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0 (금)
한영서원(韓英書院 Anglo-Korean School)은 윤치호와 애국가의 역사적 거점이다.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한영서원 학생용 찬미가집에 ‘Patriotic Hymn 뎨14(애국적 찬미가 제14장)’을 수록하여 애국가로 확산시켰고, 둘은 1910년대 초 교사들에 의해 ‘애국창가집’을 발간하는 등 노래운동을 전개하며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보급시켰다. 셋은 졸업생들이 "애국가는 윤치호 교장 작사”라고 배웠음을 증언하여 작사자를 확정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사실이다.
한영서원과 윤치호의 관계에 대해서는 1912년 9월의 경성지방법원 ‘新民會·105人事件 判決文’에서 확인이 된다.
"피고 윤치호는 고(故) 남작 윤웅렬(尹雄烈)의 장남으로 어려서 도쿄(東京)에 유학하고, 그 후 상해에 가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에 도항(渡航)하여 그곳에서 유학한 지 5년 후 귀국하여 의정부참의(議政府參議),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고 그 다음 외부협판(外部協辦)으로 전임하여 제1차 한일협약(1904) 성립의 결과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개성 한영서원(韓英書院),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원장 및 교장을 맡고 있으면서, 위의 협약 체결에 상당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1094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개성 한영서원 원장(교장)을 맡았다고 하였다. 1912년 신민회사건 판결문에서 밝힌 것이다. 다음은 1933년 중반 대중잡지 ‘三千里’에서 ‘평양 대성학교장(大成學校長) 역대거두(歷代巨頭) 윤치호・안창호’에서 대성학교를 소개하며 언급한 기록이다.
"평양 대성학교 초대 윤치호 씨는 구한국 정부시에 駐米(미국)공사를 역임하였고 개성의 한영서원 원장으로도 있었으며 더욱 재야 시에 서재필 이상재 씨 등과 더불어 독립협회, 대한렵회 등 정당을 창설하여 크게 활약하던 분이다. 교장으로 재직한지는 양 4년 간이다.”
한영서원은 윤치호의 이력에 중요한 지점이다. 특히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의 후원을 얻어 개교하였다는 기독교적 배경에서 애국계몽운동이란 그의 철학을 실현한 곳이면서 ‘애국가’의 탄생지이며 확산의 거점이기 때문이다. 윤치호가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10월 3일 14명의 학생으로 개교하였다.교사는 초가지붕의 뜸집이었고 ‘한영서원’이라 쓰인 커다란 현판을 단 것이 전부였다.그러다 1908년에는 225명으로 확대되어 동년 9월에 대지 120평에 3층의 석조 건물로 신축하였다.
학칙에 의하면 인문교육 및 실업교육 중심으로 소학과 4년, 영어전수과 2년, 고등과 3년, 반공과(半工科) 3년 과정이 있었다. 소학과에서는 수신, 국어, 한문, 역사, 일어, 산술, 이과, 도화, 창가, 체조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고, 고등과에서는 도덕, 국어, 한문, 역사, 일어, 수학, 영어, 음악, 체조, 지리, 도화, 작문, 과학을 가르쳤다. 반공과는 고등과에다 실업과목을 더해서 가르쳤고, 일주 27시간의 수업을 하였다. 학생은 15세 이상의 남자로 신체건강하고 품행이 단정하며 보통 국한문에 통달한 자로 하였다.
이 같이 실업교육이 강조된 것은 윤치호의 직업관으로 기본 원리 습득과 사회 적응을 준비하는 교육적 목적 추구 외에도 학생들의 수업료 부담을 줄이고 자립의 여건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런 정황에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초판과 재판의 발행 상황을 추정할 수가 있다. 즉, 초판 ‘찬미가’는 소수의 입학생을 위해 13편을 수록하여 등사(프린트)판으로 소량 발행하고, 이후 학생 수의 증가로 교재 간행 등을 위해 윤치호 등이 인수한 출판사 광학서포(廣學書鋪)에서 재판을 발행하였다. 여기에서는 1907년 새로 작사한 ‘찬미가 14장’(애국가) 외 1편을 더해 연활자의 정식 출판으로 출간하였다.
광학서포는 김상만책사(金相萬冊肆)가 이름을 바꾼 것으로, 윤치호ㆍ이상설ㆍ남정철ㆍ조경구ㆍ김학진ㆍ김진수ㆍ임병항 등의 발기로 설립되었고, 같은 해 4월 29일에 열린 임시총회에서 회장에 윤치호, 사장에 김종한(金宗漢)을 선출하여 운영하였다. 1907년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 신채호가 번역한 ‘이태리건국삼걸전’,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윤치호 역술 ‘찬미가’ 등을 발행했다. 일제강점 이후 압수, 검열, 발매금지 등으로 출판방향을 바꾸었으나 1910년대 말까지 약 100여 종을 출판하고 문을 닫았다.
이렇게 ‘찬미가’는 윤치호에 의해 설립 된 학교의 교재로, 그의 주도로 운영된 출판사 출판물로 간행되었다. 이의 결과로 이 책에 수록된 ‘애국적 찬미가 제14장’은 찬송가의 기능을 넘어 대표적인 ‘애국가’로서 불러지게 되고, 같은 미션계 학교로 파급되었다. 이 시기는 일제가 강점 하여 지배를 하기 위해 시국의 노래에 주목을 하는 상황이었다. 조선총독부 테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이 1911년 7월 1일 각도 장관회의 연설에서 이런 내용을 강조한 바가 있다.
"독립을 고취하고 일본제국을 반대하는 불량창가이자 위험한 노래는 허용하지 않으니 취체상 주의가 필요가 있다. 일본은 실력으로서 이를 진압할 것이고, 이 때문에 오직 조선인만이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이런 총독의 단언은 이 시기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노래들이 많이 불렸으며, 동시에 가장 엄한 불경죄로 다스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2년 3월부터 발효한 ‘조선형사령’이나 ‘조선민사령’을 기존의 보안법이나 출판법과 함께 적용하여 이중으로 탄압을 한 것이 그렇다.
한편 이 시기 윤치호는 소위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투옥 되었다. 그러나 이 공백을 대신하여 교사들이 맡아 애국가 등으로 민족교육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를 일제는 ‘한영서원 창가집 사건’으로 포착하여 탄압하기에 이르렀다. 일제가 출판법과 보안법은 물론 조선형사령까지 적용하여 탄압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교사 신영순과 백남혁, 서기 오진세, 음악과 교사 정사인, 그리고 권사 이경중이 애국창가집을 발행하고 보급하였다. 이 창가책이 일경에 압수된 사건이다. 사학자 강덕상(姜德相)의 ‘現代史資料’를 인용하여 서술한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 ‘한영서원 애국창가집 발매반포투쟁’의 일부는 이렇다.
"1914년 경기도 개성 사립 한영서원 교사 신영순(申永淳)·이상춘(李常春) 등이 배일사상 양성에 일조하고자 국권회복을 고무하는 창가 편찬을 협의하였다. 이들은 수편의 애국창가를 작가(作歌)하고 간도에서 창가를 수집해 갖고 있던 이경중 목사에게 이를 제공받은 다음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를 포함해서 1914년 8월 제1권 40부를 인쇄하여 한영서원 및 호스돈여학교 생도에게 반포하였다. 이어 1915년 9월 제2권 90책을 반포하였다. 1916년 신영순·이상춘 등 6명은 이 사건으로 보안법위반 및 불경죄로 피체되었다. 이후 음악교사 정사인(鄭士仁), 학감 이만규(李萬珪), 음악대 생도 10명, 사립 호수돈여학교 교사 등 22명이 추가로 피체되었다. 음악교사와 생도들은 창가를 연주한 행위를, 윤자순(尹滋亨)과 이치선(李致善)은 1912년 10월 이와 유사한 창가집을 편찬한 사실을, 그 외는 창가집의 배포와 관련된 활동을 문제 삼았다.”
이 사건으로 분명히 드러난 것은 윤치호가 교장인 한영서원이 애국 창가 보급에 앞장섰으며 이 때 불려진 애국가는 윤치호 작사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 때의 ‘애국가’가 윤치호 작이라는 것은 방증 자료가 있다. 1914년 간도 일본총영사관 산하 외사경찰이 외무성 외무대신(加藤高朋)에게 보고한<最新唱歌集 發賣禁止ニ關スル件>에 의한다. 여기에는 ‘尹致昊作 愛國歌等 不隱唱歌’라고 하였다.
"韓英書院ノ不隱文書發覺 大5.11.13. 尹致昊作 愛國歌 等 不隱唱歌集 印刷 一部 40錢”
또한 이 사건의 주모자로 수형을 겪은 교사 신영순의 관련 증언에도 1913년 문제의 창가책에 ‘윤치호 작 애국가’가 분명히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교사와 학생들의 증언에서 윤치호 작사임이 확인 되는데, 이후의 기록들에서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독립기념관 자료에는 ‘김동성(金東成, 1890∼1969)이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콘웨이, ARK; 1911)이 있다. 이는 김동성이 1911년 10월 15일자로 미주에 있던 안창호에게 보낸 것이다. 여기에는 "소생은, 송도 한영서원 생도로 2 년간을 윤치호씨 아래 있다가···”라고 하여 윤치호를 잘 알고 있었음을 표한 자료이다.
김동성은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학 이론서 ‘新聞學’을 출간했다. 언론인으로서 동아일보 기자로 출발하여 조선일보 등에서 활동하고 합동통신을 설립하였다. 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해외특파원, 국제기자대회 최초의 참석자, 최초의 군정청 여권소지자, 맥아더(MacArthur,D.)를 회견한 최초의 한국기자 등, ‘최초’ 기록을 보유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으로 초대 공보처장을 맡았다.
그런데 이 김동성이 1955년 5월 2일자 서울신문과 1967년 11월 6일자 경향신문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임을 밝혔다.
"나는 이미 50년 전부터 ‘愛國歌’ 작사자가 尹致昊 선생이란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 내가 한영서원에 다닐 때 학생들은 매일 아침 윤선생이 만든 ‘愛國歌’를 불렀던 것이다.”
한영서원 학생의 직접 체험을 증언한 것이다. 이는 당시 교사 채필근이나 신영순이 증언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한영서원은 윤치호가 설립한 남감리교 게통의 미션스쿨로 학생들을 위한 ‘애국가’를 지어 교재로 발행했다. 이는 이웃 기독교계 학교로 전파시켜 많은 애국가류 중에서 ‘애국적 찬미가 제14장’을 대표 ‘애국가’로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을 교사들의 실천과 학생들의 증언으로 후세에 남겨주었다. 이제 윤치호 애국가 작사와 그 확산 등을 맥락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6년 한영서원 개교, 초판 ‘찬미가’ 프린트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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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애국적 찬미가 14장’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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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재판 역술 ‘찬미가’에 ‘애국적 찬미가 제14장’으로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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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미주 국민회의 ‘국민가’ 채택, ‘국민가’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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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한영서원 애국창가집 발행으로 ‘애국가’ 확산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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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 1운동 기간 대표적인 애국가로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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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임시정부, 애국가를 국가로 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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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국민회 안익태 신곡보 사용 허가로 임시정부 국가로 준용(準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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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묵서 가사지를 통해 작사 사실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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