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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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조선민요합창곡집 제1집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과가 1931년에 발행한 ‘朝鮮民謠合唱曲集 第一集은 ‘전통의 현재화’라는 문제의식을 최초로 실현한 악보집이다. 재래의 민요를 피아노 반주가 붙은 소프라노 독창과 여성3부 합창용으로 편곡한 일곱 곡을 수록하고 있다. 편곡은 당시 음악학과장이었던 메리 영 선교사(Mary Young, 美理英, 1880-1967)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기독교 지식인’ 안기영(Keui Young Ahn, 安基永, 1900-1980)이 담당했다. 이화여전의 민요 합창 프로젝트는 편곡, 공개 연주회 출연, 음반 발매, 악보집 출판 등으로 이어지며 식민지 양악계의 시선을 모았다. 이 연구에서는 메리 영과 안기영이 주도한 이 프로젝트를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한다. 첫째, 프로젝트의 경과를 구체적으로 추적하며, 둘째, 합창곡의 가사를 이상준의 ‘속곡집’에 수록된 가사와 비교하고, 셋째, 편곡에 동원된 서양음악 기법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필자는 이화의 민요 합창곡이 계몽적 가치를 담은 가사를 채택하였고, 재래의 선율을 서양음악의 다양한 기법을 동원하여 편곡하였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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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아리랑 최초 취입 아리랑, ‘1913년 京城卵卵打令’일본 니포노폰 취입 조선민요 ‘경성란란타령’, 1913년 Nipponophone 6170 SP음반으로 최초의 아리랑 음원이다. 소리는 김연옥과 조모란이했다. 오늘의 경기 ‘긴아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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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무궁화노래‘가 처음 불려진 독립관(獨立館) 전경1897년 8월 13일 ‘대조선 개국 505회 기원절 경축식’에서 계관시인 윤치호가 작사한 무궁화노래(찬미가 제10장)가 처음 발표된 독립관 전경. 현 애국가의 원형 ‘무궁화노래’가 태어난 곳이다. 이를 통해 동일 후렴인 ‘애국가’(찬미가 제14장)의 작사자가 윤치호임이 확인된다. 한편 이 독립관에서는 1898년 2월 21일 독립협회 회원 135명이 모여 윤치호의 제의에 따라 결사적인 구국운동 전개가 결의되어 국권상실을 막기 위해 고종에게 외국인 수중의 재정권, 병권, 인시권을 회수해야 한다는 상소와 만민공동회 개최를 선포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동안 이 독립관의 현판에 대해서는 고종이 한글 ‘독립관’이라 현액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이 사진의 발굴로 한글이 아닌 한자 ’獨立館‘이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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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970년 출시 ‘아리랑 라면’아리랑은 최초, 최고, 진근, 한국을 표현 또는 상징한다. 첫 위성이 ‘아리랑호’이고, 첫 필터 담배가 ‘아리랑’이었다. 해외 이민 초기 현지에 개업한 첫 한국식당 상호는 대부분 ‘아리랑’이었다. 친근함을 표현한 경우는 ‘아리랑노래방’ 동네 ‘아리랑이발관’ 같은 상호가 그렇다 1970년 출시된 라면 중에 ‘아리랑라면’도 친근감을 활용한 상품명이다. 우리 나라 ‘라면’의 역사는 1963년 9월 15일 출시된 ‘삼양라면’으로부터다. 이후 ‘아리랑라면’도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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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한시 아리랑 ‘阿郞曲’1917년 정사년 신해음사 발간 시집 소재 ‘阿郞曲’. 시속의 아리랑을 한시화 한 작품이다. 阿郞曲 아랑요 (俗阿那郞謠)(속 아나랑 노래) 蕙山 柳興韶 阿郞阿郞復阿郞 아리따운 낭군, 아리따운 낭군, 돌아와요 아리따운 낭군, 阿郞本是有情郞 아리따운 낭군은 본래 유정한 사내라 一朝結髮隨君去 하루아침 쪽을 지고 그댈 따리 갔지요, 阿郞百年我家郞 아리따운 낭군 백년토록 우리 집 낭군이지요 阿郞阿郞復阿郞 아리따운 낭군, 아리따운 낭군, 돌아와요 아리따운 낭군, 阿郞自是薄情郞 아리따운 낭군은 본래 박정한 사내인가 一朝白馬出門去 하루아침 백마 타고 문을 나가더니 阿郞今夜誰家郞 아리따운 낭군이여 오늘밤엔 누구 집 낭군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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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북한 최성환 작 ‘관현악아리랑’ 관련 자료.아리랑 관현악 작품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북한 최성환 작 ‘관현악아리랑’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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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아리랑 名人 金光山’ 존재 확인정득만(鄭得晩) 선생 왈(曰), "팔도아리랑을 독무대로 한 양반이 광산이란 사람인데, 나도 소문만 들었지 만난적은 없시다. 하여튼 악극단에서 이 양반을 불러와야 단원들이 한 30분 쉈다는 것인데, 이은관이 보다 훨 났다고 합디다.” 1946년 02월 15자 경향신문 광고 ‘劇團 靑春劇團 新아리랑’ 金春光作 兼 演出 "김상옥사건 안중근사기를 발표한 청춘극장 제3회 신작 발표공연.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에 훤전(喧傳)된 후 우리 향토민요 아리랑의 신 연극화 대륙극장(단성사). 아리랑 명인 金光山선생 특별 출연” 이 광고를 통해 소문으로 전해진 ‘아리랑 잘하는 광산씨’의 존재와 ‘名人’이란 예칭을 이미 아리랑에서 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광고문도 기록’이란 가치 발견, 눈썰미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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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연변인민출판사가 발행한 ‘연변무형문화유산화첩’이 자료집을 통해 2012년 3월 중국이 자국 빗물질무형문화재로 지정을 한 사실을 밝혔다. 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사전 조처였다. 이 사실을 확인 한 (사)아리랑연합회가 성명서를 발표, 이를 연합뉴스와 MBC 뉴스가 언급하여 문제를 삼았다. 이는 큰 반향을 이르켜 12월 우리가 유네스코에 아리랑을 등재하여 중국의 등재를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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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국악관 설립 계획서(國樂館 設立 計劃書)1957년 국악박물관 건립을 계회한 기획서이다. 주체는 국악예술학교 박헌봉 교장이다. 매우 이른 시기 국악박물관 설립을 계획한 것은 당시 국악 진흥과 발전을 위한 의욕의 증거이다. 결국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국악의 대계를 설계한 이는 박헌봉 교장이 유일했다는 것이다. 모두 급급하고 앞가림에 내일을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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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설장고 명인 김병섭 선생 사진 및 기사자료김병섭 선생은 5, 60년대 설장고로 활동한 명인이다. 특히 70년대 초 까지 대학가와 외국인에게 풍물을 전수하고 풍물패를 육성한 인물이다. 국악신문 창간자 김호규 사장의 부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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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영화‘아리랑’ 제3편 ‘말문 연 아리랑’ 기사 자료일제강점기 나운규 감독/출연 영화‘아리랑’이 1926년 10월 1일 개봉 제1편 아리랑 말고도 2편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제1편은 ‘아리랑’, 제2편은 ‘아리랑, 그 후 이야기’, 제3편은 ‘말 문 연 아리랑’이다. 이 기사 자료를 통해 3편이 있다는 사실과 그 제명이 ‘말 문 연 아리랑’이란 사실을 알려 준다. 2026년은 영화‘아리랑’ 개봉 100년이 된다. 한국영화의 역사를 빛낸 영화‘아리랑’ 개봉 백년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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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以堂 金殷鎬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성춘향의 표준영정을 비롯한 전통 예인들의 초상을 조선화로 남긴 이당 김은호의 자서전 ‘書畵百年’. 이 책에는 근대 예인들과의 교류 등 근대문화에 대한 증언이 담겨있다. 특히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을 김인식 등과의 교류로 밝힌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저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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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해방 직후 발행 ‘獨立唱歌集 全’해방 후 가요, 창가, 민요집도 내용을 그대로 두고 애국가나 독립가를 앞에 게재하고 ‘독립’, ‘해방’ ‘신’ 등을 붙여 발행했다. 경성교육협회 발행 ‘獨立唱歌集 全’도 그 하나이다. 1946녀 2월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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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1926년 개봉 영화‘아리랑’ 전단지 복원1926년 10월 1일 개봉 전날 새벽 나운규 감독 영화 ‘아리랑’ 전단지 1만매를 총독부에 의해 모두 압수당했다. 이유는 영화 주제가 중 불미한 가사가 있어서라고 했다. 그래서 현재 전단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사)아리랑연합회가 1926년 나운규가 같은 해 출연한 영화‘농중조(籠中鳥)’의 전단지를 원용하여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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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조선인민대표단 예술단 공연종목 자료중화인민공화국 방문 조선인민대표단 예술단이 한국전쟁 휴전 후 참전에 감사를 표하는 예술단을 파견하였다. 다양한 종목이 공연되었다. 김관보의 아리랑 등이 공연되었다. 중국과 북한과의 문화예술 교류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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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펄벅의 소설 ‘갈대는 바람에 흔들려도’장편소설 '대지(大地)'로 193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벅(Pearl S. Buck, 1892~1973) 여사가 1960년에 처음 한국을 방문하고 쓴 소설 ‘갈대는 바람에 흔들려도’의 표지이다. 표지에 '아리랑' 사설을 넣은 것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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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반전음악으로 '아리랑'을 부른 피터 시거의 편지피트 시거(Pete Seeger, 1919년 5월 3일 ~ 2014년 1월 27일)는 1964년 반전음을 주도할 때 우리 신문에도 언급되었다. 1963년 대한일보 6월 20일자 <흑백문제의 민요가 각광>이란 제하에 피트시거, 데어도어 바이클, 밥 딜런이 급진주의자의 집회에서 노래한다고 보도한 것이다. 그리고 아리랑을 중용한 레파토리로 삼았다. 시거는 라이브 녹음에 이렇게 아리랑을 설명하고 불렀다. "한국인이 부르는 노래에 ‘아리랑’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불러왔다고 하는데,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시기에는 부르지 못하게 탄압을 받은 사실도 있다고 한다. 내 생각으로는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하고 갈라져 살고 있지만, 두 나라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리랑을 함께 부르기 때문인데, 이 자체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미국의 포크 음악가이다. 미국 포크 리바이벌의 선구자이며, 현대 미국 포크 음악의 시초가 되는 인물이다. 1940년대부터 전국의 라디오에서 활약했다. 1948년에 디 위버스(The Weavers)라는 그룹의 멤버로 활동하다가, 1950년대 초반에 탈퇴하고 솔로 활동을 하였다. 1950년대에도 다수의 히트곡을 냈다. 1960년대에는 활발한 인권 운동과 반전 평화 운동을 했으며, 이 시기의 곡들은 인권 문제를 다루고 있거나 전쟁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경우가 많다. 현대 포크송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과 'If I Had a Hammer'와 같은 곡을 작곡하였다. 90세를 넘긴 나이에도 환경 운동을 지속하는 등 계속 활동을 했으며, 가장 최근의 앨범은 2008년 9월 발매한 《At 89》이다. 2014년 1월 27일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본명 피터 시거(Peter Seeger) 출생 1919년 5월 3일 미국 뉴욕주 맨하튼 사망 2014년 1월 27일(94세) 국적 미국 직업 음악가 사회운동가 장르 포크송 민중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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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1962년 박정희 의장, 아리랑 등 수집 지시 자료1962년 4월 15일부터 5월 31까지 경복궁 내에서 개최된 산업박람회 현장 순시 중이던 박정희 의장이 국악인과 음악가 성경린, 나운영, 김동진 등에게 민속음악 100곡, 그 중에 ‘아리랑’을 수집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 한 유생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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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995년 총무처 발행 애국가 규정 자료 문건이 문건은 당시 총무처는 현 애국가를 ‘국가(國歌)’로 규정하였음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이는 오늘의 애국가 규정을 두고 논란을 벌이는 것에 대한 의미있는 전거로 제시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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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국악신문 편집위원 위촉장2000년 국악신문 사장 김호규 명의의 편집위원 위촉장. 2년에서 3년 단위로 위촉한 편집위원은 30년간 18명이 위촉되었다. 제1호로 당시 (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 사무총장 김연갑선생에게 발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