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2 (일)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고색창연한 한국의 대표적인 현악기를 꼽는다면 어떤 악기가 될까? 두말할 나위 없이 거문고와 가야고일 것이다. 그만큼 이 두 악기는 역사도 깊으려니와 장구한 세월을 관통하며 늘 당시대인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애환을 공유해 왔다.
기실 거문고와 가야고는 한국 전통음악을 살찌워 낸 두 개의 큰 물줄기며, 뭇사람들의 감성이 조탁해 낸 아름다운 문양의 쌍벽임에 분명하다. 그뿐이랴. 거문고나 가야고에는 악기라고 하는 한낱 소리를 내는 도구 이상의 설화가 있고 환상이 있고 아우라가 있다. 한마디로 청각에 울리는 ‘음악’이상의 ‘문화’가 있다.
우선 두 악기의 연륜을 떠올려 보자. 거문고는 멀리 씩씩한 기상의 고구려까지, 가야고는 황금의 나라로 알려졌던 신라까지 그 뿌리가 닿아 있다. 줄잡아도 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기간 동안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자. 파란만장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형형색색의 시대 감성이 명멸했다. 거문고와 가야고에는 바로 이 같은 천변만화의 감성과 사연과 희비가 켜켜이 이끼 되어 농축돼 있는 것이다.
거문고나 가야고 음악을 들을 때면 이내 우리 상념이 음악 자체의 미감을 벗어나 먼 역사의 뒤안길을 유영하며 깊은 정념情念에 잠기게 되는 소이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음악을 들으면 음악의 테두리 속에만 갇히지 않고 자유자재로 상념의 산책을 나설 수 있는 형이상의 역사공간이 있다는 사실, 어쩌면 그 점이 곧 전통이라는 개념 자체이자 전통음악의 특징이요 본령이며, 우리 미의식을 증폭시키는 기제機制라고 하겠다.
아무튼 전통악기의 연주를 들으면, 나는 그 음악과 더불어 악기의 발자취에 투영된 시대상과 시대 정서를 함께 그리며 듣는다. 말할 나위 없이 느낌이나 상상의 진폭이 무한대로 확충된다.
일반적인 통념처럼 가야고는 확실히 여성적인 악기다. 중후하고 둔탁한 거문고 소리가 남성적이라면, 청초하고도 낭창스런 소리의 가야고는 섬세하고도 온유한 여인의 모습을 닮았다. 술대로 대모玳瑁 판을 내려치는 웅혼함이 강건한 양陽의 세계에 흡사하다면, 섬섬옥수로 열두 줄을 넘나드는 우아함은 만물을 포용하는 온후溫厚한 음陰의 속성임에 분명타고 하겠다. 조선시대만 해도 거문고는 주로 문방사우가 갖춰진 근엄한 선비방에서 탄주되었으며, 가야고는 이끼 낀 담장 너머 그윽한 고가의 경중미인鏡中美人의 규방에서 연주돼야 제격이었다.
가야고와 경중미인! 참으로 절묘한 궁합이 아닐 수 없다. 정갈한 가야고 음악의 진수를 한 폭의 영상으로 형상화해 낸다면 경중미인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여기 지금도 널리 불리는 여창 가곡 한 수를 떠올리며 음미해 보자. 춘매春梅의 암향을 타고 피어 오르는 임에 대한 그리움과, 만나지 못하는 고적한 애상哀傷이 엎치락뒤치락 뒤섞이며 금상첨화의 기다림의 미학을 직조해 내는 계면조 이삭대엽의 그 아릿한 서정의 가사말이다.
언약言約이 늦어지니 정매화庭梅花도 다 지거다
아침에 우던 까치 유신有信타 하랴마는
그러나 경중아미鏡中蛾眉를 다스려 볼까 하노라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아채게 된다.‘가야고와 경중미인’이라는 가야고 음악의 상징 어휘를 클릭하자, 내 뇌리의 망막에는 반사적으로 매은梅隱 이재숙 교수의 가야고 연주 모습이 선명하게 투영된다는 사실이 곧 그것이다.
음악과 천성과 교단의 이력 등을 감안해 볼 때, 확실히 이재숙 교수와 가야고는 혈통이 유사한 천생연분일시 분명하다. 그만큼 양자간에는 정서가 같고 뉘앙스가 같고 정체성이 상사相似하다. 사근사근 자상한 속삭임이 닮았다. 투명한 창가에 놓인 난초처럼 정갈하고 단정함이 닮았다. 상대의 희로애락을 살뜰히도 보듬어 주는 따듯함과 자애로움이 닮았다. ‘당’줄을 뜯으면 당으로 울리고 ‘징’줄을 튕기면 징으로 울어 주듯, 우여곡절 인생살이 굽이마다 늘 밝은 웃음과 진정어린 배려로 이웃 주변을 챙겨 주는 살뜰한 고마움이 또한 빼닮았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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