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연재소설] 흙의 소리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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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6

  • 특집부
  • 등록 2021.03.04 07:30
  • 조회수 979

흙의 소리

 

이 동 희

 

진출進出 <1>

상소를 하고 청원을 하는 것마다 다 받아들여졌다. 대단히 당돌하고 방자한 의견이었다. 기존의 제도와 운용 방법을 과감하게 혁신하고자 하였다. 박연은 그 개혁의 중심에 서서 줄기차게 밀어붙이었다.

작은 소리의 값(음가)에서부터 악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며 그 사용과 배치 조리에 대하여, 방법과 근본 이치를 말하였다. 중국 고대와 현대를 꿰뚫고 고려와 개국 초기의 문제와 당시 조선의 현실을 아우르는 비판과 건의였다.

거기에 모든 열정을 바치었고 용감하게 앞장을 섰다. 그런데 예악의 새 정책과 혁신적인 방안을 내놓고 올리는 족족 다 예조로 내려보내 실행을 하게 되었다. 예악은 시대의 정신이었고 새 시대의 기틀을 동반하고 있었다.

"엎드려 아뢰옵건대 어지신 임금께서 새로운 법을 만들어 예악의 깨끗한 치정治政을 일으켜 사회의 모든 제도를 갱신한 초기의 습속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폐조의 여풍이라 심히 한탄합니다.”

박연은 현하 실정을 신랄하게 지적하며 주장하였다.

지금 좌교左敎가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켜 인심이 도탄에 빠졌다. 민가의 상제喪祭에 있어서 장사나 제사 지낼 겨를이 없어 오로지 불교를 위하는 데만 후하여 미풍을 없애고 세상을 어지럽게 하여 나라의 법이 닿지 못하고 군신이 모여 임금께 상주上奏하는 예의에 있어서도 품위 있고 바른 예의를 보지 못하였으며 광대나 창녀娼女들의 음악이 나와 희롱하였으므로 삼강이 분명하지 못하고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 방음方音이 바르지 못하여 민풍民風이 그릇 되었다.

 

난계-흙의소리26.JPG
[국악신문]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26

  

가례삼강행실家禮三綱行實을 널리 펴서 행하기 위하여 청원하는 상소였다. 박연의 시문집詩文集 난계유고蘭溪遺稿에 실린 글이다. 앞에 시를 몇 편 싣고 제일 먼저 올려놓은 청반행가례請頒行家禮의 소이다. 박연의 상소는 모두 39편인데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 3개이고 그 중 하나이다. 이를 ‘1번 소라기도 한다.

모든 폐습은 다 先王의 교화를 어지럽힌 것이니 성세聖世의 풍화가 아니라고 하기도 하였다. 참으로 소신 있는 언사였다. 좌교는 그릇된 종교를 이르는 말로 유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그렇게 말했다. 불교를 부정하고 비판한 유교시대의 논리이다.

"원하건대 좌교가 미풍을 없애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것을 금하게 하고 관혼상제에 관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세상에 널리 배포하여 나라의 예의를 바로 잡고 모든 학당學堂과 시골의 글방에서 소학小學의 이륜彛倫을 강하게 하여 선비들이 폐습을 바로잡으며 국민에게는 삼강행실을 펴서 실행하게 하여 숭상하는 풍습을 두텁게 하고 국민에게 오음정성五音正聲을 가르쳐 민풍을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소신도 소신이지만 용기가 있고 과감하였다.

시대적인 예와 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연은 거침이 없었다.

조하朝賀의 예를 개수하고 여악女樂을 금하도록 하라는 상소도 하였다. 참으로 하기 어려운 청원이었다. 동지冬至 정조正朝 즉위 탄신일 등의 경축일에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던 의식이 조하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창녀들의 음악과 함께 여악, 여자 악인을 없애자는 건의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복의伏以

엎드려 생각하건대언제나 허리를 굽히고 몸과 마음을 낮추어 주청하였다.

"성인의 학문이야말로 예악으로 정사를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니 원하옵건대 궁중 학문을 한결같이 대학의 격물치지 성의 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도리로 바탕을 세우고 경연학사들로 하여금 성경현전聖經賢傳과 성학왕정聖學王政을 힘써 배우도록 하는 것이 옳을까 하옵니다.”

양기가 피어나는 동지와 한 해가 시작되는 정초는 모두 인군이 원기를 가다듬어 복을 받는 날이고 계획을 다짐하는 시초가 될 것이니 부디 왕세자와 여러 신하들이 좋아하는 예의를 새롭게 하여 그 절차를 성대聖代에 맞도록 해야 할 줄로 안다고 하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국가의 연회 때 여악을 쓰는 것이 예가 아닌 줄 압니다. 전날 태종 임금 때 중국 사신 단목례端木禮가 왔다가 여악을 보고, 예악의 나라에서 어찌 이런 욕된 짓을 하느냐고 언짢아 하였고 태종 임금은 크게 부끄러워 해서 연회 때 여악을 일체 금하였나이다. 부디 임금님이 베푸시는 연회나 빈객을 맞이하는 연회라도 여악을 금하고 남악을 써서 국가의 풍속을 바꿀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시기 비옵니다.”

참으로 직설적이고 분명한 요구였다. 너무나 명분이 뚜렷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세종 초기 조선시대 예의 윤리 도덕의 잣대로 말한 것이다. 거기에 어느 누구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여자를 금하고 반대하는 남자의 줏대와 결기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아니 국가와 민족을 향한 신념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다음에 박연과 한 여인과의 관계를 가지고 그것을 얘기하려 한다. 오음정성에 대해서도 해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