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2 (일)

[연재소설] 흙의 소리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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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46

  • 특집부
  • 등록 2021.07.22 07:30
  • 조회수 515


흙의 소리

 

이 동 희

 

 

 

나무와 숲 <4>

지친 심신을 눕힌 채 정신없이 자고 있던 다래는 왜소한 남자의 품을 다시 끌어안으며 의식을 차렸다.

"조금 더 자도 돼요?”

그도 깊은 잠을 자다가 깨며 끌어안고 있는 여인의 팔을 풀어준다. 그리고 큰댓자로 두 팔을 쭉 뻗었다.

여인도 옆으로 널부러지며 하품을 한다.

"그래 푹 더 자. 실컷 자고 가야지.”

여인은 그제서야 상황이 파악된 듯 흐트러진 몸을 추스른다.

"고마워요. 선생님.”

"선생님인 건 알고 있는거여?”

"아아이. 제가 뭘 어쨌지요?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네요.”

"으음.”

"선생님은 그런 것도 가르쳐 주셔야지요.”

"가르칠 게 따로 있지.”

"호호호호

그러며 다시 남자를 힘껏 끌어안는다. 목덜미에 입술을 부비기도 하였다.

"다 가르쳐 주셔야지요. 호호호호

"으음. 으음.”

그런 것을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래의 행위가 싫다기 보다 참고 견디기가 힘든 대로 뭐라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여러날 같이 지내야 하는데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더 자아.”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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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46

  

다래와의 얼핏 이상한 행각이 알려지면 누가 이 사정을 이해할까, 아마 그 자신 이외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한 사내의 흑심으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탓할 것이 뻔하였다. 본인 다래 자신도 겉으로는 표시를 내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누구보다도 그녀는 믿고 있었고 언제나 자신의 신념을 굽힌 적이 없었다. 옳은 일이라고 판단되면 누가 뭐래도 밀어붙이는 그였다.

혈육보다 더 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기는 다래였지만 여악을 금하는 상소를 그 자신이 하여 하루아침에 궁중 출입을 못하게 된 것이다. 당시 예악의 논리와 국가 대계의 원대한 그림 속에 악도 중요하지만 더 앞에 세워야 하는 것이 예였고 그 구도構圖에서 박연의 결단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 깊이에는 그의 다래에 대한 하애下愛가 발휘된 것이었다. 물론 명분은 따로 있어 내세운 대로지만 속마음은 사랑스러운 그녀가 너무 유명해지고 끝간데 없이 널을 뛰는 인기라고 할까 세간의 관심을 주저앉히고자 한 것이다. 장안 한량들이 그녀를 가만 두지 않았고 왕자들도 치정관계를 벌이었다. 세종의 정처인 소현왕후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 이임이 물량공세를 취하고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 영빈 강씨의 아들 서장자庶長子 화의군和義君 이영이 서로 쟁탈전을 벌이었다. 친형제들이었고 아끼는 왕자들이었다. 앞에서도 얘기하고 시간적으로는 뒤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런 불행의 사태를 막고자 한 것이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라기보다 너무나 아끼는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음악의 재질을 발휘하는 데는 꼭 궁중만이 아니고 어디서든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히려 불편한 조건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장안의 사기四妓로 꼽히고 그 중에서도 으뜸의 자리매김을 하던 그녀의 명성이 꺾이지는 않았지만 거덜먹거리지를 못하게 되었고 떵떵거리지를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의 첩이 되고 누구의 소실이 되고 동가숙 서가식 하며 곡예를 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이름난 기녀들도 사정은 같을런지 몰랐지만 다래가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이다.

대단히 신통한 것은 궁중의 여악을 폐하도록 상주하고 실행한 것이 누구인 것을 알고도 불평 한 마디 언짢은 소리 한 마디 않는 것이었다. 물론 그도 먼저 말하지 않았고. 뒤에도 그랬다. 미안하게 됐다든지 일이 그렇게 되었다든지. 어디까지나 도덕 군자로서 그는 하늘과 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바다같이 넓은 마음의 소유자였다. 어떻든 이 세상에 이 천지에 그가 아니면 그녀를 구하여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단순한 한 여인이 아니라 진주 같은 보물 같은 나라의 귀인이었던 것이다.

박연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처롭고 귀여웠다. 눈을 감았다.

이미 각오한 일 저질러진 일이었다. 그녀를 구하고 살려야 하는 것이다.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사느냐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도 그렇고 그녀도 그랬다.

"그래.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