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2 (일)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규진(편고재 주인)
이제는 고인이 된 이 형기 시인에게서 강의를 한 학기 들었던 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 시인은 내게는 스승이나 다름없는 분이다. 그런데 세월이 참으로 많이 흐른 탓인지 당시의 강의 내용도 강의 모습도 전혀 떠오르지를 않는다. 대신 이 시인 하면 그분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낙화(落花)'가 생각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시는 절창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원숙하다는 느낌이 든다. 인생의 고비 고비를 넘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볼 수 있는 나이에 이른 듯한 노숙함이 묻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는 놀랍게도 이 시인이 20대에 쓴 시다. 한 마디로 나이에 비해 조숙한 시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사실 이 시인은 조숙한 시인이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문예'지로 등단을 했으니 조숙한 시인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예지 등단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등단 후 인사차 진주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온 까까머리 학생인 이 시인에게 조 연현 당시 문예지 주간은 여관방을 잡아주고 심심할 테니 소일하라며 술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사 넣어 주었다니 조숙함을 인정한 배려였을까?
그런데 '낙화'중에서도 절창 중의 절창인 첫 연의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생각하면 내게는 떠오르는 도편 한 점이 있다. 백자개구리연적편이 그것이다. 이 백자개구리연적편을 언제 어디서 구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정겨움 때문에 오랜 세월 내 곁에서 내 눈길을 자주 받아온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는 일이다.
사실 개구리는 특이한 동물이다. 허파로 숨을 쉬는 것이 부족해 살갗으로도 숨을 쉰다. 따라서 비가 오면 숨쉬기가 편해져 즐겁게 울어댄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불효자 청개구리의 슬픈 울음소리라고 돌려 말하기도 한다. 평소 말을 안 듣고 반대로만 행동을 하는 아들 청개구리에게 어미는 죽은 후 냇가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한다. 평소의 소행대로라면 반대로 물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묻어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아들은 어미의 죽음을 통해 철이 났던지 냇가에 무덤을 쓰고 만 것이다. 그리고는 비만 오면 떠내려 갈까 걱정이 되어 슬피 운다는 것이다. 이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통해 효를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훈적인 전설일까.
개구리 연적은 청자에서도 더러 보이지만 조선조 후기 백자에서 많이 보이는 기종이다. 이 시기에 이르면 도자기,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는 문방구의 나라답게 각양각색의 연적들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개구리 연적도 그 중 한 종류다. 하지만 이 백자개구리연적편은 조선조 초기 것이어서 이런 후기 것들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희색 빛이 많이 도는 경질로서 아무런 문양 없이 개구리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앞부분은 깨어져 달아나고 뒷부분만 남아 있다. 그것이 오히려 앞부분은 상상의 여지를 남긴 채 뒷부분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면 과장일까.
개구리는 앞다리에 비해 뒷다리가 길다. 그래서 몸체에 비해 멀리 점프할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백자개구리연적편도 근육질의 뒷다리와 섬세한 물갈퀴를 통해 점프하기 직전의 웅크리고 있는 긴장감이 여실히 느껴진다. 윗부분은 대칼 같은 것으로 안을 깍아내어 형체를 만든 후 평평한 밑부분 판 위에 접착을 시켜 물을 담을 수 있도록 속을 비게 만들었는데 굽은 평굽이다. 앙징스럽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 백자개구리연적편을 보고 있노라면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는 오랜 된 속담도 떠오르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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