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장편소설] 흙의 소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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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10

  • 특집부
  • 등록 2020.11.12 07:30
  • 조회수 1,278

 

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4>

박연은 아버지 어머니의 묘소로 가서 인사를 드렸다.

얼마가 걸릴지 모르지만 집을 떠나고 그동안 참배하지 못하게 됨을 고하고 가서 잘 되어 돌아오게 음우陰佑해 달라는 청을 드리는 것이었다. 물론 자식이 잘 되어야 부모에게 덕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기가 좋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죄를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많은 해찰을 하였습니다. 이제야 깨닫고 떠나려 합니다.”

박연은 한동안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하직 인사를 하고 거기서도 피리를 한 가락 불어 아들의 애틋한 마음을 바치었다.

반 나절이 지나 마곡리 산소를 내려오는 대로 길동 향교의 명륜당으로 갔다. 글을 배우러 온 차림이 아니라는 것을 유생들이 금방 알아차리고 모두들 놀라는 빛이었다. 훈장 선생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강론을 멈추었다.

"진작 말씀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오늘 한양으로 떠나려 합니다.”

박연은 그리고 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 절을 하는 것이었다.

유생들도 모두 일어나 술렁대었다.

"잘 생각했네.”

말을 안 해도 박연의 뜻을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고 왜 그러는지도 알았다. 늘 진중하고 매사에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지만 겸손하고 함부로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 그의 뜻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아무 객소리 없이 장도를 빌었다.

"자네가 본이 되어 모두들 분발할걸세.”

"책임이 무겁습니다.”

"그래야지.”

빨리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하라는 것이다.

유생들도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의 축수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장한 각오가 담긴 시선으로 정든 유생들을 바라보며 허리가 다 꺾어지도록 굽혀서 하직 인사를 하였다. 서로 허리를 있는대로 굽혀서 맞절을 하였다. 나중에 악성樂聖으로 돌아올 줄을 예견하여서인가. 엄숙하고 정연하고 그야말로 예를 다한 정경이었다.

박연은 다시 허리춤에서 피리를 꺼내었다. 고맙고 아쉬운 마음을 담아 그동안 닦은 기량을 다 발휘함으로 답례를 하려는 것이다. 높고 깊고 넓고 큰 가르침과 배움의 은덕을 다른 무엇으로도 보답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어느 때보다도 그의 소리는 힘이 있고 부드러우며 간드러지고 그러면서 미묘하게 가슴을 흔드는 것이었다. 신명이 나면서 눈물이 나고 간절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모두들 축축한 눈으로 말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박수 대신 눈물을 흘리었다.

"어서 가시게.”

 

난계-흙의소리10.JPG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10

 

목이 가라앉은 훈장의 얘기를 듣고야 박연은 밖으로 나왔고 향교 마당 끝 홍살문 앞에서 다시 큰절을 하고야 신들메를 고쳐 매며 길을 재촉하였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굶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였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양 길은 멀고도 험하였다. 힘들고 막막할 때도 그는 피리를 꺼내어 불었다. 피리는 그의 심지이며 의지이고 꿈이었다. 풀피리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문사文詞가 울연蔚然히 성장했고 개연慨然히 예악에 뜻이 있어 널리 전해오는 문적文籍을 구했으며 의칙儀則을 강론하고 토구討究하였다. 더욱 종율鍾律에 정통해서 어릴 적부터 항상 앉으나 누우나 가슴 속에 악기 연주하는 모습을 그렸고 입술로는 곡조에 맞추어 휘파람을 불었으니 대개 스스로 체득한 묘방妙方이 있었던 것이다.

영조 때의 학자로 음악이론에 일가를 이루었던 담설 홍계희洪啟禧(1703~1771)는 난계 시장諡狀에 그렇게 썼다.

한 마디로 박연은 예악에 신명을 다 바치었던 것이다.

한양이 초행은 아니었다. 옛날 기억을 되살려 머물던 객사에 다시 투숙을 하였고 그 때 듣던 피리 소리가 들리었다. 다른 악기들 연주하는 소리도 들리었고. 그로부터 몇 해만인가. 그런데 그 장악원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전과 같지 않았다. 더 간절하게 들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불만스럽고 시원찮게 들리기도 하였다. 그의 기량이 발전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라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루 이틀 후에는 거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좋게 좋게 생각하였다.

과거 시험 채비를 해야 했다. 경서를 읽고 외고 쓰고 시를 지으며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잠도 옳게 자지 않았다. 다른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문밖 출입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경서와 역사서의 문답이 있을 뿐이었다.

스스로 묻고 대답하였다. 그의 공부방법은 책문策問과 대책이었다. 그 자신이 시험관 판관이 되어 묻고 그것을 또 자신이 당사자가 되어 답변을 하는 것이었다. 정의에 입각해서 대범하게 늠름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선 말이 되어야 했다. 그것도 현실문제를 가지고 입론立論을 하였다. 노비 사여私與 사수私受 문제, 육조六曹의 분직分職 문제, 충청 경상 전라 삼도전三道田 개량 문제 그리고 신문고 설치, 한양 천도遷都 등 당시 현안들에 대해서 명쾌하게 논리를 세워 말하는 것이다. 논리가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러 절기가 바뀌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눈이 짓무르고 귀가 멍먹하고 목이 쉬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내 무릎 앞에서와 부모님 묘 앞에서 그리고 스승과 유생들 앞에서 혼신을 다해 불던 자신의 피리 소리만 들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