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연재소설] 흙의 소리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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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8

  • 특집부
  • 등록 2021.01.07 07:30
  • 조회수 2,702


 

흙의 소리


이 동 희

 

<4>

광풍과 고뇌 그리고 그에 따른 혼란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양녕대군의 폐세자위 충녕대군의 세자책봉은 동시에 행해졌으며 두 달 뒤 왕은 세자에게 선위禪位를 하였기 때문이다. 6월과 8월의 일이었다.

810일 왕세자 충녕대군은 왕으로 즉위를 하였다. 훗날 유일하게 대왕으로 호칭하게 된 제4대 세종대왕이다.

태종은 상왕으로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에 이종무李從茂 임명, 대마도 정벌, 각도 거주 왜인倭人을 노비로 하는 등 군권을 놓지 않고 행사하였다. 22세의 나이로 아직은 나라를 이끌고 다스릴 재목으로서 또는 역량이 부족하다거나 미흡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전날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고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도전鄭道傳을 살해한 후 왕위에 올라 의정부議政府 의금부義禁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 등을 설치하는 등 18년 동안 강한 왕권통치를 하던 태종으로서 총명하고 충직하기만 한 신왕 세종을 도와준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어떻든 그로 인해 세종은 편안한 마음으로 문화정책을 펼치는 결과가 되었다. 달리 말하면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과 정치적 안정 기반을 이어받아 적극적으로 청책을 펼쳤던 것이다. 태종은 상왕으로 4년간 생존해 있었다.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변계량卞季良 윤회尹淮 등에게 고려사 개수改修 지지地志 편술을 하도록 하였으며 주자소鑄字所를 두어 새 활자를 만들고 인쇄법을 개량하여 인쇄 능율을 올리었다. 집현전集賢殿 개설은 무엇보다 빛나는 업적이었다. 학문을 연구하고 예술을 꽃피우는 문화 용광로에 불을 당긴 것이다. 궁중의 학문연구 기관으로 조선 초기에 고려의 제도를 도습蹈襲한 보문각寶文閣 수문전修文殿과 집현전이 있었는데 세종이 즉위하면서 유명무실한 집현전을 확충하여 명망 있는 학사學士들을 편전便殿에 집합시키었다.

집현전 직제로 정1(領殿事) 2명 정2(大提學) 2명 종2(提學) 2명과 정3(副提學) 3(直提學) 4(直殿) 4(應敎) 5(校理) 5(副校理) 6(修撰) 6(副修撰) 7(博士) 8(著作) 9(正字) 1명을 두었는데 제학 이상은 겸직이었고 부제학 이하가 전임관 전임 학사였다. 인원은 몇 차례 늘렸고 1436(세종 18)에는 20명으로 운영되었다.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하여 배출되었고 불철주야 학자 양성과 학문연구에 온 힘을 쏟아 세종대왕은 찬란한 문화의 시대를 열고 세계 제일의 글자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결과를 잉태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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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18

 

집현전의 가장 획기적인 운영은 경연經筵이었다. 왕과 유신儒臣이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자리였다. 국왕이 유교적 교양을 쌓도록 하여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왕은 밤 늦도록 경연을 떠나지 않았다. 서연書筵은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것이었다. 겸관兼官인 집현전 학사들은 외교문서 작성도 하고 과거의 시험관으로도 참여하였다. 사관史官의 일을 맡기도 하고 중국 고제古制를 연구하고 편찬사업도 하였다. 세종은 전적典籍을 구입하거나 인쇄하여 집현전에 보관시키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는 특전도 베풀었다.

그렇게 하여 집현전은 조선의 학문적 기초를 닦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많은 학자적 관료를 배출하여 이후의 정치 문화 예술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편찬사업으로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說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三綱行實 치평요람治平要覽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의방유취醫方類聚 그리고 훈민정음의 창제와 관련하여서는 운회언역韻會諺譯 용비어천가주해註解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동국정운東國正韻 사서언해四書諺解 그 밖의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였다.

한국문화사상 황금기를 이루는 내용들이었다.

 

이 시기는 한국음악에 있어서 또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때였다. 세종은 박연으로 하여금 음악의 정리를 하게 하였던 것이고, 유교정치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것이 의례이며 국가의 유교적 의례인 오례五禮(吉禮 嘉禮 賓禮 軍禮 凶禮)에는 그에 합당한 음악이 따라야 했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을 아악의 부흥, 악기의 제작, 향악鄕樂의 창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박연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간보는 동양 최초의 악보로 132간을 우물 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 놓고 한 칸을 1박으로 쳐서 음가音價를 표시한 세계적 발명이다. 이는 서양의 오선보五線譜와 함께 유량악보有量樂譜이다.

우리 아악의 연총淵叢인 세종악보世宗樂譜의 압권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