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일)

[연재소설] 흙의 소리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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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30

  • 특집부
  • 등록 2021.04.01 07:30
  • 조회수 1,444

흙의 소리

 

 

이 동 희

 

 

진출 <5>

훈민정음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를 갖도록 하겠고, 박연은 계속해서 상소를 올렸다. 말로만 이론으로만 한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실물로 대령을 해 보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시도이고 역사적인 기록이 되었다. 음악사적인 사건이었다.

악학별좌 봉상판관 박연이 한 틀에 12개 달린 석경石磬을 만든 것이다. 이론으로 청원하고 주장하던 것을 실제로 만들어 올린 것이다. 세종 95월의 일이었다.

처음에 중국 황종의 경쇠로써 위주하였는데 삼분三分으로 덜고 더하여 십이율관十二律管을 만들었다. 그리고 겸하여 옹진甕津에서 생산되는 검은 기장으로 교정校正하고 남양南陽에서 나는 돌을 가지고 만들어보니 소리와 가락이 잘 조화되는 것이어서 그것으로 종묘 조회 때의 음악을 삼은 것이다.

그에 대한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사사건건 뭘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정신없이 요청을 하고 허락을 받고 수용이 되고 하였던 것이다.

성악聲樂을 고르는 것은 옛날부터 어려운 일이다. 옛 사람이 성음聲音을 말할 때는 반드시 경쇠를 친 것으로 으뜸을 삼았고 율관律管을 말할 때는 반드시 기장을 율관에 넣은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 그렇게 전제하고 시흥을 돋구며 호소하였다.

"하늘은 기장을 내리시어 지화至和의 답을 보이셨고 땅은 경석을 생산하여 예부터 소리를 고르는 조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마땅히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은 율관입니다.”

옛날 일을 자세히 고찰하여보면 주나라는 소지역에서 나는 기장을 얻어 소리를 고르고 한라는 임성任城 지역에서 나는 기장를 얻어 소리를 골랐다. 그 뒤 수나라는 양두산羊頭山의 기장을 얻었으나 소리가 고르지 않았고 송나라는 경성京城의 기장을 얻었으나 역시 소리가 고르지 않았다. 이것들을 미루어보면 율관에 기장을 넣는 방법이 비록 방책方冊에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진품의 기장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기장, 거서巨黍에 대하여 너무도 소상하고 세밀하게 보고하였다. 철저하고 빈틈이 없었다. 그가 하는 일이 매사 그랬다. 그러기까지 밤을 새우며 문헌을 뒤지고 자료를 찾았다. 식음을 폐하고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오로지 그 일에만 외곬으로 파고 들어 끝장을 내었다. 시골 강촌 태생으로 무엇 하나 특출한 것이 없었지만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는 데에는 이골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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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신문]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30

  

"신이 지금 동쪽 밭에서 길렀는데 기장으로 황종관黃鍾管을 만들어 불어보니 그 소리가 중국 황종율보다 소리가 높은 것은 땅이 메마른데다가 가뭄에서 자랐기 때문에 고르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이어 생각해 보니 꼭 같은 품종의 벼인데도 남방에서 생산한 쌀은 빛이 나고 윤기가 있으며 쌀톨이 굵었으나 경기미는 메마르고 쌀톨이 작은 것이 동북東北 사이도 마찬가지였는데 기장의 크고 작은 것도 응당 그와 같으리라 믿었습니다.”

너무 솔직하고 단순하였다. 우직하다면 우직하였다.

"신은 원하건데 남방 여러 고을에서 생산된 기장을 삼등三等으로 가려서 율관에 넣어보고 그 중에 중국의 성음과 맞는 것이 있으면 손익삼분損益三分하여 십이율관을 만들어 오성五聲을 고르고 헤아려 들어 오성을 고르고 저울로 헤아려 보고 이어 또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역대 제율制律이 기장이 일정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음의 높고 낮은 것이 대대로 차이가 난다면 어찌 중국의 율관이 진품眞品이니 아니니 하여 우리나라의 기장이 그 진품을 얻었는가를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논리라고 할까 흐름을 따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사대주의적 사고가 박혀 있는 사실도 지적된다 하겠다.

"그러나 율을 같게 할 도량형度量衡은 천자天子가 하는 일이요 제후諸侯의 나라에서 마음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의 기장이 중국의 황종과 맞춘 연후에 손익법에 의하여 성율을 바로잡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율관을 만들지 않으면 오음이 바른 것을 잊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본 영화가 떠오른다. 천문이던가. 신하들은 세종 임금 앞에서 조선의 언어와 시간을 갖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명나라의 말대로 해야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며. 조선의 농사 절기에 맞게 만든 천문관측기 혼천의渾天儀를 명나라 사신 앞에서 불태우고 있었다. 영의정은 조선의 글을 갖는 것을 안 될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 것과는 다른 시각인지 모르겠다. 좌우간 그건 그렇고 박연의 예악계 또는 음악계 진출의 획기적인 사건인 이 율관 제작 속에 담긴 또 하나의 의도, 그것은 황종 율관과 도량형의 관계였다. 그것이 의도하는 바가 참으로 심상하였다. 요상하였다.

박연은 청원의 글을 맺었다.

사광의 총명도 육율을 하지 않으면 오음을 바로잡지 못한다(孟子曰 師曠之聰不以六律不能正五音)고 한 맹자의 말을 인용하며, 참으로 만대에 바꾸지 못할 말씀이라고 하였다. 대단한 설득력이다.

그런데 오성을 고르고도 저울로 헤아려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