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V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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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음악창작곡 작품목록집(1996~2005)한국전통음악창작곡 작품목록집(1996~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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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음악총서10: 북한의 민족음악이론김리화·김영운·문주석·박영춘·배인교·신광호·신호, 『한민족음악총서10: 북한의 민족음악이론』, 서울: 국립국악원, 2020. 머리말 ․ 005 1. 남북한 전통음악 선법이론의 비교 - 김영운 _ 9 Ⅰ. 머리말 Ⅱ. 분단 이후 남한의 민요선법 연구 Ⅲ. 분단 이후 북한의 민요조식 연구 Ⅳ. 맺음말: 남북한 민요 음조직론의 비교 2. 북한과 중국의 민요조식 비교 - 박영춘·신호 _ 71 Ⅰ. 머리말 Ⅱ. 조선민족 조식이론의 발전맥락 개관 Ⅲ. 북한 민요조식의 형성원리와 체계 Ⅳ. 중국 민요조식의 형성원리와 체계 Ⅴ. 북한 민요조식과 중국 5성조식 간의 비교 Ⅵ. 맺음말 3. 북한의 장단론 연구 - 문주석 _ 129 Ⅰ. 머리말 Ⅱ. 시기별 북한 장단론의 변화양상 Ⅲ. 북한 장단의 종류 및 특징 Ⅳ. 맺음말 4. 북한 민족화성의 구성원리와 응용 - 박영춘 _ 173 Ⅰ. 머리말 Ⅱ. 민요 5음계조식에 기초한 다성구성의 기본원리 Ⅲ. 북한 민족화성의 응용 실제 Ⅳ. 맺음말 5. ‘조선’(북한) 성악이론의 민족음악적 특징 - 신광호 _ 223 Ⅰ. 머리말 Ⅱ. 조선(북한) 민족성악의 이해 Ⅲ. 일반 성악이론 Ⅳ. 민족성악 이론 Ⅴ. 맺음말 6. 1950~60년대 북한의 민족 악기 개량과 민족 관현악 편성 - 배인교 _ 245 Ⅰ. 머리말: 새로운 조선과 새로운 민족 관현악 Ⅱ. 민족 악기 개량 Ⅲ. 민족 관현악 편성 Ⅳ. 맺음말: 조선식 기악 음악 창작의 길로 7. 음악무용서사시에 나타난 ‘조선’(북한)의 민족음악양식 - 김리화 _ 71 Ⅰ. 머리말: 냉전체제하의 새로운 음악예술공연 Ⅱ. 음악무용서사시의 실제와 작품구성 Ⅲ. 민족음악 양식과 특징 Ⅳ. 현대적 민족음악 창조의 과정과 그 배경 Ⅴ. 맺음말 지은이 소개 ․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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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층문화 (basic culture , 基層文化)서민 내지 상민(常民)에 의하여 형성된 기저적·계속적 문화. 문화를 상층·중간층·하층의 3계층으로 나눌 경우, 상층문화는 소수의 정신적 지도자층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고, 중간층 문화는 상층문화가 중간층에 불완전한 모양으로 받아 들여진 문화이며, 하층문화는 이들 상층에서 형성된 문화가 민족의 모태로서의 서민대중인 기층(Mutterschichten)에 침하(沈下)한 것인데, 이 기층 속에 유지되어 있는 문화를 기층문화라고 한다. 이는 외부로부터 수용한 표층(表層)문화와 대응되는 것이며, 민족이나 지역의 문화가 내적인 발전·전파·접촉·피정복 등에 의하여 유지하고 있는 그 민족이나 지역의 전통적이며 고유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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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문화(民俗文化, folk culture) 대중문화(大衆文化, Popular Culture, Mass Culture)민속문화(民俗文化, folk culture) 전통적 요소가 농후하게 남아 있는 대중문화, 또는 외래문화의 수용이 늦은 농촌의 문화를 뜻하는 말. 특히 서구사회와 같이 고도산업사회를 이룩한 사회의 인류학자들이 자기의 전통문화를 농촌과 같은 지역의 민속에서 찾으려는 데서 발달한 개념이다. 따라서 민속문화는 기록되지 않은 생활의 관습 등이 주가 되며 근원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흔히 농촌문화와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대중문화(大衆文化, Popular Culture, Mass Culture) 대중매체에 의해 상품으로 대량 생산, 재생산되어 대중에 의해 소비되는 문화. 대중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대중 매체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제공되고 사회 전체 구성원들이 공유하게 되는 문화가 나타나는데, 이처럼 대중 사회를 기반으로 성립되는 문화를 대중 문화라고 한다. 대중 문화의 발달은 기존의 지배 계층만이 누리던 고급 문화를 일반 대중에게 보급시켜 문화의 계층적 벽을 허물고 대중도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대중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문화가 비창조적이고 획일화되며, 지나친 상업성으로 인하여 문화의 저질화를 가져오고, 엘리트에 의한 대중 조작이 가능해지는 문제를 낳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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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놀이1964년 12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남사당은 대개 농어촌이나 성곽 밖의 서민층 마을을 대상으로 하여 모심는 계절부터 추수가 끝나는 늦은 가을까지를 공연시기로 하였다. 남사당은 서민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지만 양반에게는 심한 혐시(嫌猜)와 모멸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아무 마을에서나 자유로이 공연할 수가 없었다.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공연에 앞서 마을에서 가장 잘 보이는 언덕을 골라 온갖 재주를 보여주는 한편 곰뱅이쇠가 마을로 들어가 마을의 최고 권력자(양반)나 이장 등에게 공연 허가를 받아야 하였다. 만약 허락이 나면 "곰뱅이(許可) 텄다"고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길군악'을 울리며 마을로 들어가지만 대개의 경우는 곰뱅이가 트이지 않았다고 한다. 저녁밥을 먹고 날이 어두워지면 놀이판으로 잡은 넓은 마당에 횃불을 올리고 공연을 시작한다. 한편 놀이판에는 사전에 가곡264의 줄을 매고 꼭두각시놀음의 포장막과 버나(대접돌리기)·살판(땅재주)·덧뵈기(탈놀음) 등을 위한 장치를 설치하며, 마당 한가운데에는 멍석을 5∼6장 깐다. 여기서 벌이는 '남사당놀이'의 종목은 6종이다. ① 풍물:일종의 농악으로, 인사굿으로 시작하여 돌림벅구·선소리판·당산벌림·양상치기·허튼상치기·오방(五方)감기·오방풀기·무동놀림·쌍줄백이·사통백이·가새(위)벌림·좌우치기·네줄백이·마당일채 등 24판 내외의 판굿을 돌고, 판굿이 끝난 다음 상쇠놀이·따벅구(벅구놀이)·징놀이·북놀이·새미받기·채상놀이 등의 순서로 농악을 친다. 풍물은 웃다리가락(충청·경기 이북지방)을 바탕으로 짰다고 하며, 참여 인원은 꽹과리·북·징·장구·날라리·땡각[令角]의 잽이[樂士]와 벅구 등을 포함한 최소 24명 정도가 1조를 이룬다. ② 버나:쳇바퀴나 대접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를 말하는데, 중국인들의 접시돌리기를 연상케 한다. 이 놀이의 묘미는 접시 등을 돌리는 외에 돌리는 사람인 버나잽이와 받는 소리꾼인 매호씨(어릿광대)가 주고받는 재담과 소리가 극성(劇性)이 짙은 데 있다. 돌리는 물체에 따라 대접버나·칼버나·자새버나·쳇바퀴버나 등으로 분류된다. ③ 살판:오늘날의 텀블링을 연상시키는 묘기로, '잘하면 살 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 한다. 종류는 앞곤두·뒷곤두·번개곤두·자반뒤집기·팔걸음 등 11가지 순서로 되며, 살판쇠(땅재주꾼)와 매호씨(어릿광대)가 잽이의 장단에 맞추어 재담을 주고받으며 재주를 부린다. ④ 어름:줄타기 곡예로, 무대 중앙을 가로지른 높다란 외줄을 어름산이(줄꾼)가 건너가며 매호씨와 재담을 주고받는 놀이이다. 종류는 앞으로가기·장단줄·거미줄늘이기·뒤로훑기·콩심기·화창사위 등 약 15가지가 있다. ⑤ 덧뵈기:덧(곱) 본다, 즉 탈을 쓰고 하는 연희로서 일종의 탈놀음이다. 4마당 구성으로 첫째 마당(마당씻이)에서 놀이판을 확보하고, 둘째 마당(옴탈잡이)에서 외세(外勢)를 잡고, 셋째 마당(샌님잡이)에서 내부의 모순을 없애고, 넷째 마당(먹중잡이)에서 외래 문화를 배격하는 내용이다. 탈은 샌님·노친네·취발이·말뚝이·먹중·옴중·피조리·꺽쇠·장쇠 등인데, 바가지 위에 종이를 쪄 붙여 탈에 따라 요철을 나타내고, 눈구멍과 입구멍을 뚫은 다음 아교·백분(白粉)·가루염료를 배합하여 각각의 특징을 그린다. ⑥ 덜미:남사당놀이의 마지막 순서이며 한국에 하나뿐인 민속인형극 꼭두각시놀음으로, 남사당패들에게는 덜미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이 6가지 놀이는 대략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3∼4시까지 연희되어 총 6∼7시간을 공연했다 한다. 남사당놀이는 야외 마당에서 연희자들을 둘러싸는 시골 관객들을 즐겁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특히 탈춤과 꼭두각시놀음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물론이고 하층민들의 억압받는 삶을 놀이로 보여 주었다. 이런 공연은 정치적으로 힘없는 자들을 대변하여 풍자로써 문제점들을 제기하기도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꿈을 주고 삶을 이어 가게 하는 평등과 자유의 이상을 보여 주었다. * 상모돌리기: 종이로 가늘고 길게 채 모양으로 만든 채상모를 쓰고 돌리는 기술 * 버나돌리기: 막대기를 사용하여 쳇바퀴를 돌리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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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이란?무형문화유산은 전통 문화인 동시에 살아있는 문화이다. 무형문화유산은 공동체와 집단이 자신들의 환경, 자연, 역사의 상호작용에 따라 끊임없이 재창해온 각종 지식과 기술, 공연예술, 문화적 표현을 아우른다. 무형문화유산은 공동체 내에서 공유하는 집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을 통해 생활 속에서 주로 구전에 의해 전승되어왔다. 유네스코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무형문화유산 보호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1997년 제29차 총회에서 산업화와 지구화 과정에서 급격히 소멸되고 있는 무형문화유산을 보호하고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제도’를 채택했다. 이후, 2001년, 2003년, 2005년 모두 3차례에 걸쳐 70개국 90건이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지정되었다. 무형문화유산의 중요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이 커지면서 2003년 유네스코 총회는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국제사회의 문화유산 보호 활동이 건축물 위주의 유형 문화재에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 즉 무형문화유산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확대하였음을 국제적으로 공인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무형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는 한편으로 아직도 세계화와 급속한 도시화, 문화 통합 정책과 더불어 젊은 세대의 관심 부족으로 인해 많은 무형유산이 사라지고 있다. ■ 무형문화유산의 정의 (협약 제2조 1항) + 공동체, 집단 및 개인이 자신의 문화유산의 일부분으로 인식하는 관습, 표현, 지식 및 기술 + 이와 관련된 전달 도구, 사물, 공예품 + 문화 공간 ■ 무형문화유산의 범위 (협약 제2조 2항) + 무형문화유산의 전달체로서 언어를 포함한 구전 전통 및 표현 + 공연 예술(전통음악, 무용 및 연극 등) + 자연 및 우주에 관한 지식 및 관습 + 전통 기술 ■ 무형문화유산의 특징 (협약 제2조 1항) + 세대와 세대를 거쳐 전승 + 인간과 주변 환경, 자연의 교류 및 역사 변천 과정에서 공동체 및 집단을 통해 끊임없이 재창조 + 공동체 및 집단에 정체성 및 지속성 부여 + 문화 다양성 및 인류의 창조성 증진 + 공동체간 상호 존중 및 지속가능발전에 부합 ※ 국제 인권 관련 규범과 양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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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世界遺産 / UNESCO World Heritage유네스코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지정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유산 및 자연 유산. 세계유산은 1960년, 이집트가 아스완 하이댐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이 댐이 완성되면 댐의 수몰지역 내에 있는 누비아 유적은 사라질 위기였다. 이에 유네스코는 누비아 유적을 지키기 위해 국제적인 지원을 호소했고 60개국이 여기에 호응하여 누비아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및 발굴, 기술지원 등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누비아 유적 내의 아부심벨 대신전이 대규모 프로젝트를 통해 옮겨졌다. 이를 계기로 국제적으로 문화, 자연유산들을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1972년 11월 16일,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서 개최된 17회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의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조약(세계유산 조약)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 조약은 1973년 미국이 최초로 비준한 이후 20개국이 비준한 1975년에 정식 발효되었다.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제도등 12개의 자연, 문화유산이 세계유산목록에 처음으로 등재되었다. 자매품인 세계기록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도 함께 보면 좋다. 세계유산은 여러 건축물을 한꺼번에 지정하기도 한다. 유럽의 경우 중세-근대 분위기의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유산이며, 교토는 킨카쿠지 하나만으로 세계유산이 아니고 교토의 많은 절과 경관을 포함해서 세계유산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로는 경주역사유적지구와 조선왕릉, 수원화성,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 등이 있다. 2. 등재 숫자 국가별 세계유산의 수를 따져보면 현재 이탈리아와 중국이 세계 최다(55개)를 자랑하고 그 밖에 많은 세계유산을 보유한 나라는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의 숫자는 세계유산 수) 35개 이상: 중국 (55), 이탈리아 (55), 스페인 (48), 독일 (46), 프랑스 (45), 인도 (38), 멕시코 (35) 20개 이상~35개 미만: 영국 (32), 러시아 (29), 이란 (24), 미국 (24), 일본 (23), 브라질 (22), 호주 (20), 캐나다 (20) 15개 이상~20개 미만: 그리스 (18), 터키 (18), 포르투갈 (17), 폴란드 (16), 스웨덴 (15), 대한민국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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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형유산 [ 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 , 世界無形遺産 ]요약 2001년부터 유네스코가 소멸 위기에 처한 문화유산의 보존과 재생을 위하여 구전(口傳) 및 무형유산을 확인·보호·증진할 목적으로 선정한 가치 있고 독창적인 구전 및 무형유산. 1997년 유네스코(UNESCO,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총회에서 소멸 위기에 처한 문화유산을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으로 선정하여 보호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이에 따라 2001년 5월부터 등재 사업이 시작되었다. 세계유산협약에 따른 세계유산이나 유네스코에서 선정하는 세계기록유산과는 개념상 구별되며 별도 관리된다. 2년마다 유네스코 국제심사위원회에서 선정한다. 선정 대상은 인간의 창조적 재능의 걸작으로서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문화사회의 전통에 근거한 구전 및 무형유산으로, 언어·문학·음악·춤·놀이·신화·의식·습관·공예·건축 및 기타 예술 형태를 포함한다. 2년마다 6월 말까지 유네스코 사무국에 등재 신청을 하면 국제비정부기구(NGO)와 여러 전문가들에 의한 평가가 이루어진 후 다음 해 4월에 국제심사위원회의에서 최종심의를 한다. 2008년 6월에는 제2차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종존의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제도를 '세계 무형유산 대표목록 및 긴급보호목록' 제도로 전환하였다. 종전 제도에서는 가장 우수한 무형유산 1건씩 신청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변경된 제도에서는 국내 목록으로 등재된 유산을 대상으로 하되 등재 건수를 제한하지 않으며, 현장실사를 하지 않고 신청서와 제출된 영상물을 통하여 심사를 한다는 점에서 요건과 절차가 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에 등재된 무형유산들은 대표목록으로 통합되었는데, 2013년 현재 대표목록 및 긴급보호목록에 등재된 세계무형유산은 총 88개 나라에 257건에 이른다. 각 나라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는 중국의 곤극(2001), 캄보디아의 왕실무용(2003),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연극 쿠티야탐(2001), 인도네시아의 그림자 인형극 와양(2003), 일본의 노가쿠(2001), 이라크의 마캄(2003), 모로코의 제마엘프나 광장 문화공간(2001), 예멘의 사나의 노래(2001),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음악 무감(2003), 벨기에의 뱅슈 사육제(2003),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전통인형극 푸피(2001), 라트비아의 발트 지역 가무축제(2003), 아르헨티나의 탱고(2009)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는 종묘 및 종묘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 단오제(2005), 강강술래(2009), 남사당놀이(2009), 영산재(2009), 처용무(2009), 가곡(2010), 대목장(2010), 택견(2011), 가곡264(2011), 한산모시짜기(2011), 아리랑(2012), 김장문화(2013), 씨름(2018) 등으로 총 20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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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자인단오제경산자인단오제는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에서 전승되고 있는 단오행사이다. 마을의 전설에 의하면, 신라(혹은 고려) 때 왜적이 침범하여 마을사람들을 괴롭히자, 한장군이 꾀를 내어 여자로 변장하고 누이동생과 함께 화려한 꽃관을 쓰고 춤을 추어 왜병들을 무찔렀다고 한다. 이후 한장군이 죽은 다음 자인마을 주민들이 한장군의 사당을 짓고 해마다 단오날이면 제사를 지내고 성대한 놀이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경산자인단오제는 제사와 가장행렬 여원무로 이어진다. 옛날에는 전쟁터까지 가서 여원무를 추고 사당에 올라가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시장의 넓은 광장에 모여 한장군 묘를 향해 행렬을 하는 데서 시작된다. 가장행렬의 순서는 동서남북과 중앙을 뜻하는 오방기가 맨 앞에 서고 농기·여원화관·무부들·희광이·여장동남·군노·사령·까치사령·포군·영장·기생·중군·익공·통인·일산·도원수·수배 등이 열을 짓는다. 가장행렬은 한장군 묘소를 한 바퀴 돌아 광장으로 내려가고,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들은 제사를 지낸다.경산자인단오제는 다른 민속놀이와 달리 이색적인 가장행렬로 이루어졌으며, 화관의 높이가 3m나 되고 춤사위도 매우 독특해서 예술적인 가치가 높다. 또한 오랜 역사를 지니면서 주민들의 확고한 신앙이 놀이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1973년 한 장군 놀이가 중요 무형 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면서부터 자인단오-한장군 놀이로 개칭되어 오다가 2007년 3월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이 변경된 2007년 행사는 봉산탈춤, 관노가면극, 진주검무 등 우리나라 중요 무형 문화재 초청 공연과 더불어 외국인 장기자랑, 씨름대회 등 외국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호주, 중국 등 각국의 외교사절과 많은 외국인을 초청하여 국제적인 행사로 개최되었다. ※명칭변경(한장군놀이 → 경산자인단오제/ 변경일 : 2007.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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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한국 외의 나라에서 한국의 대중가요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의 대중가요를 K-Pop(Korean Pop 또는 Korean Popular Music)이라 한다. 한편 일본의 대중가요는 J-Pop, 중국의 대중가요는 C-pop이라고 불린다. K-Pop은 넓게는 한국의 모든 대중음악을 통칭하는 말이지만, 좁게는 1990년대 이후의 한국 대중음악 중 댄스·힙합·R&B·발라드·록·일렉트로닉 음악 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랩과 댄스그룹이 성행하고 이때부터 대중음악의 흐름도 변하기 시작했는데, 현재의 K-Pop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외의 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한국 대중가요를 즐기기 시작한 후부터 K-Pop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부터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류(韓流)가 아시아 각국에서 열풍을 일으켰고, 2000년대 중·후반부터는 한국 대중가요가 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과 남미, 중동 지역까지 세계 각국에서 사랑을 받으며 드라마 한류 열풍을 이어갔다. K-Pop의 다양한 장르 중에서도 세계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이돌 그룹(걸그룹 & 보이그룹)의 음악이라 할 수 있다.K-Pop 아이돌 음악의 특징은 단순하고 경쾌한 리듬과 비트감,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 흥미로운 노랫말 그리고 멋진 댄스 실력으로 선보이는 군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팝과는 다른 또 하나의 특징은 시각적 즐거움이 크다는 점이다. 음악 기획사에 의하여 오랜 기간 훈련을 받은 아이돌들은 대부분 5~6명, 많게는 10명이 넘는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멋진 외모와 감각적인 패션 스타일, 화려한 댄스와 무대 장치 등을 통해 눈을 즐겁게 해준다.K-Pop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한 홍보가 큰 몫을 차지했다. 음악 기획사들은 소속 가수들의 홍보용 뮤직비디오를 유튜브 등에 올리며 온라인 마케팅을 펼쳤고, 이를 접한 이들이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확산시키는 식으로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K-Pop이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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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두선전아리랑종두선전아리랑 호열자 염병엔 예방주사 마-마 홍역엔 우두넛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천하에 일색인 양귀비도 마-마 한번에 곰보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고개서 우두 넛세 (매일신보, 1930.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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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 역사적 의미와 철원' 학술대회태봉학회와 한국군사사학회, 철원역사문화연구소 등이 주최·주관하고 철원군과 강원서부보훈지청이 후원한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철원의 역사상 지정학적 의미'를 주제로 한 이재범 경기대 명예교수의 발표와 함께 박동찬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과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연구소장 위영금 도산 통일연구소 연구위원 등의 발표와 토론 등이 이어졌다. (기미양/객원기자) 첨부:발표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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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종[ 編鐘 ]쇠붙이로 만들어졌으며, 고려 예종 11년(1116)에 송나라로 부터 수입되어 궁중 제례악에 사용되었다. 공민왕 때에도 명나라에서 보내왔으나 세종 11년(1429) 한양에 주종소(鑄鐘所)를 두고 새 종을 만들어 내어 주로 아악에 사용되었다. 제도(制度)는 약 30㎝ 미만의 길이를 가진 똑같은 크기의 종 16개가 크기에 따르지 않고 두께에 따라 고저를 다르게 하고 정성(正聲) 12율과 4청성(四淸聲)을 나무틀〔架子〕의 위·아래 두단으로 된 가로목에 음높이 순에 따라 한단에 8개씩 건다. 종 틀은 좌우의 두 설주를 거(簴)라 하고, 위 아래의 두 가로목을 순(簨)이라 하며, 순 위에는 숭아(崇牙)가 있고, 거의 위에는 업(業)을 얹는다. 업 위에는 깃〔羽〕을 꽂고, 또 단(端)과 벽삽(壁翣)이 있다. 종설주〔鐘簴〕는 나붙이〔臝屬〕로 장식하는데 아부(雅部)의 종설주는 호랑이이고, 속부(俗部)의 종설주는 사자라 하였다. 주법(奏法)은 종을 연주할 때는 각퇴로 종 아래 정면에 둥근 수(隧)를 치고 지금은 아악·속악을 가리지 않고 바른손 한손으로 연주한다. 예전에는 아악은 황종(黃鐘)부터 임종(林鐘)까지 아랫단은 바른손으로 치고, 이칙(夷則)부터 청협종(淸夾鐘)까지 윗단은 왼손으로 쳤으며, 속악의 경우는 두 손을 편한대로 쳤다. 현재 문묘제례악·종묘제례악·『낙양춘』.『보허자』 등의 연주에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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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소[ 太平簫 ]태평소는 세로로 부는 관악기로 지공(손가락으로 막고 여는 구멍)이 뒤에 1개, 앞에 7개가 있으며 호적, 날나리, 쇄납, 새납이라고도 한다. 특히 쇄납 혹은 새납이라는 이름은 중동지역의 관악기 "스루나이"에서 왔으며,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연주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평소는 몸통 부분인 관대와 서(reed), 동구, 동팔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대는 나무 속을 파내어 만드는데 단단한 대추나무로 만든다. 서는 갈대를 얇게 가공하여 쓴다. 겹서를 관대에 끼울 때는 금속제동구를 사용하는데 안쪽이 뚫려 있어야 공명이 잘되어 좋은 소리를 낸다. 태평소는 종묘제례악 정대업, 취타, 굿, 불교의식인 재(齋) 등에서 폭넓게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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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 杖鼓 ]장구는 허리 부분이 가늘다 하여 일명 "세요고"라 부르기도 하였다. 『악학궤범』에는 『문헌통고』를 인용하여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갈고, 장구, 요고는 한나라와 위나라에서 사용되었다. 요고의 통은 큰 것은 질그릇으로, 작은 것은 나무로 만든다. 머리는 모두 넓고 허리는 가늘다. 오른쪽은 채로 치고 왼쪽은 손으로 친다. 후세에는 이것을 장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송나라로부터 수입되어 조정의 당악에 쓰이고, 그 뒤 오늘날까지 정악뿐만 아니라 민속악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장구는 오른손에 대쪽으로 만든 가는 채를 가지고 그 채편을 치며, 왼손으로는 맨손이나 궁글채를 들고 북편을 치는데, 양편을 동시에 치는 것은 "쌍"이라 하고, 채로 채편만 치는 것을 "편", 왼손으로 북편만 치는 것을 "고", 그리고 채로 잠시 치고 굴리는 소리를 내는 것은 "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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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군악길군악은 길을 가면서 연주하는 행악(行樂)이다.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취타(吹打)의 뒤를 이어 관악기만으로 연주하는 곡이다. 그러므로 길군악을 연주하는 악기는 앉아서 연주해야 하는 현악기가 빠진 대금 · 향피리 · 해금 · 소금 · 장구 · 좌고 등 휴대가 간편한 악기들로 편성한다.길군악은 모두 4장으로 되어있으며, 3장과 4장 사이에 장을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돌장 1과 돌장 2가 추가되는데, 이것은 각각 1장과 2장의 반복선율로 구성된다. 마지막 장인 4장은 계면조로 변조되어 길군악 다음으로 연주될 길타령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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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음악협회[ 朝鮮音樂協會 ]일제 강점기 말기에 만들어진 최대 규모의 친일음악단체다. 1941년 1월 11일 발기인회를 열고 그 해 3월 25일 창립했다. 여러 음악 분야를 망라한 대규모 음악단체로 음악을 통해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조종해 발족했다. 회장은 조선총독부 학무국 국장이 맡았으며, 계정식(桂貞植) 김원복(金元福) 김재훈(金載勳) 함화진(咸和鎭) 현제명(玄濟明) 등과 일본인 13명이 이사로, 김세형(金世炯) 이애내(李愛內) 이종태(李鍾泰) 임동혁(林東爀) 홍난파(洪蘭坡) 등과 일본인 16명이 평의원으로 각각 참여했다. 조직은 방악부, 조선음악부, 양악부, 교육음악부 등으로 나눠졌다. 결성 당시에는 악단을 통한 조선음악계의 신체제 운동을 목표로 삼았으나 내선일체의 정서 강화, 일본음악 보급, 일본음악 건설 등으로 목표가 확대됐다. 이 같은 목표에 따라 조선음악협회는 태평양전쟁 종전 직전까지 일본 국민가요 보급, 연주를 통한 음악보국 운동, 전함 및 비행기 헌납 음악회 개최 등의 행위를 했다. 구체적으로는 음악 보국주간 설정 및 보국음악회 개최, 창립 기념 보국대회 개최, 지나사변 5주년 기념음악회 개최, 전의 앙양 국민대합창음악회 개최, 태평양전쟁 필승 결의 선양대회 개최, 징병 실시 감사 축하행사 개최, 조선음악대연주회 개최, 학도위안음악회 개최 등의 활동을 하고 국민가창운동을 전개했으며 문화단체 결의선양대회에 참가했다. 또 항공기 헌납 음악회를 후원하고 종전 한달 전에는 본토결전부민대회라는 관제 행사에서 취주악과 합창을 맡는 등 종전으로 해체될 때까지 약 4년 반 동안 음악을 통한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때에 따라서는 경성후생악단, 대화악단 등 다른 친일 음악단체와도 보조를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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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는 1934년에 결성되어 1940년까지 존속했던 판소리·기악 중심의 전문 전통음악 단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1934년 5월 창립 당시의 명칭은 조선음악연구회였으나, 같은 해 9월에 조선성악연구회라는 이름으로 개칭했다. 20세기 이후 전통음악인들은 급격한 사회문화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독자적인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 경성구파배우조합, 1920년대에 조선악연구회, 조선음악연구회, 조선음악협회, 1930년대에 조선음률협회, 조선악정회, 조선성악연구회 등이 설립된 정황으로부터 이러한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성악연구회는 판소리, 잡가, 창극, 산조, 병창, 무용 등 한국 전통공연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전문 단체였으나, 판소리 및 기악 위주의 활동이 많았다. 공식 회관은 서울 공평동에 있었지만 창립 5개월 만에 관훈동으로 이전했고, 순천의 거부(巨富)였던 판소리 후원자 김종익(金鍾翼)의 지원을 받아 서울 익선동 소재의 한옥으로 회관을 다시 옮기면서부터는 비교적 안정적인 기반을 유지했다. 조선성악연구회는 판소리, 잡가, 창극, 산조, 병창, 무용 등 한국 전통공연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전문 단체였으나, 판소리 및 기악 위주의 활동이 많았다. 이러한 경향은 판소리 명창 송만갑(宋萬甲, 1865-1939)·정정렬(丁貞烈, 1876-1938)·김창룡(金昌龍, 1872-1943)·이동백(李東伯, 1866-1949)·이화중선(李花中仙, 1899-1943)·박록주(朴綠珠, 1909-1979), 기악 명인 김동강(金東剛)·오태석(吳太石, 1895-1953)·김종기(金宗基, 1902-1940?)·강태홍(姜太弘, 1894-1957)·심상건(沈相健, 1889-1965)·김채련(金彩蓮), 고수 한성준(韓成俊), 기획 김용승(金容承)의 14인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김창룡, 이동백, 한성준이 차례로 이사장을 역임했던 데서도 확인된다. 조선성악연구회는 성악연구부, 기악연주부, 교습부, 흥행부, 외교부 등의 하부 조직을 두고 있었으며, 경과 보고·결산 보고·임원 개편·규약 개정·새 사업 기획 등을 목적으로 1년에 한 번씩 정기 총회를 개최했다. 공식 회관은 서울 공평동에 있었지만 창립 5개월 만에 관훈동으로 이전했고, 순천의 거부(巨富)였던 판소리 후원자 김종익(金鍾翼)의 지원을 받아 서울 익선동 소재의 한옥으로 회관을 다시 옮기면서부터는 비교적 안정적인 기반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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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 박헌봉(朴憲鳳/1907~1977)해방 이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국악이론가. 경상남도 산청 출신. 1921년에 상경하여 한성강습소(漢城講習所) 보통과를 거쳐 1923년에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 고등과 3부를 졸업함. 1924년진주(晋州)에서 김덕천(金德天)·임한수(林漢洙)에게 2년간 가야금풍류(伽倻琴風流)·가야 금병창(伽倻琴倂唱)·고법(鼓法) 등 전통음악을 공부하고, 1934년에 진주음률연구회(晋州音律硏究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있으면서 풍류와 민속악을 연구함. 1936년에 상경하여 정악견습소(正樂見習所)에서 정악을, 아악부(雅樂部)에서 아악풍류(雅樂風流)를 연구하였고, 1938년에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근무하며 2년간 전통음악을, 조선가무연구회(朝鮮歌舞硏究會)에서 경서도(京西道) 가무를 연구함. 1941년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산하에 조선악부(朝鮮樂部)를 창설하고 상무이사로 취임하여 공연과 교육활동에 종사. 1945년 광복이 되자 국악건설본부(國樂建設本部)를 창설하고 부위원장으로 취임하여 국악의 부흥과 계몽에 힘썼음. 1947년에 구왕궁아악부 대표 겸 이사장으로, 1948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및 시공관운영위원(市公館運營委員), 문교부 예술위원으로 취임하였음. 1956년에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을 창설하고 원장 겸 이사장에 취임하여 국악 진흥에 힘썼으며, 1960년에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63년에는 국립극장운영위원 및 한국국악협회(韓國國樂協會)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韓國藝術文化團體總聯合會) 부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64년 문화재위원회(文化財委員會)의 위원을 역임하였음. 국악, 특히 민속악의 부흥과 교육에 공헌하여 1963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저서로는 『창악대강(唱樂大綱)』 등이 있다. 이를 기려 ‘기산국악제전’ 전국국악경연대회가 13회 개최되었음. 9월 12일 제14회가 개최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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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樂而不流 哀而不悲 신라 진흥왕 때 우륵-“즐거우면서도 지나치게 들뜨지 않는다” 樂而不淫 哀而不傷 공자 논어-“즐거워하되 넘치지 않고 슬퍼하되 손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