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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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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4

김삿갓 소동

  • 특집부
  • 등록 2021.02.17 07:30
  • 조회수 1,512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소동의 시작

 

고서화를 보는 눈에는 터럭만큼의 착오도, 한 점의 용서도 있을 수 없다 해서 선인들은 금강안혹리수(金剛眼酷吏手)’라는 말을 썼다. 금강야차(金剛夜叉) 같은 눈매와 혹독한 관리의 솜씨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안목이란 고서화의 진위를 가리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그 작품 하나하나가 예술로서 얼마만큼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을 판단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즉 고서화를 감식해내고 그 참맛을 느끼려면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고서화의 진위를 가려내는 일은 그것을 감상하기 위한 기본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만큼 가장 기초적인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고서 수집가나 연구자들이 고서 수집에서 가장 난감해 하는 경우는 간찰이나 필사본을 대할 때일 게다. 여기에는 물론 내용도 중요하겠지만 누군가의 친필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항상 뒤따르기 때문이다. 또 이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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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8] 가짜 논란을 빚고 있는 난고문학관 전시 김삿갓의 작품 4점. 좌측 아래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선생부지하(先生不知何)시문, 내우혜서(內友惠書)간찰, 반휴서가(半虧書架)시문, 금강산(金剛山)시문.(출처: 강원도민일보 2003. 12. 16)

 

글씨의 진위를 알아내는 방법에 딱히 비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많은 글씨를 접해 보고 나름대로 연구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듯싶다. 다만 연구 방법에도 요령은 있게 마련인데, 다음에 이어질 김삿갓 가짜 글씨 사례는 고서를 감정하는 요령에 관한 좋은 본보기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커다란 업적을 남긴 선인들의 시편(詩片) 하나, 간찰 하나에서 우리는 역사와 문화를 본다. 또 이들의 친필을 통해 마치 선인을 직접 마주하는 듯한 마음을 갖기도 한다. 설령 그 글씨가 예술적 경지를 썩 갖추고 있지 못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누구누구의 친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흠모의 정을 느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박물관에서 주로 접하게 되는데, 박물관은 인간사회의 문화를 기억하기 위한 장치의 하나로, 학문적 계몽은 물론 사회적 계몽을 위한 곳이다.

 

20031011일 영월군에서는 조선 말기의 방랑시인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시세계를 기리고자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난고문학관을 세웠다. 이곳은 김병연의 생가 터와 묘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난고문학관 개관식에 참석하고자, 영월읍 내에서 K일보P기자를 만나 함께 길을 나섰다. 고씨동굴을 지나 옥동에 들어서자 가을 들판이 펼쳐진다. 왼편으로 옥동천을 따라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감흥이 새롭다. 옥동은 고려시대에는 밀주(密州)의 청사가 있었던 곳으로, 그 당시 죄인들을 가두던 ()’이 있던 마을이라 해서 옥동(獄洞)’이라 했는데 어감이 좋지 않다 해서 옥동(玉洞)’으로 바꿨다 한다. 절벽의 가을 단풍도 좋지만 겨울의 설경도 그만이고 사시사철 자연의 변화가 뚜렷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옥동을 지나면 곧 고지기재가 나온다. 재를 넘어 이삼 분 달리면 폐교된 와석분교가 있다. 와석분교를 오른쪽으로 끼고 산길로 접어들면 든돌·싸리골·노루목으로 이어지는 약 5~6킬로미터에 달하는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진다. 내가 박물관 터를 잡기 위해 영월을 찾아다니던 34~35년 전만 해도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숨겨진 비경이었다. 이때만 해도 소달구지 하나 겨우 지날 수 있는 그런 산길이었다. 난고문학관은 이 계곡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데, 영월군에서는 이 일대를 김삿갓 계곡이라 이름 짓고 관광지로 개발한 것이다.

 

문학관 광장에서 개관식을 마치고, 건물이 좀 비좁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전시실에는 김삿갓 친필 글씨라는 설명과 함께 모두 넉 점의 글씨가 전시되어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가벼운 신음이 나왔다. 가슴이 뛰고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쥐똥을 씹은 기분이었다. 동행한 P기자에게 어딘가 마땅찮다는 사실을 알렸다.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당분간 비밀로 하자고 했다. 다음날 영월군 문화관광과 C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김삿갓 글씨에 대한 나의 의견을 조심스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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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9] 영월군 난고문학관에 전시중인 「선생부지하」 시문. 필자는 『고서연구 21』(한국고서연구회, 2003. 11)에 「난고문학관 김병연 친필 관련 자료의 진위에 대하여」란 논문을 통해 난고문학관에 전시된 조선 말기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 자료 넉 점이 가짜라고 주장한바 있다.

 

"내 눈에는 글씨 넉 점 모두 어딘가 이상해 보이니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C과장으로부터, 전문가에게 의뢰해 고증을 거친 작품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해 보라고 재차 충고했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허튼소리 말라는 투였다. 그날 이후에도 그러기를 서너 차례 반복했다.

 

나는 다시 L계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난고문학관 설립 계획에서부터 개관까지 모든 사업의 실무 담당자였다. 그러나 그의 대답 역시 C과장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날부터 이에 관한 글을 준비해 그 해 겨울 고서연구21(200312)난고문학관 김병연 친필 관련 자료의 진위에 관하여란 논문을 발표했다. 물론 원고를 송고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C과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김병연(金炳淵)은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삿갓(金笠)의 본명으로, 순조 7(1807)에 경기도 양주의 안동(安東)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고, () 또는 삿갓은 속명이다. 홍경래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다가 반군에 항복한 김익순(金益淳)의 손자로, 난이 진압되자 익순은 사형을 당하고 일가는 멸족했다. 이때 병연의 나이 여섯 살로,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도망가서 숨어 살게 되었다. 그 뒤 익순의 죄가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자 형제는 아버지 안근(安根)이 살고 있는 양주로 돌아간다. 그러나 불과 일 년 만에 아버지는 화병으로 죽고 어머니 함평(咸平) 이씨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이후 어머니는 강원도 영월로 옮겨 집안 내력을 숨기고 살았다.

 

스무 살 때에 장수(長水) 황씨와 결혼하여 장남 익규(翼圭)를 낳았다. 그 후 집안 내력을 알고는 스물두 살 되던 해에 노모와 처자식을 남겨 두고 방랑길에 나섰다. 사 년 만에 귀향하여 일 년 남짓 머물 때 둘째아들 익균(翼均)을 낳았다. 또다시 집을 떠나 방랑생활을 하다가 철종 14(1863)57살을 일기로 전라도 동복(同福)에서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부지하(先生不知何)시문

 

난고문학관에 소장되어 있는 소위 김삿갓 친필선생부지하(先生不知何)시문과 금강산(金剛山)시문, 내우혜서(內友惠書)간찰, 반휴서가(半虧書架)시문 등 모두 넉 점이다.(*사진 68)

 

먼저 선생부지하(*사진 69) 시문을 살펴보자. 난고문학관 설명문에는 "이 친필 시는 이서면 장항리(노루목)가 고향인 서예가 우창 정근호 선생이 조부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된 것으로 95521KBS 진품명품프로에서 김삿갓의 친필임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김삿갓이 유랑하다 생을 마감한 곳이 화순 동복 구암리였음을 뒷받침할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씌어 있다.

 

우선 이 시문의 말미에는 "1850년에 난고 김병연이 동복여소에서 쓴 시묵(試墨)이다(道光三十年蘭皐金炳淵書于同福旅所試墨也)”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볼 때 이를 김병연의 친필로 단정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과연 김병연이 자신의 이름을 직접 기록으로 남겼겠느냐 하는 점이다. 김병연은 세상을 등지고 평생 방랑생활을 한 사람이다. 자신의 신분과 집안 내력을 숨기고 살면서, 이처럼 난고 김병연이라고 호와 이름을 자랑스레 밝힌다는 것은 그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어딘가 어색하다.

 

둘은, ‘도광(道光)’이란 청나라 연호를 썼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조선사회에서 통용되던 연호로, 관변문서(官邊文書)나 족보의 서문, 발문, 또는 행장(行狀), 비문(碑文) 등 예와 격식을 갖춘 기록문에서 그 사용한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나 평생 방랑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글로써 비판하던 김병연이 굳이 중국의 도광연호를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다음으로 선생부지하글씨의 호불호(好不好)에 대해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글씨는 김병연이 쓴 것만큼 결코 잘 쓴 글씨가 아니다. 사실 나는 아직 김병연의 필적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혹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의 글씨가 얼마만큼 잘 쓴 글씨인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글씨의 좋고 나쁨을 볼 수 있는 안목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호불호란 글씨의 잘 쓰고 못 쓴 정도를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글씨가 잘 쓴 글씨이고 어떤 글씨가 잘 못 쓴 글씨일까. 이것은 말로써는 표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이를 분별해내는 심미안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심미안이 어느 정도인 줄도 모르면서 그저 좋다’ ‘나쁘다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가짜 글씨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결코 잘 쓴 글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 쓴 글씨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호불호를 볼 수 있는 심미안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이다.

 

신석우(申錫愚)해장집(海藏集)기김대립사(記金笠事)에서 김병연의 글씨에 관해, "매일 글 읽는 소리가 낭랑히 그치지 않고 제자백가의 글을 베끼는 붓을 쉬지 않았다. 필법이 또한 고아하고 깨끗하여 참 좋았다고 전하고 있다. 신석우는 한때 김병연과 깊은 교우관계를 가졌고, 훗날 한성부판윤과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신석우가 쓴 글의 내용은 신뢰하기에 충분하며, 그의 글씨를 보는 안목 또한 뛰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김병연의 글씨를 "고아하고 깨끗하여 참 좋았다고 평한 대목에서 김병연의 글씨가 뛰어났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품격이라는 것을 계량해 보일 수는 없지만 어느 수준 이상의 글씨임에는 틀림없다. 난고문학관의 선생부지하글씨는 이 수준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이 글씨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잘 쓴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누구의 글씨를 흉내내고자 하여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체로 자유롭게 썼기 때문이다.

 

가짜 글씨를 만드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본(母本)을 모사(模寫)하는 방법이다. 이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모본을 참고로 하여 모사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모본을 유리판 사이에 놓은 뒤 그 위에 종이를 얹고 유리판 밑에서 형광등 불빛을 비추어 그대로 복사하듯이 모사하는 방법이다. 이 두 방법은 이미 알려진 유명인의 글씨 위작에 많이 쓰이는 수법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모두 비벽(鄙僻)과 갈필(渴筆)이 나타나지 않는다. 비벽이란 글을 쓸 때 자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관으로, 일종의 갈겨쓰는 버릇을 말한다. 또 갈필이란 붓에 먹물을 많이 묻히지 않고 글씨를 쓰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달필(達筆)이나 속필(速筆)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그러나 모사한 글씨에서는 비벽과 갈필이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글씨의 꼴을 흉내내는 데 급급하다 보니 속도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모본 없이 글씨를 쓰는 것인데, 이 방법은 모본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필체대로 글씨를 쓰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다. 김병연의 경우처럼 친필이 존재하지 않아 모본으로 삼을 만한 자료가 없을 때 많이 쓰이는 수법이다. 때문에 어떤 필체로 쓴들 그 인물의 필체라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짜 글씨는 구별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나 가짜 글씨에는 앞에서 말한 비벽과 갈필이 나타나지 않는다.

 

선생부지하글씨에서는 비벽과 갈필이 나타나 있지 않다. 필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가짜 글씨를 가장 쉽게 판별해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비벽과 갈필이다. 물론 이것은 육안으로도 알아볼 수 있으나, 이를 더욱 쉽게 판별하는 방법은 형광등 불빛이나 햇빛에 비춰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때 필력이 있는 글씨는 먹 자국이 거침이 없이 자연스러운 데 반해, 필력이 떨어지는 글씨, 즉 가짜 글씨는 속도감이 없고 필치가 부자연스럽다. 또 더러는 개칠(改漆)한 흔적이 역력히 나타나기도 한다.

 

선생부지하같은 시문이나 간찰은 봉투에 넣어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관례이다. 물론 처음에는 봉투에 넣어져 있었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봉투는 분실되고 안의 내용물만 남아 있는 일도 흔하다.

 

선생부지하의 경우에는 봉투는 없고, 접혔던 부분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등 손상된 흔적이 있다. 이런 문서는 보통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접힌 채 보관되기 때문에, 외부의 여건에 의해 종이가 손상을 입었다면 그 부위가 접혔던 겉 부분이 더 크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종이를 펼쳤을 때, 겹쳐서 접었던 부위가 규칙적으로 손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시문은 접혔던 곳의 손상 부위가 규칙적이지 않았다. 이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손상된 것으로는 볼 수 없는 상황이다.

 

한편 선생부지하시문은 배접이 되어 있다. 배접이란 글씨를 쓴 종이나 천 뒷면에 다른 종이나 비단 따위를 겹쳐 붙이는 것을 말한다. 원래 이것은 표구의 한 과정으로, 작품의 보관 측면에서 보면 굳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감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종이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배접을 할 수도 있지만, 배접을 하면 그만큼 진위 감정에는 어려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위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 중 하나다.

 

선생부지하시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도연명(陶淵明)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의 일부와 김병연의 시로 알려진 두 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러나 김병연이 자신의 시문을 언제 어디서 썼다는 것을 밝힐 정도로 예를 갖추고 도연명의 시를 함께 적어 놓은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또 이 세 편의 시를 구분하지 않고 연결하여 쓴 것도 그렇다. 강원대 한문교육과 남윤수(南潤秀) 교수는 "내용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을 김삿갓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평했다.

 

설령 선생부지하가 누군가의 친필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김병연의 친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가 또 있다. 이 글씨가 김병연의 친필이라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의 또 다른 필적과의 대조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세간에 떠도는 김병연의 필적이란 하나같이 근거 없는 것뿐이므로 대조 작업조차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