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如是我聞 知見不生分 嘎音哦哩’
굳이 해석하자면 "나는 그렇게 들어 알기에 알음알이로 아는 체 하지 않는다.”란 말이다.
삼목三目의 책상 앞 벽에 붙어있는 글귀다. "선인으로부터 듣고 보고 배워서 알되 어설프게 아는 척은 하지 마라”는 경구다. 잘 알려진 불경 첫머리말에 우리식 한자를 합성한 약간은 억지스런 문장이지만 삼목은 소중하게 30여 년을 지니고 다닌다.
빛이 바래 흐릿한 만년필 글씨는 삼목의 스승이기도 한 중하中夏 최서면崔書勉 선생(1928~2020/향년 92세)이 써준 것이다. 당연히 낙관이나 서명이 없는 메모 쪽지 수준이지만, (재)국제한국연구원 원장 시절 기획실장으로, 초대 전국아리랑보존연합회 이사장 시 사무국장으로서 일할 때인 1989년 받은 것이다.
초겨울 어느 날 저녁, 방배동 해무海霧라는 고급 카페에서 몇몇 분들과 만찬 후 갖게 된 자리였다. 이런저런 이야기기 끝에 선생의 ‘서면’이란 이름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삼목은 그야말로 말석에서 의미 있게 듣는 처지였다. 자리에는 원로 교수, 영화감독, 기업가, 이렇게 세 분과 함께 선생의 본명이 호가 되고, 호가 이름이 된 사연을 듣게 된 것이다.
"내 본명은 원래 중하야, 최규하 사촌형님과 같이 우리는 하夏자 돌림이거든. 지금 내 이름 서면을 쓰게 된 사연이 있지. 1947년이지. 동아일보 사장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을 때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이시영 선생의 도움으로 미군정에 재심을 청구하여 2년 뒤인 49년 10월에 형집행정지로 석방이 됐었거든. 그때 이시영 선생이 지어준 것이 ‘서면’이야. 이때부터 내 초명 중하는 지금 호로 쓰게 되었지. 이시영 선생이 출감하면 정치하지 말고 책 보며 근면하게 살라며 지어 준 것이지. 이게 좋아서 본래 이름은 호로 쓰고 호로 지어준 것을 이름으로 쓰게 되었지.”
삼목이 자신의 상전 이름에 관한 사연이니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이에 특유의 줄담배를 피며 얼음 소리가 나는 그라스를 흔들며 삼목을 지목하였다.
"자네는 호가 뭔가? 있나?”
자신의 얘기에 눈을 떼지 않고 주목하는 모습에 호기심이 발동해선지, 어린 나이니 호가 있겠나 싶어서 한 질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삼목은 좀 들뜬 어투로 즉각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30대 중반에 60대 원로들의 말석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발언권을 얻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예, 저요? 쓰진 않지만 있긴 합니다. 석 삼, 눈 목자, 삼목三目입니다. 눈이 세 개니.... 뭘 잘 찾아낸다는 뜻입니다.”
"눈이 셋이라고? 그래? 어 그러고 보니 자네 양미간에 점이 하나 있으니 그렇네.”
이 말에 좌중의 시선이 삼목의 이마를 향했다. 국제법학계 원로 배재식 교수가 거들었다.
"그거 쓸만하네. 그래서 자료 찾는 일 하려고 최 원장에게 온 거야?"
"아닙니다. 그냥 주신 분의 설명이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
"야 이 사람아. 지금 들었잖나. 책 읽는 데 근면하라는 뜻대로 최 원장은 온 세상 책을 다 읽고 있잖아. 자네도 호대로 귀한 것을 찾아낼 수 있는 것 아냐? 좋은 호야. 그래 지어 준 분이 뉘신가?”
"예, 저를 도와주신 분인데, 유명한 분이 아니라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삼목은 구체적으로 밝히지를 않았다. 아니 밝힐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앞에 있는 중하 선생과 사이가 아주 나쁜 사운 이종학史芸 李鐘學선생(1927~2002/향년 75세)이 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분 사이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도 자료 진위와 해석 차이로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이다. 어느 정도 알려진 얘기지만, ‘시마네현 고시 공고’ 문제로 대립하는 서울대 사학과 신용하교수, 이순신 장군 유묵(‘寒山島’. 이 유묵에는 ‘閑’이 아님) 진위 판정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지곡서당 좌장 임창순 선생과 같은 관계다.(이 두 분과의 갈등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화에서 밝힐 예정이다.)
사운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대로라면 서면 선생의 일본 국제한국연구원을 방문하여 독도자료 정보를 교환하게 되었다. 그때 "조선시대 문집 소재 독도 기록 자료를 양도할 수 있느냐”고 청하자 사운선생 소장 자료하고 교환을 하자는 조건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몇 개월 후 한국에 온 서면선생이 수원 이종학 선생 자택으로 방문, 자료를 살피게 되었다는데, 서면 선생이 이종학 선생의 고지도 한 점과 교환을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고지도는 가격이 매우 크게 나가는 것이라 사운선생이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중하 선생이 약속을 위반한 것이라고 화를 내고 헤어진 후 사이가 영영 멀어지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후 사운선생은 우연히 지인으로부터 중하선생이 일본에서 중앙정보부에 북한 김일성에 관한 정보를 전하는 편지를 구하게 되어 "최서면은 중앙정보부 정보원”이라는 말을 하게 되고, 이것이 중하 선생에게 들어가게 되면서 사이가 아주 나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어서 '삼목'이란 호를 사운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말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내친김에 이 호를 받게 된 전말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구구한 것을 빼고 정리하면 이렇다.
1995년 초, 삼성문화재단과 사운 선생이 울릉도 ‘독도박물관’ 기공식을 위해 울릉도에 체류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날씨가 쾌청한 날에 군 관계자와 성인봉 정상에서 독도를 목측目測하고자 오른 적이 있다. 다행히 눈이 온 후 맑은 날씨이어서 전해 오는 바대로 한 점點으로 독도를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사운 선생만 보인다고 하여 설왕설래하다가 두 사람이 한 점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매우 만족한 마음으로 선생의 이장설이 있었다.
"독도는 일본은 어디에서 보든 목측이 불가하지.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구. 이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독도를 국토로 인식했다는 말이지. 그러니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 얼마나 극적인 순간인지 알겠지!”
두 사람은 방금 전 독도를 목측하였다는 사실이 매우 큰 의미가 있다는 선생의 설명에 강하게 긍정하는 것으로 답하였다. 그러다 이 말끝에 어떤 역술가가 지어준 호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남들과 다른 눈썰미가 있다는 것은 사주팔자에도 있나 봐. 1970년대 말 얘긴데, 모 교수와 강릉에서 귀중한 문헌이 발굴되었다는 신문을 보고 그걸 보려고 갔다가 허탕을 치고 오던 중에 그 교수가 잘 아는 역술가를 방문하게 되었지. 종로 3가 단성사 뒷골목이었는데, 그 양반이 내 사주도 묻지 않고 바로 하는 말이 나보고 남들이 몰라보는 것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는 것이야. 보통 사람들 보다 눈이 하나 더 있다나? 그러더니 석 삼자 눈 목, ‘삼목’을 호로 쓰면 좋겠다며 써주더라구. 지금 내가 쓰는 사운史芸이란 호는 자호自號야. 삼목이란 호는 그 양반이 주어 받긴 받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쓰지 않았지.”
이런 사연을 듣고 산을 내려와 도동한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삼목이 선생에게 요구하였다.
"선생님, 그 삼목이란 호 쓰지 않으실 거면 제게 주시면 안 될까요? 어렸을 때 친구들이 저 보고 이마 가운데 점이 있다고 ”눈이 하나 더 있는 놈"라고 놀렸거든요. 제 별명이잖아요”
그런데 선생은 선뜻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긴 자네도 그런 재주는 있어 보여. 자네 나이에 80년대 중반 우리나라 잡지 창간호 전시회를 열고, 그때 군정청에서 독도 기사를 넣은 간행물 창간호를 보고 아리랑(‘가요 만주아리랑’)이 수록된 노래책 ‘해방가요’와 교환하게 되면서 나랑 인연을 맺은 거 아냐? 눈이 세 개라는 별명을 삼목이란 호로 쓰는 거 의미가 있겠는데? 쓸라면 쓰라고. 자네 호로”
삼목은 이렇게 해서 비교적 이른 나이에 호를 갖게 되었다. 이종학 선생의 호 ‘삼목’을 받게 되어서..... 그리고 이후 3년여 시간을 함께하기도 했다. 결국 삼목은 중하 선생의 (재)국제한국연구원 기획실장으로 2년 반과 사운선생의 사운연구소 연구부장으로 3년 여의 활동 기간은 사료 데이터베이스 작업에 함께함으로써 사료 해석에 대한 감각과 이해력을 습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삼목의 40대에서 60대에 이른 나름의 전문 분야 활동에 큰 밑받침이 되었다. 그래서 두 스승과 관련한 이 에피소드는 마치 어제인 듯이 소상하고 애틋하게 피력하는 그의 중요한 ‘과거’이다.
삼목의 40여 년 집중 작업은 ‘역사의 노래 애국가愛國歌’와 ‘민족의 노래 아리랑’ 연구이다. 그 일단이 바로 ‘막소설 아름아리’다. 스승으로부터 듣고 배운 사료 해석력을 바탕으로 두 주제를 지표화하고, 역사화하는 작업이다.
마지막으로 사족을 단다. 막소설이란 ‘소설이듯 소설이 아닌 형태’, ‘두서없는 이야기’ 정도로 ‘막’에 방점을 둔 표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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