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리뷰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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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전통문화 정책’도 있다지방선거에서 전통문화 관련 정책은 국민들의 관심을 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문화의 보존과 발전은 국가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자 과업이다. 이에, 본지 ‘국악신문’은 주요 후보들의 공약 중, 전통문화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으며, 그 결과 적지 않은 전통문화정책 공약을 찾을 수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송영길 서울시장 후보는(민주당) ‘연등회 등 전통문화 콘텐츠 지원강화로 K-불교의 세계화에 기여 지원’, 오세훈 후보는(국민의 힘) ‘풍납동 역사문화 중심도시 개발’, 김동연 경기도지사 후보는(민주당) ‘조선왕조문화역사공원 설립 추진(구리시)’, 박남춘 인천시장 후보(민주당)는 ‘고려평화민속촌(강화군)’ 조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서재헌 대구시장 후보는(민주당) ‘대통령 역사박물관 건립, 무형문화재 전수관 건립(서구)’을, 송철호 울산시장 후보는(민주당) ‘반구대 암각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약속했다. 특히 ‘반구대 암각화’의 경우, 1995년 국보 제285호로 지정된 이래 선사시대 생활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유적으로서, 국내외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나, 생활 수로 확보와 문화재 보존과 상충하는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대구, 구미시 등 인근 지역의 협조로 그 해결책이 열리게 되어, 천전리 암각화와 더불어 2025년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이춘희 세종시장 후보는(민주당) ‘국립 민속박물관 이전’, 최민호 후보는(국민의 힘) ‘한글사관학교 건립과 한글문화수도 건설’을, 김태흠 충남도지사 후보는(국민의 힘) ‘공주, 부여, 청양을 중심으로 한 백제문화복합단지 조성’을 계획했다. 김관영 전북도지사 후보는(민주당) ‘국제 태권도 사관학교 설립(무주)’, ‘백제 한류 전통문화 체험단지 조성(익산)’, ‘가야문화 중심지 조성(장수)’, 이철우 경북도지사 후보는(국민의 힘) ‘신라왕경, 세계문화유산 등 경북 콘텐츠의 디지털화’를 발표했다. 박완수 경남도지사 후보(국민의 힘)는 역사유적 복원 및 유물 전시관 조성’ 등을, 허향진 제주도지사 후보는(국민의 힘) ‘해녀의 전당 건립’을 약속했다. 특히, ‘제주해녀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2016년)에 등재되었고, ‘해녀’는 국가 무형문화재 제132호(2017)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의미는 이미 검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들에게는 지역적, 문화적 거리로 인해 여전히 낯선 문화로 인식되는 것이 현실이다. 세명대학교 인문대학장 이창식 교수는 "주요 후보들의 전통문화 관련 공약은 대부분 정치 경제 이슈에 가려 노출이 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은 후보자가 당선 후 공약을 실천하는데도 영향을 준다. 그동안 문화 분야의 공약은 대개 밀리고 물려 그냥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이제 유권자가 당선자의 공약 실천을 하도록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바로 언론이 보도를 통해 후보자(당선자)와 유권자의 관계 설정을 도와 줘야 한다.”고 하였다. 각각의 공약들은 지역발전이라는 맥락에서, 각 후보들이 지역의 전통문화를 어떤 시각에서 보는지를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그 실천을 지켜보는 것 역시 유권자들의 몫이다. 우리의 뿌리를 지키고 공유하는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며,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하는 길이다. 신중한 한 표를 행사한 후에도, 후보자들의 공약이 실천되고 있는지, 발전과 개발의 그늘에서 우리의 뿌리가 훼손되지는 않는지 관심 있게 지켜보는 유권자의 자세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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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 "내가 국악에 꽂힌 이유는…"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이 열악한 국악 영재 육성을 위해 '아트 경영'에 전력투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근 원자재 값 급등으로 식품업계 전반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과 관련해 "아산에 해태제과가 대규모 공장을 가동할 예정"이라며 "위기가 기회라는 역발상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윤 회장은 지난 18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회회관에서 열린 제1회 영재 한음회에서 "국악 영재들이 세계무대 공연에 나서는 글로벌 프로젝트로 한음 영재 후원자 모임을 만들었고, 이 후원자들이 직접 한음 영재들의 공연을 볼 수 있도록 영재 한음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윤 회장은 '국악'의 애칭으로 '전통 한국 음악'의 줄임말인 '한음'을 쓰고 있다.윤 회장은 "우리 전통 음악을 어떻게 하면 원형 그대로 잘 보존할까 고민하다가 일반인들에게 후원을 받는 시스템을 도입했다."며 "이 후원이 우리 국악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이날 영재 한음회 공연도 일반인이 아닌 국악 영재들을 직접 후원하는 후원자들을 초청해 진행했다.윤 회장은 "기존 크라운해태제과가 운영하던 영재 국악회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한번 걸러 영재 한음회를 운영하는 것"이라며 "이 영재 한음회를 통해 국악 영재들이 큰 무대에서 공연하는 경험을 쌓으면 앞으도 더 큰 세계 무대에서도 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고 밝혔다.윤 회장은 "영재 한음회를 통해 적립한 기부금은 해외 공연에 사용할 것"이라며 "우리 전통 음악을 보전하고 오래 지속하는 행사를 만드는 것이 내 작은 소망"이라고 강조했다.영재 국악회는 지난 2015년 처음 시작해 143회 공연을 진행했다. 이 음악회는 매우 일요일 남산 국악당에서 국악 꿈나무들에게 공연 기회를 제공해 국악 저변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윤 회장의 든든한 지원 속에 크라운해태제과가 국악에 쏟는 열정은 한 둘이 아니다. 매주 개최하는 영재 국악회에서 뛰어난 영재를 발굴하고, 이 영재들은 두 달에 한번씩 영재 한음회 공연에 나선다.지난 달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 최고 명인·명창들의 공연인 '제1회 한음회'도 개최했다. 일찌감치 2007년에는 국내 최초의 민간 국악관현악단인 '락음국악단'을 창단했고, 2010년부터 '대보름 명인전'을 매년 개최하며, 누적 공연만 1500회를 돌파하기도 했다. 서울 남산 국악당도 윤 회장의 후원으로 2017년부터 '크라운해태홀'로 현대화 해 운영 중이다. 윤 회장은 자신이 국악에 꽂힌 이유가 '힐링' 때문이라고 강조했다.그는 "기업 경영이 너무 어려웠을 때 우연히 산에 올랐다가 대금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심취하게 됐다"며 "이후 국악인들을 만났는데 공연 기회가 많지 않아 힘들다는 목소리가 높아 자연스럽게 공연 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밝혔다.이후 크라운해태제과는 국악 등 문화 예술을 경영에 접목한 '아트 경영'의 창시자가 됐다. 윤 회장은 국악 외에 조각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인다. '크라운해태 창작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조각가들과 다양한 교류를 맺고, 각종 조각 전시회 후원에도 앞 장 서고 있다.윤 회장은 국악과 조각 행사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하는 게 바로 '아트 경영'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은 더 좋은 삶을 위한 공기와 같다"며 "문화 예술을 기업 경영에 접목시키는 것이 아트 경영이고, 이를 통해 고객 감성을 자극하면 크라운해태제과만의 차별화를 시도할 수 있다"고 밝혔다.윤 회장은 아트 경영을 반영한 제품으로 '쿠크다스'를 꼽았다. 그는 "쿠크다스의 S라인은 과자에 예술을 접목한 대표 사례"라며 "단순히 초코선을 넣는 것이 아니라 S자 형태로 선의 굵기가 얇아졌다 넓어졌다 하는데 과자에 이런 율동감과 볼륨감을 넣은 것은 쿠크다스가 처음"이라고 말했다.이런 쿠크다스를 통해 소비자들은 예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윤 회장은 최근 식용유와 밀가루 가격 급등으로 식품업계 전반이 어려움을 겪는 것과 관련해 "위기가 기회라는 역발상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윤 회장은 특히 제과업체가 고객에게 건강과 기쁨, 2가지를 줄 수 있다면 계속 사랑 받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윤 회장은 "제과 업계가 가야 하는 길은 건강과 기쁨을 주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며 "먹으면 먹을수록 건강해지는 기쁨을 줄 수 있는 과자를 만들면 그 어떤 위기도 넘을 수 있다"고 밝혔다. 윤 회장은 그러나 크라운해태제과는 아직 멀었다고 강조했다.그는 "고객에게 건강과 기쁨을 주는 과자를 만들기 위해 더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며 "과자의 맛 같은 본질은 물론 포장재 하나 하나에도 고객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한다"고 말했다.윤 회장은 올 하반기 본격 가동 예정인 해태제과 아산공장이 기업 경영의 대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그는 "해태제과는 제대로 된 공장이 없었는데 올 하반기 충남 아산에 완전히 혁신적인 공장을 가동한다"며 "이 공장으로 더 날렵해진 조직을 만들어 어떤 위기도 돌파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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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제주의 소리는 다르다, 제주해녀의 아리랑제주돌문화공원사업단이 주최하는 제주 대표축제 2022선문대할망페스티발 무대에 제주도아리랑연구회(회장:장경숙)가 주관하는 제1회 제주도아리랑 발표회가 18일 오후 2시 제주돌문화공원 본무대에서 개최된다. 공연명은 '제주의 소리는 다르다'이고, 주제는 '제주해녀의 아리랑'이다. 작품의 핵심은 제주해녀의 굴곡진 삶과 저항의 역사를 ‘역사의 노래’ 아리랑에 실어 무대화 한다. 이번 공연의 기획의도는 첫째,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제주해녀문화’(Culture of Jeju Haenyeo)를 주제로 하여 제주 해녀문화를 인류무형문화 '아리랑'으로 형상화 한다. 둘째, 일제강점기 반일반제의 항일운동을 전개한 해녀항쟁운동을 재조명 한다. 셋째.인류무형문화 ‘제주해녀문화’와 ‘제주아리랑’의 컨텐츠화를 시도한다. 넷째,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통해 제주도민의 공동체 결속에 기여한다. ‘제주해녀문화’는 제주도 해녀가 지닌 기술 및 문화로, 2016년 11월 한국의 19번째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제주해녀문화’는 우리가 후대에 전승해야 하는 지속가능한 인류 보편 가치를 지닌 문화라는 것을 알리고,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과 연계하여 ‘제주아리랑도 가시화 하는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해녀, 또는 잠녀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와 일본 밖에는 없는 직업이다. 왕조시대 제주가 당해야 했던 수탈은 제주가 가진 천혜의 가치만큼이나 컸다. 일제강점기 해녀는 가족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제주 특유의 공동체 정서를 바탕으로 반일반제의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섬을 떠나 달아났던 남성들과는 달리 고난을 온몸으로 받아 안으며 섬을 지켰다. 우리나라의 해녀들은 모두 제주에서 출가한 뒤,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 지역에 출가했다가 일제의 억압과 수탈을 피해 한반도를 떠나 일본, 오키나와에서 극동 러시아 사할린 등 국외로 바깥 물질을 나갔다. 이를 ‘출향 해녀’라 부른다. 그들이 불렀던 지역의 아리랑을 무대에 올린다. 장회장은 "1937년 기준 경상·전라·함경도 등에 2,801명, 일본의 도쿄·쓰시마·시즈오카 등에 1,601명의 제주 해녀가 출향 지역에 정착해 물질을 전수하였다. 출향해녀들이 조국을 떠나서 타국에서 디아스포라 한인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제주해녀의 백년사를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으로 형상화 하려고 한다"며, "국외로 나간 출향해녀들이 일본과 오키나와. 사할린에서 접했던 '사할린아리랑'을 제주에서 최초로 소개한다"라고 전했다. 프로그램은 제1부 제주의 아리랑. 제2부 디아스포라 아리랑, 제3부 고개의 노래, 제주아리랑으로 구성된다. 해설이 있는 렉처아리랑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해설은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가 진행한다. 제1부에서는 조천아리랑, 우도아리랑, 서우젯소리, 송악산아리랑이 선보인다. 2부에서는 사할린아리랑, 탄광아리랑, 진도아리랑. 해주아리랑, 1인극 모노드라로 꾸민 '이어도로 간 해녀', 연꽃아리랑, 양산도방아타령.경복궁타령, 3부에서는 왕십리아리랑, 제주아리랑과 함께하는 가무악, 휘날레에는 아리랑대합장으로 관객과 함께 한다. 이번 행사에 초청공연 위촉을 받은 단체는 서귀포아리랑보존회(유재희),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이혜솔).황실예술단(김화숙)이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장경숙(1951년생, 제주 출생) 회장은 제주시 최남단 대정읍 보성리에 태어나서 제주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교육자이다. 대정여자교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퇴직후 '자운당문화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시아버지가 물려주신 고풍스런 자택이 문화도시 서귀포 마을문화라운지 지정(2021년)되면서 옛스러운 제주의 정서를 진하게 풍기는 '자운당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장회장은 초등학교부터 전통춤을 배우면서 늘 우리 춤사위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 왔다. 2018년 은퇴후 세계적 무용가 홍신자가 운영하는 제주시니어무용단 단장으로 활동해 왔다. 김기인춤문화재단 써클댄스동아리, 정기발표회, 현대무용 '아우라' 동아리 활동, 제주 돌문화공원 즉흥춤 축제에도 참여해 왔다. 이렇게 마을공동체 리더 활동을 하던 중, 2016년부터 제주도아리랑보존회 강소빈 회장에게 제주아리랑을 전수받고, 2019년 10월 1일 '아리랑의 날'을 기점으로 '제주아리랑연구회'를 결성했다. 이후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제3회 사할린아리랑제 참가후 본격적으로 제주아리랑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한편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에 매달 정기 후원을 해오고 있다. 장회장은 그동안 배운 한국 전통춤사위 및 모던댄스와 제주아리랑을 제재로 하여, 1인극 모노드라마 '이어도로 간 해녀'작품을 처음으로 발표한다. 이 작품은 제3회 사할린아리랑제에서도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사할린에 살고 있는 제주 출신 동포들에게 공감을 받고 돌아와서 확장시킨 작품이다. 내용은 제주해녀가 여자로써 격어내야만 한 지옥같은 고난을 '이어도'라는 지도에도 없는 섬을 통해 환타지라는 서사를 만들어 현실의 역경을 넘으려고 했다. 이러한 서사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제주민요와 제주신화, 제주아리랑을 부르고 몸짓으로 형상화하는 1인극이다. 기존 공연에서는 몸짓으로만 한 작품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소리도 치고 몸짓으로 이어지는 환타지를 선사하는 기대가 되는 작품이다. 1인극전국대회에도 나가려고 준비한 작품을 이번 무대에서 첫선을 보인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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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년 공개방송 ‘행복한 동행’KBS한민족방송은 21일 저녁 6시 KBS아트홀에서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년 기념 특별방송 ‘행복한 동행’을 개최했다. 이 행사는 러시아 사할린·중국 만주3성, 일본 등의 동포를 청취자로 하는 KBS라디오 한민족 방송(사회공헌방송부 박천기 부장)의 간판 프로그램인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가 개시 50주년을 맞아서 유명 가수와 초청 인사들과 함께 하였다. 참석자 중에는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공모전 역대 수상자 등이 참석하여 뜻을 더했다.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진행자인 이소연과 작곡가이자 가수인 이호섭이 사회를 본 이날 공개방송에는 사할린 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을 비롯해 사할린동포들의 귀환운동을 펼친 박노학 씨 아들인 박창규 씨, 前 사할린 유즈노사하린스크 14번 고등학교 백하득 교장, 前 사할린 한국교육원 김주환 원장, 사할린 한국어교육협회 공노원 부회장, 사할린아리랑축제추진단 단장인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를 비롯해 한국으로 영주귀국해서 안산, 인천, 김포, 파주, 남양주 등에 거주하고 있는 사할린 동포들, 그리고 아리랑 명창 이혜솔, 김화숙. 중국동포, 고려인, 청취자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특히 동포들과 인연이 깊은 가수 설운도, 김국환, 나태주, 설하윤, 소리꾼 박애리, 남상일 등이 출연해 50주년 축하 무대를 꾸몄다. 사할린에서 위문공연을 펼치기도 한 작곡가이자 가수 이호섭이 ‘사할린’을 부를 때 관객들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는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징용됐다가 일본 패망 후 귀국길이 막히고 억류되어 남아있던 동포들이 가족 찾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해서 1972년 4월 3일 생긴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사할린 동포에게’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다. 당시 이 방송은 수많은 사할린 한인들이 고국의 가족과 생사여부를 전하는 동아줄 역할을 하였다. 중국 동포 보낸 26만 여 통 편지 DB로 구축 이후 1974년부터 중국 지린성·랴오닝성·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과 연해주로도 청취 권역을 확대해 중국 동포들의 가족 찾기 사연도 소개했다. 특히 중국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중국 동포들이 편지를 보내와서 가족 재회 1만 4000여 건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92년까지 중국동포들이 보낸 편지만 해도 26만 여 통에 이르며. KBS 한민족방송은 이 편지를 DB로 구축했다. 박천기 KBS 한민족방송 부장은 "한중 수교가 되던 1992년까지 중국동포들이 보내온 편지가 26만여 통에 이르고,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가족을 찾아준 사례가 1만 4천여 건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날 공개방송에는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추진 운동의 대부로 꼽히는 고 박노학 씨의 아들 박창규 씨도 참석했다. 박 씨는 "아버님이 KBS에 제안해서 만들어진 방송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니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당시 사할린동포들은 한국으로 직접 편지를 보낼 수가 없어서 일본을 거쳐서 편지를 보냈는데 KBS 한민족방송을 듣기 위해 몰래 숨어서 방송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수진 前 사할린이산가족협회 회장은 "사할린 사람들은 수십 년간 방송을 들으며 고국 땅을 밟게 되기를 학수고대했다. 이렇게 와서 공개방송을 듣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KBS 한민족방송은 사할린 동포들이 잃어버린 수많은 가족을 찾아줬고, 또 책과 달력을 보내주고 노래자랑대회과 위문공연도 실시했다”며 "KBS 한민족방송은 사할린 동포들을 잊지 않고 늘 함께 해왔다. 50주년을 축하한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부터라도 영상 편지를 남기는 작업을 시작하겠다,"는 축사를 전했다. 대한고려인협회 노알렉산드라 회장은 "50년 동안 동포들과 함께 해 오면서 한민족동포들을 연결시켜 주고 있는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가 앞으로도 한민족 문화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고 밝혔다.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애청자인 재한동포문인협회 김경애 회장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이 방송을 들었는데 중국동포들 중에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를 통해 가족을 찾은 사람들도 많고, KBS 덕분에 한국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동포들이 많다. 또 KBS 한민족방송이 중국동포들이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고려인협회 채예진 부회장은 "50년 동안 동포들과 함께 해 오면서 한민족동포들을 연결시켜 주고 있는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한민족 문화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가족 찾기에서 시작된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는 통일부와 협력해 올해부터 남북이산가족 찾기를 다시 시작해 동포들의 가족 찾기를 이어가고 있다. 첫번째 무대에서는 전 사할린국립대학 박승의 교수와 사할린 전 새고려신문 안춘대 사장이 사할린 동포들의 ‘디아스포라’와 ‘이중징용’에 대한 아픔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회상하고, 2년에 걸쳐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사할린 동포들이 3대에 걸친 가족사 이야기로 대상을 수상한 감동을 전했다. 초대가수의 노래에 눈물 이어서 수차례 사할린 공연에 다녀온 가수 설운도가 첫 막을 올렸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다룬 '잃어버린 30년'을 부른 가수 설운도는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동포들에게 노래로 위안을 줄 수 있어서 그 어떤 무대보다 뜻깊었다"고 말했다. 사할린을 작곡한 이호섭이 부른 '사할린'은 또 한 세대를 넘어가는 '이산의 이산'이 남긴 아픔이 고스란히 가슴과 가슴으로 전해졌다. 두번째 무대에서는 방송 덕분에 가족을 찾았던 이승희·박동찬 중국동포이 무대에 올라 "가족을 찾았다는 소식에 동네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기뻐했고, 방송에서 한국 가족의 편지를 들을 때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만나는 날을 고대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 편지들을 분석한 동덕여자대학교 문형진 교수는 "이 편지에는 동포들이 한반도에서 연해주 지역으로 어떻게 이주를 했는지 동포들의 이주사를 엿볼 수 있고. 생활상과 문화도 알 수 있어 그 자체로 소중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나태주가 '힘내라 대한민국'을 부르면서 태권도 발차기를 하면서 공중회전을 하자 객석에서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으며, 설하윤은 K-뮤직의 아우라와 댄서들의 특급 퍼포먼스로 관객을 휘어잡았다. 세번째 무대에서는 남북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네번째 무대에서는 1세 부모가 가고 2세와 3세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다시 시작된 이산가족찾기'에 대한 문의가 오고간다고 전했다. 이어서 판소리 명창 남상일과 박애리사 ‘춘향가‘로 신명을 높였다. 휘날레에는 관객과 함께 뜨거운 가슴을 담아 아리랑으로 대합창을 했다. 이날 공개방송을 연출한 KBS 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프로그램 김경희 피디는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가 한민족 동포들과 50년을 함께 해 왔듯이 앞으로도 언제나 동포들과 함께 하면서 동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고 말했다. 최연소 방청객으로 온 사할린 4세 신아리나(9세)와 신마이아(14세)는 "한편의 다큐를 보는 것 같다. 사할린 동포와 중국 동포들이 가족찾기 편지를 보내고, 왜 이제야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라고 전했다. 이날 공개방송을 연출한 KBS 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김경희 피디는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가 한민족 동포들과 50년을 함께 해 왔듯이 앞으로도 언제나 동포들과 함께 하면서 동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고 말했다. 공개방송이 끝나고, 2020년 KBS한민족상(체험수기)을 수상한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공노원 부회장은 "오늘 50주년 공개방송은 그야말로 사할린의 날이다. 우리 가족 3대가 함께 왔다. 며느리와 손녀들이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 뜻 깊었다.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딸과 사할린에서 친구들이 이 방송을 언제 볼 수 있냐고 전화가 왔다. 국내 영주 귀국한 김포, 양주 친구들이 며칠 전 갑자기 코로나로 못 와서 너무 아쉬웠다. 50주년을 축하하고 최장수 프로그램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주년 특집 공개방송 ‘행복한 동행’은 오는 4월 2~3일 오전 7시~8시 KBS 한민족방송(AM 972Khz)에서 방송된다. KBS 한민족방송 유튜브 채널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행사장을 나오는 한 참석자의 말이 귀에 감돈다. "나 60년 행사 때 초청하면 꼭 올랍니다.” 속으로 답해 드렸다. "예 그러셔야죠. 저도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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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영 ‘코트’ 대표, ‘시간의 마음’을 읽고 ‘땅의 지문’을 지키는 문화 독립 전사종로 2가에서 인사동으로 진입하는 초입 왼편에 복합 문화공간이 숨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지만, 정작 이 장소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기자도 서울 시내를 거의 꿰듯이 돌아다니는 편이지만, 이 공간은 생소했다. 60년 묵은 5층 건물 해봉빌딩을 ‘ㄱ’ 자 모양의 본관과 별관이 병풍처럼 두른 형상이다. 500평 부지에 건물 연면적 1000평의 규모이다. 이 공간 안에 카페, 전시실, 창작 랩, 서재, 커피숍, 숙박시설, 와인바 등이 들어있다. 다음달에는 음식점도 들어선다. 아티스트들과 창작인 수십 명이 이 공간을 쓰고 있다. 공간의 이름은 ‘코트'(KOTE)이다. ‘꽃’과 ‘뜰’이라는 의미를 담은 작명이다. 멀쩡해 보이는 이 공간은 겉모습과는 달리 치열한 전투를 겪고 있다. 서울시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에 따라 이미 뜯겨나간 피맛골에 이어 철거 위기를 맞고 있는 까닭이다. 이 공간을 리모델링해서 ‘땅의 지문’에 맞게 문화 전진기지로 만들려는 ‘코트’ 대표 안주영(1968~ )씨를 만나 현황과 포부를 들어봤다. 안 대표는 남다른 세계관을 가진 문화 전사이다. 2022년 3월 19일 오전 10시 인사동 ‘코트 랩’에서. Q. 여기서 구체적으로 무얼 시도하시는 건가요? A. "‘공정 무역’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Q. 공정 무역? A."네.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예술의 자유를 구현하게끔 도우려는 거지요. 아티스트들이 돈 걱정 않고 창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들에게 창작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주려는 겁니다.” 인터뷰 현장인 ‘코트 랩’은 본관 건물 2층에 위치해 있다. 아티스트마다 넓찍한 책상 두 개가 있는 공간을 사용한다. 자기 사무실을 가질 여력이 안 되는 아티스트들에게는 안성맞춤일 것 같다. 임대료는 월 30만 원으로 싼 편이다. Q.어떤 아티스트들이 입주해 있나요? A."다양합니다. 사진작가, 현대 무용가, 패브릭 디자이너, 연극영화 연출가, 광고 기획자, 잡지 편집자, 다큐멘터리스트, 작곡가, 메타버스 개발자, 셰프 등이에요. 모두가 사막에서 샘을 찾듯이 오신 분들이죠.” 2백 평 넓이의 ‘코트 랩’에는 여러 분야의 창작인들이 열정을 쏟아 작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서로가 소통하며 영감을 주고받기도 한다. Q.가난한 창작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군요. 이런 생각을 그전부터 가졌던 건가요? A."제가 2013년에 ‘명동성당 지하 신자 공간 만들기 1898’ 운동 기획에 참여한 적이 있었어요. 명동성당을 1898년 축성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는 데 주안점을 둔 프로젝트였죠. 화장품과 중국인의 공간이 되어버린 명동에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으려는 도심 재생 운동과 지향점을 맞췄어요. 2014년에 완공됐는데, 천 평의 지하 공간에는 신자 지원시설을 집중 배치했어요. 지하의 중앙에 광장을 두고 사방으로 꽃집, 서점, 화랑, 커피숍, 편의점, 패스트푸드점, 전시장, 간이 공연장, 수도원 물품 직판장 등을 마련했죠. 이 과정을 진행하면서 저는 이런 인식을 터득하게 됐어요. ‘공간은 마땅히 사용자가 그 주인공이어야 한다’.” 그녀의 이력이 궁금해졌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북 안동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을 마치고 한글판 ‘타임 연구’지 편집장을 시작으로 영어 통역사, 사모 펀드, 투자자문, 자산운용, 뉴욕호텔 인수 프로젝트, 도심 재생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등의 업무를 거쳤다.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그나마 지금의 일과 관련성이 있을 뿐, 그전의 일들은 지금 작업과 전혀 연결 고리가 없어 보인다. Q.어떤 계기로 이 공간과 인연을 맺으셨는지요? A."제가 명동 프로젝트를 마친 직후에 이곳을 방문했다가 골목 안쪽에 서 있는 오동나무를 보았는데 그 오동이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야기 즉슨 이랬다. 그녀는 2016년 ‘승동교회와 피맛골이 교차하는 지점’인 이곳 뒷마당에서 늙은 오동나무를 발견하고선 부둥켜안고 울었다. 유서 깊은 두 문화공간 가운데서 백여 년을 버텨온 나무였다. 그녀는 오동이 "건물에 포위당한 채 죽어가고 있다”라고 느꼈다. 피맛골 자리는 깡그리 헐리고 있었고, ‘코트’ 구역도 개발 국면에 처해 있었다. 그 가운데 선 오동은 머리 부분이 이미 잘려나간 채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주영 씨는 나무의 영혼을 감지하며 ‘왜 이런 취급을 받고 있나?’ 안타까워했다. ‘예전 자기 집 마당에 서 있던 오동이 생각이 나서였다’라고 밝히기도 했지만, 생면부지의 나무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건 여간 섬세한 감성이 아니다. 일반이 표현하기는 어려운 감정선이다. 필자는 그녀가 오동에게서 ‘시간의 마음’을 읽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오규원 시인의 언급처럼 "시간에게도 다양한 감정이 있는” 까닭이다. 이 오동과의 첫 대면에서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서 그녀는 결심했다. ‘이 오동나무를 살려야겠다’ Q.계기치고는 대단히 특별하군요. 그 정도면 ‘운명적’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A."확실히 그렇습니다. 다들 ‘죽었다’며 베려 하는데 저만 살려야겠다고 달려들었으니까요. ‘미친 여자’ 소리도 들었습니다. 저는 이 오동을 개발과 보존의 경계에 선 존재로 여기죠. 그야말로 ‘경계에 핀 꽃’인 거죠. 살릴 결심을 한 뒤 이 주변을 공부를 해보니 대단히 유서 깊은 곳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죠. 삼일 독립운동의 산실 역할을 한 호해여관과 1920년대 최초로 연극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활동사진을 틀었던 조선극장이 바로 이 터에 있었더군요. 이웃에는 학생들이 삼일 만세운동을 도모했던 승동교회와 탑골공원이 있고요.” 오동나무와 조우하면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그녀는 ‘공간을 통한 나눔’의 실현을 소명으로 삼았다. 이 공간이 예사 터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에 맞섰다. ‘땅의 지문’을 읽은 것이다. 오랜 시간 이 터에 뿌리내려 깊이 박힌 ‘땅의 지문’을 이어가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남다르고 당찬 모습이다. 그녀의 우직함을 읽게 하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조선극장 터를 표시한 표지석이 다른 지번에 세워져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관계기관을 찾아가 자료를 제시하며 정정할 것을 요청해 공무원을 당황하게 만든 해프닝이다. 안 대표는 ‘코트’ 터에 조선극장의 문화 지문을 잇기 위해서는 오동부터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물의 지붕을 뚫고 서 있던 오동나무를 보던 날 ‘오동나무를 중심으로 정원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잘릴 위기에 처한 오동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기를 들어야 했다. 오동나무를 지켜 중정을 만드는 방안으로 공간 재배치에 나섰다.오동 주변의 작은 건물들을 허물고 주 건물 3개 동은 남겨 리모델링을 거친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2021년불법철거로 일부가 부서진 별관은, ‘코트’ 사태를 자신의 일처럼 함께 견디어 준 코트 커뮤니티와 예술가들 덕분에 지킬 수 있었고 보수공사를 통해 재탄생하고 있다. 여러 아티스트들이 온몸으로 막아 부서진 돌 틈에서 마침내 꽃으로 피어나, ‘코트’ 사태를 다룬 전시의 한 제목처럼, ‘깨어진 틈 사이로 피는 꽃’이 구현되고 있다. Q. 이제 오동나무를 베려 들지는 않는 것 같군요. 이 나무로 ‘코트’의 상징으로 삼으실 건가요? A."네. 이제는 살았어요.(웃음) 별관 뒤편 오동이 자리 잡은 마당을 유럽식 중정(中庭) 모양의 공간으로 살리려고 해요. 그러면 이태리나 스페인의 도시들을 걷다가 골목 속에서 반갑게 만나게 되는 중정이 인사동에도 들어서게 되는 거죠. 휴식과 소통, 축제의 공간이 될 수 있어요. 벌써 그럴 가능성을 보였어요. 2021년 6월에는 국내에 거주하는 프렌치 커뮤니티들이 이 중정 공간에서 프랑스의 음악축제를 열어 즐겼고, 10월에는 벨기에 대사관이 주관하는 벨기에 페스티벌이 열렸어요. 지난 3월 18일에는 매 학기마다 나라를 옮겨가며 유목민처럼 수업하는 미국 미네르바(Minerva) 대학 학생들이 이번 학기를 서울에서 지내면서 이곳에서 축제를 즐겼죠. 모두가 서울 속에서 익숙한 풍경을 찾아낸 겁니다. 저는 이 공간으로 끌리듯 들어선 모든 이들을 "이 공간이 초대한 사람”이라고 여겨요.(웃음) 그 사람들한테서 정말 동지애 같은 에너지를 얻곤 합니다.” 안 대표의 유일한 난제는 동업자와의 관계이다. 서머셋 몸(Somerset Maugham)의 소설 ‘달과 6 펜스’에서 ‘달’은 꿈을, ‘6펜스’는 현실을 상징한다. 안 대표가 ‘달’을 꿈꾼다면, 동업자는 ‘6펜스’를 쫓는다. 철학이 다르다 보니 동업자는 공격적이다. 개발지상주의자답게 처음에는 오동을 베어버리려 한 데 이어 호시탐탐 별관을 철거하려 하고,주차 공간을 만들 생각을 한다. ‘땡처리’ 업체들을 유치해 더 많은 임대료를 받고 싶어 한다. 개발이익을 최대화하려 함이다. 그동안 오동나무 앞 별관 건물을 파괴하려 포클레인을 동원하고, 고압수를 대포처럼 쏘고, 수시로 ‘용역’을 동원해 영업을 못 하게 막고, 공간을 돌아다니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안 대표는 건물 파괴에 저항하다 물 대포를 맞아 바닥에 쓰러지기도 하고, ‘용역’들의 갖은 횡포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해 왔다. 그렇게 맞서다 보니 그녀는 갑자기 문화 지킴이이자 전사가 돼버렸다. 그렇지만 늘 마음이 편치 않다. 같은 배를 탄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공동운명체 사이라 공존을 바라는데 쉽지 않은 탓이다. A."2016년 말 지분 20%로 참여했어요. 그러다 ‘디자인 하우스’라는 유명 잡지사를 유치해 사업이 안정되자 동업자가 저를 ‘아웃’시켜버리더군요. 그랬는데 2019년 말에 동업자가 급하게 연락을 해와서는 ‘사기를 당해 20억 적자를 지고 임대료도 6개월 연체돼 명도 당할 상황에 처해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어요. 이 공간에 대한 미련 때문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죠. 동업자가 진 적자를 10억으로 해 떠안고 지분을 50:50으로 나누고 제가 건물의 관리 운영권에 대한 최종 의사 결정권을 갖는 조건으로 다시 계약을 체결했어요. 그런데 그뿐이었어요. 명도는 모면했지만, 동업자는 저와의 계약을 이행할 의사가 없었던 거죠. 특히 본관 1층 전면 90평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제가 전차 계약을 체결한 공간인데도 막무가내입니다.” 별관에는 한때 ‘독립 뇨리점’을 입점시켜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분위기와 메뉴를 앞세워 명소로 만들려 시도했으나, 더 높은 임대료를 받으려는 동업자의 훼방으로 무산됐다. 자신이 직접 임차한 해봉빌딩에 입점시키려는 시도도 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당시 해봉빌딩은 5층 전체에 쓰레기가 가득했고, 지하에는 물이 찬 상태였는데 거금을 들여 쓰레기를 치우고 물을 빼내고 고치면서까지 유치하고 싶어 했다. 창의적이면서 터의 지문과도 잘 맞아 무릎을 쳤던 까닭이다. 별다른 관광자원이 없는 인사동에 꽤 괜찮은 관광 콘텐츠가 하나 등장할 뻔했다. 올 3월 초에는 루이비통 트렁크전시회를 개최하기로 기획했다가 또다시 방해를 받았다. 고민 끝에 동업자 요구를 받아들여 ‘땡처리’ 전시장 개장을 수락했다. 공격을 받으면 몸통을 지키기 위해 꼬리를 잘라주고 달아나는 도마뱀처럼 그도 창작의 산실인 ‘코트 랩’을 지키기 위해 전시공간을 양보한 것이다. 공존을 원치 않는 그들의 훼방이 있을 때마다 공허함을 느끼는 안 대표에게 친구들은 큰 힘이 된다. 특히 이곳에서 축제를 가졌던 프랑스 커뮤니티와 외국인 아티스트들 그리고 소식을 접한 미네르바 대학생 수십 명이 이 공간에 머무르며 ‘코트’를 지원했다. 그들은 지금도 저항 문구를 만들고, 인터넷에 실상을 올리고, 사진전을 열어 대중에 알리고, 노숙을 하며 ‘용역’의 침입에 맞서고, 피케팅을 하며 시위에 동참한다. 꽃을 꽃으로 존재하게끔 도우려는 마음들의 결집이다. 안 대표는 그들에게 감사하며, 토니 쉐이 ‘자포스Zappos’ 신발 CEO의 신념이 옳았음을 확인하곤 한다. 토니 쉐이는 라스베이거스에 창작 공간을 만들면서 "여러 예술혼들이 모이면 기적이 발생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 기적은 창작뿐 아니라 예술 환경을 지키려는 마음에도 적용될 터이다. Q.‘공정 무역’ 실현을 위해서는 열정과 사명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켜 줄 돈 만들기, 그 셋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 텐데 수익 창출 방안은 어떤 게 있는지요? A."네. 여러 계획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창작자들을 위한 공유공간 임대, 전시 대관, 이벤트 공연, 음악연주회, 파티, 출판기념회, 전시 오프닝과 클로징 행사, 광고나 드라마 촬영, 브랜드 팝업과 론칭 행사, 세미나와 콘퍼런스 유치, 파티 유치, 스몰웨딩 장소 제공, 마켓 유치, 이색 음식점 입점 등 문화 관련 사업들을 수익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코트’의 전망은 밝아지고 있다. 여러 조짐들이 보인다. 광고회사들이 레트로 감성을 좇아 이 공간에서 CF를 촬영한 사례가 안 대표에게 예상 못한 힘을 실어주었다. 갤럭시와 아이폰 두 경쟁 휴대폰 회사가 차례로 이곳에서 촬영을 한 일은 이 공간의 가능성을 대변한다. 스포츠용품 업체가 BTS를 홍보모델로 삼아 진행한 사은 행사는 직원 실수로문제가 생겼었으나 결과적으로 BTS 팬클럽‘아미’와 인연을 맺어주고, 그들이 ‘코트랩’의 첫 번째 입주자가 되는 전화위복의 행운을 제공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귀국한 젊은 아티스트들이 이 공간에 속속 둥지를 틀고 있다. 디지털 로봇비서RPA 기반의 업무자동화기업, 스마트 로봇을 활용하는 주얼리 공작소, 편집숍들이 들어오고 있다. 안 대표는 코트의 취지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아티스트들로 구성한 예술인 연대 성격의 ‘예술 학교’ 프로그램도 모색하고 있다. ‘코트 랩’이 이들로 채워지면, 천군만마의 동지들이 생기게 될 터이다. 모두가 문화로서 문화를 지키고 살리려는 계획이다. ‘땅의 지문’을 매개로 경계를 허물고 사람을 이어 예술혼을 살리려는 안 대표의 뜻을 ‘시간의 마음’이 따뜻하게 품을 것이라 예상한다. Q.마음 고생이 심할 텐데 후회가 든 적은 없었는지요? A."오동과의 인연으로 우연히 이 공간이 제게 왔어요. 평생 모은 돈을 이곳에 쏟아부었죠. 건물주가 나가라면 언제든 나가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다 해도 후회는 없어요. 운명처럼 제게 온 이 소중한 공간을 어떻게든 이 공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려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세상의 소리가 아닌 제 마음의 소리에 따라 하루를 살아도 영원히 사는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는 욕망이 자기 삶을 어떻게 삼키고, 욕심이 공동체를 어떻게 망가트리는지 모르는 부류들에게 순수와 환희로 피어나는 꽃의 의지를 보여주려 한다. A."참 신기하게도 지금은 오동이 저를 지켜줘요. 지칠 때 오동나무를 안으면 뒤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저를 가만히 감싸주는 느낌을 받거든요.” 기자는 안주영 대표의 오동이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1921~86)의 떡갈나무처럼 전설이 되기를 바란다. 전위 예술가인 보이스는 1982년 독일 중부 카셀(Kassel) 시에 7천 점의 비석을 세우고 그 끝에 떡갈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선 하나씩 하나씩 비석을 치우고 그 자리에 떡갈나무를 심어나가 마침내 5년 후 7천 그루가 들어선 녹색공간을 만들었다. "주차 공간도 비좁은데 쓸데없는 짓을 한다.”라고 비난하던 목소리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문화운동가 한 사람의 통찰력만으로도 세상이 얼마나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요제프 보이스가 떡갈나무로 시의 면모를 푸르게 바꾸었듯이, 안주영의 오동도 이 땅의 지문을 살리고 시간의 마음을 담는 인식 전환의 모티브로 역할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바람 탓에 빗나간 것처럼 보이는 화살들마저도 모두가 과녁을 향했다는 사실을 알아 안 대표가 자부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방향을 놓치지 않는다면, 웃으며 옛이야기를 할 날이 반드시 올 터이다. 긴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도 앞으로 틈날 때마다 인사동 ‘코트’ 2층의 ‘내면의 서재’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뒤져보거나 ‘조선 살롱’에서 와인을 마시며 음악을 듣거나 하고 싶어졌다. 꽃이 피는 터인 ‘코트’에서 영혼이 아름다운 아티스트들과 더불어 꽃인 양 행세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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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도 국립극장장 인선 파행, “너무 의아스럽다”국립극장장 자리가 두 번의 공모에서 합격자를 내지 못해 다시 3차 공모를 하게 되었다. 1차 공모는 지난해 6월 공고, 11월에 서류심사와 면접심사 합격자 3인이 통과되어 역량평가시험에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S매체가 3인에 대해 "적임자 없다”고 보도한 후 인사혁신처가 "적격자 없음”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1월 초 재공모에 들어갔다. 그런데 같은 과정으로 3인을 통과시킨 상태에서 1월 27일 C일보가 "A급이 없다”라는 부정적인 보도를 했다. 그리고 한달이 지난 2월 25일 문광부 내부 심사위원회는 3월 중 재재공모를 한다고 밝혔다. 이는 결과적으로 본보가 2월 3일자 "언론이 자격 없다고 보도하면, 또 재공모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 바 그대로 되었다. 이에 대해 ‘1차 서류심사, 2차 대면면접 심사를 통과하고, 3차 역량평가시험을 준비하던 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前 한국동양예술학회 회장)교수와 27일 오전 이메일 인터뷰를 보내고 오늘 28일 답변을 받았다. 이를 통해 국립극장장 인선 파행의 대강을 파악해 보기로 한다. 문광부 "3명 모두 부적격자로 판명”, 전화로 통보 국악신문: 이번 2차 공모, 최종 절차를 남긴 상태에서 적격자가 없어 재재공모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언제, 어떤 경로로 듣게 되었나 박상진(전 동국대 교수): 2월 25일 오후 4시 30분 경 문화체육관광부 OO과 직원 OO라고 하면서 휴대폰을 통해서 듣게 되었다. Q. 재재공모 이유가 무엇이라고 들었나. 구체적으로 밝혀준다면? A.직원은 재재공모에 관한 특별한 이유(3명 모두 부적격자로 판명이 나서, 등) 나 설명 없이 3월 중에 재재공모를 하기로 했다고만 알려줬다. 그래서 내가 세 번 심사 중 두 번을 마쳤고 아직 역량평가 한 번이 남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결론을 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문화체육관광부 내부 심사위원회에서 그렇게 결정했다”고 했다. Q.그동안 1차와 같이 2차 공모 절차 중에 C일보 보도도 있었고, 종로 국악님들 사이에 불쾌한 소문도 돌았다. 이번 상황에 대해 문광부나 인사혁신처에 대한 응시자로서의 입장은 무엇인가? A. 인사혁신처에서 1차 시험인 서류심사에서 5명이 합격되고, 2차 면접심사에서 3명이 합격됐다. 그 심사과정은 공정하게 잘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특히 2차 면접심사 과정에서의 심사 내용은 심층면접으로 국립극장장의 역할에 부응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재를 선발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그 역할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과정과 내용이 무시된 결론이 나온 것 같아서 너무 의아스럽다. Q. 전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소동 이후, 개방형 공모제도가 보편화 한 듯한데, 응모 경험자로서 이번의 인사 방식에 대해서 장단점을 알게 되었으리라고 본다. 장단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A. 정부 기관장의 개방형 공모제도는 ‘과거 제도’와 같은 것이다. 특정지역, 특정인도 좋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묵묵히 국가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인재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블라인드 면접을 하는 것이지 않나, 오랜 시간 동안 장단점을 보완해서 만들어진 현 제도의 취지에 맞게 오히려 정부에서 더욱 공정하고 엄격하게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잡음과 소문만 무성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Q.기관의 특수성과 위상을 고려한다면, 기본적으로 국립극장장이란 자리를 어떻게 보는가? A. 국립극장은 국내 유일의 제작 극장이다. 국립극장장의 당면 과제는 전통예술에 기반을 둔 공연작품을 개발하는 것이고, 타 장르와의 융복합을 통한 세계무대 진출이다. 극장장에 대해서는 전통예술을 전공하고, 그에 기반한 창작품을 제작한 경력의 소유자, 그리고 서양예술 등 기타 장르에 대한 이해도와 융복합을 통한 창작경험을 갖춰야 한다고 본다. 한류의 원형자산은 전통예술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국립극장에는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전통예술 3단체가 있는데, 적어도 이 세 단체의 성격이라도 알아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이 세 단체가 융복합하여 만들 수 있는 창극, 무용극, 음악극 등 총체극을 제작한 경험은 국립극장장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 소양이라고 본다. 그리고 위와 같은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예술감독과 단원들이 ‘창조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수록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극장장의 다양한 리더십 즉, 행정적 역량도 갖춰져야 한다. 그래서 역량평가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응모한 40여명, ‘부적격 블랙리스트’? Q. 제도상 다음 3차 공모에 응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다시 응할 의향이 있는가?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A. 이미. 1차 공모, 2차 공모를 통해서 ‘적격자 없음’으로 탈락된 예술인들이 40여 명으로 알고 있다. 이 부분에서 본의 아니게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기분이다. ‘적격자’로 모든 분들이 보완해서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본인은 더 생각해 보겠다. Q.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나 의견이 있다면? A. 우리나라 유일의 제작 극장인 국립극장장의 자리는 최고의 전문성을 요구받는 자리이다. 세계 무대 진출로 한류문화 확산을 도모함으로써 국립극장의 브랜드 가치를 극대화하고, 세계 속에 국립극장의 위상을 제고하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훌륭한 극장장이 선발되기를 기원한다. 인터뷰에 응해 주신 박상진 교수께 감사를 표한다.(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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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자의 객석에서] 찬란한 궁중문화의 품격, ‘종묘제례악’의 감동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종묘제례악의 장쾌함과 마주했다. 조선왕실의 품격과 장중함에 스며드는 순간이다. 국립국악원은 지난 22일 송년 공연으로 종묘제례악을 예악당 무대에서 올렸다. 한국적인 송년 공연문화 정착을 위해 기획 되어 24일까지 진행 중인 특집 프로그램이다. 종묘제례악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200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 올해로 20주년을 맞아 의미를 더하였다. 종묘제례악은 조선의 건국 이념과 철학을 담아낸 찬란한 궁중문화다. 조선왕조 역대 제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서 국가 제례 행사로 치러진다. 이때 사용되는 음악이 종묘제례악이다. 음악은 악(樂), 가(歌), 무(舞)가 연행되는 전통예술로 조선왕실 최고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세종이 만들어 아들인 세조가 제례 절차에 맞도록 수정하여 종묘제례악으로 제정했다. 역대 제왕의 문덕과 무공을 찬양하는 보태평 11곡, 정대업 11곡이다. 음악과 함께 의식무용이 수반된다. 줄지어 서서 추는 일무로 가로세로 여덟 줄로 64명의 무용수가 춤을 춘다. 문덕을 찬양하는 문무는 오른손에 꿩의 깃털로 장식한 적과 왼손에는 대나무로 만든 약을 들고 춘다. 무공을 찬양하는 무무는 오른손에 창과 칼을 들고 춤을 춘다. 종묘제례는 음악도 조선시대에는 국가 음악전문 기관인 장악원이 담당하였고, 오늘날에는 국립국악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립국악원은 이번 송연 공연에서 실내 공간의 장점을 살려 양질의 풍부한 음향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야외 공간에서는 감상하기 어려운 섬세한 선율과 음색으로 프롤로그에서는 연주에 미디어를 입혀 몰입감을 높였다. 이날 무대는 일무를 앞쪽에 배치하여 궁중 의식무용을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일무원의 복식은 2005년 종묘의궤 기록을 통한 고증 작업으로, 일무를 추는 동작 등을 고려하여 파란 남주의를 착용하였다. 종묘제례악은 한국 궁중예술의 정수로써 악무와 복식 모든 면에서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은 "종묘제례악은 조선 의례의 정점에 위치하며, 조선왕실 최고의 품격과 위엄을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을 무대화한 콘텐츠로 의미 있는 송년의 시간을 선사해드리고자 합니다”라고 밝혔다. 새해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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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호랑이 나라’ 특별전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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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악 사설 한얼 이종선 특별전', 책으로 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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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 이종선 특별展, "코로나 터널 속 서예계 성과"한글의 상형성을 완성하는 작업으로 나름의 작품세계를 갖고 있는 한얼 이종선의 개인전이 큰 관심 속에서 열렸다. 3년만의 개인전에다 코로나 터널 속에서 이루어진 작품들이란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국악신문 인기 연재 ‘한얼 이종선의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 전은 2020년 09월 20일자 제1회 작품 ‘가곡원류’ 소재 시조 ‘梅影이~’로부터 2021년 11월 24일자 제64회 안민영의 ‘어리고 성긴 가지~’ 까지 64편 중 52편을 선보였다. 오후 4시 개최된 백악미술관 3층 전시실 개전식에 함께한 관객들은 다양한 서체, 다양한 작품 형태, 특히 한자와 한글의 조화미에 격찬을 하였다. 개전식에는 서예계 어르신들이 많이 참석하여 축하하였다. 테이프 커팅에는 소헌 정도준, 규당 조종숙, 우전 맹관영, 이영철 동방대학원대학교 총장이 이종선 작가와 함께했다. 국악계에서는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회장 정은하, 기연수 명예교수, 이무성 화백이 함께했다. 그리고 주최 측인 국악신문사에서는 기미양 대표이사와 김지연 상임이사가 함께 했다. 이종선 작가는 인사말에서 "국악신문 1년 반 동안의 작업은 행운의 기회였다”면서 고통에서 이루어 낸 나름의 성과를 만족해 하였다. 축사는 스승인 소현 정도준 회장, 원로 규당 조종숙 서예가에 이어 우전 맹관영 회장이 성과와 평을 했다. 맹관영 회장은 1980년 방송통폐합 때, TBC동양방송이 깃발을 내리는 순간 ‘뉴스 기상도’ 마지막 뉴스를 울먹이는 목소리로 송출하여 한국방송역사에 획을 그은 주인공이다. 이날은 중학교 때 이경배 작가로부터 서예를 시작한 서예가로, 한국서예문인화원로 총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축사에서 "한얼 이종선 아우의 작품은 보면 볼 수록 끌리는 감칠맛이 특징인데, 이번 작품들에서도 이 맛이 두드러져 감동을 받았다”라고 했다. 주최측 주식회사 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는 "우리 신문 주간 연재의 품격을 높여주신 것에 감사를 드린다”라고 하고, 코로나가 아니라면 전국 순회전시와 해외 동포사회 전시를 하고 싶은 작품들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전시는 일주일간 15일까지 열린다. 작품은 1백만원에서 300만원 정도로 판매된다. 첫날 이미 10여 편이 관객의 품으로 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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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노래를 붓으로 부르다’ 한얼 이종선 書藝展"한글은 상형성象形性에 취약하기 때문에 독자미獨自美의 표출이 어렵다. 당연히 글자와 글자 행과 행의 조화기 필요하다. 글자와 행과 여백의 소통을 통해 전체를 하나로 이끄는 것이 내 작업의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글자의 가독성可讀性을 확보하며, 글감의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조형과 획에서 구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구체화시킨다.” 우리나라 한글 서예계의 중진인 한얼 이종선의 대표 작품 ‘훈민정음 서문’의 자평 일부이다. 한글서예의 특징과 속성을 명료하게 제시한 대목이다. ‘한글서예’의 성립 자체가 한글이 전용되면서 부터이니 그 역사는 아직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 그만큼 작가적인 운용 여지가 많은 분야이다. 이 분야의 주역 중 일인이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했던가. 2년 남짓한 연재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 64편에는 작가만의 작품세계가 반영되어 있다. 주요 서체인 궁체, 민체, 고체와 한문 행초서체와 예서, 호태왕비체의 필의筆意를 더해 자, 행간을 자유롭게 운용하며 균형을 이루는 질량분활법을 잘 드러냈다. 이는 한글에 한자가 섞인 우리 노래 시조·가곡·잡가의 다양한 변격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우직하고 질박한 우리 노래의 속성을 고저장단은 물론 시김새 까지도 표현한 듯하니, 이동식 대기자가 표현했듯 "글씨로 눈으로 우리 선인들의 노래를 들려준~”(본지 11월 28일자) 것이다. 국악신문 2020년 09월 20일자 제1회 작품 ‘가곡원류’ 소재 시조 ‘梅影이~’로부터 2021년 11월 24일자 제64회 안민영의 ‘어리고 성긴 가지~’ 까지 64편 중 52편이 선별, 전시하게 되었다. 서예 전문 화랑인 백악미술관 3층 전시실에서 일주일간 열린다. 작품은 노래로 또는 율창律唱으로 가까이 할 수 있는 대가 열성(列聖)에서 명공석사(名公碩士)는 물론 기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가의 명작이다. 물론 잡가 ‘처세가’ 같은 뛰어난 무명씨의 작품도 있다. 글감은 대체적으로 잘 알려진 가집인 청구영언·가곡원류·남훈태평가·해동가요·교주가곡집 소재 선정작이다. 전시작의 형태도 다양하다. 우연욕서偶然欲書로 좋은 글귀를 만나 불현듯 글씨가 쓰고 싶어 붓을 들었는데 마땅한 종이가 없어 옛 서책의 남는 종이에 쓴 잔지여묵殘紙餘墨도 있어 손바닥 크기에서 2메타 남짓한 크기도 있다. 바탕지도 다양하다. 장지는 물론, 최고급 냉금지, 다양한 문양지, 시전지, 중국산 선면 문양지까지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1953년 경기도 용인 출생이다. 노장적 삶을 살고 있는 성정대로 ‘한얼’과 ‘醉月堂’을 호로 쓰고 있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으로 유농서회惟農書會를 주재하고 있다. 불교방송개국기념비, 고려대학교 100주년기념관비 등의 금석문을 남겼고,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성균관대학교, 한글학회, 김대중기념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언제부터 인지도 모르게 늘 그 모습으로 있어 왔던 자연스러움에 나는 더 애착을 느낀다. 이것이 전통에 바탕을 둔 서예 미학을 기본 조건으로 하여 나의 작품이 진행되는 이유이다.” 작가의 서예에 대한 서론緖論이며 자신만의 작품세계에 대한 서론書論이다. 이에 기반한 작가의 한글궁체와 흘림, 한문 전서와 예서, 국한문 혼서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감상하는 귀한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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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무대 변사 ‘광대 김명곤’김명곤 씨는 독일어 교사, 잡지사 기자, 연극배우, 영화배우, 극단 대표, 시나리오 작가, 성악가, 소리꾼, 국립극장장, 문화부 장관 등의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지만, 노는 ‘광대’로 불리는 걸 좋아한다. 예인 김명곤을 관통하는 것은 전통의 가치이다. 그 자신도 "전통은 모든 예술의 고향”이라고 여긴다. 국악도 그를 형상화하는 주요한 키워드이다. 국악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국악이 그의 삶과 창작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국악의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는 어떤 게 있을 것인지 등을 주제로 대담을 했다. 지난 10월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굿모닝 가곡’은 관객 반응이 뜨거웠다. 가곡만 들려주는 게 아니라 노래에 얽힌 스토리를 극과 영상자료 그리고 해설을 통해 전달했다. 특히 변사의 역할이 화제를 모았다. 변사는 특유의 목소리로 다소 코믹하게 노래에 얽힌 사연을 풀어주는 기능을 함으로써 음성 더빙이 안 되던 20세기 초 무성영화 시절, 극의 전개와 출연자의 대사를 읊어주던 역할을 하였다. 이 변사를 김명곤 씨가 맡아 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모든 무대 요소를 가곡 공연이라는 드라마 속으로 이끌었다. 성공적인 반응에 힘입어 ‘예술의 전당’ 측은 12월 1일부터 이틀간 세 차례 앙코르 공연을 개최한다. Q. 가곡 무대에 변사가 등장하는 건 획기적 발상이군요. A. 네. 관객들의 호응이 컸습니다. ‘변사 쪼(조)’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예요. Q 변사를 맡으시면서 참고한 모델이 있었나요? A. 옛날 연극할 때도 신파극에서 변사를 맡아 했었어요. 전설적인 변사 고설봉 선생이나 최후의 변사 신출 선생을 인터뷰하면서 기법을 배우기도 했죠. 저한테는 굉장히 친숙하고 익숙한 역할입니다. Q. 변사가 해설을 해주면 관객들의 곡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죠. A. 맞아요. 그냥 해설이 아니라 드라마틱하게 언변을 구사해서 사람의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효과를 내죠. 노래의 배경이나 시대적 분위기 그리고 작곡 작사에 얽힌 뒷얘기를 하니까 펑펑 우는 분들도 있더군요. Q. 감정이입이 되는 거죠. 젊은 세대들에게는 변사의 존재가 생소할 텐데 먹혔군요. A. 코미디언들이 과장되게 구사하던 것과 달리 저는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애썼죠. 홍난파의 ‘울 밑에 선 봉선화’를 소개하며 "일제시대 때 우리 민족은 새장에 갇힌 새였다. 앵무새였다.” 이런 시대 상황을 코믹하게만 하지 않고 시 낭송하듯 들려주었죠. ‘동심초’ 같은 서정적인 노래는 그 시가 탄생한 중국 당나라 시대 여류 시인 설도의 시를 들려주고 이것을 김한석이 어떻게 아름다운 노랫말로 옮겼는지를 알려주었죠. 이렇게 하니 관객이 편하게 교감을 하더군요. Q 가곡뿐만 아니라 판소리 가운데서도 몇몇 대목을 변사의 해설에 이어 창을 들려주면 청중 호응이 크지 않을까 싶군요. 오페라로 치면 아리아들만 선곡해서 들려주는 갈라(Gala) 형식이 되는 거죠. A. 재미있을 것 같군요. 시도해봄 직합니다. 보통은 소리꾼들이 몇 마디 해설을 하고선 소리를 하는데 클래식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나 금난새 같은 지휘자가 곡을 소개하고 연주를 들려주면서 이해를 돕듯이, 판소리도 변사가 그 해설 기능을 맡아 할 수 있는 거죠. 관객들은 해설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거든요. Q. 가곡에 이어 판소리 변사로도 나서 보시죠.(웃음) A. 저는 할 수 있죠. 서양 음악, 우리 소리 모두 공부를 했으니까요. 모르는 분야 같으면 나서기 어렵겠지만, 동서양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고 또 제가 노래 부르는 걸 즐겨해서 재미나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Q. 네. 가곡과 판소리 장르의 ‘송해 선생’이 되시면 좋을 것 같군요.(웃음) 90살이 넘도록 하시면서 우리 음악에 대한 대중성도 높여주시고요. A. 네. 저도 그러면 좋겠습니다.(웃음) Q. 국악과 인연을 맺은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대학 2학년 때 고향 전주에서 가까운 김제에 놀러 갔다가 소리 배우는 단발머리 소녀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으셨다고요? A. 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서양음악에 매료돼 있었죠. 클래식, 오페라 아리아, 팝송 따위만 듣고 불렀는데 판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죠. 이렇게 좋은 우리 소리가 있었구나, 그런데 왜 몰랐을까....하고요. 그때 단발머리 소녀들 가운데 하나가 방송작가 김병준 씨 부인인 소리꾼 남궁정애 여사입니다. 그날을 계기로 저의 판소리 사랑이 시작된 거죠. LP판을 사서 듣기 시작한 겁니다. Q. 어떤 곡들이었나요? A. 임방울, 김현수, 박록주 명인들의 단가였어요. 알고 산 게 아니라 그 당시 인기 있던 레코드들을 사서 듣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어요. 가장 좋아했던 곡이 김현수 선생의 ‘사철가’였죠. 20대 초반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늙은 노래가 가슴에 와닿던지... 아마 폐병을 앓았고, 힘들게 객지 생활을 하다 보니 심리적으로 힐링을 받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Q. 그런 판소리들이 인생 전반에 어떻게 투영되었나요? A. 임권택 감독이 저한테 시나리오를 맡긴 1993년 영화 '서편제'에 제가 그 ‘사철가’를 삽입해 불렀죠. '개벽'에는 동학 혁명의 ‘녹두장군’ 전봉준 역을 맡아 칼춤 추며 부르는 노래를 제가 직접 불렀고요. 영화나 연극의 대본을 쓰면서 소리꾼 명인들의 말과 어투를 많이 차용했죠. 예를 들면, 서편제에서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좋은 것이 이 소리 속 판이여, 이놈아!”라고 아들에게 일갈한 대사나, 연극 '격정만리'에서 격동기 연극인의 입을 통해 "황금도 사랑도 명예도 다 싫소. 오로지 나의 소망은 조선 냄새나는 위대한 예술을 하고 싶은 것이외다.”라고 읊조린 대사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Q. 명창 박초월 선생에게 사사했다는 얘길 듣고 많이 놀란 적이 있습니다. A. 대학 4학년 때 종로 단성사 앞을 지나다 ‘박초월 국악전습소’라는 한자 간판을 발견하고선 무턱대고 4층으로 올라갔죠. 그 자리에 박초월 명인과 조상현 선생이 함께 계셨어요. 알고 보니 두 분이 판소리 보존회의 회장과 사무국장을 맡아 하셨더군요. 조 선생이 북을 당기더니 노래를 해보라고 해서 불렀는데 웃음거리가 됐죠. 판소리 곡을 이태리 벨칸토 창법으로 불렀으니 두 분이 보기에 얼마나 웃겼겠어요. 학생들도 웃고. 그렇게 입문을 했는데 그때 제1 조교가 김수연 명창이었고, 제2 조교가 김경숙 명창이었어요. 저는 박초월 선생님이 직접 가르쳐주셨어요. 타향에서 어렵게 산다는 걸 아시고선 거기서 숙식하며 지내라고 배려해주셨죠. 아침에는 밥도 갖다주시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총무 비슷하게 됐어요.(웃음) 그러다 박 선생님이 당신 아이들 가정교사를 맡기셔서 그 댁에 입주하게 되었죠. 불광동이었는데 새벽마다 불광산에 올라 목을 풀고 소리를 지르는 훈련을 했죠. 그렇게 10여 년을 배웠습니다. 박 선생님 덕에 국악계의 명인들을 두루 만나는 행운도 누렸죠. 그분들 인터뷰 기사를 써서 월간 신동아에 연재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 인터뷰를 묶어서 '광대의 꿈'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도 했죠. 그분들을 만난 게 제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되었죠.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김명곤 씨는 이 대목을 이렇게 표현한다. "판소리와의 인연은 마치 누가 미리 연출해놓은 것처럼 내 인생에 파고들었다.” Q. 레퍼토리 가운데 가장 애창하는 곡이 어떤 건가요? A. 홍보가, 수궁가를 배웠는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고고천변’입니다. 거북이가 뭍으로 나와 처음 맞이한 세상 풍경을 노래하는 대목이죠. 박 선생님은 남자들에겐 민요는 안 가르치셨어요. 대체로 민요는 여자 장르의 곡으로 취급했어요. 단가인 ‘사철가’도 제가 즐기는 곡인데, 서편제를 하면서 제가 따로 배운 노래입니다. 김수철 씨가 작곡한 서편제 중 삽입곡 ‘소리길’도 멜로디가 너무 좋아서 제가 가사를 붙여 부르곤 합니다. 김명곤 대표는 "전통은 모든 예술의 고향”이라는 모토를 갖고 있다. 그가 우리 음악에 천착하는 이유이다. Q.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도 한국음악을 살리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죠? A. 네. 뒤돌아보면 우리 음악과 그 음악을 하는 광대를 조선조는 5백 년간 무시하고 홀대했어요. 그래서 국립극장장일 때는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노무현 후보에게 전통예술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문화부 장관이 되면서 국악진흥과를 신설해 독립부서로 두고 한국음악 지원에 나서기도 했죠. 이 국악진흥과는 제가 떠나면서 같이 없어져 버렸어요. 문화재청이나 국립국악원이나 다른 기구들이 대체할 수 있다고 여긴 듯합니다. 저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죠. 그걸로 한류의 세계화를 도모했으니까요. 우리 전통예술 분야는 정치지도자가 의지를 갖고 육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Q. 요즘 국악 하는 젊은이들이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빼어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걸 자주 봅니다. 소리 내는 기본이 탄탄하니 노래를 잘할 수밖에 없죠. 확실히 우리의 자산이라 할 수 있겠죠? A. 네. 동감입니다. 일각에서는 전통이 허물어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들도 있지만, 서양도 클래식과 팝이 서로 퓨전 하며 대중의 취향에 맞추고 있죠. 물론 전통도 지켜가면서요. 어느 게 옳은 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죠.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시도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초석이 된다는 겁니다. 교류하고 소통하며 필요하면 통합도 가능하죠. 서양음악 하는 사람들도 판소리 창법을 연구하고, 한국음악 하는 사람들도 퓨전을 시도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거죠. 음악 장르 전체가 동반 발전하는 겁니다. 경계를 두지 말고 두 음악 세계가 서로 통합하고 융합하도록 협업을 계속 시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서로서로 좀 더 들여다보고 이해해보라고 권하고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올드보이로서 저의 남은 인생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오늘 바쁘신 와중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악의 저변을 넓히는 창의적 예술가로 활동하시는 모습 오래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명곤 대표는 내년 초 ‘예술의 전당’이 기획하는 획기적 가곡 공연 프로그램을 의논해야 한다며 회의실로 향했다. 어떤 형식일지가 궁금했다. 창의적 열정의 소유자인 그가 지휘하는 만큼 기대가 크다. ‘꽃을 밟고 지나간 말의 발굽에서 향기가 날(踏花歸路馬體香)’때 그는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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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시를 맞아 서예가 이종선을 만나다시조 시인으로 알려진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선생은 부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 분천으로 내려와 어부가를 시조 형식으로 만들어 퇴계 이황과 그 형 온계 이해를 배 위로 불러서 관객으로 하고는 노래로 불렀다. 아쉽게도 그 노랫가락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 노랫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로 고쳐 만들어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부르고 즐겼던 시조나 가곡을 직접 들을 수 없는 현대에 이 노래들을 붓으로 들려주는 서예가가 있다. 한국서학회 이사장을 지낸 중진 서예가 이종선(67) 씨다. 이종선 씨는 국악신문에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 사설’을 2년 이상 발표하며 글씨로 눈으로 우리 선인들의 노래를 들려주어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22일 전시회를 준비하는 이종선 서예가를 이동식 국악신문 대기자가 천도교 수운회관에 있는 서실에서 만났다. Q. 전시회를 하신다고요? A. 네. 지난해부터 음악이 담긴 우리 말, 시조, 한시 등 사설을 한글로 써서 국악신문에 발표해왔는데요, 그동안의 작업을 돌이켜보면서 이런 작품을 오프라인으로 시민들도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12월 9일에 인사동의 서예 전문 화랑인 백악미술관에서 한 열흘 엽니다. Q.그동안 신문에 쭉 올려주시는 서예 작품들은 아주 보기에 편하고 다양하고 또 정말로 노래를 읽어서 듣는 듯한 흥취를 느낍니다. 그런 것들이 한글로 써서 그런 것이겠지요? A. 우리 조상들은 생활에서의 생각, 사상, 감회 이런 것들을 시조나 시로 만들어 발표해왔고 또 노랫말로도 전하고 있는데, 우리말로 된 이런 것은 굳이 한문으로 표현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다 보니 한글서예로 표현하는 게 본래의 언어의 특성과도 맞아서 편하게 느껴지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Q.선생님은 그동안 한글서예 운동을 주도하셨지요? A. 서예의 뿌리는 한자이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고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이니 서예도 우리 나름대로 추구해야 할 길이 있는데, 한자서예는 중국인들이 개척한 서예 세계를 자칫 그대로 따라가는데 그칠 우려가 있습니다. 서예라는 것이 그 나라 사람들의 말을 글씨로 담아내는 것이라면 우리 한국인들은 우리 글인 한글로 쓰는 것이 맞고 그것이 예술로 승화되면 더없이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한글서예는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1425년에 세종 대왕께서 한글을 만들어 반포하셨지만,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다 한문을 쓰고 궁 안에서나 일상 서민들 생활의 보조 수단으로 한글이 사용되었기에 문자 조형, 곧 서예로서의 한글은 사실 근세 이후에 한글이 전용되면서 개발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역사는 아직 백 년 정도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이를 확대 개발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지요. Q. 그런가요? 한글서예가 한자처럼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A. 그렇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의 한 장르로 대중에 등장한 것이 1920년대 초로, 윤백영이란 여성이 궁녀들이 쓰던 글씨체인 궁체를 처음으로 전시작품으로 출품을 했고, 그 무렵부터 여러분들이 궁체로 한글서예를 태동시켰습니다만 1940년대 초에 이르러 일중 김충현 씨가 지금 우리들이 많이 쓰는 정자체의 한글서예, 거기다가 훈민정음 판본에서 따온 고체까지를 발표함으로써 한글서예의 시대가 본격화되었지요. 그 뒤 남궁억, 장지연, 이철경 등 문인들에 의해 그 세계가 넓어졌는데 다만 그것이 엄격한 틀에 갇혀 있던 편이었다가 최근 20년 이래에 한글서예도 조형미를 새롭게 추구하는 현대 서예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Q. 그런데 서예 작품들을 보면 순수 한글만이 아니라 한문과 혼용해 쓴 경우도 있던데... A. 사실 우리가 한글날을 맞으면 꼭 나오는 것이 한글전용이라는 말인데요, 아시다시피 우리의 말에는 상당히 많은 한자어가 들어가 있고 그것들은 한글로만 표기하면은 뜻이 명확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서예라는 것도 어차피 종이 위에 글자를 쓰는 것이기에 그 뜻을 명확히 해야만 정신과 예술성이 높아지는 것이기에 한글로 쓰지만 필요한 경우엔 한자를 써서 그 뜻을 보다 명확히 하는 작업입니다. Q.한국서학회 이사장을 역임하셨지요? 그때 문경에서 아리랑 노랫말을 모아서 한글서예로 표현한 큰일을 하셨는데.... A. 제가 한국서학회 이사장으로 있을 때 마침 문경시가 전국의 우리 아리랑 가락과 사설을 모으자는 운동을 시작해 저희가 문경시와 MOU를 맺고 2년 동안 갖은 애를 써서 아리랑 가사들을 거의 망라해서 서예로 담아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붓으로 부른 아리랑이라고 합니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 120여 회원들이 각기 10점에서 30점까지, 1만 수를 자신의 필체와 필법, 철학으로 썼기에 그 아리랑 서예를 통해서 노래로만 있던 아리랑이 유형의 시각예술로 태어났고요, 이 작업으로 우리나라 현대 한글서예의 다양한 표현 세계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집약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더구나 이 작업을 하면서 문경에서 만들어진 전통 한지를 썼는데, 이게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순수 천연재료만으로 만들었기에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한지 중에 가장 좋더라고요. 비단은 오백 년이고 종이는 천년을 간다는데, 이번에 한지장 김삼식 씨가 만든 전통 한지들로 쓴 아리랑 작품들은 정말로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문경시에서 한 아리랑 서예 작품화는 아리랑 가사와 사설을 처음 모은 것도 그렇지만, 한글서예의 발전을 위해서도 큰 획을 긋는 작업이었습니다. Q.그런데 한국서학회는 외국에서도 한글 서예전을 열었다고 들었습니다. 한글서예가 외국인들에게는 어떻게 비쳤는지가 궁금합니다. A. 저희는 이 한글서예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행사를 했습니다. 2019년에 몽골에서 초대전을 크게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작가 5명, 몽골인 작가 8명도 함께 한글서예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한글을 아는 분들이라면 한글서예도 당연히 관심이 있고 또 새로운 예술표현에 대한 탐구심도 있습니다. 전에 중국 절강성 소흥에 있는 월수(越秀)외국어대학에서 한글날을 맞춰 한극과 서예 강좌를 하였고 한글서예 전시회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도 한국서학회 주최로 한글 서예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Q.그런데 한자가 뜻글자인 데 비해 한글은 소리글자라서 서예의 조형성이나 예술성 측면에서는 비교하기가 어려운 것 아닌가요? A. 서예를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해서 이름이 다르고요, 사실 중국 서예인들이야 한자를 쓰는데. 일본 서예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표음문자인 가나가 있으니 그것으로도 자신들의 글을 많이 쓰지요. 어찌 보면 한자만의 서예를 그들의 상황에 맞게 조형적으로 확대 개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글은 죽은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글자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자는 네모라는 틀에 맞추어 쓰고 있기에 가로세로 일정한 크기에 맞춰 쓰고, 그 영향으로 우리 한글도 가지런하게 흐트러지지 않게 쓰는 것을 많이 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틀을 부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한자(漢字)이건 한글이건 한 자 한 자의 크기도 뜻에 따라 차이가 있고 문장에서의 의미전달의 중요성에 따라 크기나 필법이 꼭 갇혀 있지 않습니다. 내려긋는 선도 말하자면 꼭 꼬리를 가늘게 빼는 기법을 벗어나서 편하게 마감하지요. 그렇게 하니 우리 한글서예 작품이, 물론 그 안에 한자를 겸용하기도 하지만, 훨씬 우리들에게 친근하고 격조 있게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Q.한자나 한문을 모르는 세대들이 많아지면서 서예도 큰 전환점을 맞고 있는 것 같은데요? A. 서예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운생동(氣韻生動)’입니다. 예술의 표현대상이 갖고 있는 생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인데, 거기에는 또 글 자체의 인격이랄까 품격에다가 서예가의 인품도 담아내는 예술입니다. 중국 송나라 때 약허(若虛) 곽사(郭思)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지요. "인품이 높으면 기운이 높지 않을 수 없고 기운이 높으면 생동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높은 인품을 담아 한자와 한글이 같이 쓰이면 그 효과가 더 좋아질 것입니다. 더구나 한국인들에게 서예는 한글이 들어감으로써 우리 서예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컴퓨터로 깨끗하고 정제된 글씨체를 모두 재현함으로써 컴퓨터 키보드가 붓을 대신하는 세상에 글씨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A. 사실 서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골문, 고문, 금문, 전서 등은 한문을 모르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최근 서예 인구는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장년과 노령인구가 많아지고 또 지역사회에서 취미 개발을 위해 각종 강좌가 많아지면서 서예를 배우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서 서예인들로서는 이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매화나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고 곧게 뻗어 오르는 대나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홀로 심산유곡에서 잔잔하고 맑은 향기를 발산하는 난초처럼 서예에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려는 선인들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기에 서예야말로 첨단 전자 문명에 찌드는 우리들의 심성(心性)과 덕성(德性)을 개발해 능히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문제는 교육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인 초등학교에서 서예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가 담겨 있고 인격 수양을 하는 중요한 과정인 서예를 가르치지 않으니 최근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도 어려서 서예를 가르치지 않은 때문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서예는 다른 예술 장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신적인 수양 수단이기에 전인교육을 위해서도 초등학교에서 어느 정도는 서예를 배우도록 하는 것을 저희 서예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Q.‘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이 있지요? 글씨가 곧 그 사람이란 말인데, 이 선생님 취월당(醉月堂)이란 호가 재미있어 보입니다. 어떤 연유가 있습니까? A. 부끄러운 얘기지만 제가 젊었을 때 술을 자주 했는데, 제 스승인 능허(凌虛) 스님이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라는 글에 나오듯이 술에 취하지 말고 달에 취하라는 뜻으로 호를 주셔서 감사하게 쓰고 있습니다. Q.12월 9일이지요? 그런 작업들이 이번 전시회에 나온다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A. 네. 시간 되시면 인사동에 나오셔서 백악미술관을 찾아주셔서 우리 한글서예가 어떻게 발전했고 어디로 갈 것인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생님,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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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자의 객석에서] ‘연리지’요 ‘비익조’, 두 제자의 몸 한 목소리서천으로부터 망향의 아픔이 담긴 구슬프고 해맑은 소리가 들린다. 서도소리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힘겹게 살다간 오복녀 선생의 소리이다. 북녘에 고향을 두고 낯선 땅에서 서도소리의 꽃을 피운 오복녀 선생을 회상하며 두 제자 김광숙, 유지숙 명창이 마음을 모았다.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대금 소리에 오른 오복녀 선생의 환한 모습, 이어 추모시 ‘서천으로 날아간 기러기 명창’이 자막으로 흘렀다. 고요함 속에 관객들의 시선은 멈췄다. "가을하늘 높이 날던 기러기 자매 보일 듯 잡힐 듯 휴전선 넘어 가슴에 봉숭아 물 못내 그리운 고향마을 궁초댕기 그 시절 사연~” 네 마디의 유려한 시문이 마지막으로 흐를 때 제자 김광숙 명창이 등장한다. 차분하고 운율이 살아있는 명확한 음성이다. "청매화 피던 날 홀연히 가신 서도소리 어머니 겨레의 명창” 절절함과 자랑스러움을 담아냈다. 그리고 ‘관산융마’가 헌가(獻歌)로 올려졌다. 이에 무대 우측으로 16살의 어린 복녀가 화답이라도 하듯 ‘공명가’가 등장하였다. 제자 유지숙 명창이 수심가를 올렸다. 뛰어난 표현력과 애조 띤 음색을 선생은 반갑게 반겼을 것이다. 관객들도 고운 자태와 절제미를 가슴에 담았다. 오늘과 미래의 서도소리 주인공들인 ‘제자의 제자’들이 대거 출연하여 오뉴월 들풀 간은 풍성함을 보였다. 여기에 서도소리를 떠받치는 이춘목과 한명순 명창도 함께하여 무대를 빛냈으니 크게 흡족해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크게 흡족해하셨을 것이 또 있었다. 제자 ‘김광숙과 유지숙’, ‘유지숙과 김광숙’이 한목소리로 같은 스승에 대해 회고하는 모습이다. ‘둘이며 하나’인 두 제자는 한목소리로 이번 공연조차도 스승님이 베푼 자리가 아니냐며 은혜에 답했다. 그리고 스승님이 소리를 연마하기 위해 무용, 가곡, 일본 노래까지 배우는 입문 시절의 열의를 회고하고, 스승님이 주신 비취반지를 불러내 변치 않는 빛을 확인시켰다. 이는 두 제자가 처음의 시절로 돌아가 안기며 그때를 안고 살겠다는 절절한 제자의 흠모를 표한 것이다. 같은 스승에서 나온 같은 제자임을 확인하였다. 아니 스승님에게 확인시켜준 것이리라. 하늘에서 얼마나 흡족해하셨을까. 비유로 부연하면 이는 두 제자가 한 선생의 유업 계승을 위하여 한 몸의 목소리를 낸 것이니 연리지(連理枝)요 비익조(比翼鳥)의 애틋한 형상이 아니겠는가.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에 다시 전승케 하라는 유업을 실천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게 예술적 성취를 이루기 위해 한 몸이 되고, 서로 더하는 이번의 모습이 그렇기 때문이다. 지금, 서천에서 초겨울의 신산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새로운 계절을 맞으라는 천기이다. *취재 후기 다음은 주최 측이 보내온 두 분에 대한 자체 인터뷰 자료이다. #김광숙 선생님 "오직 서도소리의 보존과 전승을 위해 일평생을 바치셨던 선생님의 뜻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으며, 생전 아낌없는 사랑으로 소리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이 더욱 그리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공연을 통해 앞으로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더욱 올곧게 서도소리를 전승하고, 전통 서도소리의 원형에 기반한 동시대성을 추구하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서도소리를 더욱 확장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마지막 소원이었던 북녘땅에 서도소리가 다시 울려 퍼질 그날을 기다리며, 선생님의 그 애절하고 간절한 바람을 꼭 이루어드릴 수 있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유지숙 선생님 "추모 공연을 준비하며 선생님께서 그토록 간절하게 서도소리를 지키며 전승하시려 했던 바람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철이 좀 더 있었더라면 든든하게 힘이 되어드렸을 텐데~. 선생님의 큰 울타리가 좋아 마냥 철없던 시절이 후회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선생님의 제자들이 모두 모여 한마음으로 따뜻하게 기리며 한 자손임을 다시 알게 한 것은 너무나 소중한 행사였습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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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마을에 “아리랑꽃을 피웠습니다”13일 토요일 오후 3시, 초겨울의 청명한 날씨에 하숙마을 한옥에서 아리랑꽃이 피었다. 어린이 6명과 회원 30여명, 그리고 장고춤 여성 3인의 단촐한 출연이었지만 무대는 화려했다. 첫 무대는 남은혜 명창, ‘숙세가’와 ‘은개골아리랑’으로 꾸몄다. 환호와 큰 박수가 있었다. 지난 달 29~30일 러시아 카잔지역 초중고 교사 대상 ‘마스터클라스 세미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 민요의 맛을 알린 공로에 대한 감사의 박수였다. 이어진 화려하고 신선한 무대는 어린이 6명이 꾸몄다. 본조아리랑과 늴리리야를 불렀다. 서민호 박고은 오하연 박세아 장다은 김나림 지유리 강소율 어린이들이 꾸민 무대로 이름과 모습에서 향기를 발했다. 관객들은 첫눈을 맞이하듯 반겨주었다. ‘국악의 미래’ 출현을 축하해 준 것이다. 윤명숙 허경자 김옥빈 최규필이 꾸민 여성 ‘장고춤’은 이색적인 무대였다. 남성적인 ‘북춤’과 대비되는 여성 춤의 고아한 맛을 잘 전달해 주었다. 30여명의 회원들의 네 번에 걸친 무대는 흥겨운 경기민요로 꾸몄다. 군밤타령, 방아타령, 태평가, 청춘가, 양산도, 신고산타령, 뱃노래, 경복궁타령으로 흥을 돋워 주었다. 남성회원들은 지게 작대기 장단으로, 여성회원들은 채질과 물래잦기로 옛 정취를 자아내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 무대는 전 출연자 대합창 본조아리랑으로 맺었다. 아쉬운듯한 90분 공연이었다. 특히 어린이들의 출연은 여운을 주는 무대였다. 무대도, 출연자도 한옥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어우러진 무대, ‘아리랑으로 꽃을 피운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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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거장 박범훈·김덕수 선생의 국악 세계화 정신김중현(음악인류학 박사/중대 예술대학 겸임교수) 젊은 음악인, 거장의 업적을 통해 K-뮤직 세계화의 정신 전수 지난 10월 30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는 새로운 음악의 길을 열어가고자 하는 젊은 음악인들로 구성된 3기 '한음아카데미오케스트라'의 무대 '2021 국악관현악 축제'공연이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연주자들과 한국음악 거장 박범훈 지휘자를 비롯해서 KBS 국악관현악단의 원영석 지휘자, 불교음악원 박천지 지휘자와 사물놀이 창시자 김덕수 명인, 전영랑 명창 등이 한 무대에서 국악관현악 공연을 펼쳤다. 젊은 음악인은 국악 연주 기량을 높이고, 거장의 업적을 통해 K-뮤직 세계화의 정신을 이어받을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음악 세계화의 거장과 함께 연주를 경험한 단원들은 앞으로 각자의 재능과 악기를 가지고 국악을 넘어 K-뮤직으로 세계 무대를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국악관현악(박범훈)과 사물놀이(김덕수)로 한국음악 세계화의 초석 20세기 단연 돋보이는 한국음악 장르는 국악관현악(박범훈)과 사물놀이(김덕수)이다. 국악관현악과 사물놀이는 우리의 우수한 전통예술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도록 편성하여 세계로 나갔다. 국악관현악 작곡가이자 지휘자 박범훈 선생은 80년대 초 대학을 졸업한 제자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최초로 민간 국악관현악단인 <중앙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였다. 중앙국악관현악단은 국악을 넘어 한국음악으로서의 대중화를 꿈꾸며 우리 귀에 익숙한 민요, 판소리, 대중가요를 국악관현악으로 재미있게 만들어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중앙국악관현악단>은 대중화를 위한 노력과 함께 90년대 초에는 일본, 중국 등 전통악기로 구성한 민족 오케스트라들과 교류를 통해 세계화를 위한 공연을 추진하였다. 그 성과에 힘입어 박범훈 선생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을 탄생시켰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악기 개량과 음정의 표준화 등을 시도하며, 중국·일본 음악인과 전통악기 합주를 통해 한국음악의 국제 교류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를 기반으로 박범훈 선생은 한국음악의 세계화 노력과 열정으로 한·중·일 오케스트라 아시아를 창단하였으며, 한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이 만나서 다양한 공연을 펼쳤다. 2000년대에는 동남아시아 10개국과 함께 '한·아세안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국악관현악의 세계화를 위한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사물놀이는 창시자 김덕수 명인의 노력으로 국제 이벤트 공연, 다양한 장르와 크로스오버를 하고 세계 각국의 연주자들과 콜라보를 하였다. 적극적으로 해외 워크숍, 교육, 경연대회, 음반 발매, 사물놀이 의상, 악기 제작의 표준화, 미디어를 활용해 한국음악의 세계화를 추진해왔다. 기업의 예술 후원과 상생을 위한 사회공헌 프로젝트 지속 '한음아카데미오케스트라' 2021 국악관현악 축제 프로젝트는 '(주)크라운 해태'(윤영달 회장)의 관심과 애정으로 성장 중이다. 크라운 해태는 우리나라 전통음악과 한국음악 발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크라운 해태는 과자 제조할 때 우리 음악을 틀어 발효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취지의 ‘국악발효공법’을 마케팅으로 고안할 만큼 기업의 예술 사랑은 한국음악 발전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2년간 멈추었던 예술 교류는 다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의 한류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 가고 있다. 한국어와 태권도가 각국의 공교육과 수련 시설을 통해 지속해서 보급이 확대되고 있다. 한국음악이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하는 학교(43개국 1,800개교)와 세계 각국에 있는 태권도 수련 시설과 연계 프로그램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리고 세계 난민촌 지원사업 연계(130개국 507개소 2,040만)에 한국음악으로 난민 청소년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다. 정부와 기업이 진정한 한류의 세계화를 위해 국악관현악과 사물놀이를 활용한다면 새로운 K-뮤직 한류 붐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외교부, 교과부, 문체부, 후원 기업과 연계한 한국음악 세계화 추진 한국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전통음악이 한류의 붐을 타고 소중한 예술 창작의 소재로 그 가치와 진가를 발휘할 때가 왔다. 내년은 한·중 수교 30주년, 한·베트남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국악관현악은 수교를 기점으로 국가 간에 상호 교류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동안 수많은 연주자와 예술인들이 상호 교류를 이어왔다. 국악관현악과 사물놀이는 다양한 교류의 역사와 성과가 있기에 정부와 기업의 교류 행사에도 중요한 역할과 소재가 될 것이다. 외교통상부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교과부의 한국교육원, 문체부의 한국문화원 등과 연계한다면 다양한 아이디어로 한국음악을 세계화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한국음악은 각국의 예술문화와 어우러져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기여하고, 대한민국이 K-뮤직으로 인류 문화의 지속 가능한 성장,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필자의 공연리뷰는 비정기적으로 집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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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헌 한국한복협회 회장미국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면서 세계적으로 한국을 알리고 있는 보이 그룹 BTS가 도포를 입고 춤을 추는 사진을 보고선 미소를 지은 적이 있다. 속으로 "그래 이거야!”라고 외쳤던 기억이다. 긴 도포의 선이 BTS의 춤 선과 잘 어우러지면서 한복의 매력을 물씬 풍겼던 까닭이었다. 기자의 생각에 사물은 선이 고와야 예쁜 법이다. 옷과 춤이 서로의 곡선미를 위해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었다. 한복과 젊은 세대 간의 접점을 발견한 것 같아 흥분됐다.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에 이런 차림의 젊은이가 나타난다면 단박에 그 세대들 사이에서 인기몰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됐다. 작금의 한복은 우리 전통문화의 한 축임이 분명한데도 갈수록 존재감이 떨어지고 있다. 단순한 옷 차원을 넘어 우리의 정신이 오롯이 담긴 한복의 의미를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한국음악과 한복은 어떻게 상생할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갖고 2005년부터 한국한복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백설헌 선생을 만났다. (2021년 10월 12일 오후 2시 청담동 설헌 빌딩) Q. 16년 동안 한복협회 회장을 맡아 하시면서 한복의 발전을 위해 공을 많이 들이셨죠? A. 380여 회원들 간에 소통 기회를 마련한 것이 가장 큰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한복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최고라는 자부심 때문에 다른 집에도 안 가고 자기 집에 초대하지도 않았어요. 서로 상대의 작품을 보도록 기회를 만든 거죠. 서울과 지방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와 기능인들에게 교차 방문의 시간을 마련해줌으로써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배울 수 있도록 한 거죠. 한복의 소재, 색감, 문양, 디자인, 트렌드 그리고 마케팅 등에 관한 지식을 공유한 거죠. 그 덕에 식견이 다들 넓어졌어요. 색상도 파스텔 톤의 높낮이 조정과 원색의 임팩트(impact)화를, 염색 방면도 쪽이라는 식물을 발효시켜서 황산구리를 섞으면 진한 색을 얻을 수 있듯이 매염제에 따라 여러 색을 낼 수 있다는 지식도 알려주고, 롤 플레이(role play)도 했어요. 디자이너와 고객으로 나눠 역할 분담을 시킨 거죠. 그렇게 해서 상담차 들른 손님들에게 다양한 소재들로 상하와 고름, 깃, 노리개 등을 종류별, 색상별로 구성해 보여주면서 매력을 느끼도록 끌어내는 노하우를 가르쳤지요. 얼굴에 맞는 디자인, 겉감과 안감의 배색, 목 길이에 따른 동정의 폭 조정, 눈동자나 피부색에 맞는 색상 조정에 대한 감각 등 한두 가지가 아니었죠. Q. 한복 보급률도 낮고 인식도 낮은 게 우리 한복 문화 현실인 것 같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A. 네 확실히 한복이 복식 문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한복을 제대로 입을 줄 모르죠. 속치마를 앞에 입어야 하는데 뒤로 원피스처럼 입기도 하죠. 불편해하구요. 학교에서 교양 수업으로 한복 제대로 입는 법을 가르치면 좋겠어요. 생활 속에 파고들지도 못하고 있어요. 인생의 어떤 기념할 만한 날에는 한복을 입는 게 당연한 불문율처럼 조성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학교 교육서부터 방송에 이르기까지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죠. 돌이나 입학식, 졸업식, 성인식, 결혼식, 결혼기념식, 잔치, 은퇴 기념식 등등의 날에 한복을 입는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좋겠어요. 결혼식 때도 혼주나 신랑 신부 외에 가까운 하객들도 축하의 마음을 담아 우아하고 품격 있는 복식으로 성의를 보이는 그런 문화가 있으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일본 여성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만 해도 5벌의 기모노를 맞춰 입는다고 하지 않아요? 부모들이 애들 잘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러 갈 때도 반드시 전통 의상을 입혀서 데리고 간다잖아요. 전통문화가 스며 있는 옷을 입는다는 형식 절차가 인생의 한 매듭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진지한 각오를 다지도록 역할하는 거죠. 우리는 성인식 때도 안 입죠. 우리도 한복에 대한 이해나 애정이 그 정도 되면 좋겠어요. 한옥 마을에, 한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보여주는 학습관을 세우면, 한복에 대한 인식 함양이나 홍보에 얼마나 효과가 커지겠어요? 그런 노력이 범국민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Q. 사업상 파티나 동호인 모임, 손님 초대 때 드레스 코드(dress code)를 한복으로 삼는 것도 좋겠군요. A. 너무 좋죠. 한복 드레스 코드가 어려운 게 아니라 흔한 회색 계열에 하얀 스카프 하나 두른 홈웨어(home-wear) 같은 한복도 얼마든지 멋있을 수 있거든요. 입기 편하면서 멋을 낼 수 있도록 얼마든지 ‘디자인 한복’이 가능해요. Q. 한복의 디자인은 진화를 거듭해왔는데 어떤 메커니즘을 거쳤는지요? A. 궁중 의궤나 출토 복식 등에서 영감을 얻는 식이지요. 그런데 옛 복식은 굉장히 단순해요. 색상도 청, 홍, 녹, 황 등 몇 가지 안되고요. 거기에 바리에이션(variation)을 줘야죠. 원형에서 영감을 받아 그 위에 디자이너의 창의력이 가미되는 메커니즘을 거쳐 작품이 탄생합니다. Q 20세기 초 개화기 복식이 오랫동안 지배하다 현대에 들어 조선 초기나 중기의 스타일이 발굴됐죠? A. 네. 그래서 대학의 연구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잘 몰라요. 궁중에서 입은 당의(唐衣)에는 짧은 저고리가 없어요. 남자들도 바지저고리 위에 꼭 두루마기를 걸쳤죠. 상복에 관한 논문을 쓰며 궁중에서 입던 흰색의 무명 상복과 하얀 족두리 등의 당의가 일반에서는 혼례식 때 쓰인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죠. 계층별로도 복식이 다 달랐어요. 상민, 사대부, 기녀, 궁중 나인, 상궁, 왕족, 임금이 입던 복식이 다 따로 있었어요. 계절마다도 달라지고요. 기녀들이 디자이너 노릇을 하며 패션을 선도하기도 했죠. 가슴을 졸라매고 허리띠를 하고 치마를 풍성하게 만들었어요. 대학의 연구가 없으면 복식 문화가 뒤죽박죽이 돼버릴 겁니다. 이런 걸 알고 나서 디자인을 해야 제대로죠. 당의에 바탕하면 파티복 아니라 골프복도 만들 수 있어요. 꽃도 장식하고. Q. 대학의 관련 학과가 그런 점에서 큰 역할을 해왔군요. 그런데 연구나 발굴과 달리 디자인은 또 다른 영역인데 대학에서 한복의 디자인을 창의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A. 네. 한복의 디자인은 거의 도제 형식으로 전승되는 게 바람직하죠. 실제로도 그럴 수밖에 없고요. 그런데 저도 많이 받아봤지만,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얼마 못 견디고 떠나버려요. 그들은 바느질을 배우고 싶어 할 뿐, 디자인에는 관심이 없어요. Q. 예술을 배우려는 게 아니라 기능을 배우려는 거군요. A. 네. 저희도 바느질을 배워서 직접 하지만, 중요한 것은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창의력인데 문화를 계승하는 정신보다 손 기능을 더 배우고 싶어 하는 게 현실입니다. Q 오늘날 한복집들의 현주소겠군요? A. 네. 한때 동대문에 그런 한복 만드는 사람들이 4천여 명이 있을 정도였어요. 한복을 착용하면 궁궐 입장에 무료 혜택을 주는 게 그런 장사 마인드에서 비롯된 거죠. 그 결과 청바지 위에 한복을 덧입는 현상을 보이면서 한복의 우아한 멋이 실추됐다고 봅니다. Q 한복을 우리 정신문화의 한 축이라고 볼 때, 복식 디자인 능력을 함양하는 게 절실하겠군요? A. 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가죽 제품 제작을 가르치는 학교, ‘Leather School’을 보면서 부러워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어요. 그곳에서는 구두서부터 옷까지 가죽으로 만드는 법을 교육하고 있더군요. 어떻게 착용해야 멋을 내는지도 가르치고. 우리도 옷을 짓고 입는 법을 가르치는 한복 학교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Q. 직접 학교를 세워서 후진을 양성하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A. 한복 제작의 선배로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은 꼭 필요하고 가슴 설레는 일이죠. 앞으로의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Q. 한복 디자이너 브랜드는 몇 개나 되는지요? A. 글쎄요. 열 개나 될까요? Q 나머지는 모두 상인들 수준이군요. A.네. 그렇죠. Q 한복 디자이너들은 ‘한복장(韓服匠)’ 같은 명예 수여가 없나요? A. 바느질 분야에 바느질장은 있지만, 디자인에는 없어요. Q. 기능장들에게만 주는군요. A. 네. 한복의 복식이 전승되는 게 정신문화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의미가 크지만, 디자이너들을 위한 명예는 마련이 안 돼 있어요. Q. 유기장, 한지장(韓紙匠) 등은 있잖아요? ‘한복 장인’이 없으라는 법은 없어 보이는데요? A. 그러면 정말 좋겠지만, 현실 정책은 그런 이상적 상황을 추구하지 못하지요. 안타까움이 드는 대목입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동대문 시장이라는 터전이 없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4만 명의 종사자들이 한복에 기대 밥을 먹고 있는 현실이 있어서 정책화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일 거예요. Q. 기능인들이 만드는 게 상품이라면, 디자이너들이 만드는 건 작품 아닌가요? 일반인들을 위한 한복은 기능인들에게 맡기고, 디자이너들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만들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국내외의 영향력 높은 유명 인사들에게 한복을 입혀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하는 역할을 브랜드 디자이너들이 맡을 수 있도록 거시적 관점에서 정부가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A. 네. 정말 최고의 생각입니다. (웃음) 왕년의 오드리 헵번이나 그레이스 켈리, 알랭 들롱, 요즈음의 안젤리나 졸리나 이자벨 아자니, 브래드 피트가 디자이너 브랜드의 한복을 입었다면, 전 세계에 보도되면서 한복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을 거라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시각 효과는 힘이 세다. 언젠가 일본 아키타에서 수양벚꽃이 핑크색을 발하며 늘어져 있고, 검은색 담장이 쭉 이어진 길을 붉은 기모노에 빨간 양산을 받쳐 든 일본 여인이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서울에서도 봄날에 키 작은 매화를 배경으로 퓨전 한복을 입고 선 모델 한혜진 씨의 사진이 한복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한껏 풍기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런 효과를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작품으로 창출해줘야 한다. 그럴 수 있도록 정부가 복식 장인으로 대접해줘야 하지 않을까. Q.공급 측면에서 우리 한복업계에 절실하게 개선이 요구되는 분야가 있을까요? A. 네. 저는 소재 면에서 개혁이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복 하면 실크죠. 합섬 실크나 물 실크 모두 실크 계열 일색이에요. 겨울에는 양단을 쓰죠. 여름에는 모시나 삼베가 있는데 이 소재들 모두가 다 손질이 어려워요. 그런 소재서 탈피해 면(綿)을 써보자는 거죠. 만들기도 쉽고, 입기에도 편하고, 세탁하기에도 좋아서 생활 한복을 정착시키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되거든요. 외국 면들 가운데는 꽃무늬도 들어 있고 누비는 퀼트(quilt)도 있어요. 익숙한 소재라서 외국인들에게도 호응을 얻어낼 수 있을 거구요. 면에 프린트가 가능하기 때문에 한국적 문양도 넣을 수 있고, 디자인하기에도 좋고, 서양식 옷들과 매칭 하기에도 좋고, 장점이 많을 걸로 판단됩니다. 대기업들이 장삿속으로 마구 대량 생산해내던 개량 한복이 아닌 디자인 한복을 만드는 거죠. 수요만 확보되면 정말 만들고 싶어요. 생뚱맞다고들얘기할 수도 있지만, 생뚱맞다는 자체가 창작이잖아요? 혁신이 될 수 있는 거죠. 면 업체들도 성장할 수 있고요. Q. 네. 좋은 시도가 될 것 같군요. 젊은이들에게도 어필할 것 같아요. 한복이 젊은 세대들에게도 받아들여지려면 불편하다는 느낌을 탈피해야 하고, 디자인 면에서도 서구 것과 퓨전이 가능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상하의를 다른 문화로 입거나, 한복에 바카라나 스와로브스키 같은 크리스털을 장신구 엘리먼트로 달 수도 있겠죠. 퓨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 BTS가 바지 위에 도포를 걸쳐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선 2000년을 전후해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한복 사이의 접점을 찾은 듯해서 기뻤던 기억이 있습니다. 청담동에 그런 차림의 젊은이가 상체를 노출하고 도포를 걸친 채이거나, 양복을 입은 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나타나도 눈길을 끌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A. 네. 동감입니다. 퓨전과 크로스오버가 한복의 트렌드 요소가 돼야 한다는 데 공감합니다. 그런 접점을 찾는 데 필요한 부분이 ‘한복의 면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면으로 만든 한복이 그런 트렌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Q. 대학에서 한복 디자인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나 도제식 한복 제작을 이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참가자로 삼아서 한복 제작 콘테스트를 가져보면 어떨까요? A. 몇몇 대학에서 실시한 바 있고, KOEX에서도 콘테스트를 연 적이 있습니다. Q. 아니, 제 말씀은 기존의 한복 제작 방식을 답습하라는 것이 아니고, 트렌디한 주제를 던져주자는 거죠. 예를 들어 ‘2021년 가을 청담동을 걷는 젊은이가 선보여서 주의를 환기하고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널리 전파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들어보라’는 구체적인 주문을 하는 거죠. 그 과정을 국악 TV나 국악신문이 방송하고 보도하면서 분위기를 띄우면, 한복에 대한 젊은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A.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큰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저희 한복협회가 주관해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국악신문과 국악방송이 좀 힘써주시면 좋겠네요. (웃음) Q.한국음악과 한복은 어떻게 상생을 도모할 수 있을까요? A.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돼 있습니다. 한국음악을 양복을 입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한국음악 공연자들 덕에 한복이 수요를 지탱하고 있죠. 요즈음 한국음악 오디션도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던데 참가자들의 공연 점수 외에 한복 맵시도 가산점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공연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복식도 공연 문화의 일부가 돼야 한다고 보거든요. 기자는 어느 해 가을에 북촌의 고색창연한 조선집에서 고운 한복을 입은 여성이 부르는 정가(正歌)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청아한 목소리만큼이나 그 여성의 치마저고리 역시 전통음악을 대변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확실히 형식이 내용을 지배할 때도 있는 듯싶었다. 한국음악은 소리로 시작해 복식으로 완성되는 형식미를 가질 법하다는 생각을 했다. Q. 교육대학을 나와 10년간 교직에 있다가 늦은 나이에 한복 디자이너의 길을 밟으셨어요. 성대 한복학과에서 공부해서 한복 디자인 정규 교육을 받은 1호 디자이너가 되셨죠? 사명감이 남다를 거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의 계획도 남다를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A. 오늘 숙제가 많이 생겼어요. (웃음) 역시 사명감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의 정신문화를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는 겁니다. 한복이 저조해지면서 대학이나 대학원의 관련 학과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어요. 앞서 얘기한 이탈리아의 가죽 학교 같은 한복 학교를 세워 교육에 종사하는 게 선배로서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의 후반부를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도와주세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원하겠습니다. 1959년을 배경으로 한 소설 <회색인>에서 작가 최인훈은 주인공 독고준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다. "성춘향과 이몽룡이 줄리엣과 로미오를 대신할 날이 올까?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거야.” 최인훈의 비관적 전망은 2021년 BTS가 얻고 있는 세계적 인기 앞에서 허물어지는 느낌이다. 외국인 팬들이 한글로 된 가사를 외워 따라 부른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어로 피케팅을 하고 댓글을 단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춤을 추는 BTS의 춤 선에 매료당한다. 우리의 옷, 한복은 그 사건을 계기로 도약의 모멘텀(momentum)을 가져야 마땅하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 일선에 한복 디자이너들의 창의력이 잘 닦은 창검처럼 빛을 번뜩이고 있다. 그 창검을 잘 쓸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고 힘을 보태야 한다. "면으로 한복을 만들자”라는 백설헌 씨의 획기적 제안은 소구력(訴求力)이 커 보인다. ‘밀레니얼 세대를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한복 도약의 관건이다. 정부는 일선의 의견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한복 장인 제도도 만들어 한복 디자이너들을 대우하고 지원해야 한다. 상품이 아닌 작품으로서의 디자이너 한복이 세계인의 마음을 뺏을 수도 있다. 단순히 옷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정신문화를 온전히 지키고 널리 알리려는 앞선 세대의 공통된 사명감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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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리를 다듬고 가꾼 40년, 악기장 박성기국악신문 혁신 재창간 1주년 기념으로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우리나라 국악기 제작사 중 고품질에 가격 대중화를 이룬 궁중국악기 창업자 박성기 명인과 국악에 관한 저서를 갖고 있는 전 KBS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대기자와의 대담이다. ‘언제나 떳떳하게 언제든 당당하게 양심을 최우선으로 하는 악기사’를 표방하는 박성기 명인은 2003년 세계문화예술대상, 장영실과학문화상 국악기술대상을 수상한 대명장이다. 전분야 국악기 개량의 최고 권위자로 트랜드를 형성해왔다. 하남시 궁중국악기사에서 국악기 90%를 개량하게 된 배경과 성공담, 그리고 우리 국악기의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대담을 나눴다. 이 자리에는 정문교 전(前)신나라 사장도 함께 하였다. 대담 이동식(국악신문 대기자, 전(前) KBS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대기자=우리나라의 거문고나 가야금 등 현악기들은 일찍이 담헌 홍대용이 말한 것처럼 먼지와 티끌로 가득 찬 이 세상의 어두운 생각과 우울한 기분을 풀어버리는데 그 효과가 시(詩)나 술보다도 나은 점이 있다고 하겠다. 흔히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고 말하는 거문고, 그와 같이 비유되는 가야금의 소리는 중국과 다르고 일본과는 사뭇 차이가 큰데, 이러한 우리 악기의 소리는 누가 내는 것이고 그 소리는 누가 만드는 것인가? 여기에 소리를 잘 내는 악기의 중요성의 핵심이 있다고 한다면 현대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현금 악기들을 만드는 악기장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하겠다. 우리 국악기 중 현악기들을 만드는 곳이 전국에 수십 군데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을 받는 곳이 ‘궁중국악기사’라는 곳이다. 이 악기사의 대표는 40년 동안 우리나라 현대 국악기를 가장 많이 만들어, 오늘날 우리 국악이 이처럼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사랑을 받는 비밀이 아름다운 소리에 있다면,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경기도 하남시 천현산 자락에 있는 궁중국악기사의 박성기 대표를 찾아갔다. 박성기 명인=."현악기의 소리의 비밀은 당연히 나무에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나무를 쓰느냐에 달려 있고요. 좋은 나무를 어떻게 잘 말려서 좋은 소리가 나게 하느냐에 있지요. 저 같은 경우 고향인 전라북도 장수와 근처 남원 임실 일원에 오동나무가 많았어요. 그것은 60년대에 나라에서 농가 소득증대를 위해 오동나무를 심으라고 권장한 데 따라 고향 일대에 밭이나 야산에 많은 오동나무들이 잘 자랐는데, 30년 이상 잘 자란 그 오동나무들을 일찍 악기용으로 확보를 해서 충분히 말린 것이 좋은 악기를 만드는 밑거름이 된 것이지요. 저희 고향에는 지금도 20~30년 잘 건조된 오동나무 편만 수천 장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Q.예순을 넘긴 나이지만 정력적이랄까 활력에 여전히 가득 차 있는 박 대표, 그런데 나무만 있다고 좋은 악기나 나오는 것일까? A."그렇지 않고요. 일단 나무가 있더라도 거기에 줄을 매야 하고, 울림통을 받칠 몇 가지 덧붙임이 있어야 하고, 줄도 좋아야지요. 그런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야 좋은 악기가 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가야금의 경우에도 예전부터 전해오는 제작법에 따르면 악기의 줄을 맨 후에 자꾸 줄이 늘어나는 현상이 생겨 이 음들의 높이를 유지하고 조율하는 일이 무척 번거로운 일이기에 제가 줄 매는 쪽 뒤편에 조리개를 고안해서 이것으로 쉽게 줄을 맞출 수 있게 한 것이 많은 분들에게 저의 악기가 사랑을 받게 된 것 같아요.” Q.그런 말씀은 말하자면 전통악기를 개량한 것이라 하겠는데 12줄인 가야금을 22현으로, 25현으로 개량한 것이 박 대표라는 말이 있던데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 A."제가 정식으로 이 악기 만드는 일에 뛰어든 것이 1986년입니다. 사실 악기 만드는 것은 전수가 쉽지가 않습니다. 악기를 만들 때에 제대로 못하면 아까운 나무도 버리고 악기가 못 쓰게 되지요. 그래서 악기장들이 제자에게 전해주시지를 않아요. 이 때문에 악기 만드는 것을 배우고 터득하기 위해 사실 무척 노력을 많이 했고 숱한 시행착오도 겪었지요. 지금이니까 좋은 추억으로 회상하지만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실패를 하면 왜 실패를 했는지를 찾아내는 과정이 엄청 길고 힘들더라고요” Q.의욕이 강했기에 밤잠을 안 자고 연구를 하던 청년 박성기는 국악기의 주재료인 오동나무를 건조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끝에 어떤 화학약품을 쓰면 쉽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먼저 적은 양으로 실험을 했었어야 했는데 금방 만들고 싶어서 고향집 마당에 많은 양을 쌓아놓고 한꺼번에 작업했는데, 이때 마을은 온통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찼고 그 작업도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나무를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말려서 악기를 만들었던 조상의 슬기를 몰랐던 것이다. 그와 같은 실패가 있었기에 더욱 노력을 해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말이다. A."그렇게 해서 악기를 만들다 보니까 우선 줄이 문제인 것입니다. 당시까지 줄은 명주실로 촘촘히 꽈서 만드는 것인데 이게 자주 끊어지고 늘어나고 했습니다. 그래서 90년대 초에 줄을 새로운 소재인 나일론을 줄로 매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소리가 훨씬 탄력도 늘어 좋고, 또 질겨서 일정한 소리를 낼 수 있어요. 맨 처음에 어른들이 안 된다고 반대를 하셨지만, 가곡 하는 조순자 님과 가야금 하는 황병기님이 좋다고 추천을 해주셨기에 점차 사람들도 쓰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줄을 개량한 것이 실용신안으로 인정받게 되자 가야금 12줄을 17줄로 늘이는 악기를 개발했고 다시 박범훈 선생님이 기왕이면 음색과 표현력을 넓히기 위해 22현으로 해보자고 말씀하셔서 1996년에 22현 가야금을 만들어냈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고 많이 써 주셨습니다. 그 해에 북도 모듬북으로 만들어 실용신안으로 인정받았고요, 그 가야금이 나중에 김일륜 선생님의 제안으로 25현으로 확대되었고요” Q. 박 대표에 따르면 이러한 실용신안 혹은 특허는 수도 없이 많다. 1998년에 대금 제조 방법에 특허, 2000년에는 해금과 가야금의 음량을 조절하는 방법이 실용신안으로 인정받았고, 2002년 현악기 제조 방법, 2003년 양금 등이 실용신안이 되었다. 실용신안이 15개나 된다. 드디어는 이러한 작업 중에 전기가야금도 태어났다. A."양악기 가운데에는 기타가 음량이 작아 결국엔 마이크의 도움을 받다가 아예 전기 기타가 나와 서양 대중음악을 휘어잡았는데, 국악기의 경우에도 전기를 쓰는 것이 대세는 아니지만 새로운 영역으로 뚫고 나가야 할 것이기에 전기나 전자의 힘을 어떻게 쓰는가를 고민했습니다. 전자가야금은 처음에는 가야금의 울림통 안에 마이크로폰을 달아서 연결하는 방법이었는데, 이게 각 줄의 음량 차이가 생기고 음이 제대로 잡히지 않지요. 그래서 각 줄마다 센서를 달아서 해결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음이 울리는 문제도 해결되었고요.” Q. 국악이든 양악이든 예전처럼 방안에서 몇 사람만을 대상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가 있고 많은 청중들을 대상으로 하게 되면서 악기의 성량이 큰 문제가 되었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가장 처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악기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었단다. 박 대표는 아쟁을 기존보다 20% 정도 키워 대아쟁을 만들어 보았는데 이렇게 되니 너무 커서 운반이 문제가 되더란다. 그래서 아쟁에 현침(絃枕), 곧 줄을 묶는 베개를 개발해서 응용을 했고 모든 줄에 조리개를 붙여 음을 맞추는 문제를 해결했다. 또 장식용으로만 있는 부분을 과감히 잘라내어 악기 무게를 줄였다. 이런 식으로 박 대표는 우리 국악기의 90% 이상을 현대적으로 개량해내었다. 그것으로 해서 우리 국악의 음의 표현력이 엄청나게 넓어졌고 대형 무대에서 많은 청중들을 상대로 하는 현대의 연주회의 특성에 따라 음량도 커져서 많은 애호가들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 각 악기의 대가들이 자문해주셔서 가능했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국악의 저변이 확대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악기를 만들고 그것을 개량하는 일에 뛰어들었을까? 원래부터 악기를 만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인가요? A."그렇지 않습니다 전북 장수의 평범한 농촌 가정이었습니다. 다만 고향의 아는 형님이 민속 국악기 제작사를 하고 있어서 거기 들렀다가 가야금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다녀왔는데 제가 원래 손재주가 있는 편이어서 가야금 만드는 데서 2년이 안 되게 있으면서 눈으로 보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제 방식대로 직접 제작해보고 싶어서 제 몫으로 집에 있는 논을 팔아서 가건물을 하나 마련해 거기서 죽으라고 연구를 했지요. 세월 가는 것도 몰랐고요. 수많은 악기를 만들었다가 실패해서 깨어버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러다 보니 악기에 대해 원리를 터득하게 된 것이고요.” Q.이처럼 악기에 대한 물리가 터져서 여러 악기들을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그것들을 현대에 맞게 개량해내자 점차 국악계에서 그의 악기를 선택하는 연주가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의 악기에 대한 평가는 곧 세계문화예술대상, 장영실과학문화상 국악기술대상 수상(2003년) 등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사랑을 받으면서 회사는 가야금과 거문고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국악기를 만들어내었고 그 악기들은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아 많이 쓰이게 되었다. 사업이 늘어가면서 돈도 벌게 되었지만 그만큼 많은 국악 행사에 지원을 해왔다. 중요 공연만이 아니라 국악을 배우고 알리는 많은 기획이나 행사도 궁중 국악기사의 후원을 받았다. 궁금했다. 사람들은 상을 많이 받는다고 악기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결은 역시 소리에 있는 게 아닐까요? A."악기에 쓰는 나무들은 결국엔 잘 말라야 하는 거지요. 잘 마르면 무게가 가벼워져서 아주 맑고 상쾌한 소리가 납니다. 반면에 덜 마르거나 재질이 좋지 않으면 둔하고 탁한 쪽의 소리가 나는 등 소리가 죽습니다. 가야금의 몸체를 한 번 들어보세요. 요즈음엔 이렇게 가볍습니다. 그만큼 잘 말랐다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그렇게 잘 마르지 못한 악기들이 많아서 소리가 일정하지 않았기에, 차라리 요즈음 악기들이 소리가 더 좋습니다. 다만 우리 악기들은 재질이 단단한 나무가 아니어서 서양의 현악기들처럼 수백 년을 가지는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왕이면 그런 명품 악기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소나무 등 다른 목재들을 시도해 보았지만 소리가 못 따라 오더라고요. 우리 음악의 전통과 특성을 따라서 악기도 나오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요” Q.최근 우리 음악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고 국악을 좋아하고 배우려는 젊은이들도 많지만 국악기들이 생각보다는 값이 만만치 않아서 국악 확산에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가요? A."네, 국악을 배우려는 분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고 또 국악도 점점 다양해지고 전문화되어서 악기도 종류가 많아지고 있어요. 아시겠지만 가야금만 해도 정악가야금과 산조 가야금, 18현, 25현 가야금 등 종류가 많고 저음에서부터 중음, 고음 등 영역이 세분화되다 보니 전공하시는 분들의 경제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유통되는 것도 있고요. 그래서 이 가격 부분에서 부담을 덜 수 있는 방법으로 국악기를 만들고 유통하시는 분들로부터 큰 전환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최근 국악 보급이 늘어나면서 악기 수요도 많아졌는데, 저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이용자와 수용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제작 판매량이 적은 분들은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기에 획일적으로 이래라저래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로서는 방법을 강구하고 싶습니다. 어려서부터 보다 많은 분들이 악기를 옆에 두고 늘 그 소리를 듣고 자라야 이 국악이 이 시대뿐 아니라 앞으로도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 Q. 악기를 보급하는 입장에서는 더 많은 국악인들이 나오고 그래서 국악의 저변이 확산되는 것을 바랄 텐데, 그런 점에서 북한 국악의 현주소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혹 남북 간의 협력이 이뤄지면 국악 발전이 더 가속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 말입니다. A."물론 남북 간 협력이 이뤄지면 더욱 좋겠지요. 그래서 예전에 통일음악회 등으로 남북 간의 교류 행사도 있었고요. 북한의 경우 국악기의 현대화가 많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에는 남북이 음악 부문에서도 교류가 있어서 서로 악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했는데, 북한의 악기 개량은 무대 위에서 신곡 연주를 위해 성량을 키우고 미세한 음까지 필요로 하다 보니 줄에 철사 등을 사용하고 있더라고요. 북한을 다녀온 박범훈 전 총장의 말로는 북쪽이 현대화에 관한 한 한 20년은 앞서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줄을 보면 우선 철사를 넣고 명주실로 둘러싸는 식으로 만들곤 하는데, 그게 음색이 많이 우리와 달라서 우리 쪽에서는 그리 반응이 좋지 않았고요. 나무도 우리만큼 좋은 것은 쓰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형식은 앞서 가지만 내용이나 품질 면에서는 아직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더라고요. 지금은 남북교류가 끊어졌으니 많이 아쉽지만, 어쨌든 교류를 하고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진정으로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국악으로 같이 발전하는 방안을 찾아야 되겠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전통을 고수하는 것만으로 살아남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현대인들과 함께 호흡하고 숨 쉬고 함께 위안을 받는 음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국악도 진정한 우리의 음악이라는 영역으로 더 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아무래도 악기를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앞에서도 말이 나왔지만 그 기술이 전해지지 않는 풍토가 있다고 했는데, 앞으로 이 문제가 걱정이 됩니다만? A."다행히 제가 평생을 바쳐 걸어온 이 악기의 세계를 따라오는 아들이 있어 저로서는 덜 걱정입니다. 아들은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대금을 전공했는데 악기 연주를 넘어서서 저처럼 악기를 만들어 보겠다고 과거 저의 젊을 때처럼 10년 이상 밤잠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 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은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예전 제가 하던 것에 비하면 많이 미흡하지요. 이 일은 죽을힘을 다해 도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소리를 담아 놓은 악기를 저렴하게 많이 보급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매번 악기를 개량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서양의 클래식이건 대중음악이건 강력한 소리와 요란한 박자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데 우리는 물론 우리 음악의 특색과 장점을 잘 지켜야 하지만 그런 외부적인 도전에 응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악기 분야에서 더 개량하고 개선할 점이 있는지를 찾아서 본인이 터득해야 합니다.” Q.가을은 음악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박 대표가 만든 악기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책임이 더 막중하게 느껴지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국악 발전을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A."아, 물론 더 공부하고 연구하고 새로 개량하고 개발할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국악을 정말로 부담 없이 사랑하는 날까지, 집집마다 가야금과 거문고 등 국악기 하나씩은 다 갖고 사랑할 때까지 일을 계속하겠습니다. 누구나 믿고 사랑해주는 악기를 위해 남은 시간도 소중히 하겠습니다. 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종식되어 많은 공연장에서 우리 국민들이 우리 음악의 아름다움을, 우리 악기를 통해서 접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후에는 국악의 역사를 알리고 국악기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박물관이랄까 누구나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공연도 볼 수 있고, 할 수 있고, 같이 배우고 즐기고 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설을 갖추고 그것이 자생적으로 운영되도록 준비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그동안 성원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긴 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궁중국악기사 주요 연혁 2010's 2017년 해금특허 출원 제10-2017-0120407 2017년 12현 저음대아쟁 개발 2015년 모든 악기 품질개발 악기 가격 현실화 2013년 한국문화재단 명인인증 2012년 12현 대아쟁 개발 2000's 2009년 음픽업장치를 구비한 전자 현악기 특허 제10-1003336호 200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42호 이수 2003년 개량북 개발 2003년 한국예술문화대상 2003년 가야금 실용신안 0326244호 2003년 양금 실용신안 0326243호 2003년 장영실과학 문화상 국악기술 대상 2002년 세계문화예술상 2002년 해금 주화 특허 0038137호 2002년 장식용현악기 제조방법 실용신안 0015989호 2000년 음량조절 해금 실용신안 027763호 2000년 음량조절 가야금 실용신안 0207762호 1980's ~ 1990's 1998년 대금제조방법 특허 0298678호 1997년 10현 중아쟁 개발 1996년 모듬북 실용신안 24649호(조율기 부착) 1996년 거문고9현 -이형환(당시 동국대교수), 9현대아쟁(정계종 국립국악원) 1996년 중앙대 김일륜교수(국립극장 단장)님과 22현 개발 1995년 소금, 중금, 대금, 피리 - 신용춘선생 1995년 고음해금, 저음, 고음가야금 1993년 17현 실용신안 077038호(고 황병주선생 공동) 1993년 가야금줄 실용신안 077038호 1993년 대아쟁 2중 현침 및 조율기 개발 1992년 대금 옷칠 및 자개 장구통, 해금 통 최초 1992년 로구로 기계 도입 해금 통 최초 1991년 개량줄, 키타조율기 17현가야금(황병주) 1989년 저음해금 국립국악원 개량악기 윤찬구씨(저음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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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자의 객석에서] 가을 하늘, 바다보다 푸르네가을 하늘이 바다보다 푸르다. 세종대왕을 길벗 10월호가 표지로 반기며 가을 정취를 담은 소식들을 전한다. 한글 관련 이야기를 시작으로, 특별화보는 도쿄 패럴림픽에서 사투를 벌이며 경기를 치른 선수들의 표정을 실었다. 피스메이커에서는 창경궁에서 출발해 ‘거리의 천사들 섬김의 집’에서 1박을 하고 최전방 갓바위 마을을 거쳐 봉오동 삼거리를 지난 뒤 비래바위를 바라보는 만산동계곡을 향한 여정을 담았다. 실린 사진은 청명한 하늘과 짙은 녹음으로 상쾌함을 전해주고, 윙크하는 나무조각상은 우습기도 하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사진과 이야기들도 많다. 오늘은 힐링투어 ‘용머리 해안과 하멜’, Poem ‘허수아비’를 소개한다. # 용머리 해안과 하멜표류기, 산방산과 추사 김정희 ‘하멜표류기’가 발간되기까지 하멜에 얽힌 이야기와 용머리 해안과 산방산을 소개하였다. 용머리 해안에 들어서기 전에 만난 것은 스페르웨르호 상선 모형의 하멜상선전시관이다.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 일본으로 가던 중 난파돼 표착한 곳이 용머리 해변이다. 선원 64명 중 생존자 36명은 조선에서 13년간 억류 생활을 하였다. 서울로 호송 된 뒤 전라도 여러 곳으로 분산 수용되고 탈출하기 까지 억류 생존자는 16명이었다. 8명은 탈출하고 2년 후 조선 정부의 인도적인 배려로 나머지 8명도 석방되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하멜은 조선에서 13년간 억류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기록하여 ‘하멜표류기’를 완성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대한 깊은 인상과 풍부한 경험을 잘 살려 기록하였다.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린 최초의 책으로 사료적 가치도 높다. 1980년 한국과 네덜란드는 우호증진을 위해 산방산 해안에 ‘하멜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용머리는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이다. 약 100만 년 전 화산활동으로 형성되었다. 오랜 기간 파도에 화산체가 깎여나간 형태가 마치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닮아 용머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최근에 이곳을 방문한 바 있다. 파도가 심해 입장 불가로 돌아서야 했지만, 용머리 해안을 처음 마주 하였을 때는 7년 전이다. 당시엔 만조나 파도가 심하면 제한이 있는 것조차 몰라 쉽게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이번에 세 번째인데 처음 와 본 동생이 해안 길을 걸어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우리는 해안 길 너머를 한참 바라보며 사진 속에 남겨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해안 길에서 올려다 본 것은 산방산이다. 정상은 푸른 난대림이다. 유일한 회양목 자생지이기도 하다. 1966년 천연기념물 제182-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산방산에 얽힌 전설과 설화도 많다. 남서쪽 기슭에 있는 산방굴은 제주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가 즐겨 찾던 곳이라고 한다. 용머리해안 근처에는 추사관과 추사적거지가 있다. 추사는 55세 되던 해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게 되고,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아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8년 3개월의 제주 유배생활에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남겼다.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 때도 가을 하늘은 푸르지 않았을까. # ‘허수아비’ 정직한 신념, 긍정과 인내 가을이 깊어갈수록 벼는 노랗게 익는다. 초록빛 벼를 지키는 시 ‘허수아비’ 읽었다. 어릴 적 보았던 허수아비가 떠올라 반가웠다. 참새는 멀찌감치 달아났나보다. 허수아비의 얼굴과 옷이 깨끗하다. 황금빛 열매로 맺게 하는 정직한 신념을 소망하며, 시인 서성환의 시를 읊어본다. 허수아비 아름다운 혼들의 녹색 합창 흥겹게 어우러지는 빛나는 벌판 생명의 신비를 모두운 힘찬 함성들이 열매로 맺히는 활기로 가득하다 고된 사역 속에서도 패배를 모르는 정직한 신념들이 영그는 초록빛 바다 모가지 팬 벼처럼 우리의 불굴의 소망이 떼비둘기같이 함께 솟구쳐 오른다 아직 다 이룬 것 아닌데 가야 할 길 멀어도 이룬 꿈 바라보는 기쁨 마음에 넘쳐 즐거운 마음으로 동화되어 간다 인생을 긍정하고 인내로써 황금물결 환상에 손짓하며 나아가는 웃고만 서 있는 사나이 허수아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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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대 국악방송 사장 취임 기념 인터뷰국악방송 신임 사장으로 유영대 전(前) 고려대학 교수가 취임, 의욕적인 사업 추진을 계획하고 있다. 예산확보로 국악TV 활성화 등의 현안 타개와 개국 20주년을 맞아 기획 프로그램을 통한 활로를 모색하는 상황이다. 이에 본지는 사장 취임을 기념하고, 다양한 경륜과 실적으로 전개해 갈 국악방송의 내일을 전망하고자 특별 인터뷰를 마련했다. 대담은 안상윤 대기자, 사진 김동국 기자. 14일 오후 4시 사장실에서 40분간 진행되었다. 취임 2주, 첫 인터뷰 Q. 취임을 축하합니다. 취임하신지 며칠되셨죠? A. 9월 1일부터니까 2주일 됐습니다. Q. 아직 업무 파악을 다 못 하셨겠어요? A.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파악은 했습니다. 전국에 본사 포함, 지국과 지소들이 모두 14개소가 있어 시간이 좀 걸리는군요. Q. 고려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를 올해 초 정년퇴직하셨죠? 그 후에 김영운 전임 사장이 국립국악원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잔여 임기 1년을 맡으셨는데, 그 전부터 국악방송과는 인연이 좀 있으셨지요? A. 네 제가 전주 지국의 자체 프로그램에도 참여한 적 있고, 여기 본사 프로그램 제작과 진행을 맡아 했습니다. 1998년에 전주 지국의 프로그램은 방송협회에서 주는 ‘올해의 PD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국립극장 창극단 예술감독 때인 2010년에는 ‘청’을 무대에 올려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Q.‘청’은 대단했죠. 노래는 물론이고 통찰력이 묻어난 대사와 배경 장면, 회전식 무대 등이 몰입도를 높여 ‘코리아 브랜드’라는 별칭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예술감독 외에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과 판소리학회장도 하셨죠? A.네, 교수와 예술감독 그리고 방송인 이렇게 1인 3역을 하며 살았습니다.” Q.국악방송 시청자위원회 일도 하셨죠? A.네 시청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악방송의 발전에 나름 기여했습니다. 국악TV 개국도 그때 당시 저희 시청자위원회가 적극 지원했죠. 그런데 지금 국악TV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Q. 문광부가 인사 보도자료에서 "최근 K-POP을 통해 국악의 세계화, 산업화를 향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국악계에서 쌓아온 전문성을 바탕으로 국악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국악방송의 역할을 더욱 확대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평가해 큰 기대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전문가가 아닌 경영인으로서 국악TV를 살려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어떤 활성화 방안을 갖고 계신지요? A. 저는 줄곧 KㅡMUSIC을 지향해왔습니다. 국내 소수의 애호가들만이 즐기는 음악에서 세대를 초월하고 나아가 세계인이 다 좋아할 만한 장르로 외연을 넓히자는 것입니다.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게 좋은 예가 되겠죠. Q. 그렇지만 외국인들에게 국악은 멜로디도 낯설고, 가사 전달도 힘들고 해서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A. 그래서 제가 처음 시도했던 게 번역 자막 제공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어렵지 않게 창극의 내용을 이해하고 우리 소리를 좋아하더군요. 외국인 청중들이 ‘Evaluation(평가)’를 해주었는데 큰 감동을 받았어요. Q. 평가 내용이 어떤 것들이었나요? A. "눈물이 나도록 아름답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스토리도 노래도. 특히 심청의 효성과 부친 심학규의 딸에 대한 그리움 같은 내용이 지극히 동양적 가치를 표방하면서도 인간중심적인 모습을 담고 있어서 뭉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심청의 희생이 그들의 마음을 울렸던 거죠. Q. 우리 소재 가운데도 찾아보면 외국인들에게 먹힐 꺼리들이 많겠어요. A. 그렇습니다. 잘 알려진 ‘심청전’이나 ‘춘향가’ 외에도 제가 ‘몽유도원도’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서 무대에 올렸는데, 이 역시 반응이 좋았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안평대군이 꾼 꿈 이야기를 화가 안견이 화폭에 재현한 것이 ‘몽유도원도’인데, 그 두 사람 외에 기록에는 없는 지고지순한 여성을 한 명 등장시켜 정치적 암살을 당하는 안평대군과의 슬픈 러브스토리를 만들었죠. Q. 네. 인문학적 소양과 호방함을 갖췄던 안평대군이 인왕산 자락에 비해당(匪懈堂)을 짓고 살면서 많은 일화를 낳았으니 러브스토리도 있을 법 했겠어요. 형 수양에게 유배지에서 대역죄로 사약을 받는 순간까지 두고 온 집 비해당과 인왕산 자락을 사무치게 그리워했겠다 싶었는데, 연인이 있었다면 그 슬픔은 배가되겠죠. 물론 음악이 장엄하게 뒷받침을 해주었을 테고요. 그런 스토리를 드라마타이즈해서 국악과 접목시키면 좋은 콘텐츠의 프로그램이 나오겠어요. A.신기하게도 외국인들을 포함한 청중들이 스토리 전개보다 그 내용을 축약한 노래들에서 더 감동을 받곤 하더군요. 우리 음악이 먹힌다는 확신이 들던 순간이었습니다. 비단 우리 소재만이 아니라 외국의 소재도 우리 것으로 변주하는 시도도 했었죠. 대표적인 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국악 버전입니다. 카플렛가와 몬태규가의 갈등을 경상도와 전라도 가문의 갈등으로 대체하는 식이었죠. 스토리와 창(唱), 노랫말은 직접 우리 식으로 재가공했습니다. 물론 쉐익스피어의 화려한 대사의 맛도 살리구요. 원로 명창 무대, 씨리이즈 기획 Q. 참신한 발상이군요. 그런 식이면 ‘햄릿’이나 ‘오딧세이’, ‘오이디푸스’, ‘돈키호테’ 같은 스토리들도 우리 식으로 창극화할 수 있겠어요. A. 얼마든지 가능하죠. 퓨젼(Fusion)과 크로스오버(Cross over)를 과감하게 시도해야 세계화에 다가 설 수 있습니다. Q. EBS 교육방송도 2004년에 박인환, 김수영 등 50,60년 대 예술가들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창작의 고통 등의 스토리를 담은 ‘명동백작’이라는 드라마를 기획방송해서 인지도를 높인 사례가 있지요. 국악 TV도 그런 소재들을 활용해 국악과 접목시키는 시도가 있으면 좋겠군요. A. 저희는 예산이 부족해 드라마는 언감생심이지만, 창극으로는 기획할 수가 있어요. 그렇게 해 볼 생각입니다. Q.편성표를 보니 24시간 방송이긴 해도 아직은 재방, 삼방 비율이 높더군요. 콘텐츠 개발이 시급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금년이 개국 20주년 되는 해인데 특집이나 사업으로 기획한 게 있나요? A.그래서 저희가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로미와 줄리엣’을 고화질 영상으로 방송할 계획을 하고 있어요. 또한 곧 천수(天壽)를 다하시게 되는 명창들을 위한 무대를 시리즈로 방송할 생각입니다. Q.국악 오디션 프로그램은 기획하지 않으시나요? 편성하면 환영을 받을 것 같은데요. A.사실 다른 방송사와 함께 기획을 했는데 "공동제작”이라는 자막만 하나 넣고는 방송은 못 하게 해서 파기해 버렸습니다. 국악방송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매우 상했죠. 국악으로 탄탄하게 기반을 닦은 가수들이 트로트 장르에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추세이므로 저희 방송 자체만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곧 기획할 것입니다. 그 부분은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Q.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예산이 발목을 잡는군요? 예산 확보를 위한 복안은 있으신지요? A.열심히 정치인들을 만나 국악방송의 중요성을 피력하며 예산을 늘려달라고 호소할 생각입니다. 2019년 12월에 국악TV가 개국했는데도 저희 방송사의 예산이 오르기는커녕 해마다 삭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삼년 연속으로 5%씩 줄어들었어요. 국악방송의 위상이 아직 그 정도밖에 취급을 못 받는 거죠. 예산 줄이는 데 우선적으로 지목받는 게 국악방송이라는 얘기죠. 슬픈 현실입니다. 문화부, 기재부 등 관련 부서들도 찾아다니며 호소할 예정입니다. 사실 좋은 창극을 원활하게 중계방송 하려면 당장 중계차도 한 대 더 늘려야 하는데 그 비용이 적어도 40억 원이 소요되는 실정입니다. 관계 부서들은 이해가 약하고... 한숨이 나죠. Q.사장님의 개인적인 역량이 풀 가동돼야겠군요? A.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예산은 부족하고... 그래서 ‘메세나 프로그램’도 기획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기업의 후원 없이는 재원 마련이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입니다. 크라운해태 제과 윤영달 회장님 같은 국악 애호 기업인들이 한 열 분 계세요. 우선 그 분들의 이해와 지지를 이끌어내서 시작해보려 합니다. 직원들이 예산 삭감을 염두에 두고 기획을 줄이려드는 걸 보고 제가 그러지 말고 계속 추진하라고 독려했어요. 어떻게든 해봐야죠. Q.혼자서 힘들게 뛰어다니실 게 아니라 예산 확보를 전담하는 직제를 하나 둬야 하지 않을까요? 전담 본부장을 신설할 거라는 이야기도 들리더군요. A.저희 본부장은 방송 담당이라 힘은 들겠지만 아무래도 당분간 제가 뛰어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KT, 곧 SKT에도... Q. 노출도 좀 원활하게끔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국악TV를 접하기가 어려워요. A. 네, 동감입니다. 현재는 KT만 태우고 있는데 곧 SKT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그러면 보다 많은 시청자들이 저희 방송을 볼 수 있게 될 겁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망만 늘려도 국악방송 사장 일 절반은 한 게 될 거”라구요.(웃음) Q. 유 사장님의 목표를 보면 누군가가 펼쳐놓는 무대를 TV로 옮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기획 단계서부터 대본, 공연, 방송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국악방송이 소매 걷고 관여해야 할 것 같군요? A. 네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새로운 제작 시스템을 구축해야겠죠. 그럴려면 저희에게 운영 예산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산이 절대 필요합니다. 어떻든 국악방송 운영을 맡아 참신한 프로그램 생산과 직원 복지 향상 그리고 K-MUSIC을 포함하는 ‘K-CULTURE 구축’이라는 목표를 향해 매진해나갈 것입니다. Q. 응원합니다. 저희 국악신문과의 협업도 한번 생각해보시죠? 사업도 함께 기획하고. 저희 신문에 신규 편성에 대한 홍보도 하면 좋을 것 같군요. 홍보 소개글은 작가나 PD가 쓰면 될 테구요. A. 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Q. 그러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듯 싶군요. 이 정도로 취임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오늘 만나 청사진을 들어보니 국악방송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집니다. ‘먼 데 사람 보기 좋고 가까운 사람 듣기 좋은 우리 시대의 방송국으로’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빛을 발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A. 네, 또 기회를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상윤 대기자 1954년 경남 밀양 출생. KBS/SBS 32년간 재직. 다큐 PD, ‘뉴스 추적’ 앵커, 홍콩·베이징 특파원, 스포츠 국장, 논설위원,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위원 등 역임. 현재 국악신문 문화정책/생활문화 대기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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