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일)

[연재소설] 흙의 소리 33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소설] 흙의 소리 33

  • 특집부
  • 등록 2021.04.22 07:30
  • 조회수 971

흙의 소리

  

이 동 희

 

<2>

난초 난시내 계난계라는 아호를 쓰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여러 곳에서 냇가 바위틈에 피어난 난초의 자태에 매료되어 그렇게 지었다고 하고 있다. 금강 상류 덕유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물이 깊어진 마을 앞 지프내 냇가를 말한다. 짚어내는 영동 심천深川의 딴 이름이다. 그 강촌에서 태어난 하동河童 에게는 너무 고고한 명명이다. 뒤 어느 계기에 연으로 이름자를 바꾸었는데 자연스럽게 흙바탕 모래 바탕에 뛰놀며 자라던 아이는 어느 사이 빈터를 가꾸고 묘 안 담과 바깥 담 사이의 빈터 또는 성 밑에 있는 땅이라고 하는 삶의 의지와 시대적 경작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청정한 삶과 예악 악상의 소용돌이 그의 생애를 나타내고 있는 두 이름이다. 는 탄부坦夫라 썼다. 장가든 뒤에 본이름 대신 부르는 이름인데, 평범한 남편이라는 뜻인가. 집의 이름 당호를 송설당松雪堂이라 붙인 것도 그렇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생의 궤적이었다. 사철 푸른 소나무와 같이 그 위에 내린 흰 눈과 같이 고절한 비범이 있었다. 사후 행장을 평가하여 이름 지어지는 시호諡號는 문헌공文獻公이다.

난계유고의 제일 앞에 송설당이라 제한 시를 실었다.

 

우뚝한 임금 글씨 법궁에 빛나니

그 광채 아롱져 화산도 밝구나

몸소 주고받아 정이 들던 날

큰 경륜 드디어 협찬하였네

천 길 샘 파던 그 의지

산태미 흙을 쌓아 산을 이뤘네

공중에 소리 없이 오른 님

하늘나라 무사히 찾아 갔는가

倬被天章映法宮 昭回影接華山崇 身扶授受相傳日 道大經綸贊化工

掘井千尋曾有志 爲山一簣不虧功 雲衢若許乘客 直欲尋源上碧穹

 

그 뜻을 다는 알 수가 없다. 난계의 평생을 통해 써 모은 글 가운데 시를 앞에 편집한 것은 그렇다 치고 그중에 제일 앞에 놓은 뜻이 있겠는데 어떻든 일생일대를 대표하는 어떤 의미가 담긴 것 같다. 임금은 누구를 가르치는가. 그것은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태종 세종 문종 단종 4대의 왕을 모셨다고 할까, 거쳤다. 뒤의 세조世祖인 수양대군은 그를 전북 고산高山으로 유배시킨다. 나이 일흔일곱, 아들 계우가 단종 편에 섰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였다 해서 교수형에 처하고 그도 같이 처형하려 했지만 그동안의 여러 공을 봐서 살려준다는 것이었는데 그만하길 다행이었다. 죽는 것과 산다는 것은 천양지차가 아닌가.

 

난계-흙의소리33회.JPG
[국악신문]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33

 

어떻든 몸소 주고받고 하며 경륜을 협찬하였고 천 길 샘을 파고 흙더미가 산이 되도록 쌓아 올린 생애였다. 그것이 어디 흙이었던가. 은금과 같이 빛나는 것이 아니었던가. 죽어서 땅에 있을지 하늘에 있을지는 누구도 모르는 것이고 그것이 왕이나 신하나 다를 것이 없다. 그때의 빛나던 별 같은 인걸들은 지금 어디에 무엇이 되어 있는가.

난계 박연의 아버지 박천석朴天錫은 고려 우왕禑王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통례通禮 부사副使 김오金珸의 딸이고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 귀부인이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스물한 살 때 어머니가 61세로 세상을 뜨는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자 3년 시묘를 하고 여려서 못한 아버지의 몫까지 6년 동안 묘 앞에 여막을 짓고 시묘를 살았다. 산의 지킴이 호랑도 감동시켜 함께 했고 지금은 그의 묘 앞에 같이 묻혀 있지만 그 뛰어난 효행으로 25세에 임금(태종)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그리고 영동 향교에서 엄한 정훈과 돈독한 지도를 받고 학업을 닦아 생원시에 급제하고 십년 공부를 더 하여 진사에 급제하여 관로에 나아가 모든 정과 열을 다 쏟아부었다.

12세에 영동향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 바탕은 유학 경서였다. 기록들은 기질이 남다르게 뛰어났고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하는 일이 성인과 다름없었고 침착하고 사려 깊게 처신하여 주위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쓰고 있다.

영동 여자고등학교 한문 교사로 있으면서 향토사연구회를 만들고 초대회장을 지낸 김동대金東大 선생이 전적을 찾아 악성 난계 박연에도 쓰고 여기저기에 발표한 글들이 있다.

난계 박연은 누구인가, 난계의 행적은 음악 외에 학자로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공헌이 컸음은 그의 가슴에 유교적인 성리학이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예문관 대제학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망국 고려의 폐풍과 누습의 잔재를 일소하고 참신한 신생 조선의 기풍을 세워서 북돋워 나가는데 국왕을 보필하여 정치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니 풍부하고 이로理路가 정연한 주자 성리학의 소양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