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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규 - 호남살풀이 춤 최 선 명무

2005-10-26 17:44:17, Hit :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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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살풀이 춤 최 선 명무

 “혼(魂)이 담겨있고 정신이 스며있는 춤을 춰야한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텅 빈 동작을 만들어내서는 안된다”고. 선생의 한평생 무용철학이기도 한 이 말은 곧 ‘춤의 기본과 본질을 알고 창작과 전통의 구분을 명확히 하면서 인간성과 도덕성이 바탕이 된 바른 춤, 바른 동작을 깊은 내면에서 이끌어 올려야 한다’는 춤의 대한 정신을 말한다.

 전북 춤계에서 영원한 뿌리로 평가받는 호남 살풀이춤 인간문화재 최 선 선생 ! 「이제 나는 한 사람의 춤꾼으로서 개인의 영욕에만 사로잡힐 수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나의 춤은 곧 나의 희망이요. 겨레의 희망이기를 소망하고 기원할 따름입니다.」고 고뇌 하면서 최 선 선생은 춤과 같이 지나쳐 버린 60년이란 긴 세월을 돌이켜 본다.

「최 선.」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춤꾼! 이렇게 부른다. 그것은 무대에서 삶이 잠잔 시간 보다 훨씬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생을 잘 모르더라도 무용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선생의 몸에는 「춤끼」가 자르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는 일제의 식민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5년 11월 7일 전북 임실에서 유교집안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두명의 형님들은 일본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였고 부친은 유학에 밝은 시골 선비여서 최 선 선생도 당연히 그런 가풍을 따라야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기질은 일반적인 학문을 공부 하는 쪽보다는 예능쪽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그러한 자기 기질을 발견했고, 수많은 질타와 역경을 고집 하나로 이겨내며 일생을 춤꾼으로 살아오고 있다.

 “춤은 무당이나 하는 것이거늘 어찌 남자인 네가 춤군이 되어 집안 망신을 시키려느냐”며 무섭게 질타하는 부친의 노여움, 집안 식구들의 눈치, 동네 사람들의 비아냥이 열 살도 채않된 그에게는 너무 벅찬 부담이 됐을텐데도 그런 모든 아픔을 당차게 이겨낸 것을 보면 아마도 선생은 춤을 위해 태어난 일것이다. 오지게 추운 겨울 밤에도 어머니의 옷가지를 몰래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 달빛을 조명삼아 혼을 불사르다가 동상에 걸려 발톱이 빠지고 오한에 떨던 꼬마, 보통학교(초등학교) 학예회 때면 인기를 독차지하던 꼬마 최 선이 오늘 한국 무용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는 계기를 이룬 것은 완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월북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인 김미화 선생과의 인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전주에 내려와 무용 강습을 하고 있던 김미화 선생이 한눈에 춤 꾼으로 뛰어난 재질이 있음을 알아보고 체계적인 무용을 가르치면서부터 선생의 춤은 탄탄한 바탕과 독창적인 예술성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나이 불과 열 두어살 때였다. 이때부터 선생의 춤 인생은 한번도 쉴틈없이 이어진다.
동족 상잔의 비극인 6. 25 사변중에도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춤을 추었고, 하반영 선생 등을 따라 전주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연극도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엔 마침 전주에 국악원이 개설되고 주위에서 전주국악원에 계신 추월이라는 할머니 선생이 판소리도 잘하지만 춤을 잘 추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 갔다. 그 분은 항상 단아한 모습으로 국악원의 넓은 대청마루에 계셨으며, 방이 여러곳이 있는데도 거기서 판소리도 하고 춤을 추셨다.
“그 때 당시에 봤을때 돗자리를 깔고 춤을 추시더라구요. 당시만 해도 수건춤이라 것만 알았지 살풀이 라는 것은 처음 알았지요. 또한 그때는 음악이 없기 때문에 무 장단이나 장구, 북, 꽹과리 등 구음으로만 춤을 했지요.

 추월 선생이 직접 장구도 치시고, 돗자리 위에서 수건춤을 가르쳤던것을 기억한다는 선생은 지금 선생이 일궈낸 호남살풀이춤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소위 “수건 춤”을 배우게 되는데, 한량들이 흥에 겨워 기교도 없이 추던 그런 춤, 다시 말하면 춤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왠만한 사람들에겐 그 수건 춤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을 망정 선생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춤, 가장 전라도 같은 춤으로 인식됐고,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어떤 사명감에 사로 잡혀 밤낮으로 춤다운 춤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 수건춤이 바로 선생을 오늘의 한국무용계 거목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남자 초립동이 춘다는 의미로 “동초(童草) 수건춤” 또는 “호남살풀이 춤”으로 불리우는 이 춤으로 최 선 선생은 지난 84년 11월 개천 예술제 특장부문에서 「호남살풀이」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안았으며, 96년 3월 전라북도 지정무형문화재 15호가 인정됐다.

 그래서 이기반 시인은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 막혔던 강물이 흐른다.
/ 천만년 억겁에 / 쌓인 세월의 갈등도 / 원한에 사무친 시름이랑 / 철 철 철 녹아내린다. 」중략 이렇게 「살풀이춤에서」시로 찬양해 줬다.
어쨌든 최 선이 그 수건 춤에 매달리는 사이 어느 덧 그도 스무살 청년으로 성장했고, 춤 실력도 인정 받는 등 예술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자신감에 전주에서 처음으로 “최 선 무용연구소”를 차려 후진 양성에도 힘쓰게 된다.

 “6. 25 직후 무용가가 거의 없어 애로사항이 많았서요 아마 황무지인 전주에 한국 춤을 개척한것은 저 밖에 없을겁니다”라고 선생은 전한다.
전쟁도 끝나고, 공비 소탕도 대충 마무리돼 사회질서가 잡혀가던 1954년 전주도립극장에서 「논개」「승무」 「장고춤」 등으로 첫 개인발표회를 가져 전북 무용계에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전주도립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앞
에서 자신의 춤을 마음껏 펼치고 난 그날 밤, 그는 복받치는 서러움으로 밤새껏 울었다. 너무나 거칠었던 세파를 헤쳐온 지난 날들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그의 가슴에 퍼져왔기 때문이었다.

 이 첫 무용 발표후 그는 당시 서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얻고 있던 정인방 선생을 만나 정식으로 사사를 받는 영광을 안는다. 이때 서울 무대 입성과 전통 무용의 맥을 잇는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굳어진 계기가 바로 정인방 선생과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인정 받면가면서 한국무용 최고로 꼽히는 선생은 개인발표나 후진양성면에서도 그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승무 살풀이 무당춤 등 한국 전통무용 뿐아니라 창작무용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생은 1979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가잿골의 전설」로 대상이 없는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정신없는 국내외 공연과 발표회 등이 선생의 춤 진수를 과시하기도 했다. 80년엔 한길무용회 특별회원으로 일본 자유중국 미국등지를, 그리고 85년엔 대통령상 수상 혜택으로 미국 동남아공연을 가졌고 그 밖에도 미국 일본등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 70년대부터 무용협회 전북지부 지부장직을 맡아 오랫동안 일해온 선생은 그동안 전라예술제를 비롯, 각종무용제를 주최, 전북에 무용의 뿌리를 내리고 맥을 잇는 활동을 지금까지 펼쳐왔다.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죽어야지, 우리 전통춤을 좀 더 멀리 또많이 전수, 보급하는 일이 남은 삶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확신하는 선생의 춤은 현재 전북대 무용학과의 장인숙 교수, 이해인 교수, 김원(현대무용), 원광대 이길주 교수, 충남대 정은혜 교수, 서울 고선아 선생, 광주 허순선 교수, 그리고 선생의 딸 최지원 씨에 의해 전수되고 있다.

   
 끝으로 선생은 제자들과 딸 지원 씨에게 부탁한다. 호남살풀이 춤이 영원히 살아 전승 보존되고, 꽃을 피었으면 한다고. 특히 딸이 아버지의 염원과 꿈, 그리고 다 추지 못하것을 열심히 하여 아버지 보다 나은 춤을 추었으면 한다.

 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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