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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대통령상 수상자를 만났다”국악인이라면 누구나 명인·명창을 꿈꾼다. 올해 최고의 영예를 얻으며, 그 시작에 발을 내딛은 젊은 주인공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 그들은 어떤 노력을 해왔으며, 어떤 국악인을 꿈꾸고 있을까? 바로 국악방송 송년특집 ‘2022 대통령상 수상자를 만나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사회자의 질문과 대답이 출연자별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질문과 질문 사이에 출연자들의 저마다의 매력을 발산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과연 대통령상 수상자답게 빼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대부분의 소리에는 고정훈 명고가 함께 했다. 수상 당시의 어떤 마음이었을까? 최잔디 명창은 "아버님께서 말기 신장병으로 많이 편찮으신데, 조금 더 건강하실 때 상이 선물이 되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뜻 깊은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박현영 명창은 "명창은 상을 받았다고 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대명창들이 인정해야 진정한 명창이라고 생각하고요, 상을 받으니까 부담이 더 크죠.”라고 말했다. 최잔디 명창은 스승 故성창순 선생이 젊은 시절 가장 많이 불렀으며, 자신의 대상 수상곡인 ‘심청가 중 눈 뜨는 대목’을 선보였다. 명창의 애절한 소리는 심봉사의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딸 앞에서 눈을 뜨는 감격스러운 극적인 순간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며, 편찮으신 명창의 아버님을 떠올리면, 그 애절함은 더욱 진정성을 담는다. 그들은 수상의 영예에 이르기까지 도전에 대한 이야기도 전했다. 출연자들은 각 대회에서 대상을 자치했지만, 한 대회를 여러 번 도전하거나, 여러 대회를 골고루 도전했기에 서로 같은 대회에서 등수가 나뉘기도 했다. 박가빈 명창의 경우, "9번을 도전했는데, 5번을 떨어졌어요. 중간에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 많이 울기도 했어요. 그 때 스승님께서 ‘밥도 다 되는 시간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밥이 아직 설었다.’ 라고 말씀 하셨는데요, 그것이 아프면서도 맞는 말씀이더라고요. ‘밥이 다 될 때까지 나아가자. 견뎌야 된다.’는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어요.” 라는 경험을 전했다. 신정혜 명창은 ‘6년 정도 도전했으며, 실패하고 준비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마음가짐이 달라졌고 자신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허정승 명창의 경우, 자신보다 낮은 연령대의 장원자들을 보며 "지금은 국악교육도 많이 발전해서 실력들이 좋아지고, 수상자 연령대도 낮아진 것 같아요. 저는 3년 전에 도전했고 6수만에 됐는데요, 저도 어렸을 때 나가고 싶은 생각은 이었지만, 제 스스로 준비가 안됐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실력’의 기준은 40대였거든요. 그래서 40세부터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자신만의 소신을 밝혔다. 박현영 명창의 경우, 조금 다른 경우를 보였다. "저는 한 대회만 3년을 준비했는데요, 제가 전주에서 자랐고, 학창시절, 직장을 전주에서 다녔어요. 그래서 ‘전주대사습놀이’가 제게 의미가 컸던 것 같아요. 학창시절에는 ‘저 곳에서 노래할 수 있을까?’, 시간이 좀 더 지나서 ‘상을 받을 수 있을까?’ 상을 받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던 것 같아요.” 이렇게 자신의 소리의 뿌리가 확고한 그는 상금 일부를 모교에 장학금을 전달한 일도 전했다. 이어서 작년에 가사 실수로 차하(2등)를 했지만, 재도전하여 장원을 차지한 ‘적벽가 중 조자룡 활쏘는 대목’을 선보였다. 그는 출연자 중, 가장 낮은 연령이지만, 힘 있고 풍부한 성량과 탁월한 완급조절로 곡 특유의 역동적인 분위기를 구현하며 리듬을 타는 듯 소리했다. 두 번의 도전을 한 곡이니 수백 수천번을 불렀을 것이며 곡 자체가 자신일 것이다. 고정훈 명고와의 뛰어난 호흡 또한 곡의 분위기를 도왔다. 곡이 끝난 후, 사회자는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말했다. 출연자들은 스승과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도 전했다. 허정승 명창은 "스승님(안숙선 명창)께서 표현을 잘 안하세요. 수상 후에, 나중에 아드님께서 따로 연락을 주셨는데요, ‘요새 웃을 일이 없는데, 너 때문에 웃어다.’고 전해주셔서 감사했어요.”라고 전했다. 박현영 명창은 "생각 해보니까 그 동안 어머님께 감사 말씀을 한 번도 못했더라고요. 사실 어머님께서 국악을 잘 모르세요. 다른 분들은 국악에 대한 조언이나 격려를 해주시지만, 어머님께서는 아들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해주셨거든요.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지도해주신 김일구, 김영자 선생님께 늘 감사한 마음이에요.”라고 전했다. 최잔디 명창은 "제가 20대 초반에 그만 두고, 8년 쉬고 선생님(故 성창순 명창)께 전화를 드렸는데, ‘아가, 밥은 먹니?’라는 말씀에 (마음이 감동하여) 무너졌어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어요.”라고 회고 했다. 박가빈 명창은 2년 전 가슴 아픈 이별에 위로가 되어 준 ‘춘향가 중 이별가’를 선보였다. 명창의 소리는 힘이 있으면서도 감정을 누르듯 애절했으며, 춘향의 애통함, 이몽룡의 애절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다시 만날 간절함을 모두 담았다. 고수의 추임새 역시 소리와 하나가 되어 이별의 슬픔을 더했다. 명창의 반열에 오른 이들의 솔직한 마음가짐도 들을 수 있었다. 박가빈 명창은 "너무 무서워요. 무대가. 사람을 볼 때 기대치가 생기잖아요. 이제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기대치가 있을 것인데, 거기에 못 미치면 질책을 많이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이름에 걸맞게 기대치를 충족해야 하기 때문에 무섭고, 긴장되기도 해요,” 최잔디 명창은 "살얼음판 걷듯이 조심조심 생각하고 무대 오를 것. 마음을 힘들게 하는 하나하나에 연연하지 않고 빨리 잊어버릴 것. 소리꾼 과정을 걷고 있으니까, 지금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해질 것. 더 평안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신정혜 명창은 "책임감과 무게감이 확실히 생겨요. 음악으로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격에 맞는 행동과 처신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더 신중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허정승 명창은 "저도 무대가 무섭고 그런데. 선생님(안숙선 명창)께서 ‘그럴수록 다시 소리를 처음부터 한다고 생각해봐라.’ 저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요, 하면할수록 심오하더라고요. 하면할수록 새롭고. 나아가는 과정인가보다 생각하고 있어요.” 라고 전했다. 신정혜 명창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며 부를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난다는 ‘심청가 중 곽씨부인 유언’ 대목을 선보였다. 그녀의 대상 수상곡이기도 하다. 크고 깊은 성량과 애절한 감성은 어린 자식을 놓고 가는 어미의 비통함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마디마디에 심은 절절함은 자식을 두고 떠나는 어미의 마음 그 자체였다. 내년에 도전하게 될 후배들에게 독려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최잔디 명창은 "정해진 시간에 무대를 운영하고, 큰 선생님들 앞에서 실력이 늘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같이 동지가 되어 도전하시기를 바랍니다.” 박가빈 명창은 "9번 도전해서 5번 떨어지기도 하고, 3등 ,2등, 1등 다 해봤는데요, ‘상이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상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데, 준비하다보면 목적이 바뀌거든요. 소리 길로 가는 과정인데, 상이 목적이 되니까 괴롭고 힘들어지더라고요. 계속 떨어지더라도 어떤 것도 마이너스는 없다. 떨어져도 거기서 배우고, 잃는 것 있으면 얻는 것이 있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그러니 도전해야 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성장하더라고요. 실패도 실패가 아니구나. 필요한 과정이구나, 성숙해지는 과정. 넘어져도 일어난다는 마음으로 도전하시기를 바랍니다.” 허정승 명창은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고 하듯이, 소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대회마다 다르고,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본인이 준비되지 않으면 상을 탈 수 없는 것이거든요. 꾸준히 노력 하다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정혜 명창은 "처음 도전하시는 분도 도전해야 그 과정을 겪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니까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그 과정 중에 나아가면서 자신이 무너지거나 힘들 때, 자기 확신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자기 객관화와 자기 확신의 시간을 가지고 소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거든요. 6년이라는 시간이 값진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힘들겠지만 끝이 있고, 그 끝에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그 시작을 즐기기를 바랍니다.” 박현영 명창은 "저는 출전자격 나이가 되자마자 도전했어요. 용기가 많이 필요했죠. 부족해서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어떤 분이 ‘평가는 네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심사위원이 하는 것’ 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꼭 도전해서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라고 전했다. 내년을 위해 야심차게 계획한 것들도 들을 수 있었다. 허정승 명창은 ‘판소리 완창발표와 박사과정 논문완성’, 신정혜 명창은 ‘다양한 소리공부와 완창 발표회’, 최잔디 명창은 ‘춘향가 완창, 스승(故성창순 명창)의 철현금 연주 발표’, 박가빈 명창은 ‘춘향가 완창, 소리 사설집 수궁가, 적벽가 준비’, 박현영 명창은 ‘창극, 뮤지컬 등 다양한 무대경험 도전’ 등을 전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소리꾼을 꿈꾸고 있을까? 박현영 명창은 ‘겸손한 소리꾼, 소리를 맛있게 하는 소리꾼’, 박가빈 명창은 ‘따뜻한 온기를 줄 수 있는 소리꾼’, 최잔디 명창은 ‘제자들에게 예술세계를 확장해 줄 수 있는 스승이자 소리꾼’, 신정혜 명창은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소리꾼’, 허정승 명창은 ‘소리나 삶에 있어서 누가 봐도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소리꾼’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허정승 명창은 자신의 대상 수상곡인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으로 각박한 세상에 소리로 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전했다. 역시 명인은 시원한 성량과 명쾌한 발음, 뛰어난 기교로 단연 연장자임을 느끼게 했다. 때로는 흥보의 소박하지만 간절한 소망을, 때로는 경쾌한 리듬을 타고 흥보의 행운을 신명나게 표현했다. "잘난 사람도 못난 돈, 못난 사람도 잘난 돈....”해학적인 가사는 절로 흥이 나고, 재물을 나누고자 하는 바다같이 넓은 흥부 마음은 듣는 이도 흐뭇하게 한다. 출연자들은 올해 최고의 영예를 얻었지만, 그것은 수년간의 실패와 기다림, 그리고 반복되는 자기 성찰과 부단한 노력 끝에 얻은 결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수상의 영광보다는 '대상'이라는 무게를 더욱 크게 느끼며 겸손하고 정진하고 있으며, 대중에게 한 걸음 다가가고자 했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이들의 꿈과 노력이 국악계에 어떠한 결실로 이어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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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지키며 내실을 다지는, 소리꾼 김금미지난 18일 미국 문화예술기관 브루클린음악원(BAM, Brooklyn Academy of Music)에서 초청받은 ‘트로이의 여인들’, 뉴욕 하워드 길만 오페라하우스 공연은 큰 성공을 거뒀다. 어제 서울돈화문국악당 카페에서 소리꾼 김금미 선생을 국악신문 정수현 기자가 만났다.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할 법도 한데, 인터뷰 내내 소리와 창극에 대한 따뜻하고 열정 가득한 눈빛을 보여주었다. 화제의 작품 '트로이의 여인들'로부터 시작하여 판소리와 창극에 대한 열정, 그리고 앞으로 펼치고자 하는 그녀의 음악세계에 대해 들었다. 정수현 기자= '트로이의 여인들'은 전쟁의 비극에서 소외됐던 평범한 여인들을 주목한 작품으로,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한 이들의 강인함과 용기를 그렸지요. 3천 년 전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우리 고유의 판소리와 만나 세계인의 보편적 공감과 환호를 이끌어낸 것이지요. 이 작품에서 어떤 배역을 맡았나요? 김금미=왕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시대적으로 그 당시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은 흔하진 않았지만, 각본, 각색을 통해 여왕의 이미지를 부여한 것이지요. 여덟 명의 여인들과 여왕의 개인적인 삶을 포함하여, 상황과 환경을 극복해 가는 모습을 그려냈는데, 강인한 여성상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Q.여성이자, 왕이자, 어머니이자 아내인 그 역할은 시대를 불문하고 다양한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모습이겠지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A. "아무래도 내면의 연기가 가장 힘들었어요. 여자이자 왕을 대변해야 하고, 국민들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모든 걸 담아야 하기에 신경 쓸 것이 많았지요. 왕도 인간이기에 자식과 남편이 다 죽고 혼자 남았을 때의 슬픔과 힘겨움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마지막 남은 국민들을, 여인들을 지켜내야 했기에 그 감정을 삼켜내고 묵묵히 강해야만 했습니다. 그 배역을 잘 소화해 내기 위해 내면의 연기에 더 집중했습니다. 아들이 죽임을 당했을 때의 처절한 감정을 삼키고 나라를 지켜내야 하기에 꾹꾹 눌러 담는 어머니이자 왕으로서의 모습을 연기할 때에는, 특히 감정적으로 많이 아프고 아렸습니다. 또 연기적인 측면을 넘어 소리에서도 에너지와 힘을 백 퍼센트 쏟아 부어 왕의 역할을 소화하는데 모든 정성을 쏟았습니다. 감정을 억누르며 연기하는 동시에 통성으로 내지르는 판소리를 부르는 것이 어렵기도 했지만, 그게 바로 이 작품의 묘미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아마 미국의 대중들에게도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전쟁, 가족, 사랑은 모든 인류가 겪어왔기에, 모두가 아픔을 알고 있기에, 보편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Q.창극은 다양한 감정을 연기해 내는 동시에 통성으로 판소리를 함께 보여주는 것이 창극이 가진 힘이겠지요? "중국, 일본과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우리 K-MUSIC, 창극” A. "판소리를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소리의 발성이 큰 힘을 갖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외국에도 뮤지컬이나 오페라 등의 극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판소리만이 가지고 있는 부르짖는 발성의 에너지는 특별한 것입니다. 일본의 가부키, 중국의 경극이 대표적인 극이라면, 그와 견주었을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전통 가·무·악을 모두 활용하는 창극이지요. 창극을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장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극에 전통 판소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리가 우직하게 이 극을 받쳐준다는 것이 큰 멋이자 매력이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Q.오늘의 창극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국립창극단이 추구하는 창극의 가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나요? A. "국립창극단 단원으로서, ‘국립다운 국립’이라는 슬로건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니다. 이는 바로 ‘전통’ 그 자체인데, 전통은 유지하고 보존하면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요즘은 재창조라고 하여 전통 예술 분야에서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각색하고,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하지만 보존 가치를 충분히 유지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해 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국립창극단의 창극은 예술감독에 따라 추진 방향이 달라지긴 합니다만, 너무 치우치지 않는 것이 핵심이란 사실은 분명합니다. 오직 창작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전통을 확실하게 잡고 융화시키는 것. 그게 바로 세계화에 걸맞는 국립창극단만의 창극 작품으로 적합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Q. 창극주의자’라고 해야 되겠네요. 그러면 창극단원으로서의 포부와 계획은 어떠신지요? A. "무엇보다 내실을 다지는게 중요하기에 계속하여 내실강화와 자기관리에 시간을 투자할 예정입니다. 오로지 그것 뿐입니다. 특히 창극은 소리뿐이 아닌 연기나 무용 등 준비하고 공부해야 할 것이 많은 장르입니다. 무대인은 무대에서 살아야 하기에 오로지 그 무대만을 위해 집중하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판소리는, 몇 시간이고 빠져들어 할 수 있는, 또 다른 나 자신” Q. 이제 그간의 공력에 대한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검색 자료를 보니까 어머니께서는 대표적인 여성국극인이시더군요? 그 어머님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국악과는 친숙했다고 했는데, 판소리가 아닌 전통무용으로 국악에 입문하셨더라고요? A. "1982년 전통 무용으로 국악의 길에 입문하여 임이조 선생님께 살풀이, 승무까지 사사하고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KBS 국악경연대회에서 입상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소리를 하기 위해서는 다방면으로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아셨기 때문에 저에게 무용을 먼저 배우게 하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무용을 하다가 성창순 선생님께 심청가를 배우기 시작했고, 소리꾼의 길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Q.결과적으로 전통 무용을 한 것이 창극과 판소리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체험적인 설명을 부탁드린다면? A. "무용은 소리를 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판소리에는 ‘발림’이 있는데, 나의 판소리 무대를 보시는 많은 분들이 발림할 때의 선이 아름답다고 칭찬을 해 주시곤 합니다. 또한 창극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데, 연기적인 부분을 넘어서 나 스스로가 어떠한 그림을 연출하고 만들어 낼 때에 필요한 몸짓, 동작이 오래 했던 무용의 영향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Q. 판소리를 말씀하셨는데, 한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완창’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몇 시간 동안 오롯이 소리꾼의 목소리로만 무대를 채우잖아요. 이건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쉽지 않은 것인데, 많은 완창 경험이 있으시더라고요? A. "판소리 이수자로서 심청가는 기본으로 했고, 유성준제 수궁가 완창 무대도 올렸습니다. 그리고 현재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적벽가 완창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적벽가는 힘차고 우렁찬 우조 계열이지요. 적벽가를 완창 해 내는 것이 소리꾼으로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준 높고 까다로운 소리이지요. 소리꾼으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해 봐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소리는, 내가 몇 시간이고 앉아서 할 수 있고, 언제든 빠져들 수 있는 나만의 작업입니다. 재미와 즐거움을 넘어 모든 희로애락을 담아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나’라고나 할까요?” Q.현재까지 많은 국악 창작곡이 나왔지요. 또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판소리도 다양한 시도가 계속되며 그런 작품이 나오고 있다고 봅니다. 앞에서 확신에 찬 판소리에 대한 애기를 들었습니다만, 다시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판소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A. "어떤 작품이 되었든 본질을 잘 가지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본질만 잘 갖추고 있어도 창작, 각색 등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니까요. 하지만 본질이 제대로 갖추어져있지 않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댐이 잘 갖추어져 있어야 물이 넘치지 않고 흘러야 할 때 흐를 수 있듯이, 소리의 본질을 잃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현재까지 무대에 서고 있고, 앞으로도 서고 싶은 사람인데, 만일 내가 판소리의 본질을 잊고, 우직하게 정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의 나는 없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시도와 아이디어는 언제든 생겨난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술의 본질. 우리 판소리의 정통성을 어떻게 가져 가느냐에 있다고 봅니다.” "국악, 과거, 현재, 미래의 또 다른 김금미" Q.인터뷰를 진행하며 느낍니다만, 개인적인 포부나 목표를 물어도, 판소리와 창극이 더 많이 발전하고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강하게 피력하시니 다른 소소한 질문을 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리와 창극, 더 나아가 국악은 김선생님에게 분명한 "또 다른 김금미”임에 분명하네요. 여독도 다 풀지 못한 상황에서 귀한얘기 전해주어 감사합니다. 더 하실 말씀이~ . A. "예, 앞으로 창극이 지금보다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판소리가 교육적 부분에서도 대중적 부분에서도 더 많이 듣고 감상할 기회가 생겼으면 합니다. 국민들이 어릴 때부터 성장하고 나서까지 국악, 판소리를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대한민국 하면 판소리’ 라는 슬로건까지 인식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날을 위해, 무대에서 소리꾼으로서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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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에서 개최되는 KBS한민족체험수기 시상식에 부쳐...오늘 'KBS한민족체험수기' 담당 프로그램 팀 10여 명이 시상식을 위해 카자흐스탄 알마티시로 출발했다. 시상식과 축하공연이 알마티한국교육원에서 10일 개최된다. 올해 영예의 대상은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수년간 계속 한글을 공부하고 있는 사할린 2세 김경순(71세)씨가 수상된다. 일제강점기 1940년 전후부터 8만에서 10만으로 추정되는 조선인들이 사할린으로 강제동원이 되어 끌려왔다. 1945년 외세가 일으킨 전쟁은 끝났지만 동서양 냉전으로 국교가 닫혀 있어서 뱃길과 하늘길이 막혀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남사할린 전 지역에 탄광지역이나 임업지역으로 배정을 받고 100여 가구에서 150여 가구가 이주하여 남사할린 전역에서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생존했다. 잔치날에는 절구방아를 찧어서 떡을 빚고, 부침개를 부치고, 국수를 뽑아서 상을 차리고 한복을 입고 소리패들이 나가서 민요를 부르고 장구를 쳤다. 이렇게 사할린 1세들은 자신들은 언젠가 돌아갈 조국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국적도 없이 살다가 나이를 먹어갔다. 그러다가 일부는 2000년부터 국내 영주귀국이 이루어져서 국내 인천, 안산, 부산, 김포, 파주, 양주 등 25개 지역에서 현재 2500여 명이 살고 있다. 이병일 원장이 2021년 7월 한국에서 비자연장을 마치고 사할린으로 떠나기 전날부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한국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들과 사할린 현지 한인들의 소식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 주고 받았다. 비자연장을 위해 3개월마다 입국시 국내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사회 답사를 함께 동행했다. 김포, 인천에 영주귀국한 최정순 회장과 공노원 선생을 만나서 사할린 소식을 주고 받았다. 이원장은 사할린 한인사회에서 필요한 한복을 기증 받아서 가지고 가고, 2021년 제2차 영주귀국한 동포들이 요청한 한글학습 교재(러시아어 판)를 전달하기 위해 국내 영주 사할린 동포사회를 방문하기도 했다. 지난 3월 KBS한민족방송 주최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년' 공개방송에도 전 김주한 사할린교육원장님도 함께 참가해 주셨다. 2022년 9월까지 한국에 입국할 때마다 만나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메신저를 통해 현지에서의 영상통화를 요청하여 진행하기도 했다. 지난 10월 KBS한민족체험수기 수상자 발표 소식을 듣고 바로 사할린으로 전화를 드렸다. Q. 원장님, 여기 한국입니다. 방금 이번 KBS한민족체험수기 대상 작품과 수상자를 발표했습니다. 대상을 수상한 분이 바로 사할린한국교육원 원생 김경순님입니다. 이산의 가족사가 담긴 '눈물의 섬,사할린' 수기가 대상을 타게 되셨습니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수상자에게 수상소감 준비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A. 정말인가요. 꿈인가요. 믿기지 않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의 경사입니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밖에 생각안나네요. 이원장이 지난달 비자 연장으로 잠시 한국에 들어 왔는데, 몇달 전 미리 보낸 사할린 동포들의 '한글ㆍ한복ㆍ태권도ㆍ국악ㆍ아리랑 향유에 대한 인터뷰를 해주셨다. 이번에 대상을 수상한 김경순씨 체험수기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1993년부터 20년간 한글 교육을 맡아 온 사할린한국교육원의 역할과 이병일 원장의 교육활동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려고 한다. 아울러 이원장의 교육이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Q. 원장님, 안녕하세요. 3개월 전 뵙고 오늘 뵙네요. 사할린 동포들은 잘 지내시는지요. 코로나가 심한데......먼저 사할린한국교육원에 대해 소개 해주세요. A. 내년이면 사할린한국교육원 개관이 30년이 되네요. 1993년 12월 10일에 러시아내에서는 가장 먼저 설립된 한국어 및 한국문화 교육기관입니다. 2016년에 러시아 사할린 교육부에 추가(보충)교육기관으로 등록되었고, 법률적인 조건을 유지하며 운영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내에서도 재외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설립되어 있으며, 기관의 설립 또한 한-러 수교 이후 생겨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교육원은 전 세계적으로 43개 원이 있으며 러시아와 CIS지역(3개)을 포함하면, 우리나라 교육원 설립은 일본 다음으로 많은 한국교육원이 개원되어 있는 국가입니다. 한국어입문, 초급, 중급, 한국어 회화반을 운영하고 있고, 한국문화 초급, 고급반 및 민속춤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말에 특별수업으로 한지공예, 전통매듭 등을 운영합니다. 전체적으로 학기당 200명이 입학을 합니다. 연 400여 명이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한인동포 및 자녀, 현지인 절반 정도씩이고, 한글학교 등록 및 운영비 전달, 수업장학, 한국어 채택학교 지원사업, 한국어 능력시험 운영 등을 담당합니다. 다음해에는 30주년이 되는데...... 예산 확보와 30주년 행사 등의 대략적인 구상을 해놓고 이임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Q. 극동 러시아에서 사할린 다음으로 개원한 교육원은 어디인가요? 조선인이 많이 사는 곳인가요. 하바, 블라디 중? A. 교육원은 한국정부나 교육부가 원해서 설립되는 것이 아니라, 해외 동포들의 수차례의 요청에 의해서 그 국가 혹은 지역에 설립을 검토하여 개원합니다. 사할린과 연해주는 한인, 고려인 동포들이 많기 때문에, 또는 현지인들과도 사이가 좋기 때문에 국가, 지역 정부의 인정을 받아 설립, 개원하였습니다. 한러수교 후 가장 요구가 많았던 곳이 사할린이었습니다. 그래서 수교 후에 가장 먼저 1993년 12월 사할린에 개원하였고, 하바로브스크, 블라디보스토크, 로스토프나도누 순으로 교육원이 설립되었습니다. Q. 러시아에서 가장 한인들이 많이 살고있는 곳이 사할린인데. 그만큼 한국어 습득 능력과 교육 실적이 높은가요? A. 교육실적은 교육원 건물 규모와 K-POP 열기와 관계가 많습니다. 법률적으로 많이 수용 가능한 면적이라면 실적이 많겠지요. 그런데 사할린은 작은 교실 3개와 공동사용 1개 교실이 있습니다. 물론 500명 수용 가능한 대강당은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사할린에는 한국어를 배우신 분, 한국말 잘하시는 분, 이미 한국에 영주귀국하신 친척들이 많은 동포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K-POP 열기는 매우 조용합니다. 마치 한국 국내에서 K-POP을 잘 모르는 것과 같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한국어 학습 열기로 보자면 현지인(러시아 민족)이 더하고 동포들은 적당히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아서인지 참여률은 비교적 낮은 편입니다. 한국어 능력시험 수요는 사할린이 가장 낮습니다. 사할린교육원은 1년에 1번만 시험을 치루는데, 블라디보스톡, 하바로브스크, 로스토프나도누 교육원에서는 매년 2번씩 시험을 보며, 참가자들이 많아서 넓은 학교 강당을 빌려서 시험을 치룹니다. 물론 사할린에서 'K-POP경연대회' 등에서 한류 열기는 모두 대단합니다. 그러나 한국어, 한국문화 교육 실적에서는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에 비하면 높지 않습니다. 이미 한국과의 연대감이 높고 주위에 한국말 잘하는 한인들이 많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배울 수 있다는 여유가 있어서...그런가 봅니다. Q. 한국어 교육은 교육원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선생님들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요. 누구나 입학이 가능한가요. 입학시험이 있나요? 전에 가보니 엄마와 10대 후반 아들이 함께 배우더라고요. A. 한국어 교육은 입문반 3개반, 초급반 2개반, 중급 1개반, 회화 1개반으로 구성되고, 선생님들은 경력 1,2년차부터 정규 교육을 받으신 한국어학과 교수님까지 다양합니다. 현직 한국어 채택학교에서 재직하셨던 선생님들이시며, 실력은 정상급입니다. 다만 경력이 낮은 선생님들은 원어민과의 교류가 적어서인지 한국에서 파견된 저(원어민 사용자)와의 대화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처음에는 놀라웠습니다. 언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해당 언어를 하루도 빠짐없이 연구하고 접해야 하는데.... 그러나 학생들은 매우 만족해 하여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어 교육 관련 대학에서도 교육과정에서 실제 1대 1로 대화하는 '회화'나 '듣기', '말하기'의 비중을 늘려야 하는 것이 우선적 학습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Q. 사할린한국교육원의 장수 수강생인 김경순님이 대상을 받으셨는데. 어떻게 체험수기를 쓰시게 되었는지요? A. 사할린한국교육원이 주최하는 '2022년 제24회 한민족 수기대회'에서 사할린한국교육원의 장수 수강생인 김경순님이 지난 4월에 자작시를 보여 주셨습니다. 가수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곡의 가사에 맞추어 지으신 '노가바'(노래가사바꾸기) 가사인데, 일반적인 고국의 외면 속에 사시는 사할린동포 2세의 심정을 그대로 담은 가사였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에 담긴 가족사를 자세하게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을 하신 그 마음을 그대로 담아서 글로 써보시라고 권했습니다. Q. 가사 내용에는 어떤 내용이 있는가요? A. 가사에는 사할린 1세와 2세들의 디아스포라가 서린 가족사에는 뼈아픈 그리움이 절절했습니다. 그리고 7월 경에 또 한 편의 가사를 보내셨습니다. ‘칠갑산’ 노래에 맞춘 가사였는데, 한맺힌 눈물이 총총히 박힌 이별의 가족사가 담겨 있었습니다. 노래를 불러서 녹음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이 가사에 부쳐서 노래를 부르려고 연습하려고 했다가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목이 메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김경순님의 큰오빠는 1940년 10살 때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으로 떠나신 부모님과 헤어져서 배 떠난 부두에서 당시 어린 큰오빠의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적나라하게 투영되어 있었습니다. 50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가는 하늘길이 열려서, 어머니는 병드신 채, 아버지는 연로하신 채... 휠체어를 타고 한국을 방문해서 꿈에도 그리던 장남을 상봉하시고 나서 사할린으로 돌아오셔서 몇달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런 기막힌 이별과 짧은 재회, 그리고 생이별한 비극의 이야기입니다. 저도 12살에 부모곁을 떠나 서울 숙부댁으로 유학을 가던 장면이 겹쳐지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녹화를 하는 내내 목메임을 추스릴 수 없었습니다. 한국어 자막이 달린 10분 정도의 다큐 영상을 열어보고 나서 가슴이 한참 동안 울컥했다. 남의 나라 전쟁 때문에 사할린에 끌려와서 반세기 동안 겪어야 하는 한 가족사의 디아스포라는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그래서 제목이 '눈물의 섬, 사할린, 이별의 항구'이었다. 너무나 슬픈 이야기가 담긴 이 가족의 사연은 사할린 동포들에게는 누구나 겪어야 하는 가족사이다. 사할린에 사는 동포들에게 이러한 뼈아픈 사연이 없는 가족은 없다는 것이다. Q. 이번에 교육원생이 수상한 대상,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큰 성과를 얻으셨습니다. 개인적 소감은? A. 사할린에서 태어난 김경순님이 겪었던..... 부모님이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셨던 기억, 한국에 남겨진 큰오빠에게서 들은 이산에 대한 고통, 말 그대로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고향에 묻히지 못하고 타국에 묻히신 분들을 위로하고, 다시 내세에서 만나기를 기원하면서 글짓기를 해보시라고 했는데, 이 글이 조국에서 대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수상 소식은 사할린 동포들을 위로하는 치유가 되어서, 제 마음도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세계를 멈추게 하는 코로나와 전쟁으로 인해서, 이 상은 2022년 들어서 사할린 동포들이 맞이하는 조국과의 첫 교류이기도 합니다. 내년에도 사할린 동포들과 교육원생들이 많이 참가하기를 바랍니다. 2020년부터 대상을 수상하신 사할린 동포들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고 봅니다. 전 한국어 교사로서 한글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감같은 소임을 공감하셨다고 봅니다. 많은 사할린 동포들도 기뻐하였습니다. 교육원의 한글 수업에도 큰 힘이 됩니다. Q. 2년 동안 교육원에서 한글교육을 하시면서 특별히 기억나는 학생은 ? A. 수많은 학생이 기억나지만, '안냐 나른스카야' 학생이 생각납니다. 교육원에서 5년간 한국어 공부를 했고, 한국에 나가서 장학생으로 유학하고 싶었지만 한국어 능력시험 3급으로는 자격이 안된다고 하여 탈락되었어요. 이후 사할린국립대 한국어학과 들어가고, 계속 교육원에 나오고 하다가 부산외대 교환학생이 되어 6개월 동안 공부하고 돌아왔습니다. 의지의 사할린 여성이랄까요? Q.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펼친 원장님의 교육이념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A. 사할린 동포들에게 있어서 한글과 한국어는 정체성의 구현입니다. 한국어를 모르면 한국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한국어는 한민족의 얼이고 혼입니다. 다음 사할린 한인 4세 세대와 한국인 세대가 만나서 김치, 김치찌게, 삼겹살을 먹으며 먹으며 한국어로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한국문화에 친해지도록 탈춤도 보여 드리고 달고나(오징어게임)도 만들어 보여 드리고 제기차기, 팽이돌리기 등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Q. 원장님, 사할린 동포들의 한글교육과 사랑에 대한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다시 사할린교육원장직을 연장하시고 싶으시나요? 공식적 연장은 가능한가요. A. 네, 6개월 단위로 연장 가능합니다. 저는 코로나 시기와 함께 교육원 임기가 시작되어...처음 몇 개월동안 문을 닫고 해서 아쉬움이 커서. 6개월 연장 신청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떠날 때는 떠나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쩌면 다시 오기 위하여 지금 떠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장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첫 개원이나 교육원 이전 등 정말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연장이 안됩니다. Q. 현재 한글교육을 하는 사할린 세종학교(교장:임종환) 역활과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A. 유즈노사할린스크 세종학교는 재외동포재단에서 운영하는 한글학교의 이름입니다. 세종학당재단에서 운영하는 세종학당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교육원에서는 매년 재외동포재단의 한글학교 운영비를 지원하고 정산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교육원에서 보유한 교과서를 지원하기도 합니다. 세종학교의 문화행사에 가끔 참여하기도 하고, 민속춤 수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글학교 수업 장학은 우리 교육원의 업무입니다. Q. 코로나로 인해서 한국에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팬데믹 기간 동안 교육원과 사할린한인협회는 연례 행사를 어떻게 치루셨는지요. A. 교육원은 문화행사로 주최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으로부터 교류가 없으니까요. 2021년 한국어말하기 K-POP 경연대회는 국립대학이 주최, 사할린한국교육원이 주관하였습니다. 김치축제에는 우리가 강사님만 초청했고, 막걸리와 전통놀이 도구만 지원했습니다. 사할린한인협회(회장:박순옥)가 주관했습니다. 2021년의 말하기 대회와 K-POP경연대회는 사할린국립대학에서 예산을 세워서 개최했으며, 설날 행사 등에는 사할린한국교육원 민속춤 클래스에서 ‘밀양아리랑 댄스’을 더했지만, 실제적 주최는 사할린한인협회입니다. 이제는 사할린에서 문화행사는 대부분 사할린한인협회가 주관하게 되었고, 저는 사할린동포 단체가 주체가 되어 주최되는 문화행사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13일 인터뷰를 마치고 2일후 이원장은 탈춤을 가르치기 위한 한삼 20벌과 한복 10벌, 무용 슈즈 10컬레를 트렁크에 추려 넣고 뱃길로 가는 사할린 길을 나섰다. 이원장은 서울에서 출발하여 동해안 뱃길을 타고 블라디보스톡에 당도한 후 다음날 오전 사할린 가는 비행기를 타고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보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사할린에 가는 직항로가 폐쇄 되어서 2시간이면 가는 거리를 돌고 돌아서 2박 3일을 걸려서 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은 3년째 가족이 기다리는 사할린 땅을 밞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올 봄에만 해도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모스크바에서 사할린 행 비행기를 타고 가야만 했다. 올 가을부터 연해주로 가는 뱃길이라도 열려서 다행이다. 그러나 극동 러시아 바이칼 부근 지역에 사는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몽골을 경유해서 2일간 육로로 가야하는 형편이다. 우리 모두는 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다음에는 사할린 한인들의 정체성을 살피기 위해 이병일 원장에게서 사할린 동포들의 '김치'와 '국악'의 향유에 대한 인터뷰를 싣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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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춘 명인에게 듣는 '남도민요경창대회'가 배출한 5명창예향의 고장. 보배로운 섬으로 알려진 진도에서 개최되는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는 남도 특유의 가락과 신명성이 깃들어 있는 남도민요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문화예술의 고장 진도를 알리기 위해 매년 열리고 있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한국국악협회 진도군지부 이희춘 회장(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8호 '진도북춤' 예능보유자, 진도군립민속예술단 예술감독)을 통해서 '남도민요경창대회'가 홍보 및 진행되고 있는 3개월 기간 동안 10여 차례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회장에게서 진도에서 개최되는 남도민요경창대회의 성과와 함께 대회를 통해 배출한 5명의 명창들에 대해 들어보기로 한다. Q. 진도의 명물 '진도북춤' 명인이신 이희춘 회장님. 안녕하세요. 2000년 진도아리랑축제에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지난 15일 한반도아리랑이 개최된 밀양 무대에서 뵙고 반가웠습니다. 현재 한국국악협회 진도 지부장을 맡고 계시는데, 지부에서 주최주관하는 국악경연대회에 대해 궁금합니다. A. 네, 감사합니다. 진도 지부에서는 매년 2가지 경연대회를 개최합니다. 지난달 진도의 가을을 남도민요의 흥취에 흠뻑 빠지게 한 2022진도문화예술제 기간 중에 열린 제24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 및 제15회 '진도 고운 김득수 전국고수대회'가 막을 내렸습니다. 청중평가단을 도입하고 공정한 심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상과 다르게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도 전국의 찐한 국악인들이 많이 참가해 주셨습니다. '남도민요'의 위상이라고 봅니다. Q. 우선 이번 남도민요전국경창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셔서 축하드립니다. 지난달 23일 개최된 남도민요경창대회가 올해로 몇 년이나 되었나요. A.1998년부터 시작해서 올해가 24회가 되었습니다. 24살이 되었습니다. 제1회 수상자는 진도 출신 박진섭 명창입니다. Q. 올해 제24회 경창대회 축하무대에서 남도민요전국경창대회 역대 대통령 수상자 6명이 오셔서 멋진 남도민요의 무대를 선사하셨다는데 누가 오셨나요? A. 청중평가단으로 모신 양명희, 허애선, 유하영, 이경하, 양혜인, 현미 명창이 오셔서 축하 무대를 화려하게 해주셨습니다. 성주풀이, 남한산성, 진도아리랑을 불러주셔서 박수를 받으셨습니다. Q.남도민요경창대회 중 역대 수상자 중 명성있는 명창 명인이 배출되었나요 A. 남도민요경창대회에서 배출한 명창 명인으로 강송대 명인을 비롯하여 방송인으로 역활을 하면서 국악을 널리 알리는 박애리 명창이 있지요. 허애선, 유하영 명창 등등, 올해로 24명을 배출했습니다. 그 중 5명을 대회 순서로 꼽는다면.....강송대, 박애리, 허애선, 유하영, 양혜인 명창입니다. 진도 출신은 강송대 선생과 허애선명창입니다. 이회장이 뽑은 남도민요경창대회에서 장원(대통령상)을 한 역대 명창들을 다음과 같다. -제2회 대상 수상자, 강송대(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34호 '남도잡가' 예능보유자) (1999년) -제8회 대상 수상자, 박애리, 방송인(KBS 국악한마당, 불후의 명곡, 아침마당 등 출연) (2005년) -제12회 대상 수상자, 허애선, 국립창극단 상임단원 (2009년) -제17회 대상 수상자, 유하영, 국립남도국악원 상임단원 (2014년) -제20회 대상 수상자, 양혜인, 국립남도국악원 상임단원 (2017년) Q. 이회장님 자랑하시는 역대 수상자 5분에 대해 각각 소개 해주세요. A. 첫째, 진도가 자랑하는 강송대 명인(83세, 전남 무형문화재 34호 '남도잡가' 예능보유자)은 50년간 송가인을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했고 '남도민요' 대명사로 국내외에서 널리 알려진 분이십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국악영재로 길러졌지요. 어머니 이근녀는 소리 잘하는 것이 대접받지 못한 시절에 태어나서 타고난 재능을 만개하지 못했지만 진도에서는 유명한 소리꾼이시니 강송대 명인은 태아에서부터 이미 뱃속에서부터 소리를 듣고,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서 6살부터 소리의 길을 가신 분이십니다. 남들보다 일찌기 득음을 하신 명인이십니다. 혼자 무대에 서도 관객을 압도하는 가창력과 무대에서 뿜어내는 남도민요의 신명성은 언제부터인지 전설이 되었습니다. 연세가 높으신데도 누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진도아리랑을 첫척 맛갈스럽게 부르십니다. 현재 돈지리에서 어머니가 물려준 150년 된 고택을 지키고 계십니다. 둘째.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박애리 명창은 지난 1994년 대사습놀이 학생부 판소리 부문 장원과 2005년 남도 민요 경창대회 명창부 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2019년엔 제46회 춘향국악대전에서 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판소리 명창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이지요. 특히 판소리에 머무르지 않고 드라마 OST(대장금 ‘오나라’)로 일약 유명해지기 시작했죠. KBS국악한마당, KBS 불후의 명곡 등 각종 방송과 무대에서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힘쓰고 있는 국악인입니다. 셋째. 허애선(54세) 명창은 전남 진도 태생이고 2009년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2017년 박동진 판소리 명창·명고대회 명창부 대통령상까지 수상한, 민요와 판소리 두 분야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허애선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서야 늦깎이로 국악에 입문했지만, 성우향·안숙선·신영희·윤진철을 사사했고, 40대에 이르러 타고난 재능이 터져나온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맑고 강단 있는 음색에 남도 특유의 한과 정서를 잘 표현하는 장점을 지녔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이고,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 졸업(1993년)및 동대학원 졸업하고,(2016년) 현 국립창극단 상임단원으로 역량을 펼치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정자 소리꾼으로 진도씻김굿, 진도다시래기 선창을 도맡아 하시는 유명한 소리꾼으로 허애선씨가 예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넷째, 유하영 명창은 2014년 남도민요경창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했습니다. 우석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박양덕 명창,이일주 명창에게 판소리를 사사하였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수궁가' 이수자이고. 2008년 박록주 전국국악대전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설 하나하나를 정확히 표현해 내는 능력이 뛰어나며, 타고난 목 성음이 구성져 소리의 이면을 잘 그려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국립남도국악원 수석단원이고, 현재 결혼해서 진도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다섯째, 양혜인(33세) 명창은 올해 전주대사습 첫 출전에서 판소리 명창부 장원(대통령상)을 한 명창입니다.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인 이난초 명창의 제자로 입문한 뒤 29년 동안 판소리를 이어온 양혜인 명창은 호남여성농악 명인 유순자 선생의 딸이고, 당시 국립남도국악원 단원으로 2013년 홍보가 완창 발표회도 가졌고, 해남 전국국악대전 일반부 판소리 부문 대상, 제42회 대한민국 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부문 일반부 대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021년 제46회 전주 대사습에서 장원을 차지했는데, 당시 첫 출전이지만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Q. 올해 남도민요경창대회에서 대상을 쥐머쥔 인물이 역대 최연소 나이로 수상한 조수황(27세)씨인데, 강송대 명인으로부터 진도 명인들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들었습니다. A. 네, 조씨의 외조모의 고향이 의신면 돈지리입니다. 강송대 명인의 동생인지라 조씨에게는 이모할머니가 되지요. 남도들노래 전승교육사 노부희 명창이 이모이지요. '남도민요'의 DNA(유전인자)를 이어나가는 인물입니다. 진도 출신 강송대, 강은주, 노부희로 이어지는 가맥을 가지고 있습니다. 4살때부터 국악에 들어선 조씨는 장순연 선생과 진도출신 신영희 선생을 사사했습니다. 서울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하고 동아국악콩쿠르에서 판소리 금상을 수상했습니다. 11살 계정 신영희 선생 문하에 입문한 이후 다양한 대회에서 차례대로 입상하며 차세대 소년명창으로 일찌기 이름을 알렸지요. 국립국악중, 국립국악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를 졸업하고 예원국제예술콘서바토리 공연예술과 교수, 아태경제연구원 평생교육원 전임교수를 역임하고 있습니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이자 한국청년예술가협회 이사장, 한국사회공헌협회 이사로 재임하며 한국 전통 음악의 맥을 이어가는 중책을 맡고 있는 중입니다. 국악계에 남성 명창이 드문 현실에서 기대가 되는 명창입니다. Q. 경연에 참가한 국악인은 얼마나 오셨는지요? 전국 지역 중 가장 많이 오는 지역은 어느 지역인가요? A. 올해에는 홍보가 많이 되어서 작년보다 더 많은 참가자들이 왔습니다. 남도민요경창대회 약 150여 명, 고수대회에는 100여 명이 참가했고, 가장 많이 참여하는 지역은 서울, 광주, 전라남도 순입니다. Q.경연대회를 통한 성과는? A. 첫째는 전국에서 오시는 참가자들에게 예향의 고장 '진도'를 널리 알리는 것이고. 둘째는 호남지역에서 발생한 '남도민요'의 맛과 멋을 알리면서 향유자들을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셋째는 경연대회를 통해 예비 국악인들과 일반인들에게 국악의 관심과 지평을 널필 수 있습니다. 넷째는 기존 수상자들이 명인 명창으로 거듭나는 첫걸음이 되었다고 봅니다. 다섯째, 경연대회는 국악이 미래에도 보존해야 하는 '지속가능성'의 계기를 만들어주는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Q. 개선이 되어야 하는 점은? A. 아무래도 최남단에 위치한 섬이라서 교통편도 불편해서 참가자들에게 1박2일 동안 숙식을 제공해드리고 싶습니다. 전에는 진도 출신 지인들과 함께 따라오시는 참가자들이 오시면 숙식을 제공해드리기도 했습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멀리 진도까지 오신 국악인들에게 진도의 명승고적까지 관광을 시켜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코로니 이후 갈수록 경제가 어려워지니.... 보조금 지출에 있어서 현실 가격과 책정된 가격 차이가 있어 어려움이 많습니다. 특히 정산서 작성 요령에 대하여 교육과정과 일관성 있는 안내가 필요합니다. 특히 고수대회의 최고상 훈격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이라서 참가자 수가 저조합니다. 국무총리상의 격상이 필요합니다. 지난 10월 경기도 지역 국악협회 주관한 국악경연대회에서는, 지자체에서 남부지역에서 오는 참가자에 한해서 숙식을 제공한다고 하자 예년과 다르게 부산과 광주 지역에서 참가자들이 참가했다고 전해진다. Q. 남도민요경창대회 외국인 참여는 가능한가요? 외국인이 참가한 적이 있나요. 한국에 결혼해서 이주한 다문화 그룹이라든가 A. 현재는 참가자격에 국적 제한은 없습니다. 다만, 외국인 참가자가 없어 아쉬움이 있으나 추후 외국인 참가자 수가 늘어나면 외국인을 위한 부문을 신설할 계획입니다. 이희춘 회장은 경연대회의 중요성에 대해서 미래 국악의 향유자와 국악 영재를 키우는 발판이 된다고 하였다. 나아가 국악인들의 자긍심을 키워주는 역활과 열공하는 동기부여를 해준다고 덧붙였다. 남도민요를 널리 알리는 경연대회로 거듭 나겠다고 밝혔다. 이회장은 박관용류 북놀이를 이수하고 전수교육 조교로 활동해 오다가 2015년 '진도북춤' 보유자가 되었다. 박관용류 북놀이는 진도 3대 북놀이 중 하나로 남성적이고 역동적인 양태옥류와 아주 여성적인 김길선류의 중간 형태다. 다음 편에서는 큰 국악 행사에 가면 어김없이 초청공연을 벌리는 '진도북춤'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 인터뷰에서 다루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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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3색, 장원 수상자들..... 오늘과 내일을 말하다전국 단위 경연대회에서 '장원’이라는 타이틀은 국악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이다. 아무나 도달할 수는 없지만, 해마다 새롭게 누군가는 이 자리를 차지한다.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온, 올해 최고의 영예를 얻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명인·명창의 오늘과 내일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2개 지역의 주요 전국대회와 1개의 차세대 국악경연대회 총 3개 대회를 선정하여, 그 장원자들을 인터뷰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각각 다른 연령대를 보이고 있어, 각각 다른 세대의 예인으로서 가지는 고민과 꿈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인터뷰는 허정승 명창(제49회 대한민국춘향국악대전 명인부(판소리) 대상), 박현영 명창(제48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명인부(판소리) 장원), 소리꾼 이성현씨(제32회 KBS국악대경연 종합대상)와 각각 인터뷰를 진행했다. 스승 안숙선 국창의 올곧은 길 따르고파 허정승 명창(만41세) 국립남도국악원 성악단 악장 한양대 음악대학 국악과 겸임교수 *어머니 권유로 12세 판소리 입문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졸업(예술사, 판소리 전공) *안숙선, 안애란, 김순자, 조주선 명창 사사 *김소희제 흥보가 완창(2010) *국립국악원 국악경연대회(현. 온나라 국악경연대회) 성악부 금상 *제29회 임방울국악제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준우수상(2021) *제49회 대한민국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 대상(2022,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 Q. ‘춘향국악대전 대상’ 수상은 어떤 의미였나요? A.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소리를 시작했는데요, 이번에 이렇게 큰 상을 받고 나서는 그 동안 걸어왔던 길에서 새로운 출발점이 된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상을 타고 나니 제 이름 뒤에 붙는 ‘명창’이라는 무게가 엄청난 부담감으로 오더라고요. 예전에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소리를 했다면, 이제는 ‘명창’에 걸맞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크게 다가오죠.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마음가짐으로 소리를 대하고 있습니다. Q. 대상으로 이미 실력을 인정받으셨는데, 어떤 부족함을 느끼시는 건가요? A. 제 스승이신 국창 안숙선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소리가 어렵다.”고요. 이 상을 타고 나서 그 말씀이 점점 실감이 나는 것이, 예전에 했던 대목을 지금 다시 하면, 그 안에 내재된 의미나 정확한 목의 꾸밈음 같은 것이 새롭게 다가오면서, 예전에 몰랐던 것을, 할 때마다 새롭게 느끼게 되요. 각 대목마다 의미를 부여해서 불러야만 관객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어렵고요. 결국 연습밖에 없죠. 혼자 연습하지만, 그래도 스승의 그늘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뭔가 막히면, 늘 스승님께(안숙선 국창) 여쭤 봐요. 그러면, 선생님께서 웃으세요. 당신께서도 경험하셨던 거죠. "너도 느낄 때가 됐구나.” 말씀하시면서, 자세히 알려주세요. 배경 지식이나, 목의 쓰임이나, 필요한 부분들. 예전에 몰랐던 것들을 좀 더 세밀하게 알게 되죠. 어려울 때는 정말 어려운데, 소리하고 있을 때는 행복하고, 즐겁고, 가사나 배경 생각하면 슬프고, 기쁠 때도 있고요. 소리를 하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느끼는 것 같아요. Q. 춘향국악대전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A. 안숙선 선생님께서 이 대회 13회 대통령상 수상자세요. 저는 늘 ‘선생님의 길을 따라서 상을 타겠다.’는 막연한 꿈을 늘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10년 이상 직장생활(국립남도국악원 성악단 악장) 하면서 현실에 안주하거나 일상에 젖어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또 다른 제 꿈이 대학에서 소리를 가르치는 것이었거든요. 아내도 제게 ‘꿈을 향해 좀 더 적극적으로 준비했으면 좋겠다.’라고 지지해줬고요. 그래서 ‘다시 시작해야겠다.’ 라는 결심이 섰죠. 근처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음악교육과에 진학해서 2018년도에 졸업했어요. 꿈을 향해 달려가야겠다는 생각도 더 들기 시작했어요. 이곳 국립남도국악원 주요 기능 중의 하나가 교원직무연수, 공무원연수 등을 담당하는데, 제가 이론이나 여러 가지로 좀 더 심도 있게 공부해서 양질의 교육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한양대 박사과정으로 입학했어요.(2019) 그 때 조주선 교수님을 만났는데, 교수님께서 제 소리에 대한 장단점을 잘 파악해주시고, 지도해주셔서 소리꾼으로서 제게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그리고 국악경연대회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죠. 직장생활 하면서 준비하는 것이라, 연습은 일과 후에, 국악원 내에 있는 타악기 전공하는 단원에게 부탁해서 그 단원과 함께 매일 한바탕씩, 최소 2시간 정도씩은 했어요. 전주대사습, 임방울, 춘향제 3대 대회를 2020년부터 지원했어요. 2020년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본선 3등 했고요. 한 해에는 예선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고요.(2021 임방울국악제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준우수상) Q. 경연대회 과정(춘향국악대전)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A. 예선 끝나고 본선을 위한 번호표를 뽑는 순서를 정하는데, 제가 마지막 순서가 됐어요. 순서가 뒤로 갈수록 곡에 대한 선택권이 줄어들거든요. 그 때, ‘어떤 대목이든 내가 잘하면 된다. 최선을 다해서 무대를 불사르자.’는 마음으로 임했죠. 제 자신에게 더 집중하려고 마음을 다진 것 같아요. Q. 대상 수상 이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A.국악원에서도 많이 기뻐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제가 악장(국립남도국악원 성악단)이라서 국악원 상설공연, 특별공연 기획·공연하고, 단원 개인 성향도 파악하고, 대학에서 수업도(한양대 국악과 겸임교수) 하고요. 여러 가지로 정신없이 바쁩니다. Q. 대상 수상 이후, 국악인으로서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A. 명창, 대통령상 이라는 타이틀이 생겨서 부담감, 책임감도 상당히 크지만, 다른 공연에서도 불러주시고, 심사 기회도 많이 생겨서 황송하고 감사하죠. 최근에 인상 깊었던 기억이, 남원의 ‘국악의 성지’에서 열린 ‘대한민국 국악대제’(2022)에 참가했어요. 다른 장원자 분들과 함께, 국창·명창 선생님들 앞에서 민요를 불렀는데, 그 동안 많은 공연을 해왔지만, 너무 큰 어르신들 앞이라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그러면서도, 국악의 역사가 살아 있는 곳에 제가 함께 했다는 것이 너무 영광스러웠어요. 국악인으로서 자부심도 더 커지고요. Q. 내년에 출전할 잠재적 지원자들에 전하는 참가자의 가장 큰 덕목(대상 수상 비결)은 무엇인가요? A.저 같은 경우는, 날마다 한바탕씩 꾸준히 하려고 했어요. 선곡은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결정되기 때문에, 결국 꾸준한 연습밖에 없는 것 같아요.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A.이제는 발표에 집중하려고 해요. 내년부터는 국립국악원 등 단체에서 주최하는 공모사업에 지원해서 더 많은 분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또 저의 선생님(안숙선 국창)께서 이번에 문화재 되셨잖아요(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2022). 전수가 시작되어서, 장기적으로는 선생님께 춘향가 이수 받는 것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또 지도자로서의 꿈도 계속해서 준비 중입니다. 특히 조주선 교수님을 만나게 되어서 소리꾼으로서의 제 인생에 너무나 감사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거든요. 작년에 한양대 국악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겸임교수로 수업도 시작했어요. 조교수님처럼 제자에게 진정 필요한 조언을 해주면서, 인간적으로도 살가운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안숙선 선생님이시죠. 제가 16세부터 안선생님께 지도를 받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국창 반열에 오르시고 유명하시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엄청난 노력을 하셨고, 한 눈 팔지 않으신, 외길 인생을 옆에서 다 봤거든요. 저도 그렇게 올곧게 가고 싶어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그 자리에 계셔서 후배들에게 굳건하게 버팀목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Q. 국창 안숙선 선생님 지도를 받으시면서 기억에 남는 말씀은 어떤 것인가요? A.제가 진도(전남)에 있다 보니 굿, 민요를 많이 하는데, 판소리와 민요 창법이 다르거든요. 어렸을 때(약 10년 전)는 구분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질문을 드렸어요. "선생님, 판소리랑 민요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잘 모르겠어요.”라고 여쭤봤는데, 선생님 말씀하시기를 "판소리는 씹어서 하고, 민요는 밀어서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때, ‘아!’하고 뒤통수가 얻어맞는 것 같은 감동을 받은 기억이 있어요. 명쾌하면서도 깊은 뜻이 그 안에 다 있더라고요. 그리고 이제 제 생각을 덧붙이면, ‘굿은 눌러서’ 하고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선생님은 제 소리꾼 인생의 스승이자 목표에요. 소리는 나 자신과의 싸움, 늘 겸손한 소리꾼 될 것 박현영 명창(만34세)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원 *중1 때(14세) 아버지 권유로 판소리 시작.(사람들, 노래 부르는 것 좋아해서) *전북대 한국음악학과 졸업 *스승 : 김일구, 김영자 명창 사사 *정광수제‘수궁가’ 완창(2009) *제17회 완산국악대제전 판소리 일반부 대상(2012) *제39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일반부 차상(2013) *제46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부 명창부 차상(2등, 2020) *제48회 전주대사습놀이 명창부 판소리 부문 장원(2022, ‘적벽가 중 조자룡 활 쏘는 대목’) Q.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명창부 장원’은 어떤 의미인가요? A.대통령상을 받으면, 학교로 치면 졸업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했는데요, 막상 타고 보니, 졸업이 아니라, 제대로 소리 길에 입문한 듯한, 처음 시작한 느낌이더라고요. 상의 무게감, 책임감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는 공연하면, 관객 분들께 제가 좋아하는 소리를 했는데, 상을 타고 나니, ‘나만 만족하는 공연이 아니라, 관객 분들도 만족시키는, 제대로 된 소리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상을 탈 때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어서, 벅찬 감정들도 올라오고, 이른 나이에 탄 것 같아서 부담스러운 것도 있었고요. 그 때 소감으로 ‘겸손한 소리꾼이 되겠다.’고 말했는데, 그것만큼은 제 소리꾼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이에요. Q. 올해 출전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A. 3번째 도전이었어요. 첫 번째는 2등 차상(2020), 두 번째는 가사 실수를 해서 3등(2021)을 했어요. 이른 나이에 도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막연한 생각에, 이런 큰 대회를 준비하면, 더 연습하게 되고, 그 기회에 공부하고자 해서 도전했어요. 빨리 경험 쌓아서 경력을 만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도전하게 됐어요. 김영자, 김일구 선생님 지도도 받았고요. 두 번째 대회 때, 가사 실수하는 바람에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가 나와서, 연습 부족이라 판단하고, 대회 끝나고 마음 추스르고 바로 도전했어요. 다른 대회 준비 안하고요. Q. 중간에 힘들 때는 없으셨나요? A.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제 자신과의 싸움이었던 것 같아요.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일상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날씨 좋을 때, 꽃놀이 못가고, 여름에 물놀이 못가고, 직장(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퇴근 후에, 연습하고, 저녁 먹고 집에서 가사 생각하면서 연습하고, 연습시간은 하루 평균 3-4시간 정도였던 것 같아요. Q. 대회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A. 코로나 격리 1주일 후에 예선을 치렀어요. 목 상태가 말이 아니었죠. 후유증이 남아 있더라고요. 본선 때도 작년 보다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그래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임한 것 같아요. Q. 모교 한국전통문화고(전주)에 장학금을 기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A. 의미 있게 상금을 쓰고 싶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가장 생각난 것이 고등학교 때, 한창 놀 시기인데, 그 때 선생님들께서 저를 잡아주시지 않았다면, 소리 안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저도 학창시절 어렵게 소리 공부를 해서, 재능을 가진 후배들에게 경제적으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서 결정하게 됐습니다. Q. 대회 장원에 오르신 이후, 어떤 점들이 달라졌나요? A. 수상 당시에 국악단 단원 분들, 좋으신 선배님들, 주위 분들께서 많이 축하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전주세계소리축제, 전주독서대전개막공연 등에서도 공연하고, 전주MBC 인터뷰도 했지만, 제 일상이 특별하게 달라진 것은 없어요. 단원으로 다시 돌아와서 작품 활동 꾸준히 했죠. 저는 판소리 보다는 창극 같은 작품으로 주로 공연했어요. 극단 상설공연도 있고, 1년1회 정기공연, 기획공연 등에 참여하거든요. 전주는 소리의 고장이라 다른 지역에 비해 공연도 많아요. Q. 국악인으로서 느꼈던 보람은 무엇이었나요? A. 국악원에서 파키스탄으로 해외 공연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국악 관현악단과 함께 공연하는데, 현지 관객 분들이 너무나 크게 환호하고, 격하다 싶을 정도로 즐기시는 거예요. 상당히 놀랍고 신기했는데, 그 때, ‘국악이 진부하고 그런 느낌의 음악만은 아니구나. 민족을 초월해서 공감할 수 있는 뭔가가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어요. Q. 국악의 맛은 무엇이고, 소리꾼으로서 그 맛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A. 국악의 맛이요... 단기간에 알기는 쉽지 않지만, 판소리 사설에 있는 말의 맛을 알게 되면, 굉장히 재미있거든요. 한자로 되어있는 사설들이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해석하거나 풀이해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요소가 있어요. 대부분이 그런데, ‘춘향가’ 한 대목 사설 중에, ‘금강산 상상봉이 평지가 되거든 오시랴오.’라는 구절이 있어요. 춘향이가 이별 할 때, 바닥을 긁으면서 오열하는 장면인데요, 금강산 가장 높은 봉우리가 평지가 되는 것은 현실에서 도저히 불가능하잖아요. 결국 다시 만날 수 없는 애통함을 담은 거예요. 춘향이의 간절함과 애통함이 그대로 표현되는 구절이죠. 그런 사설들의 말맛에서 느껴지는 재미가 있어요. 대중 분들이 바로 소화하기에는 힘들 수 있지만, 그것을 돕는 것이 소리꾼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보통 ‘이면에 맞게 소리를 한다.’고 하잖아요. 그 내면의 뜻을 잘 살려서 소리를 전달하려고 늘 노력해요. Q. 내년에 출전할 잠재적 지원자들에 전하는 참가자의 가장 큰 덕목(대상 수상 비결)은 무엇인가요? A. 우선은 제 나이 또래보다는 후배에게 말하고 싶어요. "무서워하면 안 된다.” 도전조차 못하게 되니까요. 주위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경험을 먼저 해보라. 그래야 실패도 하고, 그 실패가 쌓여서 밑거름이 된다.”고 말해요. 결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공부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으면 좋겠어요.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A. 소리꾼의 길을 걷게 됐으니까,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완창무대(수궁가를 우선) 많이 갖고, 많은 분들 찾아뵙고 싶어요. 11월 13일 전주대사습놀이 주최로 ‘전주대사습뎐’ 공연이 국립극장에서 있어요. 다른 분야 장원자 분들과 함께 무대에 서게 되는데, 저는 입체창에 참여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제가 있는 창극단 송년 음악회도 준비 중이에요. 내년에는 음반도 내고 싶고, 다른 분야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도전하고도 싶어요. 밥 먹듯 숨 쉬듯, 소리는 나의 삶 이성현 소리꾼(만 27세) 남원시립국악단 창악부 단원 *어린이집 민요수업 후, 판소리 시작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연희예술전공 졸업, 동대학원 석사수료. *스승 : 조상현, 유미리, 한승석, 한계명 명창 사사 *흥보가(2002), 춘향가(2013), 수궁가(2017), 심청가(2020) 완창 *제35회 온나라국악경연대회 판소리부문 금상(2015) *제30,31회 KBS국악대경연 성악 차상(2015, 2016) *제21회 공주박동진판소리명창명고대회 명창부 최우수상(2021) *제32회 KBS국악대경연 대상(성악부문, ‘춘향가 중 박석치 대목’)(2022년) Q. KBS국악대경연 차상만 2회 수상 후에, 올해 대상을 수상하신 소회가 어떠신가요? A. 대상 수상은 진짜로 풀리지 않던 숙제가 풀린 느낌이랄까요. 계속 도전하던 관문을 통화한 느낌이에요. 국악인으로서 의미도 크고요. KBS국악대경연은 큰 대회이고, 어릴 때부터 더 욕심이 났던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 제가 판소리 하는데, 가장 큰 지원자이시기 때문에, 늘 감사한데, 무대에서 대상 타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조금이나마 효도한 것 같아서 기쁘기도 해요. Q. 경연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A. 5번째 도전이었어요. 2015년도에 첫 번째 도전에서 운 좋게 2등, 그 다음해도 2등. 이후 2번 더 지원했는데, 예선에서 탈락했어요. 이후에는 마음을 내려놓고 도전했죠. 특별히 더 열심히 한 것 없이, 평소 하던 대로 연습했고, 컨디션 관리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한달 전부터 술 전혀 안 먹고, 목도 무리해서 연습하지 않도록. 하루 1-2시간 정도 연습하고, 결선 당일에도 간단하게 1시간 정도 목을 풀고, 잘 나올 수 있는 컨디션으로 실전에 임했어요. Q. 대상 수상 이후 달라진 점은 어떤 것인가요? A. 크게 일상의 변화는 없고요. 주위에서 축하 많이 해주세요. 조상현 선생님께서 가장 먼저 축하한다고 전해주셨어요. 제게 거시는 기대가 남다르셨는데, 배운 것을 수상으로 보답해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수상 당시 수상 소감에 미처 말씀 드리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는데, 스승님께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해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11월 14일 국악방송 ‘바투의 상사디야’에 출연할 예정입니다. Q. 상금을 모교(중앙대 전통예술학부)에 전액 기탁하기로 결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 상금을 의미 있게 쓰고 싶었어요. 저도 국악 하면서 학교 다니는 것이, 상황이 집안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그 어려움을 잘 알고 있거든요. 국악 공부하는, 집안사정 어려운 친구나 후배들이 공연 하거나 배우거나 준비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지도교수님께 뜻을 전해드렸고요, 조만간에 절차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Q. 수상 이후 어떻게 지나셨나요? A. 현재 남원시립국악단 단원으로 근무 중이거든요. 단원으로서 충실히 활동 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완창무대도 준비하고 있어요. 내년에 국악단 통해서 창극 무대로도 찾아뵐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여기 악장님(임현빈 명창)께서 이번 경연 때, 북을 쳐주셨어요. 제가 먼저 부탁드렸는데, 흔쾌히 응해주셨어요. 결선 선곡도 악장님께서 도와주셨고요. 여러 가지로 큰 도움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커요. 전부터 존경하고, 소리꾼으로서 보고 배우고 싶은 분이라서 이곳(남원시립국악단)에 온 이유도 있어요. Q. 국악인으로서 느끼는 보람은 무엇인가요? A. 무대에서 제가 소리했을 때, 관객 분들 좋아하실 때, 가장 큰 보람 느끼고 ‘소리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 들죠. 초등학생 때, 재능기부로 병원이나 노인정 같은 곳에 공연을 종종 갔어요. 특히 병원 환자분들은 크게 웃을 일이 없으시잖아요. 그런데, 제 소리 들으시고 울기도 하시고, 웃기도 하시는 것 보면서, 저도 큰 감동 받고,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어요. Q. 어린 나이(7세, 18세)에 판소리 완창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뭔가요? A.소리를 하면서, ‘완창’이라는 것이 큰 도전이랄까?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완창을 준비하면서 실력도 늘고, 해내면, ‘해냈다’라는 생각으로 한계를 극복하면서, 도전의 의미가 컸어요. 소리를 배우면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Q. 어릴 때 소리를 시작하셔서, 힘들 때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A.힘들 때, 이겨 냈다기 보다는 그냥 밥 먹듯이, 숨 쉬듯이 소리를 했던 것 같아요. 힘들다고 느낄 때는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밥 먹듯이, 숨 쉬듯이 하는 일이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죠. Q. 내년에 출전할 잠재적 지원자들에 전하는 참가자의 가장 큰 덕목(대상 수상 비결)은 무엇인가요? A.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컨디션 관리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예선은 짧게 들으니까, 시간 계산을 정확히 해서, 그 시간 안에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보여줄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거죠. 고음, 저음 등 모두 보여드려야 하니까요. 주어진 시간이 조금 긴 본선의 경우에는, 소리의 이면이나 깊이를 보여주면서, 정해진 시간 안에 자신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A. 단기적으로는 완창을 준비하는 것이에요. 적벽가를 제외하고 완창 하기는 했지만, 춘향가를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다시 준비 중입니다. 장기적으로는 꾸준히 소리 공부하고, 나중에, 전국 명창 대회에서 대통령상 받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리꾼이 됐으면 좋겠어요. 판소리 외에 다른 장르도 좋아하지만, 주어진 것만 차근차근 해나가는 편이라서 일단 준비한 무대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려고 합니다. 허정승 명창은 학창시절을 제외하고는 줄곧 목포와 진도를 지켜오며, 묵묵히 우리 소리의 맥을 지켜왔다. 또한 교육자로서, 악단의 수장으로서 국악 교육과 대중화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며 자신만의 전통문화에 대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었다. 스승 안숙선 국창에 대한 평생에 걸친 존경은 그의 소리꾼으로서의 겸양과 열정의 반증이기도 하다. 박현영 명창은 ‘소리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의 과정’이라고 했다. 그의 소리의 연마 과정이 얼마나 치열했을 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른 나이에 명창에 올라 그 실력을 증명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명창의 무게감을 더 크게 여기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은, 그가 이미 겸손한 소리꾼임을 말해준다. 소리꾼 이성현씨는 어린 나이에 소리를 시작하고, 천재성을 발휘하면서도 꾸준히 한 길을 걸어온 젊은 소리꾼이다. 그의 천재성은 이제는 부단한 노력과 더해져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숨 쉬듯, 밥 먹듯이’ 소리해왔다는 그의 말에서 그가 얼마나 소리와 자신을 하나로 여기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은 40, 30, 20대 예인으로서 각자의 고민과 꿈을 가지고 왔지만, 자신의 목표를 위해 부단히 달려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제 또 다른 시작 앞에서 앞으로의 활동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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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특별기획] 독서운동, 지역 삶을 바꾸는 거점되다(上)서늘한 바람, 높고 푸른 하늘이 주는 상쾌함과 계절의 변화는 독서 욕구를 자극한다. 때문에, 지역의 도서관 또한 이용자가 많아진다. 도서관은 개인의 독서를 위한 시작일 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 발전의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 현장을 들여다보았다. 지역 언론인의 진심, 청년이 터 잡는 ‘옥천’ 만들 것 복합문화공간 ‘청산별곡’/ 충북 옥천군 청산면 충북 옥천군 청산면 복합문화공간 ‘청산별곡’은 지난 10월 10일 개장했다. 말 그대로 책읽기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학생들은 독서는 물론, 만화책, 보드게임, 웹툰 그리기, 영화관람, 자전거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이곳에서 옥천FM공동체라디오(2021년 개국, FM104.9Mhz) 제작, 유튜브 영상촬영, ‘청산별곡’ 신문 발행뿐만 아니라, 바리스타, 빵 만들기 교육 등의 진로체험이 이루어진다. 인구 3천이 조금 안되는(21년 11월 기준) 이곳 청산면에서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중심에는 ‘옥천신문’ 황민호 대표가 있다. 그는 2002년부터 옥천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부터 줄곧 옥천을 지켜온 언론인이다. 옥천군 중에서도, 외지에 속하는 청산면에 거주할 당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주민들의 삶을 가까이서 확인하고 깨달은 바를 실천하고자 했다. 인근 지역주민, 공무원과 함께 교류하여 자원봉사자를 꾸려, 청산초 야간도서관을 운영했고, 책읽는 사회문화재단과 한 언론사에서 공동주관한 ‘작은도서관 만들기’사업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황 대표는 여기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그 동안 지역(청산)에 대해 품었던 고민을 ‘청산별곡’을 통해 실현하기 시작했다. 청산면은 옥천군 9개 읍·면 중 가장 높은 인구감소율을 보이고 있다. 그는 청산에 야간 도서관까지 운영하고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청산면에 약 150명 정도의 초·중·고 학생들이 있는데요, 이 아이들이 하교 후에, 갈 곳이 없어요. 또 시골은 불이 일찍 꺼집니다. 하교 후에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으면 좋겠고, 밤에 머물면서, 공부하거나 자유롭게 어른들과 이야기도 하면서, 지역을 아끼고,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 또한 야간 운영을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고, 사단법인 커뮤니티저널리즘센터(이사장 황민호)를 통에서 ‘청산별곡’ 신문발행, 지역 관련 유튜브 컨텐츠 제작 등 다양한 활동을 위한 일자리도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그가 ‘청산별곡’을 만든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지역소멸’이라고 하는데요, 지역의 인구감소를 막기 위해, 이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농촌이 살아야, 나라가 살아요. 이 곳 청년과 청소년들이 더 이상 도시로 떠나지 않고, 지역에 자리 잡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 될 것입니다. 더 많은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더 있고 싶은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활동(사업)의 가장 큰 기반은 주민들의 참여와 기부이다. 지역주민의 참여는 단순히 자금의 확보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황 대표는 외부 지원사업에 응모하여, 부족한 자금을 확보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자금 사정은 넉넉하지 못하여,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을 독려하고 있다. 그는 ‘청산별곡’을 중심으로, 청소년들이 독서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에너지를 발산하고, 배고프면 먹을 수 있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심리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면서, 애향심을 갖도록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청년이 되어서 일터가 될 수 있는 ‘청산’이 되도록 하고자 한다. 그는 이 외에도, 옥천 월간지 ‘월간 옥이네’, 예비사회적기업 ‘옥이네밥상’ 등 다양한 형태로 ‘옥천군’의 발전을 모색, 실천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의 소망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르신들과 함께 책 읽고 글 쓰는 모임 하고 싶어요. 지금 70-80대 어르신들 중심으로 할머니 기자단(옥천군)을 운영 중인데, 글 쓰고, 책 읽는 것 같이 하자는 어르신들이 계십니다. 또 학생들과(중·고등학생) 영화도 만들고 싶고, 라디오 제작도 하고 싶고, 기사도 쓰고 싶습니다.” 도서관 거점, 아이-어른 함께하는 생태마을 꿈꾸다. ‘죽곡농민열린도서관’ / 전남 곡성군 죽곡면 "책을 읽으러 도서관 찾아오는 주민들은 하루에 1-2명 정도예요. 농촌의 조용한 도서관은 효용가치가 거의 없습니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 ‘죽곡농민열린도서관’ 박진숙 관장은 농촌의 도서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때문에 그녀는 2014년부터 도서관장 활동을 시작할 때에도, 도서관을 교육문화, 돌봄의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농촌 지역에서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교육 문화적 혜택이 거의 없습니다. 전남도교육청과 연계해서 ’마을학교‘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이 학교 밖 교육을 받을 기회를 주고, 주민들을 마을학교 선생님으로 구성해서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2020년도 출범한 ‘함께마을교육사회적협동조합’(이사장 박진숙)을 기반으로 한다. 지역주민들로만 구성된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죽곡면의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그 거점으로 도서관이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생태탐험’, ‘생태놀이터’, ‘운동회’ 등의 행사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이해와 애착을, 어른들(어르신들)에게는 아이들의 선생이자 지역의 어른으로서 자신감을 갖게 하여 아이-어른이 함께 하는 생태마을을 지향하고 있다. 특히 박관장은 마을의 초등학교-도서관이 연계되어 정규수업으로 진행되는 ‘생태텃밭 정원수업’의 가치를 이렇게 말했다. "농촌 아이들은 도시 아이들보다 흙을 만질 기회가 더 없습니다. 부모님들이 ‘내 아이는 농사일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들이 있으세요. 아이들이 1년 정도 토종종자 한 작물에 대해 책임지고, 수확하고, 씨앗 나눔까지 하게 되는데요, 뭔가 해냈다는 자신감도 갖고, 자부심도 생기게 되죠. 다음 해, 아이들은 ‘저는 옥수수 할래요.’, ‘저는 감자 할래요.’ 척척 알아서 합니다. 아이들이 농촌을 떠나야할 곳이 아니라, 대안이고, 아름다운 생명체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어요.” 특히, 곡성군은 전국 토란의 60%를 생산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지역의 특산물을 이해하고 키우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도서관 옆 텃밭에서 토란농사도 직접 지을 수 있도록 했다. 이 토란들로 주민자치회 주최의 ‘토란도란 죽곡마을 축제’에서, 요리대회, '빨리깎기 대회' 등의 행사까지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학교-도서관이 연계되어 인근 초등,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생태텃밭정원’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는 ‘생태텃밭 정원 교사 양성과정’을 거친 지역주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대해 박관장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말했다. "교사들 중에는, 도예가, 영상촬영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들도 참여하시는데요, 최근에는 교사와 학생이 ‘생태영상팀’을 꾸려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농촌의 다양한 가치들을 알고, 지역에 대한 자부심도 갖고, 생태 감수성 키워서, 지구 생태계 안에서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알게 하도록 하고 싶어요.” 고령으로 농촌의 일손에서 소외된 어르신들이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활동 할 수 있는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작은 운동회 행사 중에 ‘달려라 손 큰 부엌’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요리솜씨가 좋으시잖아요. ‘옛날 만드는 방식으로, 홍어를 무쳐달라고,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과 젊은이들 가르쳐달라고’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필요한 비용을 미리 드리고, 어르신께서 음식도 준비해주시고,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옛날이야기까지 하시면서, 재미나게 가르쳐주십니다. 설탕 대신 조청 쒀서 단맛 내고, 빙초산 대신 막걸리 식초 만들어서 사용하시는 옛 방법까지 소개하시죠. 아이들도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해요.” 박관장은 이 프로그램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어르신들 가지고 계신 귀한 재능 나눠달라고, ‘마을 선생님’이라는 지위를 드리면, 자존감도 높아지고, 아이들 한 번 더 쓰다듬어 주시고, 아이들도 어르신들을 더 존중합니다. 서로 관계가 돈독해지죠. 지역 어른들이 교육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비용은 전남도교육청에서 지원하는 ‘마을학교’ 예산, ‘농림축산식품부 사회적농업활성화사업’ 지원금 등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협동조합원들과 함께 사업을 기획, 운영하고 있다. 박관장은 도서관과 협동조합의 사업의 가장 큰 뿌리를 교육에서 찾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애착심이 없는 아이들은 겉돌면서 성장하거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경쟁에서 이겨서 빨리 떠나는 것이 목표가 되는 슬픈 현실로 이어집니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성장기가 되지 못하는 것이죠. 아이들이 지역을 이해하는 교육과정과 교사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함께 살고 있는 동네 언니,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해주시면서, 키워내는 과정을 정립하고자 합니다.” 책이 좋아서, 사람이 좋아서... 단단해지는 마을 공동체 죽장선바위 독서동아리 :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 고된 농사일을 생업으로 삼으면서도, 책읽기를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경북 포항시 죽장면의 ‘죽장선바위 독서동아리’(회장 장성희) 회원들이다. ‘바위가 서 있는 동네’(선바위)라는 뜻의 ‘입암마을’. 실제로 동네에는 큰 바위가 서 있다. ‘바위처럼 우리도 우뚝 서는 모임이 되어보자.’ 하는 의미로 동아리 이름도 ‘죽장선바위 독서동아리’이다. 동아리는 작년(2021년) 지역주민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장성희 회장 부부가 그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2014년에 귀농한 부부는 5년 후,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던 무렵, 죽장선바위 작은도서관 근무자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았다. 국어교육을 전공한 장회장은 좋아하던 책을 접할 수 있는 일이라 지원했고 근무를 시작했다. 동아리를 만들 무렵, 장회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여기는 도서관이 있어도. 농사일 하시느라 바빠서 도서관 오시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도 그중에는 책 가까이 하려는 사람 있거든요. ‘그런 분들과 동아리 만들어서 이야기 나누는 자리 만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남편이 먼저 제안했고, 저도 좋은 생각이라고 했죠. 책 빌리러 오시는 분들 통해서 회원 모집을 시작하게 됐어요.” 2021년 5월 10명의 회원으로 모임을 시작했고, ‘죽장선바위 작은도서관’에서 매달 1회 모임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처음에는 매번 새로운 책을 구매하는 것이 부담되어, 각자 읽었던 책을 추천하거나, 생각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이후 남편인 권현구 회원이 2022년 ‘책읽는 사회문화재단’에서 실시하는 독서동아리 지원사업에 지원, 선정 되어 올해 6월부터 1년간 도서 비용을 지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도서 선정은 회원들의 추천과 협의로 함께 결정한다. 지난달에는 ‘단단한 마음공부/저자 서방스님’ 도서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장회장은 그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불교 서적인데, 천주교 신자인 회원께서 추천하셨어요. 저도 종교가 없어서, 조금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불교에 대해서 모르던 것도 알게 되었고, 마음에 깊이 남는 부분도 있었어요. 함께 이야기 나누고, 토론하면서 더 생각하게 되었고요. 말 그대로 단단한 마음공부가 된 것 같아요.” 연령층은 50-60대 후반까지이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사과농사를 짓지만, 오미자, 땅콩, 산딸기 등 크고 작은 농사에서 전통장 제조업까지 우리 땅에서 나는 다양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있다. 이들은 바쁜 일상에서도 새벽, 저녁 등 시간을 가리지 않고, 틈틈이 독서를 한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에 모이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루의 피로를 잊게 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회원들이 주로 사과농사를 많이 해요. 농사짓는 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을 하죠. 목적이 책도 있지만, 같은 동네니까 살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요. 사실 저녁에 사람들 모여서 나와 하는 것 쉽지 않은데, 한 달 만에 만나서. 인사 나누고 이야기 하면, ‘진짜 오길 잘했네.’ 생각해요. ‘오미자, 사과 농사 어떻게 해?’, ‘땅콩 키우는데 어떻게 해야 해?’ 농사정보도 교류하고. 모르던 정보도 알게 되고, 자식들 왔다 갔던 이야기도 하고요.” 이야기는 깊이를 더하기도 한다. "어떤 분은 마시는 차나 다른 음식들도 종종 가지고 오시는데, 한 분은 식혜 만든 것을 가지고 오셨는데, 함께 마시려고 종이컵에 식혜를 담았더니, 그 분이 환경운동 하시는 분이라 ‘종이컵 쓰면 안 되는데...’ 말씀하셔서, 자연스럽게 환경운동 이야기도 했어요.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교환하기도 해요. 이런 자리를 가능하게 한 책에 고마움이 크죠.” 지난 10월 14일(금)에는 ‘기린산방’의 저자 조혜전 시인과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 특히 시인은 죽장면에 거주하는 주민이기도 하다. 동아리회원 뿐만 아니라, 관심 있는 이들도 참여하여 더욱 뜻 깊은 자리가 되었다. 장회장은 귀농한 지, 10년이 되어 가지만, 최근 뜻밖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귀농은 10년 정도 되었고,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해마다 힘들어요. 이번에 멧돼지가 들어와서. 밭에 콩을 네 번이나 심었어요. 여기 분들도 다 겪었던 일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사방으로 망을 쳤는데도 뚫고 들어왔어요. 네 번째는 모종을 심어서 넣었는데, 안 파먹더라고요. 큰 것은(콩) 안 먹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자연과 함께 하는 농사일이지만, 그만큼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생리이기에, 농사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우리 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고마움은 한 층 더 크다. 장 회장은 동아리 모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소망을 밝혔다. "같이 오래 했으면 좋겠어요. 이 모임이 계속 유지되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책으로 인해 만나기는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니까요. 그것이 주는 행복이 정말 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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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 인터뷰] ‘서편제’의 김준수, “나는 소리꾼, 마지막까지 소리꾼”서울시 혜화동 예술청(서울문화재단)에서 소리꾼 김준수를 만났다. 내년이면 10년차를 앞둔 국립창극단 소속 단원이지만, 최근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은 물론, ‘곤 투모로우’(2021)에 이어 두 번째 뮤지컬 ‘서편제’의 ‘동호’ 역으로 관객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뮤지컬 ‘서편제’는 영화 ‘서편제’를 기반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대부분의 노래(넘버)들이 대중음악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 동안 ‘동호’ 역할에 소리꾼이 참여한 적은 없었으나, 올해 마지막 공연(영화 ‘서편제’와의 라이센스 계약에 의해)에서 김준수는 유일한 소리꾼 배우로서 ‘동호’역을 맡았다. 인물의 감성과 특징을 충분히 살려, 극의 공감을 극대화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참석한 기자들과 눈을 맞추며, 소신을 담은 생각들을 자신 있게 전했다. ‘동호’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장단(추임새) 밖에 없더라구요. 극의 말미에 ‘송화’와 ‘동호’가 ‘심청가’를 함께 하는 부분은 이 극의 백미로 떠오른다. ‘소리꾼 페어(이자람-김준수 출연) 강추’, ‘고수의 역할이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다.’, ‘티켓 값의 98%는 남매의 ‘심청가’가 다했다.’ 등의 관객 평이 나올 정도로, 소리꾼 김준수의 역할은 컸다. 고법과 추임새만으로 누이 ‘송화’의 소리를 받쳐주며, 몇 십 년 동안 참아 온 누이에 대한 그리움을 풀고, 재회의 감격을 공유했고, 관객도 공감했다. 김준수만이 줄 수 있는 선물 같은 장면이다. 이 장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소리꾼의 이야기잖아요. 소리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추임새가 나올 법도 한데... 사실 판소리에서는 고수가 소리꾼과 함께 하면서, 좋을 때는 ‘얼씨구’, ‘잘 한다’고도 하고, 슬플 때도 ‘어이’, ‘그렇지’, 이렇게 공감하는 추임새가 분명히 있어요. 처음에는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장면에서 동호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것이 제게는 장단(추임새) 밖에 없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누나와 이별 했지만, 다시 누나를 찾아다녔던 ‘동호’의 애절함,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들었을 것이고, 오늘 누이의 소리를 들으면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한... 그런 ‘동호’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공감하고 싶었어요.” "이 친구, 소리 하는 것 보고 싶다.” 김준수는 ‘동호’의 오디션 장면에서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한다. 처음에는 제작진의 제안으로 ‘적벽가’만 불렀지만, 이후 그의 고민은 다양한 애드립으로 반영됐다. "적벽가 말고도 좋은 우리 소리 너무 많은데, 그 짧은 시간에 핵심 부분만 생각해내서 과감하게 보여주면 어떨까 해서, ‘춘향가 중, 어사출도 대목’을 연출님께 말하지 않고, 무대에서 과감하게 했어요.” 그의 애드리브는 통했고, 관객들은 화답했다. "그 장면에서 관객들이 엄청 박수를 쳐주시더라고요. 그 떨림이, 소리꾼 할 때도 들어보지 못했던 울림이 있었어요. ‘와, 이 친구 소리하는 것 한 번 보고 싶다, 이 친구 어떻게 하는지, 진짜 소리판에서 길게 하는 것 들어보고 싶다.’는 후기들을 보면서 너무 뿌듯했고,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원동력을 얻었어요. 공연 끝날 때까지 우리 판소리 5바탕을 모두 해보고 싶어요.” 소리꾼 김준수, ‘동호’ 안에 자신을 투영하다 ‘동호’라는 인물은 소리꾼 김준수와 많이 닮아 있는 듯하다. 그 자신도 소리가 좋아서 시작했고, 지금도 너무나 소리를 아끼지만, 사랑하는 것들을 지킬 수 없는 현실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하는 젊은 예인이다. "어렸을 때 저도 소리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20년 넘게 해오면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거스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는 한복을 입어야 했고, 소리꾼으로서의 가치관을 가져야 했고, 제 안에서도 그 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창작 판소리나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길들이 있는데, 나는 왜 사람들의 관심 밖의 음악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을 제게 많이 던졌어요. 그 격차를 줄이는 소리꾼이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고, 작년에 부담됐지만, 방송사 오디션 프로그램에 어렵게 도전했고요." ‘동호’라는 인물도, ‘소리가 싫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소리 때문에 어머니를 잃고, 강요받는 답답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이 너무 와 닿았고, 공감되더라고요. 그래서 무대에서 눈물도 흘렸고, 연기라기보다는 제 안에서 오는 허전함도 있었고, 오히려 무대에서는 원 없이 그런 감정들을 폭발시킨 것 같아요.” 또 그는 고향, 한반도의 끝자락 전남 강진에서 꿈을 키웠던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고도 했다. "노래 ‘흔적’ 대목에서, 과거 누이와의 좋았던 기억.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데요, 저도 고향 강진(전남) 근처 월출산이 항상 연습하던 곳이었어요. 엄마랑 손잡고 산에 오르고, 부채 들고 돌 두드리면서 명창의 꿈 안고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 지나가는 사람들이 쉼터처럼 듣고 가고, 어떤 분은 5천 원짜리 주시면서 ‘맛있는 것 사 먹어라.’ 하셨던 기억들. 하교 후 마을회관에 들러서 어르신들 앞에서 소리도 했고요. 지금도 고향 가면 어르신들께 가끔 소리 들려드리고, 제가 공연하면 늘 오세요. ‘너무 잘 논다.’ ‘아이고, 내 새끼....’ 말씀해주시고. 어렸을 때부터 그 분들의 정을 느껴왔고, 그 분들은 제 오랜 관객들이었죠. 사실은.” 그렇게 ‘동호’가 되어 간 김준수는 ‘진짜 동호를 만난 것 같다.’, ‘어디 갔다 이제 소리꾼이 왔을까?’라는 후기를 보면서, 큰 힘을 얻는다고도 했다. 내 뿌리는 국악, 대중화 매개체 될 것 소리를 배우던 초등학교 시절, 그는 대중과 멀어져 있는 우리 소리를 피부로 느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소리 한 번 해보라고 해서, ‘흥보가 중 놀부에게 쫓겨나는 대목’을 불렀는데, 친구들이 전혀 공감을 못 하는 거예요. 나 혼자 감정에 빠져드는데, 친구들은 "왜 저래?” "저런 음악을 왜 해?” "뭐가 좋아서?” 라고 말했는데, 큰 상처를 받았어요. 그리고 제가 소리에서 느끼는 좋은 감정들을 친구들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웠어요. ‘어떻게 하면 친구들이 공감하고, 매력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이후에 다양한 활동을 했고, 대중과 소통하는 지점은 가리지 않고 도전했죠. 뮤지컬도 두려움이 있었지만, 연결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도전했어요.” ‘뮤지컬’, ‘방송’ 등에 출연하면서, 주변 국악인들은 그의 정체성에 대한 우려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뭔가 죄를 짓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난 아닌데, 소리꾼으로서 자부심 큰데.’ 그래서 가볍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더 노력한 것 같아요.” 그의 노력은 뜻밖의 상황에서 결실을 맺기도 했다. "작품 ‘귀토’(2022)를 하던 어느 날, 창극단 선생님께서 ‘너 때문에 어떤 아이가 소리를 배우고 싶어서 왔어. 너로 인해서 소리 배우고 싶은 아이가 생겨서 고맙다. 더 열심히 해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마음속으로 ‘더 열심히 해서, 우리 국악 소개하고, 그런 국악인이 되어야겠다.’라는 생각도 했어요.” 뿐만 아니라, TV방송에 방영된 그의 무대를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접한 외국인들은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내 생애 최고의 무대(‘This is one of the best performance I've ever seen.’)’, ‘국보급 인물(‘World-class performance he truly is a Korean national living asset.’)’ 등의 댓글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는다. 10년차를 앞 둔 창극 배우답게, ‘연극’, ‘드라마’ 등에 도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뿌리가 단단한 소리꾼이 되어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소리를 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요. 소리는 제 안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 뿌리이고 중심이에요. 10년, 20년이 됐든, ‘소리꾼 김준수’로 남고 싶습니다. ” 그는 소리꾼으로서의 본분을 지켜가기 위해 내년에 ‘춘향가’ 완창을 열심히 준비 중이고, 목포에 계신 스승(박방금 명창,전남 무형문화재 제 29-4호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2008) )과 함께 하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도 노력중이라고 했다. 인터뷰 후, 자리를 나서는 기자들을 향해 인사를 하며,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는 그에게 기자는 해묵은 질문을 하나 건넸다. 무대에 서는 배우의 시선에서, 국악 대중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판소리의 경우, 사설 같은 이야기들이 관객들에게 아직은 어렵거나 귀에 안 들어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고요. 이런 부분들을 조금 더 쉽게 풀어서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또 관객들이 대중음악 멜로디에서 느끼는 익숙함이나 편안함을, 우리 판소리도, 귀에 속속 들어오게, 창작 판소리 등을 통해서 음악적으로 익숙하게 다가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중문화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악인으로서, 그의 생각은 국악 대중화를 고민하는 이라면, 한번 쯤은 의미 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년에도 그는 몇 가지의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작품 제안도 받고 있다고 했다. 대중을 국악 속으로, 국악을 대중 속으로 어떻게 끌어들일지, 이후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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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방송 백현주 신임사장,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재)국악방송 백현주 신임 사장이 지난 9월 20일,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보균)로부터 임명되어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임기는 2025년 9월까지 3년이다. 언론·방송계 20여년의 경력을 가진 백현주 신임 사장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회복지문화분과 위원을 지낸 이력이 있으며, 다매체 시대, 국내·외에서 한국음악이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가운데, 국악방송의 사장으로 취임되면서 국악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상암동 국악방송 사장실에서 백 신임사장을 만났다. Q. 취임하신 지, 약 1주일 정도(9.28 인터뷰 당시) 되었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A. 국악방송 가족이 되어서 영광스럽고 감사하고요, (직원 분들께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방향 설정 해주시고, 저도 더 많이 알기 위해 직원 분들께 많이 노크하고 있어요. 근무시간에는 당연히 국악방송을 옆에 두고 있고요, 외부에서도 틈만 나면 방송 모니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Q.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회복지문화분과 전문위원을 맡으신 이력이 있으십니다. 이 때, 국악정책을 어떻게 파악하셨나요? A. 문화예술 분야 국정과제 만드는 일을 했는데요, 우리문화를 알리는 것에 우선 중점을 뒀고요, 또 콘텐츠 생산자와 향유권자의 입장에서, 서로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한 정책들에 집중했습니다. 국악에 대해서는, 정통(전통)을 지켜가는 것, 그리고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와 컬래버레이션(협업)해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대중화하는 것, 그 두 가지에 중점을 뒀습니다. 이것은 결국, 국악인들이 설 무대를 늘리고,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만들어드리는 것이거든요. 그것을 인수위에 있을 때도 신경 썼고, 그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아요.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Q. 사장님의 경력과 문화에 대한 통찰력은 국악의 대중화에 대해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전통문화의 고유성과 전통이 도외시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의견이 있으신가요? A. 국악방송은 교육기관이 아니거든요. 국악인들이 (국악방송을 통해)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에 ‘이렇게 걸출한 국악인들이 계시고, 이렇게 의미 있는 창작활동 하고 계십니다. 많이 지원해 주셔야 합니다.’ 이것을 제가 앞장서서 하라고 이 자리에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을 지켜 오시고, 앞으로도 지켜갈 분들에게 더 많은 지원이 가도록 하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국악을 듣고, 사랑해주시고, 국악이 사랑받게 만들어 드리는 것, 그것이 제 소명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어요. Q. 국악방송 채널을 많이 확보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독자들이 국악방송을 어느 채널에서 봐야 하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시청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어떤 방안이 있으신가요? A. 소위 말해서 ‘뒷 번호(채널 번호)에 있다’라고 말씀들 하시죠. 사실 저희가 공격적인 채널 마케팅을 하기에는 그 동안 여건이 어려웠어요. 그런 여건에서도, 지금까지 IP채널 3군데 진입하고, 케이블채널 5군데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일단 우리는 발을 담갔어요. 이후, (채널)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드린 다음에, 채널 사업(앞 채널 진입)에 대한 생각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작비 등에서 많이 받쳐드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제작진들이 훌륭한 결과물(제작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셨어요. 이 중에는 넷플릭스, 애플 등을 통해 해외에 내보냈을 때, 시청자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보는 프로그램들도 몇 개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인력구조나 비용의 측면에서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할 수 있는 구조가 되지 못했어요. 이런 것들이 개선되면, 해외 OTT 플랫폼과도 손잡고 갈 수 있는 상황들은 갖춰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Q. 라디오에 대한 청취자들도 있습니다. 라디오의 매력, 특징을 살리는 방안이나 전략도 있으시겠지요? A. 지금까지 너무나 잘 해오고 계셨습니다. 더 탄탄하게 받쳐드리면서, 출근시간이나 밤 시간, 경쟁할 수 있는 채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 청취자들을 유입할 수 있도록, 국악을 기반으로 , 좀 더 다양한 구성으로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Q. 국악방송은 우수한 특집 프로그램과 ‘21c한국음악프로젝트’ 같은 기획력이 돋보이는 프로그램들을 제작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에게는 생각만큼 알려지지 않았는데, 더 많은 시청자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하겠지요? A. ‘21c한국음악프로젝트’의 경우는, 시청자분들이 계속해서 접할 수 있도록 유튜브 등을 통해 업로드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프로그램에 대한 전후의 홍보가 약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방송 전과, 방송 중, 방송 후에는 각각 어떻게 홍보해야 하는지, 그런 부분에 대해 방향 설정을 해주는 분들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 . 이 부분에서 저도 조력할 것이고 같이 뛸 겁니다. Q. 홍보의 방향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하나요? A.시대에 맞게 해야지요. 홍보는 물과 같은 거예요. 옛날에는 신문에 광고 내는 것이 홍보였지만, 지금은 지면광고만으로는 부족하죠. 다매체시대이기 때문에. 그러니 저희가 향후 1년 뒤에 있을 프로그램에 대해서 지금 예단해서 어떻게 가겠다고는 말 할 수 없죠. Q. 현재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지만, 더욱 탄탄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프로그램 질적 향상과 관련하여, 인력이나 예산의 측면에서 획기적인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A. 우리 직원 분들이 잘 해오셨습니다, 예산 부분은 정말 제가 많이 뛰어야 하죠. 제 몫이죠. 제가 잘해서 제작비, 장비 확보, 출연료 관련 고민 안하게 하는 것이 제 몫이죠. 부족한 예산으로, 없는 인력이 풍성하게 결과물을 만들어냈어요. 그것을 덜 지치게 동기부여를 하려면, 제가 잘 뛰어야하죠. 저는 지금, 제 존재의 이유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Q. 열심히 뛰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는~ . A. 직원 분들이 지금까지 잘 해 온 것들, 그 성과들을 어떻게 보여드리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저희한테는 저력이 있거든요.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왔고,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피력해야 하는 거죠. 라디오 개편 첫 날, 제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한 청취자께서 문자를 보내셨는데, ‘국악이 좋아서, 국악을 지키느라 투잡, 쓰리잡 하고 있다. 우리도 기억해 달라’는 문자가 있었어요. 제가 할 일은, 그런 경우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죠. 그 분들이 우리 무대에 출연하시도록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Q. 이번에 인사 변동 계획이 있나요? A. 계획하고 있지 않고요. 녹록지 않은 여건에서, 각자 잘 해내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하면 이 분들의 역량을 더 발휘하실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드릴 수 있는지, 복지 측면에서도 어떻게 증진시켜드릴 수 있을지, 일단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우선이에요. 그리고 언젠가 확장해야 할 때가 되면, 인력을 더 충원할 수도 있을 것이고, 필요에 의해서 인사이동도 있을 수 있겠죠. Q. 전임 사장님으로부터 인계받은 사업이 있으신가요? A. 저는 전임 사장님의 자리를 그대로 인계받은 사람이잖아요. 쓰던 의자, 탁자 그대로 쓰고 있어요. 이 분이 해왔던 것들을 그대로 이어받은 거예요. 여기서 제가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것들은 발전시켜야겠죠. Q. 국악방송이 국립국악원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 관련 협의체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A. 국립국악원은 저희와 함께 문체부에 속해 있는데요,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주요한 업무는 서로 공유하고, 경우에 따라서 같이 하기도 합니다. 협의체는 구성되어 있고, 프로그램이나 사업을 중심으로 협업하고 있습니다. Q. 동아방송예술대학교, 대구예술대학교 등에서 후학양성에도 힘쓰셨는데요, 대학과 국악방송이 연계될 수 있다면, 그 방안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죠. 제가 소속되어 있던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와도 방송국과 연계해서, 협업, 학생들의 일자리나 기회 제공 등의 측면에서 가능할 것이고요, 또 방송사의 제작진, 마케팅, 미디어 분야 직원 분들이 강단에서 하실 수 있는 일도 있을 겁니다. Q. 사장님께서 지향하시는 국악방송의 차별 점은 어떤 것이며, 이를 위한 실천 방안은 무엇인가요? A. 국악방송은 K뮤직의 본질을 특히 더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꿔서 글로벌 콘텐츠화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요. 국내에서는 저변 확대, 즉 국악은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리고 그 분들이 즐길 수 있게 해드리는 것이죠. 우리 어렸을 때 어머님들께서 자녀들 피아노 학원 많이 보내셨듯이, 이제는 ‘해금 학원 보내야지, 가야금 학원 보내야지.’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들을 할 겁니다. 또 지금까지 국악방송에서 해 오신 전통문화 자료들 아카이브 구축 사업도, 더 힘 싣고, 각 지역에 숨어 있는 음원들 더 발굴하고 알려서, 상상 이상의 것이 국악방송에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Q. 저희 ‘국악신문’은 30년여 년 역사를 갖고 있는 매체입니다. 국악방송과 연계하여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상해 보는 것도 제안 드립니다. A. 예, 얼마든지요.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같이 할 수 있지요. 앞으로 논의할 기회를 갖지요. 백 사장은 인터뷰 말미에, 어렸을 적 한국무용을 배우던 언니들을 따라 전통춤과 소리를 접했던 추억도, 젊은 시절 극단에서 국악을 배운 경험도 있다고 하며, 그 아련하고도 짧은 인연이 돌고 돌아 이 자리까지 왔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국악방송은 전통·창작 국악 보급과 대중화를 위해 설립된 방송이다. 비전공자라는 일부의 우려를 딛고, 그의 경력과 문화에 대한 통찰력이, 국악방송 경영인으로서 예산 확보와 채널 확보가 급선무인 현안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는지, 격려의 시선으로 지켜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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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무형문화유산 '이담농악'의 재현과 특성본지 8월 13일자 이담농악단 김경수 단장의 기고문 "동두천 이담농악, 경기북부에서 '국악의 메카'로 도약" 이라는 주제의 지면이 나간 후 독자들이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담농악'은 경기도 동두천시에서 전승되는 농악으로 경기 북부지방의 양주시 문화권에 본류를 둔 농악으로, 이담풍물놀이보존회가 관리하고 있다. 경기도 향토 지적 재산으로 선정되었다. '이담'은 1963년까지 양주에 속해 있는 동두천의 옛 고을 이름이다. 양주지역은 예부터 수많은 뜬쇄들이 배출된 농악의 고장이었으며 마을마다 농악대가 구성되어 있었다. 1945년 8·15광복 전후에 양주지역에서 개최한 각종 농악경진대회에서 이담농악은 많은 상을 차지하였다. 1960년대까지는 이담농악에 속하는 송내농악·안흥농악·광암농악·행단농악·하봉암농악 등이 전해져 내려왔다. 특히 송내농악의 상쇠잡이 조임득, 행단농악의 이창인 등이 이담농악을 이끌었다. 근래에는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1985년 향토사학자 조규진에 의해 윤곽이 확인되었고 1987년 재현을 논의한 후에 1995년 '이담농악'이라는 동호회 형식의 전승회가 구성되었다. 1997년 문화원에서 ‘우리소리 한마당’이라는 제명으로 이담농악이 재현되었다. 2년후 1999년 경기도 민속경연대회에서 영예의 '대상'을 차지했다. 동두천 지역민의 응원에 2007년에는 '동두천시립이담풍물단'이 창단되었다. 그리고 세상에 나온지 8년 후, 2017년 이담농악이 문화재 등록이 되고, 보유자가 지정된다. 김경수 단장은 전승이 희박해져 가는 동두천 '이담농악'을 재현하기 위해 힘쓴 공로와 타고난 예능을 인정받아서 동두천 무형문화재 3호 '이담농악' 보유자가 된다. 그런데 필자는 왜 타지에서 온 김경수 단장이 보유자가 되었을까라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지정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 동두천 '이담농악'이 무형문화유산으로 세상에 나오기까지 과정을 들어본다. 김단장의 이력을 살펴보니 일찌기 '국악영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40여 년 동안 올곧이 '농악'에 몸 담고 있었다. 특히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1982년 '농악의 육군사관학교'라고 불리는 한국민속촌농악단의 입단제의를 받아 그곳에서부터 전승활동을 시작하면서 현재 한국 농악의 맥과 계보를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김단장은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이수자로 출발하여 (사)한국국악협회 동두천 지부장, (사)대한명인회 선정 사물놀이 '채상설장구' 명인, (사)한국국악협회 이사, (사)한국국악협회 경기도 지회 이사, (사)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동두천지회 부지회장 등을 맡으면서 동두천 국악교육을 위해 힘쓰고 있다. 현재 효예술융합학과 박사과정에서 '국악교육'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학위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전국 농악보존회를 조사하기 위해 매주 현지 답사를 수행하고 있다. 한달 간 인터뷰를 통해서 일제강점기는 물론 1945년 해방 전후 전국 각 지역 고을마다 마을마다 존재했던 전국 농악보존회 단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담농악의 시원과 역사성 Q. 안녕하세요. 지난 달 본지에 실린 김경수 단장님 기고문을 통해서 '농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전해집니다. 이 기고문을 읽은 독자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 동두천 지역 농악에 관심을 가지셨나요. A. 때는 1994년, 지인을 통해서 동두천 지역 학교에서 풍물반 지도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동두천이 예전에는 양주 지역이어서 양주농악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히 수락을 하고 온 가족들을 데리고 이사를 왔습니다. 동두천여자상업고등학교 풍물반 지도를 하면서, 동두천 지역 농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Q. 당시 동두천 지역 농악의 존재와 전승상황은 어떤지요 A. 당시만해도 동두천 지역은 북한계를 따라서 흐르는 내천과 농사짓는 땅이 풍부한 지역이라서, 논두렁 밭두렁 지나가면 농부님들이 흥얼거리면서 '논매기소리' 같은 민요가 생생히 살아있는 고장이었습니다. 즉, 수량이 풍부한 내천을 끼고 사는 고을이라서 집약적 농사를 짓는 마을이 많고 당연히 마을마다 농악대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왕지사 동두천에 사는지라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농사를 짓는 마을을 중심으로 '농악'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Q. 당시 동두천 여상 고적대는 전국에서 꽤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지도하시는 풍물반은 어땠나요. A. 당시 동두천여상의 고적대와 풍물반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수이 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Q. 이담농악의 존재에 대해서 언제 알게 되어서 조사를 시작하셨나요? A.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풍물반 학생들이 동네 어르신에게서 지역 마을공동체가 주관하는 놀이(풍물)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당시 동두천여상 풍물 담당 김흥래 선생님의 자문과 천재원 동장님의 고증에 따라 동두천 지역 농악의 발자취를 찾아보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Q. 인생 최고 청년기에 동두천에 와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시는 것 같아요. A. 제가 동두천여상 풍물반을 지도하러 오게 되면서, 자연스레 이담농악을 만났고... 1999년 경기도 민속예술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동두천 이담농악이 국악계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는 계기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바로 이담농악이 오늘의 저의 존재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Q. '이담농악'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듣고 싶습니다. A. 동두천의 옛고을 지명이 이담입니다. 마을조사에서 농악의 존재와 꼭두쇠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구심점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1995년 '이담농악동호회'도 창립되자마자, 저는 문서와 흔적을 찾기 시작했죠. 당시 발족회 주축 인물은 송내농악을 이끌었던 상쇠 조임득, 이창인 어르신들이 앞장서서 이끌어주셨습니다. 동두천 지역 농악을 양주에서 최고의 민속놀이로 끌어올린 연희자들이셨습니다. Q. 학계에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A. 이담농악은 1980년대에 들어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1985년 향토사학자 조규진에 의해 윤곽이 확인되었고, 1987년부터 재현을 논의한 후에 1995년 ’이담농악‘이라는 동호회 형식의 전승단체가 구성되었죠. 이때 30살을 갓 넘긴 어린 저에게 시작을 함께 한다는 명분을 주셨습니다. Q. 마을조사와 학계의 고증을 통해 이담농악의 재현작업이 시작되어 가는 과정에서 본인의 역활과 성과가 궁금합니다. A. 재현 과정은 이론과 연희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죠. 저는 행단농악에서 활동하던 어윤희(지행동), 송내농악의 장병우(송내동)등의 고증에 따라 행단농악과 송내농악을 재정리하여 앞놀음과 뒷놀음을 구성하고, 전해지는 광복가락과 법고놀이를 체득하고 전래되어 오는 '농사풀이' 소리를 재현하여 이담농악의 몸집을 만들어 만들어 갔습니다. Q. 조사과정에서 특별하게 도움을 주신 분이 계시나요? A. 故 장병우 선생님이십니다. 이담농악의 전신인 송내농악의 유일한 생존자이십니다. 2016년 10월 12일 선생님을 찾아가서 소고놀이를 통해서 농사풀이 과정을 고증 받아서 정리를 했습니다. 전 과장의 재현과 무대화를 위해 각별한 지도를 받았습니다. Q. 당시 일정 기간 단절된 이담농악의 재현을 위해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A.동두천 출신 지역 사람이 아닌 타지인이 지역 농악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저를 처음엔 그 누구도 탐탁치 않게 바라보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마을조사와 같은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일이지요. 제가 묵묵히 흔적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 하며...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시간나는 대로 지속적으로 마을을 찾아다녔습니다. 우선 마을을 들어서면 입구에서 우리를 압도하는 당목 은행나무 밑을 그냥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막걸리를 올리고 절을 하고 기원을 드렸습니다. 그런 모습에 저의 진심이 통했던지... 사람들도 점차 마음을 열게 되면서 지난 마을의 역사와 함께 마을굿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Q. 긴 세월 동안 힘든 고증과정을 거쳐서 언제 이담농악이 세상(동두천시)에 나왔나요? 즉 언제 어느 무대에서 첫 '재현'(Repretation)을 하셨나요? A. 드디어 10여 년에 걸친 고증작업 끝에 2017년 12월 12일 오후 6시30분 동두천시민회관 공연장에서 동두천시립 이담농악단 첫번째 정기공연, 즉 무대화를 통해 시민들에게 알리게 되었습니다. 우린 모두 이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에 모두 눈물을 쏟았습니다. 아직도 생생합니다. Q. 그 마을이 바로 이담농악의 근간이 된 마을인가요? A. 네, 사당골(현 이담로 161) 마을 사람이 주축이 되어 마을굿이 면면히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몇몇 마을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굿을 지켜내려고 애를 쓰고 계셨습니다. 마을굿이 있는 곳에는 농악대가 존재합니다. Q. 사당골 마을제는 언제, 어디서부터 출발을 하나요? 특정 장소가 있나요. A. 마을 입구에 마을 수호신 당목이 우뚝 서 있습니다. 특히 이를 알리는 사당골 수호비도 세워져 있습니다. 매년 마을 사람들이 당목 아래에서 마을제를 지냅니다. 행단제라고 합니다. 1,000년이나 된 당목 은행나무에서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액운을 떨쳐내고 화합과 단합을 기원하는 고유제와 같은 제사의식과 줄다리기 및 씨름대회가 끝나고 뒤풀이 형식으로 구성된 놀이로 시작됩니다. Q.그렇다면 이담농악의 근간이 된 사당골에서 이루어지는 마을굿 행단제에서는 섬기는 대상이 있나요. 대상이 있다면 무엇을 상징하는 설화나 전해오는 민담이 있지 않을까요? A.사당골에는 마을을 수호하는 당목과 함께 어유소 장군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Q. 흥미롭습니다. 사당골을 지키는 은행나무가 기적이나 예시를 보여준 전설이 있나요. A. 조선 초기 어유소 장군이 어린시절부터 이 은행나무 밑에 단을 쌓고 학문과 무예를 익혔으며 은행나무와 대화를 주고받듯 은행나무를 모시면서 가까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장군이 세상을 떠나자 한달 동안 은행나무가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또 조선 말기 고종 인산일 바로 직전에는 날씨가 맑고 화창한데 갑자기 마른 벼락이 치면서 한양 방면을 향해 자라고 있던 큰 가지가 저절로 꺾여 부러졌다고 합니다. 이후부터 어유소 장군과 은행나무을 기리는 ‘행단제’라는 마을굿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죠. Q. 사당골 마을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A. 1150년대에는 온양 방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거주하였으며 고려 의종시 상서령 벼슬을 한 방휘진이 1177년에 이 마을에 묻히고 이후에 사당이 건립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1420년에는 평해 황씨, 1430년에는 충주 어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사당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사당골이라고 불려졌다고 합니다. 사당은 양지마을에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1920년대부터는 사당골을 행단부락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1963년부터는 양주군 동두천읍 지행 2리였으며, 1981년 7월 1일부터 동두천시 내행동 5통이고, 현재는 불현동 23통으로 46세대 외에 아파트 단지가 구성되었고, 이후 마을회가 조직되어 있습니다. Q. 사당골 마을회 구성원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A. 고문에는 박양희, 회장에는 황석만,부회장은 이경훈,총무는 이창수,감사는 박현희, 운영위원으로 박은희, 박찬희, 박정호, 송요섭, 이상재, 이명애이십니다. 언제든지 가면 황석만 회장님이 반겨주십니다. 이담농악보존회 후원회의 전신이기도 합니다. 마을제를 지내도 앞장서서 주축이 되는 마을 유지분들입니다. 그런데 자꾸 젊은 사람들은 아파트로 이사가는 추세입니다. 아! 마을이 살아야 나라도 삽니다. Q. 지금도 사당골에는 마을제를 지내나요. A. 인터뷰 당일날에도 우연치 않게 은행나무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박은희 어르신께서 은행나무 주변에 제초기로 잡초를 제거하고 계신 것을 보고 다행이도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인구가 줄어서 매년 음력 10월1일에 마을사람들이 당목 아래에서 삼색 과일과 술을 올리며 간소하게 마을제를 지낸다고 박은희 어르신께 인터뷰를 통해서 전해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마을공동체가 활성화 되어 활동이 번창하였으나 지금은 어르신들의 연세가 고령화되면서 박은희 운영위원님 외 몇몇 어르신들만이 관심을 가지시는 실정이라는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Q.주변 마을에서 농악이 성행했는 마을은? A. 이담농악의 전신인 행단농악(지행동), 송내농악(송내동), 안흥농악(동안동) 등이 조선후기부터 연행되었으며, 주변 지역 송내농악과 안흥농악 등 농악들이 다수 존재했습니다. 특히 행단농악의 지행동, 송내농악의 송내동, 안흥농악의 동안동, 이 3개의 지역에서도 마을굿과 농악대 활동이 가장 성행했다고 합니다..... 이 마을에도 마을굿이 내려오고 있었죠. 그러나 산업화가 급속히 발전하고 미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농사보다는 보산동 상가와 주변 골목들은 달러를 벌어들이는 미군을 대상으로 한 클럽문화가 조성되어 전국에서 외지 사람들이 불나비처럼 모여들었죠. 최근 지하철이 개통되면서 동두천역 근처 상권이 발달하면서 점점 전통 민속문화같은 농악이 자취를 감추고 명맥 마저 희미해져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Q. 마을조사를 하시면서 이담농악 재현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신 분은 누구신가요 A. 송내동에 사시는 장병우라는 분이십니다. 소고잽이이십니다. Q. 송내농악의 소고잽이셨던 故 장병우 선생님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A. 사당골 마을회 운영위원이신 박은희 어르신에 의하면, 송내동에 장병우라는 소고잽이가 있었고, 송내농악이 행단제를 지내고 나면 넓는 공터에서 난장을 틀고 농악놀이 등 다양한 풍장놀이들이 화려하게 펼쳐졌다고 합니다. 그 중에 장병우 소고잽이가 송내농악의 유일한 생존자로 살아계셨는데 안타깝게 금년 6월 18일에 소천하셨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작년 12월 12일(토) 2시에 동두천시민회관 공연장에서 동두천시 무형문화재연합회 주관으로 무형문화재 연합회 공연에서 이담농악단원들과 장병우 선생님께 ’소고놀이‘ 농사풀이를 지도받고 선생님과 저와 단원들이 함께 공연을 했는데 그것이 마지막 공연이 되었습니다. Q. 저도 작년에 이광수 선생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12일 참석했습니다. 장병우 어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단원들과 함께 무대에서 풍물을 치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그 분의 유품 중 상모같은 거라도 보존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혹 남겨주신 거라도 있나요. A. 네, 다행히 상모와 의상을 저에게 주시고 가셨습니다. 몇 장의 사진이 남겨있습니다. 가끔 시간이 나면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곤합니다. 가신지 얼마 안되어선지 실감이 안납니다. 생각만 하면 그리워집니다. Q. 이담농악보존회는 언제 창단이 되었나요? A. 1990년 초반 이담농악을 연구하며 1995년에 ’이담농악‘이라는 동호회 형식의 단체가 구성되어 이담농악보존회를 창단하였습니다. 이담농악의 발전과 저변 확대를 위해서 성신여대 지회와 을지로 지회 및 구미 지회, 동두천 관내에도 상패동, 송내동,걸산마을, 동두천시 평생학습관. 동두천문화원에서 이담농악 강좌, 등..... 활성화를 위해서 회원님들을 모시고 있으며 이담농악후원회 이사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동두천 시민들에게 이담농악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이담농악 각 과장의 구성은? A. 이담농악을 이끌어 가면서 재구성한 것은 광복가락을 입장과 퇴장할 때 치고있습니다. 고깔소고 농사풀이 과정을 故 장병우 선생님과 작년에 함께 공연하면서 보완하였습니다. 1)길놀이(광복가락) ⟶ 2)인사굿 ⟶ 3)원진 ⟶ 4) 벅구마당놀이 ⟶ 5)당산벌림 ⟶ 6) 멍석말이 ⟶ 7) 원진 ⟶ 8) 벅구놀이 ⟶ 9) 한줄벅구 ⟶ 10) 두줄벅구 ⟶ 11) 벅구 농사풀이(가래질,논가는 동작, 모판대기, 씨앗 뿌리기, 써래질, 모 짜고 심는동작, 애눈파기, 두벌논메기, 퇴비주기, 벼베기, 타작)로 전과장이 11과장입니다. 설명을 하자면 동작과 춤사위도 보여 주어야 하니 일정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Q. 당시 문화재 지정 신청하는 과정 중 가장 어려웠던 점은? A. 2016년에 시 문화재 신청서를 넣을 당시에는 절차와 방식도 모르는 상태에서 막막했습니다. 장구잽이로 학교에 출강하면서 현장에서 활동하던 실연자이라서 행정적인 문서화 작업이 저에게는 엄청 부담이 많았고 벅찼습니다. 그러나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발품을 팔아가며 지인들의 많은 도움을 받아서 신청서류를 제출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했나 싶을정도로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이담농악'의 광복장단과 태극상모.그리고 제금 편성 Q. 이담농악만이 갖고 있는 지역성을 상징하는 특징이 있나요? A. 하나는 '광복장단'이고 다른 하나는 태극 문양이 들어간 '태극상모'입니다. ‘광복장단’은 이담농악에서만 쓰이는 가장 특색 있는 장단으로써 1945년 광복 전후 동두천 지역에서 길놀이를 할 때에 쓰이던 장단입니다. 말 그대로 ‘광복’ 이라는 의미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해방을 표현하는 장단이라고 봅니다. 외세에 의한 억압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흥을 더하고 신명을 표출할 때 쓰이던 장단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지금까지 큰 경사스러운 날에는 반드시 ‘광복장단’을 썼고 이것이 전통이 되어 이담농악 판제에 가장 특색 있는 장단이 되었습니다. 더한다면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불교적 성향이 보입니다. 불교식 제례에서 스님들의 춤사위인 바라춤에서 쓰는 '바라'(제금)를 사용하여 편성이 이루어집니다. Q. 이담농악의 3가지 특성이 타 지역과 대비해서 이담만의 것인가요. 그렇다면 동두천 지역 농악대에서만 전해진다는 '광복가락'에 대해 궁금합니다. A. 동두천 송내동, 지행동, 동안동, 등 여러 지역에서 치던 가락입니다. 일제강점기 1940년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군가로 불린 광복군아리랑이 떠 오릅니다. 농민들이 광복을 기원하면서 '광복+농악'이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광복후에 광복군아리랑을 만들리가 없거든요. 이 용어의 발생을 1940년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 재금을 치배로 구성하여 함께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담농악의 판제가 완성됩니다. Q. 다른 지역 가락의 용어는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A. 삼채장단, 덩덕쿵이, 자진모리장단 등등 다양합니다. Q. 광복가락을 듣고 싶습니다. 음악적으로는 어떻게 다른가요? A. 다른 지역과 현저하게 다릅니다. ‘광복가락’의 기본 장단은 쇠가락 구음으로 ‘갱 무개갱 갱 무개갱 갱 갱 갱 무개갱’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장단은 '덩덕궁' 장단이라 볼 수 있죠. 광복장단은 긴 삼채굿 혹은 자진삼채굿과 비슷하나, 다른 점은 긴 삼채굿, 자진삼채굿의 경우에는 기본형과 반주형을 교대로 치지만 덩덕궁이의 경우에는 기본형에 구애됨이 없이 다채롭게 변주하여 리듬이 매우 생동하는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이 ‘광복장단’ 역시 길놀이 때의 걸음걸이에 따라 장단의 속도와 장단이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Q. 이담농악대가 쓰는 태극상모도 독특합니다. 연유가 있나요. A. 이담은 다른 농악대와는 달리 농기(만장기, 깃발)위에 태극기를 그려 넣고, 상모에도 태극문양을 그려넣습니다. 예전에 동두천에는 태극기와 태극문양이 아주 흔했습니다. ’동두천‘이라는 지리적 특성에서, 남과 북이 갈리는 최전방 길로 통하는 교통의 도시 동두천, 전통과 달러가 공생하는 동두천(당시 세간에서 지나가는 개도 파란 달러를 입에 물고 다닌다고 했죠.)....거리에는 주한 미군 제7사단에서 쏟아져 나오는 미군들이 많았죠. 미군들을 상대하는 크럽이나 레스토랑 건물 입구에서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흔하게 보입니다. 미군들이 주로 외출복으로 걸치는 카키색 항공점퍼나 모자에는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를 수 놓아서 입는 것이 당시 유행이었죠. 점퍼 뒤에는 한반도를 상징하는 호랑이를 수놓아서 입을 정도입니다. 당시 중고등 학생들도 그런 미군들이 입던 군복을 구입해서 멋스럽게 걸치는 미리터리룩이 유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우리도 농기에 태극기를 그려 넣게 되고, 태극상모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동두천 이담농악만이 태극 문양이 그려진 태극상모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담농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습니다. 동두천, 광복장단, 태극상모를 연결해보니 동두천 백년사 중 민중사 일부가 고스란히 '이담농악'으로 직결된다. 일제강점기 외세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한 광복장단(1940년초), 1950년 6.25전쟁 이후 주한미군 7사단이 주둔한 동두천은 외부 집단으로부터 정체성을 찾고자 해서 나온 태극문양(1960년 이후)은 지역성을 구현시키고자 나온 태극상모(2017년)로 연결된다. 김단장은 아직까지 타 지역에서 태극상모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전통문화의 시대성이 발현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거기에 제금을 쓰는 모습에서 불교적 성향이 엿보인다. 이 이담농악의 3가지 특성을 통해서 동두천 역사의 일부분을 살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Q. 이담농악보존회 농악단 자랑을 하신다면? A.동두천 이담농악의 자랑은 모두가 한 가족 같은 마음으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최고의 자랑이라고 자부합니다. 전공자나 동호인분들이 구분없이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협동하고 단결하여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특히나 지역 유지이신 차유철 보존회장님을 중심으로 이담농악 후원 이사회가 구성되어서, 정신적으로 든든합니다. 동두천 관내에서 저명한 훌륭한 분들로서, 우리에게 큰 버팀목이 되고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메타버스 시대에 앞서가는 '농악의 컨텐츠' 개발 연구 절실하다" Q. 한국국악협회 동두천 지부장으로서 동두천 시민들에게 ’국악‘과 '이담농악'을 어떻게 알리고 싶으십니까? A. 첫째, 가까운 의정부에는 회룡문화제가 있다. 공주의 백제문화제 등..... 동두천예술제를 더 키워서, 전통을 복원하고 'K-국악'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전통이 실린 ’이담문화제‘가 개최되어야 한다.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어우러져서 시민들에게 낯설지 않은 ’국악‘을 알려야 합니다. 특히 동두천은 일찌기 숭늉보다도 커피를 더 좋아하고 서양음악에 익숙한 사람들인지라 낯선 국악을 감상하기 위해 쉽게 다가가지 못하죠. 둘째, 세계적 한류 바람을 타고 한류의 근간을 전통 민속문화에 두고 있습니다. ’K-국악‘이나 ’K-뮤직’ 시대에 맞는 창작활동을 통해 외부에 동두천의 전통문화를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요청하는 예술을 하고 싶습니다. 셋째, 동두천시가 주최하고 국악협회가 주관하는 ‘동두천 국악대제전 전국국악경연대회’를 타악 부문, 민요 부문, 연희 부문 이렇게 3개 부문 학생부와 일반부, 명인부로 나누어서 개최를 하여 경기북부를 시작으로 경기도를 대표하는 국악대제전을 통해 동두천을 알리고 싶습니다. Q. 해외 공연은 언제부터 나가셨나요? 다녀 오신 나라는? 어떤 영향을 받으셨는지요. A. 1987년 남사당 사물놀이 예맥 활동을 시작으로 김덕수 명인 밑에서 일본. 미국. 러시아. 중국. 유럽, 호주 등에 있는 한국문화원과 동포사회에서 공연을 하였습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인도. 말레이 시아. 폴란드. 파라과이. 베네쥬엘라.멕시코. 보스니아. 칠레. 홍콩. 이라크 등 많은 나라에서 우리나라 민족음악을 알리는 기회가 주어졌죠. 문화와 문화가 만나면 다양한 컨텐츠가 열립니다. 그것은 현장에서만 느낄수 있습니다. 많은 영감을 얻고 왔습니다. 특히 말은 안통하지만 손짓 발짓으로 동포사회 청소년들이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특히 동포들과 휘날레를 할때는 모두 손을 잡고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우리 공연에 대해서 아리랑으로 답해주는...그 감동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동포들에게 농악을 전수해주고 싶습니다. Q.가장 기억에 남는 최고 '농악' 을 주제로 한 전국 단위 행사는? A. 2018년 10월 전국 50여 개 지역 농악보존회가 총집합해서 난장을 틀고 광화문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조직위원장:윤영달) 판놀이길놀이(거리퍼레이드)를 할 때입니다.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농악대들이 하늘 높이 만장기를 들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난장을 틀때는 신명이 올라서 하늘로 용솓음쳤습니다. 전국 농악대를 이끄는 리더를 맡은 임웅수(경기무형문화재총연합회 이사장)회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하늘과 땅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눈물 콧물 땀이 범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날에 형제들(?)과 주고 받은 에너지가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립니다. 그 행사를 열어주신 해태크라운제과 윤영달 회장님의 국악에 대한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전 고인이 되신 주재연 예술감독님의 열정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올라온 농악대 길놀이야말로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컨텐츠라고 봅니다. 동두천예술제에도 시도하고 싶습니다. 길놀이는 길닦이를 통해 정화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필자는 제1회서울아리랑페스티발부터 학술자문위원 소속 단체라서 매년 3일간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전국농악대가 보여준 거리퍼레이드는 장관이었다. Q. 20여년 동안 동두천에서 이담농악단을 맡으시면서 제자 중 특별한 제자가 있는지요. A. 파란눈의 이담농악 전수자, 프랑스인 바질 쁘비용(Basile Peuvion)입니다. 우리가 2015년 9월 프랑스 낭트페스티발에 초청 공연을 받고서, 프랑스주 한국문화원에서 사물놀이 교습을 열었는데, 그때 농악을 공부하러 온 재즈 드러머를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음악교사로 활동하는데 2018년 여름 휴가를 받고 한국에 와서 수소문 끝에 저를 찾아서 동두천까지 와서 우리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한달 동안 농악을 배우고 돌아갔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이담농악단 하계, 동계 수련회 및 김경수 장구 두드림캠프에서 농악을 전수한 이래로, 해마다 2회에 걸쳐 ‘동두천시립이담농악단 동·하계수련회’에 참여하고 있으며, 농악과 재즈가 협연하는 실험적 무대도 만들었죠.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우리 문화와 서양 문화가 섞이니까 상대는 물론 우리 농악도 빛을 발하더군요. Q. 외국에서 동두천까지 농악을 배우러 온 프랑스인 바질 쁘비용 소개해주세요. A. 재즈음악가인 그는 12세때 재즈드러머로 입문. 2012년 여수 국제 엑스포에서 공연한 경험을 계기로 한국 음악을 발견하게 됩니다. 판소리와 민요, 그리고 사물놀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후에 장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프랑스주 한국문화원에서 추최한 ‘K-Vox voix coréenne 2015’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할만큼 신명과 끼가 있는 친구입니다. 프랑스주문화원에서 이담농악을 배운후, 칠곡 세계사물놀이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국악 타악곡 웃다리를 드럼으로 편곡해 연주하고 비나리, 진도아리랑, 사랑가를 연곡으로 부르고, 장구 솔로 연주를 선보였죠. 외국인 부문에서 2위로 입상했습니다. 이후, 한국음악과 재즈음악을 배합한 수많은 콜라보레이션 공연을 이어나갔습니다. 국내 국악대전에서 외국인 부문 최우수 수상하는가 하면, 자라섬 재즈패스티벌 참여하여 농악을 가미한 재즈 드럼 공연 등을 펼치는 등 활발한 국악 전도사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후 한국음악에 빠져서 이광수 명인을 찾아가서 '비나리'도 배워서 무대에서도 불렀습니다. 휘날레에서는 늘 아리랑도 잘부릅니다. 현재 프랑스,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 이담농악 및 한국 음악을 알리며 '국악의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동두천 명예시민증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매우 특별한 제자입니다. 벌써 보고 싶어지네요. Q. 단장님이 연구하시는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A. 저는 지금 성산효대학원대학교 효예술융합학과 박사과정 6학기 논문 학기를 다니고 있습니다. 장은주 교수님의 논문지도하에 "대한민국 농악 용어 연구”란 제목으로 열심히 인터뷰를 하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용어 속에서 예인들의 생각과 시각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공연이 없는 날에는 전국에 있는 농악인들을 찾아가서, 국가문화재, 광역시문화재, 도문화재로 분류하여 자료를 수집, 분석하고 있습니다. 전국 지역 농악에 대한 데이터가 국가기록 빅데이터 자료가 되리라는 기대를 해봅니다. 특히 아직 저에게는 벅찬 서양예술사, 예술기획과 행정. 한국예술사, ’예술과 사회‘같은 학문이 농악을 다각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3년이나 된 코로나라는 비대면 시기에 주어진 시간을 다행히 공부로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Q.인류무형문화유산 ’농악‘ 예능보유자로서 다음 세대에게 이 민족유산 '농악'을 물려주기 위해 지향해야 할 과제는? A.농악은 마을굿에서 출발한만큼 지역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민족유산입니다. 중국이 우리보다 먼저 2009년 동북삼성에 살고 있는 조선족(중국식 표현)이 향유하고 있는 농악을 ’농악무‘라는 종목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습니다. 우리는 2014년에,,,안타까운 일이죠. 첫째, 180개국에 살고 있는 동포사회를 대상으로 ’농악의 세계화‘를 펼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실험적 무대가 필요합니다. 일찌기 김덕수 선생님을 따라서 국외 공연을 많이 다녀왔습니다. 국내 무대와 국외 무대는 다릅니다. 청중의 시선에 맞추어야 합니다. 당시는 공연에만 집중하는지라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이제는 공연 무대에서 연희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예술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국외에서 동포들과 외국인들이 농악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러한 기회가 확장될 수 있도록 문화와 문화를 연결을 시켜주는 문화매개자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사물놀이'(김덕수 명인)와 '판소리'(안숙선 명인)가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도 고 주재연이라는 문화기획자에 의해 'K-국악'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둘째,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메타버스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 ’농악의 컨텐츠‘ 개발작업입니다.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풍류대장, K-팦 등과 같은 대중문화가 넘쳐나면서 국악을 전공했던 세대들의 지각변동이 일고 있습니다.(방탄소년단과 같은 아이돌 그룹의 경제적인 가치와 시너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농악도 이런 특별한 목적을 가진 무대가 생긴다면 무한한 컨텐츠가 생겨나리라고 봅니다. 셋째,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농악이 '지속가능성' 있는 종목으로 다음 세대로 전승되고 계승발전이 될 수 있도록 중앙 정부와 지자체에서 전승환경 개선과 행정적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농악은 메타버스 시대에 살고 있는 이 시대와 다음 세대에도 전해져야만 하는 지속가능성 있는 민족유산입니다. 다음세대에도 계승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는 작업이 '농악의 컨텐츠' 개발이라고 봅니다. 저의 연구는 이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악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번 구술작업을 통해 이담농악의 특성을 찾게 되었다. 광복장단과 태극상모, 그리고 '제금' 편성이다. 더 늦기 전에 마을조사를 통해서 광복장단에 대한 민속학 및 음악적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는 아리랑연구자로서 광복가락을 듣고서 '광복군아리랑'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1940년을 전후해서 '광복'이라고 명명했던 가락을 오늘날까지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을에서만 치던 장단이 아니고 양주농악을 계승해 온 이담농악 권역에서 많은 마을이 전승해 오고 있다. 시대성을 도입한 민중예술의 전승주체들이야말로 '창조적 계승'의 실체인 것이다. 태극상모의 출현과 이를 계승하는 이담농악은 자발적으로 지역성을 구현하려는 주체들의 성과라고 본다. 대내적으로는 미군 제7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동두천과 태극기를 연결시켜볼 수 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무형문화유산 종목 중 지역명(지역+종목+보존회)을 달고 있는 전국단위 민속예술 종목 중 하나가 '농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그만큼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마을 사람들도 함께 참가할 수 있는 '대동놀이' 종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광화문 무대에서 전국 단위로 집합할 수 있었던 종목이 농악(2018년)과 아리랑(2019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지속가능성' 종목 중에서 아리랑, 농악이 2012년 2014년에 각각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다. 이때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부분이 바로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기능을 가진 종목'이라는 것이다. 즉 대동성에 주목한 것이다. 이담농악보존회는 동두천시 무형문화재 3호 전승단체로써 위상을 확립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보존회 회원들과 경기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목표로 원형을 복원하고 재현하여 이담농악을 후손들에게 계승하고자 힘쓰고 있다. 경기도 문화재보호조례를 보면, "제53조의5(도무형문화재의 보호 및 육성)의 제1항에 도지사 및 시장·군수는 지정된 도 무형문화재의 전승·보전을 위해 전수교육비·장학금 등 필요한 경비를 예산의 범위에서 지원할 수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전승자들은 경제적 문제와 열악한 전승 환경에 내몰린 채 힘겹게 우리 전통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전통문화의 수요가 많지 않은 분야일수록 명맥 잇기를 위해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현재 무형문화 전승자들의 실상은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생활고를 겪으며 우리 전통문화를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티고 있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주최·주관하는 ‘2022 대한민국 전통연희축제’가 9월 9일부터 9월 12일까지 온라인으로 공개된다. 전통연희축제 첫날은 김덕수 명인이 ‘신동 김덕수의 초연’ 둘째 날에는 연희풍류’, 고창농악보존회의 ‘고창농악 판굿’, 삼도농악’이 이어진다. 셋째 날에는 줄타기 공연인 ‘동두천 이담농악X여류줄꾼 서주향’ 공연이 준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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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국악대경연 현장(下)...........전통 잇는 젊은 국악, 이런 것!지난 경연에 이어 3일째, 마지막 단체 부문 경연. 경연자들은 모두 창작곡으로 도전한다. 각 팀별 대기실에서, 경연 준비를 서로 확인하거나, 경연곡 일부를 연습하며 맞춰보기도 한다. 한 팀이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팀은 구성원이 많을수록 더 다양한 악기들로 경연한다. 팀 구성원들은 대학 동기 재학생, 군악대, 중·고등학교 동문, 대학 동문, 대학 동아리 등 다양한 인연으로 맺어졌다. 어디서든 불러주세요, 저희 음악 보여드리겠습니다! 경연자들은 무대에 앞서 긴장과 행복이 교차하는 설레는 표정을 보이면서도,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자신감에 차 있으며 진지했다. ‘E'space’ 팀원 / 단체 부문 경연자 "목표는 ‘KBS 뮤직뱅크’에 출연하는 거예요. 창작국악 그룹으로,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싶어요. 획기적인 무대와 활동, 자신 있거든요.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어디서든 불러 주신다면 열정을 다해 저희 음악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작당’ 팀원 / 단체 부문 경연자 "대회 1등 해서, 우리 음악 해외에도 꼭 알리고 싶습니다. 국악이 가진 매력과 저희만의 음악적인 색깔이 합쳐져서, 저희만의 음악으로 세계인들과 함께 즐기고 싶어요.” 이들은 이미 자신들만의 음악적 세계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었으며, 영향력 있는 국악 관련 단체로부터 창작 음악 활동을 위한 지원을 받고 있거나 다양한 대회에 출전 경험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갖춘 팀들이다. 또한 국내 공신력 있는 창작국악대회를 찾아 지원, 출전하고 있을 정도로 창작 국악인으로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누룽지’ 팀원 / 단체 부문 경연자 "저희 팀이 생각하는 전통은 단지 계승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에는 지금 우리의 음악도 전통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만의 또 다른 전통 만든다는 생각으로 음악활동하고 있습니다. 도전하는 사람, 즐기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이 대회에서 기대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기회 자체가 저희에게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출전 곡도 이 대회 출전을 위해 1년 전에 위촉한 곡입니다.” ‘O’ 팀원 / 단체 부문 경연자 "올해 정규 앨범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도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저(작곡자)는 서양음악을 전공했는데, 개인적으로 국악을 좋아해서 국악 전공자 분들과 팀 결성을 제안하게 됐습니다. 음악적으로 영화음악처럼 드라마틱한 전개도 있으면서, 국악, 서양음악 함께 조합해서 대중과 공감하는 음악을 만들고 싶습니다.” 또한 ‘KBS국악대경연’의 경우, 대중을 만나려는 젊은 국악인들의 요구와 방송사가 갖춘 인적·물적 자원과 맞닿아, 이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 음악, 그리고 국악 창작국악의 특징 중 하나가 국악 밖의 영역을 도입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역으로 국악 밖의 영역이 국악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번 경연자들 중에, 서양음악 전공자도 상당수 있다. 전자 기타 연주로 단체 부문에 출전하고 있는 한 경연자의 소감은 창작국악이 음악적 경계를 허물며, 젊은 음악인이 국악으로 집결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보여준다. ‘O’ 팀원 / 단체 부문 경연자 "처음에는 국악이 생소하게 느껴졌는데, 그 생소하게 느끼는 것 자체가 (한국인으로서) 마음이 짠하더라구요.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아서 시작했고, 서로 더 친근해지고, 국악을 더 진지하게 깊이 받아들이고, 이제는 새로운 음악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경연 시작 팀원들과 악기들로 무대는 가득 채워졌다. 조명은 더욱 세심해졌고, 경연자들을 향한 카메라와 마이크는 늘어났다. 경연자들과 악기들을 위한 무대 설치가 끝나고 경연이 시작됐다. 단체팀 최다 인원(9인)을 가진 팀의 음악은 무대를 꽉 채운 경연자들과 다양한 악기들로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곡의 정점에서, 진고(큰북)의 가슴을 치는 듯한 울림과 천하를 뒤흔드는 듯한 힘찬 소리(노래), 그리고 선율로 받쳐주는 현악기와, 타악기 등의 합류로, 모든 것을 삼킬 듯한 파도가 휘청이는 망망대해에 와 있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듣는 이의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을 느낄 정도다. 인터뷰 때 온화했던 경연자들이, 음악 안에서 때로는 질주하는 황소처럼, 때로는 들판의 순한 바람 같은 모습을 오가며 반전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전자기타, 드럼, 피아노와 함께하는 팀의 곡은, 후반부에서 ‘굿거리장단’을 연상하게 하는 강한 리듬과 사운드와 함께 장구, 드럼으로 곡을 주도하면서, 뒤이어, 북, 전자기타와의 색다른 조화로 감동을 극대화했다. 종묘제례악을 새롭게 해석한 곡 역시 인상적이었다. 소리(노래)가 곡의 중심축을 잡아가며, 가락에 화성, 템포를 가미하여 음악적으로 풍요로워짐은 물론, 기원의 간절함과 진정성을 더했다. 제목에 이중적 의미를 부여하며, 시작하는 음악인들의 꿈과 포부를 한껏 담은 곡은 밝고 열정적인 그들 자신을 보여주었다. 감각적이고 세련된 리듬과 선율로 맑은 숲과 같은 신선함을 연상케 하면서도, 후반부 피리의 강한 음색은 극적인 감동을 주었다. 구성원 모두 가야금 한 가지의 악기로 도전한 곡은 조선시대 궁중연례 악곡 중 일부를 새롭게 재구성했으며, 가야금 고유의 고음에서 나오는 맑고 청아한 소리는 마치 맑은 물이 흐르는 숲 속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가야금이 가진 소리와 경쾌한 가락의 매력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의 음악은 마치 포장지부터 각기 다른 색깔과 모양을 가진 선물상자 같았으며, 음악적 맛은 더더욱 다채로워 듣는 이의 영감을 자극했다. 전통곡을 기반으로 한 창작곡은, 어떤 느낌으로 해석했는지, 가슴을 울리는 대목에서는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를 반추하며 작곡자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재미가 있었다. 순수 창작곡에서는, 그들이 깔아 놓은 음악을 보고, 만지며 더듬어 가듯, 완전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재미가 있었다. 10월 22일 결선에서(추후 변경 가능)는, 본선에서 순위를 가르지 않고 선정된 총 9팀이(부문별 3팀) 대상을 두고 열띤 경연을 벌일 예정이다. 결선에 오른 경연자들은 전문가 멘토링을 거쳐 한층 더 다져진 실력을 갖추고 무대에 오를 것이다. 제작진에 따르면, 결선 연주회에서는 무대 경연 장면 이외에, 예·본선 과정에 대한 영상과 최종 결선 준비과정에서의 선배들의 멘토링 영상, 경연 현장 심사위원들의 심사평, 참가자들의 자기소개 등을 담아, 시청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경연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또한 ‘KBS국악대경연’ 유튜브 채널을 통해 경연 관련 다양한 영상을 업로드 할 예정이며, 연출을 맡은 정현경PD는 그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작년 수상자 인터뷰, 예·본선 과정의 모습과 인터뷰 등 각종 영상 등을 업로드해서, 단지 1위 수상자뿐만 아니라, 예·본선 참여만으로도 지원자들에게 큰 의미와 가치가 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어느 경연자의 말처럼 지금 이 시대 음악이 전통국악과는 달라 보일지라도, 후대에는, 지금의 음악이 ‘국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전승될 시대가 있을 것이다. 국악의 ‘전통 보존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민한다면, 이 안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고유의 것에 뿌리를 두고, 우리 음악을 향한 탐색과 함께, 지금 우리 삶이 녹아 있는 음악이라면, 시대의 색채를 더했을지라도, 그것은 우리 음악, ‘국악’ 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날, 기자는 젊은 국악인들이 그것을 해내고 있는 현장을 확인했으며, 그들의 미래와 함께 할 우리 국악이 어떤 음악이 될 것인지 진정으로 기다려지고 기대됐다. 10월 말의 결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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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국악대경연 현장(上)..... 실력은 기본, 열정과 창의까지 [류기자의 인터뷰][류기자의 인터뷰] ‘KBS국악대경연’은 올해 32회를 맞고 있는 국악인들의 등용문이다. 국악 전통에 뿌리를 둔 최고 실력자를 선발하면서, 시대가 원하는 젊은 국악 인재들의 참신한 모습을 제시하기 위해 해마다 다양한 시도를 보이고 있다. 작년부터 단체 부문(창작곡)이 신설되었고, 올해의 경우, 각 지원 부문의 소폭 조정 및 달라진 결선 방식 등에서 그 시도를 찾을 수 있다. 성악, 기악, 단체(창작곡) 3부문으로 이루어지며, 본선에서 순위를 가르지 않고 선정된 부문별 3팀(총9팀)이 결선에 올라 대상을 놓고 최종 경연을 치르는 방식이다. 총 180여명(팀)이 지원, 예선과 본선을 거쳐, 10월 22일(추후 변경 가능) 결선을 앞두고 있다. 결선은 1TV를 통해 녹화 방송될 예정이며, 결선 진출자는 전문가 멘토링 기회와 KBS국악관현악단과 협연 및 방송프로그램 출연 등의 기회를 갖게 된다. 기자는 제작진의 협조를 받아, 본선 경연이 있던 지난 8월 8-10일, 젊은 국악인들의 도전과 열정이 살아 있는 생생한 현장을 찾았다. 8월 8일/ 성악 부문 경연 "내 매력을 발산하자!” "~매우 쳐라!” KBS신관 1층 출연자 대기실 복도에서 낭랑한 소리 대목이 들려온다. 본선 경연을 준비하는 한 경연자가 연습 중이다. 속속 다른 경연자들도 배정받은 대기실에 도착한다. 대기실은 긴장과 여유로움이 공존한다. 경연자들의 솔직한 마음을 들어보았다. 김초*/ 성악 부문 경연자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많이 떨리지만, 준비한 것 최대한 보여드리고, 즐기면서 하려고 합니다.” 이지*/ 성악 부문 경연자 "내 매력을 발산하자, 끝나고 나 스스로에게 아쉽지 않도록 하자라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제작진에 따르면, 본선 경연자들은 이미 규모 있는 타 대회에서 상위권으로 수상을 했거나 공신력 있는 기관으로부터 그 실력을 인정받은 탄탄한 실력의 소유자들이다. 이미 국악 아티스트로서의 길을 가고 있으며, 이번 경연 역시 이들에게 큰 무대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차세대 국악인으로 발돋움 하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는 것. 조명이 밝아지고, 카메라와 마이크가 설치된 무대에 첫 경연자가 오른다. 정해진 시간 내에 준비한 곡으로 자신만의 무대를 이끌어 간다. 자신의 강점과 준비한 모든 것을 녹여내는 시간이다. 소리 마디마디에 강약조절, 박자 하나 남김없이 끌고 가며, 감정의 기승전결을 소화해 낸다. 클라이맥스에서 듣는 이는 소름이 돋거나, 그 감동에 눈물을 자아낼 정도이다. 긴장하면서도 즐긴다는 경연자들의 무대는 과연 젊음의 터질 듯한 패기와 열정 그 자체였다. 우리 소리의 깊은 울림과 무르익은 기교에 감탄하고, 또 그것을 저렇게 젊은 국악인들이 구현해낼 수 있다는 것에 두 번 감탄하며, 기자는 그 열정과 실력에 빠져들어 숨죽여 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지상 최고의 악기임을 증명하는 것이 우리 국악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다시 확인한다. 각 경연자들의 무대 끝은, 정중한 인사와 함께 박수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이번 경연의 특징 중 하나는 지정곡이 없이 자유곡으로 출전한다는 점이다. 도전 분야 또한 판소리, 민요, 정가 등이며, 민요 중에서도 서도, 경기, 강원도 등으로 다양하여, 경연은 차세대 국악인들의 다양한 면모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마치 국악 콘서트장을 연상하게 했다. 제작진은 올해부터 자유곡으로 범위를 넓힌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예선 때, 심사위원 분들께 심사를 위해 경연자들의 악보를 드렸는데, 두꺼운 책 한권 분량이더라구요. 자유곡으로 곡의 제한을 두지 않은 것은, 경연자들의 자유로운 음악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기 위한 저희 제작진의 노력 중 하나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8월 9일/ 기악(관악, 현악) 부문 경연 "자신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전 날의 폭우가 우리의 일상을 뒤집어 놓았던 그날, 경연 2일째를 맞았다. 어제와 달리 대기실 경연자들 옆에는 악기가 하나씩 있다. 그들 자신이자, 음악적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는 매개체. 이제 악기와 자신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시간이다. 악기종류는 관악부문 대금, 해금, 피리, 현악부문 거문고, 가야금, 아쟁이며, 모든 참가자들은 각자 다른 곡으로 출전했다. 분야 역시 정악, 산조, 창작곡으로 다양하다. 경연 첫날 확인한 것과 같이, 경연자들 대부분이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음악적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한 경연자의 소신은 자신만의 정체성, 색깔 등이 확립되어 있음을 보여줬다. 홍준*/ 기악 부문 경연자 "선택곡이 정악인데요, 정악이 제 성향에 맞는 곡 같습니다. 제가 차분하고 바른 음악을 좋아해서, 느낌을 잘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들은 다양한 경연을 경험하면서, 자신만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도 가지고 있었다. 박윤*/ 기악 부문 경연자 "무대 올라서 독주하는 마음으로 ‘들어봐라’는 느낌으로 하려고 합니다. (경연) 전에는 아무것도 안하고, 릴렉스 하면서, 첫 소절은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경연은 관악 부문, 대금 연주부터 시작되었다. 경연자는 강하면서도 섬세한 호흡으로 공명을 만들어 소리를 구현하고, 세심한 손놀림으로 장단과 음의 조화를 만들어 낸다. 누군가의 울음을 연상케 하듯, 듣는 이의 심장을 두드리며, 경연자들은 자신만의 호흡과 공명으로 능숙하게 곡의 감성을 전달하고 있었다. 피리 경연자는 한층 더 깊은 호흡으로 그 작은 관에서, 굵직하고 강한 소리를 내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듯한 인상마저 주었다. 현악 부분은 거문고, 가야금, 아쟁 순으로 연주가 이어졌다. 경연자들은 온몸의 에너지를 손끝에 집중한다. 양손의 섬세한 손놀림으로 음의 구분과 강약, 농현을 구현, 음악적 감성을 더했다. 무르익은 솜씨는 때때로 고음과 저음을 넘나드는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곡의 기승전결을 이끌어갔다. 아쟁 연주는 마치 사람의 울음 소리처럼, 가슴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눈물을 자아낼 정도로 구슬프기도 하지만, 빠를 때는 익살스러운 아이를 연상케 하는 기교까지 갖추고 있었다. 연주소리 외에는 적막함뿐이었지만, 경연자들의 음악적 완성도와 열정은 경연의 열기를 실감하게 했다. 경연이 무르익을수록 다음 경연이 기다려졌다. 다음 경연은 창작곡으로 도전한 단체 부문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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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국악 현장] (下) 노원문화원 국악예술단, 즐거움에서 치유까지8월 20일 창단 15주년 기념 공연 ‘마들향기 바람에 흩날리고’를 앞두고 있는 노원문화원 국악예술단의 활동은 국악이 우리 삶에서 ‘전통’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 예술단과 창단부터 함께 해 온 김덕수 명인(예술감독), 역시 오래 전부터 생활국악에 뜻을 두고 실천하면서 이러한 가치에 힘을 싣고 있다. 이번에는 창단 15주년 기념 공연 ‘마들향기 바람에 흩날리고’의 출연자들을 만나기로 한다. 김감독의 생활국악에 대한 가능성과 믿음은 예술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예술단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활국악은 전통문화의 확장 이상의 가치를 구현하는 의미있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단원들 대부분이 노원문화원 강좌 수강생에서 시작하여, 예술단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생업에서 은퇴 했거나 주부들이고, 일부 단원들은 생업과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이 7-8년 이상 예술단에서 활동했고, 창단부터 함께 해 온 분들도 상당수이며, 40대에서 80대까지, 평균 연령 60-70대이지만, 자신의 악기를 모두 가지고 있고,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들의 삶 또한 살아온 세월만으로도 몇 권의 책은 나올 법한 사연을 가지기에 충분할 것이다. 한 분 한 분, 예술단과의 인연을 들어보면, 국악이 이 분들의 삶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전통음악의 힘을 엿볼 수 있다. 성기순(국악예술단 부단장, 60대) "노원문화원 생기면서 수업 듣기 시작했어요. 40대 후반 들어와서, 집에 있는 것보다는 뭔가 배우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교우들 몇 명이랑 수강신청 하게 됐죠. 이(경숙) 선생님 제안으로 봉사활동으로 공연 시작했어요. 일상을 무료하게 보내지 않고, 나가야 할 곳이 있고, 배우고 즐길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다른 생각 할 시간 없이 직장인처럼 바쁘게 생활하는 것도 좋고요. 지금은 선생님 수업 도와드리면서 함께 지도하고 있어요.” 김 모씨(주부, 50대) "어머님께서 많이 편찮으세요. 늘 옆에서 돌봐드리면서, 저도 많이 힘들었는데, 여기 수업 배우고, 예술단 활동하면서 힘을 많이 얻었어요. 집에서 마음가짐도 많이 좋아졌고요.” 신 모씨(80대, 주민 센터 사물놀이 지도, 예술단원 학생회장) "수업들은 지는 18년 정도 됐고, 예술단 처음부터 함께 활동했어요. 국악 배우고 싶어서 생업 하고 있을 때, 배우기 시작해서 지금은 생업은 은퇴하고, 주민 센터에서 사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옆에 있던 동료가 ‘인정 많으신 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국악 하면서, 젊은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까 활기도 생기고 좋아요.” 정 모씨(주부, 60대) "어렸을 적부터 국악을 해보고 싶었어요. (이경숙) 선생님 만나서 예술단에 들어오게 됐고, 잘 끌어주셔서 지금까지 왔어요. 사실 제 아이가 몸이 불편해서, 항상 옆에서 돌봐줘야 해요. 그래서 연습시간에 충분히 있지 못하는데 선생님께서 배려해주시고, 또 제게 ‘마음에 있는 것 다 모두 다 풀고 가라.’라고 격려도 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이런 활동 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임 모씨(올해 정년퇴직, 60대) "정년 퇴직 앞두고, 올해 3월에 친구(현 예술단원) 따라 문화원 수업 듣게 됐어요. 친구가 중학교 동창이에요. 장구 배우는데, (이경숙) 선생님께서 열정적이시고, 저도 재미있더라고요. 선생님 권유로 예술단에 들어오게 됐어요. 예전에는 민요가 와 닿지 않았는데, 접하다 보니, 마음속에 애잔함 같은 걸 끌어내는 맛이 있는 것 같아요. 나이가 드니 이런 것이 끌려요. 진심으로 공감되고, 즐거워요.” 함 모씨(주부, 50대) "아이 키우면서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서, 문화원 수업 듣게 됐어요. 배운 지 7-8년 되었고, 예술단 활동하면서, 일단 제가 즐거워요. 제가 행복하니까 남편이나 아이들 대할 때도 훨씬 좋아졌어요. 지금은 이(경숙) 선생님 수업 도우면서 조교 역할을 하고 있어요.” 권 모씨(주부, 70대) "퇴직 후에, 교회에서 어르신 분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국악을 배우게 됐어요. 저도 즐겁게 봉사할 수 있어서 좋고, 제 아이들도 제가 이런 취미생활 즐기니까 좋아해요.” 박 모씨(주부, 60대) "배운 지는 2년 됐어요. 올해 예술단에 합류했고요. 저는 경기 민요 노래 가락이 너무 좋고,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아요. 제 딸이 외국에서 음악공부 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저랑 같이 거리에서 버스킹 하자고 하더라고요. 하하.” 안 모씨(주부, 60대) "예술단 활동 한 지는 13년 됐어요. 처음에 친구 따라 국악 배우기 시작했다가, 친구는 나가고 저만 남았죠. (이경숙) 선생님께서 너무 잘 가르쳐주세요. 수업도 재미있고요. 이런 활동이 생활에 활력소에요. 무료하지 않게, 즐겁고, 바쁘게 살게 되니까요.” 박 모씨(주부, 70대) "예술단 활동은 7-8년 정도 했어요. 이런 활동 하게 되면, 배우면서 노는 거잖아요. 소득 있죠. 악기도 배우고, 행복하고, 또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요.” 이 모씨(주부, 60대) "어려서부터 국악을 좋아했어요. 혼자 공부하기도 했는데, 15년 전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저는 이것 없으면 안돼요. 정신 건강에도 좋고, 집에서 짜증이나 스트레스도 덜하고, 생활이 행복해지니까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문 모씨(올해 2월 정년퇴직, 60대) "작년에 퇴임을 앞두고, 퇴임 이후 생활을 고민하던 중에, 개인적으로 우리 소리를 배우고 싶더라고요. (이경숙) 선생님께 배우고 싶다고 연락 드렸어요. 퇴근 후에 시간을 내서 ‘창부타령’을 배웠어요. 그렇게 원하던 것을 배우고, 예술단 활동까지 하게 돼서 너무 행복해요.” 최 모씨(생업 종사, 60대) "8년 전에 예술단에 들어왔어요. 일을 하고 있었지만, 사물놀이를 배우고 싶어서 신청했는데, 민요를 배우게 됐어요. 예술단 활동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뭔가가 있어요. 특히 공연 하고 나면 성취감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어요. 또 대사나 동작을 외우는 것들이, 우리 같은 나이에 오는 치매에 좋아요. 뇌를 써야 하니까요. 또 활동량이 많아서 운동도 되고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국악에 관심이 많은데, 요즘 TV나 라디오 국악 프로그램에 경기민요가 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 노래가 정말 좋거든요.” 박 모씨(생업 종사, 50대) "사물놀이를 배우다, 민요를 배우고 싶어서 여기 문화원에서 배우게 됐어요. 어릴 때부터 국악을 좋아해서 살풀이 같은 한국무용도 1년 정도 배우고, 그 외에도 다양하게 배웠어요. 예술이란 게 음악, 춤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1인 가구인데요, 살면서 종종 외로움을 느껴요. 국악을 배우거나, 예술단 활동이 그런 외로움을 대신 채워줘서 너무 행복해요. 코로나 때, 못해서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요즘 코로나가 심해져서 다시 못 할까봐 걱정되기도 해요. 그 정도로 지금 배우고 활동하는 것들이 너무 좋아요.” 젊은 예인들의 합류 또한, 이 예술단의 공연은 안무가, 조연출, 연기자 등의 역할로 다양한 분야에서 젊은 예인들이 참여하는데, 이들은 예술단 창단 초기부터 함께 했던 김덕수 명인, 이태훈 연출가 등 연륜 있는 예인들이 매개가 되어 합류하게 되었다. 이 역시 문화적 콘텐츠로서의 생활국악의 또 다른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점이다. 이태훈 연출가와 함께 14년 전부터 함께 한, 약 20년 경력의 이창순 안무가는 예술단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을 이렇게 말했다. 이창순(안무가) "이 분들의 열정에 감동받아요. 저는 전문가이고 생업으로 하고 있지만, 선생님들은 즐기시면서 하시니까 그 열정은 못 따라가는 것 같아요.” 조연출과 객원 배우로 활약한 예인들 또한 자신들의 솔직한 감회를 밝혔다. 송은혜(조연출) "비전문가 분들이라 안 해보신 것들이고, 반복해서 연습하는 부분도 많은데, 지치시지 않고 더 열심히 해주세요. 또 선생님들끼리 서로 동영상 녹화나 녹음 해주시면서, 연습하시는 것 보면, 감사하면서도 멋지신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정동(객원 연기자, 변사) "예전 공연에 잠깐 합류했었고, 이번에 주연(변사)으로 출연하게 됐는데요, 부모님 세대 분들이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어요. 정말 좋아서, 열정을 가지고 하시는 모습, 이런 감동적인 것들이 관객 분들께 전해질 것이라고 믿어요." 단원들은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동료이자 이웃으로,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연습 중에, 자신의 파트가 아닐 때는 동료를 지켜보며 노래 불러주었으며, 누군가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옆에서 응원해주고, 당사자도 위축되지 않고 마음을 다지곤 했다. 이러한 모습은 전통예술을 매개로 지역 공동체가 더욱 단단해지는 과정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그 모든 시간들을 즐기고 있었으며, 이후에 돌아갈 일상의 자양분으로 삼고 있었다. 그 분들의 삶은 국악으로 치유되고, 문화 공동체로서 단합하면서, 국악은 각자의 삶 속에서 행복의 중심축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들은 영역을 넓혀가며 주변의 소외계층을 찾아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이것이 생활국악이 지향하는 가치이며, 우리 음악, 전통문화의 힘일 것이다. 앞으로 지역을 중심으로 공유되는 국악과 전통문화가 좀 더 활성화되어, 우리의 삶을 더욱 건강하게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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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향전문가 허진, “국악기 변화로 청중 신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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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에 뜬 은하수(銀河水)‘미리내’ 한복미리내 ‘은하수(銀河水)’의 '제주도' 방언. "이곳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더위가 한창인 지난 9일 토요일 오후 인사동의 ‘미리내’라는 매력적인 이름을 가진 공간을 찾았다. ‘미리내’는 직물에 천연 염색을 입혀서 한복 작품을 만들어내는 인사동의 의상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순간, 인공적 화학적 요소의 매염제를 배제한 천연염색 원료들로 물든 색감과 자연에서 가져온 옷감의 재질에서 뿜어내는 질감이 편안하게 다가왔다. 깊이 있게 담백하며 명도 높은 색감에 음영만 더하여 멋스러움을 표출하는 작품부터 자연스럽게 물감을 뿌린 듯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은하수 빛 색감의 작품들까지......진열대에 걸린 의상들의 색깔과 재질은 모두 자연에서 찾아 온 작가의 고지식함이 드러낸 한복이다. 그러한 작품이 전시된 공간이 품질의 고급화를 추구하는 인사동의 ‘미리내’ 공간이다. 기존의 인공 염색 소재의 의복들과 대비하여 100% 자연 원료만을 고집하여 직물에 천연염색을 하는 ‘미리내’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인사동의 ‘미리내’에서 윤지영 선생님과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은 윤 선생님과의 일문일답이다. Q. 인사동에서 한복 의상실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A. "원래는 20년 정도 해외를 돌아다니며 의류 도매로 무역하는 사업을 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체력의 한계가 느껴짐과 동시에 언젠가는 개인 숍을 운영하고 싶다는 소망을 마음속에 한구석에 꾸준히 품고 있었다. 해외에 의류 도매를 하는 와중에도 한복에 관하여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인사동에 들어오게 되었다.” Q. 어떻게 ‘미리내’ 라는 매력적인 이름을 가지게 되었나? A. "남편이 제주도 사람이다. 은하수를 가리키는 제주 고어 '미리내'라는 뜻도 좋고 매력 있는 이름이라서 선택하게 되었다." Q. 코로나 시기가 도래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을 텐데 인사동에는 어떠한 변화가 찾아왔나? A. "가장 큰 변화는 대부분 한복 의상실이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Q. 인사동에서 한복 의상실을 운영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A. "기다림" …… "봄에 씨앗을 뿌려서 가을에 수확하듯, 잘 만들어진 한복이 제 주인을 찾을 때까지 나와의 싸움을 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 Q. ‘미리내’ 한복의 맵시(실루엣)에 특별히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A. " ‘미리내’는 어떠한 체형의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잘 맞도록 맵시를 유지하면서 주 연령대인 40-50대 여성들의 현실적인 단점은 보완하고, 편안함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하고 있다." Q. 천연염색만을 고집하는 ‘미리내’의 색은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지는가? A. "덜 익은 떫은 감(풋감)에 의한 염색법인 ‘감물염색법’과 쪽이란 한해살이 풀을 염재로 사용하는 식물성 염색법인 ‘쪽물염색법’ 과정을 보통 10번 이상 거치며 햇볕으로 발색시켜 원단으로 사용한다" Q. 한복에는 부드럽고 섬세한 재료들이 많이 쓰이는데 어떤 직물을 주로 사용하는가? A. ”주요 작품에는 현대적이고 저렴한 합성 섬유, 레이온, 폴리에스터로 직조된 직물이 아닌 순수하게 합성섬유가 섞이지 않는 천연 재질의 원단만을 직조하여 고집스럽게 사용한다.” Q. ‘미리내’ 만의 디자인 철학이 있다면? A. "특별한 날 외에도 기성복과 함께 착장 시 생활에서 자연스럽고 이질감이 없으며 실용적이라는 인식되는 작품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찾아오시는 고객분들께 작품의 품질로서 확실한 믿음을 주는 것이다." Q. 최근 들어 한복과 더불어 한국 문화에 전반적인 논란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A. "우리가 스스로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엷고,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라져 가는 우리의 얼이 담긴 문화유산을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고 본다." Q.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서양 복식의 형태를 본뜬 한복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A. "전통의 과도한 개량에 대해서는 부정적 의견이 더 크다. 전통 한복의 기본적 본질을 무시하는 국적불명(?) 한복들은 단순 흥미 위주로 관심만을 모으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뿐인 한복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Q. 마지막 바라는 점이 있다면? A. "고객들과의 신뢰를 잃지 않도록 스스로가 정한 '선'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내면적으로 유지하며, 누구나 만족시키는 한복을 만들어내는 것이 ‘미리내’ 의 바람이다" 한복은 오랜 세월 수많은 외세에 억압에 저항해 온 우리 민족의 삶과 닮았다. 그래서 한복은 한민족 공동체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가 자발적 의지를 가지고 전통유산을 지키고자 하는 힘을 키우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그녀의 철학이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세대를 이어 계승하는 고유한 전통이 사라지면 우리 예술과 문화의 정체성, 그리고 우리의 역사까지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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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 명장, ‘난계국악기제작촌 현악기공방’ 입주[류기자의 인터뷰][류기자의 인터뷰] 충북 영동군은 국악의 3대 악성 중 한 분인 박연 선생의 출생지로서, ‘난계 박연’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전통문화 계승과 보급 및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복합 문화 체험 공간을 마련해 다양한 시설과 활동을 운영하고 있다. 이 중 ‘난계국악기제작촌’은 수십 년 외길을 걸어온 악기장들의 국악기가 탄생되는 곳이다. 박성기 명장은 영동군의 엄격한 심사기준(사업체 운영 기간, 기능공 규모, 제작기간 등)을 통과하여 ‘난계국악기제작촌 현악기공방’에 입주를 앞두고 있다. 명인은 가야금을 25현까지 계량하는 등 국악 연주와 창작의 폭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러한 공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42호(2008년)로 지정되었다 난계의 고장 영동에서 악기장의 활동은 지역과 악기장 모두에게 상생의 기회를 제공한다. 명장의 활동과 계획을 통해, 국악기의 현주소와 전통문화 계승, 발전을 위한 모색을 해보고자 한다. 인터뷰는 전화 통화로 이루어졌다. Q. ‘난계국악기제작촌’에는 어떻게 오시게 됐나요? A. 영동군에서 낸 ‘난계국악기제작촌 입주업체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해서 서류심사, 면접심사 받고, 여러 절차 거쳐서 입주하게 됐어요. Q. 거의 40년을 악기 제작에만 몰두하셨습니다. 어떤 어려움이었고,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A. "지금도 4-5시간씩 자요. 토요일, 일요일 없이 계속 연구해요. 남들 하는 것이 아니라 선두역할 하니까, 현재 개량된 악기 90퍼센트를 제가 했으니, 앞으로도 꾸준히 할 생각입니다. 좋은 악기를 만들기 위해 30년 이상 재료를 말려야 합니다. 누구한테 내가 걸어왔던 이 길을 똑같이 가라고 하면 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오늘이 며칠 인지도 모르고 일하기도 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도 많았고, 그러면 시골 논도 팔기도 했고, 더 어려운 사람들 생각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살아왔어요.” Q. 국악의 공연환경 등의 변화로 국악기도 함께 변화했고, 선생님의 악기 개량은 국악의 현대화, 대중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것은 자칫 국악의 정통성과 대립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A. "전통악기는 전통 그 자체로 보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국악이 나오면, 그것을 실현해낼 수 있는 악기가 필요합니다. 연주자와는 서로 필요한 불가분의 관계에요. 60-70년대에도 미묘하게 줄 조이는 방법 등 개량하려는 흔적은 봤습니다, 하지만, 제가 악기 구조 자체를 개량한 것은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개발한 것이 현악기에 쓰이는 ‘개량줄’이에요. 이전에는 명주실을 썼는데, 고음 낼 때 자꾸 끊어져요. 연구하다 새로운 재질로 만들었죠. 장력이 더 세기 때문에 고음 낼 때 안 끊어져요. 처음에는 연주자들이 외면했어요. 이후에 점점 많은 사람들이 제 악기를 인정해주고 찾았죠.” Q. ‘난계국악기제작촌’에서 선생님께서 특별히 계획하시는 일이 있으신가요? A. "악기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공신력 있는 체계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면 국악기 가격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지지는 않을 거예요. 지금 국악기 시장의 문제 중에 하나가 악기 가격이 천차만별이에요. 쉽게 얘기해서, 해금이 500-600만원에 실제 거레되는데, 이 중에는 실제 150만원 정도 되어야 하는 것들도 있어요. 그리고 2500만원까지 하는 가야금도 있는데, 이것이 정말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는가 하는 거예요. 결국, 연주자, 대중들이 손해를 보게 되죠. 그러면, 국악은 우리 생활에서 멀어지는 거예요. 현재 전통악기 가격 거품이 많습니다. 가격을 평준화 할 수 있는 체제가 없어요. 그래서 이것을 평준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다른 전문가분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Q.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A. "약 5년 전부터 공동 연구해서 이제 완성했습니다. 영동(난계국악기제작촌)에서 시작할 계획입니다. 음향기기 표준화 시스템이에요. 전자 시스템을 이용해서 악기의 음량, 재료 등을 표준화된 기준으로 측정하고, 각 등급이 나옵니다. 그러면, 악기의 가격이 책정될 수 있는 어느 정도 공신력 있는 기준이 마련되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처럼 터무니없는 가격이 나오지 못할 겁니다. 100만원 가치 악기는 100만원에, 500만원 짜리 악기는 500만원에 팔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난 기본적으로 악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그런데, 악기가 터무니없이 비싸버리면, 사람들이 못 사죠. 악기 만드는 사람도 먹고 살 수 있으면서, 일반 사람들도 전통악기를 쉽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요. 아마 그 동안 저를 믿어준 많은 국악인들이 참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Q. 그 외에 계획하고 계신 것이 있으실까요? A. "종묘제례악을 미니어처로 만들어서 초등학교 같은 곳에 보급(판매)하려고 해요. 아이들은 우리 국악기 생긴 것도, 소리도 익숙하지 않잖아요. 예를 들면, ‘편종’ 버튼 누르면, ‘편종’ 주변이 반짝거리면서 편종 소리가 나와요. 이렇게 하면, 아이들도 우리 악기에 대해 좀 알게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만들게 됐어요.” Q. 악기 제작에서 보람을 느낄 때는 어떤 때인가요?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가장 큰 보람은 열심히 연구해서 좋은 악기가 탄생했을 때, 그 때 보람이 가장 크죠. 국립국악관현악단 출범하고(1995년), 박범훈 단장님께서 신곡을 만들었을 때, 내가 만든 악기로 그 큰 무대에서 연주했을 때도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일하면서 음대 교수님들 많이 만나는데, 그 인연으로 몇 개 대학에 장학금도 대고, 악기 기증도 하고 그랬어요. 돈 없어서 우리 음악 못 배우고, 악기 못 사는 일 없어야 하니까요. Q. 악기 제작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인가요? A. "자신만의 고집 있어야 해요. 재료에 공들이고, 악기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려는 노력. 그리고 좋은 악기를 제대로 만들어서 합리적인 가격을 책정할 수 있는 양심도 있어야 합니다. 타고난 예술성도 필요해요. 손재주나 음감 같은 거예요.” Q. 악기장이라는 직업도 쉽지 않은 만큼 보람도 클 것 같습니다. 젊은 악기 제작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당부를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A. "돈을 보고 하면 안 되고, 자신이 연구해서 좋은 악기를 만들었을 때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 저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 많아도 그 사람들은 악기 제작은 안했잖아요. 남들 못 한 것을 해냈다는 자부심 그게 가장 커요.” Q. 악기장으로서 궁극적인 목표, 소망이 있으시다면 무엇인지요. A. "지금까지 전국에 국악기 제작하는 곳이 많이 있어요. 이 중에, 일부는 자격이 안 되는 악기들을 높은 가격에 팔아왔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그것을 정리하고 싶어요. 가격을 현실화하고, 거품 없는 제 가격으로 품질 좋은 악기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래요. 인터뷰 내내 박성기 명인은 악기시장에서 기준 없이 책정되는 가격의 문제를 토로했고, 그 정상화를 이끌고 싶다는 뜻을 강하게 밝혔다. 지난 약 40년 동안, 악기연구를 그렇게 해왔듯이, 이 문제의 해결 역시, 옳은 길이고, 자신의 길이라 생각하고 쉼 없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외에도 그가 실천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 국악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난계 박연 선생의 고장, 충북 영동군 ‘난계국악기제작촌 현악기공방’에서 그의 활동이 대중과 국악인들, 나아가 국악발전에 도움이 되는 행보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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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도 국립극장장 인선 파행, “너무 의아스럽다”국립극장장 자리가 두 번의 공모에서 합격자를 내지 못해 다시 3차 공모를 하게 되었다. 1차 공모는 지난해 6월 공고, 11월에 서류심사와 면접심사 합격자 3인이 통과되어 역량평가시험에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S매체가 3인에 대해 "적임자 없다”고 보도한 후 인사혁신처가 "적격자 없음”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1월 초 재공모에 들어갔다. 그런데 같은 과정으로 3인을 통과시킨 상태에서 1월 27일 C일보가 "A급이 없다”라는 부정적인 보도를 했다. 그리고 한달이 지난 2월 25일 문광부 내부 심사위원회는 3월 중 재재공모를 한다고 밝혔다. 이는 결과적으로 본보가 2월 3일자 "언론이 자격 없다고 보도하면, 또 재공모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 바 그대로 되었다. 이에 대해 ‘1차 서류심사, 2차 대면면접 심사를 통과하고, 3차 역량평가시험을 준비하던 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前 한국동양예술학회 회장)교수와 27일 오전 이메일 인터뷰를 보내고 오늘 28일 답변을 받았다. 이를 통해 국립극장장 인선 파행의 대강을 파악해 보기로 한다. 문광부 "3명 모두 부적격자로 판명”, 전화로 통보 국악신문: 이번 2차 공모, 최종 절차를 남긴 상태에서 적격자가 없어 재재공모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언제, 어떤 경로로 듣게 되었나 박상진(전 동국대 교수): 2월 25일 오후 4시 30분 경 문화체육관광부 OO과 직원 OO라고 하면서 휴대폰을 통해서 듣게 되었다. Q. 재재공모 이유가 무엇이라고 들었나. 구체적으로 밝혀준다면? A.직원은 재재공모에 관한 특별한 이유(3명 모두 부적격자로 판명이 나서, 등) 나 설명 없이 3월 중에 재재공모를 하기로 했다고만 알려줬다. 그래서 내가 세 번 심사 중 두 번을 마쳤고 아직 역량평가 한 번이 남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결론을 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문화체육관광부 내부 심사위원회에서 그렇게 결정했다”고 했다. Q.그동안 1차와 같이 2차 공모 절차 중에 C일보 보도도 있었고, 종로 국악님들 사이에 불쾌한 소문도 돌았다. 이번 상황에 대해 문광부나 인사혁신처에 대한 응시자로서의 입장은 무엇인가? A. 인사혁신처에서 1차 시험인 서류심사에서 5명이 합격되고, 2차 면접심사에서 3명이 합격됐다. 그 심사과정은 공정하게 잘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특히 2차 면접심사 과정에서의 심사 내용은 심층면접으로 국립극장장의 역할에 부응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재를 선발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그 역할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과정과 내용이 무시된 결론이 나온 것 같아서 너무 의아스럽다. Q. 전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소동 이후, 개방형 공모제도가 보편화 한 듯한데, 응모 경험자로서 이번의 인사 방식에 대해서 장단점을 알게 되었으리라고 본다. 장단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A. 정부 기관장의 개방형 공모제도는 ‘과거 제도’와 같은 것이다. 특정지역, 특정인도 좋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묵묵히 국가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인재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블라인드 면접을 하는 것이지 않나, 오랜 시간 동안 장단점을 보완해서 만들어진 현 제도의 취지에 맞게 오히려 정부에서 더욱 공정하고 엄격하게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잡음과 소문만 무성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Q.기관의 특수성과 위상을 고려한다면, 기본적으로 국립극장장이란 자리를 어떻게 보는가? A. 국립극장은 국내 유일의 제작 극장이다. 국립극장장의 당면 과제는 전통예술에 기반을 둔 공연작품을 개발하는 것이고, 타 장르와의 융복합을 통한 세계무대 진출이다. 극장장에 대해서는 전통예술을 전공하고, 그에 기반한 창작품을 제작한 경력의 소유자, 그리고 서양예술 등 기타 장르에 대한 이해도와 융복합을 통한 창작경험을 갖춰야 한다고 본다. 한류의 원형자산은 전통예술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국립극장에는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전통예술 3단체가 있는데, 적어도 이 세 단체의 성격이라도 알아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이 세 단체가 융복합하여 만들 수 있는 창극, 무용극, 음악극 등 총체극을 제작한 경험은 국립극장장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 소양이라고 본다. 그리고 위와 같은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예술감독과 단원들이 ‘창조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수록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극장장의 다양한 리더십 즉, 행정적 역량도 갖춰져야 한다. 그래서 역량평가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응모한 40여명, ‘부적격 블랙리스트’? Q. 제도상 다음 3차 공모에 응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다시 응할 의향이 있는가?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A. 이미. 1차 공모, 2차 공모를 통해서 ‘적격자 없음’으로 탈락된 예술인들이 40여 명으로 알고 있다. 이 부분에서 본의 아니게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기분이다. ‘적격자’로 모든 분들이 보완해서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본인은 더 생각해 보겠다. Q.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나 의견이 있다면? A. 우리나라 유일의 제작 극장인 국립극장장의 자리는 최고의 전문성을 요구받는 자리이다. 세계 무대 진출로 한류문화 확산을 도모함으로써 국립극장의 브랜드 가치를 극대화하고, 세계 속에 국립극장의 위상을 제고하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훌륭한 극장장이 선발되기를 기원한다. 인터뷰에 응해 주신 박상진 교수께 감사를 표한다.(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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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곽동현의 음악세계국악아카펠라 '토리스' 리더를 맡고, 최근 '곽동현과 슈퍼밴드'를 결성한 곽동현 명창을 통해 국악 단체 토리스의 정체성과 국악 전승활동을 살펴본다. 대구에서 태어난 곽동현(1981년생)은 영남민요와 영남아리랑을 지키는 정은하 명인 밑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내년이면 30년이 되어간다. 타고난 재능은 신명까지 갖추어서 이미 어린 나이에 무대를 압도했다. 어느새 영남민요와 경기민요를 공부하다가 서도소리를 이수한 젊은 소리꾼 곽동현이 '밀양아리랑 선율의 변천 연구(한예종 석사)에 이어, 작년에 한양대학교 한국음악학을 전공하고 ”영남지방 유희요의 존재 양상과 특징"이란 주제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매년 대구에서 ‘곽동현 대구영남의 소리’ 무대를 열고 있다. 이후 경기잡가 완창발표회를 가졌다. 2009년 21c한국음악프로젝트 창작국악경연대회에서 창작곡 '아부레이수나'로 대상 수상, 소리경연대회 명창부 대상( 문광부장관상)과 러시아국제민속음악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018년부터는 방송에서 마을을 찾아가는 민요 리포터로 사랑받는 젊은 소리꾼으로, 크고 작은 축제에서 음악감독과 해설을 맡고 있는 곽동현을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국악 꿈나무에서 국악계의 별로 떠오르다 Q. 안녕하세요, 제가 대구 공연장에서 만난지도 25여 년이 훨 넘네요. 제가 알고 있는 국악 스타 곽동현보다 이제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국악인으로서, 자신을 직접 소개한다면, 부탁드려요. A. 국악아카펠라 '토리스' 그룹에서 10년째 리더를 맡고있구요. 경서도 소리꾼 곽동현입니다. 몇년전 '곽동현과 슈퍼밴드'도 결성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영남민요연구회 정은하(현 사단법인 영남아리랑보존회 이사장) 명창 밑에서 공부를 하고, 영남대학교 한국음악학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예술전문사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에서 한국음악학을 연구했습니다. 매년 대구에서 ‘대구영남의 소리’를 발표하고 있고, 최근 2019년 2020년 국립국악원에서 경서도잡가발표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매년 창작국악 음반을 내놓고 있습니다. 최근 판소리 흥보가 음반을 내고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서양음악과 트롯트 열풍에 의해 국악을 외면하는 관객들과 소통을 하고 싶어서 편곡 작품을 음반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전통에서 창작, 다시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외유를 했다고 할까요. 지금은 판소리의 매력에 빠지고 있는 중입니다. Q. 매년 발표하는 '아리랑 & 2017 대구'영남의 소리를 찾아서'에서는 어떤 곡이 불렸나요? A.제1집 음반에 수록된 '담바귀타령' '신옹헤야' 2집에 수록된 '쾌지나칭칭나네' 3집에 수록된 '경성아리랑'. 이 밖에 세계적인 지휘자 클로드최가 작곡한 '나의 아리랑'을 연주하고, 마지막으로 예천통명농요 중 '도움소소리' '에이용소리' '캥마쿵쿵노세'를 재현했습니다. Q.영남민요에서 경기민요, 경서도민요,제주민요까지 공부를 했는데, 자신의 음색에 가장 어울리는 곡은 무엇인가요? A. 개인적으로 애창하는 노래는 비장미가 뛰어난 서도소리 '수심가'입니다. 무대에서 맑고 깊은 맛으로 부르고 싶어요. Q.국악아카펠라는 어떤 음악장르인가요? 국내에 다른 국악밴드에도 있나요? A.장르는 아카펠라이구요. ‘국악+아카펠라’라는 배합으로 탄생한 저희 팀이 아마 세계 최초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예종 후배들로 구성된 국악아가펠라 '토리스'는 지역마다 다른 토리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토리스는 민요와 판소리, 아카펠라를 전공한 견두리(소프라노)·이신예(알토)·곽동현(테너)·백현호(바리톤)·최홍석(베이스) 남녀 5명으로 구성됐으며, 우리 가락을 아카펠라 창법에 접목해 활발한 활동을 10년간 함께 하고 있습니다. Q. 퓨전음악과 밴드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다양한 동서양 악기편성이 대세가 되어버린 창작국악계에서 우리악기의 멋과 소리꾼의 진정성을 살린 곽동현의 시도는 신선하면서도 의미가 깊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토리스에서 그동안 출시한 음반은 어떤 것이 있나요? A. 제1집은 민요를 국악기로 편곡한 노래들이구요. 제2집은 제가 작사 작곡한 곡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3집은 새로운 아리랑을 주제로 엮었구요. 4집은 박사논문을 통해 재해석하여 현대화한 ‘월워리청청’이 있습니다. 토리스 그룹에서 2019년 8월 판소리 '흥보가' 음반을 내고 서울과 대구에서 발표했는데, 호응이 좋아서 .... 다음 작업으로 판소리 장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Q. 퓨전국악과 창작국악에 관심이 많으신데요. 출시된 음반은 어떤 것이 있나요? 음반 1집 ‘바람을 그리다’에서 국악을 일상의 음악으로 만들어 다양한 계층의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2집 ‘젊은 노래꾼 곽동현의 광대소리’에서는 민요에 밴드 요소를 결합해 현대적 감성을 살려낸 신선한 작업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여러 음반 중 가장 공을 들인 음반은? A.경기잡가 4곡 서도잡가 4곡, 2019년 곽동현의 경서도잡가 1탄을 선보였습니다. 연속성이 있도록 매년 선보이는 프로젝트이구요. 제3탄이 끝나면 경서도잡가 24곡을 완창하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2탄을 무탈없이 마무리 지었습니다. 여러 음반 중 가장 공을 들인 음반은 ‘새로 그린 아리랑’ 입니다. 서정적이면서 기승전결이 있는 선율을 만들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벅찬 감동까지 느낄 수 있는 힘이 있는 노래입니다. 경성아리랑 첫 수는 황현의 매천야록(1894)에 수록된 현존하는 최고의 아리랑 기록인데. 1930년 문헌에서 찾은 ‘서울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불린 아리랑 중에서 일제강점기 경성의 이미지를 부각할 수 있는 정서를 담아내려고 재구성하였습니다. 아리랑 음반들은 아리랑학회에서 문헌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곽동현의 음악 세계 국악아카펠라 '토리스' 그룹 리더 곽동현은 전국 어디를 가도 들을 수 있는 경로당 노래 1호 경기민요 '노랫가락'을 5.8.8.5.8 장단에서 6/8박으로 변용하고 애틋한 감정을 담아 가사를 새롭게 작사하여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내어 놓았다. 그리고 1926년 경기소리의 대가 박춘재가 불렀던 '낭군가'를 오늘날 현대적 감성을 실어 보사노바로 새롭게 편곡하였으며, 그 밖에 선소리 산타령에 속하는 '개구리타령', 담배를 소재로한 '담바귀타령', 보리타작소리인 경상도 대표소리 '옹헤야'를 재해석하여 새롭게 편곡하였다. 10년전 첫번째 음반(아리랑)이 나왔다고 제일 먼저 필자에게 달려왔던 기억이 새롭다. 이후에도 매년 음반이 발매되었다. 필자가 지켜본지가 22년이나 된다. 영남민요발표회 무대에서 눈여겨 본 어린 국악 꿈나무가 성장하여 국악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실기에서도 국악계 민요부 3트리오(김용우, 이희문, 곽동현)반열에 서도 무리가 없다. 국악 이론까지 겸비한 그는 그만큼 책임감이 무겁다고 한다. Q. '곽동현 경서도잡가발표회' 준비하고 발표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도 국립국악원 공연장에 가서 박수를 치고 온 거 기억하시나요. 그때 비가 많이 왔죠. 비를 흠뻑 맞고 들어가서 들어보는 음악은 묘하게 집중력을 가지고 감상했습니다. 국악에 입문한지 1년만 있으면 30년이 되는데, 그동안 영남민요. 경기민요. 서도민요까지 한국음악의 여러 갈래를 공부했는데 기억에 남는 스승은? 국악계의 힘든 고개를 넘어갈 때 도움을 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현재의 자신이 되기까지 영향을 주신 분은? A.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자주 찾아 뵙는 소리 스승은 영남민요와 아리랑을 널리 전수하는 정은하(1956년생)선생님입니다. 처음에 학원 수강을 하러가니 너는 남자이니 민요보다는 악기를 배우면 어떠냐고 권하셨으나 저는 민요를 배우겠다고 며칠동안 고집을 피웠습니다.2003년부터 사단법인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장을 맡고 계십니다. 이전에는 영남민요보존회를 이끄시다가 영천아리랑전국경연대회와 대구아리랑전국아리랑경연대회를 주최주관하고 계십니다. 정신적 저의 멘토이자, 소리 인생의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항상 뒤에서 앞에서 응원해 주시고. 언제부터인지 칭찬을 아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도소리를 가르쳐 주신 분은 김광숙 선생님이십니다. Q. 대구 예술인으로만 구성된 '곽동현과 슈퍼밴드’에 대해 소개 해주세요. A. ‘곽동현과 슈퍼밴드’ 는 민요와 밴드의 결합을 시도한 밴드로서, 국악기와 서양악기와의 배합으로 편성하여 모던 감성과 한국민요의 재해석을 통해 다양한 음악적 레파토리로 젊은층 국악 애호가와 만나고 소통하고 세상을 노래하고 있는 국악을 중심으로 만든 밴드이고, 악기는 국악타악, 가야금, 드럼, 신디, 베이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요 레파토리는 영남의 민요, 아리랑과 서도소리입니다. Q.코로나 이전에 최근 가장 큰 무대에서 부른 곡명은? 기억에 남는 무대는? A. 저의 이름을 걸고 나간 무대입니다. 재작년과 작년에 이은 ‘곽동현 경서도잡가발표회’ 제1탄(2019년) ,제2탄(2020년)을 끝낸 것이 저 스스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내용을 정확히 이해를 해야 암기가 되기 때문에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영화(적벽가)부터 보고 책을 찾아서 읽고, 내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보는 상상력을 동원시켜서 전체 기승전결을 스톨리텔링으로 각인시켜가며 연습을 하니 저절로 외워지게 되더군요. 조조를 통해 인생을 새로 배우기도 했습니다. Q.코로나19 이후 어떻게 국악활동을 하고 있나요? A. 관객을 대면하는 공연에서 비대면으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고 신명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비대면 공연을 통해 관객을 바라보고 선 무대보다도, 저 자신을 바라보고 부른 무대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많은 후배들이 어렵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비대면 공연활동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데. 저에게는 경제적 어려움보다도....리더로서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것이 가장 힘듭니다. 후배들 보기가 미안하지요. 토리스 밴드의 리더로써 많은 생각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교차되는 나날인 것 같아요. 그래도 외부활동의 저하로 시간이 많아셔저 팀원들 모두 소리공부에 열공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국악방송부터, 국악한마당. 국악 관련 방송에 집중하고 있게 되더군요. 무대에서 열창하는 국악인들의 열정과 내공에 많은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저의 창작활동의 근원이 됩니다. 올해 초부터 유뷰 채널 '곽동현' 채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악 애호가들이 함께 해서 많은 관심과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Q.앞으로 국악 장르 방송사에서 국악프로를 맡긴다면 어떤 프로그램을 하고 싶나요? A.민요나 아리랑을 주제로 각 지역 아리랑을 소개하고 따라 부르고 해설을 하는 프로그램을 맡아보고 싶어요. 각 지역별 토리와 사투리는 알고 감상을 하면 더 재미있어요. 지역마다 특성있는 노래도 소개하고, 라듸오도 괜찮고 ,,,,,재미있는 것을 하고 싶어요. 제게는 민요가 제일 재미있는 거지만...지역의 소리와 이론을 공부한 실연자와 연구자로서 그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 민요의 맛을 전해주고 싶어요. Q.전통민요에서 퓨전국악을 향유하다가 몇 년전 ‘대구영남의 소리’같은 향토민요로 돌아가게 된 계기가 있나요? A. 대구사람이 지역에 있는 소리를 너무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5년 전부터 들었던거 같아요. 그때부터 경상도 지역의 민요와 옛 토속소리를 찾아가 채록하고, 무대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방송에서 마을을 찾아가는 리포터로 활동하게 되면서 더욱 굳어졌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지역 민요컨텐츠를 많이 살려야 되겠다구요. 실기와 이론을 갖춘 민요 연구자 곽동현 박사 Q. 경기민요.서도민요.남도잡가.제주민요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는데, 왜 영남민요는 지정이 안되는 건지 문제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아이러니컬하게 근대 조선의 민요학자들은 거의 영남 출신들입니다. 김사엽선생부터.... 연구자 입장에서 이에 대해 논의를 하고 싶습니다. A. 첫째는 아마도 근대가 시작되는 일제강점기 영남에서 국악 스타가 나오지 않아서 그런것 같습니다. 그래야 제자들이 줄지어 들어와서 계보가 만들어지고 전문예인집단이 형성되어야하는데.......예를 들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판소리를 들 수 있습니다. 한말 판소리가 널리 향유되고 1930년대 근대매체 음반과 방송을 통해. 경성방송국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전국에서 제자가 되겠다고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스타가 먼저 나와야 특수전문 예인집단이 형성되고 나서야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영남민요는 전공하고 싶어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지 못한 영남민요는 예능보유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구 지역을 예를 들면 아마도 전국에서 민요학원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모두 경기민요를 가르치는 학원이죠. 학원을 내려면 경기민요나 서도민요 전수나 이수를 받아야 검증이 되거든요. 저 역시 영남민요를 배우다가 한예종에 입학해서 경기민요, 서도민요를 배우다가 서도민요로 이수를 받았습니다. Q. 그러면 각 지역 경기민요.서도민요.남도잡가.제주민요 선율의 특성은 학술적으로 언제부터 어떻게 갈라지나요? 각 지역 토리를 살피면 우리나라 민요의 토리 중 각 지방의 특징을 강하게 드러내는 토리들은 우리 역사상 존재하였던 국가의 수도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 수심가토리이며, 한강이남 옛 백제땅에 존재하는 음악어법이 육자배기토리입니다. 반면에 고려시대,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황해도와 경기도 북서부지역에 존재하던 음악어법이 반경토리이며, 조선시대 수도였던 서울지방의 대표적인 토리가 진경토리입니다. 그리고 그 분포범위가 비교적 넓은 메나리토리는 옛 신라시대 전성기의 강역 안에 널리 퍼져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각 지역의 토리가 서도소리.경기소리.육자배기토리.서우제토리가 국가무형문화재로 등극되었죠. Q. 영남민요 선율의 특성은 학술적으로 어느 토리에 속하나요? 영남민요의 음악적 특성을 살피면, 메나리토리가 가장 많은데,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신라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현재까지 영남의 민요에 대한 연구 실적은 부족합니다. 특히 가장 많이 부른 유희요에 대해 음악적 관점에서 고찰한 논문도 전무한 실정이며, 영남민요의 리듬, 토리, 가창방식 등 음악적 특성 등에 관해 상세히 연구되어지지 않았습니다. 영남지역 경창대회 심사를 나가보면 경연자들 99퍼센트가 경기민요 일색입니다. 영남민요를 부르는 경연자들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민요학원에서도 경기민요 위주로 수업을 합니다. 다행히 현재 영남민요는 지역 예능보유자와 영남민요보존회(정은하), 영남민요연구회(배경숙), 경상도민요보존회(최윤영). 동부민요보존회(박수관), 경기민요 이수자들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구에서는 매년 대구아리랑축제 축제 무대와 대구아리랑전국경연대회에서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영천과 경산에서도.... Q.영남지역에서만 불려지는 특별한 민요를 고른다면? A. 놋다리밟기노래. 옹헤야, 월월이청청. 쾌치나칭칭. ‘아부레이수나’ 줄다리기노래입니다. ‘칭칭이소리’는 경상도의 대표적인 노래로, 유희요 뿐만 아니라 농요나 어업노동요(어로요)로도 많이 부르는데. 특히 고기잡이 배가 만선으로 돌아올 때 부르는 만선 풍장소리와 논매기를 끝내고 돌아오며 부르는 논매고 오는 소리는 일노래이면서 유희요의 기능을 겸하고 있습니다.가사는 ‘칭칭이소리’ 치나 칭칭 나래/친 친친 나래((후렴) 칭칭 소리는 크고 크네 / 얼시구 절시구 잘 놀아보자 간다 간다 나는 간다 / 떨떨 거리고 나는 간다 언문에 어루하야(관문에 달빛이 어두운데) 수원이 적막한데(근심에 차서 적막한데) 초패왕은 초를 장차 / 집우 중에도 잃다 말가 삼산은 발라 청천이요(삼산반락청천외(三山半落晴天外) 이수중년에 백노주로구나(이수중분백로주(二水中分白鷺州) 신작로 널러서 질 걷기 좋고 / 전기불 밝아서 도망개기 좋네 올베는 피어 고개가 지고 / 열무 배추는 찌들아진다 저 해는 져서 산 넘얼 가고 / 우리 부모 고향 생각 발괭이 나네 (그리워 미칠 듯하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 떨떨 거리고 나는 간다 삼산은 발라 청천이요 / 이수야 중년에 백노주로구나 "우리 배가 만선일세”와 같이 만선풍장소리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주인네 마누라 흥분이 나서 술병을 이고 춤을 추네”, "에야 디야차 도장원 났다” 등은 조기잡이배에서 부르는 만선풍장소리(배치기소리)에도 흔히 나오는 관용구입니다. "노자노자.....” 이후의 노랫말은 다양한 지역 및 갈래에서 공유되는 내용이다. 운율은 대체로 4.4조입니다. 누구나 다 따라 부를 수 있는만큼 신명이 오르는 노래입니다. 가사는 서사민요 성격이 강해서 기승전결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잃어버리지 않는,,, 각인이 되는 노래입니다. 재미있는 만큼 영남 지역마다 가사가 다양합니다. 돌아가며 부르다 보면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치나 칭칭나래~'라는 후렴이 중독성이 있어서....영남에서만 불립니다. Q.영남민요에서 가장 먼저 음반작업을 한 민요는 무엇인가요? 첫수만 불러주세요. 가사와 특성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A. 통영농요보존회가 전승하고 있는 ‘어부레이수나’와 영남아리랑보존회가 전승하는 ‘경상도아리랑’입니다. 운율은 4.4.조이고, 불러보겠습니다. 어부레이수나 어부레이수나(후렴) 저 건네 저 묵밭에 / 소도 들고 말도 든다 아해중아 말 몰어라 / 어른중아 시(소) 몰어라 남갑사 붕어댕기 / 펄렁펄렁 펄럭인다 장부간장 다 녹이네 / 일천간장 다 녹는다 어부레이수나 어부레이수나(후렴) 이 빠진 데 박씨 박고 / 코 빠진 데 동곳 박고 눈 빠진 데 불콩 박고 / 귀 빠진 데 신짝 박고 머리 신데 먹칠하고 / 녹음방초 성화시야 해난 어이 수이가노 / 오동추야 긴긴달에 해는 어이 더디던고 / 건너 비탈 좁은길로 아해 하나 올라가면 / 어예 갈꼬 어예 갈꼬 한양 오백리 어예 갈꼬 / 앞산아 당겨라 뒷산아 밀어라 / 임아 임아 정든 임아 이 내 줄을 잡지 말게 / 줄 떨어지면 정 떨어진다 어부레이수나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첫째는 남녀가 함께 어울린다는 뜻이라고 현지인은 말하고. 둘째는 ‘어부레이수나’ 또는 ‘아부레이수나’는 그네가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Q. 잘 들었습니다. 저도 예천에 가서 통영농요보존회 이상휴(예능보유자)선생집에 가서 보존회 사람들이 모여서 어부레이수나를 부르는 것을 보고 반했지요. 독일의 산타첼로 그룹도 '옹혜야'와 함께 이 곡을 불렀습니다. 다른 버젼의 노래이었습니다. 감동이었습니다. 영남민요는 노래 종류도 많은데, 반려견 1200만 시대에 혹 '개'에 대한 민요가 있나요? A.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서 불리는 "개야 개야"라는 노래가 있는데 노랫말은 개야 개야 껌둥개야 / 내가 너를 밥줄 적에 배가 고파 너를 주나 / 배가 부리라 너를 주나 오밤중에 오신 손님 / 짓지 마라꼬 밥을 준다 이 곡은 밤에 몰래 찾아오는 임을 보고 짖지 말라고 개에게 밥을 주는 노랫말인데, 님을 기다리는 여인의 애절한 심정이 녹아있습니다. Q, 재미있네요. 해학성이 두드러집니다. 박사학위 논문에서 분석한 영남민요 유희요의 노랫말의 특징은 다른 지역과 어떻게 다른가요? A.제가 연구한 결과는...영남 유희요 사설의 주제는 놀이, 사랑, 자연, 계절, 세월 등이 있으며, 유희요의 속성상 ‘놀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운율은 모든 갈래에서 4.4(3.4)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며, 그 외 4.3(5.3), 3.3, 3.5, 4.3, 4.4, 5.5 등이 있습니다. 각운은 언어유희요에서 가장 많이 관찰되었는데, 그것은 언어유희요가 노랫말의 재미를 향유하는 갈래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희요의 특성은 특히 짧고 단순한 구조의 곡일수록 각운의 비중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음악적 요소는 단순화되고 노랫말의 전달력에서 잘 구현된 경우이고. 간혹 노랫말에 다른 유희요나 일노래의 노랫말이 섞인다든지, 통속민요나 대중가요의 노랫말이 섞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가창자 개인의 음악적 경험들이 집약된 결과로 보입니다. 영남의 유희요는 지역마다 다른 언어적 방언 특성, 다양한 문화를 담고 있는데, 특히 영남의 놀이문화가 녹아있습니다.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저항이 담겨 있습니다. Q,국악계에서 실기와 이론을 전공한 국악인은 드문 편입니다. 특히 민요 전공자 중 남성 가창자는 희박합니다. 그래서 스승님들과 학계에서 기대가 큽니다. 앞으로 음악활동 계획은? A. 코로나로 인해 외부활동이 줄어들게 되면서. 음반작업에 주력하여 판소리 눈대목 중심으로 집중하여 녹음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통음악에서부터 창작음악에까지 다양한 버젼의 민요를 선보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산타첼로가 편곡한 옹헤야, 아부레수나이는 반주하는 악기에 따라서 부르는 가창자에 따라서 다른 맛을 냅니다. 편곡의 묘미를 알아가는 중입니다. 앞으로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내년에는 욕심을 내서 경기잡가 완창 음반을 내는 것입니다. 경기잡가 12곡 완창. 서도잡가 12곡 완창....매일 잘때마다 사설집을 숙독하고 배게밑에 비고 잡니다. Q. ‘국악아카펠라 토리스’와 ‘곽동현과 슈퍼밴드’ 리더로서 앞으로 국악발전을 위한 계획은 무엇인가요? 구체적으로 답해주세요. A. 대구에서 활동하는 드럼 김민건, 베이스 한태웅, 건반 이지민, 타악 신재승. 아티스트로 구성된 '곽동현과 슈퍼밴드'는 역시나 대구 영남의 소리중 평소 작업을 해보고 싶었던 토속민요를 중심으로 현대화 하는 작업을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판소리 흥보가, '박타는 대목 시리렁실근'은 제가 편곡한 첫 작품입니다. 그리고 코로나로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 작사작곡하고 있는 ‘으랏차차 아리랑’을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대해주세요. 계획은 많지만 실천하기가 어렵더라구요. 토리스는 꾸준하게 앨범작업과 공연활동을 하고 있구요. 요즘은 유튜브 영상컨텐츠 개발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민요나 판소리를 아카펠라로 편곡하는 작업을 꾸준하게 할 생각입니다. Q. 최근에 자극을 준 국악음악이나 소개하고 싶은 곡은? A. 작년에 알려진 이날치의 '범내려온다'는 중격이었습니다. 전세계인에게 우리 판소리를 강하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국악의 무궁무궁한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국악이란 장르를 새롭게 인식시켜주었어요. 신선하고 중독성있는 판소리 버젼으로 코로나를 이기고 있습니다. Q, 저도 자꾸만 보게 되더군요. 우리 민요의 신명성을 높이 평가하고. 옹헤야 같은 민요를 편곡으로 재편성하여 유럽인들에게 널리 불렀던 독일 산타첼로 그룹이 한국에 왔다면 들려주고 싶은 소리는? A. 산타첼로에게 긴아리랑과 구아리랑. 창부타령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우리 한민족이 향유하는,,, 민요에 담긴 정서를... 맛깔나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곽동현이 국악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통해, 국악이 진화해 가는 모습을 멀리서 년년이 지켜볼 수 있었다. 특히 구비전승되는 문화는 사승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승이 끌어주고 도반이 밀어주고 당겨주어야만 높는 언덕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예술의 '예'는 '인간 예'라고 한다. 예술집단 공동체에서 인정을 받아야 머리에 별이라는 훈장을 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스승이나 제자나 마찬가지이다. 제자들이 떠 받을어주어야 사후에도 기념사업회가 생기고 제자들의 계보가 단단해지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매년 없어지는 무형문화유산 도 단위에서 한 두개가 아니다. 전승하는 제자들이 없어서 있는 것도 못 지키게 되는 것이다. 무형문화유산를 전승하는 국악인의 길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그만큼 희생과 고난을 겪어야 하는 험난한 각고의 노력없이는 다이아몬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30여 년을 올곧게 예인의 길만 고집한, 이제 떠오르려는 비상의 날개를 단 곽동현 국악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명창의 반열에 오르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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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더스의 손’ 세계적 바디페인팅 아티스트 김선미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PICK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네번째 인터뷰는 시각예술가 김선미 교수(서경대)이다. 3월 6일부터 19일까지 인사동 마루 아지트갤러리에서는 ‘신의 손’이라는 김선미 교수의 "바디페인팅에 美치다” 출판식 기념 및 사진 전시가 진행되었다. 한편 김선미 교수의 연출로 코로나 극복 기원을 하는 이색 이벤트가 인사동 거리에서 열렸다. "빛깔로 코로나를 보낸다”라는 주제로 13일 인사동 마루 야외공연장에서 바디페인팅 포퍼먼스가 열려 주위의 눈길을 끌었다. 김선미 아티스트를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바디페인팅에 美치다 기미양: 안녕하세요. "바디페인팅에 美치다” 출판과 전시회를 축하합니다. 이번 행사를 마치고 한마디 소감은? 김선미: 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에 미치든, 누군가에게 미치든 평생 하나에 미쳐 산다는 것은 여러모로 행복한 일입니다. 미쳐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이 좋다면 그건 신이 내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20년 코로나19로 1년 넘게 언텍트시대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지난 작품들을 정리해 이번에 첫 출판을 했습니다. 20여년간 작업한 초창기 아트 메이크업과 바디페인팅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Q: 통미분장예술연구소(統美扮裝藝術硏究所)는 어떤 목적을 가진 연구소인가요? A: 현재 살고 있는 동시대인들이 공감하고 저항하는 목소리를 개념미술로 재해석하여 비주얼로 형상화하는 시각예술 연구소입니다. 연구 목적은 '세상을 美로 아우르다'입니다. Q: 통미라는 의미는? A:통미(統美)라는 네이밍은 우리나라 전위예술가 1세대 무세중 선생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이 세상을 밝히는 아름다움의 큰 줄기는 자연이다. ‘자연의 모든 분야를 아름다운(美) 시각으로 아우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럿을 모아 한 한 판이 되게 하는 아우르다의 사전적 의미를 확장하면 통합(統合)의 개념이 됩니다. 모든 예술장르와 소통하고 美로 아우른다. 그래서 ‘통(統)+미(美)‘라는 뜻에서 ’통미‘라고 명했습니다. Q:선생님이 추구하는 작가정신은 한마디로 무엇인가요? A: 태초에서부터 현생 인류로 연결되는 인간을 생각해 봅니다. 현대문명과는 거리가 먼 비문명인, 순수했던 인간의 영혼이 담긴 바디를 통해서 신을 닮은 ‘완벽한(Perfect) 아름다움’을 형상화 하고 싶습니다. 즉 인간의 속성, 반인반신(半神半人)중 신성성(神聖性)을 뽑아내고 싶었습니다. 영적 아름다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Q:인간의 몸에 어떻게 무엇을 표현한다는 것인지요? A:인간의 바디, '살아 있는 몸'을 화폭으로 삼아 신의 모습을 그려내었습니다. 우리에게 신은 바로 자연입니다. 우리의 몸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땅속에서부터 하늘까지 모든 곳에 인간과 함께하는 정령이 존재합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비추어 주는 태양, 바람도 물도 바위. 꽃 한송이 모두 정령입니다. 세상에 모든 곳에는 정령이 있습니다. 작은 조약돌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까지........ 자연계의 수많은 정령들은 우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속에서 사는 고기가 죽으면 인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의 살아 있는 몸에 바위, 나무, 꽃, 나비, 새. 물고기. 사과, 등을 그립니다. 우리는 오래 전 바다물 속에서 태어난 물고기에서 진화를 했습니다. 자연과 우리는 하나의 근원에서 시작된 생명체라는 점에 집중했습니다. Q: 이번 첫 출판은 어떤 내용이 정리되어 있나요? A: 1999년 가을 바디페인팅에 美쳐서 다니던 미술대학 대학원을 때려치우고 한 달 만에 무작정 파리로 떠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쓰듯 20여 년 동안 추구하고자 한 열정들이 분기별로 담겨져 있습니다. 초기 아트 메이크업과 바디페인팅 작품들이 20여년 동안 시대와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변화한 모습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중간에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성균관 대학 박사과정도 수료했습니다. 혼자 바디페인팅을 공부하고 싶거나 수업을 진행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각예술가 입문과정 Q: 국내에서 독보적 존재인 '바디페인팅 아티스트 김선미'가 되는 과정을 소개해 주세요. A: 한 때는 ‘필받다’ ‘미치다’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난 바디페인팅이 좋아서 필 받는 대로 20년을 미쳐 살다 보니, 미용학원에 바디페인팅 수업이 생겨 가르치게 되었고, 민간자격증과 미용대회가 생겨나면서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받는 분야의 전문가로도 살았습니다. 대학원이 생겨나더니 대학이 생기고, ‘교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살았었습니다. 하지만 교수보다는 바디페인팅 아티스트이고 싶었습니다. 때론 바디페인팅 작업을 혼자 하는 것이 어려워 가르치는 것에 집중하던 때도 있고, 무대에 설 수 있다면 돈을 떠나서 무조건 고고하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에이터의 길은 노력해야만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디란 말 그대로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입니다. 당연히 헤어스타일에서부터 발끝(발톱 색깔)까지 모두 디자인해야 합니다. 모델에게 입힐 옷을 직접 구상해서 만들고, 어느 때는 특수분장도 해야 합니다. 저에게는 건축물 이상입니다. 숨쉬고 움직이는 건축물,,,,, 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헤어와 에어브러시를 가르치면서도 난 여전히 자유로운 바디페인팅 아티스트이고 싶습니다. Q: 작가의 길을 가면서 어려운 점은? A: 외국은 크리에이티브 한 인재들을 발굴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적절한 기회도 제공해 주고 확장해갑니다. 세계는 가파르게 변해가는데, 한국은 2016년 '메이크업 국가자격증'이 실시된 이후로 급격히 크리에이티브 한 아트 메이크업과 바디페인팅 자격증 교육, 대회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과 작업하려는 동료 작가를 만나기도 힘들어졌습니다. Q: 팬데믹 이전 작품전보다 오늘 작품전에서 달라진 점은? 인사동 거리에서 퍼포먼스 작품은 인상적이었습니다. A: 시대에 맞게 작품도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예술은 팬데믹을 전후해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미래에는 자연과 합일해야 살 수 있기에.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각인하기 위해 신화를 소환했습니다. 대리석으로 만든 여인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피그말리온 처럼, 바디페인팅을 통해 자연의 신을 소환했고, 그것이 팬데믹 시대에 문명과 충돌하며 저항하는 모습을 퍼포먼스로 표현했습니다. 거리에서 퍼포먼스를 바라보는 관객들도 전체 작품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Q: 이번 출판 전시회에서 뮤즈로 분한 모델은 누구인가요? 작품을 쳐다보면 이국적 이미지와 아름다운 눈동자는 잠시 신화 속 이야기로 안내되는 것 같습니다. A: 러시아에서 온 금발 미인 소녀는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나의 뮤즈로 활동한지 강산이 한번 변했습니다. 한국에 온지 10년 되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한국이 좋아서 정착한 친구입니다. 김선미 작가론 Q: 예술이란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A: 예술이란 예측불허라는 자연 앞에 살아가야 하는 약한 인간이 다음 세대의 계승을 위해 열악한 환경에 저항하며. 신에게 의탁하기 위해서 신을 찬미하는 몸짓에서 기원했습니다. 저의 예술세계는 그런 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신화에서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Q: 그래서 인간은 신화를 만들고 목적에 의해 신을 소환하기도 합니다. 선생님 작품에서는 누구나 신의 모습을 본다고 합니다. 여자는 여신이 되고 남자는 남신이 되고....어떤 사람은 꽃이 되고, 유니콘이 되고 그렇게 우리는 신의 모습을 닮고 싶어 하지요. 선생님 작품은 그대로 빨려 들어가서 어느새 우리는 신화 속에서 걷게 됩니다. 전시장을 나와도 그 감동은 오래 오래 갑니다. 그런 신성한 감동은 상처 받았던 자신을 치유시키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신화에서 모티브를 찾게 된 배경은? A: 저의 작품은 신화에서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았던 신를 소환하여 인간의 몸에 숨어있는 신의 모습을 찾아서 형상화 하고자 하는 작업이지요. 문명사회를 이루기 전 공동체 사회에서, 신화는 살아있는 역사이었습니다. 자연을 경외하고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 시대는 모든 만물에는 정령이 있다고 여기면서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신이 있는 시대에서는 마을에서 굶어죽어 나가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노숙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Q: 선생님 작품을 관객의 시각에서 해석한다면. 문명의 이기 속에서 점차 빠르게 잃어버리고 있는 인간성 회복을 찾기 위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해석이 될까요? 큰 범주에서는 인공(Atificial)이 아닌 자연(Natural)을 의미하고, 작은 범주로는 문명에 의해 이기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문명의 이기’에 저항하는 작업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문명이 정착하기 전 인류 공동체가 공유했던 '아름다운 원시성'을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느껴집니다. A: 모든 문학이나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성 회복을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누구나 마지막에는 신을 찾습니다. 누구에게는 어머니가 신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작품속에서 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Q: 21세기에 들어서 인간은 더욱 고독하고, 개인과 개인의 이기적인 관계에서 집단과 집단의 이기로 치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욕망이 극대화하면서 자연 파괴의 결과로 코로나라는 비싼 대가를 치루게 되었습니다. 출판과 함께 공연한 "빛깔로 코로나를 보낸다”라는 퍼포먼스 연출 기획의도는 무엇인가요? A:결국 코로나라는 팬데믹도 문명의 이기라는 무기를 가진 인간의 빗나간 욕망으로 예측된 대참사입니다. 자연 파괴는 야생동물에서 가축들까지도 구제역으로 참살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지속되는 세계를 멈춘 팬데믹 상황에 지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밝고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화려한 색상을 강조하여 "빛깔로 코로나를 보낸다”라는 의식을 표출하고자 했습니다. 이정민 무용수의 퍼포먼스, 서승아 무용가의 지신무로 코로나 극복을 간절히 표현했습니다. Q: 분장예술세계에서 김선미 작가는 국내에서 가장 활동이 두드러진 "앞장서 가는 전위예술(前衛藝術)의 중심에 선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A: 과한 평가입니다. 저는 그림과 바디페인팅 아트의 세계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돈을 벌면 미국 가서 특수분장 배우고, 세계경연대회 나가고,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캐나다, 미국, 싱가폴 중국, 몽골, 러시아 등을 다니며 바디페인팅을 하는 동료 아트스트의 작품을 보고 자극을 받고 새로운 작업을 즐기며 아티스트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Q:가장 영향을 주신 스승은 누구이신가요? A: 전위예술가 무세중 선생이십니다. 소개하면 "1937년 5월 23일 서울에서 출생하신 무세중은 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로서 1950년대부터 대학가의 저항문화였던 탈춤을 처음으로 정리하여 소개했다. 또 1969년 서울 YWCA 강당에서 공연한 ‘민족극회 남사당 제50회기념공연’은 세간에 묻혀있던 ‘남사당’이라는 민중들의 밑바닥 예술을 세상 안으로 끌어들여 선보인 장본인이다. 한국에서의 전위예술 공연은 물론 독일과 미국 체류를 통해 한국 전통예술과 서구 전위예술의 접목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등 전위예술 공연만해도 국내외에서 500여 회가 넘는다. 특히 독일에서 발표된 "제3세계 연극論(1977, Munchen 세계 자유 연극제 국제 심포지엄)”은 서구 연극인들에게조차 획기적인 논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세중 선생님은 1982년 독일에서의 귀국 후 첫 공연 작품 "反 그리고 통·막·살 (TongMagSal)”은 남북통일을 주제로 한 대표적 한국 전위예술의 전형으로 꼽힌다. 그의 전위예술의 특징은 그 이론적 틀을 한국의 전통사상과 민중예술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50년 동안의 전위예술작업을 통해 이제 저자는 한국전위예술의 이론과 사상적 배경을 텍스트화 하여 정리를 하고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시도와 결과들은 그의 생활과 예술행위의 일치성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 50년'에서 증명하고 있다. 한국 전위예술의 손꼽히는 춤사위인 ‘무사위’는 선생님의 천지인 사상이 녹아낸 창작물이다." Q:앞으로 작가로서의 행보는? A: 저는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예술은 자위행위요. 다 똥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아티스트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일캠퍼스에서 사람캠퍼스로 바꾸고 '살아있는 예술'(Living Art) 해왔지만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소통하기 위해 이제 밖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메시지가 있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 분야 문화예술과 만나서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을 하고 싶습니다. 국악계를 뒤흔든, 세계적 평가를 받은 이날치 밴드와 함께 하는 바디 페인팅 아트같은....... 시각예술은 어떤 예술 장르와도 배합이 자연스럽습니다. 초대합니다. 코로나가 끝나는 날, 마스크를 벗고, 새로운 옷을 입듯, 특별한 메이크업을 하고 지인들과 함께 페스티벌을 즐기던 행복했던 그날들이 다시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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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국어 교육자, 박승의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이메일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세 번째 인터뷰는 사할린 한국어 교육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전 사할린국립대학 한국학과 박승의 (1941년 생)교수를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박승의 교수는 한국어교육에 힘쓰고. 사할린 한인 연구에 진작해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가 담긴 3대에 걸친 가족사가 자서전으로 출판되어서 관심을 받고 있다. 며칠을 밤새어서 들어도 끝나지 않는 살아있는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박승의 교수의 사할린 디아스포라 이야기는 다음 2편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이번 1편에서는 사할린 한국어 교육 활동을 중심으로 질문을 하고자 한다. 기미양-안녕하세요. 사할린에서 2010년 파주로 영주귀국하신지 올해가 11년이 되시네요.이번에 국외동포 체험수기공모전에 '사할린에 팔려간 이쁜고모'로 첫번째 KBS한민족상 수상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재외동포뉴스와 연합뉴스 및 국악신문 등 사할린 새고려신문에 주요 뉴스로 나갔습니다. 수상소감 부탁드립니다. 박승의-안녕하세요? 심사위원님들께 저의 소박한 글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할린 한인 1세대는 혼자 또는 가족과 사할린에 강제동원, 강제이주하여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목숨을 담보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탄광과 산판에서 모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건강의 악화와 자녀의 양육 및 교육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모국귀환의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의 지원 대상자들은 영주귀국을 선택하느냐, 사할린에 잔류하느냐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출생한 사할린 한인은 영주귀국 지원대상에 제외되기 때문에 또다시 형제자매와 자손들과 헤어져 살아야 합니다. 이산의 이산은 세대를 거치면서 반복됩니다. 기존 기록에서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역사적 측면에서 주로 남자들이 강제동원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수만명의 여성들이 남편을 찾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후토(사할린)로 가서 모진 고통을 이겨낸 사실을 묘사한 글은 전혀 없습니다. 작은 글이나마 여성들의 공적을 공평하게 평가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잊어서는 안되는 뼈아픈 역사를 자손들에게 남겨주고 싶었습니다. 러시아에 살지만 뿌리를 잊지말자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일단 이 수상 소식이 여러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다시 한번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역사가 주목을 받고 이슈화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KBS방송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Q:박승의 교수님은 사할린2세로서 1945년 이전에 태어나셔서 사할린1세의 자격으로 한국에 영구귀국했습니다. 언제 어떻게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서 사할린에 강제동원 되었는지요? 처음에 어느 지역으로 배치되었나요? A; 밀양 박씨 아버지 고향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입니다. 1939년 결혼 후 한달 반만에 강제모집으로 가라후토에 가게 됐습니다. 그 당시 오찌아이 (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습니다. 이후에 어머니는 충청남도 금산에서 태어나셨고 임신 상태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경유해서 가라후토에 오셨습니다. 1945년에 해방되셨으나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시고 끝끝내 타국의 땅에 파묻혔습니다. 한국에 와서 조상의 뿌리를 찾기 위해 고향에는 2번 방문했습니다. 자세한 가족사는 최근 출판한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에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Q:보내주신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저자: 박승의)는 잘 읽었습니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단숨에 읽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메세지는 ’조선인 박승의‘, 다까하라 가쯔요시, 보꾸 다까하라 유리 알렉산드로비치, ’대한민국 박승의’라는 이름으로 살아야만 했다는 부분입니다. 구체적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일제강점기 당시 저는 사할린으로 강제징용 당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일본국적을 지닌 조선인으로 출생을 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방이 되었지만 가라후토에 억류된 조선인으로 아버지의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무국적 조선인으로 살다 소련 국적을 받게 되고. 다시 러시아 국적을 받게 되고 러시아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78년을 살면서 6번이나 국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로........일제시대에 태어나서 3년동안 일본 국민으로, 1945년 해방 후 무국적자로, 1958년에 북한 공민으로, 1970년대 소련 국적자로, 1990년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 국민으로, 그리고 2010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삶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는 일본 아이들과 놀면서 일본말과 더불어 일제 사상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1948년 조선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 받았으며, 2009년부터 대한민국 자본주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제도가 바뀌면서 이름도 변해야 했습니다. 다카하라 가쯔요시에서 박승의로, 박승의에서 박유라로. 의사소통도 세 민족의 언어로 하였습니다. 일본어, 러시아어, 그리고 한국어로. 그래서 나 스스로"나는 누구냐?”란 질문에 답할 때 머리가 터질 지경으로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타 지방에서 살면서 우리 민족의식과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 부모들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사할린 영주귀국자들은 대다수 결혼도 같은 동포끼리 했으며 현재 러시아에 남아있는 자녀들도 러시아인과 결혼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강한 학구열을 가지고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이기도 합니다. 평생 러시아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한국 음식을 고집해 먹는가 하면 다른 민족들에게 한국요리 조리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Q: 지난 신문방송에서 ”한글을 알아야 한민족 정신을 지킨다" ‘사할린 한국어 운동가 박승의’ 라는 짧은 다큐를 보았습니다. 사할린에서 한국어 교육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서로 동질감을 느껴 힘을 나누면서 하나로 뭉칩니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조국이 아닌 해외에 살며 한민족 정신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세계화 추세에 맞추어 세계 한민족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지속적인 협력이 필요합니다.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서로 힘이 되어주고 한민족의 인식을 더욱 강화시켜야 하므로 이 측면에서 한국어 교육 및 민족교육은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한국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많이 발전하며 잘 사는 것이 국외 동포들에게는 무한한 힘이 되고 자부심을 갖게하는것임은두말할나위없습니다.저도 1988서울올림픽 이후 사할린에서 '한국 붐'이 일어 났을 때 한국어 교육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89년에 여러 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으며유즈노사할린스크시 한인협회설립 초기부터 회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후 1992년에 6개월간 서울 연세대 어학당을 마치고 사할린대학교 한영과에 취직하여 전임 교수로 거의 20년 동안 자라나는 4세대의 교육과 교양에 모든 정성과 힘을 바쳤습니다. Q: 2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할린한국어교사협의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A; 1992년에 사할린주 한국어 교사 협의회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이 협의회(회장으로 이옥자, 공노원, 김순희, 박승의, 코르네예바 이브)에서 한국어 지도에 필요한 교재 구입과 공급 그리고 한국어교사 연수회를 주관하고 일반 학교 학생들의 한국어 경시 대회를 매년 조직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인단체와 연합하여 대한민국 교육부에 건의하여 사할린에 교육원을 설립하도록 힘썼습니다. 한국어 교육 활성화를 교사협회는 사할린한국교육원과도 밀접히 사업하고 있으며, 한국교육원은 한국측에서, 협회는 러시아측에서 사할린에서 추진하고 있습니다. Q: 사할린 한국어교육을 위해 사할린 동포사회는 어떤 일을 해오고 있나요? A; 사할린 한인 사회의 언어 문제는 역사적 여건에 의해서 이루어진 언어의 간섭과 접촉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특이합니다. 일제때 사용하던 일본어가 한국어와 러시아 어 사이에 끼어들어 있습니다. 한인1세는 모국어인 한국어, 생활어였던 일본어, 그리고 러시아어를 구사합니다. 이들의 한국어 읽기 쓰기 능력은 떨어지며, 러시아어도 정확한 구사는 어려운 듯합니다. 한인 2세 가운데 1935년 이전 출생자는 부모에게서 배우고 들은 한국어를 구사하며, 학창 시절을 일본어로 보냈고, 러시아어를 정식으로 교육받기 시작한 세대입니다. 이들 가운데 대략 1941년 이후 출생자는 공식 언어생활을 러시아어로 한 세대입니다. 가정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를 쓰기도 하였고 투철한 민족 의식을 갖지 않거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생활하지 않은 사람은 한국어를 잘하지 못합니다. 조선학교가 있었던 1946년부터 1964년 사이에 교육을 받은 사람은 한국어를 잘합니다. 그러나 1964년부터 25년 간 한국어 공백 기간에 청소년기를 보낸 30, 40대들은 한국어를 잘 구사할 수가 없지만, 능숙해진 사람이 많이 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한인 3세는 공식적인 언어생활을 러시아어로 하여 모든 생활이나 사고 방식이 러시아인과 같습니다. 한국어를 잘 쓰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란 이들은 당연히 한국어를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은 외국인(러시아 인)에게 하는 한국어 교육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Q: 사할린에 강제동원으로 끌려온 경북 의성 출신이고, 당시 지식인으로 활동했던 춘계 '류시욱' 선생님이 남기신 한글 일기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셨는데, 어떤 작품인가요? A; 나는 춘계 류시욱의 '산중 반월기 (山中半月記)'를 여러번 읽고 러시아어로 번역했습니다.춘계 류시욱은 1920년 5월 14일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속암동 고실촌 류성룡 선생 집안에서 13대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류시욱은 젊은 시절에 문예 창작과 사상활동을 벌이다가 서대문형무소와 사상범 교화보호소에서 옥중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사상범으로 출옥한 조선인들에게 강요된 징병을 피하기 위해 류시욱은 가라후토(현 사할린)로의 동원을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자를 고향에 남겨두고 산업보국대원으로 찍혀 마을 사람 20여명과 함께 사할린으로 끌려가게 되어 가라후토 나이부치 탄광에 도착한 때가 1941년 2월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으나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조선학교의 교사로 류춘계 선생은 돌린스크 구역에서와 돌린스크시에서 교원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조선어 문법” 및 "조선 문학”을 가르치셨습니다. 조선학교 폐교 후 '세월은 흘러가고 과거의 꿈은 사나운 폭풍에 갈가리 찢겨 쓸쓸한 유폐의 암흑' 속에서 류시욱의 시절은 무의미하게 지나갔습니다. 희망도 기대도 없이 그는 인생의 반 이상을 이국 땅의 노동자로 살다가 1962년에 노동 현장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춘계 류시욱이 1957년 9월 1일부터 15일까지 15일간 사할린 "크라스노고르스크 임산 사업소 직속인 임동화(林東樺) 브리가다가 새풀치러 가는 곳에 식모(食母, 밥을 해주는 사람)로 따라가 쓴 일기다”(저자의 자서에서). 저자가 1957년 9월의 보름을 지낸 사할린 크라스노고로스크의 산속은 외부와 100리 고립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단절된 허술한 풍막은 고향과 수천 리 떨어진 사할린 섬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갇힌 삶과 닮아 있었습니다. 목적 없는 삶 속에서 하루살이하는 매일 매일의 끝없는 외로움 때문에 그는 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동료들이 새풀을 치러 나간 후 혼자가 되면 구멍 뚫린 천막 앞으로 나와 소통에 대한 소원을 페이지마다 채워 나갔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토의하며 일제의 강압과 이데올로기의 장벽으로 생이별하게 된 가족과 이른바 내적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던 그 일기장을 펼칠 때마다 고향의 ‘한오리 신작로’가 뻗어 나왔을 것입니다. 그는 정직하게 사할린으로 끌려가 소련 체제에 갇혀버린 평범한 조선인들이 수없이 우물거렸을 속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일기는 개인적 회고를 넘어 자신이 동원되었을 시기를 전후한 시대와 인물들에 대해 날카롭고도 풍부한 정보들을 제공해 주는 가치있는 사료가 되었습니다. Q: 춘계 선생 외 사할린의 한인문학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사할린 한인의 문학은 CIS 한인들의 문학과 같이 상당히 오래되고 견고한 전통을 자랑하지는 못합니다. 이는 러시아에서의 거주 기간이 겨우 70년이이고,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도, 그리고 사할린의 초기 한인 이주민들이 일본 당국에 의해 남한의 시골에서 사할린으로 동원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다는 사실로도 설명됩니다. 이것은 특히 전후 첫 시기에 사할린에서의 지식인 집단 형성에서도 나타남을 의미합니다.'사할린의 한인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김증손과 아나톨리 김이 사할린에 거주하며 사할린에 대한 글을 썼던 작가들이지만, 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고려인)이었고, 그들의 작품은 CIS의 모든 한인 디아스포라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할린 한인들 중에서 우리는 장윤기와 허로만의 작품을 알고 있으며, 사할린의 문학 전통에 중요한 영향을 주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에서 유명한 일부 다른 저자들(양 세르게이)을 알고 있습니다. Q: 사할린 한인으로서, 교육자로서, 사할린한국문화원과 교육부에 요청을 하고 싶은 것은? A; 사할린의 한국어 교육은 사할린 한인 1세의 영주귀국으로 인한 한인동포수의 감소, 한국어교사 부족 및 고령화 현상 등으로 점차 악화되는 추세입니다. 말을 잊어버리면 다음에는 고유의 문화를 잊게되고 결국에 가서는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할린 한국교육원에서는 한인동포 청소년들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매년 한국어 교사를 대상으로 교원 연수를 한국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모국연수 기회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에게 한국연수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사관, 교육원, 한인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한민족 전통문화를 동포들과 현지 러시아인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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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으로 남북을 잇는 최신아예술단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Pick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두번째 인터뷰어는 함경북도 청진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함경북도예술단에서 활동한 최신아예술단 최신아 (1969년생)단장을 국악신문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기미양-안녕하세요, 먼저 통일부에서 통일교육위원으로 위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최신아 선생님, 북에서 대한민국에 온지 얼마나 되었나요? 최신아-네, 감사합니다. 아마도 북한에서 오신 분들 중 통일교육위원으로 임명을 받은 사람은 제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 온지 10년이 안되었지만 제가 이룬 성과 중 가장 기쁜 일 중 하나입니다. 2012년 봄에 대한민국으로 왔습니다. 처음에 와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Q.북한에서 한국에 온 이유는? A. 저는 함경북도 예술단 예술 감독을 26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는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 탈북을 했습니다. 우연히 중국에 나왔다가 인터넷에서 남한 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한 땅에 평양예술단이 있다고 해 보니 진짜 순수한 북한예술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보장받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짦은 순간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첫째 남한에 가서 진짜 최승희 무용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둘째 북한에서 예술가는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저의 이름을 걸고 나만의 고유한 예술세계를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셋째.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귀멀고 눈멀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과 함께 자유민주주의가 있는 남한에서 자유인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Q.중국에서 직접 한국에 왔나요? 오면서 힘든 고비를 어떻게 넘겼나요? A. 네, 저는 2009년 북한에서 여권을 떼고 중국에 와서, 태국으로 넘어가서 3개월 후 한국에 가기 위해 죽음의 사선을 넘고 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펼칠 수 없는 순수한 예술을 위해, 저희 예술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났는데, 당시 검열이 너무 심할 때인지라 검열관이 내 앞에 서자 갑자기 말문이 막혀서 벙어리 역활을 했는데 그게 통하더라고요. 하늘이 도우셨다고 기도를 하면서... 곤명으로 와서 산을 6시간 타고 죽기 살기로 태국으로 건너 갔습니다. 거기서방콕을 거쳐 한국으로 무사히 입국하였습니다. 가파른 산 비탈길을 넘어야 하는데 당시 중국에서 만나서 같이 도망을 나온 어린 친구가 더는 못가겠다고 그냥 여기서 죽겠다고 땅바닥에 주저 앉아서 포기할 때, 같이 죽더라도 한국에 가야 한다고 그 친구를 부추켜서 붙잡고 오느라 땀이 어찌나 비처럼 쏟아지는지....간신히 고개를 넘고 넘어 태국까지 무사히 건너왔습니다. 거기서 대한민국으로 왔습니다. 드디어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자유의 나라로 왔습니다. Q.나중에 큰 따님 강나라는 북한에서 어떻게 탈출했나요? 남겨진 북한의 딸은? 가슴 아픈 질문을 드리네요. A. 제가 한국에 와서 3년 만에 맏딸을 데려왔는데요. 늘 가슴 한구석에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갈망하던 끝에 브로커를 통해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아직 오지 못한 막내딸 때문에 밤에도 제대로 못자고 있지만 함께 살 그날만 그려봅니다. 맛있는 음식 먹을 때마다 목구멍에 잘 안 넘억갑니다. 멋있는 옷도 사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꿈에서는 가끔 만나서 붙잡고 울고...자식 그리운 것은 말을 다 할 수 있을까요? Q.북한에서 무용가로만 활동하다가, 처음에 남한에 적응하기 얼마나 어려웠나요? A. 한국에 와서 3년 동안은 막막했습니다. 무용을 포기하고 자신을 치유하고자 하루종일 창가에서 십자수를 시작했습니다. 힘들게 한국에 왔지만 하나원을 나오니 직업이 없는 실업자가 되더라구요, 그래도 북한에서는 완벽한 무용가였지만 여기서는 그걸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무용을 포기하고 집에서 십자수를 하며 나 자신을 위로하고 식당에 나가서 알바로 생활비를 벌면서 살았습니다. 첫번째로 답답한 것은 이질화 된 남한의 문화극복이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언어 소통도 힘들고 무엇을 사려고 해도 말(표현)이 너무 달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너무나 없었습니다. 북에서 온 사람 중 주유소에서 전화 받는 일을 하다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1달도 못 버티고 식당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 분도 많습니다. 돈을 북한에서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빈손으로 왔는데 저희한테 주어진 것은 오직 실업과 빈곤이었습니다. 좌절도 했고 다시 북에 가고 싶은 생각을 하루에도 열 번씩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북한에서 태어나서 예술 활동을 하면서 남한에 와서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거든요. 지금은 SNS를 통해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격려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Q.탈북후 다시 무용가로서 기회가 주어진 것은 언제인가요? 대한민국에 와서 꿈은? A. 제가 2015년도에 7월에 한통의 전화가 오면서 그때부터 무용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국악방송국에서 진행하는 '국민대통합 아리랑'공연에서 전국 순회 공연에출연하면서 저라는 사람을 알리게 했고, 그로부터 최신아예술단 창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에는 강남문화재단이 주최하는 759회 목요상설무대에서 ‘아리랑 아라리요 북에 보내는 편지‘를 발표하게 되어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지역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한 기획공연을 통하여 많은 관심과 호응을 얻었습니다. Q. ‘최신아예술단’을 창단하시게 되는 계기가 궁금합니다. 소개도 해주세요 A. 최신아예술단은 2015년 11월에 창립됐습니다. 2012년 4월에 하나원 나와서 3년후 국악방송국 모 간부가 방송출연에 나와달라고 해서 북한에서 경력을 밝히고 난후 국민대통합 아리랑에서 장구춤을 선보인 후 격려와 용기를 받고 결심을 했습니다. 저의 이름 세 글자를 걸고 최신아예술단으로 만들어 현재까지 공연하며 오고 있습니다. 전통무용을 전공으로 한 대학 졸업생들로 오디션을 통해 5명의 인원으로 시작하였습니다. 현재는 무용을 전문으로 배웠던 분들도 계시고 또 대한민국의 살풀이 이수자분들도 계시고 초등부 학생들도 계시고 취미반도 있고 성인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용을 정말 너무나 하고 싶었는데 체격이 안되거나 여러 가지 조건으로서 못했던 분들의 꿈을 키우기 위해서 저에게 배우러 오기 때문에 "최신아 무용연구소”라 하면 정말 대한민국에 없는, 한 동작 한 동작 체형에 맞게 연구하면서 배워주는 연구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현재 문하생들은 글로벌하게도 중국 유학생부터 조선족, 일본, 캐나다, 그리고 한국분들. 탈북인들을 대상으로 지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방에서도 많이 오고 계십니다. 이제는 최신아무용연구소로 발전시켜서 현재는 예술단과 무용연구소를 겸하고 있습니다. 우선 남한에 오신 북한 출신 예술가들과 소통을 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북한무용이나 최승희무용에 대한 연구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Q.처음 남한에서 섰던 첫 무대는 언제 어떤 무대인가요? 이후 특별한 무대는 A. 영광스럽게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아리랑 명인 이춘희 명창과 남도잡가 신영희 명창과 함께 하는 '2015국민대통합 아리랑 순회공연'을 성료하고, 2016년에는 괌에 초청돼서 북한무용을 보여주는 특별한 공연을 했고, 2018년에는 인도에 가서 ‘남북의 아리랑’ 주제로 투어공연을 하면서 북한무용의 진수를 알려왔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최근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하는 2019년 제3회사할린아리랑제입니다. Q.기사를 검색하니 최근 해외공연으로 사할린에 갔는데? 어떻게 해서 사할린아리랑제에 가게 됐나요? 북한 출신은 안보상 북한과 가까운 사할린을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A. 그해 4월 이미시문화서원(좌장:한명희) 주최로 열린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추념 음악회'에 최신아가 이끄는 최신아예술단이 출연해서, 선보인 최승희의 '장고춤'을 사할린 동포들이 본 것이 이번 초청의 기회가 됐습니다. 그 중 한 가족이 고향이 북한이라고 합니다. 이후 사할린 동포사회에서 꾸준히 아리랑을 알려 온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장)에게 사할린 동포들이 부탁해서, "사할린 동포들이 최신아 씨를 무조건 초대해달라고 했다"고 전해 듣고 가게 되었습니다. 가보니 북한이 고향인 분들이 적지않게 계시더군요.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났지만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시는 고난을 위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Q.2019사할린아리랑제 공연에서 어떤 작품을 선보이었나요? A. 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 기획 측에서 북한의 대표적 무용 '쟁강춤' 선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북한 고유의 민족성이 담긴 쟁강춤은 북한 무용의 꽃입니다. 귀신을 쫓고 복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손에 부채를 들고, 손목에는 방울을 달아 '쟁강쟁강' 소리가 나는 '쟁강춤'은 최승희의 '무희춤'으로부터 이어져 온 대표적인 북한무용입니다. 남한 전통무용에 비해, 러시아 예술만 접해 온 동포들에게 우선 북한무용은 박자나 호흡 속도가 러시아 무용과 거의 비슷합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 한국 전통무용과 북한무용이 한 무대에서 이루어져서 감동이었습니다. 한국무용가 영덕에서 오신 김옥순 무용가의 전통무용의 정적인 살풀이춤과는 대조적이어서 조화가 되었다고 봅니다. 다음에도 또 와 달라고 했습니다. 저 자신도 관객의 호응과 열기가 전해져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Q.70년 동안 우리는 남과 북이 갈라져 있다. 북한 무용가로서 사할린아리랑축제에 다녀왔는데, 예술가로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A. 북한무용가로서 최승희 선생님이 최초로 사할린에 공연 갔는데, 제가 또 두 번째로 최승희 선생님의 뒤를 이어서 사할린에 가서 공연하고 왔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북통일에는 동포사회의 역활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이 "우리 가족은 북과 남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북에 공부하러 간 자식들을 마음대로 오고가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만나는 길은 남북통일 밖에 없다. 우리는 갈라져 있지만 하나의 민족이다"라고 하시면서, 저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리셨습니다. 남북을 잇는 예술가의 길을 가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습니다. 제가 북한무용을 알리는 길도 통일에 기여한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한무용을 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꿈이 더 확실해졌습니다. 북한에서 무용가 입문경위 Q.언제부터 무용을 시작했나요? 계기는? A. 저는 평양에서 알아주는 예술가의 집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배구를 좋아해서 초등학교에서는 스포츠 소조 활동을 하였습니다. 저희 학급이 2중 영예 붉은기 학급이 되어 배려로 평양학생소녀궁전 가야금 소조에 다니게 되었는데 제가 손가락이 아프다고 복도에 나왔다가 신명나는 장단소리가 나서 호기심으로 찾아 간 곳이 무용소조였습니다. 그러다 그 다음 해 우리 가족은 청진으로 추방을 당해서 지방으로 내려와 예술대학에 월반으로 입학해 본격적인 무용가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3살입니다. Q.해방후 남과 북은 민속예술도 이질감이 생겨났습니다. 북한 민속무용은 전통적 민족무용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고 시대의 목적에 따라서 재창조 되어 민족적 색채를 지닌 현대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무용은 빠르기나 호흡이 전통무용보다 훨씬 빠릅니다. 재창조 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체제 나라 중 영향을 받았나요. A. 북한은 1950년 이후 가장 영향을 받은 무용은 우쿠라이나 발레입니다. 남한은 현대무용 하는 분들이 따로 있고 발레 하는 분들이 따로 전통 무용하는 분들이 따로 있어요. 남한은 더운 지역이다 보니까 빨리 추면 덥지 않아요. 그러니까 온유하게 천천히 부드럽게 그냥 우아하게 부드럽게 춤을 추지만, 북한은 아주 추운 지역이어서 가만히 있으면 춥기 때문에 항상 뛰어야 되요. 러시아처럼 발 동동 구르며.... 그런 식으로.... 춤이 역동적이고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경쾌한 춤이 나왔기 때문에..... 전래되는 놀이문화를 봐도 남과 북의 차이점이라 하면 남쪽은 따뜻해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춤사위가 살아있고, 북한은 추위가 강하니 강렬함과 역동적인 춤사위가 다른 것 같습니다. 북청사자놀음이나 밀양백중놀이를 비교해 봐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Q.(남한과 비교해서) 북한무용의 특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북한무용은 당의 문예정책에 의해 '민족적 형식과 사회주의 내용'을 주입시킨 시대적 변용에 의해 새로이 창출되었다고 하는데, 예를 든다면? A. 그래서 전 인민에게 노동을 장려하는 천리마 운동을 하는데 신나는 박진감 있는 박자가 어울리지요. 남측이 계승하고 있는 전통무용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요. 북한은 "인민의 민족적인 생활풍습과 정서가 짙게 반영되어 있는 예술형식의 하나”로 무용예술을 정의하기 때문에 민족무용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남한무용이 자신의 의도와 감성을 표현하기 위함이라면, 북한무용은 당에서 내려온 문예정책 안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예술적 사고의 확장을 위한 다양한 주제나 느낌을 표현하는 활동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로 이루어진 예술무용에 대한 심미안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북한무용이 탄생한지 올해로 70년이 됩니다. 북한학으로 보지 않고, 시대적 문화변용(Acculturation)에 의한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Q.북한무용을 한마디로 한다면? A. 북한무용은 한마디로 말하면 '최승희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남북이 갈라지고 나서 북한은 사회주의로 길을 가면서 예술도 시대적 변화에 맞추어러시아 예술을 수용했습니다. 1950년대부터는 우리 전통무용을 근간으로 한 우크라이나 무용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빠른 반주에 맞추어서 동작을 크게 하면서 우화함과 세련된 춤동작을 창작하여 왔습니다. 추운 지방의 특성을 살려 경쾌함과 역동적이며 빠른 톤으로 춤동작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북한 무용수들은 발레에서부터 모던댄스는 기본동작으로 배우고, 한국 전통무용을 전공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1960년대는 발레 기본과 최승희 선생이 정리한 '조선무용기본'을 통해 무용수들을 훈련해 왔지만, 1970년대 이후부터는 변화가 일어나서 '민속무용기본'을 만들어 무용수들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춤 연구가 정병호 교수는 북한무용에 대해서 "대체로 움직임이 기계적이고 절도가 있으며 동작이 크고 빠른 동작이 많으며, 목이나 손목 동작은 유난히 각을 많이 만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Q.무용가로서 가장 존경하는 무용가는 누구인가요? A. 제가 가장 존경하는 무용가는 예전에도 현재도 '최승희'선생님이십니다. 일제강점기 조선무용을 전세계에 알린 세계적 예술가이십니다. K-한류 1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동양인으로서 일단 쭉 뻗은 큰 키와 섬세한 맵시, 서구적 마스크와 유연한 품세를 그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 나와서 더욱 자세하게 알게 된 보살춤 같은 창작작품은 환타지를 넘어 신비주의를 보여줍니다. 북한 무용의 발달 과정은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일제시대부터 이어 온 신무용으로서 조선민족무용과 서양식 무용을 근간으로 당의 목적과 필요성에 의해 재창조 되고 있다. 1960년대 와서는"민족적인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으라”는 당의 문예정책에 부합하는 민속무용으로 개발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부터는 혁명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북한무용을 이끌어온 '피바다식 가극무용'이 공연되면서 지금의 북한민속무용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Q.북한에서 무용가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A. 저는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을 모시고 무대를 한 적도 있습니다. 북한 전국무용대회 솔로(독무) 무대에서 15년 동안 1위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엇이든지 1등을 해야 하는 성격입니다. 다행히 달리기 수영 등산 등 대회에서 늘 상위권을 할 수 있는 체력을 타고 났습니다. 부모님께 감사하죠. Q.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무용을 사제자로 전수받은 탈북 무용가 최신아라는 타이틀이 붙고, 이병옥교수가 최단장을 최승희 무용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해주셨는데, 무용가로서 자신의 소개 부탁드려요? A. 탈북 무용가 최신아라는 타이틀은너무 과분한 말씀입니다. 북한무용 자체가 최승희 선생님의 무용정신을 이어 받았기에 거기에 저도 포함되어 있던 것 같습니다.저는 북한에서 예술대학을 졸업하였고, 그후 예술단에서 무용수로 한 26년간 활동하다가 남한에 온 지 11년이 됐어요. 최승희 춤 중 가장 자신있게 출 수 있는 춤은 사당춤, 장구춤, 쟁강춤입니다. Q.북한에서 최승희 무용은 누구에게 배우셨나요. 스승이 ‘최승희 무용’을 가르칠 때 최승희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하셨나요? 북한에서의 최승희 무용가에 대한 평가는? A. 저희 담임 선생님이 최승희 선생님의 제자다 보니까, 최승희 선생의 사당춤을 배워줄 때 한마디 한마디 하실 때마다 최승희 선생님이 이런 표정을 짓고 이렇게 춤을 이런 형식으로 쳤다는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어요. 그래서 북한에선 최승희 선생님에 대해 세 글자만 불러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세 글자 외에는 그 누구의 이름을 부른다는 게 쉽지 않는 거였어요. 그래서 저희 때는 최승희 선생님이 활발하게 활약을 했다는 내용도 잘 몰랐어요. 남한에 와서 많이 알게 되었고 북한에서는 잘 모르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Q.남과 북의 춤을 비교하신다면 어떻게 다른가요? 무대에서 북한과 남한의 관객의 반응은 어떻게 다른가요? A. 남쪽은 무용은 워낙 더운 지방의 특색을 살려 우와하고 부드러운 춤을 추지만 북쪽의 춤은 강한바람과 추위를 이겨내는 고구려 정신으로 경쾌함과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습니다. 북한은 형식적 박수를 치고, 남한은 자연스럼 감성에서 나오는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공연후에 꽃다발도 안겨주고 사인도 해달라고 한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남한 춤사위는 화려하고 우와함이 있다면 북한은 화려하고 우와미가 있고, 거기에 다이나믹(역동성)이 하나 더 추가됩니다. 전체적으로 스토리가 있는 퍼포먼스가 완성되어야 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관객을 바라보는 남한 무용가의 시선은 무대에서 자기도취형이랄 수 있고, 북한 무용가의 시선은 반드시 시선을 관객과 눈이 맞추어야만 합니다. 관객을 끌고 가는 것이 첫째입니다. 북한 무용은 첫째가 관객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소통이 안되면 완성된 작품이 아닙니다. 그래서 북한은 얼굴표현이 아주 중요합니다. 연기력이 있어야 합니다. 관객의 호응을 못 받으면 무대에 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전 선동의 기본이라고 하죠. Q.북한에서 전통무용 살풀이. 태평무를 배웠다는데 북한무용 춤사위 기본동작에 어떻게 반영되나요? A. 북한무용 춤사위 기본동작에는 살풀이 태평무를 위한 동작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앉기동작과 수건춤 동작, 뿌리치기 동작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문예정책에 의하면 북한의 무용은 이러한 민족무용을 근간으로 발전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무용 의상도 전통한복을 기초로 창작됩니다. Q.최신아씨가 북한 대집단체조 공연에서 맡은 역할은? A. 저는 1993년 전승 40돐기념공연 대집단체조 (’대집단체조 아리랑 공연‘ 원조)에서 '기러기떼 날으네' 출연과 동시에 예술감독 역활을 맡았습니다. 작품은 '빈터에서 우리는 자랐다'와 '지새지 말아다오 평양의 밤아'에서 무용수로 참여하였습니다. Q.북한에서 30여년 무용을 하면서 무용가로서 북한 무용가의 자질은 한마디로 무엇인가? A. 무용가라 하면 ‘종합예술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용가라고 하면 첫째 선율에 맞추어서 몸을 움직여야 하기에 음악을 받아들이는 음악적 청음(귀명창)이 발달해야 하고, 기본적 악기를 연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단(박자)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는 전통무용에서부터 발레, 현대무용을 배워야만이 무대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이론적 단계까지 공부를 해서 무용론, 초리론, 무용표기법까지 완벽하게 마스터해서 소화를 해야만 아래 후배를 이끌 수 있습니다. 육제적으로는 체력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매일 하루도 안 쉬고 혹독한 연습을 해야만이 뒤처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그 어떤 장르의 예술인들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단련해야만 무대에서 제대로 된 작품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대부분 북한 무용가는 가무악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장구 같은 악기 연주는 필수입니다. Q.주목되는 아리랑 작품이 있는데(아리랑환타지.서울아리랑) 어떤 계기로 만들었나요? A. ‘아리랑환타지’작품은 제이케이앤컴퍼니에서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앙상블과 함께 아리랑환타지 작품을 콜라보로 하자는 제안이 들어와서 보내준 음악을 듣고 결정을 했습니다. 20일 만에 창작하여 여수에서 공연을 하였습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선율에 세계인이 인정하는 신명나는 장구를 메고 장구춤을 형상화 했습니다. 남북의 통일된 모습을 상상하며 기쁨과 상생을 상상하며 화려한 부채와 신명나는 장구춤으로 창작하였습니다. 서울아리랑 작품은 국악방송 15주기기념 ‘기적의 아리랑’ 공연에서 소리아밴드와 함께 콜라보로 창작하여 만든 춤입니다. 대한민국의 아름다움이 담긴 긴부채를 꽃처럼 묘사해 행복한 모습을 서울아리랑 음악에 맞추어 춤을 창작하였습니다. Q.'서울아리랑' 작품을 하시면서 직접 부른 가사를 알려주세요 A. ‘그리운 강남’이라고 1930년대 나온 음악으로 아리랑을 부르며 고향으로 갈 그날을 그리며 창작하였습니다. 가사는 ‘정이월 다가고 사월이라네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을 어서 가세’입니다. 여기서는 장사익 선생이 잘 부르는 곡이더군요. 이미 널리 알려져서 강남아리랑이라고도 하더군요, 그래서 서울아리랑 창작무의 주제곡으로 선정했습니다. Q.한국에 나와서 창작하신 무용작품들은 어떻게 만들었나요? A. 무용작품도 시, 소설과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 주제와 내용을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창작을 합니다. 대충이라는 단어는 안 통하는거죠. 그래서 그 어떤 동작을 넣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쓰는 것처럼...시놉시스를 구상하고 시나리오를 짜고, 주인공(배역을 맡은 무용수)들이 내용을 숙지하고 무용으로 옮기는 작업을 통해 하나의 창작작품이 탄생을 하는 거죠. 이 과정에서 며칠동안 잠도 안자고 안무를 구상합니다. 길을 가다가도 구상과 몸짓이 떠오르죠. 한국에 와서는 창작작품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남한의 아름다우면서도 우아한 살풀이, 부드러운 선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역동적이면서 격동적인 무용을 배합하여서 5개의 작품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렸습니다. Q.북한에서 가장 자신있는 당신의 레파토리(대표) 작품은? 지금 제자들과 무대에 오른다면 보여주실 수 있는 총 작품은 얼마나 되는가요. A. 북한에서 가장 자신있는 작품은 장구춤, 쟁강춤, 사당춤, 나의초소, 도라지춤, 물동이춤 등등입니다. 제가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북한에서 배운 장고5인무. 쟁강춤, 사당춤, 장고춤과 제가 남한에서 발표한 창작무 서울아리랑, 아리랑환타지, 그리운강남, 임진강, 삼색부채춤, 매직춤입니다. 어림 잡아 10여 작품입니다. TV조선 '모란봉 클럽'에 출연했던 본인 작품 아리랑환타지가 유튜브에서 인기입니다. 이후 인기있는 작품은 역시 ‘서울아리랑’과 ‘아리랑환타지’ 작품입니다. 무용곡은 남북이 애창하는 민족의 노래 아리랑입니다. Q.현재 인기가 좋은 매직춤(사계절춤) 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어떻게 만든 것인가요? 남한에 와서 처음 안무를 맡은 작품이 있나요? 창작작품에 따라서 의상 디자인도 직접 구상했다는데 자세한 설명 듣고 싶어요. A. 제가 대한민국에 처음 도착하여 국정원에서 이 음악을 듣고 가사도 좋고 곡도 좋아서 제가 한국에서 무용을 한다면 꼭 이 음악 한국의 사계절을 담고 싶었서 창작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남한에 와서 남원한복패션쇼에서 안무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든 창작작품은 제가 디자인을 하고 의상사에게 맡겨 완성합니다. Q.최근 북한 예술가 중 가장 인기있는 모녀라고 하는데, KBS와 MBC, 전주 얼쑤 우리 가락과 부산 KBS 가요 1번지토크쇼, 남도 국립국악원공연. 최근 강나라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실제 자문위원이었고, 어머니는 함경북도 예술단 예술 감독을 맡은 모녀가 MBN ‘대한민국 팔도명물인증쇼&에 나왔다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방송을 통해 북한문화예술을 어떻게 전달해 주고 싶으신지요? A. 제가 방송을 통해 알려줄 것은 우리의 문화예술의 뿌리는 하나다라는 것과 북한의 전통을 알아야 통일을 대비해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북한무용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무대에서 다이나믹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속도감이 빨라서 한국무용과는 차이가 나죠. 무대에서 정적인 한국무용과는 대비가 되어서 관객들의 호응이 높습니다. 일단 신선하고 새로운 장르이니만큼.......... Q.'이북5도무형문화재'는 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함경북도 북한 지역에 있는 5개 지역을 기반으로 한 19개의 종목문화재를 가리키는데, 현재 이북5도무형문화재 제1호 애원성에서부터 만구대탁굿, 돈돌날이, 두만강뗏목놀이소리, 제2호 평양검무 제3호 부채춤, 평안도 다리굿, 제4호 화관무. 제4호 평북 농요평안도 등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신청한 종목은 무엇인가요? A. 제가 3년전에 북한의 전통무용으로 "최승희 류 평양 장구춤” 종목을 신청했습니다. 평양장구춤은 최승희선생님의 장구무용을 북한의 최고 춤꾼인 홍정화 선생님이 승화 발전시켜 오늘날에는 공훈배우, 인민배우 급수시험작품으로 진행되고 있는 난이도가 높은 무용작품입니다. 앞으로 쟁강춤도 북한의 무형문화재로 만들고 싶습니다. 최근 황해도무형문화재 제4호 화관무 2020 정기공연이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지난 1월 20일 비대면 동영상 공연으로 진행되었습니다. Q.개인적으로 첫째. 앞으로의 계획은? 둘째, 통일부 통일자문위원으로서 통일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실건지요? A. 아마도 무용가로서 무용은 제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 몸이 허락할 때까지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북한에서도 살아봤고, 남한에서도 살아 봤잖아요. 아마 저는 통일되면 남과 북에 예술인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남과 북의 무용을 승화 발전시켜 우리의 문화예술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과 현재 운영하고 있는 최신아무용연구소가 발전되어 특수한 문화적 요건에 의해 탄생한 북한무용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글로벌 차원의 북한무용연구소를 만드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한반도 민족유산을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을 해서 통일후 남북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한걸음 뚜벅 나아갈 것입니다. Q.마지막으로 통일부 통일자문위원 최신아 선생에게 한가지 자문을 구하고 싶습니다. 사할린은 북한지역과 지정학적으로 오고 가기 쉬운 북러관계에서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950년 이후 북한 노동자들이 나와서 돌아가지 않고 눌러 앉아 있는 북한 출신 실향민들이 사할린 동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한합동공연을 한다면 가장 1순위가 사할린입니다. 지정학적 특수한 여건에서 남북이 제3지역에서 합동공연을 할 수 있는 1순위 지역입니다. 그런 성격의 남북공연이 60년만에 사할린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18년 광복절 기념 남북한합동공연이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개최되어 다녀왔습니다. 공식 행사명은 '광복 73주년, 남부사할린과 쿠릴열도 해방 73주년 기념 우정의 날'입니다. 사할린 동포 강제동원 80주년을 기리기 위해 사할린주한인협회가 주최하는 남북러합동공연 행사입니다. 남측에서는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북측에서는 삼지연악단과 모란봉악단 단원으로 구성된 통일음악단, 사할린동포의 아리랑무용단, 사할린의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이 출현했습니다. 북한에서 나온 3000명의 노동자 중 많은 북한 사람들도 함께 한 광장은 인산인해로 열기와 박수 소리가 가득 메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김정은 체제 선전가를 부르게 되니, 남측의 경고가 반복되어도 김일성 3부자를 우상화 및 찬양하는 공연이 계속 이어졌다. 결국 북측의 예측불허 공연으로 행사진행이 불발되어 남한 측 공연단은 무대에서 모두 철수하는 급작스런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무대는 북한 선전선동가 일색으로 끝났습니다. 무대 앞에서는 현란한 북한 공연이 이어져서 북한공연팀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고 흥이 오른 관객들은 무대 잎에 나와서 부르스를 추고, 무대 뒤에서는 남과 북 공연 대표팀이 고함을 지르고 큰 싸움까지 붙었습니다. 모든 일을 추진한 사할린한인협회는 북측 공연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고 싸우고 나서는 북한 공연팀을 이동시키는 리무진 버스도 철수시켰습니다.,,,,그날 대한민국 신문방송은 모두 '사할린 남북합동공연 불발'이라고 전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남북공동 행사가 제3국에서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문을 구하고 싶습니다. A. 네, 방송과 신문지면을 통해 사할린에서 몇십년만에 모란봉악단이 와서 국립남도국악원과 함께 콜라보 공연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북합동공연이 불발이 되어서 안타까웠습니다. 남북이 함께 하는 공연에서 감자기 북측에서 김정은 체제 선전가를 부르는 무대에서 남측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공연팀이 무대에 같이 설 수는 없지요. 왜냐하면 사전에 국가 체제에 관한 선전가는 안 부르기로 합의를 보았는데, 북측이 그 합의를 준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남측의 민간단체가 함께 했다면 그 공연은 함께 해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국립기관과 민간단체가 함께 공연을 했다면 어느 정도 조율이 가능했을 겁니다. 100명 정도 되는 인원이 사할린까지 날아가서 국민혈세를 쓰고서 그냥 오다니 말도 안되는 남북 국제행사입니다. 민간단체 공연팀이 같이 갔다면 예정대로 무대에서 남북이 아리랑을 대합창으로 휘날레는 했을 겁니다. 즉 국민들 앞에서 대의명분은 서는 거지요. 북한에서 나온 노동자들과 사할린 동포들이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우리는 하나인데... 당시 기사를 보니 "사할린다민족협회 아코뺜 싸르키스 조리코비츠 회장은 사전 리허설을 보고 직관적으로 "사할린에서 남과 북이 만나 아리랑을 함께 부르니 하나의 민족이다"고 외쳐 기립 박수를 받았다.”라고 했는데. 예를 들어 제가 참가한 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이 정례화 하고 있는 사할린아리랑제와 같은 민간단체가 매년 사할린에서 열리는 아리랑축제와 함께 했다면..남북러가 참가하는 공연 타이틀은 이름값을 했을겁니다. 그리고 후일담으로 국립국악원에서 오프닝 무대의에서 유지숙 명창이 부른 '애원성' 같은 북한지역 서도민요는 현지 관객의 취향에는 맞지 않아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이나 북한 노동자들은 전통민요의 멋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트롯트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북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제2호 아리랑은 다 좋아합니다. 영천아리랑은 북한 민요음반에 첫 번째 인기곡목입니다. 밀양아리랑도 좋아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북한과 러시아는 박자 빠르기가 남한과 확연하게 다릅니다. 처음 들어보느 낯설고 느린 전통민요 코드는 맞지 않습니다. 남북합동공연에는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사전조사를 철저히 해야합니다. 차라리 남측에서 처음에 유지숙 명창이 아리랑 메들리를 부르거나, 북한이 좋아하는 영천아리랑이나 북한 최고 유행가 '휘파람'을 불렀다면 중간에 타협도 가능하지 않겠어요? 관객은 대한민국이 아닌 러시아 동포들과 북한 노동자입니다. 그들의 취향에 대한 배려가 먼저입니다. 2018년 사할린아리랑추진단이 한국에서 사할린한인협회와 MOU를 맺고(<사할린아리랑제, 北 예술단 참가 추진···현지 한인협회 MOU> 뉴시스, 2018-06-19)두 단체는 "한민족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아리랑의 기능을 활용, 올해 제3회 사할린아리랑제에서 사할린을 거점으로 삼는 아리랑로드를 확장하기로 했다. 급변하는 국제관계에서 북한 동포들과 아리랑공동체를 공유한다는 취지다. 금년 사할린아리랑제는 러시아는 물론, 남북 합동공연도 추진한다"고 밝혔다. 사할린아리랑추진단은 2018년 사할린을 세번 오가며 남과 북이 유네스코에 공동등재 된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주제로 하여 남북합동 공연을 같이 하자고 사할린한인협회에 제안을 했죠.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 결국 성사가 안 되었죠. 공동주최가 안되어도 한꼭지 무대를 주었다면, 국립기관 단체 공연팀이 공연 도중 철수를 해도 민간단체는 탄력성을 가지고 남북합동 공연은 마무리 되었을 겁니다. 적어도 불발이라는 기사는 안나가겠죠.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