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내우혜서(內友惠書)」 간찰과 「반휴서가(半虧書架)」 시문
먼저 「내우혜서」 간찰을 살펴보자.(*사진 71) 난고문학관의 설명문에는 "김병연이 강릉 김 석사(碩士)에게 보낸 편지로, 1857년 3월 19일에 쓴 편지다(영인)”라고 씌어 있다.
이 간찰에는 ‘김병연(金炳淵)’이란 이름이 씌어 있는데,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 난고 김병연의 간찰이라고 주장함은 억측에 불과하다. ‘병연(炳淵)’이란 이름자는 아주 희귀한 이름이 아니다. 따라서 난고 김병연이 살던 시대에 ‘김병연’이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씨를 난고 김병연의 간찰로 단정 짓기 위해서는 글의 내용에서 이 글이 난고 김병연이 쓴 것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아니면 적어도 편지를 받은 사람과 난고의 친분관계를 입증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간찰의 내용은 일상적인 안부를 전하는 것으로, 편지를 쓴 이가 난고 김병연임을 입증할 만한 내용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다. 또 김 석사와 김병연의 친분관계를 증명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렇다면 설령 이것이 난고 김병연의 친필 편지라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실제로 ‘김병연’이라는 이름이 적힌 간찰은 적지 않게 발견되기도 하며, 김씨 집안의 족보를 뒤지다 보면 ‘병연’이라는 이름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편지 끝 부분에 ‘김병연’이라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글씨는 난고문학관의 설명문대로 영인본이 틀림없다. 영인본이란 책이나 글씨 따위를 사진으로 찍어서 인쇄한 것을 이른다. 영인본을 인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종이가 필요한데, 「내우혜서」의 경우에는 옛 종이를 사용했다. 물론 이것은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 도리어 옛 종이를 영인에 사용함으로써 사실감을 높이려 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고서를 전시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영인에 사용한 종이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다음에 설명할 「반휴서가」가 최근에 만들어진 글씨일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다음으로 「반휴서가」 시문(*사진 72)에 대한 난고문학관의 설명문에는 "1840년 후반에 동복면 구암리 창원 정씨 서재를 소재로 쓴 시”라고 설명돼 있다. 이는 전남 동복의 향토사학자 M씨의 「김삿갓 초분지(初墳地)에 대한 고찰(考察)」(1999)에 근거하고 있는 듯하다. 이 논문은 제1회 전라남도 향토문화연구논문 공모전에서 입상한 논문이다.
M씨는 이 논문에서 「반휴서가」를 김병연의 친필이라 전제하고, "1840년 후반에 동복면 구암리 창원 정씨 서재를 소재로 쓴 시”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놓치고 있다. 「반휴서가」의 내용을 논하기 이전에, 「반휴서가」의 글씨가 김병연의 친필임을 먼저 증명해 보였어야만 했다. 따라서 만약 「반휴서가」가 김삿갓의 친필이 아니라면 그의 주장은 허구가 될 수밖에 없다.
강원대 남윤수 교수는 「반휴서가」 시에 대해 "운자(韻字)도 맞지 않으며, 마지막 결구(結句)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 「강촌(江村)」의 일부를 적고 있는데, 이는 시도 아니다”라고 평하고 있다. 여기에 글씨 또한 치졸하여 한눈에 거슬리는 작품이다.
이러한 지적 이외에도 「반휴서가」가 김병연의 친필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 나는 앞서 「내우혜서」의 설명에서, 영인에 사용된 종이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내우혜서」와 「반휴서가」의 종이가 같은 지질의 종이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반휴서가」가 최근에 쓴 글씨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반휴서가」가 옛날에 쓰인 글씨라면 그 종이가 「내우혜서」 영인에 사용된 것과 같을 수가 없다.
「내우혜서」와 「반휴서가」의 종이를 같은 종이로 보는 이유는, 첫째 이 두 종이가 같은 제지소(製紙所)에서 만들어졌고, 둘째 원래 같은 공책에 묶여 있던 종이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위의 두 종이가 같은 제지소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발초자리로 알 수 있다. 발초자리란, 종이를 뜰 때 대나무 발을 사용하는데 이때 밭고 성긴 정도가 줄 모양으로 나타나는 무늬 즉 종이의 결을 말한다. "이 발초자리의 모양은 제지 작업 여건에 따라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작업 조건에서 만들어진 종이는 모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한지(韓紙) 장인 장용훈(張容熏) 선생의 설명이다. 즉, 「반휴서가」와 「내우혜서」의 종이에서 이 발초자리의 무늬가 같은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또, 이 두 종이가 원래 같은 공책에 묶여 있던 것이라는 사실은 먼저 「반휴서가」의 종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 종이에는 오른쪽 약 일 센티미터 정도 세로로 접혔던 흔적이 길게 나 있다. 또 거기에는 약 팔 센티미터 간격으로 뚫린 네 개의 송곳 구멍 흔적이 있다. 종이의 윗부분은 원래 모습 그대로이고 아랫부분은 찢긴 흔적이 있어, 원래는 이보다 조금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종이는 공책에서 뜯어낸 종이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까닭은, 구멍 네 개의 흔적은 한적을 꿰맸던 실 자국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잘려 나간 아랫부분에 구멍 하나를 더해 원래는 구멍이 다섯 개였을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나라 한적은 주로 다섯 바늘로 꿰매는 오침안정법으로 묶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종이의 원래 크기는 세로 약 삼십오 센티미터, 가로 약 이십이 센티미터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난고문학관 진열장에 전시된 자료를 눈대중으로 측정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차이가 날 수도 있다.
난고문학관 이층 전시실에는 「내우혜서」와 「반휴서가」 글씨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이제 이 두 종이가 같은 종이라는 결정적인 사실을 증명해 보일 차례다. 「반휴서가」 오른편에 전시된 「내우혜서」 글씨를 시계방향으로 구십 도 돌려 보면 두 종이에 나타난 얼룩 자국을 더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둘 다 마치 어린애가 요에 오줌을 싸 놓은 듯이 얼룩져 있다. 이것은 고서를 보관하는 과정에서 물이나 빗물 따위가 스며들어 얼룩진 것으로, 이 얼룩의 모양은 같은 책에 묶여 있던 종이라면 닮은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내우혜서」와 「반휴서가」의 두 종이가 희한하게도 닮은 얼룩 자국을 하고 있다.
다시 정리해 보면, 공책에 묶여 있던 빈 종이에 누군가가 최근에 「반휴서가」를 쓰고, 다른 종이 한 장을 「내우혜서」 영인본에 사용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휴서가」가 김병연의 친필이 될 수 없다는 명확한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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