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목)

아리랑칼럼 26중국, 중국동포, ‘중국 속의 아리랑’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리랑칼럼 26
중국, 중국동포, ‘중국 속의 아리랑’

  • 특집부
  • 등록 2021.02.27 13:04
  • 조회수 18,540

기찬숙/아리랑학회 연구이사

 

아리랑 연표상 어느 해에나 아리랑으로 점철(點綴)되지 않는 해가 있을까마는 2005년의 아리랑은 벽두(劈頭)부터 시작되었다. 119일자 국악신문에는 뜻밖의 아리랑 기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한 국회의원의 인터뷰 중 세계적인 통신사 ‘AP통신보도의 인용이란 설명과 함께 아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이 눈에 띄었다.

 

"고유의 전통음악인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1위에 선정되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이 노래를 알 것이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작곡가들로 이루어진 세계 아름다운 곡 선정대회에서 82%라는 엄청난 지지를 받고 아리랑이 선정된 것이다. 선정과정 중에는 단 한명의 한국인도 없어 심사했던 이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이에 대해 아리랑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나에게 깨우쳐줬다’, ‘듣는 도중 몇 번씩 흥이 났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감동적이다라는 반응이었다. 이들 모두 처음 듣는 곡이었다고도 했다.”

 

 이 기사는 화제를 낳았다. 이로부터 급기야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오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 순간, 아리랑연합회 김연갑선생의 근거 없다는 유권해석(有權解釋)으로 가짜 뉴스로 잠복되었다. 이렇게 필자에게 2005년은 이 가짜 AP통신 기사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정작 2005년의 중요한 아리랑 기억은 4월 중순 연변에서 전해 온 아리랑 소식이었다. 바로 연변 원로 음악가 안계련선생과 민속학자 김봉관선생의 아리랑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찬동서가 우리에게 전달 된 것이다. 매우 조심스럽게 전해진 이 문건은 일견 우리가 이미 추진하는 것에 대해 찬동한다는 뜻이지만, 진의는 이 때 우리는 유네스코 등재를 생각을 하지 않던 것으로 중국이 먼저 등재할 수도 있으니 서두르라는 충고였다. 이 충고는 2012년 중국의 아리랑 국가 비물질문화유산 지정으로 현실화 되어 소동을 버린 바 있어 그 진정성을 확인하게 된 바 이다. 이 두 원로 동포 2세대의 고국 아리랑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은 우리에게 동포들의 세대차를 실감하게 하는 계기였다. 이를 통해 중국과 동포사회를 정확하고 더 깊게 이해해야 함을 절감했다.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탄생했다. 그러나 중국 내의 소수민족정책은 이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공동강령(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共同綱領)’이란 공산당의 발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정책은 다민족 국가는 자치제가 적합한 제도이며 보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였고, 자치제도는 공산당의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정책이며 기본정치제도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는 크게 두 단계로 나뉘는데, 첫 단계인 1922년부터 1935년까지는 소련의 영향을 받아 연방제가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다 1935년 중국공산당이 모택동을 핵심으로 한 영도기구를 설립하고 난 이후, 연방제는 민족정책 고려 대상에서 서서히 배제되었다. 소련과는 사정이 다르다는 이유로 연방제 대신 민족구역자치제를 택해 1947년 내몽고자치구 건립을 둔 것이 그것이다.

 

주은래(周恩來)는 중국이 5천년의 역사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서로 교류하여 한 지역에 다민족이 혼거하는 상황을 강조하였다. () 왕조 이후 중앙집권 전통이 지배적이었던 점과 20여년에 걸쳐 민족해방전쟁과 내전에서 한족과 소수민족들이 동지적인 혈연적 유대를 갖게 된 점을 들어 소련식 민족 간 자치가 아닌, 보다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민족 간 연합의 형태로 민족자치구를 두고자 했다. 이중에 조선족의 경우, 한족(漢族)을 포함한 기타 민족들과 함께 반제반봉건 투쟁과 국내 해방전쟁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시민권을 부여 받았다. 이로부터 건국 직전 중국 공산당이 조선민족에 부여한 정치적 지위는 중공연변지위(中共延邊地委) 서기 유준수(劉俊秀)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조국이 조선이라는 것을 승인하는 동시에 그들을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이며, 중국공민으로 일체의 권리를 향수할 수 있고 조선이 외적의 침략을 받을 때 조선공민의 신분으로 조선에 나가 전쟁에 뛰어들 수 있다

 

조국이 조선이란 북한을 말하는 제한성이 있긴 하지만 한반도를 조국으로 인정하여 이중국적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건설과 중국대륙의 승리가 보이면서, 유준수는 만주의 조선인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그것은 조선족과 조교(조선교포)의 구별이다. 연변에 중국공민으로 등록된 자는 조선족으로 분류되며, 등록을 하지 않았거나, 1945년 이후 적절한 중국 공산당의 허가를 취득하지 않고 입국한 사람은 북한 국적으로 분류하여 조교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중, 호주(戶主)가 중국에 살고, 가족이 북한에 있는 경우 집이나 토지를 중국에서 소유한 자도 중국 공민권을 취득할 수 있다고 했다. 이후, 북한방문을 원하는 조선족은 중국정부의 허가를 취득해야 했으며, 중국인과 동일한 권리 의무를 행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한국전쟁으로 조선족이 동원(참전)되면서 실제적 시행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한국전쟁 기간과 전후 북한의 복구사업에 많은 조선족이 참여한 사실 등에서도 사실상의 이중국적이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57년에 이르러 중국정부는 지역적 개념을 사용하여, ‘산해관(山海關) 이북의 조선인을 조선족으로, ‘이남의 조선인과 이후 중국에 들어온 사람을 조교로 분류하기까지 특수한 상황은 유지되었다.

 

이에 앞서 19459월 말, 이미 조선족의 국적문제를 주시해온 중공중앙동북국은 역사적인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조선인 상황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한족과 만찬가지로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향유한다고 인정하였다. 또한 동북민주연합군사령부 사령 겸 길림성정부 주석 주보중은 "화북지구 항련(抗日聯軍)에 참가한 조선의용군을 제외하고 동북의 조선주민은 일반적으로 중국 경내의 소수민족으로 보는것으로 조선족의 소수민족 지위를 인정하였다. 이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으로 정치적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현재 조선족자치구역은 조선족자치주 1, 자치현 1, 자치향진(민족연합진을 포함) 43개가 있다. 그 외, 조선족촌이 1000여개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김봉관 찬동서.jpg

 

중국은 국가보다 공산당이 먼저 창립하고 이를 통해 국가를 건립하였음으로 당을 우선시 한다는 특수 상황에서, 정치체는 이미 공산당 선립기인 1920년대 초로부터 확립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1930년대 화북지구 항련(抗日聯軍)에 참가한 조선의용군과 북한 정권 수립 구성원들과 연관을 갖게 되어 남한과는 다른 긴밀성을 갖게 되는 배경이 된다. 결국 구체적으로는 북한이지만 한반도를 고국으로 인식한 동포사회 구성원은 이 역사를 살아 온 소위 동포 1세대들이다. 바로 이 2세들 중 민족성 내지는 고국의 민속과 음악을 이해하여 그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안계련과 김봉관 선생이다. 1946년 연변에서 개최된 3.1절 행사에 아리랑七景같은 민족정서가 담긴 연극작품을 체험하고 자란 이들이다.

 

2005년의 아리랑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찬동서가 아니었다면, 이를 계기로 이 분들과 인식을 공유하지 않았다면 2012년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도 중국에 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