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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용의 史事是非] 부끄러운 이천시, 애련정(愛蓮亭) 해설문 오류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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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용의 史事是非] 부끄러운 이천시, 애련정(愛蓮亭) 해설문 오류투성이

  • 편집부
  • 등록 2021.07.1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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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장


몇 해 전 고향에서 추석을 쇤 뒤 서울로 올라오다가 차도 막히고 해서 고속도로에서 내려 산 좋고 물도 좋다는 이천(利川)을 찾았다. 물이 좋다는 것은 이천시 도처에 자리 잡고 있는 온천(溫泉)에서 체험할 수 있었고 산천경개(山川景槪)는 길을 오가면서 저절로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필자는 달성 서씨이긴 하지만 이천 서씨가 큰집이라서 이천시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어 온 터다. 대문호(大文豪) 이문열(李文烈) 선생님과의 편안한 만남, 이천 쌀밥으로 대표되는 우리 반상 문화에 대한 체험 그리고 이천 도자기의 그 높은 격조까지 느낄 수 있으니 금상(錦上)에 첨화(添花)가 먼 곳에 있지 않다.

 

온천장에서 일행보다 조금 일찍 나온 터라 시간도 있고 해서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애련정(愛蓮亭)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로만 들었던 바이지만 아름다운 애련정이 이렇게 지척에 있는 줄은 몰랐다. 필자에게 애련정은 퇴계 이황 선생이 어릴 적 공부했던 안동부(安東府) 관아(官衙)의 부속 건물로 익숙하다. 물론 가장 유명한 애련정은 주렴계(周濂溪)의 정자일 것이고, 창덕궁 비원(祕苑)의 어수문(魚水門) 동쪽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정자도 빠질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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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3년 기해(1779) 86(정사), 양력으로는 1779915일이었다. 정조대왕이 이천 행궁으로 납시었던 날이다. 필자처럼 온천을 한 뒤 애련정을 찾았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필자와 240년을 뛰어넘어 묘하게 날짜까지 겹쳐졌다. 조선왕조실록을 펼쳐서 보니, "주상이 여주(驪州) 행궁에 나아갔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 좌의정 서명선(徐命善), 호조 참판 송덕상(宋德相), 행 부사직(行副司直) 김양행(金亮行)은 입시하라고 명하였다.”"다시 이천 행궁(利川行宮)에 이르러서는 경기감사(京畿監司) 정창성(鄭昌聖). 이천현감(利川縣監) 이단회(李端會)에게 명하여 백성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오게 하고 승지(承旨) 서유방(徐有防)에게 명하여 하유(下諭)하게 했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날 주상이, "행궁(行宮)의 뜰 가에 연정(蓮亭)이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애련정(愛蓮亭)’인가? 언제 건립되었는가?”라고 묻자 경기감사 정창성(鄭昌聖, 溫陽 鄭氏)은 애련정의 의미를 설명한 뒤 "고을의 고로(故老)에게 물으니, () 읍쉬(邑倅) 이세보(李世珤)가 처음으로 이 정자를 세웠고, 상신(相臣) 신숙주(申叔舟)애련이란 편액(扁額)을 걸었다고 합니다.”라 하였다.

 

대화는 이어져서 주상이 다시, "풍월정집(風月亭集, 月山大君 李婷)새 못을 파고 또 연을 심으니(鑿得新塘又種蓮), 풍류 사랑스럽고 주인 어질다(風流可愛主人賢)’라고 한 것이 있는데, 이 정자를 이르는가?”하였고, 정창성은 이를 확인한 뒤 "그렇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실록 기사는 마치 어제인 듯 이 정자의 역사와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정조 대왕이 박람강기(博覽强記)하다지만 세조의 장손이요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아들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애련정을 노래한 시를 단번에 외웠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유서 깊은 애련정은 마치 중국 소주(蘇州)에 있는 서호(西湖)의 한 곳을 옮겨온 듯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안흥지(安興池) 중간으로 아치교가 나 있고 그 중심의 작은 섬 위에 단청으로 곱게 장식된 팔작지붕 정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정자는 유서 깊은 연못 위에 조성된 아름다운 정자다. 그런데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정자가 하루아침에 일제의 만행(蠻行)으로 소실(燒失)되었을 때 이천 시민들이 가졌을 분함과 상실감은 어떠했을까? 그러한 한과 염원을 담아 민선 시대의 시장과 시민들은 다시 정자를 짓고 주변을 정화해 오늘날과 같은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름 모를 많은 분의 노고에 존경을 표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역대 관찰사와 수령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선정비군(善政碑群)을 구경했다. 낯익은 인물이 보였다. 학봉 김성일의 후손으로 이천부사를 지냈던 탄와(坦窩) 김진화(金鎭華, 1793~1850)의 선정비다.

 

이제 좀 미안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렇게 의미 있고 좋은 일을 한 뒤 금상첨화(錦上添花)나 화룡점점(畵龍點睛)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오래도록 오점(汚點)’을 남길 수 있을까 싶어서 쓰는 것이다. 전제해 둘 것은, 필자 또한 글을 쓰다 보니 오자나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오금이 저릴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보는 안내 표지판이나 금석문의 경우는 일반적인 글과는 차원이 다르다. 보고 또 보아 오류를 없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한 뒤라도 잘못이 발견되면 즉시 이를 따져서 겸허하게 고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애련정 앞에 정자를 복원하면서 아름답게 금속물로 조성된 애련정 표지판의 경우다. 안내판에 간혹 오자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렇게 많은 오자와 오류가 뒤섞여 있는 경우는 처음 본 바라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대략 손꼽아보더라도 이런 현상을 유지한 채 지나온 세월이 글을 쓰는 현재로 23년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더 문제가 아니겠는가.

안내판 하나를 조성할 때의 과정을 생각해 보자. 기안을 올려 업자에게 넘기기까지 길게 이어졌을 결재 과정이다. ‘담당자-계장-과장-국장-부시장-시장의 결재를 얻어서 다시 담장자-해당 제작업체-제작 완료-시공업자-시공-담당자 확인-제막식-일반에 공개라는 긴 과정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꼴이다.

 

따지자면 누구를 탓할 일도 못 된다. 논어(論語)에 보면 子曰 不在其位하야는 不謀其政이니라.’라 했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일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함에도 이런 글을 쓴 것은 이러한 현상이 비단 이천시의 애련정 안내판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합리화를 하자면 요즈음은 민주시민 사회요 그런 사회에서는 시민 참여가 중요하다고들 하지 않는가? 이제 문제의 애련정 현판의 현상과 이를 필자가 바로잡아 보았다. 붉은 글자는 오류 또는 탈자이다. 이를 바로잡은 것이 수정안(修正案)이다.

 

현 애련정 안내판

애련정(愛蓮亭) 이천시 향토유적 제15, 경기도 이천시 안흥동 404

이천읍지(利川邑)에 의하면 객사(客舍) 남쪽에 정자(亭子)가 언제 창건(創建)되었는지는 모르나 세종10(1428)에 중건하고 세조 12(1456) 이천부사(利川府使) 이세보(笹珤)다시 중건()하였으며 정자 옆 습지에 안흥지(安興)를 파서 그 한가운데 연꽃을 심고 영의정(領議政) 신숙주()에게 애련정(愛蓮亭)이란 명칭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이정(李婷)(조선9대 성종의 형), 서거정(徐居正), 조위(曺偉)등 많은 시인들은 애련정의 경치를 읊은 시를 남겼고 임원준(任元濬)과 김안국(金安國)의 애련정기(愛蓮亭記)와 애련루기(愛蓮樓記)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중종 23(1528), 숙종 14(1688), 3(1779)의 기록에는 역대 임금님들이 영릉() 행차에 이천행궁(川行宮)에 머무르며 으레 붉은 연꽃이 어우러진 애련정(愛蓮亭)을 돌아보았다고 전한다. 순종황제 원년(1907) 벌떼같이 일어났던 정미의병(丁未義兵)때 일본군(日本軍)이 이를 진압하고자 이천읍내 483가구를 불태운 충화사건(衝火事件)이 있었으니 이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본다.

이천시에서는 지방자치 시대를 맞이하여 18만 시민의 의견을 모아 1998년 애련정을 복원하였다.

 

필자 수정안(修正案)

"애련정(愛蓮亭) 이천시 향토유적 제15호 경기도 이천시 안흥동 404 번지

이천도호부(利川都護府)의 객사(客舍) 남쪽에 있었던 이 정자(亭子)가 언제 창건(創建)되었는지는 미상(未詳)이다. 이천읍지(利川邑誌)에 의하면 세종 10(1428)에 중건하고 세조12(1466)에 이천부사(利川府使) 이세보(李世珤)가 중건(重建)하였으며, 정자 옆 습지에 안흥지(安興池)를 파서 그 한가운데 연꽃을 심은 뒤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에게 애련정(愛蓮亭)이란 편액(扁額)을 걸게 했다 한다. 그 뒤 월산대군(月山大君:李婷, 조선9成宗)과 서거정(徐居正), 조위(曺偉)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애련정을 찾아 시를 지었고, 임원준(任元濬)과 김안국(金安國)은 애련정기(愛蓮亭記)와 애련루기(愛蓮樓記)를 남겼다. 중종 23(1528), 숙종 14(1688), 정조 3(1779)에 국왕들은 영릉(英陵) 행차(行次)에 이천행궁(利川行宮)에 머물며 애련정(愛蓮亭)의 아름다운 연꽃을 구경했다고 전해진다. 정미의병(丁未義兵, 1907) 봉기(蜂起) 당시 일본군(日本軍)이 이들을 강제로 진압하고자 이천 읍내 483가구를 불태운 만행(蠻行)이 있었는데 유서 깊었던 이 정자는 이때 불타 사라졌다.

이천시에서는 지방자치 시대를 맞이하여 18만 시민의 의견을 모아 1998년 애련정을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역사성을 갖고 있는 애련정, 이천시는 빨리 바로잡아야 한다. ‘애련정(愛蓮亭) 해설문 바로잡기를 위해 자문단을 꾸려 수정, 교체해야 한다. 무지와 무관심의 결과이다. 후손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