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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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가훈’한 맺힌 삶, 모진 세월, 동토의 땅 사할린. 대한적십자사의 주선으로 일시 귀국하신 1세대 동포 23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조국의 포근한 봄 향기와 선친들께서 숨 쉬었던 산천 정기를 맘껏 누리셨기를 바랍니다. ㈜국악신문은 10여 년간 사할린에서 ‘사할린아리랑제’를 개최하고 ‘사할린새고려신문’,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사할린영주귀국동포후원회’를 지원하는 30년 전통의 언론사입니다. 이제 6박 7일간의 모국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시는 동포 여러분. 귀국하시어 내내 건강하심을 전 독자들과 함께 기원드립니다. ㈜국악신문에서는 모국의 훈훈한 정을 기억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저명한 한글 서회(書會) ‘갈물한글서회’와 협의하여 한글 가훈(家訓)을 준비하였습니다. 작가들께서는 귀국하시여 가족들과 함께 모국의 정을 나눠 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적극 동참하였습니다. 이에 15명의 저명 서예가들의 정성어린 작품을 대신하여 전해드립니다. 작가의 이력을 각각 동봉하였으니 참고하여 주십시오. 직접 뵙고 전하지 못하는 작가분들의 서운해하는 마음도 전해 드립니다. 동포 여러분! ㈜국악신문은 하루빨리 정세가 안정되어 사할린 ‘아리랑공원’에서 다시 ‘사할린아리랑제’를 개최하여 반가운 마음으로 뵙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편안한 귀국길이 되시길 비옵니다. 2024. 03. 22. ㈜국악신문 대표 기미양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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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이즘한글서예가전시회... '아리랑 특별전'을 축하하며오늘 네번째 맞는 '이즘한글서예가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 2002년 제2회 이즘한글서예가전을 참관하고, 아름다운 한글서예 매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우리나라 대표하는 서예단체 작품답게 다양하고 웅장한 작품을 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자긍심을 지켜가는 이즘회 회원 작가들의 면모를 보면서 존경심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우리 문화의 정체성은 전통을 지키며 민족적 가치를 발현시켜 나가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면에서 국악과 함께하는 서예는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주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글서예는 서예문화권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우월성을 나타내는 독보적 분야입니다. 저희 국악신문에서는 국악과 한글서예를 연계시키기 위해 매주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을 주간으로 연재하여 현재 200회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시조 가사. 가곡 종목의 사설로 시작하여 지금은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사설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앞으로 신민요 시설은 물론, 창가와 가요 사설까지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코너는 주간 접속 수가 가장 높은 연재물입니다. 이는 서예술이 국악신문 독자들을 감동시킨 것이며, 우리 전통예술 서예술과 국악의 융합'이라는 성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동안 연재를 맡아주신 한얼 이종선 선생님의 서체의 기운은 물론, 깊고 풍부한 해설의 격조를 국악계가 받아 들이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국악신문 독자들이 한글서예에 다가갈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특히 오늘 이번 전시에는 '아리랑특별전'이 함께 열렸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불리는 아리랑이 아름다운 한글서예와 만나 어떤 꽃을 피워낼까? 기대가 큽니다. 오늘 3월 꽃향기를 찾는 셀레임으로 '2004 이즘전' 그리고 그 속에 '아리랑특별전'을 우리 독자들과 전국 아리랑 식구들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아리랑 작품들은 전국 아리랑 전승지역과 국내외 동포사회에 널리 알리는 기회를 마련하는데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즘전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3월 13일 (주)국악신문사 대표이사 기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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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제주 전통초가…장인들 "이제 은퇴 할 때"편집자 주=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제주의 전통가옥인 초가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4·3과 6·25 전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도 그 명맥을 이어왔지만, 새롭고 편리한 문물이 쏟아져 들어온 근현대를 거치며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오랜 세월 전통을 이어온 장인(匠人)들이 있지만, 그들 역시 늙고 병들어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3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4·3에도 멀쩡하던 초가…근현대화에 사라져 40대 중반인 기자가 제주 전통 초가에서 생활한 적은 없다. 다만 어렸을 적 친할아버지·할머니가 살던 초가집에 대한 추억은 간직하고 있다. 친할아버지·할머니댁은 제주시내에서 자동차로 1시간 남짓 떨어진 한림읍 동명리에 위치에 있었다.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안채'를 뜻하는 제주어)와 밖거리(바깥채), 모커리(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가로 높인 부속건물)가 'ㄷ'자 모양으로 된 세거리집이었다. 1938년생으로 올해 90세 가까이 된 아버지는 옛날 초가집에서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자매와 살던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고조부 이전부터 대를 이어 살았던 오래된 집이었다. 하지만 가족은 4·3 당시 군경과 무장대를 피해 세차례나 옮겨다녀야 했기 때문에 한동안 집을 비워둘 수 밖에 없었다. 그 오랜 난리통에도 이 집은 멀쩡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4·3 이후 다시 고향 동네로 돌아온 아버지 가족을 반갑게 맞아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를 비롯한 9남매(이 중 3명 일찍 사망)는 안거리에서 살았고, 밖거리에는 할아버지의 어머니인 증조할머니가 홀로 생활했다. 안거리와 밖거리에 모두 정지(부엌)가 있었기 때문에 증조할머니는 직접 음식을 해드시며 독립적인 생활을 했다. 제주에선 자식이 혼인해 아이를 낳으면 부모는 안거리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밖거리로 들어가 살았다. 장남이 부모를 모시며 대가족을 이루는 다른 지역과 달리 제주는 부모와 결혼한 자식이 한 울담 안에 거주하면서도 별채에 따로 생활하며 세대별로 독립된 경제생활을 하는 독특한 가족제도를 이룬다. 부모는 자신의 손으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한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고, 가급적 간섭도 하지 않는다.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 손바닥 만한 마당은 부모와 자식 세대가 '따로' 또는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 준다. 초가가 대부분이었던 제주 전통가옥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공간이 많다. 일종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우영',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인 '고팡', 집의 출입문에 해당하는 '정낭', 소의 먹이인 꼴을 저장해 두는 '눌왓' 등이다. 또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면 동시에 방바닥을 달구도록 설계해 취사와 난방을 일체식으로 만들었던 한반도 다른 지역과 달리 제주는 취사와 난방을 분리해 '굴묵'이라는 난방 시설이 따로 존재했다. 이외에도 제주를 찾은 관광객이 가장 신기해 하는 '돗통시'가 있다. '돗'은 돼지를, '통시'는 뒷간을 뜻하는 말로 돗통시는 돼지우리와 화장실을 겸한 공간이다. 제주 사람들은 돗통시에서 볼일을 보고 그 인분을 먹여 돼지를 키웠는데, 이러한 옛 풍습으로 인해 제주 돼지에 '똥돼지'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기자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댁에 갔을 때는 돗통시에 돼지를 키우진 않았지만, 형·누나들만 해도 볼일을 보다가 돼지가 뒤(?)를 핥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는 말을 듣곤 했다. 제주의 초가는 1970년대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새마을운동 일환인 '농촌주택개량사업', '지붕개량사업' 등으로 인해 점차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다. 또 인분을 위생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수거식 또는 수세식 화장실로 바꾸는 변소개량 사업도 추진됐다. 제주도심에서는 돗통시가 자취를 거의 감췄지만, 나머지 농어촌 지역에서는 돗통시와 같은 재래식 화장실이 오랜 기간 여전히 남아있었다. 행정기관은 1980년대 들어 반강제적인 개량 사업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제주에서의 1984년 전국소년체전 뿐만 아니라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등 굵직한 행사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됨에 따라 제주 관광객 유치에 '돗통시'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과거 변소개량, 지붕개량 사업을 했던 옛 기억을 떠올리며 "제주에선 집 곳곳에 신이 있었다고 믿었고 함부로 뜯어 고치면 동티(신의 노여움으로 인한 재앙)가 난다고 믿었다"며 "변소·지붕개량 사업을 할 때 공무원도, 철거인력도 동티가 날까 무서워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관명'(官命, 조정 또는 정부에서 내리는 명령)이라고 쓰고 군수 직인이 찍힌 종이를 변소 등에 붙여서 초가를 뜯어고쳤다"고 말했다. ◇ "전통초가 새로 짓고 있지만 옛 제주 방식 아냐" 제주 초가를 짓는 방법은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초가의 재료다. 다른 지역에서는 가을 추수 후 생긴 볏집을 지붕 덮는 재료로 쓰지만 제주의 경우 논이 드물어 억새풀의 일종인 새('띠'를 뜻하는 제주어)를 사용한다. 또 화산섬 제주에 지천으로 널린 현무암을 많이 사용하고, 제주의 흙을 사용해 붉으스름한 색감을 띠는 타지역 초가와 달리 제주 초가는 거무스름한 색감이 나는 등 차이가 있다. 제주 초가 공사는 토공사, 석공사, 목공사, 지붕공사로 이뤄진다. 세부 공정을 살펴보면 초가가 세워질 터에 바위와 큰 돌을 골라내고 바닥을 견고하고 평평하게 다지는 '기반 다지기', 기둥이 세워질 곳을 약간 판 뒤 그 자리에 주춧돌을 놓는 '주춧돌 놓기', 잘 건조된 둥근 목재를 다듬어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는 '기둥 세우기' 작업을 차례로 진행한다. 이어 '지붕 서까래 엮기', 자연석을 차곡차곡 쌓아 외벽과 내벽을 만드는 '벽체 돌 쌓기', '구들(방)에 돌 쌓기', 지붕을 올리기 전에 서까래 위에 전체적으로 대발을 까는 '대나무 살대 깔기', 흙과 새풀을 섞어 만든 바름흙을 대발과 벽체 안팎, 구들바닥, 천정 안팎 등에 꼼꼼히 바르는 '바름흙 바르기', '마루널 깔기', '문·창호 만들기', '초가지붕 잇기', 화덕·정낭 등 만들기, 돌담 쌓기 등 순서로 공사가 이뤄진다. 제주 서귀포시 성읍리 성읍민속마을에는 실제로 제주 초가를 지을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장인(匠人)들이 있다. 토공(土工) 김권엽(84) 선생, 석공(石工) 강창석(83) 선생, 모공(茅工, 지붕잇기 장인) 강임용(76) 선생, 목공(木工) 홍원표(66) 선생 등 4명이다. 제주도는 지난 2008년 4월 18일 초가를 짓기 위한 각 공정의 전문가를 도 무형문화재 '초가장'으로 지정하고, 기술 보유단체로 성읍민속마을 보존회를 지정해 전승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을 잇는 데는 애로사항이 많다. 네명의 초가 장인들 중 한 명인 지붕잇기 장인 강임용(76) 선생은 "현재 초가장 석공 부문에는 전승교육사(옛 명칭 '전수교육조교')가 있다. 하지만 나머지 3개 부문에는 보유자를 이어갈 전승교육사가 없는 상태"라며 "20~30년간 같이 일을 한 이수자들이 아직도 전승교육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답답할 노릇"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무형문화재와 달리 초가장은 몸을 많이 쓰기 때문에 일이 매우 고되다. 나이가 80세 가까이 됐고, 다른 보유자들도 나이가 많아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이제 은퇴해 명예퇴직하고 그 자리를 물려줘야 할 때"라고 얘기했다. 8년 전인 지난 2016년 목공 장인이었던 현남인 선생이 89세의 나이로 작고한 바 있다. 무형문화재 전승체계는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기·예능 보유자'와 보유자의 전수교육을 보조하는 '전승교육사', 보유자 등이 실시하는 전수교육과정(3년 이상)을 수료하고 이수심사를 통과한 '이수자', 전수교육을 6개월 이상 받은 사람 중 심사를 거쳐 장학생 자격을 얻은 '전수장학생' 등이 있다. 강 선생은 제주만의 특성이 없는 육지식 초가가 새로 지어지는 현 실태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그는 "해마다 성읍민속마을 내 오래된 초가를 고치거나 못쓰게 된 집을 헐어 새로 짓는다. 하지만 이때 초가장을 활용하지 않고 입찰을 통해 들어온 외지 업체들에 일을 맡기기 때문에 우리들이 전수 활동할 수도 없고, 옛날 제주 전통방식의 초가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육지식 초가가 새로 지어지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강 선생은 "축담을 쌓는 것부터 옛날 제주방식으로 하지 않고 전부 기계로 다 깎아 매끈하게 만든다. 또 거무스름한 제주 화산회토를 발라야 하는데 업체들은 제주에 없는 황토를 가져다 발라 초가가 빨간집이 돼 버렸다. 초가 자체가 옛날 제주 것이 아니다"라고 아쉬워했다. 이에 대해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관계자는 "법률과 실제 현장과 괴리가 있는 부분"이라며 "현재 법률상 문화재 수리 자격을 갖춘 업체, 기술자들이 문화재 보수를 할 수 있는데 이때 장인분들이 소외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문화재청장이 인정해 주는 일부 무형문화재에 대해 장인들이 문화재 수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가 있다. 그래서 우리 세계유산본부에서도 문화재청에 초가장을 인정해 달라고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는데 현재 수용되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또 이수자들이 전승교육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수자가 된 후 전승교육사가 되려면 5년 이상 경력이 돼야 인정받는다. 20∼30년 함께 일하셨지만, 그분들이 지난해 이수자 신청을 해서 같은 해 9월에야 인정받아 현재로서는 규정상 자격을 갖출 때까지 기다려야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제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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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보는 세상] 33년 걸친 한 우편배달부의 집념(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그는 작가가 아니었다. 건축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만든 건축물을 보기 위해 세계에서 연간 1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한적한 프랑스 남동부 시골, 오트리브(Hauterives)를 찾는다. 페르디낭 슈발(1836~1934)은 평생 걷고 또 걸은 우편배달부였다. 소중한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하루 약 30km 거리의 궁벽하고 척박한 길을 돌아다녔다. 어느 날 돌에 채 넘어졌다. 돌을 원망하다 돌을 자세히 본 그에게 영감이 떠올랐다. 이후 걷는 걸음마다 주변을 살피며 돌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은 돌로 '짓기' 시작했다. 지으면서 건물의 구조와 형태를 상상하며 자기 머리를 채운 '이상'으로 향했다. 그가 지은 건축물에 '팔레 이데알 (Palais Ideal)', 즉 '이상의 궁전'으로 이름 붙였다. 건축물을 결코 단기간에 지은 것이 아니다. 직업에 충실하며 틈틈이 지었다. 궁전을 지은 시간은 무려 9만 3천여 시간, 약 33년이었다. 1879년에 돌을 모으기 시작해, 외벽을 짓는 데만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멈추지 않고 내부를 꾸며 마침내 1912년 꿈을 이뤘다. 가히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과 미술에 대해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오늘날까지 굳건한 아름답고 튼튼한 성을 구축했다. 그의 집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건축물을 자세히 보면 안토니 가우디가 지은 '성 가족 성당'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할 만하다. 평범한 한 시골 집배원 노력에 가족과 주민들은 아마 찬사를 보내기보다 '미친놈' 취급을 했을 것이다. 점차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가족들도 인정하고 도왔다고 한다. 그는 상상을 북돋우기 위해 다른 문화 건축물도 공부했다. 프랑스식 궁전 모양뿐 아니라 이슬람, 중국, 인도 문화 건축물 양식까지 합쳤다. 그는 자신이 지은 이 건축물에 묻히고 싶었지만,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포기할 법한데, 그는 아니었다. 허가조건에 맞게 다시 8년에 걸쳐 자신과 가족을 위한 영묘를 완성했다. 불굴의 의지로 그와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궁전 벽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농부 자식으로 태어나 농부로 살아온 나는 나와 같은 계층의 사람 중에서도 천재성을 가진 사람, 힘찬 정열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고 또 죽겠노라" 유언으로 남긴 말도 의미심장하다. "나는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선 안 된다고 했던 나폴레옹을 떠올렸다. 그가 옳다" 한 인간이 품은 '자존(自尊)'의 힘은 이만큼 크다. 돌을 하나하나 쌓을 때마다 스스로 쌓이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고, 자기 생각이 형상으로 실현되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세월은 그에게 전혀 장애물이 아니었다. 33년이라는 자존의 시간에 그 어떤 방해가 그를 막을 수 있었을까? 작고한 시인, 신현정에게 '길 위의 우체부'라는 시가 있다. '세상은 온통 나비 떼 나비 떼 정작 나는 행방불명이 되고 싶었다 민들레 옆에 자전거를 모로 눕히고 쪼그려 앉아 담배 피운다 아, 나는 선량했다' 이 시를 읽으며 슈발을 생각했다. 슈발은 선량했다. 슈발은 건축에 몰입하는 동안 행방불명이 되고 싶었다. 슈발에게 세상은 나비 대신 온통 돌이었고, 궁전이었고,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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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더스] 당신의 말하기 실력이 늘지 않는 이유우리는 늘 말을 하고 있다. 만 1세 전후로 말문이 터진 이후 지금까지도 회사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늘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냥 말만 한다. 말을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은 말을 일하게 만든다. 상대방의 귓속으로 흘러 들어간 말이 그의 마음을 열게 만들고, 때론 지갑도 열게 만든다. 법정에 불려 나온 용의자가 억울한 혐의를 벗는가 하면, 범죄가 드러나 심판도 받는다. 그뿐인가. 말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와 함께 말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누군가를 설득하고 마음을 울리며 의견을 명료히 전할 수 있는가? 유튜브 등 SNS를 보면 스피치(말하기) 관련 영상들이 꽤 된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봐도 말하기 학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영상을 보고 따라 하거나 학원에 다녔다고 말하기 실력이 향상됐을지는 의문이다. 늘어난 실력이 지속됐는지도 마찬가지다. 전부는 아니어도 고개를 젓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대표적인 이유는 강사가 말을 잘한다고 말 가르치기도 능숙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발음, 발성 등 음성 훈련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소통)의 일부분일 뿐이다. 검증되지 않는 정보와 파편화된 훈련을 해 봐야 효과를 장담할 수 없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전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소통'의 문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말하는 상황을 접하면서 말하기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필자가 수많은 기업에서 스피치 코칭을 하면서 느낀 것은 '셀프 코칭'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말을 하면서 스스로 코치해 발전하는 선순환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스피치의 셀프 코칭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할까? 바로 방향성과 의지다. 방향성이란 스피치의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나의 말하기를 향상시킬 수 있을지 학문적, 이론적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다. 무턱대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로 연습해봐야 소용이 없다. 나의 말하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정확히 판단해 그에 맞는 훈련 방법을 적용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비로소 말하기를 하면서 스피치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두 번째는 의지다. 의지도 사실 방향성과 연관이 깊다. 스피치에 돈이 걸려 있거나, 승진과 관련이 있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기회로 여겨지면 열심히 연습한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장기적, 선순환적 구조를 갖기 위해서는 방향성에 맞는 훈련이 중요하다. 그러면 성취 경험이 생기고, 그것을 바탕으로 의지를 갖추고 생활에서 훈련할 수 있다. 말하기는 자전거 타는 것과도 유사하다. 무조건 연습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어느 정도의 타기는 가능하겠지만 우리가 바라는 고급 수준까지는 오르기 어렵다. 또 이론을 아무리 안다고 해도 실제로 타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제대로 습득한 이론을 바탕으로 연습했을 때 성과가 있다. 필자는 2006년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국내 1호 박사 학위를 받았고 27년간 아나운서로 일하며 17년 동안 스피치 코칭을 해왔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스피치를 잘할 수 있는 노하우를 공유하고자 한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스피치, 말하기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통상 스피치라고 하면 나의 주장을 얼마나 논리적이고 막힘없이 말하는가에 집중해 있다. 즉 다변(多辯)과 달변(達辯)이 말 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스피치는 단순히 말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다. 가장 좋은 말하기는 상황과 때에 맞게 적절히 말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최고의 말하기일 수도 있다. 그걸 증명한 사람은 바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다. 2011년 애리조나 총기 난사 사건 추도식 현장에서 현직 대통으로서 오바마는 스토리텔링(이야기)을 통해 사람들을 위로하며 미국이 나아갈 방향을 얘기했다. 그 사건으로 죽은 가장 어린 사람은 9살 크리스티나였다. 그녀에 대해 언급하며 스피치를 이어가던 오바마는 유가족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돌연 침묵에 빠졌다. 무려 51초 동안. 다음날 미국 언론들은 '21세기 공감의 스피치'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 장소, 그 상황에서 어떤 미사여구로도 유가족을 위로하지 못한다. 같이 아파해 주는 게 최선이다. 종종 우리는 말을 잘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 무언가를 많이,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걸로 여긴다. 하지만 100% 옳은 방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최고의 스피치는 상황과 때에 맞는 내용으로 적절히 말하되, 때로는 침묵도 필요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결국 말을 잘하기 전에 '소통'이 우선해야 한다는 뜻이다. 앞으로 연재할 스피치 나침반은 바로 '소통력 5단계'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1단계는 '공감력'이다. 공감의 힘을 키워 상대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스피치의 기획, 구성, 전달 모든 과정에서 공감이 내재돼야 한다. 2단계는 '지식력'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못하면 상대가 이해할 확률이 떨어진다. 나의 메시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연습해야 한다. 3단계는 '언어구사력'이다. 막힘없이 말할 수 있는 힘을 체계적으로 길러야 한다. 4단계는 '표현력'으로 언어와 비언어에 해당한다.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그 비중이 작아지고 있다. 좋은 말하기는 단순히 아나운서처럼 부드럽고 전달력 있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5단계는 '상황 통제력'(메타인지)이다. 말하는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해 대처하는 능력이다. 이 5단계는 여러분이 스피치를 연습할 때 방향성이자 스피치 이후 모니터하는 기준점이다. 아무쪼록 소통력 5단계를 통해 여러분의 답답한 스피치가 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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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2편)가라후토에 맺은 의형제 박득수는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화태에 들어가셔서 산중에 사는 누나 집에서 거의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 힘든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기로 결심한다. 누님이 그저 밥은 먹여 주지만 옷도 안 사주고 돈도 안 주고 하니까 더욱 눌러 앉을 수가 없게 된다. 박득수는 누님 집에서 3년 있다가 돌린스크 시내로 내려 왔다. 일본사람의 꼬임에 모집으로 들어온 조선사람들을 만나 같이 잡일을 하게 된다. 어른들과 같이 살면서 숙소도 함께 하면서, 모두 정이 들어서 형님 아우로 의형제를 맺으면서 지내게 되는데 박득수는 가장 막내였다. 5년후 가장 나이 어린 박득수는 글도 아는 정직한 청년이어서 형님들에게 많은 사랑과 희망을 받게 된다. 장가를 갈 나이가 들자 가장 맏형 고 오지상이 당장 장가를 가야한다고 한다. ”수!, 너 여기 있지 말고 한국에 나가 가주고 장개 들라. 여기서는 여자들이 없다 보니께 일본 여자한테 장개 가지 말고 한국 가서 장개 들어 가지고 오라! 우리는 조선에 처도 있고 자슥도 두고 와서 이렇지만은, 너, 다까하라, 너는 이렇게 해서 나이 어린게 안된다. 고향에 가서 장가를 들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어라" 그는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었다. 그래서 조선사람들과 누이 내외가 조선행 배삯을 거둬주어서 박근수는 24살에 고향에 나가게 됐다. 8년 만에 나간 조선에서 집안 어른 중신으로 아내(강순예)와 결혼하게 됐다. 가라후토 강제모집과 이산 박득수는 결혼 후 조선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소박한 희망은 허사가 되어 버렸다. 안성면 사무소에서 모집 영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1936년, 1937년에 흉년이 들었지. 2년 동안에 흉년이 들어서 농민들은 먹고 살기가 매우 바빴어. 마침 그럴 때 일본이 지나사변으로 중국과 싸우다가 젊은이들이 군대에 동원돼 노무자가 부족했어. 흉년이 든 상황에서 일본은 모집을 시작했단다. 어느 탄산이 모집한다는 광고가 여기저기 붙었었지. 그러니까 조선에서는 생활이 바쁘고 먹고 살기가 바쁜데 모집을 한다니께, "아! 일할 데 있으면 어디든지 가야지!” 라고 하니 일본 놈들이 그저 막 강제오 데려 간거야. 1938년에 네 둘째 박기남 삼춘이 일본 구주(九州, 규슈)로 모집가서 탄산에서 사고를 당하고 불귀가 됐어." 아버지가 나에게 그 당시 상황을 상세히 밝혔다. 처음에는 모집 광고로 해서 많은 조선인들을 데려갔는데 점점 모집을 광고 없이 하고 다음 지원자가 나오지 않자 강제연행으로 바꿨다. 일본회사가 모집을 하면 조선총독부를 통했는데, 총독부에서 어느 면에서 몇 명을 보내야 한다면 조선 앞잡이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영장을 전달했다. 박득수는 이미 가라후토에서 살다 왔으니까 모집영장이 잘못 나왔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토리우치보(헌팅캡)를 쓰고 당꼬바지를 착용한 형사가 새살림을 시작한 신접 살림집으로 들이닥쳤다. ”너, 다까하라, 이리 오라! 너 영장 받았니? 왜 면사무소에 안 왔니?" "나는 벌써 화태에 갔다 왔습니다. 그래서 영장을 내게 잘못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빠가야로! 너는 무조건 가야해! 빨리 준비해서 나와" 이렇게 새신랑 박득수는 강제모집으로 결혼 일년반 만에 가라후토로 끌려가게 됐다. 면사무소에 갔을 때, 거기에는 이미 백 여명의 모집을 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에 니무라와 마쪼까 두 친구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로는 동네 경찰서에서 일본 사람과 조선사람 앞잡이들이 와서 "우리는 내선일체다 천황의 명령이다”라고 하면서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지나 전쟁이 막바지에 다달았다. 이제 결승전이다 보니까 1년간 가라후토로 가서 일해라”고 윽박지르고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면서 노예 취급을 했다. 25살 새 삶을 시작해야 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운명과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우리가 나가면 집에 일할 사람이 없고 어머니는 굶어 죽는다”고 애원을 하니까 앞잡이들은 ”집에 여자들이 있으니 1년간 살 수 있을거”라고 설득하고 달랬다가 발로 차고 때렸다. 앞잡이는 총독부 명령에 따라서 국민들은 꼭 가야만 한다고 했다. 아니면 니네 가족은 배급을 못 탄다. 아니면 아직 어린 여동생이나 딸을 위안부(정신대)로 내놓으라고 칼을 휘두르며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무주군 안성면에서는 가라후토에서 온 일본인 사무소장과 김수문이라는 함바(飯場, 현장 근처 노동자 숙박소)사장을 맞이했다. 가라후토에 가면 얼마의 돈을 번다든가 어떻게 산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도 없이 그냥 가라는 것이었다. 그 때 안성면에서 모인 사람들이 열둘인가? 열넷인가? 그 정도 모였다. 함바 사장인 김수문은 다른 지역으로 사람을 모우러 나가고, 일본인 사무장은 남아서 징용을 가는 조선인들을 감시했다. 그날 밤은 여관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기차 타고 부산으로 떠났다. 일본인들은 그 당시 공습 때문에 무서우니 밤에 다녔다. 부산에 도착하니까 소독소로 보내서 모든 일행을 소독하고 목욕도 시켰다. 밤 아홉시 쯤 되어서 부두에서 연락선 공고마루에 승선했다. 한밤중에 배를 타고 부산항에서 출발하여 일본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으로 갔다. 아침 해 뜰 무렵에 도착했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 합쳐져서 열여섯 명이 한 그룹이 되어 함께 다다미(たたみ,타타미)를 배 가장 밑바닥에 있는 하등실 공간에서 모두 다 잠을 잤다. 그 때가 6월, 여름이니까 춥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하관에서 동경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동경에서 또 하루 자고 기차를 갈아타고 아오모리까지 가서 다시 하루 자고 거기서 북해도 하코다테까지 배로 갔다. 북해도 북부에 위치한 와카나이에 가서 사할린 섬 오도마리항까지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부득이한 여행은 8일 이상 걸렸다. 박득수는 가라후토에서 오치아이(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다. 깊은 산 골짜기에서 아름드리 나무를 베는 일은 힘들었지만 할만했다. 6개월 후 조선에서 아내 강순예가 화태로 왔다. 박득수가 배치된 산판은 오치아이에서 한 630리가 되는데 이미 30명의 모집으로 온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어른들이 새집도 얻어 주고 살림살이도 장만해 주었다. 가족들도 한 여섯, 일곱집이 있어서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데 큰 고생은 안했다. "개인집에서 그 때는 한달에 2원씩 집세 받고 세 놓고 그랬어요. 방 두 칸짜리 이런데서. 그때는 주로 화롯불, 난롯불 놓고 거기서 밥 해 먹고 그렇게 살고 했어요.” 산판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부를 못한 분들이어서 강순예가 편지나 문서를 작성해주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인한테서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남편 박득수도 지식인으로서 브리가지르(бригадир,조장, 팀장)로 일했다. 벌목공들은 2년 동안의 계약을 맺고 왔는데. 기한이 지나도 일본 당국은 조국으로 돌려 보내지 않았다. 월급은 다 주지 않고 조금씩 내주었다. 나머지는 조선에 갈 때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끝까지 지켜지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산판에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박득수도 역시 시리도리(현 마카로프) 제지공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거기에서 일년 동안 일하고 조선사람들 한 30명을 모아서 니또이 산판에 가서 벌목일을 시작했다. 3년 후 1942년 조선에 살고 있는 친척들한테서 편지가 왔다. 조국에서는 너무나 살기 어려우니까 가라후토로 불러 달라고. 그래서 증명서를 보내 홀로 계신 어머니와 큰 형 식구 5명이 니또이 촌으로 오게 했다. 몇년 후 고모 가족도 우리가 사는 니또이에 이주하여 가까운 곳에서 함께 등 부비고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사람들은 기르던 앵무새와 개까지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조선인들은 영영 귀환하지 못했다. 남의 나라 전쟁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강제동원 되어 잠시 있다가 돌아가는 줄만 알았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4만3천 여명의 이산가족이 해방된 사할린에 나타난 것이다. 언제가 조국과의 상봉을 꿈꾸며 이국 만리에서 낯선 민족들과 뒤섞여 살아야만 했다. 러시아 180여개 민족 중 식민국민이라는 낙인이 찍힌채.......소련은 일본이 버리고 간 탄광과 산판. 펄프공장에 투입할 노동력이 필요했고, 불안정한 조국은 우리를 데려가지 못했다. 남화태에 남겨진 30여 지역 탄광에서 돌아가는 기계는 일본어를 아는 조선인이 작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양인의 몸 사이즈에 맞춘 탄광 지하 갱도는 서양인의 체구에 전혀 맞지 않았다. 남겨진 조선인을 관리하기 위해서 소련 정부는 큰땅(대륙)에 사는 고려인 지식인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완장을 채우고 우리를 감시하고 체계적 시스템을 조직하여 노동력을 착취해 나갔다. 배급을 받아야 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해져 가고 일본말과 조선말을 못 쓰게 하고 소련 정부에 적응하는 동화정책을 실시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조선말과 조선 이름 대신 러시아 이름으로 바꾸어야 불이익을 안 받게 된다. 사할린 한인 국적도 조선, 일본, 소련, 북한, 러시아 등으로 5번 변경되면서 국적에 따라서 이름도 바뀌게 된다. 그래서 2세부터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젖줄같은 고향땅 논밭전지와 집문서를 맡겨놓고 온 사람, 홀로 남은 늙은 어머니를 친척집에 맡겨놓은 사람, 어여쁜 아내와 자식들이 기다리는 사람 등등 사연도 많고 많다. 조선인들은 코르샤코프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미쳐서 죽고 얼어죽어 나갔다. 장가도 못간 청년들은 남편 잃고 여러 명의 아이가 딸린 여자와 살아야 하고, 두고 온 가족을 그리다가 평생 재혼도 하지 않고 홀아비로 살다간 사람, 산판과 탄부에서 죽도록 일하다가 지병을 얻어 일찍 죽거나 나이를 먹어서 죽은 사람들은 결국 고향으로 못가고 가라후토에 뼈를 묻어야만 했다. 특히 정신대로 끌려와서 버려진 어린 여성들을 평생 껴안고 남편으로 아들 딸로 살아야만 했다. 아버지의 노래 고향을 그리던 박득수는 1977년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억울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제1 공동묘지에 영원히 안치했다. 매년 8월 15일 추석날 우리 가족은 모두 아버지의 묘옆에 묵묵히 서 있다. 3명의 아들과 2명의 며느리. 손자들을 데리고 그리운 아버지를 소환해 본다. 오늘은 아버지를 위한 시를 준비했다. 세월을 잘못 만나서 낯선 땅에서 억울하게 살다가신 아버지의 이산과 억류, 미귀환에 대한 아픔을 시로 지어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두 손으로 바쳤다. 나는 천천히 낭송을 해 드렸다. <아버지의 노래>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 여년에 청춘만 늙고 추석밤 청명한 보름달 바라보며 철새따라 가고팠던 아버지의 노래! 일제에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고 할아버지 아버지 형님을 여의고 열여섯 젊은 시절 가장이 되어 일제시대 엄동설한 화태로 들어가서 산판에서 만고풍상 겪으셨고 스물다섯살 고향가서 아내를 얻었지만 꿈같은 신행도 얼마 못가고 강제모집 가라후토로 끌려갔네 산판에서 위험한 벌목장에 목숨을 바치시고 소련시대 위태로운 강에서 유송하시고 토끼같은 사남사녀 팔남매 밝게 키우시고 조선민족 풍습과 예의범절을 가르치시네 육년동안 험한 중풍에 시달리셨으나 자식 앞에서 흉한 모습 보이지 않으시네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그리운 고향주소 소리없이 불러보시네 매년 팔월십오일 아버지 묘비명에 서있네 살아생전 아버지의 소원을 못 들어드려서 손자손녀들 사할린에 뿌리를 내리지만 밀양박씨 대대손손 영원하리라 아버지가 불렀던 노래 한 구절은 평생 그리워하던 고향집 주소였던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12번지”는 아버지의 노래이고 영혼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잊지 않으려고 늘 우리들에게 되새겨 주셨던 것이다. 너라도 반드시 찾아가서 밀양박씨 집안 어른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갈 수 있었다. 나는 11년전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아내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땅을 찾았지만 우리 집안을 알던 이웃 어른들은 모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빚이 되었는데. 2019년 어느 봄날 다시 무주땅을 찾아가서 안성면 이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와 같이 총 14명이 강제징용으로 차출되었는데, 돌아 온 사람은 단 1명만 부상을 당해서 장애자가 되어 돌아왔는데 후에 그 자식들은 이민을 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아버지의 이름이 박힌 호적등본 사본을 안성면사무소에서 신청해서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 석자 박득수와 주소가 찍힌 호적등본과 아버지가 살던 집터의 흙을 고이 담아서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왔다.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를 뵐 낯이 있게 되어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2달후 7월이 되어 사할린에 들어갔다. 사할린 땅에 묻히신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의 묘지를 찾았다. 아버지 혼령 앞에 호적등본을 보여 드리고 고향집 주소를 큰소리로 읽어 드렸다. 이어서 고향집 흙을 뿌려 드리면서 술 한잔을 올리자 나는 아버지가 읊으시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아들에게 손자에게 일러줄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집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12번지” 아버지! 이제나마 편안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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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1편)2023년 제25회 한민족 체험수기에서 사할린 동포 3분이 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어 오는 2일 시상식이 예정되어 있다. 공동 우수상을 받은 수기는 박승의 씨의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 러시아 사할린 코르사코프시 발레리 오(오석만) 씨의 '사할린 한인 2세, 오래된 희망',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인무학 씨의 '내가 아는 고려극장 맹동욱'이다. 이 수상 소식을 듣고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이 우리 사할린에 살고 있는 동포들도 다 읽어볼 수 있게 국악신문에 개재를 요청하게 되어서, 3분의 수상작을 5부로 나누어서 게재를 한다. 다음은 박승의 씨의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는 전라도 무주에 살던 가족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토지 수탈 정책으로 소작인과 농민들이 하루 아침에 생명줄을 이어주던 땅을 뺏기자, 살기 위해 한반도를 떠나게 된다. 평화로운 한 가정이 일제의 강제모집에 속아서 사할린에 끌려가면서 이산과 고난이 시작된다. 3대에 걸친 사할린 가족사이다.(편집자 주) 이 글은 사할인 한인 1세 아버지(박득수, 1915년생)와 어머니(1922년생), 할머니(1883년)에게 전해 들은 밀양박씨 집안과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이가 끌려간 가라후토 전라도 무주에서 살던 나의 아버지 박득수는 16살 어린 나이에 누님 박봉순이 살고 있는 가라후토로 가기로 결심한다.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대대로 부치던 땅을 빼앗기자 아버지는 화병을 얻어 졸지에 아버지를 잃게 되고. 형님마저 큰집으로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피폐해진 조선의 농촌은 먹고 살길이 막연하였다. 박득수는 강제모집에 속아 가라후토에 끌려간 누나가 있는 곳에 가면 무언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생길 것만 같았다. 박득수는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한 방책으로 일본 교장집에 가사도우미로 맡겨 놓고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라후토로 향했다. "어머이! 내 누님한테 갈래! 여기선 할일이 너무 없어서 못 견디겠어. 왜놈들 때문에 우리 조선사람들은 죽을 지경이야!" "니 아직 어린데 혼자 낯선 데서 어떻게 살라고?" "어머이! 가라후토에서 2년만 일하면 돈 많이 벌 수 있대. 또 거기 누님 있잖아. 어머이, 걱정마! 꼭 2년만 갔다 올께” 늦은 가을이었다.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덮었고 비가 올가 말가 했다. 마치 자연도 박득수의 기분에 동정하는듯 ... 검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기차는 전라북도 무주에서 출발하여 다음 날 새벽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부산 항구는 사늘했다. 때는 1931년 동짓달 그믐이었다. 먼 동해바다에서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은 습기로 말미암아 눅눅해진 얇은 외투를 입은 부산항에 도착한 득수에게 뼈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부두에는 몇 백명의 젊은 남자들이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부산항을 출항할 때는 늦은 밤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박득수는 저 멀리에서 반짝이는 항구의 불빛을 바라봤다. 당시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시 한편에 실어본다. <고향> 잘 있거라 나의 조국! 귀여운 삼천리 금수강산! 출렁이는 바다 물결!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버리고 무얼 찾아 이국땅을 향하리까? 나의 어머니(강순예)는 당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 "다음날 네 아버지는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동경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탔다. 동경서 친하게 지내던 양반이 있었대요. 그래 그 집에 가서 구경도 하고 하루 쉬어 가주고 자고 그래 인제 갔지요.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후에 급속도로 근대화를 달성한 도쿄의 모습, 즉 카페나 댄스홀, 영화관, 유곽 등 향락적인 거리의 모습은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일제강점기 빈곤에 시달리거나 일본사람에게 멸시당하는 조선사람들의 비애를 체험한 박득수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광경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 동경에서 어디, 그 오래 되어서 인제 잊어부려. 그 북해도 있지. 사할린 가는 배 타는 아오모리까정까지 가주고 거기서 또 인제 화태로 들어가는데. 그래갔고 언젠가 모르겠어…., 하여간 니 아부지가 동짓달 여기 오니께 눈이 막 오고, 배가 좀 출렁거렸대. 오도마리. 지금 콜사코프 (코르사코프)라 하지. 거 가서 내려갔어." 드디어 사할린 오도마리에 도착하니 매형이 보낸 일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라후토는 득수 총각을 땅위에 쌓인 눈과 추위로 맞이했다. 누님이 살고 있는 마누이라는 촌은 오찌아이(현 돌린스크시)에서 한 130리 떨어진 두메산골이었다. 말이 끄는 발구를 타고 5시간 이상을 매서운 바람이 부는 눈길을 헤치면서 나아갔다. 득수는 이렇게 많은 눈을 처음 봤다. 참 신기했다. 조선에서는 눈이 이렇게 많이 쌓이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발구(말이 끄는 눈썰매)에서 내려 눈길을 걷기도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나의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래 누님 집에 가니께 농사를 크게 짓고 그 외딴 집이 있대. 거기서 농사를 짓고 혼자 그렇게 있고 말 두 마린가 그렇게 메기고, 농사라야, 뭐랄까, 말 메기는 거 그런 농사지. 뭐 밀, 기밀 것은 농사 지어 갖고 그래 팔아 먹었데. 인제 일본 사람들 거기서, 산판에서, 이 말 메기는데서 사다가 멕여 (먹이려고 갖고) 가데. 그래 갔고 누님집은 괜찮게 살데. 돌린스크 오찌아이)서 한 130리 들어가는덴데 우리도 갔다 왔어. 아주 산중에 농촌인디 거기 한국에서 조선 사람들 모집해다가, 막 일본사람들이 모집해다가 벌목시켜. 나무 비는 거. 거기는 그 시누 있는데서도 많이 떨어졌어. 누님네 집은 가다 중간이고, 그니까 누님은 그 산판에서 가는 중간에 그 외딴집을 사가주고 남편하고 거기서 농사짓고 살고 있었지. 그래 농사를 지은 걸 저게 벌목하는 데 돌려보내서 이제 돈 벌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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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江祭, ‘정선 뗏목 제례’ 확장 필요한강은 양평 팔당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남북한강이 합수, 경기도를 관통하여 바다에 이른다. 북한강은 금강산 단발령에서, 남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금대산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합수한다. 길이는 북한강이 317,5km, 남한강은 375km임으로 공식적으로는 남한강의 길이가 북한강보다 길어 발원지를 한강의 발원지로 꼽고 있다. 한강은 우한 한문화(韓文化)의 형성지이다. 강은 물길이다. 하천과 내도 물길이다. 이 중 큰 물길을 강이라고 한다. 강은 단순히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침식 · 운반 · 퇴적 작용을 하여 강 유역에 여러 지형을 이루게 한다. 또 사람들에게 농업용수와 공업용수, 식수 등을 공급할뿐만 아니라 발전과 교통에도 많은 혜택을 준다. 그러나 때로는 홍수 등으로 많은 피해를 주기도 하므로 우리 생활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강은 역사적으로 인간의 생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세계 4대 문명이 모두 강을 끼고 있는 지역에서 발달한 까닭이다. 이런 연유로 세계 모든 강에는 강제(江祭)가 존재한다. 한강에도 갖가지 강제가 절기와 상황에 따른 의례가 있어왔다. 그 한 실증이 남한강 상류 아우라지와 조양강에서, 북한강 강원도 인제 합강에서 이뤄지는 뗏목 의례이다. 제48회 정선아리랑제 3일차 행사일인 16일 오후 4시, 여량면 문화체육위원회가 주관하여 조양강 제2교 아래에서 뗏목의례가 개최되었다. 서울 뚝섬나루와 마포나루까지의 목재를 운송하는 뗏목의 안전 수송을 기원하는 강제이다. 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목재 운송의 유습과 함께 한 의례이다. 정선아리랑제 다양한 행사 중 주목 받는 행사이다. 풍물단의 땅밟기에 이어 알자가 호선되어 제물을 점검한 하는 것으로부터 진행되었다. 첫 순서인 제문낭독에서 "계묘년, 정선아리랑제의 성공과 조양강을 통과하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 주십사”라고 고한 후, 최승준 정선군수가 초헌관으로 안전을 기원하였다. 정선 떼목 제례는 정선아리랑의 역사와 함께한 민속행위이다. 좀 더 풍성하고 다양한 내용 구성으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는 행사이다. 어떤 행사도 근원이 분명한 영사를 소재로 한 이벤트는 행사 의의를 확인시켜 주는 요소라는 점에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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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 50년"콱 뒈져라. 먹고 싶어 죽겠다. 에라 죽으면 편하지. 너하고는 죽은 인연이야. 너 죽어볼래. 죽어도 못다하는 사랑아.서양 사람들은 위의 모든 죽음의 말들에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구체적인 죽음의 형태를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죽음의 의미를 갖는 행동 관념을 다 운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죽음을 죽음 이상도 이하도 아닌 죽음 그 자체로서 생(生)의 반대되는 현상으로 삶으로부터 이잘화시켜 놓는다. 즉 죽음은 삶의 적이며, 공포이며, 부정이며, 파괴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문지방 하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늘 함께하는 친구이며 언제나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계기이며 매일 죽어가는 것을 인식하는 죽음이며 생노병사(生老病死) 중의 하나로서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이 자연순회의 그것처럼 밥 먹듯이 죽음과도 같이 사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생사(生死)의 관념은 생(生)과 사(死)의 유기적 관계 속에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통ㆍ피ㆍ살은 '통일을 위한 피의 살풀이'의 줄인 말이다. 귀국 후 첫 작품으로 '통ㆍ막ㆍ살'을 했던 것이우리 민족의 간절한 염원인 통일에 대한 한 민족인으로서의 몸부림이었다면, 피의 살풀이는 민족 본능에 충동하여 통일을 막으려는 외세와 공포의 핵 공해에 대처하려는 투쟁의 일환으로 죽어있는 통일에 민주의 '곡(哭)'을 바치는 행위이다." (본문 118~119쪽, '통ㆍ피ㆍ살(TongㆍPiㆍSal) 때 : 1987년 8월 3일, 곳 : 바탕골 소극장' 중에서) 이 책에는 1959년부터 2007년까지 전위예술가 무세중의 평생 예술작업이 담겨있다.무세중은 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이며 이처럼 한 전위예술가의 50년동안의 전위예술행위가 한 권의 책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나오기는 국내에서 처음이다.무세중의 전위예술은 저자의 20대 시절부터 시대에 대한 회의와 대안을 향한 끊임없는 사고의 결과들이다. 따라서 ‘충돌50년’이라는 의미는 저자가 한평생을 바쳐 현실과 역사와 끊임없이 대면하고 저항하고 대안을 찾아 부단히 행위를 해 온 고독하고 힘겨운 예술작업의 과정들을 함축하고 있다.'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50년'은 한국전위예술을 실제적인 공연과 이를 뒷받침하는 저자의 예술적 자세, 공연의 목적과 행위의 이론적 근거들이 일일이 제시되고 있어 전위예술에 대한 실제와 이론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또 공연을 한 연도와 날짜 출연자와 더불어 사진들을 함께 수록해 명실공히 한국 전위예술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노예술가의 평생예술업적을 기록하고 있다.특히 전위예술은 서구적 예술행위로 인식되어 왔으나 무세중은 이 책에서 전위예술의 전위성이야말로 우리민족 특유의 민족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무세중은 이 근거로 우리의 탈춤이나 고대 및 중근대사에서 민중들의 행동방식이나 놀이 등 그리고 민중들이 역사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켜나가는지를 고찰함으로써 한국 전위예술술의 이론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무세중은 독일 체류 기간 동안인 1977년부터 1989년 동안의 전위예술 행위를 통해 한국 전위예술의 실험을 무수히 시도하고 유럽에 한국의 탈춤이 갖는 전위성과 한국전통예술과 서구적 행위예술의 접목을 무수히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저자의 전위예술의 기본 맥은 전통과 현대이다. 즉 한국의 전통적 미학이 어떻게 하면 세계적 미학과 결합하여 보편적 미학의 세계로 다가가느냐가 저자가 탐색하고 있는 전위예술의 본질이다.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민족성이다. 즉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민족이 갖는 특징적 요소들이 무세중 전위예술의 근거들이 되며, 저자는 민족성을 민중들의 삶에서 찾고 있다. 민중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해 낙관적 자세와 역경이 닥칠수록 뭉치는 끈질긴 생명력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한국사의 고대 중근대의 민중들의 삶의 방식과 형태들 그리고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민중의 생활 속 예술행위들에서 찾고 있다.'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50년'은 전위예술이라는 이름만 난무하는 한국의 전위예술에 이론적 근거와 한국적 전위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 역사적인 전위예술서라고 할 수 있다. 무세중 (지은이) 무세중(巫世衆)의 본명은 김세중(金世中)이다. 상식 밖으로 ‘무(巫)’라는 성으로 바꾼 이유는 김(金)씨 문중의 자손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자손(天孫)’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간 역할을 해야 함을 깨닫고, 민족의 근원과 얼이 깃들어 있는 예술의 시원을 찾아 젊은 시절부터 전국 방방곡곡 8천 리를 걸어서 순례하며 연구하고, 깨달음을 작품 속에 진일보하여 승화시키려 했던 전위 예술가이자 굿 예술가이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연극학 석사를 마치고 독일, 일본,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활동해 왔으며 50년간 500여 편의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주로 통일과 아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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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을 읽다"카메라를 든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를 알고 싶다면, ‘그때 그 사진 한 장’을 읽어야 한다. 이 책 속의 사진들은 절묘하게 시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항시 수첩을 들고 다닌다. 언제 어디에서 사건이 발생하여 "기록"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선은 기록하고 발췌는 나중이다. 이 책에서는 기자로서의 세상을 보여준다. 기자는 1968부터 1991년까지 많은 이들, 상황을 기록한다. 만약 세상에 기자가 한 명이라면 모든 사진들이 특별하겠지만 신문사도, 기자도 많다. 그래서 세상은 특별하고 유일한 사진을 찾고 싶어 한다. 그러한 유일 사진을 엮은 책이 ‘그때 그 사진 한 장’이다. 이 책에서는 사진을 새롭게 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려준다. 첫 번째,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히 사진으로 보여줘야 한다. 14 페이지 "거리에서" 의 캡션에서 "어느 시대나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한 사람이 있고, 친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친절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이 사진 속의 서울의 거리나 지금 당장 서울의 거리를 나서도 동일한 장면은 포착할 수 있다. 이는 곧 이 시대상과 빈부격차를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려면 부자인 사람들만 촬영해서도, 가난한 사람들만 촬영해서도 않된다. 이 두 장면이 동시에 보이는 그 각도에서 장면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촬영해야 한다. 아마 이 기자는 이 순간을 위해서 기다렸을 것이다. 두 번째, 순간의 선택을 위해서 노력하고 집중해야 한다. 24페이지 "만원 열차"에서의 등교하는 학생들로 기차가 매달린 모습을 촬영하였다. 사람들로 꽉 찬 대중교통은 현재도 있다. 그 안에서는 시대상을 볼 수 있고, 특이한 행각들이 때로는 일어나기도 한다. 그 상황을 재미있게 촬영해야만 하는데, 그 때 카메라가 없으면 이 장면을 생생히 보더라도 기록을 놓치게 된다. 세번 째, 촬영 대상의 색다른 모습을 포착해야한다. 이 책의 178페이지 "얼굴"에서는 서정주 시인의 지금까지 보지 못한 살아있는 표정을 촬영한 것이다. 이는 우연찮게 시인 앞에 기자가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선택이 다신 없을 사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유명한 사진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의 저서 ‘결정적 순간’ 책 속에는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와 "사진을 찍을 때 한 쪽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 이고, 찰나의 승부를 거는 이유는 사진의 발견이 곧 나의 발견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을 보며 내내 마음에 눈을 뜬 채 피사체를 바라보고 그 찰나에 승부를 걸었구나 싶었다. 또한, 이 책에는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다각화하여 세상을 바라보며 한 사람을 촬영 할 때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담아야 만족할 만한 사진이 나올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 기자는 때론 과감하지만 촬영 대상자에게는 친근하게 다가간 결과다. "하루 한 번 잠깐 멈춰 마음의 눈을 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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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날 퇴계의 생각은?안개 걷힌 봄 산이 비단처럼 밝은데 진기한 새들은 서로 화답하며 온갖 소리로 우네 그윽한 곳 요즘은 찾는 손님이 없다보니 푸른 풀이 뜰 안에 마음껏 났구나 霧捲春山錦繡明 珍禽相和百般鳴 幽居更喜無來客 碧草中庭滿意生 1565년 봄 퇴계 이황은 4년 전 완공된 서당에서 봄을 맞으며 서당 앞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신이 머물며 수양과 교육에 진력할 좋은 땅을 구해 5년 여 공사기간 끝에 마련한 도산서당의 앞 뜰에 봄이 왔음을 시(詩)로 표현해 본 것이다. 퇴계는 봄날의 아침 풍경에 이어 한 낮을 묘사하는 시도 지었다. 뜨락에는 비 갠 뒤에 고운 볕이 더딘데 꽃향기는 물씬물씬 옷자락에 스미누나 어찌하여 네 제자가 모두 제 뜻 말하는데 시 읊고 돌아옴을 성인이 감탄했나 庭宇新晴麗景遲 花香拍拍襲人衣 如何四子俱言志 聖發咨嗟獨詠歸 아침이 한 낮으로 바뀌면서 살짝 비가 온 마당에 햇빛이 서서히 들고 있고, 비에 씻긴 풀과 꽃 향기가 옷자락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앞 두 줄은 그런 뜻인데 뒤의 두 줄은 무슨 뜻일까? 네 명의 제자가 무슨 말을 했는데, 그 중에 유독 시 읊고 돌아온다는 말에 대해 성인(공자)가 감탄을 했다는 것이고,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내용의 시다. 무언가 금방 이해하기 어려운 사연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퇴계가 무심코 이런 귀절을 넣어 시를 지을 분이 아니다. 무슨 뜻일까? 알아보니 귀절의 배경에는 공자가 네 제자와 나는 대화가 있었다. 공자는 어느 날 자로(子路)와 증점(曾點),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네 제자에게 차례로 각자의 포부를 말해보라고 하니 자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전차 천 대의 군비를 갖춘 제후의 나라가 강국 사이에 끼어 군대의 침략으로 인한 전쟁으로 피폐하여 기근이 덮쳐 곤궁에 쳐했다면 제가 그 정치를 맡아 3년 만에 다시 활기를 되찾게 하고, 도의를 존중하는 나라로 키워보고 싶습니다. 염유(冉有)가 대답했다. 사방 6, 7십리 또는 5, 6십리 쯤 되는 지역의 정치를 제가 맡아 3년 만에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 보이고 싶습니다. 공서화(公西華)가 대답했다. 저는 꼭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희망을 말씀드리면 종묘의 조상 제사와 빈객이 모이는 회동(會同)의 제사 때에 단(端)의 예복을 입고 장보(章甫)의 관을 쓰고 의례를 보좌하는 소상(小相)의 역할을 맡고 싶습니다. 증점(曾點)은 그때까지 슬(瑟)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튕기고 있다가 퉁하고 내려놓더니 자세를 고쳐 대답했다. 춘삼월이 되면 봄옷으로 갈아입고 젊은이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을 데리고 나가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광장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올까 합니다. 말하자면 자로는 강병(强兵)의 나라, 염유는 부민(富民)의 나라, 공서화는 예악(禮樂)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했고 증점(曾點)은 기수라는 데서 물놀이하다가 바람 쐬고 놀다가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공자가 다른 제자들 말에는 빙긋이 웃기만 하다가 증점의 말은 그것을 인정하고 허락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퇴계는 갑자기 그의 시에 왜 이 구절을 집어 넣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 주희(주자)는 다른 제자들이 섣불리 정치에 뜻을 두고 있지만 증점은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가치관과 자세에 대해 올바르게 천명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다른 제자들이 남을 부리고자 하는 의욕을 이야기했지만 증점은 자기를 다스리고 싶은 그 마음이 표현한 것이며, 그것을 공자가 높이 인정한 것은 증점이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를 알고 그 속에서 자신이 취할 태도를 정해 자기완성의 길로 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어서 그것이 곧 올바른 군자의 길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퇴계가 봄날의 시에다 이런 뜻을 담은 것은 퇴계가 고향인 안동 도산에 내려와 서당을 열고 생활할 때의 생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퇴계는 친형님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목숨을 잃자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완전히 굳혀 1561년에 서당 건물을 완성했고, 서당 주변에는 집 옆의 샘을 살리고 연못부터 울타리, 화단까지 직접 디자인했고, 집 앞 오솔길의 입구와 낙동강 변의 천연대와 천광운영대까지를 찾아 다듬어놓음으로써 서당 일대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정리해놓았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학문과 수양과 교육을 시작했다. 퇴계는 그렇게 도산서당을 세워 거기에서 증점이 말하고 공자가 인정한 학문의 방법론을 일상생활에서 구현한 것이라 하겠다. 증점의 일화는 세상을 자기가 다스리겠다고 호기를 부리는 것보다는 먼저 자기부터 갖추어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퇴계는 선비들이 ‘도를 밝히고 세상을 구하다(明道救世)’의 삶을 치열하게 사는 것은 반드시 관료의 삶을 사는데 있지 않고, 자기 수양을 해서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다시 인용한다. 그것이 도산서당으로 들어와 서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려한 그의 속마음이었다. 참된 수양과 학문과 교육으로 진정한 인간을 만들어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자는, 이른바 ‘물러섬(身退)의 학문’이 퇴계의 속 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학자들도 모두가 논어를 읽고 주희를 공부했기에 공자가 증점에 대해 평가한 이 부분을 다 공부하고 주희가 말한 이런 경지를 추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삶을 산 인물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은일적 삶을 항상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때론 관료적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기에 세속에서의 성공과 명성의 유혹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그러나 퇴계는 겉으로만 물러가는 척하는 풍토를 아쉬워하며 진정으로 자연으로 돌아와 공자의 속 뜻, 공자가 말한 요순의 세상을 위한 방편을 몸으로 체현하자는 것이며, 그 말을 봄에 대한 시의 두 번째 연(聯)에서 말한 것이다. 겉으로 보면 하루가 지나는 과정을 쓴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공부와 수양의 길을 제시하고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퇴계는 학문과 덕행을 힘쓴 옛 성현들의 삶을 시 속에 녹여 그들의 길을 함께 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퇴계가 도산에 들어온 이유이자 까닭이라고 생각하고 필자의 최근 저서 『퇴계가 도산으로 간 까닭은』에서 밝혀 보았다. 많은 분들이 학문을 하고 있지만 세상은 왜 이리 어지럽고 혼란스러운가? 학문은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이라면, 학문을 하신 분들은 진실해야 하는데 왜 온갖 요설과 사설이 난무하고 세상이 어지러워도 학자들이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가? 학문을 하는 분들이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세상이 밝아질 것이고,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하다는 퇴계의 생각을 이 멋진 봄에 다시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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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도산서원의 품격세계유산으로까지 지정된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은 게 몇 번쯤 될까?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러함에도 첫 번째 봉심(奉尋)만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된다. 1980년 추향(秋享)이었는데, 초헌관(初獻官)으로는 퇴계 선생의 직손(直孫)인 백주(白洲) 이원윤(李源胤) 옹(翁)이, 상례(相禮)는 도산(陶山) 하계(下溪) 출신인 이윤항(李潤恒) 옹(翁)이었다. 진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초성까지 참 좋았던 어른이었다. 안동대학교 한문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필자는 어떤 계기에서였는지는 모르나, 그 경건한 도산서원 향사에 ‘학생’ 신분으로 참사(參祀)하게 되었다. 같이 간 이로는, 고등학교 5년 선배인 권혁윤(전 안동과학대 교수), 한 해 선배인 박명철(전 고등학교 국어교사), 한 해 후배로 현재 안동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임 중인 이성규 박사였다. 그때가 벌써 43년 전 일이다. 2023년 3월 12일 일요일, 도산서원에도 매화가 피었겠지? 싶어서 귀경을 잠시 미룬 채 서원으로 차를 몰았다. 혼자 ‘도산탐매(陶山探梅)’에 나선 셈이다. 예상대로 매화는 막 피기 시작했다. 도산서당(陶山書堂) 옆에 조성된 매화원은 물론 역락서재(亦樂書齋) 앞의 노거수(老巨樹)에도 어김없이 꽃은 피었다. ‘산다는 것은 꽃 소식을 듣는 일’이라더니, 와서 보니 ‘참 잘 왔다’였다. 퇴계 선생께서 남긴 "문 닫은 채 솔바람 듣고(松風關院聽), 눈 속 매화를 화로 낀 채 바라보네(梅雪擁爐看)”라는 선생의 싯구가 떠올랐다. 아직은 쌀쌀한 봄날, 아랫목이 그리울 때인지라, 도산서당 완락재(玩樂齋)의 아담한 방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선생께서 계셨다면 문을 열고 이렇게 막 핀 매화를 바라보고 계시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매설(梅雪)’은 눈을 맞은 채 핀 설중매(雪中梅)일 텐데, 그것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옹로(擁爐)’ 즉 화로를 낀 채 본다는 표현은 신의 도움까지 받은 게 아닐까 싶었다. 숙종 때 이조판서에다 15년간 대제학까지 지냈던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 1657-1723)가 퇴계시 가운데 더욱 맛을 느꼈다는 시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쾌한 기분을 품고 선생의 유품을 전시한 옥진각(玉振閣)으로 걸음을 옮겼다. 늘 보아도 감명 깊었던 지극히 소박한 서기(書丌, 冊床)와 아울러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매화연(梅花硯)과 매화등(梅花燈)이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있었다. 이들 기물(器物)을 보는 것만으로도 선생을 뵙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유가 있어 시선을 다른 자료들로 옮겼다. 복제품들로 전시장의 대부분이 채워져 있었다. 사연이야 있겠지만,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진품(眞品)들에 눈길이 더 갔다. 영문으로 번역까지 된 안내문을 가만히 읽게 되었다. 퇴계 선생께서 편집해 조선 선비들의 필독서가 되었던 ‘회암서절요(晦菴書節要)’가 펼쳐져 있었다. 그 책 첫째 장 하단(下段)에 ‘도산서원(陶山書院) 상(上)’이라는 묵서(墨書)가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도산서원 광명실(光明室)에 소장된 책 가운데 한권 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를 소개한 안내문에는 "1561년 문인 황준양(黃俊良)에 의해 간행된 목활자본 15권 8책이다.”라고 되어있었다. 문제는 ‘황준양’이라는 표기다. 혹시 싶어 황금계(黃錦溪) 종손에게 확인해보니 그렇게 쓴 예는 없다고 했다. 오식(誤植)이다. 이어진 "선생의 수택본으로 곳곳에 비점(批點)과 주기(註記)가 있다”는 부분은 일견 완전해 보이지만, 첫째 장 상단에 주묵(朱墨)으로 주서(註書)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주기(註記)’는 ‘주기(朱記)’가 바른 표기일 듯하다. 문제가 있다 싶어 다른 안내문까지 이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퇴계서초(李退溪書抄)’다. "선생의 8대손 초초암공(草草唵公:泰淳)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김이교(金履蕎)에게 빌려 복사한 것이다. 10권 10책이다.”라는 것이었다. ‘초초암공’은 대사간을 지낸 ‘초초암공(草草庵公)’이 정답이고, ‘김이교(金履蕎)’는 우의정을 지낸 죽리(竹里) ‘김이교(金履喬)’이며 ‘복사’는 ‘필사(筆寫)’가 바른 표현이다. 그 옆에 있는 등경(燈檠) 설명문에는 "등잔을 엊어 놓던 등잔거리로서”라는 것에 ‘엊어’라고 오식(誤植)한 것을 진작 인지해서인지 ‘ㄴ’을 ‘수기(手記)’해 궁색하게 잘못을 수정해 두었다. 그러나 이 역시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도산서원의 품격에는 모두 어울리지 않는 잘못된 방식이다. 고식지계(姑息之計)다. 우리의 유산은 ‘세계유산 등재’를 자랑하는 것을 넘어서 이를 기리고 배워 후대에 이어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오식을 오래도록 간과, 방치하고 있는 현실은 분명 문화재 당국이나 도산서원 관계자는 물론 필자를 포함한 관람객 모두에게도 등한(等閑)히 여겨 지나친 잘못이 없지 않다고 본다. 조속한 시일 내에 그 정오(正誤)를 살피고 가려서 바로잡아야 한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다. *고식지계 (姑息之計):임시방편으로 당장 편한 것을 택하는 꾀나 방법.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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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함흥도시 연구인가도시공간이 흥미로워 관련된 도서를 읽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 2012년 경기남부지역 통일교육센터 상근직 강사로 2년간 활동했다. 통일교육강의를 하면서 살아온 고향에 대해 무지함을 느꼈다. 경험으로 강의를 이어가기에는 지식이 한참 부족했다. 무지함을 벗어나고자 북한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관련 수업을 듣으며 내가 살았던 공간이 궁금해졌다.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구는 시골답지 않는 도시다. 석탄이 식량만큼이나 중요해 탄맥 있는곳에 인력을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1980년대까지 고층건물이 희소하고, 하모니카로 부르는 급조된 단층집이 많았다. 생산에 집중했기에 서비스업이 부족하고 문화생활이 자유롭지 않다. 새로 나온 영화는 명절시즌에 맞추어 방영되는데, 그걸 보려고 사람들이 빼곡하게 늘어섰다. 뒷거래로 뭉치표를 구매해 야매로 파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유행되었던 음악, 무용, 영화가 흑백화면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도시연구는 평양 위주로 많았고 지역도시 함흥관련 선행연구가 적었다. 중요하게 식민도시에서 사회주의도시이행 관련 연구가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석박사 논문을 함흥으로 준비했다. 함흥을 읽다보니 내가 살았던 고원군 수동구보다 훨씬 이야기가 많았다. 함흥은 외사촌형제들이 살고 있고 친언니가 함흥 주변으로 시집가는 바람에 닳도록 드나들었던 지역이다. 함흥에 있는 ‘도지방총국기능공학교’에서 직업교육도 받았다. 함흥역전과 동흥산구역, 회상구역으로부터 장진, 부전으로 가는 신흥선 기차를 타고 다녔다. 함흥냉면에 원조 ‘신흥관’에서 농마국수도 먹었다. 1984년에 지어진 함흥대극장 앞으로 수 없이 지나다녔다. 함흥에 얽힌 이야기를 담으니 살아온 생애처럼 사람들이 도시를 만들어온 흔적이 보였다. 아득한 옛날부터 길이 생기고 사람이 모여 도시를 만들어왔다. 사람이 도시를 만들고 도시가 사람을 만들듯 도시생애를 통해 사람과 사회가 변화해온 과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떠한 이유로 도로가 생기고, 건물을 올리고,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흔적을 남겨놓았다. 도시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그래서 도시를 변압기에 비유한다. 도시는 새롭게 태어나 성장하기도 하지만 쇠퇴하고 몰락하면서 사라지기도 한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회가 연결되어 도시 성격을 만든다. 사람이 모여 있는 만큼 정치적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것이 공간을 지배하고 도시문화를 만든다. 도시와 도시는 비교 가능하다. 개발된 지역과 덜 개발된 지역을 살펴보면 사람과 사회를 알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간에 도시가 있다. 공간은 영원한데 사람과 사회는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왔다. 색바랜 기억과 지식으로 도시에 얽힌 이야기를 꺼낸다. 자연, 사람, 사회 요소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다. 북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북한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고,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도시기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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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12월은 춥다(2)매서운 추위가 계속된다. 버스를 기다리는 잠깐 사이 볼이 빨갛게 얼어 든다. 아무리 추워도 영하 30도씩 오르내리는 겨울을 살았기에 지금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고 살았던 사람이 눈 속을 뒹굴러도 끄떡없을 패딩을 입고 춥다고 야단이다. 춥지도 않을 추위가 춥다고 생각되니 따뜻한 남쪽에 적응이 되었나 싶은데 다시 보면 추위보다 마음이 추울 때가 있다. 시린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면 북한이탈주민 모두는 시인이다. 돈을 벌어서 가족에게 보내고 현재 삶에도 충실하려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남쪽 사람들처럼 좀처럼 여유를 즐기지 못한다. 시는 마음에 여유가 있어 생기는 것도 아니요. 아프니 그냥 써 본 것이 어느 날 시가 되어 시린 마음을 다독인다. 시를 쓰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고 누군가 읽어주고 공감한다면 기쁨은 배가 되고 살아갈 이유가 된다. 북한이탈주민 이지혜 씨는 시를 써본 적 없다. 그는 십 년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또 다시 맞이하는 새해가 두렵다. 떠난 것이 불효가 되어 못 견디게 그리운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보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 편지를 쓴다. 다섯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바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얼음산이 막혀 있는 것도 아닌데, 가로 지른 분단선 하나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혹하고 야속하다. 그리움을 담으면 꿈속에 엄마가 꼭 안아준다. 엄마품이 따뜻하고 포근해서 온기로 추위를 견딘다. 행복을 멀리한 적 없고 이별을 가까이한 적 없으나 돌아갈 수 없는 고통이 평범한 사람을 시인으로 만든다. 그렇게 그리움을 한 자 한 자 새겨 시를 짓는다. 북한이탈주민은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워 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고 잊기에는 인연이 남아 있다. 헤어진 시간이 길어질수록 잊혀질까 두려워 시를 쓰는 사람이 있고, 혼란한 사이를 탈출해 완전한 남쪽 사람으로 변신한 사람도 있다. 아직 사이를 벗어나지 못해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 시를 짓는다. 시린 마음에 온기를 유지하려 문장을 만든다. 차가운 시선이 머무를 때 시와 문장을 만들며 마음을 덥힌다. 고향에 12월은 춥다. 동지섣달 한 허리를 베어 먹을 만큼 춥다. 무너지게 내리는 눈사태에 연탄불에 모여들어 배가 볼록한 도루메기를 구워먹었다. 오그랑 팥죽을 먹으며 긴나긴 겨울을 보냈던 시기도 있다. 따뜻한 기억은 가족과 함께 있었을 때이고, 차가운 기억은 상실했을 때 마음이다. 자식을 두고 온 어미와 어미를 잃은 자식이 괜찮다고 아프지 않다고 느낀다면 가을과 겨울 사이를 벗어난 사람이다. 시를 써본 적 없는 사람이 시인이 되어 아픔을 노래할 수 있다면 다가오는 새해가 두렵지 않겠다. 고향이 추우면 따라서 마음도 시리다. 남북관계가 얼음이 되면 따라서 마음도 얼어 든다. 북쪽도 따뜻한 남쪽처럼 등 따시고 배부른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주저 없이 추위에 당당하겠다. 주저 없이 가을과 겨울 사이를 벗어나 새해를 맞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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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고향 12월은 춥다(1)갑자기 추워졌다. 날씨도 추워지는데 고향에서는 김장이나 식량이나, 땔감은 마련하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 단단히 준비를 해야 추운 겨울을 이길 수 있다. 북쪽 고향에 추위는 매섭다. 김장독이 꽝꽝 얼고 밖에 나가면 코끝이 베어진다. 추워지고 있는데 남북의 정치상황은 그 보다 더 춥다. 일상인듯 날아오르는 미사일과 현실성이 의심되는 통일정책을 듣는 것도 이제는 지친다. 북쪽 고향 12월은 남쪽만큼이나 바쁘다. 12월에 어떻게 해서라도 계획을 끝내려고 몰아치기 전투를 하고, 가정에서는 식량이나 땔감도 마련해야 한다. 집안이나 집밖이나 마지막 12월을 넘기려 힘을 써야 할 때다. 날아오르는 미사일을 지켜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러니 눈이 오기 전에 산에 내린 도토리나 밭에 널려있는 시래기를 한톨도 남기지 말고 집으로 가져와야만 기나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12월에는 각종 행사가 많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몰라도 수령 생모 김정숙을 기념하는 행사에 목청껏 노래를 불러야 한다. 12월 24일 행사 준비를 하려고 근무시간이 끝났어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노래연습을 했다. 진달래를 연상시키느라 흰 종이에 분홍물감을 들였다. 노래를 뽑는데 에너지를 쓰고는 1972년 12월 27일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한 날이 공휴일이라 쉬는가 싶다. 그런데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추모 행사가 계속 이어지게 생겼으니 고향에 12월은 분주하고 춥다. 춥기도 한데 북쪽은 더욱 살기가 많이 어려워진듯하다. 가족과 연계되어 송금하는 사람들 이야기로 코로나19로 국경이 막혀서 장사도 할 수 없게 되자 더욱 어렵다도 한다. 지금까지는 너만 잘 살면 된다고 격려하던 가족들이 어렵다고 하면 정말로 어려운 것이라 말한다. 자식 이 있고, 부모가 있는 사람들은 적게 쓰고 적게 먹으며 돈을 모아 보내주지 않을 수 없다. 돈이 마련되지 않아 보내주지 않으면 그런대로 마음이 아파 가슴앓이를 한다.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은 늘 마음을 졸인다. 미사일이 날아오르고 남북관계가 얼음이 되면 죄인이나 된듯 숨죽인다. 북쪽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남쪽 사람인듯 정말로 남한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자식이 있고, 가족이 있는데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마음이 찢긴다. 그래서 아픔을 멈추려고 어떻게 해서라도 가족을 데려오는데 올인한다. 얼마 전에는 공안에 잡혀있는 아들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는 엄마를 보았다. 12월은 춥다. 고향이 추워지면 따라서 여기서는 더 추워진다. 하늘만 아는 미사일은 아니본듯 냉각된 남북관계에 떨지 말고 산이나 밭에 있는 땔 것이나 먹을 것은 모두 걷어 곳간에 넣을 일이다. 어야든 살아남아야지. 그래서 올해 마지막 12월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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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주의 춤 그리고 춤론에 담긴 생명철학Ⅰ. 들어가며 우리 춤의 뿌리를 붙들고 무궁 창성에 앞장섰던 전통춤 계승자, 추악하고 해로운 액운을 제치고 새로운 세상 문을 열어 이로운 기운을 불러들였던 시국춤 창안자, 그가 시대의 춤꾼 이애주1)이다. 옛 전통과 시대적 창안을 오가며 무한히도 개전되었던 그의 춤 세계는 세기에 부응하여 신명의 날개를 활짝 펴고 민족의 춤으로 거듭났다. 가락에 흥과 멋을 얹어 신명에 거듭난 춤으로 불태웠고, 그 자태는 궁극에 달하여 예술로 승화되었다. 그 춤새가 혼돈에 처한 시국에 올라앉으니 그 또한 민주화를 울부짖는 바람맞이춤으로 승화되었다. 전통춤 계승자로 그리고 민중의 희로애락을 풀어낸 시대의 바람맞이 춤꾼으로 우뚝 선 그가 우리 시대를 풍미한 이애주이다. 본 글은 학술적 이론을 내 세우거나 특정 논지를 쟁점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2022년 5월 세 번에 걸쳐 개최된 춤꾼 이애주 추모행사2)에 참여하며, 상기한 그의 전통춤 계승 가치, 그가 시대적으로 창안한 창작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춤의 생명철학을 사회적 시각과 사상적 관점에서 살핀 것이다. 이러한 작업 이면에는 오늘날 한계에 도달한 한국춤의 기능적, 형태적, 예술미학적 접근을 뛰어넘어 사회와 정치 그리고 이념과의 관계 속에서 작용되고 응용되는 우리 춤의 본질 및 존재 가치를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 예술 현상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움직임의 목표가 삶의 생명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첫째 이애주 전통춤의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을 예증 삼아 그의 춤 생애 그리고 그의 전통춤 세계관을 살펴 볼 것이다. 이애주 1주기 추모행사는 2022년 5월 10일 (화) 오전 11시 그가 묻힌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서 <시대의 춤꾼: 이애주 선생 1주기 추모 나눔굿>으로 개막되었다. 다음 날 5월 11일 (수) 오후 8시에는 그가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던 경기아트센터의 소극장에서 '우리 춤의 혼과 맥 그리고 기억'의 이름으로 추모공연이 있었고, 5월 27일 (목) 오후 2시부터 과천 이애주문화재단에서 '이애주 저, 한성준 바탕 한영숙 류 이애주 맥: 승무의 미학'(2022), '고구려 춤 연구'(2022), '춤꾼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2022)의 출판기념회 및 '이애주 춤: 학예굿'이 개최되었다. 추모행사에는 이애주와 함께 민족춤 문화 회복을 위해 사지 동거했던 동지 및 춤계 선후배, 동료 그리고 제자가 함께하였다. 춤 '땅끝', '나눔굿 밥', '도라지꽃' 등 세 개 작품에서 드러난 기획 의도, 춤판 현장, 이면에 담긴 이애주 춤의 생명관에 대해 논할 것이다. 세 개의 작품에는 겉 치장을 요하는 미학적 춤이 아닌 내면의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이른바 영혼이 살아 숨쉬는 춤, 공동체 정신을 살리는 춤, 민중의 아픔을 품어 내는 치유의 춤 사상과 사회적 시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통춤과 창작춤을 넘나들며 표명하고자 했던 이애주 춤의 본성과 의미를 탐색하고 그 속에 담긴 생명철학을 파악하고자 한다. Ⅱ. 시작하며 1. 이애주의 전통춤 및 계승 여기서는 전통춤 계승자 이애주가 전수한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 그리고 이애주 춤 맥을 잇고 있는 현재의 계승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애주가 전승한 여러 전통춤 중,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만을 다루는 까닭은 첫째, 한성준-한영숙-이애주가 전승한 여러 전통춤 들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이면서 기본적인 춤이라는 점, 둘째, 경기제 대풍류 및 경기 무속음악을 춤 장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셋째, 살풀이춤을 통해 보건대, 단아하고 우아한 독창적 춤 새로 추어진다는 점(이은주, 1998), 넷째, 전승 계보가 명확하다는 점 등의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중, 「태평춤」은 이애주 자신이 늘 주장한 바와 같이 태평무의 원 춤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공연에서도 원 춤에는 원 장단을 써야 한다며 경기도당굿 악사를 대동하여 「태평춤」 공연에 임하곤 하기 때문이다. 이애주 전통춤은 춤계에 익히 알려진 충남 홍성출신 한성준(남, 1874-1941) 그리고 그의 손녀 한영숙(여, 1920-1990)으로 이어져 온 족보 있는 전승계보를 갖고 있다. 한성준은 일찍이 전통연희 무대화와 예술화에 주목하여 이를 성취적으로 이룩해 낸 한국 근대 연희사의 거목이다. 그의 민족춤 예술화에는 신앙, 놀이, 의례로써 사유된 민중사상과 시대적 철학이 담겨 있어서 민족주의적 사고와 미래를 향한 예술 창달의 미래관을 일깨웠다. 그동안 버림받고 묻혀 있던 옛 춤을 세상에 펼쳐 보이며 춤 예술 발전을 도모하였기에 그를 한편에서는 춤 문화운동가라고도 한다. 한성준의 춤 무대화 업적 뒷면에는 그의 천부적인 음악적 재질을 바탕삼아 이루어진 우리 것 지키기에 대한 투철한 의지가 서려 있다. 한편, 한성준의 「승무」 및 여타 춤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경기도 용인 출신의 명인 김인호(남, 1858-1932)와 연결된다(이병옥, 2022, pp. 1-21). 그 까닭은 명고수 한성준이 광무대(光武臺, 1898에서 1930년까지 서울에 존속했던 전통연희전문극장)에서 김인호 춤을 전문적으로 반주했고, 김인호가 권번에 나가 춤을 가르칠 때도 동참하여 장단을 잡아 주었다(이병옥, 2018). 명인으로 이름 석 자를 떨친 김인호는 전남 담양 출신 이날치(남, 1820-1892)의 제자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성준은 김인호에게서 많은 춤을 익혔고, 1930년대에 이르러 김인호가 사망한 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여 김인호가 남긴 춤을 정립하고 가르치게 된 것이다(이병옥, 2022, 15). 이와는 또 달리, 한성준의 「승무」 등 전통춤은 또한 전북 정읍 세습무 출신의 전계문으로부터 전수되기도 하였다. 전북지역 단골로서 큰 명성을 얻었던 전계문(남, 1865-?)은 명고수였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 가야금, 해금, 해적, 대금 등의 기악과 성악 그리고 춤에도 밝았던 인물이었다(김익두, 2022, 48; 김익두, 전종구, 최동현, 최상화, 1992, 245-247). 이처럼 한성준 춤은 윗대로 올라가면 그 전승 계보가 김인호 그리고 전계문과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이러한 명인들이 모두 남자였다는 것이고, 또한 음악에 능통한 고수였다는 것이며 그 출신 지역을 호남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정통한 계보를 잇는 이애주는 1947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할 당시, 운니동에는 국립국악원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 이애주는 일찍이 국악원 활동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애주는 어머니 손을 잡고 국악원 악사로 활동하다 춤을 가르치고 있던 김보남(남, 1912-1964) 문하에 입문하게 되었다. 한국동란 때 황해도 사리원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부모는 일찍이 이애주의 춤 길을 열었고, 특히 어머니의 뒷바라지는 헌신적이었다. 어린 이애주가 김보남으로부터 배운 춤은 기본춤을 비롯한 「승무」, 검무, 소고춤, 무고, 민요 가락으로 추어졌던 아리랑, 밀양아리랑, 노들강변, 양산도, 천안삼거리 및 궁중정재 춘앵전 등이었다. 성장한 이애주는 1965년 서울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무용 전공으로 입학하였고, 국립무용단 객원으로 공연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학 4학년이던 1968년 문화공보부가 주최한 무용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주의를 놀라게 하였다. 필자: 양종승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전공하고 문화인류학을 부전공하여 Folklore and Cultural Politics in Korea: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and Living National Treasures (민속과 문화정책: 한국의 무형문화재와 인간문화재) 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민속기록학회 회장,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한국전통춤협회 부이사장으로 있으며, 연구 관심사는 샤머니즘, 무형유산, 전통춤 등이며, 주요 연구로 "한국의 굿" (공저), "서울 이태원 부군당굿", "God Pictures in Korean Contexts (한국 샤머니즘 神圖) (공저), '우리춤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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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악회 학술회의, “애국가 定位시킨다”국민악회 주최의 애국가 관련 학술모임이 결성되어 오는 9월 3일 ‘대한민국 애국가를 말한다’라는 대 주제로 발표회를 개최한다. 국민악회는 1980년 창설, 원로 작곡가 중심의 음악가 단체이다. 주최는 국민악회(회장 문성모)이지만 안익태기념사업회 국가상진연구회 한국음악평론가협회가 함께한다. 이들 단체는 지난 10여년간 애국가가 심한 내외상(內外傷)을 입었다고 진단하고, 이를 정위(定位)시켜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여 행사 주제를 ‘대한민국 애국가를 말 한다’라고 정했다고 밝혔다. 이번 발표회에서는 작곡가와 작품 그리고 작사자와 가사 문제에 대한 파괴적 공격에 대한 반론을 네 전문가가 분담했다. 첫 발표자인 김승열(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숭실사이버대학교 외래교수) 교수는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의혹에 대한 해명과 변호’를, 전인평(한국음악평론가협회 이사장, 중앙대 명예교수)교수는 ‘안익태의 한국 활동과 한국음악계와의 갈등 양상’을 발표한다. 세 번째는 ‘애국가의 변천 과정과 작사자 문제’를 문성모(前 서울장신대 총장, 국민악회 회장)회장이 맡고, 마지막은 김연갑(국가싱징연구회 분과위원장) 위원장이 ‘애국가, 그것은 민중의 선택이었다’를 발표한다. 김승열교수는 2000년대 들어 안익태를 친일/친나치 인사로 매도하는 주장들에는 좌파진영인 노무현, 문재인 정부 시절에 집중되었다고 전제했다. 이의 원인 제공자로 故 노동은 교수(1946-2016)를 꼽았다. 노 교수가 안익태가 연주하지도 않은 1938년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나 1944년 R. 슈트라우스의 ‘일본축전곡’을 연주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을 지적했다. 이런 오류를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이해영교수의 2019년 발간 ‘안익태 케이스’가 그대로 승계했다고 비판한다. 이어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학술원 김보국 연구교수가 안익태의 헝가리 유학 시절을 추적한 논문과 방송의 인터뷰를 지적했다. 안익태가 1939/40학년도 등록서류에 안익태와 부모의 종교를 일본 ‘신도(Shintoi)’로 기재한 것이 명백한 타인 필적임에도 무비판적으로 채택하는 등 오류를 범했다고 밝혔다. 이런 실태는 "3국 동맹 체결 이후 엄중해진 전시(戰時)체제 하의 일제 강압을 보여주는 물증”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두 번째 발표는 전인평(한국음악평론가협회 이사장, 중앙대 명예교수) 교수는 ‘안익태의 한국 활동과 한국음악계와의 갈등 양상’이란 논문을 발표한다. 전교수는 1962년 제1회 국제음악제 주관을 위해 귀국한 안익태가 전국을 순회하던 때 대전사범학교 밴드부원으로 <애국가>를 연주한 경험을 들어 그의 강한 음악가적 열정을 회고했다. 그리고 1962년의 시작 된 국제음악제 준비과정에서 안익태가 국내 음악인가들 면전에서 "이 중에서 스코아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라고 무시하는 등의 발언을 소개하며 국내 음악계 인사들, 특히 임원식(지휘자)과의 갈등상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안익태가 국내에 정착하여 활동하였더라면, "한국음악계가 최소한 30년 이상 앞서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표했다. 세 번째 발표 논문은 문성모(前서울장신대 총장, 국민악회 회장) 회장이 ‘애국가의 변천 과정과 작사자 문제’이다. 작사자가 아직도 확정되지 못한 채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음을 전제로 현행 애국가의 가사 변천 과정과 작사자 문제를 논했다. 현 애국가의 ‘무궁화가’와의 관련을 전제로 "찬미가" 14장(1908년), ‘국민가’(1910년), ‘국가’(1014년), ‘애국가’(1931년), 윤치호 자필 4절 가사’(1945년), ‘한국애국가’(1945년)‘에 이르기까지의 가사 변천 과정을 살폈다. 작사자에 대해서는 기존설을 정리하고, "문헌적인 증거로 보아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하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 발표는 김연갑 위원장이 ‘애국가, 그것은 민중의 선택이었다’라는 논문이다.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에는 "이미 확정해야 했다”는 전제로 더 이상 논란의 의미는 없다고 단언한다. 이어 애국가가 걸어온 역정(歷程)을 제시하고 ‘국가’ 아닌 ‘애국가’라는 명칭과 기능은 작사 작곡자나 국가(國家)가 정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민중(우리)이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따라 누구도 현 애국가의 국가 기능 폐지나 새로운 국가 제정 주장은 ‘애국가 공동체’의 총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이는 근대 혁명 국가의 경우와 다르게 제도를 초월한 민중의 공인 가치가 큰, 특이한 경우라고도 주장한다. 결론에서는 제헌국회의 ‘애국가 지속 사용 합의’를 존중하여 "통일이 될 때 까지”는 애국가는 국가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애국가의 곡명과 위상은 작사 작곡자의 의지가 아닌, 우리(민중)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애국가 자체가 친일을 한 적이 없음으로 비제도적이고 한시적인 국가 기능의 애국가 위상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선택이 지혜로운 집단지성이란 사실을 통일을 앞당겨 입증해야 할 뿐이다.”라는 주장으로 글을 맺었다. 이번 발표회가 다시 ‘애국가 논쟁’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이번 발표회를 주도한 문성모 회장은 "이번 발표회를 계기로 다양한 단체나 개인이 참가하는 열림 모임으로 확대, 발전시킬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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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 죽음을 넘어 빛이 된 비운의 사진가.소멸함으로써 빛을 발하던 한 여인의 자가 촬영 사진. 그녀는 한평생 가치 있는 사진을 찍어왔지만 사망 직후에서야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 이 비극적이지만 명예와 영광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기술한 책, ‘역광의 여인, 비비안 마이어’를 소개하려 한다. 이야기는 2008년 12월, 시카고 로저스 파크에서 한 노파가 빙판에 쓰러진 채 발견된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이름은 비비안 마이어(Vivian Maier). 수십 년 동안 수만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진을 보지 못한 비운의 사진가이다. 그녀는 생사를 헤매다 2009년 4월 26일 사망한다. 장례는 그녀가 옛적에 17년간 보모로서 보살펴왔던 존, 매튜 그리고 레인 겐스버그 삼형제에 의해 치러졌다. 그들은 비비안의 초상을 요약해서 <시카고 트리뷴>에 게재했다. 그것이 그녀의 사진이 빛을 보게 된 계기가 됐다. '시카고 트리뷴'에 존재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젊은 부동산 중개인 존 말루프가 찾던 것이었다. 그는 2007년에 열린 경매에서 비비안의 네거티브 필름이 담긴 상자를 샀다. 2년 후, 그의 감각적인 안목으로 자신이 구매한 것이 비범하다는 것을 확신했고, 구글 검색을 통해 얼마 전 올라온 그녀의 장례 보고서를 발견했다. 그 후로 삼형제를 만나 그들이 알고 있는 비비안 마이어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삼형제는 기억했다. 그녀는 카메라를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숨 쉬듯이 사진을 찍었다. 마치 자신의 생명이 그것에 달린 것처럼.” -25p 존 말루프는 자신이 보물을 발견했다는 것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사들인 다른 구매자들을 찾아내 대부분의 사진을 사들였다. 하지만 뉴욕의 대형 미술관들은 그와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그는 이베이에 네거티브 필름을 팔아 번 돈으로 시카고 문화센터에서 비비안 마이어의 전시회를 열었다. 대중은 열광했고, 곧 이 파급력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존 말루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Finding Vivian Maier>를 제작했다. 이후 세간의 반응은 확실하게 좋았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에는 지저분한 거리, 얼룩이 있고 찢긴 더러운 옷들이 등장한다. 구멍 난 신발과 도랑에서 노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지친 여자들과 세속적인 남자들이 등장한다. 두아노풍의 부드러운 노스텔지어는 전혀 없고, 학교 의자에 앉은 꿈꾸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앞에서, 정면에서 포착한, 전혀 미화되지 않은 현실이 그 속에 담겨 있다.” -36p 위의 글처럼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에는 사람들과, 그들의 미화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포착돼 있다. 사람 또는 삶의 형태에 초점을 맞춘 그녀의 사진과는 달리 인생은 외롭고 고달팠다. 그 어두운 인생의 내막은 이 책의 저자인 가엘 조스와 존 말루프에 의해 세상에 나온다. 비비안 마이어는 1926년 2월 1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불화로 인해 남편과 헤어졌고 불량아인 오빠가 빈번히 사고를 일으키는 가운데 혼자 방치되었지만, 친할머니 마리아 하우저 마이어와 외할머니 외제니에게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가난한 어머니와 비비안의 소식을 들은 뛰어난 사진가 잔 베르트랑이 모녀를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해주었다. 저자 가엘 조스는 비비안의 사진가적 재능의 토대가 이 시기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후 1932년에 어머니의 고향 프랑스로 가서 6년을 보낸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어머니를 따라 돌아온 뉴욕에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할 상황이 되자 보모 일을 직업으로 택한다. 일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할머니와 외할머니, 이모할머니의 유산으로 구매한 사진기 롤라이플렉스로 여러 사람들을 찍어왔다. 후에 시카고에서 50여년을 가난한 보모로 살면서도 사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작업은 사람들의 얼굴에, 초상 사진에 집중되었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아메리칸 드림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피곤한 노동자들, 장애인들, 삶에 지친 여자들, 씻지 못해 지저분한 아이들, 노숙자들의 얼굴에. 가끔은 보석으로 치장하고 모피를 두른 채 험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상류층 여성이나 더블 버튼 정장 차림에 시가를 문 채 짜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사업가 남성의 모습을 냉소적인 눈으로 포착하기도 했다.” -111p 비비안이 어떻게 사진가적 재능을 발견했는지는 미스터리이다. 카메라 조작법을 알고 있던 어머니에게서 또는 어린 비비안을 돌봐준 잔 베르트랑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모두 추측일 뿐이다. 게다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어쩌면 인간관계에 회의감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가 찍은 사진들에 대부분 사람이 찍혀 있다는 사실이 의문이지 않은가. 비비안은 그녀가 돌보는 아이들, 거리의 사람들을 사진에 담아내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가난한 그녀가 자신을 돌볼 여유도 없는 상황에서 왜 사진에 집착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또한 가치 있는 필름들을 한가득 가지고 있었으면서 전문가들에게 보내지 않았는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인간관계에 상처가 있는 그녀가 왜 사람의 사진을 찍었을까? 그녀의 삶에는 수많은 상처와 이별, 외로움이 함께했는데 어떻게 사진에서 공감과 연민의 시선이 느껴질까? 수많은 사람의 사진을 찍으며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평생 카메라에 담아왔던 사진들이 빛나고, 자신은 그 뒤에서 역광을 맞길 바라지 않았을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비비안 마이어의 일생, 그리고 그 이후. 저자인 가엘 조스가 집요하게 찾아낸 단서들이 ‘역광의 여인, 비비안 마이어’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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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에 스미는 평화음악제;…PLZ페스티벌 24일 고성 제진역서 개막비무장지대(DMZ)에서 열리는 음악 축제 ‘PLZ(Peace&Life Zone) 페스티벌’이 오는 24일 개막한다. PLZ 페스티벌은 ‘평화와 생명의 땅, DMZ’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고성·인제·양구·화천·철원 등 강원도의 접경 5개 군이 함께 주최하는 야외 음악 축제다. 페스티벌 조직위는 또 8월 3~5일 청소년을 대상으로 온라인 'PLZ 국제평화음악캠프'를 연다. 온라인 캠프는 전쟁의 상흔이 철조망을 가운데 두고 남아 있는 분단지역에서 문화예술이 갖는 기능과 의미를 짚어보기 위해 평화예술특강과 온라인 연주회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음악 꿈나무들의 기량 향상을 돕기 위한 온라인 마스터클래스도 펼쳐진다. 이어 DMZ평화의 길 테마노선 고성, 인제, 양구, 화천, 철원 지역을 9월3일부터 10월 29일까지 20여개 콘서트를 펼칠 계획이다. 오프닝 콘서트는 대한민국 최북단에 위치한 고성군 제진역에서 정전협정 69주년을 앞두고 열린다. 동해선철도 남북출입사무소이기도 한 제진역은 북한으로만 철로가 향해 있어 시험 운행 이후 운행이 끊어진 상태다. 이날 공연엔 서울 비르투오지 챔버 오케스트라가 국내 대표 관악주자로 꼽히는 김한 클라리네티스트, 임미정 피아니스트(PLZ 페스티벌 예술감독)와 함께 한다. 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제진역의 오프닝 콘서트엔 우크라이나 주한 대사를 포함한 12개국 외교관들도 참석해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한 데 모을 예정이다. 이밖에도 10월 29일까지 이어지는 축제엔 클래식 음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정상급 아티스트들이 출연한다. 2022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첼로 1위를 수상한 최하영 첼리스트, 2위에 오른 이바이첸, 발달장애인 연주자들로 구성된 하트하트 오케스트라 등이 무대에 오른다. 행사는 온라인상에서도 펼쳐진다. 8월 3∼5일 온라인으로 열리는 ‘PLZ 국제평화음악캠프’에선 음악에 재능 있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특강과 연주회, 마스터클래스 등이 진행된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는 오케스트라 데 나시옹의 앙투안 마르기에 음악감독의 특강도 예정돼 있다. 임미정 PLZ페스티벌 예술감독은 "3년 만에 코로나로 인한 관람 제한이 완화됨에 따라 더 많은 지역 주민들이 현장에서 평화의 선율을 접할 수 있게 됐다”라면서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평화가 더욱 절실한 상황이다. 세계 유일한 분단의 현장이면서, 한반도 평화를 넘어 세계 평화를 상징하는 DMZ평화의 공간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PLZ 페스티벌을 통해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이 축제를 기획하고 총괄해온 임미정 예술감독은 국내외 공연을 통한 음악 평화운동 단체인 ‘하나를 위한 음악재단’의 이사장이면서 한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임미정 예술감독은 2019년 처음 화음을 선보인 뒤 매년 DMZ 곳곳을 순례해왔다. 올해는 민간인통제구역인 고성 제진역 콘서트를 시작으로 오는 10월 말까지 고성(군수 함명준), 인제(군수 최상기), 양구(군수 서흥원), 화천(군수 최문순), 철원(군수 이현종) 등 강원도 내 접경지역 5곳을 돌며 평화와 생명의 콘서트를 펼칠 예정이다.이날 개막식은 최기용 강원도 문화관광체육국장, 함명준 고성군수,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대사를 비롯한 각국 외교관, 지역 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올해 PLZ페스티벌은 개막식에 이어 이날 제진역 플랫폼에서 진행된 오프닝 공연을 시작으로 오는 10월29일까지 온라인 국제평화음악캠프, 철원, 화천, 양구, 인제에서의 공연 등으로 구성됐다. 함명준 고성군수는 "최북단 고성을 찾아주셔서 감사하다. 제진역은 우리 지역이 유라시아로 뻗어나가는 시작점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이런 곳에서 PLZ페스티벌을 열게 돼 무한한 영광”이라고 말했다.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대사는 "이번 공연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에서 삶에 대해 고통받고 있는 이들과 이들이 갈구하는 평화에 대해서도 생각해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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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영금의 시선] 술 익는 마을고향은 지척에 있어도 오갈 수 없으니 지구의 반대편보다 더 멀리 있는 듯하다. 때로는 미움에 온 몸을 불사르다가도 때로는 술 한 잔에 목메는 날도 있다. 아니 생각하려 해도 기억을 소환하지 않고서는 나도 모르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어 취중에라도 목 놓아 불러보고 싶은 것이 고향이다. 술이라면 제일 먼저 아버지를 떠올린다. 세상살이 어려워 숫 덩이 같은 마음이라도 술 한 잔으로 해독할 수 있다며 이유를 붙여가시면서 드신다. 어떤 술을 마실가. 대부분 누룩을 발효시켜서 만든 증류이다. 알코올을 얻으려면 먼저 누룩이라는 곰팡이 균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화학공장에서 나온다. 시장에 나온 것을 사다가 재료(가루)와 섞어 놓으면 곰팡이 균이 자라고 두 번째로 독에 넣고 보름 정도 지나면 술 익는 소리가 엄청 요란스럽다. 뚜껑을 열어 향긋한 냄새가 나면 잘 익은 것이고 시큼한 냄새가 나면 술도 시어져 버린다. 가마에 넣고 열을 가해 오르는 증기를 냉각시키면 관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것이 술이다. 여기에 세신 뿌리나 오미자를 넣으면 정품보다도 더 맛있는 향기로운 술이 된다. 이 것을 서민들이 먹는 농태기(소주)라고 한다. 식량이 귀한 때일수록 술에 대한 수요가 더욱 높다. 이러한 현상은 밀주 단속으로 이어지면서 숨기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의 숨바꼭질이 이어진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집안에서는 누룩이 발효되어 부글부글 끓는 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방 아랫목에 어른의 허리 넘게 큰 독을 갑자기 옮겨놓지 못한다. 처음에는 솔 뚜껑을 뒤집어 술을 만들었는데 방법도 점점 정교해지고 술 기계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파는 사람도 생겼다. 밀주가 성행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 술의 재료는 곡류와 산열매로 만든다. 산열매로 만든 도토리 술은 맑고 깨끗하다. 공장에서 정품으로 생산되는 유명한 술도 있다. 대동강 맥주, 개성인삼 술, 들쭉술은 매점에서 볼 수가 있으나 서민들이 마시는 술은 아니다. 술은 식량대체자원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국내의 소비보다는 외화벌이 수단일 가능성이 높다. 화학공장에서 에틸알코올 원액을 가져다가 물에 희석시켜 팔기도 한다. 어떻게 마실까. 혼자도 마시고 여럿이 모여 먹기도 한다. 술은 취하려고 마시기 때문에 도수가 높은 것을 좋아한다. 농태기에 길들여진 사람은 공장에서 제조된 술이 맞지 않고 정품에 익숙한 사람은 그것만 좋아하기에 맛에도 구별 짓기가 있다. 비즈니스로 먹기도 하고 친분을 쌓으려고 일부러 자리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위하여’라는 건배사로 술잔을 부딪치기보다는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먹는다. 술 익는 마을에 취한 듯 살고 싶었던 사람들과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아버지, 고통스럽고 막막한 생활에서 탈출하려는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게 만들었던 것은 한 잔 술에 녹아있는 알코올의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