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5 (일)

[연재소설] 흙의 소리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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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9

  • 특집부
  • 등록 2021.03.25 08:03
  • 조회수 1,047


흙의 소리

 

 

이 동 희

진출 <4>

그건 그렇고 여악을 금하는 상소에 앞서 삼강행실 훈민오음정성訓民五音正聲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린 것에 대하여 말하였었는데 이에 대한 해명을 조금 하여야겠다.

훈민오음정성을 줄이면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되고 훈민정음을 박연이 창제했다는 주장이 있다.

박희민의 박연과 훈민정음은 역사적 실화를 소설 형식으로 쓰며 세계적인 문화유산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세종 5(1443) 323일 문헌연구를 시작해서 9623일 훈민정음을 창제하자는 상소를 올리고 21424일 훈민정음 창제를 완료했으며 25(1443) 1230일 훈민정음을 창제를 공표했다는 일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한 뒷받침으로 여러 가지 사실을 근거로 들고 있다. 율려신서律呂新書와 홍무정운洪武正韻 등 운서韻書에 능통하고 사성칠음四聲七音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난계유고蘭溪遺稿1번 소에서, 널리 가례와 소학 삼강 행실을 가르치고 훈민오음정성으로 민풍을 바로잡자고 한 것 등.

다 맞는 말이다. 다만 훈민오음정성이 훈민정음인가 하는 대목은 그냥 지나가지지 않는다. 묘한 이름 조합이다. 여기서 말한 난계유고 1번 소의 내용을 앞서 소개한 바 있는데 난계유고는 1822년 박연의 사후 그의 글을 모아서 엮은 시문집이다.

이 얘기를 조금 더 하기 위해서 난계유고의 앞부분에 실은 시 가운데 한 편을 소개한다.

 

바다 물결 가 없이 넘실거리고

푸른 봉우리 구름 위에 빼었네

온 고을에 뽕나무 무성하니

푸른 비단 짜 인군께 바쳤으면

(滄海餘波接懸門 華峯蒼翠暎紅雲 一村桑拓人無事 欲上靑緞獻我 君)

 

과교하過交河, 교하를 지나며이다.

자연 서정이 흘러 넘친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받들어 모시고 있는 임금에 대한 생각이었다. 진정에서 울어나는 성심, 국가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랑이며 충성이며 신념이었다.

숨을 좀 돌리고 얘기를 다시 이어 간다.

훈민정음의 정음正音은 아설순치후牙舌脣齒候 반설半舌 반치半齒의 칠음七音 일곱 가지 음운 용어인데 반해 오음정성의 오음五音은 궁상각치우宮商角徵致羽 다섯가지 음가이며 음악용어이다. ‘1번 소에서 언급한, 나라의 전례도 바르지 못하고 회례의 음악에서도 바른 거동을 보지 못하겠고 창우 여악의 진퇴나 연회에서도 삼강의 행실을 볼 수 없고,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고 음악도 바르지 못하고 미풍양속이 그릇되게 뒤섞여 있다는 것 등은 음악에 대한 사항이라고 지적하며 훈민정음의 박연 창제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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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29

 

그런데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다른 설도 있다. 조선 초기의 승려 신미대사信眉大師가 실제 창제했다는 주장이다.

신미대사, 속명 김수성金守省은 김수온金守溫(14101480)의 형이다. 永山김씨 대동보에 "집현전에는 불교를 배척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오랫동안 지키고 스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미대사가 실제 창제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산은 영동의 다른 이름이다. 그도 난계 박연과 같이 영동 사람이다. 영동향토사연구회 김윤호 전회장이 펴낸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의 표지 제목 위에 훈민정음 창제의 보필輔弼 주역이라고 쓰고 있다.

박희민이 밀양박씨 난계파 후손이라면 김윤호는 영산김씨 대종회 회장을 지낸 신미대사 후손이다. 그러나 후손이냐 아니냐만 가지고 따질 수는 없고 팩트가 말하는 것이다.

정찬주는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에서 신미는 범어梵語에 능통해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을 담당했다고 쓰기도 했다.

필자는 여기에 대하여 그렇고 아니고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 또는 갑작스럽게 부닥친 발문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나름대로의 준비와 시간이 필요하고 고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민하는 국어학개론 시간에 제출했던 리포트의 기억을 하고 있었다. 훈민정음을 필사하고 꼭 같은 모양으로 제책을 하여 내라는 것이었다. 전국방언조사를 했다는 이유로 100점을 준 교수에게 너무도 부실하게 대충 만들어 내었던 리포트. 오랜 옛날, 참으로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저쪽의, 기억 속에 교수의 의도가 떠올랐다.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쓰며 훈민정음 한글 창제의 뜻을 새기라는 것이었다. 처음 접한 국어학의 역사 연구사 학설 이론이 아니고 막 천자문을 뗀 아이들로 할 수 있는 대학의 첫 과제물이 이토록 오랜 시간 뒤에 뒤통수를 치고 있었다. 김용경金容卿 선생은 민하가 교직으로 갈 때 추천을 해주기도 했다. 뒤에 안 일이었다. 그 때 흥사단인가에 나가며 <기러기>라는 잡지를 보내주기도 했었다. 어디선가 내려다 보고 있을 처음 만난 국어학자의 음우陰佑 계시가 있기를 빌며 발문을 다시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