡가를 속속들이 배우게 된다. 이 때 조선 권번에는 70~80명의 예기들로 붐볐고 하규일(河圭一) 씨가 가곡을 가르치고 있었다. 기악, 무용부도 있었지만 묵씨는 오직 경기잡가에만 몰두했다. 권번 학습이 끝나면서(14세) 과장에도 더러 나가고 사랑놀음에 자주 불렸다. 자그마한 몸매에서 터져 나오는 다부진 소리에 사랑어른들은 매료됐고 가는 곳마다 ‘묵계월뿐’이었다고 한 시절의 풍류를 떠올린다. "기왕에 소리해 먹고살 팔자라면 이골나게 배워야 되겠더군요. 독선생(김윤태)을 모셔다 붙임새를 새로 보태고 최정식(崔貞植) 선생을 찾아가서는 자청해서 경기민요를 배웠습니다. 무슨 짓이든 해야 먹고사는 세상, 확실한 ‘자기 일’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18세에 ‘화초머리’ 얹은 채 인력거를 타고 명월관, 국일관, 천향각을 주름 잡던 일, 쌀 한 가마니에 7원씩 할 때 놀음채를 25원씩이나 받던 전성기 얘기 등은 행간에 접어 넣자고 한다. 해방(25세), 6ㆍ25 등 민족의 격동기를 살면서도 묵씨는 목청을 지켜 내기 위해 개인 놀음청에도 응했고, 또 그것이 먹고사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부산 피란 시절에도 그랬고 수복 후 서울에 다시와서도 남편과 자식을 위해 목소리만은 생명처럼 아껴야 했다.이래서 묵씨는 상ㆍ중ㆍ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특히 중ㆍ상청 부분에서 꺾어 올려치는 끝막음 소리는 그의 제자들만이 이어받아 낼 수 있는 일품의 경기민요다.임정란(林貞蘭ㆍ50, 준문화재)ㆍ고주랑(高柱琅ㆍ46)ㆍ임수연(34)ㆍ조경희(趙慶姬ㆍ33)ㆍ김운경(32)ㆍ정경숙(30) 씨 등이 이수생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는 문하생들이며, 박순금(38)ㆍ최근용(32)ㆍ김진희(28)ㆍ최근순ㆍ최보물(32)ㆍ김덕례(29)ㆍ이명희(25) 등은 전수생.서울 중구 무학동 5번지 중부소방서 건물 앞 ‘경기12잡가 묵계월 전수소’에는 문선진(37), 배미숙(28) 씨 등 교습생만도 30명이 넘어 묵씨의 경기민요 맥은 탄탄하다. 다만 소리좀 할 만하면 결혼과 함께 작파해 버려 들인 공력이 아까울 때가 많다고 늘 아쉬워한다. 풋고추 절임김치 문어 전복 곁들여황소주 꿀 타 향단이 들려 오리정으로 나간다 ······.이제 가면 언제 요료 오만 한을 일러 주오.명년 춘색 돌아를 오면 꽃 피거든 돌아를 볼까 ······.곤히 든 잠 행여나 깨울세라등도 대고 배도 대며 쩔래쩔래 흔들면서일어나오 일어나오 겨우 든 잠깨어나서 눈떠 보니 내 낭군일세······. 경기민요 중 출인가(出引歌)의 소절들. 경기잡가는 ①유산가, ②적벽가, ③제비가(연자가), ④소춘향가, ⑤집장가(집장 사령), ⑥형장가, ⑦평양가, ⑧선유가, ⑨출인가, ⑩십장가, ⑪방물가, ⑫달거리(월령가) 등 크게 12가지로 나뉘어져 있다.이 중 묵계월 씨는 적벽가ㆍ출인가ㆍ선유가ㆍ방물가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1975년 7월 12일), 이은주(李銀珠) 씨는 집장가ㆍ평양가ㆍ형장가ㆍ달거리로, 나머지는 안비취 씨 몫으로 구분돼 있다. 1971년 묵계월, 이은주, 안비취, 김옥심, 이소향 씨 등이 만든 민요연구회는 이들 경기민요꾼의 권익을 증진시키며 사회적 예우도 격상시켰다."배운 게 소리였고 살기 위해 잡가를 불렀지요. 누가 인간문화재 같은 거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미국도 구경하고 일본에도 다녀왔습니다. 인생사라는 게 꼭 잘돼야 되겠대서 잘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이제는 여자 나이 70이 넘다 보니(1920년 10월 19일생) 별 생각이 다 든다고 했다. 아차 하면 한 달이고 문득 깨어 보면 한 해가 가 버리고······. 곱던 얼굴 생각하며 젊은 제자들이 찾아들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수시키려 사정하며 가르친다. 22세에 결혼하여 1남2녀를 두고 지금은 손자, 손녀, 외손자, 외손녀를 둔 할머니지만 시름에 겨워 홀로 뒤척이는 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청춘에 짓밟힌 애끊는 사랑눈물을 흘리며 어디로 가나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묵계월 씨는 임과의 사랑, 인생무상이 듬뿍 담겨져 있는 강원도 민요도 즐겨 부른다고 했다. 애틋하면서도 홀로 서려는 기개가 확실한 애곡(哀曲)이어서 더욱 그렇다고 한다. • 묵계월 경기12잡가 계보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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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이춘희 [인터뷰]/글:조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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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천, 가ㆍ무ㆍ악에 능한 씻김굿의 예능보유자피는 못 속인다. 진도 무당 박병천(朴秉千ㆍ58, 진도씻김굿 기능 보유자) 씨는 자신이 무업에 종사하게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이 일이 천하다고 여겨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어디서나 자신있게 나선다. 오히려 몸 속에서 우러나는 천부적인 몸통발림, 재기(才技), 목청을 놔두고 무얼 하겠느냐는 되물음이다. "진도 입대조(入代祖)가 9대라니까 적어도 우리 가문은 250년 이상을 무업에 종사한 거여.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빌어 준 덕택에 숱한 사람들이 마음놓고 좋은 곳으로 갔을 거구먼.” 어려서부터 어정(굿)판을 좇아 다니며 몸에 익힌 박씨의 남도 풍물 가락은 귀신까지 감복시켜 버리고 만다. 특히 가(歌), 무(舞), 악(樂), 의식(儀式)은 물론 농악에까지 능해 가히 이 분야의 독보적 존재다. 박병천과 무악. 삼현육각(징ㆍ장구ㆍ대금ㆍ북ㆍ쌍피리ㆍ아쟁)으로 뒷바라지하는 씻김굿의 무악은 당연히 징이 발군이다. 잔잔한 파도같이 밀려오는 삼현육각의 소용돌이가 갑자기 멈춰버리고 대금과 쌍피리의 구성진 죽관음이 한 맺힌 망자의 넋을 위무할 즈음 난데없는 박병천의 징이 오장육부를 훑어 내며 마무리지어 버린다. 그의 징 소리는 일반 사물놀이의 징 소리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듣는 이의 마음가짐과 한의 두께에 따라 계면(界面, 슬프고 애원적인 것) 섞인 탄식음일 수 있고 우렁차고 씩씩한 미래성일 수도 있다. 박씨의 무악은 1985년 베를린음악제에 출전, 6개국 32개 지역을 순회하며 음악 선진국들을 놀라게 했고 LA올림픽 개막 축제 공연, 니카라과 세계민속음악제 등을 통해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의 원초적 감성에 호소하는 무악의 기본음은 동서양은 물론, 유ㆍ무식, 종교까지를 뛰어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무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요즘의 외국 유학보다도 힘든 당시 목포 유학(목포중, 6년제)을 마치고 한때는 딴 직업을 찾으려 했지만 무슨 일을 해도 되는 게 없었단다. 스무 살 때 어머니 김소심(金小心, 무가의 대가였음) 임종을 지켜보며 받은 충격이 오늘로 이어진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혼수 상태에서 잠깐 정신이 돌아오면 "아가, 오늘이 음력 며칠이제······. 내 건너 안서방네 성주굿 해 줘야 할 텐디······.” 순간 박씨는 자귀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충격을 느꼈단다. 한평생을 ‘무당’ 이라 천대받으면서도 죽은 사람 좋은 곳으로 가 달라고 빌어 온 무업이 먹고살기 위해 한 일이 아니었음을 번개스치듯 깨달았다는 것이다. "어머니, 지가 한번 대신 해볼까요?.” 이 말에 김소심 씨는 벌떡 일어나 "배울테면 똑바로 배워야 한다. 어정판에 돈 조금 내놓는 건 가난해서 그런 게야······. 돈 적다고 슬슬 하다가는 신장이 노하는 법이야.” 이후 박씨는 굿판에 가 돈타령한 적 없고 돈 벌어 써 본 일도 없다. 일곱 살 때부터 부락 농악칠 때 무동을 서 인기를 독차지했고 국민학교 때는 학예회 콩쿠르에 나가 ‘끼’를 보여 줬다. 고교 시절 밴드부에 들어가 클라리넷을 불며 ‘요것이 바로 혈통 세습’임을 스스로 느꼈다는 것이다. 쉽게 손만 떼면 곡이 절로 나왔다고. "한때는 내가 전라도 ‘번개’였지. 무당이라고 업신여기는 놈은 무조건 한방부터 내질러 버렸으니까. 도대체 남 잘되고 좋은 곳으로 가라 빌어 주는 게 뭐 잘못된 거냐는 생각이었지······.” 그의 주먹 솜씨는 전남에서 알아줬고 알 만한 사람은 대세 불리하면 박씨 이름을 팔고 다닐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가락 마디엔 징채, 북채, 장구채를 쥐어 생긴 상수리만한 굳은 살들이 돋아 있다. 진도 무당은 박(朴)ㆍ함(咸)ㆍ노(魯)ㆍ채(蔡)ㆍ최(崔)ㆍ이(李)ㆍ김(金)의 칠성(七姓)받이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전통 세습무는 밀양 박씨가 뚜렷한 단일 계보를 이어오고 있다. 박씨 조부(대금 명인)가 타계했을 당시 (일제 때) "비록 천한 사람이 죽었지만 진도군장(珍島郡葬)으로 모셔졌다.”면서 세습무 집안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진도 신청(神廳) 계보는 박씨 가문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다. 중ㆍ고ㆍ대학은 물론 대학원 강의까지 나가며 국문ㆍ민속학 교수들과 난상 토론을 전개하고 진도만가(挽歌), 북춤, 강강수월래, 다시래기(초상집에서 상주를 위로하는 놀이), 씻김굿 등을 다듬고 정리해 이 분야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다. 1971년 전국민속경연대회 국무총리상(남도 들노래팀), 1972년 국무총리상(강강수월래), 1973년 대통령상(강강수월래), 1974년 문교부 장관상(진도만가), 1975년 거문도뱃노래 발표, 1976년 진도다시래기 발표 등 민속학에 끼친 공헌도 만만치 않다. 그 자신 인간문화재 72호(1980년 지정, 진도씻김굿 기능 보유자)로 남도굿과 가락을 통해 17명의 중앙ㆍ지방 문화재 지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도 박씨는 자신한다. 문명교(서양 종교 등 무를 업신여기는 종교를 그는 ‘문명교’라 불렀다.)를 믿는 집안에서도 객적은 일이 있으면 무(巫)가 혹세무민이 아님을 현장에서 보여 주겠다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박씨는 쓸데없는 피해 의식, 열패감 등으로 조상을 속이려는 재인 후손들을 경멸한다. 우리 민속악의 고향이며 연원인 무악을 잘 보존하고 되살려 맥을 되찾아야 할 책임이 오히려 뒤따르고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 민족의 원형을 담고 있는 무굿이 시절 인연을 잘못 만나 한동안 밀렸지만, 이제는 우리 것을 바로 보고 찾으려는 안목이 생겨 운세가 달라지고 있다고 내다본다. 다섯 바탕 판소리 장단 외에 ‘선부리’ 가락까지 들어간 무악은 서양 음악에만 심취된 사람들도 녹여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씨는 지금 재인 가문의 단명과 손(孫) 귀함을 크게 염려하고 있다. 300년 가까운 가문의 세습무가 자신의 대에 와 끊어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9가지 종류(한 가지만 9시간씩 걸려 81시간 소요)의 씻김굿을 제대로 전수받기도 힘들 뿐더러 아들 환영(桓永)은 국립국악원 대금 주자로 있어 더욱 걱정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박병천 문화재전수소’에 제자들은 많다. 그러나 그의 징 솜씨뿐만 아니라 북, 장구, 무무(巫舞) 등을 배우려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씻김굿 한 바탕을 제대로 전수받으려는 후학이 없다. 박병천 문화재전수소를 통해 많은 제자들을 길러 냈지만 정작 씻김굿 한 바탕을 제대로 배우려는 후학은 드물다. "저는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고 훌륭한 조상을 가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불던 대금에서 피가 떨어지며 운명하셨다고 들었어요. 어정판 시나위 속에 징채를 잡다가 여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 박병천 세습 무가 계보도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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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MBC] (다큐)씻김굿을 세계에 알린 사람, 진도 씻김굿 명인 박병천예향의 고장, 진도 민속예술의 고장, 진도 씻김굿을 세계에 알린 사람, 진도씻김굿 명인 박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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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詩評 . 詩로 우려낸 문경, 그 상큼한 맛과 향. 이만유 시집 ‘문희(聞喜)의 노래’권갑하(시인) 문희(聞喜)! 그 아름다운 이름 문희는 문경(聞慶)의 다른 이름이다. 기쁜 소식을 듣고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문희경서(聞喜慶瑞)’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지난날 과거 길에 오르는 선비들은 모두 문경을 거쳐 한양으로 향했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죽 미끄러진다고 했으니 어느 간 큰 선비가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었겠는가. 문경은 이처럼 경사의 기운이 넘치는 땅이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까지 내달리는 백두대간의 양지바른 남쪽 자락에 위치하여 어느 한 곳 명당 아닌 곳이 없다. 그래서인지 인구가 감소하는 다른 지방과 달리 문경은 오늘날에도 인구가 늘고 있다고 하니 그 또한 ‘문희’란 이름 덕분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경북 북서부에 위치한 문경지역 사람들은 다소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속정이 깊어 시간이 흐를수록 잘 익은 술처럼 인간관계에 향기를 드리운다. 한 번 정이 들면 잘 헤어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만큼 믿음을 중시하고 또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전통과 뿌리의식이 강하다. 이러한 문화는 어쩌면 변화에 무딜 수도 있는데 문경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영남과 기호지방의 첨예한 경계지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새로운 문화의 수용 적응력이 높고 소통과 교류를 중시한다. 경계에서 꽃이 핀다고 했는데, 이런 지역적 특성이야말로 문경이 독자적으로 구축해온 문화 형성의 동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만유 시인은 이러한 지역의 정서와 문화, 정체성을 누구보다도 잘 육화하고 있는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일찍부터 지역문화를 가꾸는 일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오고 있는 분인데, 지금도 문경아리랑과 구곡원림 보존 활동에 특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문경새재는 근대 아리랑의 발원지이다. 구한말 선교사 헐버트 박사가 1896년 서양 오선지 악보로 채록해 세계에 소개한 최초의 아리랑 대표 사설이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인데, 이는 문경새재 지방의 소리가 경복궁 중건 시기에 전국으로 퍼져 근대 아리랑으로 탈화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로부터 30여 년 지난 1920년대에 등장한 진도아리랑 등 지역 아리랑 가사에 ‘문경새재’가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 때문이다. 구곡원림은 조선 선비들의 정신세계와 자연관이 녹아 있는 문화유산인데, 문경에는 가은 완장의 선유구곡 등 9개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구곡원림을 보유하고 있는 고장이다. 산이 높은 만큼 골이 깊어 독자적인 문화 형성과 학문하기가 좋고 또 그 어느 지역보다 산세가 수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유 시인은 이러한 문경의 아리랑과 구곡원림 문화의 가치를 일찍부터 인식하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와 문경구곡원림보존회 회장 등을 맡아 열정적인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회장도 역임했으니 지역 문화에 대한 시인의 각별한 애정이 얼마나 큰 지를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어디를 가든 카메라를 늘 들고 다니는데, 바로 이러한 기록하는 자세와 애정이 오늘의 이러한 성과를 낳게 한 에너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시인께서 문경을 소재로 한 첫 시집을 출간한다. 보통 한 권의 시집에는 70~100편 정도의 작품이 실리는데, 이 ‘문희의 노래’ 시집에는 그 배 이상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 한 권이면 문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소재를 담고 있다. 그런 만큼 편의상 빙산의 일각을 조망하듯 몇 개의 테마를 중심으로 시인의 시 세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시로 우려낸 문경, 그 짙은 문향(文香) 문경은 고개 아래 고을이다.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홍귀달 선생의 말을 빌리면 ‘영남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문경지역에는 일찍부터 하늘재, 새재, 벌재, 이우리재(이화령), 버리미기재 등의 고갯길이 개척되었다. 그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개척된 고갯길이 바로 서기 156년에 열린 하늘재(계립령)다. 고갯길은 문화 교류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외침의 길목이기도 해 하늘재는 삼국 쟁패기엔 군사 요충지로 격전의 장이었다. 곳곳에 성과 관문이 전해오는 이유다. 하지만 싸움은 한 순간, 고갯길의 진정한 의미는 ‘인생 고개’가 상징하듯 돌아보고 성찰하는 삶의 공간이란 점이다. 일찍이 김종직은 "높고 험한 계립령은/ 예부터 남북을 갈랐네/ 북쪽 사람은 호화로움을 다투는데/ 남쪽 사람은 살과 피를 빨리네/ 소달구지는 험한 산길을 가는데/ 일터엔 장정들이 없구나…”(‘가흥참에서’)라며 하늘재에 올라 백성들의 참상에 가슴 아파하며 붓의 날을 세웠다. 이만유 시인도 하늘재에 올라 역사를 돌아보고 삶을 성찰한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 간 길/ 경순왕이 태조 왕건에게 신라를 바치러 간 길/ 망국의 한을 품은 마의태자가 피눈물을 흘리며 지나간 길”(‘하늘재1’)처럼 욕망과 슬픔이 교차하는 역사의 고갯길에서 성찰의 의미를 되새긴다. 하늘재는 조선 초 문경새재가 새로 개척될 때까지 낙동강과 남한강을 잇는 고려시대 영남과 개성을 잇는 주로였다. 그로 인해 곳곳에 불교 유적이 전해오는데, 대표적인 것이 미륵사지 유적과 마을 이름이다. 신기하게도 문경 쪽 관음리에서 하늘재를 넘으면 수안보 미륵리다. 이를 근거로 시인은 하늘재가 ‘관음’의 현세에서 미래의 ‘미륵’세계로 넘어가는 "구원의 길”임을 제시하며 "선업(善業)을 쌓”(‘하늘재1’)자고 노래한다. 문경새재 소재의 시편은 별도의 부로 나눴을 정도로 많고 다채롭다. ‘상처 난 소나무’ 등에서는 새재의 역사를, 「문경새재에 들면」 등의 시편에서는 새재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문경새재에 들면/ 계곡의 맑은 물이 바이올린이 되고/ 산새가 소프라노로 노래 부른다/ 나무들이 정겨운 친구가 되고/ 사시사철 피는 꽃이 입맞춤해 준다/ 굽이마다 긴긴 세월 지켜본 바위가/ 옛이야기 들려주고/ 나뭇잎이 툭 툭 장난치듯 어깨를 치고/ 바람이 귓속말로 속삭인다”(‘문경새재에 들면’)는 시편은 공감각을 자극하는 환상의 시편이다. "모처럼 문경새재/ 푸른 세상 속에 홀로 있으니/ 예가 선경이다 싶네// 인간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 이를 우야면 좋노”(‘우야면 좋노’)에서는 선경과 같은 새재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화령을 문경새재라 부르는 외지인들이 많다. 1925년 낸 신작로인 이화령은 백두대간 상 문경새재 아래에 위치한 고개다. 길에도 생명이 있어 문경의 고갯길은 하늘재→새재→이화령→이화령터널→중부내륙고속도로로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데, 2022년이면 수서-문경 간 고속철 시대가 새로 열릴 전망이다. 이화령터널이 생기면서 6.25 때 낙동강 전선 사수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화령도 이젠 옛길이 되었는데, 시인은 "옛길 이우릿재엘 가면/ 흔들리는 완행버스 안에/ 가슴 설레는 꿈을 안고 오가던/ 낯익은 문경사람들이 타고 있다/ 정겨운 웃음소리 들린다”(‘이화령’)고 힘들게 이화령을 넘든 지난날을 회상한다. 문경새재 목전에는 고갯길 못지않은 험한 길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곳이 ‘토끼비리’라 불리는 토천(兎遷)이다. 짚신 발자국에 닳아 반질반질 빛나는 영남대로의 역사적 흔적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명소다. 이곳은 산태극수태극의 군사 요충지로 삼국시대 축성된 고모산성이 전해오고 임진란의 아픈 역사도 서려 있다.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배를 타고/ 푸르렀던 아름다운 시절과/ 폭풍우 치든 날의 두려운 시간을 지나/ 이제 가을비에 촉촉이 젖은 옛길에 누워/ 긴 역사의 수레바퀴 위에서/ 한 생애 찰나의 삶일지라도 감사하며/ 바람과 함께했던 그 날들/ 그리움 가득 안고 떠나련다./ 영원한 시간 속으로”(‘토끼리비 낙엽’) 역사적 사유와 서정적인 진술이 아름다운 이 시는 영원한 시간 속으로 스러지는 낙엽을 통해 삶과 인생이 드리우는 내면의 길을 사유한다. 문경은 아리랑의 고장이다. 아리랑은 삶의 가락이요, 길 위의 노래다. 사람들은 문경새재를 넘으며 삶의 고비 고비, 힘든 인생살이를 떠올렸다. 그 승화된 울먹임이 아리랑이다. 문경시는 새재에서 생성된 아라리가 한양으로 올라가 근대아리랑으로 탈화된 역사를 2013년 광화문 광장에서 재현했다. 시인은 "아리랑의 성지 문경새재/ 경복궁 중수 때 베인 문경새재 물박달나무가/ 문경의 아라리가 아리랑이”(‘서울 간 문경새재아리랑’) 된 연원을 밝히고 있다. 또한 시인은 "마을 뒷산 마루금이/ 초가집 반달 지붕이// 조령천 물소리가/ 문경새재 열두 고개가// 어울려/ 가락이 되”었다며 "모두 다/ 저 고개 넘어/ 꿈을 찾는/ 희망가”로 아리랑의 의미를 새기고 있다. 골골마다 등을 밝힌 문경의 고갯길은 인재를 낳아 키우고 구곡원림을 조성해 학문과 문화를 일구는 젖줄이 되었다. 문경의 구곡원림은 선유구곡을 비롯해 석문구곡, 화지구곡, 쌍룡구곡 등 이름만 들어도 문향이 느껴지고 가슴이 서늘해지는 명소들이다. 최근에는 관산구곡이 추가로 밝혀졌고 문화인들이 중심이 되어 아름다운 영강에 구곡을 새롭게 설정했다. 구곡원림의 의미가 현대인들에겐 많이 약화되었다 해도 그 미래적 가치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문경 문화인들의 이러한 구곡원림 보존 및 조성 활동은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선이 노닌다”는 가은의 선유구곡은 도암 이재(1678~1746), 손재 남한조(1744~1809) 선생이 학문을 닦았던 곳이다. 경관이 수려해 피서지로도 인기가 높다. 시인은 신선이 노닌다는 선유구곡에 와서 계곡물에 떠내려가는 낙엽을 응시한다. "연초록 봄날의 희망/ 푸르렀던 여름날의 열정이/ 물살에 흘러간다// 세상의 아픈 것들/ 여기 선유 맑은 물에 띄워 보내리”(「선유구곡 낙엽」) 인생에 대한 사유가 계곡의 맑은 물 만큼이나 명징하게 느껴진다. 선유구곡의 제4곡인 세심대(洗心臺)에서는 "노을처럼 타는 단풍/마지막은 모두 붉다”(‘세심대’)는 명구를 뽑았고, 석문정에서는 "맑은 물 반짝반짝/ 물고기 은빛 비늘 춤추듯 흐”르는 석문구곡의 정경에 취하게 한다. 문경엔 유서 깊은 사찰이 많다. 삼국유사 <사불산조>에 소개 된 대승사 사불암의 역사는 이를 잘 말해준다. 오늘의 현대 불교는 청담, 성철의 봉암사결사에서 시작되었으니 문경의 불교문화는 그 뿌리가 깊고 위상도 높다. "옹재기를 가지고 온 사람은 옹재기만큼/ 독을 가지고 온 사람은 독만큼/ 딱 그만큼만 받는다/ 비움이 크면 채움도 크고/ 기울어지지 않게 반듯이 놓으면/ 그릇만큼 빗물이 고인다”(‘홍하문(紅霞門)을 들어가며’) 김룡사엔 ‘일주문’이 아닌 ‘홍하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붉은 노을은 푸른 바다를 꿰뚫는다(紅霞穿碧海)”에서 딴 이름인데, 용맹 정진해 얻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홍하문에 들며 "빈 그릇이라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가은 봉암사 경내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금강산 만폭동보다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백운대가 나온다. 큰 바위 면에는 마애보살상이 양각돼 있다. "너럭바위 목탁 두드리며/ 은은히 불경을 외”며 "오늘도 푸른 솔향 속에/ 세상을 씻고 있다”(‘봉암사 마애보살상’) 이곳엔 최치원이 썼다는 ‘白雲臺’, ‘夜遊岩’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전해오는데, 시인은 "세상살이 소태맛이거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 거문고 가락 되고/ 쏟아지는 폭포는 풍악 소리 되”는 "양산동천 야유암으로 오”(‘양산동천 야유암’)라고 한다. "밤에 노닐기 좋은 바위”란 뜻의 야유암이니 달밤에 그곳에 들면 신선이 따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경은 도자기, 서민들의 그릇을 구워낸 민요(民窯)의 고장이다. 그런 저력으로 막사발 ‘이도다완’을 재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9대 째 이어지는 조선백자 가문은 도자기 고장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한다. 천년을 이어 온 꺼지지 않는 불 흙에 영(靈)을 넣고 혼(魂)을 사른다 망댕이가마 살창구멍 속에 정점을 향해 유혹의 불길이 일고 도수리구멍 불꽃이 수많은 나비처럼 날 때 더 붉을 수 없어 하얗게 날을 세우면 천기를 받고 넋이 스며 흙은 생명을 얻는다 무심 속눈썹 내리깔고 다소곳이 앉은 고졸함 조선여인의 동그란 어깨 위에 소박한 미풍이 인다 이윽고 흰옷 입은 혼령이 훠얼 훨 춤을 춘다 ‘백자’ 전문 「백자」는 소박한 흙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도자 예술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4연이 치밀한 구성을 보여주는데, 구체적이고 적확한 묘사로 선명한 이미지를 얻고 있다. 특히 "도수리구멍 불꽃이 수많은 나비처럼 날 때/ 더 붉을 수 없어 하얗게 날을 세우면/ 천기를 받고 넋이 스며/ 흙은 생명을 얻는다”는 구절은 마치 신의 손놀림을 보는 듯 수사가 경이롭다. 또 "무심, 속눈썹 내리깔고/ 다소곳이 앉은 고졸함/ 조선여인의 동그란 어깨 위에/ 소박한 미풍이 인다”며 구워낸 백자를 조선 여인의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는데, "소박한 미풍이 인다”에서 정서가 고조된다. "이윽고 흰옷 입은 혼령이/ 훠얼 훨 춤을 춘다”는 마지막 구절은 마침내 탄생한 백자의 영원한 생명력을 동적으로 묘사한 이 시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이도다완으로 불리는 조선의 막사발 정호다완은 문경 찻사발의 정점에 놓이는 도자기이다. 투박함에 고고한 자연미가 매력적이다. "아기 볼 비파 색에/ 비껴 스친 손자국// 우물진 깊은 바닥/ 굽에 내린 아침이슬// 매화꽃/ 점점이 피워/ 천년 세월/ 빛나네”(‘정호다완’) 시인은 정호다완의 아름다움을 ‘아기 볼’, ‘손자국’, ‘매화꽃’ 등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다완의 살결을 ’아기 볼‘에 비유한 것은 정호다완의 도자 미학을 한 단계에 높이고 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문경은 대표적인 탄광지대였다. "뒷골목에 강아지가 만 원짜리를 물고 다”(‘가은역’)닐 정도로 돈이 끓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석탄박물관에서나 그 자취를 볼 수 있을 정도다. "기적소리 멈춘 녹슨 철길 위에/ 코스모스가 다시 손짓해도/ 역사의 깨진 유리창 넘어 찾아온 바람이/ 막장의 죽음을 실은 누렇게 바랜 신문지 한 조각을/ 눕혔다 일으켰다 할 뿐 자물쇠 잠긴 대합실에는/ 오후의 적막이 낮잠을 자고 있”(‘가은역’)는 모습이 오늘의 탄광지대 풍경이다. 시인은 진폐증을 앓는 남자의 이미지를 통해 화석화되는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 "가은선 폐선로 위에/ 한 남자가 멍하니 앉아있다/ 힘겹게 숨 쉬는 그의 폐에는/ 삼억 년 전 고생대 석탄기 양치류가 자라고/ 삼엽충이 바스락거리며 기어 다니고 있다/ 일억 오천만 년 전 중생대 쥐라기 공룡이 밟고 지나고/ 익룡이 날개를 퍼덕이다 부리로 쪼면 각혈을 한다/ 고통은 뱀처럼 꿈틀댄다”(‘화석(化石)’)는 진술에서, 폐가 점점 굳어가는 이 폐질환은 지옥 같은 탄광 산업이 남긴 아픔을 상징한다. 문경은 특산물의 명성이 높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미자와 사과다. 오미자는 전국 생산량의 40% 이상을 생산, 유통한다. 매년 9월이면 축제가 열리는데, "찬란한 빛 머금은/ 영롱한 태양이슬 빨간 사랑의 묘약/ 백두대간 중심 붉게 물들이면/ 사람들은 블랙홀에 빨려들 듯/ 오미(五味)에 빠진다/ 붉은색 마술에 걸린다”(‘문경오미자’) 시인의 표현대로 "붉은 색 마술”에 "천주산 높이 새들 날고/ 금천에 물고기 흥겨워 뛴다.” 다섯 가지 맛의 오묘함만큼이나 문경에 매력을 더하는 특산물이다. 시월의 과수원에는 함박웃음, 터질 듯한 가슴들이 붉은 하트 하나씩 품고 가지마다 ‘문경사과2’ 위 작품은 맛이 일품인 문경사과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시인은 "이 땅에 어울려 사는 사람들의/ 수많은 그리움과 설렘과 소망이/ 숱한 시련의 날들을 이겨내고/ 저리도 붉은 사랑을 주렁주렁 매달았”(‘문경사과2’)다고 노래한다. "문경사과 빨갛게 익으면/ 집 나온 관광객들 감홍의 달콤함에/ 빨간 양광, 진한 향기 부사의 매혹에/ 3번 국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달리고 달려”(「문경사과 빨갛게 익으면」)온다는 진술도 과장이 아니다. 특히 문경 감홍사과의 맛은 한번 맛본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을 정도로 그 맛이 기가 막히다. "시월 초가을 미풍에 눈부신 은혜로움/ 반야용선 다다른 곳, 천상인 듯 황홀하고/ 뭇 생명 노래 부르는 축복의 땅/ 월방산에 가보세요”(‘월방산에 가보세요’) "청대 권상일 선생께서 장 보러 오신 곳/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영남만인소 집결지/ 문경에서 처음 만세운동이 시도된 곳/ 삼천 명의 조합원을 둔 산양금융조합이 있던 곳/ 전국에서 알아주는 큰 우시장이 서던 곳/ 전국 장사씨름대회가 열렸던 곳”(‘산양장’) 이렇듯 시인의 문경 예찬은 끝이 없다. 작품으로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눈길 아니 주는 곳이 없고 마음 가 닿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다. 어느 한 편도 가볍게 넘길 작품이 없을 정도로 시인의 사랑이 배어 있고 혼이 담겨 있다. 그래서 시인은 "내일이면 늦어요/ 나비들 폴폴, 벌들이 웅웅대는/ 천상의 세계// 꽃 지기 전에/ 얼렁 가보”(‘월방산에 가보세요’)라고 나들이를 청한다. "나와 봐요, 어서요/ 벚꽃이 지기 전에// 나와 봐요, 빨리요/ 이 봄이 가기 전에”(‘나와 봐요, 어서요’) 얼마나 문경의 아름다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으면 이토록 간절한 독촉일까. 그렇다. 계절의, 자연의 아름다움이 한 순간이듯 우리네 인생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 시인의 이 간절한 호소는 ‘인생의 이 순간’을 ‘문경이라는 아름다운 공간’에서 마음껏 누리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방안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 대자연과 어우러지라는 시적 화술이다. 세상의 중심은 나, 우주의 중심 문경! 지금까지 이만유 시인의 문경을 노래한 첫 시집 ‘문희(聞喜)의 노래’를 감상해 보았다. 한 두 편도 아닌 백여 편에 이르는 방대한 시편들을 통해 시인의 뿌리 깊은 시심과 문경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지간한 감성으로는 우려내기 어려운 소재들이 시인의 붓 끝에 마구 춤을 추며 다양한 빛깔과 향기로 꽃을 피우고 또 스러졌다. 시집에서 보여주는 이만유 시인의 시적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보면, 첫째 시인의 시심이 남달리 뜨겁다는 점이다. 시심은 불씨와 같아 뜨겁지 않으면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어질 수 없다. 시에 감탄사나 "~이여”와 같은 영탄조가 자주 나타나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남다른 정신문화의식을 들 수 있다. 이 또한 뜨거운 시심에서 분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문화로 모아진다는 점에 의미가 크다. 구곡원림에 관심을 갖고 문경아리랑의 저변 확대에 애를 쓰는 것 또한 이러한 의식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에 관심을 늦추지 않는 자세도 이와 연결된다 할 것이다. 셋째는 틀에 갇히지 않는 유연한 사고와 자세를 견지하고 있음이다. 이는 자유시를 쓰면서 우리 민족의 정형시인 시조를 창작하고 있음에서 그 일면을 읽을 수 있다. 이 또한 관습화된 고정된 틀을 거부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마침내 경계에서 꽃을 피우고자 하는 자유 의식의 발로라 할 것이다. 지금은 지방화시대, 글로컬리즘(Glocalism)의 시대다. ‘지역 중심의 세계화’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지역 문인들의 문학 활동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역의 특수한 고유성에 객관적 보편성을 더할 때 진정한 의미의 명작이 탄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이만유 시인의 지역 문화운동에 기반을 둔 문경을 소재로 한 다양한 창작 활동은 예사롭지 않은 족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거듭 시집 출간을 축하드리며, 건필을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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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평생을 춤과 함께 산 타고난 춤꾼, 강선영"도리깨질을 아십니까. 긴 자루를 뒤로 돌려 일단 멈췄다가 채에 힘을 주어 마음껏 내리쳐야 합니다. 처음 배울 적엔 건들거리는 도리깨 채에 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그렇게 재미있고 힘이 날 수가 없어요.”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기능 보유자(1988년 12월 지정)이며 1990년 2월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된 강선영(姜善泳ㆍ67) 씨는 충남 천안군 수신면 한선 이씨 가문으로 시집 가 견뎌 냈던 시집살이 얘기부터 털어놓는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의 고춧가루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는 아니었지만, 엄하고 조신해야 했던 3~4년의 기간이 평생 몸가짐을 흐트리지 않게 지켜 주었다고 한다. 거창해 보이는 예총회장 자리도 잠시 맡아 있는 행정직일 뿐 그는 역시 뛰어난 춤꾼이었다."왕십리 당굿(경기 무악)에서 유래한 태평무 장단은 진쇠 가락으로 10박에서 36박자까지 들어갑니다. 춤을 추다 중간에서 한 박자만 삐끗해도 다시 따라잡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태평무는 음악을 제대로 알아야 추고 생음악을 훨씬 선호하게 됩니다.”이럴 때마다 강씨는 ‘좋았던 스승’ 한성준(韓成俊) 선생 생각이 간절하다고 했다. 승무, 살풀이, 태평무, 학춤(신선무), 한량무, 장군춤 등 온갖 전통 민속춤에 통달했던 한씨(충남 홍성 출신)는 당대 최고 명고수로 한 시절 민속악계를 주름잡았던 인물이다.그 중에서도 태평무는 한씨의 창작무로 생전에 가장 아꼈던 춤이다. 옛 왕조 시절 왕비가 추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만들어 낸 춤이 바로 태평무이다. 요염하면서도 우아하고 풀고 맺음이 분명하여 보는 이의 심사에 따라 감응의 폭은 다양해진다. 조선조 궁중 의상(부분적 변형 시도)으로 때로는 근엄하기까지 하여 태평무에 맛들여 놓으면 딴 춤은 싱겁게 여겨진다는 강씨의 말이다.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명목리가 고향인 강씨는 전통 예술과는 무관한 가문(진주 강씨)에서 태어났다(1925년 3월 30일생). 관가 벼슬을 하던 조부(敬秀)는 당대 한성준, 이동백(李東佰), 정정렬(丁貞烈) 명인들과 사랑채에 어울려 음풍농월하던 사이였다고. 다만 작은아버지(炳華)가 토월회 등 연극 단체를 조직, 전국을 유랑 생활하다 할아버지한테 매 맞고 아버지(炳學)는 계집애(강씨)를 신식 교육시킨다고 볼기까지 맞았다고 한다.이런 가문에서 자란 강씨가 춤을 추겠다고 나서니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결국 진노한 할아버지가 모녀를 내쫓아 버려 오히려 ‘춤꾼 인생’은 자유롭게 되었다고 회고한다."소학교 적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가 평생 진로를 결정해 버렸습니다. 학교에서 꾸민 ‘구식 어머니, 신식 어머니’ 연극에 출연하며 노래는 한 달 연습해도 안 되는데, 무용은 보기만해도 척척이었어요.”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끼’를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구경 나온 어머니께 "선영이는 무용을 가르치는 게 좋겠어요.”라는 선생님의 한마디가 오늘날의 예총 회장까지 만들어 놓았다. 평택으로 쫓겨나온 어머니는 전세방에 하숙생을 치며 안성 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강씨를 서울의 한성준 씨한테 보내 전통춤을 가르쳤다. 이 때가 열 세 살이었다.서울 경운동에 있던 음악무용연구소에서 이강선(선배), 장홍심(張紅心), 한영숙(韓英淑, 한성준 씨 손녀, 승무 인간문화재, 1989년 작고) 씨와 함께 배웠다. 특히 이강선 씨의 춤은 선녀인지 나비인지 구분 못 할 정도였다고 지금까지도 찬탄한다.20세까지 7년간을 배우면서 15세 때 이미 일본 공연에 나섰고 서울 부민 관(현 서울시 의사당)에서 첫무대까지 가졌다. 17세엔 동양극장에서 공연된 ‘삼국지’ 안무를 처음 맡아 주변의 시샘도 받아야 했다고.신불출(申不出) 씨 등과 전국 공연을 다니며 8도는 물론, 일본ㆍ만주 지역 까지 좁다 하고 뛰어다녔다. 강씨의 이러한 역마살은 일제 정신대를 피해 천안 형부 집에 피신 갔다 시집 가면서 잠재워진다. 절구에 겉보리 찧으면서도 춤을 잊지 못해 몸부림쳐야 했고 물두멍에 물을 져 나르면서도 어찌하면 춤을 다시 추느냐가 일구월심이었다고 한다."6ㆍ25를 대전ㆍ부산 등지에서 겪다가 9ㆍ28 수복 후 서울에 와 무조건 무용 학원을 차렸습니다. 시어머니의 졸도, 남편의 구타 등 고비도 많았지만 ‘옳다는 일’에의 ‘강씨 고집’도 막을 순 없었지요.”김보애(金寶愛), 이현자(李賢子) 씨가 무용을 배우기 시작한 게 이 무렵. 지금까지 ‘강선영 무용연구소’를 통해 배출된 후학들은 많지만 그의 제자들에 대한 선별안은 매우 까다롭다. 결혼 후 춤을 작파해 버릴 사람한테는 아예 가르치지를 않는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인 이현자ㆍ이명자(李明子)ㆍ김근희(金槿姬) 씨 등 이수자, 채상묵(蔡相默)ㆍ심가영(沈佳英)ㆍ가희(佳姬) 형제 등의 수제자, 양성옥ㆍ김나영 씨 등 장학 이수자와 일반 이수자인 고선자ㆍ최윤정ㆍ김경희ㆍ이춘자 씨 등의 각오는 대단하다. 1960년 4월 프랑스 등 유럽 일주 공연 이래 강선영 무용단이 가진 해외 공연은 수십 회가 넘는다. 아시아 지역은 물론 북ㆍ남미, 중동, 동구권, 아프리카 지역까지 그의 춤 구경을 못 한 나라가 드물 정도. 일본 오사카(1963년), 도쿄(1966년) 등에 무용 연구소 분교를 개설하며 순수 민간 외교 차원에서 기여한 공로도 적지 않다. 강씨의 이런 행적은 서울시문화상(1965년), 제12회 아시아무용제 작품상(초혼, 1965년), 국민훈장 목련장(1973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연예부문(1976년) 수상으로 요약된다."처녀 적 별명이 ‘모르쇠’였습니다. 남의 얘길 묻거나 시비 걸릴 얘기에 대해선 무조건 모른다고 대답한대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예술에 대한 이해가 다양한 만큼 말도 많은 곳이 예술계입니다.”무용 연구생 시절 어느 치대생과의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 등은 지금도 아쉽다면서 홍조를 띤다. 까치발로 딛는 태평무 춤사위가 마치 스페인 전통 무용과도 흡사해 그들도 열광하더라는 강회장은 "아직도 국내에선 태평무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며 아쉬워했다.• 강선영 태평무 계보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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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 호흡으로 뽑아 내는 신비의 공명(共鳴), 이생강아직도 ‘생강 피리’를 못 잊어 하며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6ㆍ25를 전후해 시골 저잣거리나 고향 역 앞 행상한테 산 피리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소리와 품질은 흉내낼 수 없다는 찬사뿐이다. 그 당시 피리 파는 중년 남자 옆에서 벙거지를 눌러쓴 채 피리를 구성지게 불어 대는 ‘피리 부는 소년’이 있었다. 의심 많은 사람들은 10세 안팎의 소년이 부는 피리 소리를 듣고 나서야 꼬깃꼬깃한 쌈짓돈을 내놨다. 그때 피리 불던 소년이 바로 오늘날의 젓대(대금) 명인 이생강(李生剛ㆍ54, 1937년 3월 16일생) 씨다. 뒷짐지고 먼산 바라보던 중년 남자는 그의 아버지(壽德)로 역시 피리만 잡으면 흐드러지게 불었다고 한다."영락없는 비렁뱅이 행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부끄러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재일 교포의 아들로 한국말이 서투르다 하여 괜히 얻어맞는 것보다는 나았고 피리 자루 들쳐 메고 전국 산천 곳곳을 누비던 그 시절이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신라 임금 신문왕(681~691) 때의 ‘만파식적’에 뿌리를 대고 있는 우리의 민속 관악기 대금. 예로부터 ‘대금’보다 ‘젓대’로 널리 불리고 있다.이 시대 최고의 젓대 주자 이생강 명인은 피리 행상으로부터 국악계에 발을 디뎠다. 해방 직후 우리말이 서투르다 하여 동네 애들한테 뭇매를 맞은 건 그가 동경의 아사쿠사(淺草) 출생이었기 때문이다. 경남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 출생의 아버지는 3대 독자로 13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교포 딸인 어머니 김위선(金渭先) 씨를 만나 이씨를 낳았다. 생강씨 조부(경주 이씨)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선대에는 신의 점지를 받아 뭇사람의 맺힌 한도 풀어 주었다고 한다.그 피가 섞인 이씨의 젓대에 대한 천부적 감각은 5세 때인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사쿠사 옆집 어른이 척팔(尺八, 사쿠하치ㆍ일본식 퉁소)을 부는 것을 얼른 빼앗아 손바닥으로 흉내내면서부터 비롯된다. 아홉 살에 해방을 맞은 이씨는 아버지를 따라 귀국하여 부산 보수동에 정착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알거지가 된 이씨 부자는 ‘생강표’ 피리를 만들어 전국을 유랑하게 된다. 이씨의 파란 많은 ‘젓대 인생’은 참으로 우연찮게 맺어졌다. 1952년 여름, 전주 풍남동 전주역 앞에서 당대 젓대 명인 한주환(韓周煥, 1904~1963) 씨를 만나면서 본격 학습에 들어간다. 한명인은 피리를 팔며 멋지게 불어제끼는 이씨 부자의 가락에 반해 발길을 멈춰 섰던 것이다. 한명인은 전남 화순 능주 태생으로 젓대 산조의 초기 명인이었던 박종기(朴鐘基, 1879~1939)의 맥을 잇고 있는 대가였다. 박명인은 전남 진도인으로 무악 피리의 귀재였다. 진도 씻김굿 기능 보유자(인간문화재 72호)인 박병천(朴秉千)의 종조부가 된다. 이러한 연유로 ‘이생강제 젓대’는 박종기―한주환의 정통 맥을 잇고 있으며 이씨의 뒤는 아들 광훈(廣訓, 25, 중앙대 국악과 2년) 씨가 군말 없이 승계하고 있다.젓대는 예로부터 오랫동안 쓸 수 있는 황죽(黃竹)을 최고로 쳐 왔으나 최근에는 쌍골죽(雙骨竹)을 주로 사용하는 65cm 안팎의 죽관악기다. 대통좌상의 취공과 밑의 청공에 갈대 속에 있는 엷은 막을 붙여 진동으로 소리를 낸다. 주법으로는 저취(底吹, 부드러움), 평취(平吹, 곧고 굳음), 역취(力吹, 가장 높은음)의 세 가지가 있으며 산조는 무속적인 살풀이춤 반주서 사용돼 온 시나위의 즉흥 합주곡 형식에 속한다.젓대 산조로는 박종기(한주환ㆍ이생강)제와 강백천(姜白川, 1898~1982)제, 한범수(韓範洙, 1911~1980)제로 대별된다. 특히 이생강은 진양조ㆍ중모리ㆍ중중모리ㆍ자진모리의 4악장으로 구성되며, 사용되는 조격은 우(羽)ㆍ평(平)ㆍ계면조(界面調)가 고루 섞여 시나위 더늠 젓대산조에 비해 밝은 선율이 많다. 이씨의 젓대는 59년 경기 무악의 달인 지영희(池瑛熙, 피리 명인, 작고) 씨를 만나 피리 솜씨까지 붙어 금상첨화가 됐다. 한때는 임춘앵 여성 국극단 악사(1958~1959년)로 오진석(피리), 방태진(새납) 씨와 함께 전국 순회 공연을 다니며 약관 명인으로 날렸다.이씨는 5세 때부터 배운 젓대 솜씨여서 나이는 어렸지만 나이든 제자들을 많이 가르쳤다. 60년 5월 처음으로 유럽 순회 공연을 나가 파리 공연장에서는 ‘수십만 마리의 벌들이 꿀 따 오는 소리’라는 등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당시 공연에는 강선영(姜善泳), 임승남, 김문숙(무용가 조택원 씨 부인) 씨 등이 약관의 이씨와 함께 갔다.이씨는 20년 전부터 종로 쪽을 떠나지 않으며 전통국악연구소(서울 종로구 와룡동 태일빌딩 402호)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연구생만도 50명이 넘으며 전국 유명 상을 끊임없이 수상해 오고 있다.김경애(金京愛, 대구, 김경애 국악원장, 1986년 전주대사습 기악부 장원, 1989년 신라문화제 대통령상), 박환영(朴桓永, 국립국악원 젓대 주자, 1987년 동아국악콩쿠르 대상), 이용구(李鎔九, 1990년 전주대사습 일반부 장원) 씨와 김종선(金鐘善, 워커힐 국악 연주), 이형표(李炯杓, 방송 출연), 김현임(金賢任, 1989년 전주대사습 학생부 장원), 김현재(金玄載, 국악예고 3년) 양 등 손꼽을 만한 전수자들이 수두룩하다.아들 광훈 씨와 함께 조카 병금(炳金, 국립국악원) 씨도 젓대를 불어 든든하며 형 정화(正華) 씨는 현재까지도 일품 젓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동생 성진(成鎭, 리틀앤젤스 농악부) 씨는 통영오광대놀이의 장재봉(張在鳳, 작고) 씨한테 습득한 타악 장단으로 꽹과리, 장구, 북 등 타악기에는 무불통지다. ‘토마스 박’으로 유명하며 세계 순회 공연도 많이 다녔다.생강 씨는 중앙대와 국악예고에 나가 연구생을 가르치며 이씨를 거쳐간 제자들만도 4백여 명이 넘는다. 한주환제는 단전에서 복식 호흡으로 뽑아내는 특이한 주법이 ‘짐’ 넣는 방법부터 타제와는 확연히 구분된다.이씨는 호주를 제외하고 4대주 70여 나라를 순회하며 한국의 명금 젓대를 불었다. 종래의 18분(박종기), 32분(한주환) 젓대 연주를 이씨가 90분으로 완성시켰고 레코드까지 내놓았다. 국위 선양 공로로 1973년에는 국민훈장을 받는 등 상패와 상장이 쌓여 있지만 이명인의 바람은 국악계의 올바른 평가와 예우가 바로잡히는 것이라고 했다. 아들 광훈 씨도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젓대를 학습시켜 ‘3대 명인 가문’을 이뤄 놓겠다고 다짐을 보였다."인연은 기이하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박종기 선생제를 잇고 있는데 그 어른의 증손자인 환영 군이 저한테 학습한 뒤 다시 맥을 이어 주고 있습니다.”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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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박녹주의 예술과 비운의 사랑박녹주의 本名은 命伊, 雅號는 春眉, 藝名은 錄珠이다. 흔히 판소리하면 호남을 떠올리게 된다. 판소리가 거기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시대에는 그 사정이 달랐다. 1920년대부터 40년대에 이르기까지 영남은 그야말로 판소리의 고장이었다. 박녹주는 영남 출신의 선배 김추월(金秋月:1896∼1933), 김녹주(金綠珠:1897∼1932), 이화중선(李花中仙:1898∼1943), 김초향(金楚香:1900∼1983), 권금주(權錦珠:1903∼1971) 그리고 후배였던 이소향(李素 香:1905∼1989), 신금홍(申錦紅:1906∼1942), 신숙(愼淑:1916∼1982), 오비취(吳 翡翠:1918∼1982), 임소향(林素香), 박귀희(朴貴嬉:1921∼1993), 박초향(朴楚香:1 923∼1964) 등과 함께 달구벌을 판소리 고장으로 만든 주역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박녹주의 은퇴공연이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있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이날 무대에서 박녹주는 "여러분들을 이 자리서 보고 언제 다시 뵐지 이제 기약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저의 무대생활은 마지막입니다. 소리가 잘못되더라도 허물없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략한 인사말과 함께 단가 <백발가>와 흥보가 중 <박타령>을 불렀다. 박녹주는 울먹이며 간신히 <백발가>를 마쳤다. 객석도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 은퇴 공연은 부산, 대구, 대전으로 이어졌다. 박녹주는 1905년 경북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 437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박중근, 모친은 권순이이며 박녹주 밑으로 남동생 태술, 만호, 만술이 있었다. 박록주의 어릴 적 이름은 모친의 이자를 딴 命伊였다. 박녹주의 부친은 한량으로 집안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노름과 술로 세월을 보냈고, 그리하여 박녹주는 10살 때부터 모친을 도와 농사짓고 소를 몰며 물레도 돌리며 억세게 자라났다.박녹주는 그녀의 아버지가 박수무당으로 소리선생도 겸했던 터라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접하면서 자랐는데 1916년 그녀가 12세 때, 그녀가 살던 선산에 협률사 공연이 있었다. 협률사는 소리, 춤, 줄타기, 등의 갖가지 재주를 보여주는 순회 공연단체인데, 박녹주의 부친이 이 공연의 판소리를 보고 크게 감동하여 평소 목소리가 우렁찬 박녹주를 명창으로 길러내 그녀가 벌어들인 돈을 자신의 노름과 술값으로 쓰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연유로 부친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박기홍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 때 그녀의 부친은 딸에게 명창이 되라며 命伊라는 이름 대신 錄珠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박녹주는 하루 24시간 가운데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약 20시간 동안 꼬박 소리를 질러가며 박기홍에게 소리를 배웠다. 그러나 소리할 때의 자세가 매우 엄했고 사설은 거의 한문 투로 되어 있어서 외우기가 무척 어려웠다. 음식은 참기름만 먹었고 고된 연습으로 목에선 피가 터져 나오기 일쑤였다. 지옥훈련 같았던 박기홍의 가르침으로 판소리의 기틀을 확고하게 갖춘 그녀는 그때부터 경상도 곳곳에 초청되어 다니며 소리를 하기 시작했으나 사례비가 생기는 족족 그의 부친이 술값으로 써버렸다. 그러던 그녀의 나이 14세가 되던 해 그녀는 김창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김창환은 좀처럼 소리를 가르쳐 주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듣고 그저 따라하도록 지시할 뿐이었다. 박녹주는 김창환이 무대에서 부르는 <제비노정기>를 유심히 듣고 모르는 것을 물어보며 한 구절씩 익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덕택에 김창환의 <제비노정기>가 지금까지 전승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박녹주의 세 번째 스승인 강창호는 명창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실력이 대단했고, <심청가>에 장기가 있었다. 그녀는 수궁가 중 <고고천변>을 두 달 동안 배웠다. 강창호에게 소리를 배운 뒤 그녀는 다시 부친의 손에 끌려 대구로 가서 억지로 기생 수업을 받게 된다. 그녀의 부친은 박녹주를 당시 달성권번의 행수기생이던 鸚鵡에게 3년동안 양딸로 맡기는 대신 2백원을 받았고 박녹주는 행수기생의 소유가 되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겨우 14세였다. 앵무는 너그러운 품격의 소유자였고, 재주가 뛰어난 박녹주를 아꼈다. 박녹주는 앵무를 통해 기생수업을 받으면서 춤, 시조, 소리 등을 연습했으며 예의바른 행동거지를 배워나갔다. 그러던 중 그녀 나이 15세 때 李某라는 한량이 박녹주의 딱한 처지를 듣고 2백원의 빚을 대신 갚아 주는 일이 생기게 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박녹주였지만 그녀는 또다시 아버지의 손에 끌려 대구로 갔다. 역시 기생수업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 때 그녀는 김점룡, 임준옥, 조진영에게 남도민요 <육자백이>와 <화초 사거리>를 배우게 된다. 당시 그녀는 김초향 다음 가는 소녀 명창으로 이름이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하룻밤 초청되어 가면 10원을 받았다고 한다. 쌀 한 가마니가 50전 할 때의 일이니 그 명성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무렵 충청도의 갑부 변씨가 그녀에게 화초머리를 얹어주고 세간을 사주었다.1922년, 박녹주는 서울로 가서 송만갑에게 단가 <진국명산>과 춘향가 중 <사랑가>부터 <십장가>까지를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1923년 그녀는 우미관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하게 되면서부터 눈부신 활동을 시작한다. 그렇게 전성기를 보내던 1928년 봄 그녀는 조선 극장에서 열린 8도 명창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공연이 끝난 후 두 사람이 그녀를 찾아가는 데 한 명은 전 부통령 김성수의 부친 김경중 영감이었고 다른 한 명은 김유정이었다.김유정의 박녹주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은 그녀가 평생 사랑의 고달픈 행로를 걸어야 했던 전주곡의 시작과도 같았다. 원래 김유정의 집안은 천석지기의 지주였고, 고향은 강원도 산골이었지만 서울에도 백여 칸 되는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그러나,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로 집안을 관리하던 큰형의 방탕한 생활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어린나이에 부모 모두를 잃고 외롭게 성장기를 보냈던 그는 늘 어머니 사진을 품고 다니며 연상의 여성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움을 품게 되었는데 그것이 비극의 시초였다.박녹주에게 첫눈에 반한 유정은 그날 이후 심한 가슴앓이를 하게 되었다. 유정을 매일 밤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연모의 마음을 글로 옮겨 보냈다. 편지를 받고 무척이나 당황했던 녹주는 편지를 다시 하숙집으로 돌려보냈지만, 이번엔 레코드판에서 뜯어낸 자신의 사진 밑에 ‘당신을 연모합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주옵소서’ 라고 적힌 편지가 전해져 왔다. 하루가 멀다 오는 편지를 보며 근심하게 된 녹주는 행랑어멈을 시켜 유정을 오게 한 뒤 학생은 오로지 공부에 전념해야지 딴 생각을 하면 아니 된다하고 자신은 기생의 신분임을 내세워 조용히 타일러 보았지만 이미 유정은 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다. 편지를 아무리 보내도 답장이 없자 유정은 녹주의 집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하게 되고, 이를 보다 못한 녹주의 동생 태술이 유정을 달래어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날로 태술과 친해진 유정은 친구 태술을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녹주의 집을 찾아갔고, 태술을 통해 편지를 직접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녹주의 마음은 요지부동으로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협박과 공갈 등으로 그녀를 괴롭히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다음은 박녹주가 「한국일보」에 38회 연재(1974. 1. 5~ 2. 28)된 「나의 이력서」에 고백한 내용이다. 우리는 그 자료를 통해 유정이 박녹주에게 한 말의 내용과 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살펴 볼 수 있게 되고 유정의 슬픈 집착이 잘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척 하는 거요. 보료 위에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하듯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김유정이 나한테 죽이겠다고 협박편지를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김유정이 나를 부른 칭호도 금새 달라져 갔다. 처음에 "선생”이라고 하더니 "당신”이라고 변했고 나중에는 "너”라고 자기 부인을 칭하듯이 불렀다. 하루는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데 검은 그림자가 인력거를 향해 돌진해왔다. 직감적으로 김유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력거꾼에게 정거하지 말고 빨리 앞으로 달려가라고 소리쳤다. 김유정은 번쩍이는 뭔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칼이다’ 하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인력거꾼은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갔으나 김유정이 더 빨랐다. 그는 인력거채를 움켜잡고 나에게 소리쳤다. "녹주, 오늘 밤은 너를 죽이지 않으마. 안심하고 내려라.” 그가 들고 있던 것은 하얀 몽둥이였다. 그는 자기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 들이대더니 불뿜는듯한 눈초리로 노려보면서 물었다. "너는 혹 내가 돈이 없는 학생이기 때문에 나를 피하는 거지?” 나로서는 너무나 의외의 질문이었다. 잘못 대답하면 내가 돈에 의해 좌우되는 천한 여자가 될 것만 같았다....."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리기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이 정도의 협박편지가 들어온 것은 그해 즉 1928년 겨울쯤이다.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를 않았다. 만일 그 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나는 몸이 오싹해졌다. 편지는 잉크로 쓴 게 아니라 혈서였다.이렇듯 유정의 감정은 병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박녹주는 직업상 사람들과의 만남이 잦았고, 그로 인해 그녀는 일상은 활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정은 늘 어디론가 가서 소리를 하는 그녀를 문 밖에서 기다리며 나올 시간만 기다렸지만 끝내 나오지 않으면 온갖 상상을 일삼으며 그녀를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것이었다.박녹주는 유정이 구애하는 동안 매년 그를 피해 피서를 가는데 1928년에 한 달, 그리고 1929년에는 두 달동안 원산에 있는 삼방 저수지에 머물며 창 공부를 한다. 그녀가 종적을 감춘 동안 매일 그녀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며 초조해하던 유정은 감정이 한층 더 격해진다. 후에는 그의 감정이 연모의 감정인지 혹은 복수의 감정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가 된다. 이 때 그의 음주량은 그의 몸 상태에 비해 과도했으며, 늑막염을 앓고 있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허약한 상태였다. 혈서를 쓰고, 협박을 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등의 행동은 그녀가 그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오히려 역효과만을 낳을 뿐이었다. 박녹주가 자신은 소리하는 사람이므로 학생과 연애할 수 없다고 하자, 유정은 학생과 소리하는 사람이 사랑해서 안된다는 규정이 어디에 있냐고 대들며 사랑이란 국경이 없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그러나 이미 남의 소실이었던 박녹주는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는데, 부친 문제 등으로 인생을 비관해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던 박녹주가 일주일여만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바로 유정이었다. 그는 "당신 장례를 치루려고 기다렸다” 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것을 보면, 유정 그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아주 서툴거나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정은 박녹주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음에 큰 상처를 입어 학교도 그만두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내려간 1930년 여름부터 그가 타계하는 1937년 봄까지 약 7년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30여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쓰지만 유정의 가슴앓이는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이어져 결국 나이 서른에 눈을 감는다. 이때의 작품 중 「생의 반려」와 「두꺼비」는 그와 박녹주의 관계에 대한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룰 수없는 사랑에 대한 유정의 恨은 그렇게 작품 속으로 용해되고 승화되어 갔던 것이다.김유정과 같은 시기에 알게 되었던 김경중은 박녹주의 소리일생에 지대한 영향과 주게 된다. 김경중은 8도 명창대회에서 박녹주의 모습에 반하여 그녀에게 집을 한 채 선사하는 등 아낌없이 그녀에게 베품을 주었다. 그 뒤에도 김경중은 박녹주를 귀애하며 그녀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당시는 일제의 수탈이 가혹해 먹고사는 것이 힘든 사정이었고, 박녹주는 한량인 아버지에 의해 착취당하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경제력은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기생수업을 받고 2백원에 팔려 다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또 그런 와중에 몇 차례의 사랑에 빠지기도 했는데 15세 때는 임준옥과 사랑에 빠졌다가 부친의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고, 17세 되던 1921년에 열린 원산 명창대회에서 남백우와 만나 이내 혼인하였으나, 그녀는 첩이었고, 그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수많은 역경을 통해 그녀는 이미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경험했었고, 누구보다 뛰어난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으므로 낭만적이고 현실감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김유정과의 사랑을 받아드리기에는 그녀의 굴곡많은 삶이 허락하지 않았을 터이다. 김경중은 1929년에 송만갑의 수제자인 김정문에게 박녹주가 소리를 배우도록 주선해 주어 21일동안 김정문에게 흥보가 중 초입부터 <제비 후리러 나가는 데>까지를 배우게 된다. 이 때 배운 소리 가운데 <박타령>과 <비단 나오는 데>는 흥보가 중에서 박녹주가 가장 즐겨 불렀던 대목이다. 박녹주는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우고 집으로 돌아온 1929년 3월, 부친에 대한 원망과 복잡한 가정사를 비관하여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을 기도하게 되는데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다.자살 소동 이후 몸을 회복하게 된 박녹주는 1930년, 다시 김경중의 권유에 따라 김정문에게 <심청가>를 배우기 위해 남원으로 가서 열흘 동안 심청가 전 바탕을 익히게 된다. 김정문은 송만갑이 "제자가 무섭다.”고 할 정도로 극찬한 명창이었다. 김경중의 후원이 없었다면 김정문의 <심청가>의 전승이 끊어질 뻔했는데, 다행이 박녹주를 통해 전승되어 온 것이다. 남백우의 첩으로 사는 데 회의를 느낀 박녹주는 이별을 결심하고 申某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여 함께 살다가 1931년에 김종익과 재혼하게 된다. 김종익은 박녹주와 송만갑을 위해 조선성악연구회의 사무실로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 159번지에 있던 9천 5백원짜리 건물을 사주었다. 일제시대가 되면서 양반 등 상류계층이 몰락하게 되자 전통음악인들은 돈 많은 한량과 서민을 상대로 공연하여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그런 장소에 음악인들을 공급하는 구실을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박녹주는 생활을 했고, 송만갑에게 틈틈이 소리를 배웠다. 박녹주는 김여란, 이기권과 함께 정정렬에게 <춘향가>와 <숙영낭자전>을 배웠는데, <숙영낭자전>은 전승이 끊어진 판소리로서 정정렬이 창작해서 불렀고 그것을 박녹주가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유성준에게서 <수궁가>를 익혔다. 1935년,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창극을 춘향전을 공연했는데, 이 때 박녹주가 춘향 역할을 하였다. 공연이 끝난 후 춘향을 직접 보려는 관중으로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40년 박녹주의 부친이 타계했다. 박녹주는 한평생 부친을 원망하며 살았으나, 막상 그가 타계하자 며칠 동안 슬피 울었다고 한다. 박녹주에게 있어 예술과 사랑의 길 모두가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을까? 훗날 그녀는 아편흡입과 아편소지 매매 등의 죄명으로 공판에 회부되고 철창에서 탄식하는 절망의 날들을 맞기도 했으니 말이다.박녹주는 여류명창이면서도 매우 남성적인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데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가 투박하고 꿋꿋한 소리제를 구사했던 것은 그가 남자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웠던 데 가장 큰 이유가 있겠고, 또 그가 타고난 성음 자체가 강한 인상을 주며 그의 고난에 찬 인생살이가 그를 강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박녹주의 제자인 이옥천은 박녹주의 소리를 가리켜서 "통이 크고 박력이 있으며, 부드럽기 보다는 꿋꿋하며, 맺고 끊음이 무섭다.”고 평했다. 박녹주는 대체로 전바탕 공연보다는 토막소리 위주로 공연을 하였기 때문에 아니리는 극히 짧으며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멋이 있다. 판소리 명창들의 출신지가 대부분 전라도 지역이라서 전라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산에서 태어난 박녹주는 경상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기 때문에 매우 특이하다. 남성을 능가할 정도의 통성을 위주로 해서 소리를 끌고 나가며 소리 맺음에 있어서 군더더기가 없고 분명하다. 이런 박녹주소리의 특징이 「?조선 창극사」?에는 모지락스럽게 맺고 끊는다고 적혀 있다. 성음은 엄성이 많이 쓰이고 정대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각 대목마다 상황에 맞게 성음, 장단, 선율에 변화를 주어 이면을 살려내는 기량이 출중하다. 또 서편제의 더늠을 부르더라도 동편제의 특성을 가미해서 소리가 매우 진중하다. 이러한 박녹주의 소리는 별로 힘 안들이고 쉽게 부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엄청난 공력을 내보인다. 또한 박녹주는 발림이 요란하지 않았다. 발림보다는 성음과 선율에 변화를 주어 목소리만으로 각 대목의 상황을 적절히 묘사해냈던 것이다.1940년대 후반에 박녹주는 국악계가 남자들 편의 위주로 운영되는 것에 불만을 갖고 김소희, 박귀희 등을 이끌며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면 안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판소리계에서 유독 경상도 사투리를 고집한 박 녹주가 남긴 음반은 명물로 꼽히며, 40년대에 김소희.박귀희 등과 함께 결성한 여성국악동호회는 남성 전유물처럼 인식되던 판소리계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6. 25 발발 후에는 월북을 강요당하기도 했으며 전쟁통에 한쪽 눈을 실명하여 그 뒤로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 6. 25때 그녀는 오태석, 김세준, 박춘홍, 조농옥, 이용배등 30여명과 함께 방위대에 입대하여 군인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다니기도 하였다.이러한 박녹주는 5명창이 타계한 후 여류 국창으로 군림하였고 인간문화재로 소리판을 지켜냈다. 박녹주의 콜럼비아에서 나온 음반이 인기를 끌자 여러 음반회사에서 앞다투어 그녀의 음반을 제작했다. 박녹주는 음반 취입, 무대 공연, 잔칫집 초청 공연 등으로 돈을 벌어 월수입이 무려 5-6백원이나 되어 자가용차를 전세내어 타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저축하는 성품이 아니어서 돈이 생기면 모두 써버리곤 하여 말년의 곤궁함을 면하기 어려웠다.박녹주는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서 50대 전반기였던 1955년~1960년에 가장 좋은 소리가 나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국가 경제가 극도로 악화되어 대다수의 국민이 음악을 즐길 여유가 없었기에 음반 제작이 활발하지 못했다. 그녀 또한 6. 25 이후부터는 유랑극단 생활을 통해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녀는 1960년 초에 급성 폐렴을 얻어 경찰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 때 그녀의 유랑생활은 끝이 났다. 그녀는 젊을 때 벌어놓은 돈을 저축해 놓지 않아, 6. 25 이후에는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어렵게 삶을 꾸려나가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1965년 박녹주는 김여란, 김연수, 김소희, 정광수, 박초월과 함께 <춘향가>로 중요 무형 문화재 제 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다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대상이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확대되면서 그녀는 <흥보가>의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박녹주의 은퇴공연을 하고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1970년대에 집에서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운영했다. 김소희, 한애순, 박귀희, 성우향, 조상현, 박초선, 성창순, 이옥천, 한농선, 박송희, 정성숙, 조순애, 정의진 등이 그녀에게서 소리를 배웠다.1978년 박녹주는 고향인 선산에서 공연을 했다. 이 무대에서 그녀는 <백발가>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소리를 하면 할수록 폐가 붓는 지경으로 몸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녀가 74세의 병든 몸을 이끌고 고별무대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생각하면 징그럽도록 사연도 많고 한도 많았던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단가 <백발가>를 목놓아 부르자 객석은 순식간에 눈물바다로 변해버렸다. 그러던 1979년 5월26일 오후 1시, 시대의 명창 박녹주는 셋방을 전전하다가 면목동의 단칸방에서 혈육한 점 없이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그에게는 오직 양아들로 맞아들인 조상현이 있을 뿐이었다.구미시 선산읍 노상리 마을회관 앞 놀이터. 화강석 장구와 북을 깔고 앉은 ‘인간문화재 제5호 박녹주(朴綠珠:1905∼79)여사 기념비’가 외롭게 서 있다. 1981년 세워진 이 비석의 주인공 박녹주는 젊어서는 대구 달성권번, 서울 한남권번의 名妓로 이름을 날렸고, 늙어서는 동편제의 거목으로 판소리<춘향가>, <흥보가> 분야 인간문화재로 예우를 받았지만, 삶 자체는 판소리 서편제처럼 너무나도 서글펐다. 조상현, 박송희, 신영희 등 그의 뜻을 기리려는 후학 들은 매년 그녀가 타계한 5월26일, 비석 앞에서 판소리 한마당으로 기제사를 올린다. 지금은 구미문화연구회 등이 주축이 되어 추모사업회가 구성되었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한 전국국악대회도 2001년부터 매년 10월 열리고 있다.(출처:한국컨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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