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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4

특집부
기사입력 2021.02.1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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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의 소리

     

    이 동 희

    소명 <4>

    "본시에 벼슬한 사람은 그 책임을 사피辭避할 수 없사오나 당시의 아악이 바르게 고쳐지지 않아 저서가 있지 않은 것도 당연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신악新樂을 가르쳐 익히고 공인들의 재주를 취하는 데에 모두 이 책을 상고하면 그 공이 적지 않을 것이나 제사지내는 데에 겸하여 쓴다는 것은 전의 규정을 받고서도 완전히 이에 의거하지 않았으니 지금 이 책을 가지고 본조의 아악에 소용되는 법을 상고한다면 모두가 심히 정밀하고 적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선국악장에 대해서 문제점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었다. 그 대목에서 박연은 다시한번 자신을 낮추었다

    "신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외람된 생각이오나 개국한 초기에는 경륜이 초매草昧하여 먼저 마음을 쓴 바가 문물의 상경常經 뿐이었고 아악에 이르러서는 단서만 열고 뜻을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상경은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떳떳한 도리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부정적으로 읽힌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한 책을 저술하여 아부雅部로 삼아 영구히 전하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일 저술한 악서가 있었다면 지난 날 봉상시에서 부지런히 공인들이 초록해 쓴 나머지를 철습掇拾하여 미완성된 악서를 만들었겠습니까. 지금 이 책에 의거하여 조목별로 좁은 소견을 다음과 같이 말하겠습니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우리 조정의 제향 때의 음악은 모두 주나라 제도를 근거한 것인데 다만 자세히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고 말대로 아악 전반에 대하여 하나 하나 조목 조목 따지고 건의하였다. 맞지 않고 부당하고 바르지 않은 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그가 생각하고 있는 안을 내놓은 것이다.

    먼저 종묘의 음악에 대하여 말하였다.

     

    난계-흙의소리24.JPG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24

     

     이는 본래 주나라 제도의 무역을 연주하고 협종을 노래하여 선조에 제향한다는 글에 의거하였는데, 지금 종묘의 제사에는 당하에서 무역을 연주하는 것은 바르다. 그러나 관창祼鬯 전폐奠幣 초헌初獻 등의 음악은 모두 당상에 속해 있으니 마땅히 협종을 노래해야 될 것인데도 도리어 무역을 연주하게 되어 무역만이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음악인 줄만 알고 협종이 무역과 합하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여 당상과 당하에 모두 무역을 사용하여 다 양성을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종묘의 음악이 심히 정세精細하고 마땅치 못하다.

    그리고 사직의 음악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본래 주나라 제도의 태주를 연주하고 응종을 노래하여 지신에 제사지낸다는 글에 의거한 것이다.

    먼저 대체적으로 말한 것을 다시 정리하여 지적하고 있었다.

    지금 사직의 제사에 당에서 태주를 연주하는 것은 바른 것이지만 전폐 헌작獻爵 변두籩豆를 철거하는 따위의 음악은 모두 당상에 속해 있으니 마땅히 응종을 노래해야 될 것인데도 도리어 태주를 연주하게 되어 태주만이 사직에 제사지내는 줄만 알고 응종이 태주와 합하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여 한 제사에 순전히 태주만 사용하고 양률만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사직의 음악이 심히 정세하고 당연하지 못한 것이다.

    관창은 제사 때 울금향을 넣어 빚은 울장주를 땅에 부어 신을 내리게 하던 일이며 전폐는 나라의 대제에 폐백을 올리는 일이고 헌작은 신령에 술을 올리는 것이다. 제일 먼저 잔을 올리는 제관을 초헌이라 하고 두 번째는 아헌, 마지막은 종헌이다. 변두는 향연에 쓰는 제기로 변은 죽기竹器 두는 목기木器이다. 과일을 담는 변은 신위를 기준으로 왼쪽에 국물이 있는 음식을 담는 두는 오른쪽에 두었다.

    다시 석전釋奠에 대하여 말하였다.

    석전은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에서 옛 성현 전대前代의 현인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석전의 음악은 주나라 때 양로養老를 주로 하여 대체로 육대六代의 음악에 합한 것인데 북제北齊 때 이르러서 대뢰大牢(나라에서 제사지낼 때에 소를 통째로 바치는 일)로 석전할 적에 헌가軒架의 음악과 육일무六佾舞를 베풀었고 당나라 개원開元 연간에는 문선왕文宣王에게 석전할 적에 궁가宮架에는 왕의 예를 사용하였으며 율은 악궁樂宮을 사용하였으나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지금 중국의 대성악보大晟樂譜 와 지정조격至正條格을 보건대 모두 아래서는 고선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남려를 노래하고 악은 음악의 차례대로 사용하면서 신을 맞이했다. 황종이 구변九變한 뒤 관세盥洗(제례 때 손발을 씻음)할 적에는 고선을 사용하고 전에 올라갈 적에는 남려를 사용하고 조두俎豆(나무로 만든 제기)를 받들 적에는 고선을 사용하고 초헌할 적에는 남려를 사용하고 아헌과 종헌할 적에는 고선을 사용하고 변두를 철거할 적에는 남려를 사용하여 음양이 합성하여 서로 번갈아 사용되니 주례周禮의 합성하는 제도에 들어맞는다.

    그런데, 지금 아헌에서는 아래에서 남려를 연주하고 종헌에서는 전에 올라가 남려를 노래하니 노래와 주악은 순전히 남려만 사용하고 그 합하는 것은 사용하지 않았다. 절차도 갖추지 못하고 상하가 차례를 잃었다. 심히 미안한 일이다. 일찍이 공성孔聖의 사당에 이러한 근거 없는 음악을 설치했겠는가. 이것은 석전의 음악이 정세하고 당연한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외람된 생각으로는박연은 계속 자신을 낮추면서 그러나 신랄하게 현재의 음악 체계를 비판하였다. 개선을 요구하고 있었다

     

     

    경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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