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3 (월)
이규진(편고재 주인)
가는 실금만 있어도, 작은 알팀만 있어도 타박이 심하다. 고미술계 특히 도자기에 대한 요즘의 시중 풍속도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그런 시중의 풍향계를 무시하고 일을 저질렀다. 새로 구입한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이 그 것이다. 사진을 보면 금간 부분을 땜질만 한 것 같은데 잔편이라니 무슨 이야기인가. 완형같이 보이는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은 사실 손상이 심해 몸체의 1/3정도는 남의 살을 붙인 것이다. 그러니 도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은 도편이라고 해도 귀한 것이다. 귀한 정도가 아니라 도자기를 좀 안다면 탐을 내야할 물건이다.
분청덤벙의 매력은 특이하다. 그것은 다른 기종에 비해 변화의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분청덤벙의 완이나 잔으로 차나 술 등을 마시며 계속 사용할 경우 색깔이 배어들어 경색의 미가 발생한다. 따라서 분청덤벙은 다른 기종처럼 가마에서 완성되어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온 후 사람과 세월과 더불어 새롭게 만들어 가는 기물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것이다. 일본인들이 덤벙분청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도 그런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경색의 미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귀한 분청덤벙에 간혹 철화가 들어간 것이 있으니 세상에서도 보기 드문 귀물이 아닐 수 없다.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은 입지름이 9~9.5에 굽지름이 4이고 높이가 5Cm 크기다. 술잔으로 사용해도 좋지만 녹차잔으로도 적격이다. 죽절굽에 태토받침이며 입술은 약간 벌어진 형태다. 굽부터 입술까지 몸 전체를 백토로 분장한 분청덤벙이다. 여기에 간략한 초화문을 철화로 그리고 있다. 문제는 몸체의 1/3정도가 없어져 남의 살을 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남의 살도 덤벙에 철화가 들어가 있다. 색깔도 비슷한데다 크기도 얼추 맞는 것을 골라내 붙여서 완형잔을 만들어 낸 원 주인의 안목이 대단하다는 느김이다. 땜질은 옷칠을 한 것인데 아직은 세월이 짧은 탓인지 검게 변색을 않고 누르스럼한 빛깔이다. 옷칠이 숙성되어 검게 변하면 철화와 어울려 오히려 맛깔스럽지 않을까도 생각되는 점이다.
분청덤벙 요지로는 보성 도촌리와 고흥 운대리가 알려져 있다.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의 초화문은 가는 형태의 것이 운대리 것과 비슷한 양상의 문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굽이나 약간은 거친 덤벙의 형태를 보면 도촌리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원 소장자도 도촌리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가는 실금만 있어도, 작은 알팀만 있어도 타박이 심한 세상에서 남의 살을 뒤섞은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 앞에서 마냥 즐거워하고 있는 내 모습은 정상일까. 정상이 아니더라도 나는 오히려 즐겁기만 하니 이를 어쩌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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