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옛날에 준마를 팔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흘 내내 그 말을 시장에 내놓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준마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이에 말 주인은 백락(伯樂)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내게 준마가 있어 팔려고 하는데, 사흘 동안이나 시장에 내놓았는데도 알아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선생께서 제 말을 한번 살펴봐 주십시오. 그리고 자리를 떠나시다가 아까운 듯한 표정으로 한번 뒤돌아봐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제 하루 벌이를 그 대가로 드리겠습니다.”
이에 백락이 말을 살펴본 후 그 자리를 떠나다가 한번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하루아침에 말의 가격이 열 배로 올랐다.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이야기다. 춘추시대 진(秦)나라 사람 손양(孫陽)은 말 감정에 조예가 깊은 명인으로, 그의 탁월한 안목과 식견에 탄복한 사람들은 천마(天馬)를 주관한다는 별의 이름을 따 그를 본명 대신 ‘백락’이라 불렀다. 어찌나 정평이 높던지 그의 품평 한마디에 말 값이 순식간에 몇 곱절씩 뛰어오를 정도였다. 고서 수집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고서에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이 어떤 책에 관심을 보이면 그 책은 비싼 가격으로 팔리기도 한다.
언젠가 청계천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소 친분 있는 지인으로부터, 지금 막 모 서점에서 예사롭지 않은 책을 보았으니 서둘러 가보라는 전화를 받았다. 곧장 달려가니 주인이 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책값은 방금 전화로 전해들은 값의 두 배를 불렀다. 아무 말 않고 돈을 건넨 뒤 책을 들고 나왔다.
불과 한 시간도 안 되어 책값을 두 배로 올렸는데, 이처럼 고서점 주인이 손님에 따라 가격을 달리 부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손님이 책의 내용을 잘 알아보는 듯하거나 꼭 필요해서 살듯 한 경우에는 이런 수법을 쓰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것을 따지고 들면 서로 관계만 어색해지니 그냥 모른 척한다.
그날 구입한 책은 『홍전시략(紅田詩略)』 필사본이었다. ‘홍전시략’은 표제이고 속표제는 ‘자하시집(紫霞詩集)’이라고 씌어 있었다. 자하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화가·서예가로 유명한 신위(申緯)의 호다. 책 윗부분이 조금 손상됐지만 됨됨이가 반듯한 것이 첫눈에 귀물이었다. 시종일관 단아한 글씨로 아주 정성스레 만든 필사본이었다. 대부분의 필사본이 그렇지만 문제는 누구의 친필인가 하는 것이다. 잘 만들어진 필사본 중에는 해서(楷書)로 쓴 글이 많은데, 이 경우 누구의 글씨라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의 글씨가 그랬다. 일점일획을 정확히 독립시켜 쓴 것으로, 파세(波勢)가 없고 방정하게 정서(正書)했다. 또 목판 괘선지의 판심(版心) 아래 어미(魚尾) 상부에 안경 모양의 그림이 새겨져 있어 이채로웠다.
순간 나는 자하의 친필임을 직감했다. 그러니 책값을 두 배로 불러도 안 살 도리가 없었다. 그날 N씨가 호산방에 들렀다가 이 책을 보더니 갖고 싶다고 했다. 당시 그는 청량리 근처에서 꽤 규모있는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어려서 찢어지게 가난한 탓에 책을 사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늦게나마 책을 사 본다고 했다. 그는 고서에는 문외한이었지만 내 말이라면 그대로 믿고 따랐다.
그리하여 결국 이 책은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 주일쯤 후, 나는 우연히 어떤 책을 보다가 연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몽홍선관시초(夢紅仙館詩抄)』를 발견했다. 이 책은 자하의 친필로 알려진 책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괘선지의 판심에 『홍전시략』의 안경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N씨에게 보낸 『홍전시략』 괘선지의 문양과 연세대 소장본 『몽홍선관시초』의 그것은 분명 일치했다. 이 괘선지는 바로 자하의 전용지였던 것이다.
또 한번은 한 서점에서 이삼십 권의 책을 골라 놓고 각 권에 대한 가격을 셈하는데, 주인에게 가격을 물었더니 처음에 말했던 것과 달랐다. 조금 전에 부른 가격을 주인도 헷갈려 하는 것이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고서에는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고서점 주인의 재량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터무니없이 비싸게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터무니없이 비싸게 불렀다 하더라도 손님과 주인의 관계에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고서점의 생리다.
가령 손님이 "이것은 그렇게 비싼 책이 아니고 이 정도면 적당할 것 같소” 하면 주인은 못 이기는 체하고 적당한 선에서 고객의 요구에 응한다. 이러한 예가 고서점에서 관례가 된 풍경이다. 어찌 보면 이렇듯 같은 책이라도 고서점마다 가격이 다 다른 것이 고서 수집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고서점 주인은 고서를 입수한 후 가격을 정하기까지 나름대로의 고민과 연구를 거듭한다. 가격을 정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그 중에는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손님에게 책을 보여 주면서 눈치를 살피는 경우도 있다.
"이거 소장자가 팔아 달라고 맡긴 건데, 얼마에 사면 되겠소?” 그러면 자연스레 얼마에 팔면 되겠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만약 그 과정에서 손님이 그 책을 욕심내면 주인 입장에서는 머쓱할 수밖에 없다. 손님이 되레 주인에게 "그래, 소장자가 꼭 얼마를 받겠답디까?” 물으면, 주인이 "이거 소장자가 얼마를 받아 달라는데” 하면서 아주 높은 가격을 던져 보기도 한다. 이처럼, 서점 주인들은 낯선 책의 가격을 알아보는 데 나름대로 여러 가지 요령을 가지고 있다. 설령 자신이 제시한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도 민망해 할 까닭이 없다. 이미 ‘소장자가 맡긴 물건’이라고 복선을 깔았기 때문이다.
또 심상치 않은 고서를 입수하면 일단 가게 한구석에 무심한 척 놔두고는 손님이 물어 올 때를 기다린다.
"이거 얼마요?”
"그건 팔 물건이 아닌데….”
"…….”
"굳이 필요하시다면, 얼마나 주겠소?”
이때 손님은 책이 욕심나면 나름대로 가격을 제시하는데, 그러면 십중팔구 그 책을 사지 못한다. 주인이 생각했던 가격보다 높으면 혹시 이것이 아주 귀한 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쉽게 팔지 않을 것이고, 생각했던 가격보다 낮으면 적당히 거절한 뒤 다른 손님에게도 똑같은 방법을 쓴다.
나는 이런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격을 잘 몰라서 나보고 얼마면 사겠냐고 물었을 텐데, 그럼 내가 제시하는 값에 무조건 팔 겁니까? 그렇다면 성의껏 말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꼭 받고 싶은 값을 먼저 말하십시오. 값이 적당하면 사겠습니다.”
나는 절친한 사이가 아니면 절대로 가격을 먼저 말하지 않는다. 저렇게 묻는 것은 얼마가 되더라도 애당초 나에게 물건을 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 잔꾀를 부린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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