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3 (월)
이규진(편고재 주인)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산(怡山) 김광섭(金珖燮)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다. 이 시가 널리 알려진 것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화백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하고서 부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1970년 한국일보가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그림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70년도라면 수화가 뉴욕에 정착해 있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수화는 성북동 시절 이웃사촌으로서 친하게 지냈던 선배 이산 시인이 작고했다는 부음을 듣게 된다. 너무도 안타까운 소식에 수화는 이산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삼아 그림을 그리는데 그 것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다. 그러나 이산 시인의 사망 소식은 잘못된 뉴스로 작품이 나온 지 4년 후인 74년에 수화가 먼저 세상을 뜨고 이산 시인은 이보다도 더 늦은 3년 뒤인 77년에야 투병 끝에 세상을 하직했으니 흥미로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뉴욕 시대의 특징인 무수히 많은 점을 찍은 듯한 그림이다. 산과 달과 도자기를 주로 그렸던 수화가 별들과 같은 점으로 시선을 옮긴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어떻게 그런 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에 대해서 내 나름의 엉뚱한 생각을 해보게 되고는 한다. 즉 배율이 아주 높은 확대경으로 도자기의 피부를 들여다보면 무수히 많은 망점이 떠오른다. 그렇다고 하면 수화는 도자기라는 거시세계에서 망점이라는 미시세계로 옮겨간 것일까.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상상은 자유라는데 나는 때로 그런 뜬금없는 생각을 해보며 홀로 미소를 머금어 보기도 하고는 한다.
수화는 본인이 너무도 좋아했던 도자기 그림을 많이 그린 셈인데 항아리 중에는 굽이 중앙에 있지 않고 한 옆으로 치우쳐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처럼 기우뚱한 그림을 보며 나는 조형미를 강조하기 위해 변형을 시도한 것일까 하고 의문을 품어 보고는 했었다. 그런데 언젠가 부암동에 위치한 환기미술관에서 수화가 살아생전 소장했었거나 거쳐 간 도자기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던 적이 있었다. 이 전시회를 보니 그림에서처럼 실제로 굽이 한 옆으로 비켜 서 있는 백자 항아리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는 수화의 머릿속에만 있었던 상상의 조형미가 아니라 실물 자체가 존재했던 것을 형상화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도자기에서 굽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부식 정도나 만든 모양에 따라 진위와 시기를 판별하는데 아주 유용한 감정의 요건을 비교적 많이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기 도자기의 굽만 해도 죽절굽을 비롯해 역삼각형굽 수직굽 오목굽 넓은굽 안굽 평굽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여기에 받침도 초기의 태토빚음받침을 비롯해 모래받침 내화토받침 모래빚음받침 등이 있으니 간단치만은 않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잘 살펴보면 어느 정도 진위와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으니 여간 요긴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도자기 굽을 잘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계룡산 가마터 것이 분명한 분청귀얄조화문병편은 굽이 압권이다. 그야말로 천지의 기운을 모아 얹어도 끄떡없어 보일 정도로 크면서도 튼튼해 보인다. 계룡산 가마터의 완이나 사발 같은 것의 굽이 다른 가마터에 비해 비교적 작은 것을 감안한다면 병이라고는 하지만 특이한 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듬직한 굽에 올라앉은 몸체 또한 우람하고 당당하다. 하반부만 남아 있어서 그렇지 병 전체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 중량감이 뿜어내는 위용이 대단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외부의 색감은 갈색이 짙고 안쪽은 회색이 짙다. 몸체 외부에는 백토로 귀얄 분장을 하고 그 위에 두 줄의 음각 선 위에 조화로 양식화 된 초문을 넣고 있다. 유약은 번들거릴 정도로 안팎 모두가 살아 있어 방금 가마에서 껴낸 것처럼 싱싱하다. 따라서 손상을 입어 하체만 남아 있는 것이 더욱 아쉽다. 없어진 부분은 이산 시인의 시 <저녁에>서처럼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기약할 수도 없는 처지이고 보면 더욱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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