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3 (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이규진(편고재 주인)
용(龍)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아마도 강력한 왕권(王權)이 아닐까 생각된다. 용이 이처럼 왕권을 상징하다 보니 왕의 얼굴은 용안(龍顔)이요 왕의 평상은 용상(龍床)이요 왕의 옷은 용포(龍袍)로 불리기도 한다. 왕이 즉위하는 것을 용비(龍飛)라고 하는데 <용비어천가>의 제목은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용은 왕권만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용은 민간신앙에서는 비를 가져오는 우사(雨師)이고, 물을 관장하고 지배하는 수신(水神)이며, 나쁜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주는 벽사(辟邪)의 선한 신으로 인식되어 용신제 및 용왕굿 등이 행해지기도 한다.
용은 또 무소불위의 권능과 천변만화의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상징성을 보이다 보니 그 모습도 다양하다. 중국의 삼정구사설(三停九似說)에 의하면 낙타의 머리, 사슴의 뿔, 토끼의 눈, 소의 귀, 뱀의 목, 개구리의 배, 잉어의 비늘, 매의 발톱 등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 뿐 아니라 자유자재한 초월적인 존재를 암시하기 위해 구름 속으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운룡문(雲龍文) 형태로 그려지기도 한다. 용은 순수한 우리말로는 미르라고 하며, 용이 되려다 못되고 깊은 물속에서 사는 큰 구렁이를 이무기라고도 한다.
이러한 용은 조선조에서는 백자항아리에 청화로 운룡문이 많이 그려지지만 청자와 분청에서도 보이고 있다. 비색청자나 상감청자의 문양이나 상형청자의 용은 대개 최상급의 품질을 보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물결과 함께 표현된 수룡(水龍), 용두구신(龍頭龜身)의 구룡(龜龍), 용두어신(龍頭魚身)의 어룡(魚龍) 등이 그 것들이다. 조선조 백자청화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 운룡문은 청자에서는 후기에 와서야 상감청자에서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라면 특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청자 중 용이 장식된 대표적인 기명은 무엇이 있을까. 그런 청자는 적잖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명품 중의 명품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일본의 야마토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靑磁陽刻濤文九龍淨甁)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전라도 어느 고분 석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정병은 고려 12C 것으로 높이가 33.5Cm나 되는 당당한 크기로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첨대(尖臺)와 목 그리고 주구{注口)에 아홉 마리의 용머리를 장식하고 있는데 입을 크게 벌려 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포효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이 정교하고도 정성스럽게 조각을 해 형상화 되어 있다. 몸체 전면에도 용이 휘감기는 모습을 음양각 기법으로 박진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청자를 통 틀어서도 명품중의 명품으로 꼽을만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에서 보이고 있는 아홉 마리의 용이다. 아홉 마리의 용중 목이 보이는 것은 주구와 첨대에 장식된 것뿐이다. 다른 것들은 용머리가 몸체에 바짝 붙어 있다 보니 목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주구의 것도 흔적만 보일 뿐 비늘에 덮인 목을 제대로 뽑아 올리고 있는 것은 첨대에 장식된 용뿐이다. 왜 아홉 마리 용중에서도 첨대에 장식된 이 용머리가 내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그 것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청자상형용문편 때문이다. 형태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뽑아 올린 목, 쩍 벌리 입, 뒤로 날리고 있는 갈기, 거기에 눈이며 비늘 등을 음각으로 처리한 점, 비색의 색감 등이 동일한 양식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청자상형용문편이 정말이지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의 첨대에서 보이고 있는 용머리 조각과 같이 청자정병첨대에 붙어 있던 장식이라고 하면 이 얼마나 귀하고도 희한한 자료인가. 하지만 나로서는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추측을 떠나서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고 보면 오로지 신나고 즐겁고 감격스럽기만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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