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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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0

  • 특집부
  • 등록 2020.11.16 07:30
  • 조회수 292,237

       놀이문화시대(6)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 민속악을 대변하다

놀이문화7호의 발행 시기(9~12)‘94 국악의 해정점에 있었다. 창간의 시대적 배경과 그 영향권에서 발행되었다. 지난 호에서도 7호까지의 기사 방향은 국악의 해주요 프로그램 소개 중심이라고 밝혔다.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창간호-10<94 국악의 해 소식>(세종국악관현악단 중국 공연, 표어 3종 소개, 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

        -15<국악의 해 기념 민속예술 대공연>(국악협회 소식)

2-7<94 국악의 해>(마당놀이 심청전 미국순회 공연, 세계사물놀이 겨루기대회)

3-7<94 국악의 해>(국악협회 주최 제14회 대한민국국악제 서울 대국 부산 공연, 세계사물놀이 겨루기대회)

5-8<국악의 해 소식>(3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4회 동리대상 시상식 및 축하공연, 아태민족음악학회 학술대회, 조선조 왕세자 국혼 재현, 대한민국 종교음악제,5회 춘향가 및 민요발표회)

7-7<국악의 해 대담>(전통공연예술협의회 발족에 관한 보고, 국악의 해를 이끈 사람임헌영, 94국악의 해 실시사업 현황 자체사업과 지원사업 소개)

 

 

이상과 같이 제4호와 6호를 제외하고 모두 주요 기사로 국악의 해를 조명했다. 시기적으로 국악의 해 시행 막바지 9월부터 12월까지 기간으로 지면상으로는 총 7면이지만 기사 꼭지 수로는 10여 회가 된다. 이는 전문지로서는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반 종합지에 비하면 적은 편은 아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면수나 꼭지수로 대비할 수 없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하게 된다. 이는 다음의 세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기사 내용에서 정악(正樂)에 비해 절대적으로 민속악(民俗樂)에 편중되었다는 점이다. 5호의 조선조 왕세자 국혼 재현소개 외에는 모두 민속악 공연이다. 이는 기사 내의 주최, 주관 단체가 국악협회를 비롯한 민속음악 단체라는 사실로도 방증해 준다

 

둘은 국악의 해를 이끌어 온 조직위원회4개 분과위원회 등에 대한 소개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이 조직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일반 일간종합지의 기사 형태가 주요인물(위원장 황병기, 부위원장 권오성 등 4) 활동과 행사 기획의도 해설 등을 다루는 일반적인 기사 방향과는다른 형태인 것이다.

 

셋은 '국악의 해' 성과나 문제점 같은 평가를 미루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국악의 해에 대한 비판적 시각 편에서 무시한 것이거나 새로운 대안 준비 중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62국악의 해라는 표제가 아닌 국악계 동정란 전면 기사 <전통공연 진흥 방안>과 제72<전통예술 진흥을 위한 중장기 발전계회>에서 확인된다. 국악의 해 폐막 한 달 전인 1130, "94 국악의 해 조직위원회 마지막 사업인 대토론회를 요약한 내용이다. 역시 국악의 해 평가보다는 전통공연예술 진흥에 대한 방안과 단계별 학교 음악교육의 제도 보완 제시에 중심을 둔 것이다.


특히 전통공연예술 진흥 소위원회조직인데 위원장을 허규(국악의 해 기획담당 상임위원)로 하고, 권오성과 이성천 조직위원, 이성림 집행위원(국악협회장), 문화체육 전통예술과장 최진용으로 구성했다. 이러한 구성체 성격은 실행력이 있고, 민속분야의 성격을 강하게 띤 인물들이란 점이다. 이 같은 국악의 해 마무리 기사는 그동안 정악계와 민속악계의 보이지 않는 반목이 들어나 성과를 내세우기 보다는 대안이 더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었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는 한 일간종합지의 국악의 해 총평 기사까지 적시되어서 심각성을 알게 된다.


"국악인들이 총의를 모으는 과정에서도 적잖은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민속악이 주류인 국악협회측과 아악의 전통을 잇고있는 국립국악원, 재야 국악인들과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학구파 국악인들 사이의 간극이 재확인이 된다. 한 국악인의 표현대로 물과 기름과도 같은 이들은 사업추진 과정에서 계속 상충되는 의견으로 화합점을 찾지 못하다가 한때 조직위를 해체위기까지 몰고 갔다. 국악인끼리 다툼도 이들은 폐막식 초청장에도 조직위원장과 집행위원장의 이름을 나란히 새겨 넣는 등 외부에 자칫 세 다툼으로 비쳐질 촌극 연출에서 끝까지 화합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조선일보, 1994.12.26.) 

 

실제 국악의 해 성립에 자극을 준 것은 국가나 학계의 국악연구의 결과가 아니다.  220만 관중을 탄생시킨 한 해 전의 판소리 영화 <서편제>증후군에 있었다는 것이 세평(世評)이었다. 이러한 국민들의 국악 인식 중심에는 민속악이 각인되고 있는 사실에서, 국악의 중심을 민속악으로 해야 한다는 시각은 당시 강한 시대적 요청이었다.

 

이상과 같이  국악의 해’ 정점에서 탄생한 놀이문화시대는 성과에 대한 평가보다는 민속악의 가치를 일반화 하는 대변지 역할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