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수)
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한 삼십 년쯤 됐을까. 호산방 손님 중에 젊은 화가 H씨가 있었다. 하루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책 가운데 한 권을 들고 와 자랑했다. 1955년 10월 산호장(珊湖莊)에서 발행된 박인환(朴寅煥)의 『선시집(選詩集)』이었다.(* 사진 64) 원래 그 책은 1955년 10월에 출간되어 서점에 배포되기 직전, 인쇄소 화재로 모두 불탔다. 그래서 이듬해인 1956년 1월에 다시 제작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박인환 연구자나 몇몇 수집가 정도다.
박인환의 『선시집』은 1956년 1월에 다시 초판본이 출간되었으며, 표지는 호부장(糊付裝)으로 되어 있다. 호부장은 제본에서 옆을 매는 방식의 하나로, 속장을 철사로 매고 표지를 싼 다음 표지째 함께 마무리 재단을 하는 제본 방식이다.
그런데 H씨가 가지고 있는 『선시집』은 하드커버의 고급 양장이었다. 판권의 발행일자는 ‘1955년 10월’로, 바로 화재 직전에 출판된 오리지널 판본이었다. 물론 나 역시 그 판본은 처음 보았다. 흥미롭게도 그 책에는 저자가 시인 장호강(張虎崗)에게 증정한 친필 서명이 있었고, 그 옆에는 만화가 김의환(金義煥)이 직접 그린 박인환의 캐리커처가 있었다. 또한 면지와 속표지 그리고 뒤표지 면지 등에는 김광주(金光洲) 이진섭(李眞燮) 송지영(宋志英) 박거영(朴巨影) 차태진(車泰辰) 김광식(金光植) 조영암(趙靈巖) 등의 친필 메모와 함께 ‘1956년 1월 16일’에 썼다는 기록도 있었다. 또 같은 날짜의 『한국일보』 서평이 스크랩되어 붙어 있었다. 이로 미뤄 본다면 1월 16일 출판기념회가 있었고, 이 자리에서 지인들이 이 책에 친필 축하 메시지를 담았음을 알 수 있다.(* 사진 65~67)
어쨌든 박인환은 화재 직전에 이 책을 인쇄소로부터 직접 전해 받았고, 출판기념회 때 이 오리지널 판본을 장호강에게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화재를 피한 오리지널 판본이 몇 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이 책이 유일본이 아닌가 싶다. 당시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여러 문인들의 친필 메시지가 적혀 있다는 것은 그때 이미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음을 잘 말해 준다.
寅煥이 인환이가
冊가게에서 처음 만난 그 寅煥이가
十年을 하로같이
詩 속에서 詩를 찾으며 읊으며
용하게도 오늘까지 뻗혀왔다는게
진정 반갑구나.
소설가이자 당시 언론인이었던 송지영의 축하 메시지다. 이 메모에 등장하는 ‘책가게’란 박인환이 종로에서 경영하던 고서점 ‘마리서사(茉莉書肆)’를 말한다. 박인환은 1945년 해방을 맞자 평양의학전문학교를 다니다 말고 그 해 말 종로에 고서점 ‘마리서사’를 차렸다.
마리서사란 이름은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마리 로랑생은 19세기 프랑스 모더니즘의 선구자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연인이기도 하며, 당시 몽마르트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싱싱한 영감을 불러일으킨 화가였다. 아폴리네르는 로랑생을 만나고 많은 예술적 자극을 받아 시를 썼으며, 연인에게 바치는 시 「마리」를 남기기도 했다. 박인환이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을 통해 프랑스 문학과 그 예술적 삶을 지향했음은, 박인환 아내의 회고나 김수영(金洙暎)의 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후 마리서사는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의 모태이자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송지영과 박인환은 이때부터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박인환은 마리서사를 생활의 방편이라기보다 문학 교류의 한 장(場)으로 여기면서 운영했던 것 같다. 그곳에 진열된 책 대부분은 그가 소장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마리 로랑생, 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시인들의 시집과 일본의 시 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리서사에는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들이 모여들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김수영은, 박인환이 마리서사를 운영하던 두 해 남짓 동안이 "박인환이 제일 기분 내던 때”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H씨가 소장한 『선시집』 오리지널 판본은 인간 박인환의 정취가 물씬 배어나는 책이다. 따라서 이런 내력을 갖고 있는 책이라면 누구든 욕심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날 나는 안복(眼福)을 누린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나는 이같은 귀한 고서를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남의 귀한 장서를 내놓으라고 말한 적은 없다. 내가 욕심나는 책이라면 남도 귀하게 여기기는 마찬가질 텐데 어떻게 그것을 내놓으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기껏 하는 소리가, "이다음 책을 처분할 의사가 있으면 내게 제일 먼저 알려 주시오” 하는 정도다.
그리고 이삼 년 후, H씨로부터 고서 일부를 정리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니 그림공부를 게을리 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때 삼사백 권의 문학서적을 입수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박인환의 『선시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그 책 한 권 때문에 삼사백 권의 책을 산 셈이라 말해도 틀림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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