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2 (일)
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몸으로 체화되고 맘으로 발원된 몸짓과 소리들이 소박한 타악기들에 얹혀 시공을 가른다. 땅의 조건과 하늘의 이치를 목으로 풀어낸 소리를 정가(正歌)라 했지만, 오로지 장구 하나 혹은 징 하나로 풀어내는 이 소리야말로 천지를 왕래하는 아정한 소리임이 틀림없다. 아정(雅正)이란 무엇인가? 기품이 높고 바르다는 뜻이다. 정가에 비해 속가(俗歌) 그중에서도 천한 계급이 담당하던 씻김굿의 소리를 어찌 기품이 높고 바르다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악(樂)의 격조는 계급의 대물림이나 신분의 귀천으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다. 귀천의 이데올로기가 가리고 있던 행간을 들추면 비로소 보인다. 어떤 선율이 흉금을 털어내며 어떤 리듬이 격조를 재구성하는지. 나는 본 지면을 통해 "송가인의 엄마는 왜 무당이 되었나", ‘송가인 신드롬’, ‘남도 트로트’ 등 개인사를 넘어선 노래 기반의 사회현상을 여러 차례 주목해온 바 있다.
당골 송순단 선생의 음반 작업에 몇 줄 보태면서 이렇게 썼다. "송순단의 굿소리를 수리성이나 천구성을 넘어 귀성(鬼聲) 곧 신에 이르는 소리라 하는 것은 그녀의 영육에 배어든 삶의 서사를 두고 나온 말이다."
아름다운 동행, 운명의 굿판 숙명의 소리
기억을 되살려 정보 몇 오라기를 소환한다. 송순단의 소리는 진도 지산면 지역 무당이었던 친정어머니 여금순으로 거슬러 오르며 나주 출신 외할아버지로 거듭해 올라간다. 열다섯에 시작한 식모살이를 시작으로, 어머니, 오빠, 동생, 아이, 아버지 등 연이은 가족들의 죽음으로부터 그녀가 상속받은 것은 지상의 어떤 묘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암울한 것이었다. 외눈봉사 아버지와 가난한 집, 이 땅에 대대로 전승되어 온 심청의 현현이라고나 할까. 절절한 가족사를 넘어 지역의 역사에 깃든 그녀의 서사가 대하를 이룬다. 죽음을 딛고 일어나 오보살의 법제를 받고, 진도씻김굿 준보유자였던 이완순의 율격을 받았다. 남도 씻김굿의 대표 연행자로 현장을 누비며 남도 전통의 소리 법제와 부채(負債)를 또한 한 몸에 받았다. 운명이었을까.
그 아스라하던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야 비로소 작은 음악 하나를 기록했다. 장구 하나 허리에 대고 온갖 역신들을 마주하는 담대함의 소리다. 징 하나 엷게 울려 지상의 혼령들을 일깨우는 소리다. 가곡과도 같고 남도 전통의 '흥그래'와도 같은 선율이 고이 잠든 영성을 일깨운다. 차원을 넘어서는 공명의 소리요 죽은 자와 산 자들이 더불어 가는 동행의 소리다. 웅장한 오케스트라보다 더 깊은 귀성(鬼聲)으로 백만 군사 이끄는 북소리보다 더 넓은 몸짓으로 맞서는 담대함의 소리다. 이제 외동딸 송가인이 국민가수로 등극해 이 땅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동행하고 있다. 나는 연이어 이렇게 썼다. 지극한 가슴 열고 어깨 겯고 가는 송순단의 소릿길, 이 소리 닿는 심연의 저 끝에, 우리 모두에게 이를 축복 있으리니.
만조상해원경, 경자년의 해원
만조상해원경, 본 이름은 옥추경(玉樞經) 또는 옥추보경이다. 독경할 때 읽는 경문 중에서 으뜸으로 친다. 1831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간행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외 출간본들이 몇 권 있고 그 뿌리는 중국 도교까지 이어진다. 영화 '사도'의 OST로 인용된 후 사람들의 관심이 커졌다. 압도적인 시퀀스, 정신병에 걸렸던 사도세자는 미친 듯 외는 옥추경을 배경 삼아 칼을 휘두른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을 기록한 대천록(待闡錄)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무작정 죽인 중관, 내인, 노속들이 100여 명에 이른다. 뒤주에 갇혀 죽게 된 원인이다. 옥추경의 본래 기능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몸에 달라붙은 귀신을 쫓아내는 굿거리인데 사도세자는 이마저도 억제하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송순단의 만조상해원경(萬祖上解寃經)은 이렇게 시작한다.
"선망조상 후망조상 부모좌우조상 혼령님과 다생사자 다생남녀 형제숙백 숙질남매 원근친척 무주고혼 금일영가 저 혼신은 혼이라도 오셨으면 만반진수 흠향하고 일배주로 감응하시고 살다 남으신 명과 복록은 자손궁에 전하시고~"
근자의 진도씻김굿에서는 연행되지 않는 장르이지만 송순단의 굿에서는 인용된다. 무경(巫經) 연행은 친정어머니 여금순의 굿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뭇 사람들은 만조상해원경 자체의 의미를 높게 치지만 송순단의 경우, 영육으로 체화되고 발원된 장단과 선율의 의미가 더 크다. 흰쥐의 해, 잔뜩 계획을 세우고 포부를 가졌던 한 해가 기울어간다. 반백 년을 더 살고도 항상 세모에 들면 후회가 남는다. 후회 중 가장 큰 일은 원통한 일을 당하는 것이다. 집값의 폭등과 경제난으로 자영업자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여기에 코로나19까지 겹쳤으니 고대사회라면 왕 살해가 일어날 상황이다.
하지만 원통한 마음 푸는 해원(解寃) 뒤에는 상생(相生)이 달라붙는다. 해원 상생, 맥락 없고 명분 없는 노래라면 희망 고문이겠지만 적어도 핍진(乏盡)한 개인사를 극복해낸 송순단의 노래 아닌가. 화려한 반주음악도 수려한 무대도 없다. 그저 장구 하나 혹은 징 하나 들고, 천만 군사 호령하는 담대함을 율격에 담을 뿐이다. 바라건대 이 소리가 해원일 수 있기를 바란다. 희망도 포부도 다 잃어버린 경자년 세모(歲暮), 타악기 하나 들고 외는 송순단에 그저 기대는 마음 처연하다. 가장 낮은 땅 이곳으로 해원이여 오라. 가진 자 못 가진 자 우호(友好) 하는 상생으로 오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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