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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현, 아리랑을 만나다

2009-02-02 15:30:39, Hit : 2541
      http://kukak21.com

황현, 아리랑을 만나다


『매천야록』의 아리랑 관련 기록은 1894년 4월 27일과 5월 5일 사이에 쓰여진  기사이다.
기사는 1894년 1월 어느날 고종이 불길한 꿈을 꾼 것을 서두로 하여 시국에 대해 고종이 매우 심약해진 상황을 내용으로 하고 그 끝은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궁궐을 침범하여 고종이 아리랑 듣기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럼으로 1894년 1월부터 일본 공사가 왕국에 온 후부터 그만두었다고 했으니 1894년 6월 29일 고종에게 내정개혁을 강요하기 위해 궁중에 들어 왔으니 6개월 정도 아리랑이 연행된 상황이 띤다.
이 책의 앞부분 박유붕의 완화군 책봉 반대를 다룬 기사에서 “구례 사람 류제관이 내게 말했다”라는 표현과 아리랑 관련 기사 직전 2월 중순 중국에서의 김옥균 암살 사건을 기록하며 “<중동전기>에 실린 글에 따라···”라고 한 것을 보면 전남 구례 은거처에서 여러 자료들과 인편을 통해 전문한 것을 정리한 것으로 보아, 아리랑에 대한 기록도 노래 자체를 듣지 못한 상황에서 궁궐의 소식을 전해 듣고 쓴 것이다.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국편본>을 따라 번역한 것이다.    

“정월(正月)에 임금(高宗)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광화문(光化門)이 쓰러짐을 보고 두렵고 놀라 큰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 나셨다더라. 이에 이월(二月), 어전을 창덕궁 선동관(繕東官)으로 옮기시니 임금(王)이 꿈에서 불길함을 본 후 위급한 날이 닥쳐올 것을 경계하여 그 시름을 잊고져 풍류객들을 모아 묘한 악기와 재주들로 하여금 노래를 시키는데, 매일 밤 전등불로 궁궐을 밝히고 악공들로 하여금 노래 부르게 하여 악몽을 잊으려 하였다.

이때 새로 생겨난 고운 노래(新聲艶曲)가 있으니, 이르기를 「아리랑타령」이라 한다.
타령은 연곡(演曲)의 속칭(俗稱)이며 민영주(閔泳柱/1846~?))를 원임(原任)으로 삼고 각신(閣臣)들로 하여금 우수한 창우들을 거느리게 하는데 아리랑타령을 오로지 제일로 삼아 관할하더라.
(嫏打令 打令演曲之俗稱也 潣泳桂以原任閣臣 領衆優 專管阿里娘) 그리고 이들을 헤아려 높은 벼슬을 내리고 금은(金銀)의 상(賞)을 후하게 주더라. 그러다가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궁궐을 침범함에 이를 그만 두었다.” 전통적인 왕실 기록 수법대로 왕이 꿈을 꾼 내용을 빌어 시작했다.
이어 그 꿈으로 인한 불길함을 잊기 위해 아리랑을 들었다고 했다.
당시 고종의 음악적 취향은 진연(進宴)에서 부르지 않는 속가인 <수양산가>를 약방기생(藥房妓生) 석경월에게 부르게 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일반인들이 부르는 속가도 많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 기사의 논점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새로 생긴 고운 곡조’

  ‘신성염곡’은 황현이 직접 아리랑을 듣고 표현한 것은 아닐 것이나 이렇게 긍정적으로 표현한 사실, 그리고 장악원(掌樂院) 궁중 악사가 아닌 창우(유랑 광대)들의 새 노래를
즐겼다는 사실, 또한 이들 중 아리랑을 잘 부르는 이를 상방궁(尙房宮)에서 선별하여
상을 주었다는 사실 등을 긍정적으로 기술 한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전통적인 한문문화권에서는 감정을 노출시키는 것을『논어』‘기뻐하되 음란하지 않고 슬퍼하되 상심하지 않는다’(樂而不淫 哀而不傷)를 들어, 자제하기를 권했고,『삼국사기』
<악지> ‘기뻐하되 흐르지 않고 슬퍼하되 비탄에 빠지지 않는다’(樂而不流 哀而不悲)를
빌어 자제를 권했다. 그 말이 그 말이지만 요체는 지나침을 경계하라는 것인데, 전통적인 한문문화권 음악관의 한 표현이다.
바로 이런 인식을 견지했을 황현이 구한말 어지러운 시국에서 새로이 생겨 유행하는 노래를 부정적으로 기술하지 않았음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최영년(崔永年)(1859~1935)이『海東竹枝』에서 아리랑을
‘말세에 부르는 노래’(季世之音)로 표현한 것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동시대 아리랑에 대한 표현은 단순히 현상적인 노래의 하나로 본 서양선교사 H. B. 헐버트가 ‘Korean vocal music’(1893)으로 보고 일본 <우편호우지신문>이 ‘朝鮮의 流行謠’(1894)로 표현한 것과 일치한다.

그런데 황현은 앞에서 비교한 동시대 아리랑 기록 태도와는 다른다. 즉 세 기록이 직접적으로
아리랑을 기록, 기술한 것임에 비해 황현은 아리랑에 방점을 두지 않고 고종의 궁중
생활과 외세 침략상 기록하며 경과적으로 기술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阿里娘打令’으로 표기하고 ‘타령’에 대해서는 설명을 한 반면에 ‘阿里娘’의 어의 풀이나 형성
시기나 그 내용(가사)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그렇게 본다.

그러나 이 기사를 황현의 기술 태도를 파악하는 대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아리랑관련 문헌 차원에서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닌 기사이기 때문인데, 다음의 세 가지를  간과할 수 없다.

‘시대의 노래’로의 성격 변화 이 기사가 황현의 기술이라는 신뢰성을 담보할 때 궁중에서 아리랑이 불렸음을 사실이게
해주고, 이 아리랑은 토속민요가 아닌 ‘시대의 노래’로의 성격 변화와 그 수용층이 일반 민중을 넘어 최상류층에 이르른 시점을 분명히 알려준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한다.
이는 H. B. 헐버트기 아리랑의 유행 시점을 1883년으로 본 것과 최영년이 1891년으로 보아 이
가사의 기록 시점보다 앞섬을 대비할 때 이미 1890년대에 수용층이 전 계층에 확대되었
음을 알게 한다. 이는 그 유행 시점을 1890년 전후라고 보게 하는데, 이는 이 아리랑의
형성 시점을 이 유행 시점보다 앞서 잡게 하여 경복궁 중수공사(1865~1872)를
계기로 형성되었다는 기존설을 뒷 받침해주는 것이다.

즉 김지연이 1935년 『조선민요 아리랑』에서  정리한 것에 의하면 아리랑 발생설(發生說)은 다음 표와 같다.


아리랑 발생설

 

번호
주장
주장 근거
방생시기
주장자
1
歌謠大方 南道山氏說
‘我耳聾 訛音
경복궁 중수기
영주 남도산
2
八能堂 金德長氏說
我離娘(아리낭)
경복궁 중수기
순흥 김덕장
3
尙州 姜大鎬氏說
我難離(아난 訛音리)
경복궁 중수기
상주 강대호
4
密陽居住 金載德氏說
阿娘(아낭) 訛音
朝鮮中期
密陽 金載壽
5
尙玄李先生의 說
兒郞偉
古代
李玄尙
6
新羅舊郡慶州傳說에 因한 說
閼英(알영) 訛音
古代
없음


이상의 정리표에서 보듯이 경복궁 중수설은 세 가지가 되는데, 이 기사는 이들 설을 더욱
견고하게 해준 것이다. 이 설의 배경인 경복궁 중수 기간은 아리랑이 근대성을
획득하여 ‘흙의 노래’에서 ‘시대의 노래’로 성격이 전환되는, 즉 전통적인 메나리권 노래에서
패생된 새로운 아리랑이 형성되는 계기라는 측면에서 다수설로 이해되고 있다.
1950년대가 그 기점인데, 1958년 국악사가 장사훈은 <경북궁 중수와 민요>에서 다음과 같이
제기한바가 있다. “실로 경복궁 중수는 이러한 새로운 민요발생의 직접동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역하는
인부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그 원망을 사지 않으려는 한 방편으로 각 지방에서
소리꾼과 무동들을 불러 올렸기 때문에 13도의 가지가지의 소리가 서울에 집중 소개되었다.
또 훨씬 뒤의 일이지만은 고종황제는 민요를 몹시 즐기어 소리하는 이들을 대궐 안에 자주
불러들인 바가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아리랑이 연행되는 계기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즉, 경복궁 중수 기간
잡색의 유랑예인들이 대원군의 후원을 받고 공연했던 상황과 아라리권의 강원도와 경상도

부역군들이 향수에 젖어 제 고향의 노래를 불렀으리라는 상황을 대입하면,
이 때 불렸던 어떤 아리랑이 문화적 충격을 주어 새로운 아리랑을 파생시켰 고, 바로 그것이
1차적으로 공사장에 동원되었던 유랑 연예집단(優)에 의해 수용, ‘연곡’(演曲)화 되어 이후
궁중에서 불리게 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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