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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6) 아리랑문화의 남상(濫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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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6)
아리랑문화의 남상(濫觴)

  • 특집부
  • 등록 2020.10.10 07:30
  • 조회수 11,315

 기찬숙/아리랑학회 이사  

                                       

94년 전인 1926101일 오후 4시부터 510분까지 서울 종로 3가 극장 단성사에서는 아리랑이 여섯 번이나 불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영진이 두 명의 순사에 의해 포승줄에 묶여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장면에서는 관객 모두가 일어서서 눈물로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그 순간 단성사 악대의 반주에 의해 아리랑을 부른 가수는 유경이(劉慶伊)이다. 당시 나운규 감독의 영화<아리랑> 개봉 당일의 상황이다. 단성사에서의 개봉상연은 단 3일이었다. 그러나 이후 서울 지역 극장의 재상연을 거듭하여 전국에 확산되었고, 이미 소문에 의해 알려진 주제가 아리랑은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영화<아리랑>을 끌어들이는 자장력(磁場力)을 발휘했다.


아리랑1.jpg

 

1926년 단성사에서 영화<아리랑>의 개봉으로부터 흥행 상황은 1929년을 정점으로 자장력을 형성하고 문화 유전형질 아리랑(Meme)을 확산시켰다. 이 밈은 문학은 물론 연극, 무용 같은 무대공연 부야로 증식 되어갔다. 그동안 아리랑밈의 증식 사례를 1929년 박진 연출 연극<아리랑>으로 꼽았다

 

그러나 최근 사료의 발굴로 192711월 발표된 시 <아리랑>이 확인되면서 서열이 뒤집혔다. 개봉 1년후 문학 분야에서 아리랑의 의미를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을 알게 된 것이다.

 

<아리랑>192711문우5호에 발표되었다. 문우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재학 조선인들의 모임인 문우회에서 발간한 잡지이다. 이 모임의 회칙에 의하면 "本會朝鮮文藝硏究 及 獎勵目的으로하고, 京城帝國大學 豫科 內하고, 目的하기 하여 每學期 一回式 朝鮮文藝雜誌發刊이라고 밝히는 동시에 문우조선문예잡지라고 규정했다. 곧 교지나 학습지가 아닌 문학지로 자임한 것이다.

 

이 문예지의 필자들은 자신의 작품이 조선문예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제국대학의 학생이자 식민지 조선의 선구적 지식인이라는 위치에 있고, 변방인 조선인으로서 갖는 자의식과, ‘제국대학의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갖는 교양인’, ‘세계인으로서의 감각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전문 작가와 학생의 위치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기도 하다. 5호에 수필, , 소설, 논평을 발표한 유기춘-유진오-고유섭-한재경-민태식-정종실-노병운-한용균-이병일-최재서-신남철-이효석-김봉진-조용만-김종무-조규선-원흥균 그리고 근원 같은 이들의 이후 행적에서 확인된다. 다음 근원(槿園)의 시 아리랑도 이런 성격과 수준의 작품이다.

  

<아리랑>

마을 닭의 첫 소래에 놀래 깨어

아침이슬을 밟으면서

들을 지나 언덕을 넘어

굽은 산길을 올라가는 초부樵夫!

손에 든 작때기로

어깨에 매인 지게를 치며

깊은 산에 울리는 아리랑의 노래

 

피와 같은 늙은 낙일落日은 넘어가고

회색灰色의 장막帳幕으로 변하여 가는 넓은 들에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초부樵夫!

피곤한 몸을 질질 끌면서

없는 기운을 억지로 내어

허공에 우렁차게 울리는 아리랑의 노래

 

아침에 노동할 힘을 주고

저녁에 피로를 회복식히는

미묘한 농촌의 고운 노래!

도회의 우울을 멀리 떠나서

한폭의 그림같은 자연미와 함께 아리랑의 노래

 

3연의 자유시다. 시적 긴장감은 부족하지만 아리랑을 농촌의 초부나 도회 노동자의 우렁찬 노래로 해석한 것은 소중하다. 특히  아리랑 이라는 작품 표제가 주목이 된다. 이를 통해 '아리랑 밈'의 자기 복제 1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지식인들에게 아리랑 밈의 복제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시가 문학 아리랑, 나아가 오늘의 광대한 아리랑문화의 남상인 것이다.