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1 (토)
금사리의 추억과 여운을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에서 멋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시문(詩文)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근래 들어 시가 위축되고 있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전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공자가 만년에 제자를 가르치는데 있어 육경 중에서도 시를 첫머리로 삼았다던가, 시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에서 우러난 것이므로 정서를 순화하고 다양한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 등은 모두가 시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거창한 의미를 되새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자기에 시문을 장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멋이요 풍류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문은 청자나 분청에서 상감으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백자에서는 청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백자에 청화로 시문이 들어간 것으로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시문명전접시가 널리 알려져 있다. 백자 전접시에 술을 주제로 하여 청화로 칠언시를 종으로 써내려 간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竹溪月泠陶令醉
대나무 계곡에 달빛이 차가운데 도연명이 취해 있고
花市風香李白眼
꽃 사랑의 향기로운 바람 속에 이백이 잠들었네
到頭世事情如夢
세상사 돌아보면 품은 정은 꿈만 같고
人間無慾似樽前
사람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술동이 앞에 있는 것 같네
이러한 백자청화시문편은 경기도 광주 도마리 1호와 번천리 9호 가마터에서도 출토되고 있음은 물론 관청 건물지 터 등에서도 수습되고 있어 이 시기 일종의 멋과 풍류로 유행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백자에 시문이 들어간 것은 초선 초기뿐이 아니라 17~19세기로도 이어지는데 중기와 후기로 가면서 초기의 접시와는 달리 병 호 문방구 등으로 널리 확대되고 있어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
백자청화시문접시편은 금사리에서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18세기 전반 것인데 이 시기는 임란란 후 거의 사라져 버렸던 청화가 되살아나며 가장 한국적이며 사대부의 문인 취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백자청화시문접시편은 이 시기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작은 조각만 남은 데다 청화로 쓰여진 시문 또한 설유국(雪濡菊) 시화니매(是花尼梅)의 일곱 글자만 남아 있어 시의 제목이나 내용을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국화나 매화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기존에 알려진 백자청화시문명 도자기들이 대개 그렇듯이 술과 관련된 한시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금사리는 도자기 가마터 중에서도 내게는 꽤 친근한 이름이다. 서울에서 멀지 않아 여러 번 찾아보아 익숙한 점도 있거니와 금사리 시기 백자청화에서 보이는 저 추초문 같은 절제된 미감이 내 마음 속에 깊이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의 답사를 통해서도 추초문 같은 청화는 인연을 맺지 못했으니 지금 까지도 아쉬움이 남는다고나 할까. 그런 가운에 작은 조각에 글자도 몇 자 안 남은 백자청화시문접시편에서 금사리의 추억과 여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여간 다행한 일 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듯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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