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한악계 별들 7: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내는 능력과 수완, 박범훈 교수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악계 별들 7: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내는 능력과 수완, 박범훈 교수

  • 특집부
  • 등록 2020.10.30 07:30
  • 조회수 3,975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무릇 예술 활동에 정답은 없다. 얼핏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시대마다 지향하려는 좌표는 있었다. 그것을 시대적 풍조래도 경향이래도 추세래도 공감대래도 좋다. 아무튼 대다수가 승복하는 목표는 있었다.

그런데 여기 목표가 오리무중인 현안이 하나 있다. 나의 개인적 문제의식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이거다라고 하는 정답을 내놓을 수 없는 분야가 있다. 국악관현악의 문제가 곧 그것이다. 소위 전국국악관현악 축제라는 행사를 10여 년 끌고 오면서 늘 부닥치던 문제의식이 한둘이 아니지만 아직도 선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중지를 모아 진지한 자기 점검을 해 볼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뿐이다.

국악관현악단에 대한 긍정 반 회의 반의 저울추가 긍정 쪽으로 약간 이동한 계기는 곰곰 생각해 보니 국립국악관현악단의 탄생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활동을 통해 무언가 국악관현악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관현악의 음량 문제에 대한 가능성이었다. 익히 알듯이 전통음악의 앙상블은 방중악房中樂의 규모와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었다. 체질적으로 실내악적 원형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박범훈11.jpg

이 같은 전통에 코페르니쿠스적 격변이 닥쳤다. 서구 오케스트라적 환경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 곧 그것이었다. 전래의 앙상블은 이제 보료방석의 사랑방이 아닌 넓은 스테이지와 수백 수천 석의 관중 앞에서 연주를 해야 할 팔자가 되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딜레마였다. 자연히 치기와 부조화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문제가 음향이었다. 수수백년을 아담한 공간에서 자라온 음악을 갑자기 황야의 들판에 내세운 격이었으니, 그 넓은 공간을 충만시킬 음량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우선 무대에 서는 연주가 수를 확충하는 초보적 방법이 대안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악단이 그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 같은 대안에는 한계가 있었다. 재정적 측면만이 아니라 음향학적으로도 임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유수한 악단들이 나름대로의 적정 규모로 인원 확충을 꾀하기도 했다. 하지만 흡족한 결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런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원천적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는 악기에 대한 반성으로 눈을 돌렸다. 소위 악기 개량 작업이 그것이었다. 물론 유사한 시도들이 간헐적으로 있어 왔지만, 오케스트라 사활의 문제로 인식하며 확고한 목적의식을 전제로 추진한 것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선택이 효시가 아닐 수 없다.


이때 관현악적 문제 극복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 박범훈 초대 지휘자다. 그는 비단 국립국악관현악단 제1대 지휘자만이 아니다. 아예 악단 창단을 위해 심혈을 쏟은 산파역이기도 했다. 창단의 주역이자 초대 지휘자였으니, 자신의 이상대로 악단의 개성과 색깔을 빚어 가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미 중앙국악관현악단의 창단과 운영에서 터득한 경험과 안목으로 신생 국립악단의 이미지를 참신하게 윤색해 가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같은 조건의 악단을 활용하더라도 박범훈의 작품 속에서는 괄목할 만한 음향 효과가 우러난다. 관현악 구성 악기들 하나하나의 구조와 기능과 장단점을 속속들이 꿰고 있기 때문이다. 실내악적 구조의 악기들을 보듬어 가면서 그만한 음향을 이끌어 내고 요리해 간다는 것은 가히 음향의 달인이 아닐 수 없다.


박범훈 특유의 음향 감각은 후발 관현악단의 위상을 단번에 굳건한 반석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더욱이 악기 개량을 통한 꾸준한 음량 확충 작업은 국립악단의 체질을 한층 튼실하게 가꿔 갈 수 있었으며, 그 같은 일련의 결실들이야말로 초대 지휘자 박범훈의 남다른 공로요 음악적 가치관의 특징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박범훈 교수는 참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다방면에 걸쳐서 능력과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탁월한 지휘자에 작곡가임은 물론 행정이나 경영에도 뛰어나다. 일개 국악인이 굴지의 대학인 중앙대학교 총장이 되는가 하면, 권부에도 발탁되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되기도 했다. 남들이 뭐라고 입방아를 찧건 그를 아는 나는 모두가 그의 능력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믿는다.


대개 재주가 좀 있는 사람은 노력은 하지 않고 꾀부리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보편적인 세태요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범훈 교수는 이와는 딴판이다. 지독한 노력형인 데다가 바지런하기 짝이 없다. 지난 시절에는 거개가 그러했듯이, 박 교수 역시 가난한 역경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요즘 말로 치면 흙수저 출신이다.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은 비관하거나 자포자기한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오기를 키우며 분발했다. 그 같은 오기와 분발이 곧 훗날 그의 대성의 동력이 되고 자양분이 되었음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작곡가 박범훈과 나는 이런 인연이 있다. 70년대 초의 일이다. 내가 중앙대에 출강하며 음악미학, 한국음악개론 같은 음악이론을 강의할 때다. 서양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한국 전통음악에는 관심들이 없었고, 시험을 쳐도 60점 내외를 맴돌기 일쑤였다. 그런데 시험 때마다 돌연변이처럼 늘 80점대 이상을 받는 학생이 있었다. 하도 궁금해서 한 번은 그 학생을 따로 불러 정체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자기는 국악예술고등학교 출신이라 국악 관련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었다고 답변했다. 그때의 그가 바로 훗날 그 대학의 총장이 되는 박범훈 학생이었다.


하찮은 일이지만 박 교수를 떠올리면 가끔 연상되는 엉뚱한 사연도 하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여럿이 모여서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개중에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자신이 승복하는 사람에게 신임을 받으려고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교언영색 선인의巧言令色 鮮仁矣라는 옛 글귀도 있듯이 그런 인물치고 미덥거나 진솔한 사람이 드물다.


아무튼 당시 중앙대 국악과 교수진의 내부 구도가 어땠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곳 교수 중의 노아무개라는 양반이 한양대 권오성 교수와 내가 박범훈 교수를 흉보고 다닌다며 근거 없는 모함을 퍼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 딴에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오히려 평생 박 교수를 감싸고 믿어오는 처지가 아니었던가. 민속악 계보에 뿌리를 둔 박 교수의 음악 활동을 정악 계통의 인사들이 사시로 볼 때마다 극구 옹호해 왔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 한국일보에서 국악계의 유망주를 소개해 달라고 할 때도 수백 명 신진들 중에서 박범훈을 천거하여 문화면 전면 기사로 소개시킨 추천자도 누구인데, 얼토당토 않게 그를 비방하고 다닌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시정의 장삼이사도 아닌 대학 강단의 교육자가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어느 해 연초 KBS 국악관현악단 신년음악회 때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그를 조용히 불러 분명한 사리로 나무라고 훈계한 적이 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