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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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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2

  • 특집부
  • 등록 2020.11.25 07:30
  • 조회수 1,311

    고서 수집 십계명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완주 책박물관장

 

 

 

고서를 수집하려면 우선 고서를 판매하는 곳의 정보를 알아야 한다. 고서를 판매하는 곳으로는 고서점과 골동품점, 중간상인을 들 수 있으며, 최근에는 인터넷 서점과 인터넷 경매 사이트도 등장했다. 이 외에도 개인 소장가나 수집가가 고서를 판매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고서 수집가들은 나름대로의 수집 요령을 갖고 있다. 어떤 수집가는 전국의 고서점과 골동품점을 순회하기도 하는데, 이런 수집가 중에는 주인에게 일일이 명함을 돌리며 이러이러한 고서가 나오면 알려 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소위 저인망 전술이다. 물론 다리품을 팔다 보면 의외로 맘에 드는 것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나는 이러한 수집가를 여럿 보았는데, 이 방법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여러 고서점을 상대로 하니 수집의 폭이 넓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어느 수집가가 어떤 분야의 고서를 수집한다고 여러 고서점에 알렸다면, 고서점 주인들은 수집가가 부탁한 고서를 구하기 위해 주위의 동업자에게 알릴 것이 뻔하다. 결국 그 고서를 찾는 수집가는 한 사람인데, 그것을 팔려는 사람은 여럿이 되는 꼴이다. 자연히 서점 주인끼리 경쟁이 붙고, 가격은 순식간에 뛰어오른다. 그렇다고 그 물건이 반드시 그 수집가의 손에 들어온다는 보장도 없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관심 분야를 고서점 주인에게 일체 내색하지 않고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는 자신이 관심 갖는 분야의 고서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고서점 주인 입장에서는 언제 팔릴지도 모르는 책을 모두 갖춰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을 슬기롭게 조율해 주는 파트너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럴 때는 맘에 드는 고서점 주인이 그 상대가 되게 마련이다.

 

같은 조건에서 수집하더라도 어떤 파트너를 만나느냐에 따라, 수집 기간은 물론 고서의 질이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공립 박물관이나 공공기관의 자료 수집에는 소위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이나 기획사가 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료를 평가하는 안목과 그 활용 가치의 기준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치 평가의 기준을 확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때로 이런 전문가들과 고서점 주인 사이에 묘한 갈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 고서 수집에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

 

고서에 대한 감식안을 갖고 전체적인 계획을 주도하면서 차후 박물관 운영까지도 예상할 수 있는 기획력을 갖춘 파트너와 손잡는 것이 중요하다. 훌륭한 파트너는 뛰어난 감식안으로 수많은 고서를 한곳으로 모으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런 능력은 마치 깔때기의 원리와도 같다. 또한 훌륭한 파트너란 바로 맥을 잘 짚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마음에 드는 고서를 수집하려면 고서가 모이는 깔때기의 목 부분만 지키고 있으면 된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파트너를 만난다면 이미 수집의 절반은 성공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집가와 그 파트너인 고서점 주인 사이의 끈끈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순전히 수집가가 판단할 문제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 하더라도 좋은 고서를 만나려면 운도 따라야 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거나 몇 안 되는 희귀한 자료를 만나는 데 운이 따르지 않고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운이 좋다 하더라도, 평생 동안 좋은 책은 그리 쉽게 만나지지 않는다. 좋은 뜻을 가지고 성실한 마음으로 수집하다 보면 좋은 책을 만나게 되려니 하고 기대해 보는 것도 좋다. 다음은 고서 수집 10계명을 소개한다.

 

첫번째, 책을 뒤적거리지 않는다. 대형 서점에서는 독자가 책을 한참 살펴본 후 구입하는 것이 보통이다. 서문과 목차를 확인하고 내용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던 책은 그대로 놔두고 서가에서 새 책으로 바꾸어 간다. 이렇게 뒤적거린 책들은 대개 상품가치를 잃게 된다. 그런데도 점원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이런 책은 출판사로 반품하면 그만이기 때문인데, 그로 인한 손실은 고스란히 출판사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고서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서는 물건의 특성상 다루기가 매우 조심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고서는 신간도서와 달라, 그냥 놓여 있는 상태에서는 책의 내용은 물론 제목조차 거의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됨됨이를 살피려면 책을 뒤적거리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더라도 유별나게 책을 뒤적거리는 수집가가 있다. 그러나 겉볼안이라는 말이 있듯이 노련한 수집가는 책의 겉모습만 보고도 종류며 간행 연대, 내용까지도 알아차릴 수 있다. 다시 말해, 책의 됨됨이는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지 책을 뒤적거린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수집가치고 좋은 안목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습관적으로 책을 뒤적거리는 수집가를, 고서점 주인은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두번째, 사려는 책을 흠잡지 않는다. 수집가 중에는 마치 마음에 없는 책을 마지못해 사는 듯한 내색을 하면서, 사려는 책을 흠잡는 사람이 더러 있다. 아마 그러면 주인이 책값을 좀 싸게 부르겠지 하는 마음에서인지는 몰라도 이 얼마나 우스운 노릇인가. 맘에 안 드는 책을 굳이 왜 산단 말인가. 흠잡을 게 아니라 칭찬을 해 보라. 주인이 얼마나 기분 좋아하겠는가. 주인하고 사이가 좋으면 분명 귀한 책을 얻게 될 것이다.

 

세번째, 책값이 비싸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이 책 저 책 가격만 묻고 사지 않는 것까지는 좋다. 한술 더 떠, 책값이 비싸다고 주인의 심사를 뒤집어 놓는 사람이 간혹 마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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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4] 김시습 간찰

다음은 통문관 주인 이겸로 선생의 일화다.

쉰 살 정도의 신사가 와서 사문유취(事文類聚)를 찾았다. 보여주었더니 한참을 보고 나서 판()이 나쁘다고 가 버렸다. 몇 달 뒤에 그 신사가 다시 나타나 사문유취를 찾기에 내주었더니 이번에도 얼마 동안 뒤적거려 보고 비싸다고 가버렸다. 그러기를 너댓 번이나 반복했다. 어느 날 그 신사가 예전처럼 사문유취를 한참 보고 나서 또 무슨 흠을 잡으면서 나가려고 할 때, 이겸로 선생은 "선생, 미안하지만 좀 앉으시죠하고 의자를 내놓았다. 그 신사가 앉은 뒤에 "선생께서는 선생의 생존 시에 사문유취를 못 살 것이니, 임종 시에 아드님에게 내가 평생을 두고 사문유취를 사려고 하다가 못 사고 가니 네 대에는 꼭 사문유취를 사서 내 소원을 풀어 다오하고 유언을 하라고 했다.(통문관 책방비화중에서)

 

네번째, 책값을 깎지 않는다. 리진호 지적박물관장은 학촌 리진호 책 사냥·관리 십대 지침이라는 글에서, "고서점에서는 삼십 퍼센트 정도 깎아서 흥정을 한다. 꼭 필요해서 산다는 눈치를 보이지 않고 참고삼아 산다는 인상을 준다고 자신의 수집 비법(?)을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수법을 모를 고서점 주인이 어디 있겠는가. 삼십 퍼센트를 깎아서 사려 하는 수집가에게는 오히려 가격을 사십 퍼센트 정도 올려 부를 것이다.

 

 고서는 다른 물건하고는 달라, 사고파는 과정에서 고서점 주인과 손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심리전이 펼쳐지곤 한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좀 비싸 보이는 책도 있게 마련이다. 또 알게 모르게 서점 주인이 바가지를 씌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까짓 바가지 좀 쓴들 어떠한가. 책값이 비싸다는 소리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 냉정히 말해, 값이 비싸면 사지 않으면 그만이다. 또 책값이 비싼 것은 사려는 사람의 입장이지 고서점 주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책 가격을 깎지 않는 것이 되레 좋은 흥정이 될 수 있다. 이 정도의 요령을 익히면 분명 좋은 책을 수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번째, 진본(珍本) 한두 권은 무리를 해서라도 구입한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좋은 책은 그리 많지 않고, 또 쉽게 만날 수도 없다. 때문에, 평소 구하려고 마음먹었던 책을 만났을 때는 어느 정도 값이 비싸더라도 과감하게 구입하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물론 그 책을 당시의 값보다 훨씬 싼 가격에 다시 만날 자신이 있다면 구입을 미뤄도 좋다. 그러나 그런 행운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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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5] 율곡 이이 간찰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천하의 진본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평생에 한두 번은 만나게 된다. 이럴 때 그 가격이 엄청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망설이게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단호하게 마음을 접지 않고 망설일 정도의 값이라면 무조건 구입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 가격이 본인에게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된다면 당연히 포기해야겠지만, 망설여질 정도라면 결단을 내려도 좋을 것이다. 물론 진본을 구입한 대가로 오랫동안 후유증에 시달려야겠지만, 만약 그것을 취하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 속에서 살아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이런 일은 한두 번으로 그쳐야 하며, 그 결단은 결국 각자의 몫이다.

 

30여 년 전 어느 날, 키가 자그마하고 귀티가 나는 노신사가 호산방을 들렀다. 그는 한참 동안 서점 안을 유심히 살피더니 아무 말 없이 그냥 나갔다. 그리고 열흘쯤 후에 다시 찾아왔다. 그날도 예전처럼 아무 말 없이 서점을 둘러보고는 그냥 나가는 것이었다.

 

다시 며칠 후에 그 노신사가 또 들렀다. 이번에는 자리에 앉더니 말을 건넸다. 나는 한참 동안 그와 차분히 얘기를 나누었다. 노신사의 집에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간찰첩(簡札帖)이 여러 권 있는데, 어디 적당한 곳이 있으면 처분하려 한다는 얘기였다. 물론 물건을 보기 전에는 진위 여부를 단정지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의 말로 미루어 보아 매우 호감 가는 물건이었다. 그는 내일 다시 들리겠다고 약속을 하고 갔다.

 

다음날 약속한 시간에 맞춰 노신사가 잘 정리된 사진을 가지고 왔다. 김시습을 비롯하여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석봉 한호 등 수백 명의 간찰이었다. 모두 단번에 알 수 있는 명인들이었다그날부터 내 머릿속엔 온통 간찰 생각뿐이었다. 얼마를 주고 살 것이며, 그 목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물건을 사고팔 경우, 일반적으로 팔려는 쪽에서 값을 제시한다. 그러나 고서를 사고팔 때는 소장자가 그 적정한 가치를 모르고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일이 많다. 이런 경우 소장자를 설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십 원에 사고 싶은데 백 원을 부른다면 흥정의 여지가 없어지고 만다. 이럴 경우에는 차라리 사는 쪽에서 먼저 가격을 제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고가의 물건은 가격의 단위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특히 간찰같이 아무나 쉽게 알아볼 수 없는 물건일 경우에는 구입하고자 하는 쪽에서 먼저 값을 제시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도리어 상대에게 자신있게 먼저 가격을 제시함으로써 흥정의 주도권을 잡고 소장자에게 신뢰감을 줄 수도 있다.

 

달포 후, 나는 노신사의 집을 방문했다. 집 안에는 고화(古畵) 몇 점이 걸려 있었는데, 모두 격이 있는 작품들이었다. 대물림한 유물들로 보였다. 간찰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드디어 노신사가 간찰첩을 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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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6] 조선 명인 365명의 간찰을 모아 놓은 『간독(簡牘)』12책. 펼쳐진 글씨는 한호의 시문이다.

간찰첩은 모두 열두 권으로 낡은 오동나무 궤()에 들어 있었다. 간찰첩을 사이에 두고 노신사와 마주 앉았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심스레 간찰첩을 꺼내 보았다. 첩의 외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크기가 두 가지였다. 조금 작은 것은 모두 여덟 권이었고, 그보다 조금 큰 것은 네 권으로 되어 있었다. 첩이 만들어진 연대는, 여덟 권짜리는 이백 년이 좀 넘어 보이고 네 권짜리는 이백 년이 채 안 되어 보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나는 첫번째 첩을 열었다. 김시습의 글이 제일 먼저 보였다.(*도판 24) 순간 심장이 요동치고 손끝이 떨렸다. 김시습이 누구인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오백여 년 전의 인물이 아닌가. 사실 이 정도 인물의 진적(眞跡)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계속해서, 퇴계·율곡의 간찰(*도판 25)이 줄을 이었다. 모두 사백여 장으로 된, 명인(名人) 삼백예순다섯 명의 간찰첩이었다.(*도판 26) 나는 이것들을 짧은 시간에 일별했지만 모두가 진품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내렸다. 나는 간찰첩을 조심스레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이제는 내 쪽에서 무어라 답을 해야 할 차례였다. 노신사가 내 눈치를 살피면서 먼저 말을 건넸다.

 

"그래, 살펴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 모두 진품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간찰첩은 처음 봅니다.”

 

"젊은 분이 이것들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대단합니다.”

"…….”

"그래, 이것들을 얼마나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나는 노신사가 사진을 맡기고 간 뒤 이를 평가하기 위해 여러모로 검토해 보았다. 고심 끝에 나름대로 구입하고픈 가격도 정해 놓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가격을 제시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가격이 높고 낮고 간에, 상대가 고서의 생리를 잘 알지 못할 경우에는 흥정이 깨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신사에게 고서의 매매 과정과 수집가의 생리에 대해 짧은 시간 동안 진지하게 설명했다. 노신사는 내 말을 모두 진실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나는 미리 준비해 간 봉투를 조심스레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제가 성의껏 평가한 것입니다. ○○원입니다.”

"…….”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허허, 젊은이 정말 대단합니다. 이 물건의 임자는 젊은인가 봅니다. 네 흔쾌히 드리겠습니다.”

 

거래는 불과 몇 분 만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