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수)
고서 수집 십계명(2)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여섯번째, 일단 구입한 책은 물르지 않는다.
수집가 중에는 한번 구입한 책을 다시 물러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물론 책에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너무 비싸게 주고 산 것 같다고 물러 달라면 정말 어이가 없다. 만약, 구입한 책이 나중에 아주 귀중본으로 판명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한번 구입한 고서는 가짜거나 주인이 설명한 내용과 많이 차이가 나지 않는 한 물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집가는 결코 좋은 고서를 수집할 수 없다.
25여 년 전 일이다. L씨가 호산방을 방문했다. 그는 평소 고서에 관심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호산방에서 고서를 구입한 적은 없었다. 『호산방도서목록』(*사진 27)에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보고 왔다며, 이래저래 살피더니 구입하겠다 했다. 모두 열 책이 한 질이고 가격은 이백만 원으로 결코 만만치 않은 값이었다. 『목민심서』는 다산 정약용의 저술로 목민관(牧民官)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고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내용의 책이다. 이 책은 1901년 광문사에서 출간되기 이전에는 필사본으로만 전해져 왔다. 『목민심서』 필사본은 지금도 가끔 고서점에서 눈에 띄지만 필체가 좋은 것은 그리 흔치 않다. 호산방에 있던 것은 필체도 좋고 책의 됨됨이가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L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열 책 한 질 중에 한 책이 『목민심서』가 아닌 다른 책이라는 것이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문제의 『목민심서』 제삼책인가가 『흠흠신서(欽欽新書)』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흠흠신서』 역시 열 책이 한 질인 다산의 저술이다. 원래 이 필사본들은 『목민심서』와 『흠흠신서』가 각각 한 질로 되어 있었는데, 『목민심서』 제3책이 낙질되어 누군가가 『흠흠신서』 제3책을 끼워 넣어 눈속임을 했던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구입 당시는 물론 몇 년이 지나도록 모르고 있었다.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는 책 모양과 장정은 물론 필체까지도 똑같아 겉으로 봐서는 다른 책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각 책의 표지에는 ‘목민심서 1’ ‘목민심서 2’…라는 제목이 각각 붙어 있어 당연히 완전한 한 질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흠흠신서’가 어떻게 ‘목민심서’로 바뀌었을까. 『목민심서』 표지에는 각 책마다 붓글씨로 표제가 씌어 있었다. 문제의 책에는 ‘목민심서 3’이라고 씌어 있었는데, 다른 책과는 달리 ‘牧民心書’ 네 글자를 한지에 써서 덧붙인 것이었다. 그러니 수년 동안 갖고 있으면서도 책이 바뀌었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L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게 되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로 나를 몰아세웠다. 나 같은 전문가가 어찌 이같은 사실을 수년 동안이나 몰랐을 수가 있냐는 것이었다. 자기는 책을 산 지 단 하루 만에 알아보았는데, 고서점 주인이 책을 살 때 책장도 안 넘겨 보았겠냐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판 게 분명하다는 얘기였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고서를 구입할 때 여러 권이 한 질로 된 것은 권수만 헤아려 보고 구입하는 것이 보통이다. 『목민심서』의 경우도 그랬다. 책의 겉모습이 반듯하니 중간에 다른 책으로 바뀌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L씨는 책을 구입하고, 기쁜 마음에 그날로 모든 책에 장서인을 찍었다. 이 과정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L씨는 자기에게도 약간의 과실이 있을 수 있고 이미 모든 책에 자신의 장서인을 찍었으니, 자신도 일부 손해를 볼 테니 환불해 달라고 했다.
나는 모든 게 내 실수로 일어난 일이니 설령 장서인을 찍었다 하더라도 환불해 주겠다 하고 그 즉시 전액을 돌려주었다. 그래도 그는 오해가 풀리지 않은 듯, 그후로 호산방을 다시 찾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이상 오해를 풀 방법도 없어 지금까지 두고두고 마음이 무겁다.
그날로 나는 문제의 『목민심서』의 가격을 3백만 원으로 조정했다. 2백만 원에 팔았던 책이 위와 같은 이유로 반환되었으면 가격을 낮추어야지 도리어 가격을 올리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이 책이 호산방에 진열된 지는 약 칠 년가량 되었다. 호산방에서는 한동안 팔리지 않은 책의 일부는 가격을 상향 조정하여 판매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가격을 올리려던 참이었는데, 퍽 잘되었다 싶었다. 그러나 그 이유보다는, 설령 한 권이 낙질되었다 해도 그 가치가 3백만 원은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석 달 후 K교수가 이 책을 사 갔다. 그의 전공은 법학으로 평소 고문서에 관심이 깊었다. 물론 나는 그에게 이 책이 반환되어 돌아온 경위와 장서인이 찍힌 사연을 모두 얘기해 주었다.
사실, 앞서 소개한 경우는 책을 반환할 만한 충분한 사유가 된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일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됨됨이가 온전한 것 같아 구입한 책 중에는 가끔 훼손되거나 낙장된 것들이 있다. 이런 경우, 안타깝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비록 훼손되긴 했어도 책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귀중본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만약 내가 L씨였다면 그 책, 『목민심서』를 그냥 소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L씨에게 서운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일곱번째, 섭치 백 권보다 귀중본 한 권을 산다.
고서 중에서 변변치 못한 책을 섭치라고 한다. 섭치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유독 섭치를 좋아하는 수집가도 더러 있다. 물론 싼 맛으로 사는 것이겠지만 "지금의 섭치는 영원히 섭치다.” 결코 싼 것이 아니다. 섭치 백 권을 사느니 차라리 귀중본 한 권을 사는 것이 여러 면에서 낫다.
여덟번째, 알면 사고 모르면 사지 않는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좋은 책을 아주 싼값에 사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 반대로 아주 비싸게 사는 경우도 있다. 좋은 책을 비싸게 사는 것은 별 문제가 없지만, 사지 말아야 할 것을 샀을 때는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좋은 책은 아무리 비싸게 주고 샀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잘 샀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지만 가짜라든가 신통치 않은 책을 사면 평생 후회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서를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주고 사거나 가짜 고서화를 사는 수집가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안목을 과신하거나 욕심이 앞서 있다. 한마디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서를 사는 것이다. 반대로, 안목이 있는 사람은 어디서든 좋은 물건을 놓치지 않는다.
근 40년 전의 일이다. 골동 거간꾼 최씨의 별명은 ‘최따로’다. 그는 C시와 O시, G시 등을 무대로 고서와 골동을 수집하여 서울 등지에 내다 팔았다. 보통 거간꾼들은 시골을 직접 다니면서 집안에서 내려오는 옛 물건을 수집해 파는데, 최따로는 주로 가짜 골동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별난 이였다. 그래서 별명도 ‘가짜’라는 뜻의 ‘최따로’다. 물론 그 아류로, ‘김따로’ ‘이따로’도 있다. 그가 취급하는 가짜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글씨를 비롯하여, 민화·민속품 등 매우 다양했다. 그는 가짜 물건을 내놓으면서 일체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추사의 가짜 글씨를 내밀면서도 능청을 떨었다.
"이거 쓰는 거요?”
그러고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흘렸다. 어떤 때는 제법 그럴듯한 가짜를 내놓기도 했다. 그가 다녀간 며칠 후 그 물건이 다른 고서점에 나도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호산방에 물건을 팔러 오기보다는 물건을 구하러 오곤 했다. 그가 구하려는 물건은 옛 종이였다. 가짜 그림과 가짜 글씨를 만드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최따로도 가끔은 진짜 고서와 고문서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섭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최따로가 고문서 한 뭉치를 내놓았다. 필사본과 시문·간찰 등이 마구 섞여 있었다.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글씨의 됨됨이가 빼어나,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 생각되었다. 최따로에게 물건을 구입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문의 주인공들은 조선 후기의 시인 홍세태(洪世泰)와 최승태(崔承太)·정내교(鄭來僑) 등으로, 소위 위항시인(委巷詩人)들이다. 이 시문들은 모두 이들의 친필이었다. 그 중 홍세태는 17세기말 18세기초의 문단에서 중인층뿐 아니라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명망있는 시인이었다. 이때 ‘선명(善鳴)’이란 제호의 필사본도 함께 입수했는데, 이 책은 홍세태의 시문을 모아 놓은 필사본으로 그의 친필본이었다.(*사진 28)
주인이 먼저 묻지도 않은 가격을 말한다. 그런데 그 가격이란 것이 가짜일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비쌌다. 그래야 팔리나 보다 생각하고 있을 때, 어지럽게 널려 있는 물건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그림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6절지보다 작은 크기에 새 한 마리가 수묵으로 그려져 있었다. 어느 가난한 선비의 벽장 문에 붙어 있던 그림인지 땟물도 그만이다. 첫눈에 격이 있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표암(豹菴)’이란 기명(記名)과 ‘광지(光之)’라는 낙관이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났다. 각(刻)도 훌륭했다. 표암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호로, 광지는 그의 자(字)이다. 한성부판윤과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서화로 북경에까지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이건 얼마요?”
"지금 막 시골에서 사 온 건데 이만 원만 주시오.”
이처럼 가짜를 취급하는 가게에도 가끔은 귀물(貴物)이 섞여 있다. 그러나 이를 감별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모르고 사는 물건 중에도 가끔은 귀물이 섞여 있을 수 있겠지만, 이를 바라고 고서를 수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일부 수집가들은 잘 모르면서도 주저 없이 사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사지 말아야 할 물건만 골라 사고, 정작 사야 할 물건은 놓치곤 한다. 고서를 잘 모르면서 고서를 사겠다는 마음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고서는 열 번 잘 사는 것보다 한 번 실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아홉번째, 구입처와 구입 가격을 말하지 않는다.
고서 수집가끼리는, 어떤 책을 어디서 얼마를 주고 샀다는 등 자랑도 할 겸 정보를 교환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서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그 평가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정보교환이 고서 수집에 그다지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이런 정보들이 왜곡되어 수집가나 고서점 주인 모두에게 불편한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수집가 중에는 단골 서점의 책값이 너무 비싸다고 비방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비싸면 사지 않을 일이지 기껏 사 놓고 비싸다고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반대로 어느 고서점 주인은 손님에게 고서를 팔아 놓고는 아무개는 책값을 깎는다고 흉을 보기도 한다. 이 역시 깎으려 하면 팔지 않으면 될 일이지, 기껏 물건을 팔아 놓고 손님을 흉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화근은 말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고서 수집에서도 입이 무거워 나쁠 것은 없다. 대부분의 이름난 수집가나 고서점 주인들이 그러했다. 그래야 좋은 책을 수집하게 되는 법이다.
열번째, 이 서점 저 서점 다니지 않는다.
수집가 중에는 여기저기 순례하듯 다니는 사람이 있다. 물론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서점 저 서점 다니다 보면 많은 책을 구경하게 되고 또 많은 정보를 얻게 마련이다. 이러한 고서점 순례는 고서 수집을 취미로 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수집 목적을 세웠다면 이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서의 유통구조는 깔때기와 흡사해서 좋은 책은 한곳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고서 수집의 성공 여부는 파트너 선택에 달려 있다. 다만 파트너의 자질에 관한 평가는 순전히 수집가의 몫이다. 파트너의 자질을 판단하는 기준은 우선 고서를 보는 그의 안목이다. 다음으로 인간관계가 고려돼야 할 것이다. 이러한 파트너십은 고서 수집에만 그치지 않고, 장서의 활용이라든가 혹 나중에 있을지 모를 장서의 처분 때에도 원만한 역할을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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