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와 김초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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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와 김초향

  • 편집부
  • 등록 2021.01.1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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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년 판소리 명창들이 중심이 되어 산조명인(散調名人)·경서도소리명창·민속무용의 명인들을 규합하여 판소리·남도잡가·창극·산조·민속무용·경서도소리 등 한국전통음악의 공연 및 전수를 목적으로 모인 단체이다.

 

1933년 5월 10일에 당시 여류명창 김초향(金楚香)의 발의로 서울 관훈동에 있던 김초향의 집에 송만갑(宋萬甲)·김창룡(金昌龍)·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한성준(韓成俊) 등 판소리명창을 중심으로 한 여러 민속악인들이 모여 창립하였다. 연구회는 만들었으나 사무실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므로 1935년 서울 익선동에 있던 당시 여류명창 박녹주(朴綠珠)의 집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박녹주의 주선으로 전라남도 순천의 독지가 김종익(金鍾益)의 후원을 받아 그 해에 익선동에 큰 한옥을 마련하여 사무실을 차렸다.
 
당시 참가한 명인·명창들을 보면 송만갑·이동백·김창룡·정정렬·김연수(金演洙)·정광수(丁珖秀)·김준섭(金俊燮)·김초향·박녹주·김여란(金如蘭)·임소향(林少香)·김소희(金素姬)·박초월(朴初月) 등이었고, 김재선(金在先)·정원섭(丁元燮)과 같은 명고수(名鼓手), 강태홍(姜太弘)·박종기(朴鍾基)·한주환(韓周煥)·박상근(朴相根)·신쾌동(申快童)·정남희(丁南希) 등의 산조명인, 오태석(吳太石) 등 가야금병창명인, 한성준·박소군(朴素君)과 같은 무용명인(舞踊名人), 김연승(金演承)과 같은 경서도소리명창 등이다.
 
연구회는 여러 가지 공연에 참가하였고, 1935년에는 창극단체를 조직하여 그 해 봄에 정정렬 편곡으로 창극 「춘향전」을 창립기념작품으로 서울동양극장(東洋劇場)에서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힘입어 조선성악연구회 창극단은 대구·부산·진주·광주·전주·함흥·평양·마산·충무·여수·목포·대전·청진·사리원·개성 등지의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공연하며 성황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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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조선가요집(精選朝鮮歌謠集)』(1936)에 실린 김초향

 

김초향(金楚香, 1900-1983)은 경북 대구(현재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여성 명창이다. 성명을 김초향(金初香)이라고 기록한 문헌도 있다.


12세(1911)부터 대구에서 가곡을 배웠고, 14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동백(李東伯, 1866-1949), 김창환(金昌煥, 1855-1937), 정정렬(丁貞烈, 1876-1938), 송만갑(宋萬甲, 1865-1939) 등에게 소리를 배웠다.

 

14세에 장안사의 전속기생으로 들어가 판소리 몇 대목을 배우고, 바로 극장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공연으로 적지 않은 인기를 끌었던 그는 당시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기획 기사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소개되기도 했다. 30대 초반까지 무대에서 판소리 공연을 하고 레코드에서 음반을 취입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32세 때, 조선음률협회에서 박록주(朴綠珠, 1909-1979)·박월정(朴月庭)·김초향의 특별공연으로 기획한 삼대여류명창회(三代女流名唱會)에서 단가 〈장부한〉과 〈소상팔경〉, 〈춘향가〉 중 '사랑가', 〈흥보가〉 중 '흥보 집터 잡는 대목', 〈심청가〉 중 '화초타령' 등을 불렀다. 34세에 조선성악연구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그의 익선동 자택에서 조선성악연구회가 발족했으며, 창립 초기에는 그곳이 연구회 건물로 사용되었다. 결혼 후 국악계를 떠나 은거했다.

 

단가 〈운담풍경〉(Okeh 12100 短歌 雲淡風景 金楚香 鼓韓成俊), 〈춘향가〉 중 '박석티'(Victor 빅타-大衆盤 KJ1075 春香傳 박石틔(上) 金楚香 伴奏빅타-朝鮮樂團), 〈심청가〉 중 '범피중류'(Columbia 40081-A·B 沈淸傳 泛彼中流(上)·(下) 金楚香), 〈흥보가〉 중 '흥보 집터 잡는 대목'(Okeh 12107 興甫傳 興甫집터닥는데(上)·(下) 金楚香 鼓韓成俊), 〈적벽가〉 중 '삼고초려'(Regal C174-A·B 三國誌 三顧草廬 (一)·(二) 金楚香 鼓韓成俊·Regal C175-A·B 三國誌 三顧草廬(三)·(四) 金楚香 鼓韓成俊) 등을 유성기 음반으로 남겼다.


성음의 억양이 지나치고, 일구 일절에 편벽의 힘을 쏟아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럽다는 평이 있었다. 이화중선(李花中仙, 1899-1943)과 대비되는 창법을 구사했다고 하는데,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창법보다는 격정적으로 질러내는 창법을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흥보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춘향가〉 중 '사랑가'도 잘 불렀다. 강태홍(姜太弘, 1894-1957)과 함께 〈운담풍경〉을 작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