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기찬숙/아리랑학회 이사
님 웨일즈는 김산과 22차에 걸친 인터뷰 이후 중일전쟁 발발로 난징이 함락되어 활동이 여의치 않자 집필을 위해 중국 연안을 떠나 필리핀 바기오 섬으로 간 것이 1937년 말이다. 이후 집필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 존데이(Johnday) 출판사에서 ‘Song of Arirang’을 발간한 것은 1941년이다. 이 시기 아리랑사 국면에서 보면, ‘아리랑’은 이미 전형성(典型性)을 획득하고, 한국(한민족)이라는 공동체 아이덴티티 표출 기능을 하며, 다층성과 잠재성을 지닌 메타문화(meta culture)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책의 헌사격인 ‘망명과 투옥과 국가적 굴욕을 담은 오래된 전래민요 5절 아리랑’이나 20여 회의 명징한 아리랑 진술들은 동북아시아 조선(Korea)의 국제적 질서를 담고 있다. 나아가 중국의 거대한 공산혁명 광풍 속에서 결코 바닷물 속의 소금 같이 녹아 버리는 존재가 아닌, 조국 혁명을 이루려는 한 조선 청년의 빛나는 투혼을 그려내기도 했다. 거기다 아름답고 슬픈 노래지만, 죽음을 넘고 넘어 끝내는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는 활화산 같은 열정을 추동하는 민중의 노래임을 발현해 냈다. 1930년대 말 동아시아적인 정황의 공식적이면서 지극히 비공식적인 탁월한 기억과 기록의 합체인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김산은 1930년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고, 이어 1933년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형을 산 것을 빌미로 1938년 캉성(康生)에 의해 트로츠키주파이자 일본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총살당했다. 님 웨일즈는 남편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 1905~1972)와 17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혼한 개인 사정으로 활동을 하지 못했고, 미국 정계의 반공주의 강세로 책은 묻히고 말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 어디에서도 읽혀질 수 없었다.(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으나 마오쩌둥이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공산혁명을 이루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극동의 교두보인 중국을 공산세력에 내주게 된다. 이에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님 웨일스의 이 책은 미국 대중에게 보급될 수가 없었다.)
이 책은 3년 후에나 존재가 드러난다. 2차 대전이 후반기로 치닫던 1943년 그 해 7월, 김구선생은 장제스(蔣介石,1887~1975)를 만나기 위해 고단한 여정을 보내야했다. 장제스를 설득하여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의제화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장제스는 11월 카이로(Cairo)에서 루즈벨트와 처칠과의 회담에서 종전 후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사실을 명문화 하였다. 그런데 이 회의에 참석한 루즈벨트는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Song of Ariran’을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시 김구선생은 장제스와의 만남을 위해 오가는 과정에서 아리랑(광복군아리랑)을 불렀을 것이고, 루즈벨트는 낮선 ‘Ariran’에 의아(疑訝)해 했을 것이다. 이렇게 김구선생과 장개석와 루즈밸트는 역사적인 카이로회담(Cairo Conference)에 아리랑이 접속했던 것이다.
이 같은 아리랑은 빛나는 사실이다. 항일혁명 전선에서 그 열기를 북돋워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경 임시정부 특별간행물 ‘중국혁명에 희생된 조선의용군 추도’에 당개 최고의 중국 시인 애청(艾靑)의 추도사에도 아리랑이 언급될 정도이다. 애청은 당시 ‘광서일보’ 편집자로 활동한 조선의용대원 김창만을 만나면서라고 했다. 1988년 발행된 ‘애청시선집’에서 "애청은 조선혁명가들에 대하여 경모의 심정을 품고 있던 가운데서 아리랑을 배워 근 5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가사를 잊지 않고 부른다.”라고 했다. 이어 다음과 같은 증언을 이었다.
"우리는 주저 없이 스스로를 전쟁에 바치기로 맹세했다. 무한히 광대한 대지 위에서 우리와 중국의 형제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투쟁한 지 어언 5년이 되었다. 아리랑의 노래 소리가 화남(華南)에서 화북(華北)까지 울려 퍼지고, 우리의 족적은 중국 전장 곳곳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런 아리랑의 동지적 유대는 1935년 중국 공산당에서 음악적 명성을 얻은 정부은(정율성,鄭律成, 1914~1976) 같은 뛰어난 조선인 음악가에 의해 항일혁명 의지와 결합시키는데 성공한 결과다. 아리랑은 중국 형명군들에게도 조선의 힘 있는 노래라는 사실을 인식시킨 것이다. 바로 이런 정황들이 1930년대 ‘김산 아리랑’의 배경인 것이다.
한편 이 시기 만주와 조선과 일본 속의 또 다른 아리랑 상황은 이와 배치되기도 한다. 시대상이 직조한 탁류에 휩쓸리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중반에는 엔카풍(演歌風)‘아리랑夜曲’이 일본과 조선에서 유행하고, 1940년에는 일본 히비야공원(比谷公園)에서 ‘한일합방 30주년 기념’ 행사에서 아리랑이 연주되었다. 만주에서는 총독부의 이주 정책 홍보를 위한 ‘만주아리랑’이 불렸고, 조선에서는 ‘애국아리랑’이나 ‘아리랑술집’ 같은 친일적이고 자폐적인 가요(歌謠)가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네//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라는 정책 선전가(宣傳歌)이고, ‘아리랑술집’은 "눈물로 미뤄다오 한숨도 미뤄다오/조각달 내 신세가 타관에 두고//잔속에 노래 실어 부르자 부르자/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자탄가(自歎歌)이다. 뿐만 아니다. 총독부의 동원에 ‘악극(樂劇)류 아리랑’ 작품들이 여러 공연단체들에 의해 산업전선을 돌고 있었다.
이런 탁류에 비해 중국 연안 항일전선 상의 김산에게는 그 격렬함만큼 주옥같이 빛나는 아리랑이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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