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목)

잡가에 실려 온 70년, 영원한 소리꾼, 묵계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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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게 듣다]

잡가에 실려 온 70년, 영원한 소리꾼, 묵계월

  • 편집부
  • 등록 2021.01.18 03:41
  • 조회수 2,802

백이숙제 착한 이와 도척 같은 몹쓸 놈도 죽어지면 허사로다.
역려건곤에(逆旅乾坤) 부생이 약몽(若夢)하니 즐거움도 얼만고
병촉야유(秉燭夜遊)하며 독서담론 자락하니 한가하기 측량없다 ······.
일생이 이러하니 상산사호(商山四皓) 죽림칠현 한가롭다.
이만하면 적송자(赤松子) 안기생(安期生)을 부러하랴
범려(范蠡)의 오호주(五湖舟)와 장자방(張子房)의 사병벽곡(謝病辟穀)
소광의 산천금(散千金)과 도연명의 귀거래는 모두 다 작은 일이 아니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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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12잡가에 실려 살아온 영원한 소리꾼인 그는 상ㆍ중ㆍ하청을 자유로이 구사하며 상청에서 올려 꺾는 끝막음소리가 단연 압권이다

 

깊은 밤, 은근한 석유 등잔 불빛이 창호지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한동네 또래 할머니들 대여섯이 둘러앉아 ‘이 집’ 며느리가 읊는 알듯말듯한 소리를 내 신세와 견줘 가며 듣고 있다. ‘소리’하는 며느리가 지칠까 봐 이따금씩 ‘그려!’ 하며 추임새로 부추긴다. 할머니 무릎에 앉아 뭐가 뭔지도 모르며 골똘히 듣고 있던 손자 녀석은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이 때 구슬픈 듯하면서도 청아한 목소리로 읊어 대던 ‘며느리의 소리’가 바로 ‘삼설기’다.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같은 얘기책에 청을 넣어 구성지게 읽었다.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게 책 읽고 편지 읽는 투의 바로 그 ‘목청’이었다.

삼설기는 수많은 경기잡가 중에서도 엄연히 ‘족보 있는 소리’다. 잡가에 능한 소리꾼이 많건만 묵계월(墨挂月ㆍ72,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씨의 삼설기는 단연 독보적이며 발군이다. 그래서 묵씨는 ‘묵계월의 삼설기가 기막히다’는 칭송을 들을 때마다 16세 적 수양모(이정숙) 집 사랑방까지 찾아와 그 소리를 가르쳐 준 이문원(李文元) 선생을 잊지 못한다.

인간문화재 묵계월 씨는 또래 소리꾼 이은주안비취 씨와 함께 꽤나 알려진 이름이다. 설이나 정월 대보름, 추석 등 민족 고유 명절 때면 TV를 통해 ‘묵계월과 그 문하생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다. 늘 깨끗한 한복에 쪽머리나 찌고 만단 시름없이 소리만 하고 살 것 같은 묵씨에게도 인생의 우여곡절은 깊다. 그가 살아 온 ‘한 생애’는 묵씨 자신의 것이라기 보다는 동시대를 살아 온 동료, 선ㆍ후배 국악인들과도 연관지어 가볍게 지나칠 내용들이 아니다. 바로 국악 1세대들의 현장 육성이기 때문이다.

묵씨는 서울에서 나고(중구 광희동 2가 357번지) 자란 순 서울 토박이다. 아버지(이윤기)는 언제 돌아가셨는지 기억도 없고, 열 한 살 때 만난 양어머니(이정숙)에 의해 한 소녀의 운명은 반전해 버리고 만다.

"그 집에 살던 양언니 이름이 묵계홍이었어요. 소리는 별로였지만 얼굴이 예뻤습니다. 계월이라 지으면 팔자가 좋아질 것이라며 그 집 성을 따 묵계월이라 부르게 된 겁니다.”

그 때가 열 두 살 적. 본명 이경옥(李瓊玉)을 버리고 예명 묵계월이라 써온 지 60년이 넘었다. 웬일인지 이씨 집안에는 남자가 귀해 족보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며 아쉬워한다. 수양어머니는 소리 선생 이광식(李光植) 씨를 불러 개인 학습을 시켰다. 1년여 동안 여창 지름, 남창 지름, 시조, 가사 등 기초를 익혔지만 뛰어난 소리는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양모 손에 이끌려 조선 권번에 입적한 것이 13세. 여기서 주수봉(朱壽鳳) 씨를 만나 경기12잡가를 속속들이 배우게 된다. 이 때 조선 권번에는 70~80명의 예기들로 붐볐고 하규일(河圭一) 씨가 가곡을 가르치고 있었다. 기악, 무용부도 있었지만 묵씨는 오직 경기잡가에만 몰두했다. 권번 학습이 끝나면서(14세) 과장에도 더러 나가고 사랑놀음에 자주 불렸다. 자그마한 몸매에서 터져 나오는 다부진 소리에 사랑어른들은 매료됐고 가는 곳마다 ‘묵계월뿐’이었다고 한 시절의 풍류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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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에 소리해 먹고살 팔자라면 이골나게 배워야 되겠더군요. 독선생(김윤태)을 모셔다 붙임새를 새로 보태고 최정식(崔貞植) 선생을 찾아가서는 자청해서 경기민요를 배웠습니다. 무슨 짓이든 해야 먹고사는 세상, 확실한 ‘자기 일’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18세에 ‘화초머리’ 얹은 채 인력거를 타고 명월관, 국일관, 천향각을 주름 잡던 일, 쌀 한 가마니에 7원씩 할 때 놀음채를 25원씩이나 받던 전성기 얘기 등은 행간에 접어 넣자고 한다. 해방(25세), 6ㆍ25 등 민족의 격동기를 살면서도 묵씨는 목청을 지켜 내기 위해 개인 놀음청에도 응했고, 또 그것이 먹고사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부산 피란 시절에도 그랬고 수복 후 서울에 다시와서도 남편과 자식을 위해 목소리만은 생명처럼 아껴야 했다.

이래서 묵씨는 상ㆍ중ㆍ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특히 중ㆍ상청 부분에서 꺾어 올려치는 끝막음 소리는 그의 제자들만이 이어받아 낼 수 있는 일품의 경기민요다.

임정란(林貞蘭ㆍ50, 준문화재)ㆍ고주랑(高柱琅ㆍ46)ㆍ임수연(34)ㆍ조경희(趙慶姬ㆍ33)ㆍ김운경(32)ㆍ정경숙(30) 씨 등이 이수생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는 문하생들이며, 박순금(38)ㆍ최근용(32)ㆍ김진희(28)ㆍ최근순ㆍ최보물(32)ㆍ김덕례(29)ㆍ이명희(25) 등은 전수생.서울 중구 무학동 5번지 중부소방서 건물 앞 ‘경기12잡가 묵계월 전수소’에는 문선진(37), 배미숙(28) 씨 등 교습생만도 30명이 넘어 묵씨의 경기민요 맥은 탄탄하다. 다만 소리좀 할 만하면 결혼과 함께 작파해 버려 들인 공력이 아까울 때가 많다고 늘 아쉬워한다.

풋고추 절임김치 문어 전복 곁들여
황소주 꿀 타 향단이 들려 오리정으로 나간다 ······.
이제 가면 언제 요료 오만 한을 일러 주오.
명년 춘색 돌아를 오면 꽃 피거든 돌아를 볼까 ······.
곤히 든 잠 행여나 깨울세라
등도 대고 배도 대며 쩔래쩔래 흔들면서
일어나오 일어나오 겨우 든 잠
깨어나서 눈떠 보니 내 낭군일세······.

경기민요 중 출인가(出引歌)의 소절들. 경기잡가는 ①유산가, ②적벽가, ③제비가(연자가), ④소춘향가, ⑤집장가(집장 사령), ⑥형장가, ⑦평양가, ⑧선유가, ⑨출인가, ⑩십장가, ⑪방물가, ⑫달거리(월령가) 등 크게 12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이 중 묵계월 씨는 적벽가ㆍ출인가ㆍ선유가ㆍ방물가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1975년 7월 12일), 이은주(李銀珠) 씨는 집장가ㆍ평양가ㆍ형장가ㆍ달거리로, 나머지는 안비취 씨 몫으로 구분돼 있다. 1971년 묵계월, 이은주, 안비취, 김옥심, 이소향 씨 등이 만든 민요연구회는 이들 경기민요꾼의 권익을 증진시키며 사회적 예우도 격상시켰다.

"배운 게 소리였고 살기 위해 잡가를 불렀지요. 누가 인간문화재 같은 거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미국도 구경하고 일본에도 다녀왔습니다. 인생사라는 게 꼭 잘돼야 되겠대서 잘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이제는 여자 나이 70이 넘다 보니(1920년 10월 19일생) 별 생각이 다 든다고 했다. 아차 하면 한 달이고 문득 깨어 보면 한 해가 가 버리고······. 곱던 얼굴 생각하며 젊은 제자들이 찾아들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수시키려 사정하며 가르친다. 22세에 결혼하여 1남2녀를 두고 지금은 손자, 손녀, 외손자, 외손녀를 둔 할머니지만 시름에 겨워 홀로 뒤척이는 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청춘에 짓밟힌 애끊는 사랑
눈물을 흘리며 어디로 가나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묵계월 씨는 임과의 사랑, 인생무상이 듬뿍 담겨져 있는 강원도 민요도 즐겨 부른다고 했다. 애틋하면서도 홀로 서려는 기개가 확실한 애곡(哀曲)이어서 더욱 그렇다고 한다.

• 묵계월 경기12잡가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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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