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우리가 몰랐던 국악음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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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우리가 몰랐던 국악음반 이야기’

  • 편집부
  • 등록 2021.01.19 21:08
  • 조회수 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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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을 통한 국악 해설서 우리가 몰랐던 국악음반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해리티지 채널’(문화재청)문화유산 채널’(한국문화재단), 그리고 월간 객석에 발표한 글들을 재구성한 글모음이다. 저자는 서양 고전음악 매니아로 자처하다 "서양음악에 비해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한 국악에 매력을 느낀 후국악음반 수집으로 전향, 국악 애호가로 정평을 얻고 있는 정창관선생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국악 음반의 역사를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 제기한 부분이고, 둘은 국악 테마음반 평가와 해설이고, 마지막은 주요 아리랑 독집음반에 대한 분류와 해설이다. 이 중에 이 책의 눈대목은 단연 첫 부분인 국악 음반역사 부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초기 한국음반사는 곧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문제 자체를 몰랐던 부분을 뒤늦게 인식했으나, 아직 모두 해결하지 못한 상황이다. 한국 근대문화사, 그 중에서도 대중문화의 주축인 음악의 근대 이행과정에 대해 그 중요성과 미해결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책을 익는 독자들에게 지적 자극을 주리라고 본다.

 

# 우리 민족 최초의 음반은 18967월 워싱턴의 하워드대학교 재학 중인 한국인 유학생 3명의 노래를 앨리스 플리처(미국의 인류학자)가 녹음한 에디슨 원통음반 6개이다. 이 사실은 3년 후 황성신문 1899310일자에 녹음이 되었다고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녹음 자료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19984월 한국국악학회가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11곡의 곡명과 음원이 공개되었다. 여기에는 아리랑(‘love song-Ar-ra-rang') 3곡을 비롯하여 8곡이 담겨있다. 이 귀한 음원은 저자의 여러 노력으로 복각음반으로 발매하여 연구에 기여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 버지니아주 의회도서관 외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이 음반은 사실 미국으로서는 수많은 음반 중의 6개일 뿐이지만, 우리로서는 최초의 한국인 노래가 녹음된 역사적인 원통음반 6이다. 그러니 이를 이양 받아 국내 박물관에 보관하고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만 할 것이다. 저자는 이를 이양 받으려는 여러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했다. 그러나 미 의회도서관은 거부의사를 전해왔다고 한다.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 책 곳곳에서 토로하고 있다. 이를 한 전문가의 안타까움으로만 읽고 말아야 하는가? 이는 분명, 우리 근대음악사의 공백으로 잃어버린 고리인 것이다.

 

# 우리나라 보물제 339호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서봉총(瑞鳳冢)’ 출토 금관(金冠)’이다. 서봉총은 경주시 노서동 노서리 129호 고분인데, 이름이 의외이다. ‘는 스웨덴의 한자표현 서전(瑞典)의 첫 자이고, 봉황 장식의 금관이 나온 묘라는 뜻의 鳳冢이 합성된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이름의 배경에는 우리 노래 음반과 기묘한 인연을 맺고 있다는 사실에서 주목을 하게 된다.

 

192610, 일본에는 스웨덴의 황태자이자 고고학자인 구스타프(Gustaf) 공작이 국빈으로서 방문하고 있었다. 일제는 구스타프 공작이 고고학자라는 점을 파악하고 조선의 경주에서 금관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 무덤 발굴에 참가해달라고 청했고, 공작 또한 고대 동양의 무덤을 직접 발굴할 기회에 호기심을 갖고 받아들였다.

 

1926109, 구스타프 공작이 식민지 조선 경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튼 날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이 내려와 불국사와 석굴암을 관람한 뒤 서봉총에 도착해 발굴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미 황태자가 도착하기 전까지 일본 고고학자들이 미리 발굴을 거의 마치고 목관만을 남겨놓은 채 황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황태자가 직접 금관을 들어 나무상자에 넣게 되었다. 바로 이런 사연으로 스웨덴의 한자표현 가 붙게 된 것이다.

 

이런 이벤트를 벌인 총독부와 황태자는 기념으로 전나무 식수를 하는 등 다양한 선전활동이 이뤄졌다. 그리고 의외의 기념품도 전달되었다. 그것은 일축조선소리반유성기 음반 20장이었다. 이 레이블은 1911년부터 1927년까지 발매한 조선소리 음반으로 귀중한 음원이다. 이 사실은 1928년 발행된 조선레코드총목록서전황저전하헌상곡(瑞典皇儲殿下獻上曲)’이란 제하에 분명히 밝혀져 있다.

 

20장의 음반들에는 송만갑의 단가, 김금화와 유운선의 아리랑, 홍난파의 피아노 연주곡 등이 수록되었다. 저자는 "아주 오래된 음반으로 한국음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이 음반 중 12장의 음원은 국내에서 발굴된 음반에서 확인되었으나 8장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확인이 된 음원도 상태가 아주 열악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총독부가 선물한 20장을 추적하였다. 스웨덴 황실유물이 이관된 스톡홀름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리스트까지 추적했다. 그러나 그 단서를 찾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음반을 스웨덴으로 가지고 가지 않았는지, 스웨덴 황실에서 폐기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 실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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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축조선소리반’ ‘서전황저전하헌상곡’ 20, 이는 일본이 스웨덴 왕자에게 식민지 조선 왕릉을 파헤친 비문화적 만행, 도굴사(盜掘史)의 한 단면을 증거 하는 사료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스톡홀름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목록에 없는 이유와 이를 추적하는 데는 새로운 발상을 필요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 남겨져 있을 것이란 전제로 추적을 재가동 하자는 것이다

 

이를 전제로 하면 구스타프는 황태자이기보다는 고고학자로서 식민지의 비문화적 행위에 동조한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구스타프는 이를 박물관에 이관하지 않고 또 다른 방식으로 남겼을 것이란 기대이다. 이 경우에는 포장된 그대로일 것이고, 당연히 상태는 미사용 최상급일 것이다.

 

또 하나의 추정도 가능하다. , 일본에 남겨져 있을 수 있다는 전제이다. 당시 구스타프의 의전팀은 일본 관리들이다. 이들은 성향으로 보아 분실이나 파손은 있을 수 없다. 조선에서 일본에 도착한 시점뿐만 아니라 스웨덴으로 출항 할 때까지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파손이 쉬운 SP음반임으로 특별 취급을 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구스타프는 정중히 반려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이 경우에는 이 음반은 일본 국가 기관에 음반 외적인 표기로 보관되었을 것이고, 역시 상태는 최고음질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란 기대다.

 

스웨덴 왕자가 기증 받은 일축조선소리반’ 20, 단순한 음반 20장이 아니다. 당시 대중음악의 상업적 매체 의존성, 일본의 우리음악 음반 생산과 판매권 장악 상황, 일제의 마구잡이식 고분 발굴과 유물 반출, 식민 지배의 국제적 이용, 이 모두 식민지의 조선적 상황이다. 당연히 20장의 음반도 너무나 조선(한국)적인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전자는 아프게 인식해야 하고, 후자는 찾기를 노력할 필요가 있다.

 

# 저자는 국악 음반의 역사 마지막 ‘100년 후 우리문화유산이 될 CD음반’ 739~11줄에서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했다.

"100년 전에 출반된 유성기 음반 쪽반이 문화재청 발간 ‘2010년 근대문화유산 음악분야 목록화 조사보고서에 그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CD음반도 100년 후에는 문화유산으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예견은 앞에서 제시한 두 가지 잃어버린 고리처럼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일침이다. 저자는 1986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CD로 발매된 분야가 한국 가곡인데, 이에 대한 수집과 정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문제 제기이다. 한국 가곡계의 기관 단체에게 분발을 촉구한 것이다아마 저자는 바랄 것이다. 100년 후 초기 가곡 CD음반 역사에 잃어버린 고리없이 온전한 사실에 연구자들이 우리가 몰랐던 국악음반 이야기’ 739~11줄 내용이 기여했다는 것을 인용하기를. 당연히 오늘의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三目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