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2 (일)
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2>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냥 이대로 있기만 하면 되는 건지, 날이 갈수록 어렵고 힘들어요.”
"예? 그게 무슨?”
"올바른 행실을 하고 무엇을 가려서 하고 자나 깨나 성현의 말씀을 읽고 실천하고 그런 것은 쉬워요. 하는 데까지 하면 되지요. 그런데…”
"아아, 그래요?”
"예.”
"그것도 극복해야지요.”
세자는 스승을 정색하고 바라보았다.
박연은 그제서야 세자가 힘들고 어려운 사정을 알았다. 자신을 위해 두 형이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백형 양녕은 온 천지를 유랑하며 광풍을 일으키고 있었고 중형 효녕은 느닷없이 입산을 하겠다는 것이다. 아니 출가를 하여 머리를 깎은 것이다.
세자 충녕은 그런 것이 다 자신에게 돌아온 기회라 생각하고 다행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영민하고 충직하다는 구실로 ‘큰일’을 맡을 사람이라고 내다보고, 양녕의 판단이지만, 효녕의 의사까지 바꿔놓은 것이다. 백성을 이끌고 모든 일에 모범이 되고 언제나 굳건히 보좌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충녕이 적격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부왕은 여러 차 떠 봤지만 양녕은 번번이 실망을 시킨 것이다. 밤마다 밖으로 나가 주색잡기로 문란한 행동을 하였을 뿐 아니라 실성한 행동을 하였고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충녕이라고 책상에 앉아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경서를 읽고 있어도 거기에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귀가 있고 눈이 있고 생각이 있었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물어봐야 올바로 대답을 해주지 않았고 혼자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물어본 것이다. 너무도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는 스승에게.
"운명이라는 것이 있지요.”
사실 자신도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연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럼 운명적으로 내가…”
"그래요. 이미 결정된 것, 다시 흔들리면 안 되지요.”
세자의 생각은 옳은 것이다. 자신에게 양위를 하기 위해 이상한 행동을 하며 떠나가는 형들에게, 잘 알겠다 하고 고맙다고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고 거부의 몸짓을 할 것인가, 그러나 이미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세자로 책봉이 된 것이고 만천하에 다 알려진 것이다. 이제 와서 새 불을 사를 필요가 있는가.
박연도 마음이 모질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합해야 하였다.
"그럴까요?”
"그럼요.”
"백씨 중씨의 처지에 대해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고 요로를 힘들게 할 뿐입니다. 오늘부로 그런 무용의 생각은 가슴에만 새기고 큰 걸음을 떼어놓아요.”
"정말 너무 괴로워요. 이렇게 몰염치하고 뻔뻔해 가지고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을까요?”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것입니다. 성현 군자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세자는 스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연은 얼른 적절한 말을 내놓지 못하였다.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고 했다가 과단성을 갖고 결단력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여전히 동의를 못 하고 있었다. 납득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연은 이번에는 맹자의 논리를 가지고 왔다.
"인성人性을 말할 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갖추어야 한다고 하는데 가령 형들을 생각을 하는 것을 인仁이라고 한다면 그것만 가지고서는 안 돼요. 의가 있어야 하고 예와 지가 있어야 하는데 지란 무엇인가. 그때그때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직관적으로 결정하는 것이지요.”
"직관적이라면…”
세자는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 어투였다.
"물도 길이 있어요. 물길. 옛날 우禹임금이 홍수를 물리칠 때에, 물이 흐르는 대로 방향을 정해서 물길을 터주니 물이 잘 흘러가더라는 말이 맹자 때 전해졌어요. 맹자는 그 전설을 비유로 해서 사람의 행동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에 당면하였을 때는 그때의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행하면 된다고 하였어요.”
박연은 행수行水, 물 흐르는 대로의 양지良知를 다시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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