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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44) 아리랑의 위상과 나운규의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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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44) 아리랑의 위상과 나운규의 재평가

기미양 / 아리랑학회 이사

  • 특집부
  • 등록 2021.08.14 09:00
  • 조회수 11,938
오늘날 세계인이 알고 있는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은 1926년 10월 1일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된  영화 주제가 아리랑이다. 모든 아리랑을 대표하는 ‘아리랑’으로 불리어지지만, 예부터 불려져 오던 전통민요는 아니지만 우리는 전래민요로 자리매김 되어 부른다. ‘민족영화 제1호’인 나운규(羅雲奎,1902~1937)의 영화 <아리랑>과 함께 ‘민족의 노래’라고 불리워지는 아리랑은 영화 주제가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운규에게 1993년 항일영화를 만들어 민족혼을 고취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1926년에 상영된 <아리랑>은 세계 최초의 저항영화로 알려져 있다. 수년전 미국의 유력한 영화잡지에서 세계에서 잃어버린 영화 중 다시 찾아야 할 명작 10편 선정에서 제일 첫 번째로 선정되었다. 1세기 동안 세계 영화인에게서도 주목을 받았던 명화 중의 명화이다.

1926년 10월 1일 영화 아리랑의 흥행과 장기상영에 따라 주제가는 전국에서 ‘민요처럼’ 불려졌던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전통민요 아리랑’의 장르와 대비하면 주제가 아리랑은 분명 새로이 만들어진 민요 ‘아리랑’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영화라는 근대 미디어를 통해 탄생한 영화 주제가 아리랑을 만든 이는 조선의 청년 나운규이다.

영화 아리랑과 주제가를 만든 사람은 각본, 감독, 배우 1인 3역을 맡은 당시 25살의 춘사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서 요절하기까지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기면서,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로 세계 영화사에서도 회자되고 있다.

이 필름을 일본의 아베가 소장했었다고 해서 아리랑필름을 되찾기 위해서, 필자는 2000년대에 들어서 3번이나 도쿄와 오사까를 방문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아무런 실마리를 찾아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학에서 공부하는 김도형 다큐작가의 도움을 받아서, 국립영상자료원에서 키네마순보를 며칠동안 뒤져서, 삭제되고 탄압받았던 영화 주제가 아리랑 몇 수를 확인하여서 돌아왔다.

나운규가 만든 무성영화 아리랑에 의해 그 주제가 아리랑이 탄생되던 1920년대는 내적으로는 전통성과 근대성이 충돌하고, 외적으로는 식민성이 착종되는 시기이었다. 우리 음악 상황도 전통음악의 기층 위에 기독교를 통해 들어온 서양음악의 이식과 일제를 통해 들어온 일본음악의 공존으로 여러 장르의 음악이 혼종(混種)이 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된 영화음악으로서의 ‘주제가 아리랑’은 전통에 기반을 두었으나 새로운 서양음계 체계였고, 그 기능과 역할도 기존의 일반적인 영화주제가와는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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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2009아리랑학회심포지움'영화 아리랑 성격과 나운규 위상에 대하여'. 주최주관:아리랑학회, 2010-10-01

 

민요처럼 불려진 주제가 아리랑은 영화 속에서만 불려진 것이 아니고 주제가라는 제한성을 넘는 조건을 갖고 근대의 미디어와 유통을 통해 수용되어 스스로 독립하였다. 주제가가 영화보다 더 유행하고 독립된 장르를 장악하게 된 것은 그만한 요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바로 나운규가 영화적 장치에 의해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불리워진 주제가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가의 대유행으로 "주제가가 영화를 끌고 다녔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가사와 곡조는 나운규와 극장 단성사의 김영환(감독, 변사,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1920년대 중반의 트렌드에 맞게 전통 음악과 서양 음악과 일본 음악의 혼종 어법인 왈츠풍 4분의3박자를 수용하여 대중의 정서에 영합한 신아리랑이다. 특히 개봉 직전에 저항적인 일부 사설이 삭제당하는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압제는 오히려 민중 사이에서 본조아리랑이 전파되는 것을 부추겼고 더욱 저항적인 사설의 각편을 출현하게 하였다. 
 
영화 아리랑이 대흥행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영화보다도 주제가가 1930년을 전후하여 전국에 대유행했고, 전 사회·문화·예술 국면에서 장르 확산의 계기를 맞게 된다. 즉 아리랑을 표제로 쓴 영화(1926년 제1편 아리랑과 1929년 제2편 아리랑 그 후 이야기)·연극(1929년 박승희 원작·박진 연출 '아리랑고개')·악극(1932년 김춘광 작 '향토극 아리랑고개')·무용(1932년 최승희 작 '아리랑곡')·선전계몽가(1930년 '한글보급가 아리랑'과 '종두선전가 아리랑') 등 작품에서 본조로 기능했다. 즉 이 주제가는 ‘영화소패 아리랑’·‘신민요 아리랑’·‘유행가 아리랑’ 같은 성격 변화에서 본조화되면서 대표성을 부여받아서 ‘민족의 노래’라는 위상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다음의 4절까지는 본조아리랑의 정전이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와요
산천에 초목은 젊어나 가고/ 인간에 청춘은 늙어가네
문전에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동냥의 쪽박이 왠말인가

제1절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는 아리랑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고, 그만큼 가장 많이 불린 아리랑이다. 주목할 것은 개봉 직전 압수당한 전단지(傳單紙)에 수록된 주제가 아리랑 사설은 본래 제5절까지라는 것이다. 정든 고향 땅을 두고 북간도 등으로 떠나가는 처지와 이별의 아픔을 담아서 세상에 대한 저항감을 표출했다. 이에 사전 검열에서 내용이 불온하다고 하여서 제5절의 사설이 삭제되었다. 반어적으로 쓰인 제3절이 자조적으로 널리 불리면서 아리랑은 성격 변화를 겪게 된다. 전국적으로 상영되는 극장에서 변사에 의해 개작이 이루어지며, "싸호다 싸호다 아니 되면/ 이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자”와 같은 더 저항적인 사설이 더해졌다. 이는 개봉되기도 전에 탄압을 받았다는 소문이 의외의 가역반응(可逆反應)을 일으킨 결과이다.

본조아리랑의 탁월한 보편성은 세계적인 음악가들에게 재해석되는 한국의 대표적인 노래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1989년 남북 체육회담에서 본조아리랑을 남북 간 단일팀 단가로 합의하여 남과 북이 ‘민족의 노래’라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그리하여 ‘본조아리랑’이라는 용어는 하나의 개체요 곡명이기도 하지만 대표성과 상징성을 획득하고 위상이 부여된 명칭이다. 이러한 아리랑의 위상에 주목하여 2012년 12월 6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의 노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