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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려 판소리연구소의 <고 한농선 명창 추모공연> *무기한연기*

김다슬
기사입력 2014.03.2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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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려 판소리연구소는 4월 16일 여객선 '세월호'의 침몰 소식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하루빨리 실종자들이 구조되어 생존하기를 바라며 대회를 무기한 연기합니다. 1. 일시 : 무기한 연기 2. 장소 : 국립국악원 우면당 3. 주최 : 강길려 판소리연구소 4. 주관 : 강길려 판소리연구소 5. 문의 : 010-2525-0111 6. 공연소개 오는 24일(목) 오후 7시 30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고 명창 한농선 추모 공연이 펼쳐진다. 이번 공연은 강길려 판소리연구소 주최로 신영희,김청만,강정숙,강길려 등 명인명창이 출연하여 고 한농선 명창을 기린다. 7. 한농선 명창 한농선(韓弄仙) 여류명창.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5호 흥보가 예능보유자. 가야금명인 한성기(韓成基)의 딸로 일본 동경에서 1935년 출생 했으며, 2002년 2월 제5호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 되었으나 4월 8일 오후 7시 급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68세)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가야금 명인이었던 아버지(韓成基)에게서 8세 때부터 줄풍류를 학습했다. 당시 한성기 선생은 조선의 예술인들을 일본에 강제 이주시키는, 이른바 ‘내선일체’ 정책으로 동경에 살고 있었다. 선생은 김창조(金昌祚) 선생에게 예술을 익혔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란 한농선 씨였지만 가야금을 배울 때만큼은 거침없이 매도 들 만큼 아버지가 엄했다고 떠올린다. 9세 때 목포 양동으로 이사하면서 한농선 씨가 걸어야 할 예인의 길은 최초의 변혁을 맞는다. 목포극장에서 먼발치로 만난 당시의 신숙(愼淑) 씨와 김소희(金素姬) 씨가 그렇게 예쁘고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어 최막동(崔莫童)선생에게 춘향가와 심청가를 학습하면서 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를 18세 때까지 배웠다. “아버지를 졸라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지요. 목포의 최막동(崔莫童) 선생을 찾아가 춘향가와 심청가를 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1950년 9월)인 18세까지 가야금과 소리 공부를 함께 했습니다.” 28세 때 박녹주(朴綠珠)에게 흥보가 등을 사사했다. 영화 "홍살문"·"월하의 공동묘지"에 출연했으며, 1960년에는 라디오 연속극 "후추탁"의 주제가를 소리로 불렀다. 1950년대 말 원각사 개관기념 춘향전 공연 때 춘향 역을 맡았다. 박녹주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가를 이루었다.당시 미모의 한농선 씨는 28세에 당대에 날리던 여류 명창 박녹주(朴綠珠, 1906~1978) 씨를 만나면서 평생을 모녀같이 지내며 오늘의 인간문화재(5호, 판소리 보유자 후보, 1982년 지정)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동안 박초월(朴初月) 선생에게 수궁가를 배우고 김소희 선생에게는 심청가와 춘향가를 이수 연마한 뒤였고 ‘이씨’와의 결혼으로 인생의 쓴맛 단맛도 겪고 난 뒤였다. 1960년대 신세계레코드에 "새타령"·"칠석놀이"·"널뛰기"·"강강술래" 등의 남도민요를, 그리고 킹스타레코드에 "진도아리랑"·"육자배기"·"자진육자배기" "긴농부가"·"자진농부가"를 취입하였다. 198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흥보가 준보유자가 됐다. 1968년 성음사가 제작한 LP음반(SFS-1201~1210) 『民謠三千里』에 김옥심·묵계월·성창순 등과 함께 취입하였다. 1977년 3월 24~27일 국립창극단의 심청가 공연 때, 9월 16~19일 국립창극단의 흥보가 공연 때 출연했고, 6월 25일, 8월 27일, 그리고 9월 24일 국립창극단의 판소리감상회 때, 1978년 4월 29일과 9월 30일 국립창극단의 판소리감상회 때, 5월 18일 박녹주의 흥보가 전수자연창회 때, 6월 10~12일 민요대잔치의 남도민요 공연 때, 1979년 5월 14일 제8회 판소리유파발표회 때, 1980년 4월과 8월 국립창극단의 판소리감상회 때, 1981년 10월 25일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때, 1982년 11월 3일 제13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때, 그리고 1987년 11월 25일 제17회 판소리유파발표회에 출연했다. 1990년 10월 6일 서울놀이마당에서 판소리발표회를 열었다. 1991년 4월 14일 주말민속공연 때, 12월 7일 제21회 판소리유파발표회 때, 12월 16일 고(故) 한일섭 추모음악회 때, 1992년 10월 19일 제23회 중요무형문화재 무대종목 발표공연 때 출연하였다. 1993년 3월 27일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완창판소리 흥보가 발표회를 열었고, 12월 14일 KBS-FM국악무대의 판소리명인전 때, 1994년 6월 19일 94일요명인·명창전 때, 9월 29일 제14회 대한민국 국악제 때, 12월 6일 제24회 판소리유파 발표회 때, 2월 13일 중요무형문화재 무대종목 공연 때, 1995년 9월 29일과 10월 13일 중요무형문화재 공연 때, 1996년 3월 13일 KBS국악관현악단 제86회 정기연주회 때, 그리고 10월 26일 제2회 판소리유파발표회 때 출연했고, 1999년 6월 19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완창판소리 흥보가 발표회를 가졌다. 한농선 선생이 잇고 있는 소리제는 송만갑(宋萬甲)―김정문(金正文)―박녹주로 내리닫는 동편제지만 강산제의 계면조(界面調, 슬프고 구성진 調格)를 가미하고 있어 ‘섞어제’란 표현이 적절하다는 주장이다. 박녹주 선생에게서 박송희(朴松姬), 조순애(曺順愛) 씨 등과 함께 소리 공부를 했다. 2001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판소리 강사로 후진을 양성하다가 2002년 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자마자 4월에 세상을 떠났다. 1967년 호남예술제 기악부 특상, 제4회 경주신라문화제 전국국악경연대회 가야금병창부 장원, 1997년 7회 김해가락문화제 국악경연대회 가야금병창부 대통령상, 제4회 전국판소리경연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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