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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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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9

국악의 위상정립 사업(6)

           국악신문 특집부

 

 

국악신문의 박헌봉 선생 회고록 國樂運動 半生記는 제98호부터 6회에 걸쳐 수록했다. 원래는 신동아(新東亞)19667월호부터 9회에 걸쳐 발표한 글이다. 결국 작고하기 11년 전에 쓴 것이니 이후 10여년의 생애는 진술하지 못한 것이 된다. 본 회에서는 10여년의 생애 중 중요한 업적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박헌봉 선생의 민속악 발전에 기여한 실상이 제시 될 것이다.

 

기산.jpg
기산 박헌봉 선생

 

#해방 직후 혼란기 국악을 재건한 업적은 무엇보다 앞서 평가되어야 한다다음은 전 한국불교민속학회 황윤식(1934~2020)회장의 이에 대한 평가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민속음악계는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신분사상에 의하여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였고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민족혼이 강하게 배어있다고 하여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그러나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한 우리 민족은 해방의 환희를 민속음악을 통하여 한껏 분출할 수 있게 되었다그리하여 우리의 민속음악은 천시의 대상도 아니고 탄압의 대상도 아닌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어 갔다이 과정에서 기산 박헌봉 선생을 중심으로 국악건설운동본부국악학교 기성회 등이 조직되었고이를 통해 국악의 새로운 발전을 추구하려는 문화운동이 전개되어 갔다.”

 

#1960년 3월 5일 국악예술학교가 개교했다이는 첫 손에 꼽히는 업적이다민속음악 교육뿐만 아니라 민속악 위상 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이후 학교는 세 번에 걸쳐 개명을 하게 되는데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로 바뀌며 발전해왔다지금은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이후 규모를 갖춘 학교로 발전시킨 박귀희 선생만을 기억하지만 아무것도 없던 초창기부터 국악을 정상의 궤도에 올려놓고학교의 체계를 정립한 박헌봉 선생의 업적 역시 중요한 것이다.

 

물론 혼자만으로 이룬 것은 아니다향사 박귀희 선생만정 김소희 선생이 학교 설립에 많은 힘을 보탰고지영희성금연한영숙선생 등 많은 국악인들이 뜻을 모았다전국에 흩어져 있던 국악의 명인들을 제도적인 교육기관에서 수용하면서 효과적인 교육이 가능하였다또한 전국에 흩어져 있던 민족예술인을 정규 교육기관에 수용하게 되면서 이들에게 민족예술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했다

 

이와 같은 과정은 국악교육의 정상화를 기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국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산시킴으로써 국악발전의 한 이정표를 마련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이들을 규합하여 함께한 지도력은 당시 선생의 열과 성에 동의한 결과이다.

 

국악계의 회고 중에는 "국악예술학교를 중심으로 국악인들을 규합하지 못했더라면 민속악은 아악계에 눌려 제대로 된 평가와 대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거칠게 말하자면 문화재 지정은 고사하고 존재마저 유야무야해졌을 것이 분명하다그러한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라는 발언이 있게 된 배경이다또한 이에 더하여 사단법인(社團法人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을 설립하여 후에 현 한국국악협회(韓國國樂協會)로의 발전을 견인했음으로 기성국악인(旣成國樂人)의 단합과 국악계 혁신(革新)에 디딤돌을 놓은 일은 주목되는 업적이다생님이 품었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소중히 전승되어야 한다.

 

6 국악대관 출간을 에 수록할 일중 선생의 축하 휘호 (1).jpg
[국악신문] 국악대관 출간에 수록할 일중 선생의 축하 휘호 (1)

#선생의 두 번째 업적은 민속악계 국악인들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제도화 한 사실이다당시 문화재관리국의 기예능보유자 지정에 앞장섰다는 점이다사실 60년대 이전의 민속악계 국악인들은 탁월한 예술적 재능이 있다 해도 교육수준이 극히 낮다는 이유로 예능에 대해 이론적 투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전무했다그러니 오늘날 소위 인간문화재(국가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의 지위를 누리고 예술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과오늘날과 같은 국악의 진흥을 가져오게 된 것은 선생의 공로이다.

 

1964년 6월에 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을 조사했고이를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꼭두각시놀음으로 지정하였다. 1964년에는 판소리 춘향가를 조사하고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로 지정하였다. 1965년에는 진주농악을 조사하고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하였다. 1966년에는 진주검무를 조사하고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하였다. 1965년에는 진주 농악을 조사하고 이듬해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하였다. 1966년에는 거문고산조를 조사하고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로 지정하였다.

 

이상과 같은 초기 민속음악의 제도적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 낸 것은 선생 자신이 문화재위원으로 위촉 받은 상황이어서 가능했고반대파나 다른 분과 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국악에 대한 이론과 설득력 때문이다.

 

#세 번째는 1966년 이론서 창악대강(唱樂大綱)’의 대작 저술 실적이다이는 이선유(李善有, 1873~1949)와 유성준(劉成俊, 1873~1944) 같은 경남 지역의 판소리 명창들과의 교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이선유 판소리 동편제 명창으로 1933년에 오가전집(五歌全集)’을 펴낸 판소리 이론가인데 창악뿐 아니라 국악 관련 이론을 배웠다유성준은 경남 하동에서 박귀희 등에게 판소리를 지도하기도 한 명창이다역시 이분으로부터도 창악을 배웠다. 1934년에 사재를 털어 진주음률연구회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역임한 전후의 일이다.

 

6 국악대관 출간을 에 수록할 일중 선생의 축하 휘호 (2).jpg
[국악신문] 국악대관 목차 원고, 박헌봉 선생 자필

 


창악대강은 판소리와 단가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서술하였고, 정확하면서도 방대한 주석을 단 것이 특징이다. 첫 째는 창악의 개념을 제시했다. "唱樂은 우리 겨레의 民俗音樂이라고 선언하면서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이 본디 창악의 참모습"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창악의 범주로 단가, 판소리, 창극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다음은 창악의 기원과 유래를 제시했다. 판소리 광대의 기원과 유래, 전승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증하였다. 광대의 유래에 대해서는 무속과 연관시켜 고찰하였고, 창악의 초기 모습을 굿판과 잡희에서 찾아내어 이를 민족음악의 출발로 보았다. 이 책을 통해 선생의 국악관과 연구자의 자세를 확인할 수가 있다.

 

#네 번째는 경남의 대표 지역축제 개천예술제의 창안이다. 이 축제는 1949년 정부 수립 1주년을 기리고 예술문화의 발전을 위해 시작되었다. 당시 행사는 103일 개천절부터 6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대통령이 참석하는 예술제로 규모가 커졌는데, 1974년부터는 예술의 대중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행사의 변화를 꾀하였다. 1981년 제31회 대회 때에는 개천예술재단이 설립되었으며, 1983년에는 경상남도 종합예술제로 지정되었다. 2000년에는 진주문화예술재단이 설립되면서, 이후 개천예술제는 전통문화예술과 지역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로 이 행사를 선생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한다. 1949년 전후는 대한국악원의 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때였다. 문교부 예술위원회의 음악위원으로 국악뿐 아니라 전통예술 문화 조사를 준비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에서 고향에 축제를 제안한 것으로 해방후 출현한 최초의 축제를 선생이 창안한 것이다.

 

선생은 국악대관(國樂大觀)의 저술에 힘쓰시다가 197758일 세상을 떴다. 선생의 빛나는 공적은 국민훈장 동백장(冬栢章)과 금관문화훈장(金冠文化勳章)으로 국가가 인정하였다.

 

이상에서 간추린 선생의 업적은 더 많은 연구로 더해 질 것이다. 국악신문기사를 통해 보면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선생을 기리는 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2013년에는 산청군에 기산국악당이 건립되었다. ‘사단법인 기산국악제전위원회가 본격적으로 현창 사업을 맡게 되면서, ‘기산국악제전 및 전국국악경연대회등 선생을 추모하고 정신을 잇는 여러 행사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뜻 깊은 창악이 탄생하였다. ‘산청아리랑이다. 박범훈 작곡에 홍윤식 작사로 산청군이 낳은 명사들과 명소, 지리산의 아름다움과 지역의 특색들을 세마치장단의 경쾌함으로 묘사했다. ‘산청아리랑은 선생이 다시 산청으로 돌아와 다시금 고향을 품은 듯한 푸근한 느낌마저 주기도 한다. 현재 산청군에서 개최하고 있는 각종 행사에서 이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노래로 불리고 있다.

 

이상에서 4회에 걸쳐 박헌봉 선생의 회고록 '國樂運動 半生記'를 살폈다. 이를 통해 박헌봉 선생이 국악의 가치를 정립하고 그 바탕에 민속음악이 있다는 소중한 논지를 정립하는데 기여한 거의 유일한 인물임을 확인했다. 이에 대해 국악신문이 일반 독자들에게 확산 시키는데 기여하기 위해 선생의 회고기를 재수록 한 것이다. 이는 곧 국악신문국악의 위상정립 사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선생이 집필하고 출간을 보지 못한 국악대관국악사는 선생이 말년에 혼신을 기울인 것으로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원고가 발굴되기를 고대한다. 이에 국악신문은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